정직하여 복된 나라 (시편 112:1 - 10)
새문안교회 2002.12.15 주일예배
설교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인 시편 112편은 앞서는 111편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두 편의 시는 각각 10절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내용상으로는 각각 22절로 이루어진 시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말 번역으로는 볼 수 없으나 그 22절의 각 절은 히브리어의 22개의 글자를 알파벳 순으로 사용하며 시작됩니다. 즉 영어식으로 설명을 하면 첫 절은 A자로 시작하고 둘째 절은 B자로 시작하며 셋째 절은 C자로 시작하도록 정교하게 작시한 것이란 말입니다. 시편 111편과 112편이 모두 이렇게 작시된 것이라는 데에서 우선 이 두 시편이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11편은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의 백성에게 행하신 일들과 그 일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특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그의 공의가 영원히 서 있다"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고 합니다. 7절에서는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다"고 합니다. 9절에서는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는 이러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밝히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를 찬양함이 마땅하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112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그를 찬양하라고 한 111편의 끝 절의 결론을 받아 그 말로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11편이 언약의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었다면, 112편은 언약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112편은 111편에서 선포된 그 하나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백성들이 누리는 복과 삶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선언이라면, 2절 이하는 모두 그 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먼저 2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누릴 첫 번째 복을 언급합니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사람에게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복을 주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과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정직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에 그 자녀들이 가난하고 고생하며 박해를 받아야 한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복을 지상에서의 부와 직결시키는 히브리인들 특유의 사고가 드러납니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물론 복을 지상에서의 부와 직결시키는 사고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지만,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다"는 것은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라"는 뒤의 말과 더불어 생각해 볼 때 의미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재물 그 자체를 복이라고는 보지 않더라도, 재물이 있음으로 해서 불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공의를 계속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복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롭게 행하며 살려는 사람이 가난해서 결국 그 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가 넘쳐서 교만하여지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도 없어야 하겠지만, 가난 때문에 범죄하게 되지 않도록 필요한 만큼 채워주시기를 우리는 또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시로다" 했습니다.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는 것 또한 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고 오로지 흑암 곧 절망뿐이라면 그 삶은 불행이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는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했습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돈이나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거저 주거나 혹은 아주 관대하게 빌려주되 어떤 불의한 목적이나 계산에 따라서가 아니고 정의롭게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는 지극히 행복한 일이며, 그런 사람들이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잘 되는 사회는 정말 복된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를 베풀거나 꾸어 줄 수도 없고 은혜를 베풀어도 돌아오는 것이 배은망덕뿐인 사회, 꾸어가고도 안 값는 사람은 배부르고 꾸어주고 돌려받지 못한 사람만 사업이 부도나고 망하는 사회, 조그마한 돈을 고리로 빌려주고는 제 때 값지 않는다고 채무자나 그 식구들을 납치하고 폭행하며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거나 빚 대신 강제로 장기를 적출하게 하고 그 아내나 딸들을 윤락가로 팔아넘기는 사회는 악해질 대로 악해지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어찌 행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6절에서는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했습니다. 앞 절에서 말한 순수하게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돈이나 양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거저 혹은 아주 관대하게 빌려주는 사람이 영원히 흔들리지 않고 늘 그렇게 행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의인들이 정당히 인정받고 영원히 기억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개인과 사회를 복되게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순수하고 겸손하게 사랑과 도움을 베풀며 바르고 정당하게 일을 하는데 칭찬이나 인정은 고사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오해하고 빈정거리며 왜곡시켜 비방하고 방해하는 일을 당하다 보면 낙심하고 상처받아 더 이상 그런 일 하지 않고 살기로 마음먹게 만드는 사회라면 병이 단단히 든 사회일 수밖에 없고 보통 사람들은 그 속에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짓말 잘하고 권모술수를 잘 쓰며 기발한 아이디어로 멋있게 자기포장을 하는 불의한 사람들만이 인정받고, 착하고 성실하며 의로운 사람들은 인정도 기억도 되지 않는 사회라면 복된 사회가 아닙니다.
7절에서는 아무리 흉한 소문을 듣게 되고 자신에 대해 온갖 오해하는 말이나 빈정거리는 소리나 왜곡된 이야기나 비방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일시적으로 오해와 조롱과 비방과 음해가 있을지라도 곧 진리가 드러나고 정직한 사람이 승리하는 사회라면 복된 사회입니다.
8절에서는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합니다. 이것은 오해와 조롱과 비방과 음해가 있을지라도 오래 가지 않고 진리가 드러날 뿐 아니라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그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또한 복된 사회임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크고 중한 악과 불의를 저지르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버젓이 활개치며 살게 내버려두는 사회는 복된 사회가 아닙니다.
9절에서는 선을 행하고, 그 선을 행하는 의가 언제나 굳게 설 수 있으며, 그 존엄성이 영예롭게 드러날 수 있는 것 또한 복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여기서 "뿔"이란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10절에서는 의인이 좋은 결과를 보고 악인이 나쁜 결과를 얻는 것이 복된 일임을 말합니다: "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의인들이 한탄하며 사라져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세상입니다. 악인들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소멸되고 악인들의 욕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가 복된 사회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복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복받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복받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가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받는 사람들의 덕목으로서 특히 정직성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절에서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했으며, 4절에서는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3절에서 말하는 "공의"나 5절에서 말하는 "정의"나 6절에서 말하는 "의인"은 다 이 "정직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들이 결국 행복할 수 있으며 그들만이 진정 복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떤 사회입니까? 정직한 사람들의 자녀들이 복을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입고 소외되는 사회는 아닙니까? 부가 의보다는 불의와 더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는 아닙니까? 의롭게 행하며 살려던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의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 아닙니까? 정직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사회는 아닙니까? 개인 돈이건 나라 돈이건 닥치는 대로 해먹은 사람들은 아무리 국가경제에 위기가 와도 더 잘 살고, 정직한 사람들은 오히려 힘들게 키워온 사업체마저 다 헐값에 내놓아야 하거나 가정이 파탄나는 사회 아닙니까? 순수하고 겸손하며 선하고 정당하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낙심과 상처만을 주고, 거짓말 잘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불의한 사람들만이 떵떵거리고 즐기며 사는 사회 아닙니까? 거짓말과 근거없는 비방과 조작된 폭로가 하도 난무해서 진리는 도무지 드러날 수 없게 되어버린 사회 아닙니까? 명명백백한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 제대로 벌을 받는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도 도무지 볼 수 없는 사회가 우리 사회 아닙니까? 악인들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사라져야 할텐데 오히려 의인들이 한탄하며 눈물 뿌리며 사라져가야 하는 세상 아닙니까? 언제나 이 사회 이 나라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두겠습니까? 이젠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4일 앞에 두고 있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온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우선 이 기회와 권리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꼭 투표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뽑아야 합니다. 앞으로 5년간 나라를 다스릴 대통령이지만 잘못 뽑을 때 나라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10년, 20년을 갈 수 있습니다. 어떤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정직한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은 역사가 바로 서는 것입니다. 역사가 바로 서려면 법이 바로 서야 합니다. 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없습니다. 법이 살아있는 나라가 되어야 경제도 정상화되고 힘을 얻습니다. 법이 바로 서지 않으면 정치고 사회고 문화고 교육이고 국방이고 안보고 다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초법적으로 행동하는 대통령은 이제 이 나라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국민을 무시하고 수시로 말 바꾸는 사람에게는 이제는 절대로 표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재간있는 홍보팀들을 고용해서 만들어 내는 그럴듯한 이미지에 속아서 표를 던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즉흥적인 공약이나 선동적 구호로 일단 표를 얻고 보자는 술수를 부리는 후보에게는 한 표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후보들이 평소에 보여온 언행과 성실함을 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정직한 대통령 뽑고 우리도 모두 정직해짐으로써 복된 나라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투표가 우리가 나라정치를 위해서 할 수 유일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복받는 사람의 덕목 중 정직성을 특별히 주목했지만 복 받는 근원이 어디 있는 것인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본문 1절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믿음을 바르게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국민으로서의 선거권을 바르게 행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되게 하실 것이며 이 나라를 복된 나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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