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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를 원하나이다/마가복음 10:46-52

by 【고동엽】 2021. 12. 23.
보기를 원하나이다
마가복음 10:46-52


6.25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 입니다. 포탄이 날으는 최전선에서 미군군목 한 사람이 참호마다 뛰어 다니면서 불안과 초조 속에 있었던 군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 주면서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군인에 게 이 군목이 기도하기 앞서서 기도 제목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 니다. 이 때 이 흑인병사 한 사람이 한 얘기가 아주 유명한 스토리가 되 어서 전 세계에 회자되었습니다. 기 도제목이 있습니까? 이 흑인병사는 군목을 쳐다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 니다.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 Give me tomorrow! -
"나에게 내 일을 주십시오"
삼중고의 인생을 살 아간 헬렌 켈러는 어느 방문객이 와 서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답답하시 겠네요. 이 말을 듣고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볼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가지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야 훨씬 낫지요. 두 눈을 가지 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는 훨씬 낫지요. 오늘 본문에는 소 경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저 는 이 본문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 이 또 하나의 소경을 만날 수 있기 를 바랍니다. 그 소경은 여러분 자 신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시고, 그를 보 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 는 너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보낸다. 나는 너를 보기 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 에게 너를 보내노라.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람 들, 죽음 저 건너편의 세계가 보이 지 않는 사람들, 교회당에 출석하면 서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예수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답답하 세요? 제가 코미디언 우리 구봉서씨 하고 미국의 전도집회를 위해서 같 이 간 적이 있습니다. 옆에 나란히 앉아서 여행을, 긴 여행을 같이 했 는데 제가 자꾸 조니까 저를 깨우더 라구요.
"목사님, 바이블 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성경퀴즈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세요"
그랬습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나 타나자마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 요.
"네 그렇지요"
그 부활하신 주 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제일 일성, 첫마디 말씀이 무슨 말 씀인지 아십니까?
"평강이 있을지어 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하고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에이, 목사님 틀 렸어요."
"틀리다니요. 성경에 분명 히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랬습니 다."
"에이, 아니예요"
그래요.
"그럼 뭐라 그랬습니까?"
구봉서씨가 말하 기를
"너 나 보이니?"
"너 나 보이 니"
그랬대요. 예수님 보이세요? 하 나님이 보이십니까? 내 인생의 미래 가 보이십니까? 오늘 본문의 이 소 경은 예수님 만났을 때 그 앞에 엎 드려서 이런 절절한 고백을 쏟아냈 습니다. 선생님, 제가 보기를 원하나 이다.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한 번 따라해 보실까요? 보기를 원하나 이다. 볼 수 없었던 사람이 보게 된 다는 것은 치유지요. 이 치유의 조 건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 면 눈이 뜰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할 필 요를 가르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 리가 눈을 떠서 주님을 보고 우리 인생의 영원한 세계를 보고 내일을 보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인 식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의 이름은 바디매오라는 사 람입니다. 성경은 그를 디매오의 아 들 바디매오 그랬습니다.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히브리 말로는 '바' 라는 말이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러 니까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 저 의 아들을 말하려면 바이동원 그러 면 이동원의 아들 이렇게 되는 것입 니다.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리고라는 도시에 살고 있었 습니다. 여리고는 아름다운 도시입 니다. 여러분이 성지순례를 하면 예 루살렘에서부터 사해 바다쪽을 향해 서 내려가는 동안에 광막한 유대 사 막이, 광야가 펼쳐집니다. 그러다가 광야를 다 내려가면 아름다운 도시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것이 여리고 입니다. 다른 곳에서부터 이스라엘 로 들어오려면 여리고는 옛날부터 이 가나안땅의, 팔레스타인의 관문 과도 같은 역할을 했던 도시였습니 다. 사막에 둘러싸여 있지만은 사막 지대에서는 비교적 수목이 우거진 도시, 향나무도 있고 뽕나무도 많고 장미나무도 있고 종려나무도 우거진 도시 - 여리고의 사연중에 성경에 보면 이 도시에서 예수님 만난 사 람, 나무위에 올라가서 예수님 만난 사람 생각나죠? 누구? 녜, 삭개오. 나무가 많은 도시, 냄새가 좋은 도 시입니다. 여리고란 말은 냄새라는 뜻입니다. 향그러운 냄새. 어떤 사람 은 이 도시를 가리켜서 The City of Rose, 장미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살 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그 도시의 아 름다움을 도무지 볼 수가 없었던 소 경, 그는 얼마나 답답한 인생이었을 까요? 그는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 라 오늘 본문은 이 사람이 거지였다 고 말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고대 세계에서는 소경은 의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 다. 생활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 삶 을 헤쳐갈 수 있는 그런 생존의 능 력이 없으니까 소경은 자동적으로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런 비참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비참한 처지에 있다 는 사실만은 알았습니다. 내가 불쌍 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어 요.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이 자기가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 도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데 그것은 알았습니다. 이 사람이. 그래서 예수님앞에 나와 엎드리면서 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선생님, 나 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 들이 예수님앞에 나오지 못하고 있 는 이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자기 의 불쌍함을, 자기의 비참함을, 존재 의 비참함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 에 그렇습니다. 예수가 구주라는 사 실. 이것이 복음이지요. 예수는 구주 이시다. 구원의 주님이시다. 예수가 구원이시다. 이것이 Good News요,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이 메시지가 복음으로, Good News로 내게 다가 오지 못하는 이유, 감격으로 내게 나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 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구원이 필 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 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구원이 필요하다. 구세주가 필요하다. 나는 죄인이다 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 고 있는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 다. 제가 언젠가 독일의 아우츠비츠 의 참담한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유 대인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의 이 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 사람은 1961년 유명한 전범 재판,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전범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 의 참모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 범 증인으로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 판관은 예이 옐 디무르라는 사람에 게 옆에 앉아 있는 아이히만을 가리 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 오. 저 사람이 아이히만이 맞습니 까? 좀 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 지요. 예이 옐이 한참 아이히만을 쳐다보다가 졸도를 해 버렸어요. 그 냥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 버렸습니 다.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 는 미움 때문에 그 분을 이기지 못 하고 졸도하셨습니까? 그것도 아니 올시다. 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이 때 이 사람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 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란것입니다. 너 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어떻게 저 비 참한 가스실로 몰라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 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앞에 그날 놀란 것입니다. 나도 저 아이히만이 될 수가 있다. 내 속 에도 아이히만이 살고 있다. 그 사 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내 속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 고 살인의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이 있는 아이히만을 나도 품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앞에 놀랐습니 다.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 안에도 이런 광기가 있고 모순이 있고 갈등 이 있고 그리고 미움이 있고 그리고 온갖 증오심으로 포박된 죄인의 모 습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 까? 그렇다면 나는 새로워져야 합니 다.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 죄 인, 내가 내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 성을 발견하다면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 에서, 이 절망의 몸에서,이 불안의 자리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가 있겠 습니까?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사 람만이 예수님앞에 나오게 될 것입 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보세 요. 자신의 삶의 처지를 보세요. 똑 바로 보세요. 자기 불쌍한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이라야 예수앞에 나와 서 엎드리면서 이렇게 말할것입니 다. 오! 구세주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그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눈을 뜨는 첫 번째 스탭입니다.

두 번째 정말 눈을 뜨기를 원하 신다면 둘째로는 예수님이 치유자라 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님만이 치유자다.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자, 본문의 47 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 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자, 사람 들은 그에게, 소경 바디매오에게 나 사렛 예수시다. 이렇게 소개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가 오시고 있다. 예 수가 우리 도성에 방문하셨다. 나사 렛 예수다. 그런데 이 소개를 듣고 그가 막상 예수님을 불렀을 때 사용 한 타이틀은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 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시기 바랍니 다. 뭐라고 불렀습니까? 다윗의 자 손 예수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 윗의 자손 예수여! 잘 아시는 것처 럼 나사렛이란 지명은 팔레스타인에 서는 편견으로 가득찬 지명이었습니 다. 거기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자주 섞였고 또 혼혈 결혼도 유행했 고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속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가 있느냐? 나사렛 예수라는 이 말 속에는 상당한 경멸과 편견이 섞 인 그런 호칭이었습니다. 나사렛 예 수. 그런데 나사렛 예수라는 소개를 받고도 막상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는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지 않고 뭐 라고 불렀다고요? 다윗의 자손 예수 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 손 예수여!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다 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류 의 메시야가 되고 구원주가 되고 사 람의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구원자로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아마도 예수 님을 그렇게 인식할 수 있을만큼 그 는 성경에 대한 어떤 지식도 있었다 고 우리는 가정해 볼 수가 있습니 다. 우리가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 면 메시야가 오시면 그는 그의 나라 를 이루시게 될 것이다. 메시야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할 때 그 메시야 왕국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그 때에 메시야 가 오시고 그가 통치하시게 되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 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는 소 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가 사람들의 눈을 띄웠다. 귀를 열 었다.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바뀌였다. 운명이 변하고 그의 가치 관이 새로워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변하고 있다. 사람을 바꾸고 있는 예수, 예 수! 그분은 메시야일지 모른다. 메 시야에 대한 믿음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11장을 보시면 침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요. 사람을 보내면서 질문 하나를 던집 니다. 그 질문이 뭐냐하면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마음 이 흔들렸고 회의를 가질 수도 있었 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다려야 할 분이 당신입니까? 당신이 메시야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예 수님이 어떻게 대답을 하셨어요? ' 그래 나는 메시야야'라는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기 보다도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가서 요한에게 이렇게 말 하라 나를 통해서 소경의 눈이 열리 고 귀머리가가 듣고 있다고 말하라 간접적으로, 그러니까 메시야가 오 시면 소경의 눈을 연다, '소경이 눈 을 연다'라는 것은 메시야적 기적 사역의 한 증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메시야라 면 내 눈도 열수가 있을거야 그래서 그는 어떻게 말합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는 그가 예수를 메시야로, 예수를 치유자로 믿었다 는 증거를 본문안에서도 찾아볼 수 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끝나는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선 포하십니까? 52절을 다 같이 읽겠습 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가라, 네 무엇이 너를 구 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한 것이다. 그 의 눈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시키면 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이 기름부어 주셔서 보내주신 분, 나를 고치고 내 육체 도 고치고 내 마음도 고치고 내 영 혼을 변화시켜 주시는 분 내 삶의 통치자 그리고 내 삶을 바꿀 수 있 는 나의 희망이요, 구원이신 예수, 예수는 메시야다! 믿었습니다. 믿었 습니다. 왜 교회에 나와도 인생이 바뀌지 않아요?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메시야 로 신뢰해 보십시오. 예수님만은 나 를 바꿀 수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 꿀 수 없었던 나, 나도 나를 바꿀 수 없었던 내 절망과 내 부조리와 내 문제를 안고 예수앞에 엎드려 보 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당신을 믿나이다. 당신이 나의 구세 주 그리고 나의 치유자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변화시 켜 주실 것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치유자로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눈을 뜨는 두 번째 스탭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을 떠서 예 수님을 보려면 그리고 내 인생이 바 뀌려면 셋째로는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 구도자가 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들 이 구도할 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또 이 믿는 자들이, 믿고 있는 사람 들이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도 어느 때는 그 기도의 장애물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장애물을 극복하려면 인내심이 물러가지 않 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 소경 바디매오는 단 한번의 부르짖음으로써 그 기도 가 응답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다시 본문의 정 황을, 상황을 살펴보시면 47절에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 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런데 이 현재, 바로 이 타이밍, 이 순간에서 그가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나 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자, 부르짖었 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눈을 떳던 것은 아닙니다. 자, 그가 불렀 지만 아직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 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직도 그의 육체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의 인 생은 여전히 어둠이었습니다. 자, 거 기에다가 장애요인이 발생합니다. 자, 그 다음 48절에 보시면 이 장애 물은 누구였습니까? 수 많은 무리 들, 예수를 에워싸고 있었던 수 많 은 무리들, 그 많은 사람들이 장애 요인으로 등장합니다. 그 많은 사람 들이 이 소경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 습니까? 잠잠하라! 그를 꾸짖어 잠 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중요 한 사실은 그는 물러가지 않았습니 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구 도의 열망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 주님앞에 나오고 있다면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 나오기 바랍 니다. 자, 48절에 인상적인 두 개의 단어 - 그가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태도, 저는 이 태도를 믿음 의 태도라고 말해요. 아직 확실한 믿음은 아니였지만 그가 확실한 믿 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믿음의 징후들을 설명해주고 있는 단어들, 한 두 개의 단어가 발견됩니다. 48 절에 보시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 잠하라 하되 그가 어떻게 해요?
"더 욱 심히"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 려 더욱 그리고 심히 소리를 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부르 짖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르짖 은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르짖었을 때 그 때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 합니다. 단 한번의 구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가 노력해 봤는데 안 되더라구요, 안 깨달아지더라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제가 기도했는데 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구요. 성 경은 단 한번의 기도에 꼭 응답이 된다는 그런 약속을 하신 일이 없습 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그런데 그 구하라는 말이 한 번만 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구하라, 찾으라! 한번만 찾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찾으라. 희 랍어의 현재 텐스는 지속성의 의미 가 있습니다. 찾으라, 계속해서 찾으 라. 문을 두드리라. 한 번만 두드리 라는 말이 아니라 계속해서 두드리 라. 아니, 한 번만 딱 두드려서 문이 착~ 열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 동판매기처럼 우리가 동전만 집어 넣으면 착~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 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식으로 우리 의 구도를 응답하지 않으시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 답하지 않으실까요? 모르겠어요. 그 러나 제가 한 가지는 짐작해 볼 수 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진지성을, 구도의 진지성을 테스트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이 사람은 장애요인이 발생했지 만 그러나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물 러가지 않는 배경속에서 우리는 이 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 는 알아, 주님은 마침내 나를 도와 주실거야, 그 분은 나를 만나 주실 거야, 나는 그 분이 나를 기어히 만 나주실 것을 믿는다. 이것이 믿음아 니예요? 단 한번의 기도에 내 상황 이 달라지지 않아도, 내 환경이 달 라지지 않아도 나는 믿어. 주님은 마침내 내 기도를 응답하실거야! 이 런 사람의 기도는 응답을 받더라구 요. 우리 주변에 보시면 기도의 풍 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 기적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계속 엎드 리는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기도는 그래서 질이 아니라, 질 뿐만이 아니라 양 도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 깨달았습 니다. 실제로 많이 기도를 해야합니 다. 엎드려야 합니다. 계속 엎드려야 합니다. 주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 주님도 가르치시길 항상 기도하 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그렇습니다. 단 한 번의 기도에 상황이 달라지지 않아 도, 하늘이 개이지 않아도 그 먹구 름 속에서 우리는 계속 엎드려야 합 니다. 그러면 마침내 장애물은 극복 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빛이 보일것입니다. 그리고 삶은 달 라질 것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물러가지 않고 나아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의 목소 리가 들려오자 그는 겉옷을 버리고 달려갑니다. 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용기, 그 인내심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믿음의 징후, 그렇습니 다. 이런 사람을 주님이 만나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이 띄어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나 아오고 있는, 접근하고 있는 이 사 람을 향해서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예수님의 반응?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머물러 서셔서 그를 부르십니다. 49절 같이 읽어보 겠습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 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 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드디어 두 번째 부르짖음을 듣고 그 분은 머물 러 서셨습니다. 그 자리에 서셨습니 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예수님 은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지난 시 간에도 말했는데.. 아직 계속 가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뭐가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가. 마지 막 가시는 길입니다. 그는 십자가가 예루살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의 진상을 확실히, 분명히 알고 있었던 분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지 독한 모멸이요, 그리고 고통인가를 아시는 그 분, 아시고 걸어가고 있 는 그 분, 사람이 고통을 체험할 때 보다도 고통을 예견하고 바라볼 때 가 더 고통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속에는 십자가로 꽉 차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걸음 걸음 사이 속에서도 들려오는 이 사람의 부르짖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부르짖음의 소리를 듣고 가던 걸음 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러와! 내 가 그를 부른다고 전하라. 불러라. 그 분은 이 고통의 순간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셨 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우리의 신 음소리를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그 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우리의 고통 에 더 민감해 보십니다. 이것이 주 님의 모습입니다. 십자가 상에 매달 렸을 때도..자, 그 고통의 절정속에 서도 그는 그 핏방울을 뿌리고, 흘 리는 고통의 한복판속에서도.. 사람 이 정말 고통스러우면은 고통스럽다 그것밖에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대 요.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습 니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그런데 그 고통의 절정에서 그는 옆에 매달 린 강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당신 의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해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 소리를 또한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엄청난 고통의 절정속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오늘 나 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네가 오 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거야. 염 려하지 말라. 그는 결코 우리의 고 통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세요. 그 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의 소리 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지금도 우리 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고 묘사되어 있는 그 분, 이 땅에서 삶을 살면서 허우적 거리며 우리가 부르짖음의 소리를 토할 때 그는 저 하늘에서도 듣고 계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분은 지금 영광중에 계십니다. 천사들에 게 둘러싸여서 찬양과 영광을 받으 십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아마 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옆에 있는 천사들 에게 쉬이~ 저 땅에서 들려오고 있 는 내 어린양의 고통의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네가 가서 봐야겠다. 그 는 이 땅의 골짜기를 그리고 이 땅 의 걸음을 옮겨가면서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내 작은 신음소리에도 멈 추지 않고 그는 그 소리를 듣습니 다. 그리고 불러오라!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에게 이 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원 하느냐? 그는 멈추어 서셨고, 부르 셨고 둘째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가 를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중요한 순간입니 다. 구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입 니다.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 니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요. 그는 집을 구할 수도 있었고, 돈 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이 절실한 타 이밍에 그는 자기 인생의 가장 절실 한 근본적인 것을 구하기로 결심합 니다. 뭘 구했습니까?
"보기를 원하 나이다."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 적인 것, 눈을 떠서 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새 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을 뵙고 싶습니다. 눈을 떠서 보고 싶 습니다. 오늘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이 말씀을 듣고 예 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성경은 말하 기를 저가 곧 보게 되어 그 순간 어 둠은 순식간에 걷히고 빛이 밝아옵 니다. 때로 한 순간 이런 경험이 일 어 날 수 있어요. 여러분, 구원의 체 험은 지속적인 추구의 과정을 요구 할 수가 있지만 어느 날 한 순간에 눈이 열릴 수가 있습니다. 한 순간, 바로 한 순간에 눈이 열려 버려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 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 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울 의 체험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서 다마스커스로 길을 가고 있었던 사울, 그는 정오의 격 렬한 태양속에서 한 음성을 듣고 쓰 러집니다. 빛 가운데서 쓰러집니다. 그리고 한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 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순간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 만난 경험을 나중에 사도행전 26장 17절이하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날 눈을 떠서 보게 하셨다. 어둠에서 빛으로 옮기셨고 사단의 권세에서 나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고, 영생의 기업을 주 시고 그리고 이방인의 전도에 소명 을 맡기셨다. 그 순간 두 가지 눈이 떴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져서 예수 가 구세주라는 눈이 떴고, 사명의 눈을 떴습니다. 자기의 할 일을 알 게 되었습니다. 평생에 할 일. 예수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온 세상에 가 서 복음을 전하는 것, 새로운 인생 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 분, 우리가 찬송가 불러보면, 찬송가 책을 쭉 들쳐보면 페니 크로스비라 는 이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여러 분이 좋아하는 찬송의 대부분은 이 여인이 작사한 찬송일 가능성이 많 습니다.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소경 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잃어버렸습 니다. 6개월만에.. 아주 뛰어난 달란 트와 그리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 녀였습니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무 엇을 할 수가 있었겠어요? 그는 무 력해졌고 그의 달란트는 감추어져 있었고 그는 자기 자신을 자학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나 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교회에 나 오고 있었는데, 어느 날 교회의 집 회에, 뉴욕의 어떤 전도집회에 참석 했다가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찬송가가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반복되는 찬양, 몇 번 씩 반복되는 찬양을 듣다 찬양의 가 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 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보다 복음이 어디있어요?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요, 이것이 믿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믿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 다. 그것은 그의 과거를 씻어 버리 는 어둠을 몰아내는 눈물이었습니 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 이 몸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님 나를 쓰실 수가 있다구요? 내가 무엇을 할 수 가 있겠습니까? 너, 시를 쓸 수 있 는 능력이 있잖아. 그 순간 눈이 열 렸습니다. 예수가 보이기 시작해요. 십자가 상에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 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 기의 주님으로 믿어지기 시작했습니 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구원을 체 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미 션의 눈이 열렸습니다. 새로운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다. 그는 일어나 자 마자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 다. 그가 처음 작사했던 것이 '자비 한 주께서 부르시네 부르시네 사랑 의 햇빛을 왜 버리고 너는 도망가고 있었느냐 주께서 부르신다 부르신다 지친자 부르신다 쉬라신다 쉬라신 다... 자기를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는 붓을 들어 작사를 시작합 니다. 이 여인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 다. 8000곡. 할 일이 생겼습니다. 할 일이.. 그는 육체의 빛보다도 더 강 렬한 빛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그의 미래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의 인생은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 이 열린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이렇게 기도할 사 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지 않을까요?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오 늘 주께서 여러분의 눈을 열어주시 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 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놀라운 세상을 열 어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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