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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오셔야 합니다/마가복음 11:1-10

by 【고동엽】 2021. 12. 23.
왕이 오셔야 합니다
마가복음 11:1-10


옛날 독일, 현재 독일은 프러시 아 제국이라고 불리워졌죠? 프러시 아 제국의 프레드릭이라는 대왕이 어느날 시골길을 행차 하셨습니다. 왕의 행차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 노인이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 의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 이 먼저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고 합 니다. 자기를 몰라보는 이 노인이 궁금해서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노인은 도대체 누구시요 하고 질문 을 던졌습니다.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왕이요.그런단 말이죠. 나는 왕이요, 그래서 어느 나라 왕이시 요? 그랬더니 노인이 대답하기를 나 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나는 나 자신의 왕국의 왕이요. 그때서야 알아차림 대왕이 빙그레 웃으며 다 시 질문하기를 그래 나라살림은 잘 되시는지요? 그래서 노인이 대답하 기를 그것이 문제요. 이때 대왕께서 또 말하기를 노인장이나 나나 꼭 같 은 문제를 가지고 계시는군요.이런 대화를 나누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에는 로마 에서부터 임명 받은 팔레스타인의 소위 분봉왕이라고 일컬어지던 헤 롯 대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소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일 때는 헤롯 필립1세가 그 땅 을 통치하고 있었고 또 그 당시 로 마에는 매우 강력하고 현명한 군주 였던 티베리우스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통치자들 의 통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팔 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민중들은 아 직도 새로운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 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이 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는 왕과 같은 자로 오시리라고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이 였 습니다. 구약 예레미야 23장5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 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 이 되어 잘 들어 보십시오, 그가 왕 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 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 이 렇게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그들을 통치하 는 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운 왕, 그들에게 진실로 공평과 정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 렘 성에 입성하시던 그날 이른 아침 부터 예루살렘 성에는 커다란 흥분 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 면 이 새로운 왕에 대한 기대 때문 이었을 것입니다. 이 기대는 결코 잘 못된 것은 아니 였습니다. 마태 복음 21장4절과 5절에 보시면 똑 같 은 오늘 본문의 기사가 마태복음에 서는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인 것 을 말하면서 보라 네 왕이 네게 임 한다라고 선포되고 있습니다. 평화 와 그리고 진정한 의를 약속할 수 있는 왕에 대한 기대 이 기대는 바 람직한 기대였고 이것은 오늘 우리 도 그런 기대를 안고 살아야 할 것 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세상의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또 우리의 살림살이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지도자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 늘 도정을 맡으신 지사님도 여기 앉 아 계시지 만은 이러한 지도자의 존 재는 매우 소중한 것이고 성경은 언 제나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 를 가르치고 있고 기독교는 한번도 무정부적인 그러한 주의를 지지하거 나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또 다른 왕을 약 속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통치자와 는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들 이 외면적인 살림살이를 다스리는 왕이라면 성경에 약속된 왕은 우리 의 내면까지, 우리의 존재를 다스릴 수 있는 왕, 그것은 일시적인 통치 자가 아니라 영원한 통치자, 부분적 인 통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운명 을 바꿀 수 있는 통치자로써의 왕, 즉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있 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정말 뒤 바뀌고 그리고 개인의 삶이 정말 하 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이 되고 또 우리의 역사가 변화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왕으로 이해하는 안목 그리 고 사람들이 예수의 권위 앞에 굴복 하고 그리고 그분을 왕 중의 왕으로 King of Kings, 그리고 내 내면과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진정한 왕으로 그리스도를 맞이할 때 개인 도 바뀌고 사회도 바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나라 로 바뀌고 내 개인의 삶도 그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내게 왕으로 오 시는 그분을 왕으로 영접할 수가 있 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질문의 대답 을 찾기 위해서 이천년 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맞이했으며 또 어떤 태 도로 맞이 했어야 했었는 가를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오셔야 할 왕, 이리 민족 가운데 오셔야 할 왕, 그분을 어떻게 영접하고 맞이해 야만 할까요?
첫째로 우리는 왕의 계획을 신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이신 그 분 의 계획 계획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 게 무엇보다도 필요합니다. 자, 예수 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우리가 성 경 속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 은 우연한 행진의 한 결과가 아니라 이것은 계획된 하늘의 섭리의 행진 이 였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예 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다라 고 말합니다. 옛날 구약의 유월절에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었던 어린양과 같은 존 재로 그는 세상의 죄를 구속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어린양으로 오셨더라고 약속 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은 유월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 루살렘에 입성 하신 때가 정확하게 유월절을 앞둔 엿새 전에 그 분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다 시 말하면 하나님의 때를 Gods timing, 그 하나님의 타이밍을 그때 를 기다렸다가 정확한 그 때에 예수 께서는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던 것 입니다. 입성하시기 위해서 그는 먼 저 감람산 쪽의 산을 오르십니다. 이 산 마루에는 두개의 마을이 있었 는데 하나는 벳바게, 또 하나는 베 다니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 에 들어서면 감람산의 등선에서 불 과 100m 떨어진 예루살렘의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 다. 자, 거기에 오르신 예수님은 이 제 한 마리의 나귀를 찾고 계십니 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희 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 르시되 너희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끌고 오너라 왜 하필이면 여기서 나귀 새끼가 등장 했을까요? 이것은 구약 예언 즉, 하 나님의 계획의 성취였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520년 전 구 약성경의 스가랴서 9장9절에 보면 예수님의 이 사건이 있기 520년 전 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시 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찌어다. 예 루살렘의 딸들아 즐거이 부를지어 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리니 그 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 손하여서 나귀를 타리니 나귀의 작 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바로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귀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 고 그 분이 타셔야 할 나귀가 정확 하게 어디 있었는지 예수님은 알고 계셨어요.이 간단한 에피소드속에서 그의 범상한 인간 이상의 존재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맞 은 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면 아 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 가 있을 것이다. 그분은 이 모든 것 을 계획하셨고 알고 있었습니다. 자, 3절에 보시면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그러니까 나귀 끌고 오너라 하나깐,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 하면 어떻게 해 요? 그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가 쓰시겠다고 하라 바로 그 분 자 신이 나귀의 주인 그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한가롭게 놀고 있었던 나귀한 마리의 주인이 바로 당신이 라고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는 나귀의 주인일 뿐만 아니라 그는 인 생의 주인,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 과 저를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 그리 고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주가 쓰시 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4절에 보시면 제자들이 가서 본 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 에 매여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 되 나귀 새끼를 풀어서 무엇을 하려 느냐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말대 로 하매 뭐라 그랬을까요? 주가 쓰 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이라니 누 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분이 메시아 요 약속된 메시아요 그 주인이 이 나귀를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허락하는지라 이것은 하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인 것 임을 주목해 보십시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나귀 한 마리를 쓰실 계획을 갖고 계신 주님이라면 그분이 만물 의 영장인 여러분과 저를 향한 계획 이 없겠어요? 우리의 삶이 하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쓰여 지는 보람찬 인생을 살려면 내 인생 속에 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던져진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쩌 다가 인생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 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아다니다 가 오늘 이런 인생의 길에서 서있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 은 놀라운 계획을 갖고 오늘 이 땅 에 나를 보내셨고 나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인생의 성패는 단순히 세속적 인 어떤 성공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는 그 정도의 인생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가 지고 있었던 계획, 그 계획 속에서 오늘 하루하루의 삶이 그 분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 것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 다. 왕 되신 하나님 내 인생에 왕이 라고 선포하신 하나님 그 분의 의도 대로 내 인생이 쓰여지고 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 후회 없이 인생을 살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그 중요한 첫번째 Step은 예수를 왕으로 믿으시기 바 랍니다. 그리고 그 왕은 나를 향해 서 Plan을 갖고 계시다! 놀라운 계 획을 갖고 있다! 내가 온 것은 내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 히 얻게 하려함이니라 그 분은 내 삶이 허무와 갈등에 가득찬 고뇌에 찬 인생을 허우적거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 왕의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바뀌고 새로워지는 첫번째 step인 것입니다.
둘째는 왕의 구원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왕의 계획을 믿으시고 둘째론 그 왕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구원, 그 구원의 뜻이 무엇인가를 똑바로 분별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이 예 루살렘 성을 향해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습 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종 려나무가지를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길에다가 놓기 시작했고 어떤 사람 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놓기 시 작했습니다. 이 겉옷을 벗는 행위는 왕에 대한 예절이였습니다. 그를 왕 으로 기대했다는 예루살렘 군중들의 기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찬송소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자, 본문의 9절 마가복음 11장 9절을 다 시 다같이 읽겠습니다. 11장 9절 시 작,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 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아마 도 이 찬송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들의 입술에서 먼저 순수한 아이들에 입에서 이 찬송이 터졌을 것입니다. 호산나! 호산나. 히브리말로는 이것을 호시안나! 호 시안나! 한번 해 보십시다 호시안 나! 원어 그대로 말하면 호시안나! 뜻은 구하옵나니 기도하옵나니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영어로 Safe us now! 바로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 십시요. 이것이 바로 호시안나라는 단어의 뜻이 였습니다. 우리는 이 찬양 속에서 이 말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에 대한 메시아로서의 기대 그 구원에 대한 기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은 구원을 기대했고 그리고 그 들이 구원을 기대한 것 그것은 당연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것입 니다.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그 들이 예수에게서 기대했던 구원에는 다소간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 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제공하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구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에게 걸었던 메 시아로서의 기대는 영적인 메시아 보다도 다분히 정치적 메시야였습니 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 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는 로마 정권을 때려부수고 그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자 유, 이것은 정치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서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 다. 그것을 기대한 그 자체를 우리 는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걸어야 할 기대는 단순한 정치적인 자유 이상의 것 이 였습니다. 사실 예수가 붙잡히고 체 포되고 십자가로 갔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 로 높이기 시작했을 때 그 당시에 그 땅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사람 들은 정치적인 갈등을 느끼고 예수 에게서 정치적인 라이벌 의식을 느 끼고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저 를 왕으로 추대한다면 우리의 입지 는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 분은 체포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왔던 나사렛 예수 그러나 그 예 수님은 빌라도에게 이런 유명한 말 씀을 남기십니다. 염려마시요. 내 나 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 니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나 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관련 이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의 나라는 세속적인 나라 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휠씬 더 중 요한 나라입니다. 휠씬 더 본질적 의미를 담고 있는 나라입니다. 즉, 살림의 외부, 표면적인 것만을 다스 리는 그 분이 아니라 그 분은 인간 의 존재의 내면을 통치하는 왕입니 다. 왕들의 마음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왕 그래서 그분은 왕 중의 왕 King of kings. 그 분은 어떤 정치 나 경제나 외적인 상황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의 깊숙한 것 우리의 의 식,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내 좌절과, 내 부조리와, 내 절망을 아시고 내 마음 속 깊은 곳 으로부터 나를 바꾸어 주실수가 있 는 분. 인간의 내면의 깊은 것으로 시작해서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 람들의 삶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왕. 그래서 온 세계의 모든 나라들 속에서 높임과 찬양을 받을 수 있는 왕. 왕 중의 왕. 내 나라는 이 세상 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히 도 예수님의 말의 뜻을 빌라도나 그 당시의 사람들, 민중들이 얼마나 이 해했는지는 질문일 수 밖에 없습니 다. 이스라엘의 민중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그 분이 오시면 당장에 로마를 박살 낼 것을 기대했을 것입 니다. 만약 그러한 정치적인 메사야 로 오셨다면 그 분은 탱크와 군마를 거느리고 타고 당당하게 이성에 입 성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 수님이 입성하시는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종의 코미디예요. 코 미디. 나귀 타고 들어오시는 모습 Ducky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조 차도 그들이 일상생활에 쓰면서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동물 이 나귀였습니다 그것은 나귀 중에 서도 건장한 나귀가 아니라 뭐예요? 나귀 새끼, 새끼 나귀. 이 새끼 한 마리, 나귀 타고 터덜 터덜 들어오 시는 예수상을 한 번 연상해 보십시 오. 그것은 코미디 중에 코미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계획 주엔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자, 나 귀를 타신 이유를 일찍이 구약의 선 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겸손 하여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것이다. 그는 겸손한 왕, 그래서 예루살렘 도성에 뛰어 노는 가장 어린아이 까 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무 식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권위가 있는 사람도 권세가 없는 사람도 지 식 있는 Intelligentsia도 무식한 사 람도 누구나 쉽게 친근히 다가설 수 있는 겸손한 예수. 나는 마음이 온 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신 예수. 누 구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서 인생이 바뀔 수 있는 희망을 약속하 는 예수. 그는 단순히 정치적인 압 박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아니 라 그는 인간의 모든 문제 가운데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 그렇습니다. 그는 정 치적인 압박에서 우리를 자유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깊숙한 인 간의 문제,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 시기로 약속된 구세주 그래서 그 분 이 마리아에게서 잉태 되었을 때 천 사는 그 분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이 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Jesus! 예수와, Jesus! 예수와. 예수란 말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오늘 나를 방황하게 만드 는 것. 그리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 내 인생 의 방황, 내 인생의 수수께끼 같은 어려움, 갈등 내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삶의 존재의 갈등 그것 은 결국 죄 때문입니다. 이 죄로부 터 나를 해방하시고 나를 용서하시 고 나를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분. 바로 그분은 예수.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 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그 분만 이 죄로부터 우릴 용서하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 님의 자녀되게 하신다. 여러분 성경 이 약속하는 구원의 본질을 이해하 시길 바랍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감 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왕의 구원 을 분별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 리가 정말 왕 되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뀌고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뒤바뀌기 위해서는 세번째로 왕의 눈물을 이해할 수가 있으셔야 합니다. 왕의 눈물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자, 오늘 마가복음 11장은 자 호산나 찬송 속에서 예수께서 예 루살렘에 들어오셨다 이런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루살렘 에 들어오기 직전에 한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에피소드가 마가복 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본문 의 사건의 계속되는 진행을 이젠 누 가복음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9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9장입니다. 그 리고 41절입니다. 누가복음 19장41 절. 41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자, 누 가복음 19장41절 직전에는 마가복음 과 동일한 사건.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 기록됩니다. 그리고 이 누가복음 19장 예를 들어38절에 보 시면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 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호산나 찬송 의 내용이 여기에도 설명되어 있습 니다. 그리고 41절에 보시면 그런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사건 직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일어났 던 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기록합니 다. 41절 다같이 한번 읽어 보실까 요.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 며 네 가까이 오시사 성을 보시고 우셨다. 아마도 이것은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일 지 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찬송하는데 왕으로서 그 분을 환영하는데 예수 님은 이상하게 우시고 있습니다. 예 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여러분 이해 하십니까? 자, 예루살렘 성에 다가 오시면서 그가 우시는 모습 속에 정 치적 메시야의 기대를 걸고 흥분한 군중들의 환호성 호산나! 호시안나! 호시안나! 찬양하는 찬송소리를 들 으면서 감람나무 이 감람산 입구를 돌아서시면서 예수님은 아마도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계셨 을 것입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도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그 다음절을 보십시요. 42절에보시면, 누가복음 19장42절. 다같이 한 번 읽어요. 가 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 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 금 네 눈에는 숨기웠도다.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부수고 그리고 그들을 정치적인 자유와 독립을 줄 수 있는 예수상을 예수에게서 기대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폭력 의 힘을 가지고 오신 예수가 아니라 평화의 주님으로 오셨습니다. 너희 들이 평화의 의미를 알았더면 좋았 을 것을.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눈 에는 내가 숨기워 져있다. 예수를 예수로 알지 못하는 그 당시의 민중 들. 그리고 그 분이 정말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참된 평화, 정치 적인 자유이상의 본질적인 자유, 인 간 존재의 자유, 실존의 자유, 나를 참으로 자유케하고 새롭게 할 수 있 는 이런 놀라운 샬롬의 주님, 평강 의 주님, 나가 너희들의 눈에는 내 가 가리워져 있구나. 예수상. 참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 여 그 분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다음절에 보시면 43절에 날이 이를 지라 한 날이 올것이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부 터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 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 함을 인함이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는 주만들의 다가올 운 명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자, 지금 은 예수를 환영하고 있는 군중들 예 수에게서 지금 이땅에서의 당장의 어떤 이득과 이해관계를 기대하면서 환영하고 있는 그 군중들의 모습속 에서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맞지않는 예수임을 알았을떄 불과 닷새후에 엿새후에 호시안나! 찬양 하던 이 군중들이 예수를 향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 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이렇게 폭도로 돌변할 군중들의 모습을 예 수님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리고 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거 절한 이백성들, 그리고 예수를 거절 한 예루살렘 도성은 하나님의 심판 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아셨습 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 적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로마의 타이토스 티도 장 군과 황제가 영도하고 있는 로마의 군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정복했습니 다. 그리고 예수님이 예언한 그대로 예루살렘의 도성을 잔인하게 파괴했 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 이 예언하신 그대로 돌 하나 돌 위 에 남기지 않고 완전히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에 언은 적중했습니다. 이 다가올 심판 왕 되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구원 을 거절하고 멸망할 도시의 운명. 그리고 이 도시 속의 사람들의 모습 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호시안 나! 이 찬송소리를 들으면서 예수 님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서 자주 그 분의 눈물을 만나게 됩 니다. 얼마후에 잠시 후에 그는 겟 사마네 동산에 들어가서 내일 아침 이면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바 라보시면서 그 분은 또한번 우십니 다. 히브리서 기자는 겟사마네 동산 에서 예수님이 우신 광경을 그가 심 한 통곡으로 우셨다 이렇게 묘사하 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 통곡의 눈 물을 쏟으셨습니다. 다가올 십자가 의 고통이 괴로워서 흘리신 눈물이 아닙니다. 자, 예수 믿지 못하고 예 수를 알지 못하고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의 그 운명을 슬퍼하시 며 그는 우십니다. 구원 받아야 할 영혼 예수 앞에 돌아와서 새로운 삶 을 살고 하늘의 평화를 맛보고 그리 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 아야 할 그 민중들의 운명을 내다보 시면서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을 향 해서 흘리는 애타는 눈물이셨습니 다.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 십니까? 그 눈물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고 흘리셨던 그 눈물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며 우리를 곤고 히 여기시며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 고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을 체험하 기 위해서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 그 눈물 떄문에 여러분과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분을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길 바랍니다. 그의 눈물 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의 눈 물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준 것입 니다. 그의 눈물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것이 였습니다.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물을 흘릴 차례입 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우리가 눈 물을 흘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 속에 사는 이 유 아직도 우리가 충분한 눈물을 흘 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민족을 위해서 충분히 눈물을 흘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의 민중 들의 고통의 행진은 아직도 계속되 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 의 눈물을 요구하십니다. 이런 얘기 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 한분이 꽤 괞찮은 목사님이 신데 쫒겨나셨어요. 쫒겨난 이유가 뭐냐하면 이 분이 지나치게 설교가 기독교의 초보적인 메시지 예수, 복 음, 십자가 이런 초보적인 메시지만 주일마다 계속한다 아주 피곤하다 듣기싫다. Sick and tired! 그래서 목사님을 쫒아냈어요. 나도 쫒겨날 지 모르죠. 자, 그런데 얼마후에 새 로운 목사님이 부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새로오신 목사 님도 전임 목사님과 거의 비슷한 예 수, 십자가, 복음, 똑같은 메시지를 증거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이번에 는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분 은 쫒겨 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상한 사실이였습니다. 옆에서 이 사 실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찾아 와서 그 교회 교인들을 붙들고 이런 질문을 했대요. 난 당신교회 사람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오. 당신들이 옛날 목사님을 사직시킨, 사임시킨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기독교의 초보 예수 복음 십자가 그 메시지를 증거한다고 해서 사임 시켰는데 보 시오. 새로오신 목사님도 똑같은 동 일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 까? 그때 그 교회 교인하나가 이러 한 대답을 했대요. 맞습니다. 새로오 신 목사님도 꼭같은 메시지를 전하 고 계시더군요. 그런데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달라요? 새로 오신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면서 십 자가를 전하면서 우시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눈물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확 인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눈물 속 에서 주님의 사랑을 만나고 있습니 다. 그렇습니다 눈물이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는 울어야 할 시간입 니다. 아직도 안타까운 민족의 현실 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니 다. 아직도 예수 알지 못하고 방황 하는 이거리 속에 수많은 우리 이웃 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울어야 합 니다. 우리가 울면 민족이 살 것입 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가 거 두리로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주 변의 안타까운 우리 가족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바라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신 때가 언제 였습니까? 이 시대는 우리의 눈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눈물에 대 한 감격속에서 내 눈에 눈물이 흘려 지는날 우리 민족은 치유될 것입니 다. 새로워 질 것을 믿으시길 바랍 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 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리에서 일 어나서 우리 다함께 통성으로 기도 할 때 내일이면 3.1절입니다. 우리 민족을 향해서 한 번 기도하십시다. 자, 많이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어려운 우리민족, 경제도 회복되고 그러나 더 중요한 우리만족이 하나 님 앞에 돌아오는 영적인 회복이 이 루어지고 그리고 저 북녘 땅의 사람 들도 우리처럼 자유롭게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는 그날이 다가오도 록 하나님 구원의 복음이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이땅을 새롭게 하고 이 민족을 새롭 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 이 민족 가 운데 주의 부흥을 주시고 우리를 새 롭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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