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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라가는 길의 각오/마가복음 10:35-45

by 【고동엽】 2021. 12. 23.
예수 따라가는 길의 각오
마가복음 10:35-45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영국에 기 독교 사상가 그리고 언론가 가운데 멀콤 리치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의 책에 이런 내용이 기록이 되 었습니다. 실용주의가 이 땅의 기 독교인들의 삶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기독 교인들에게서 참된 결단, 헌신을 빼 앗아 간 것이다. commitment 라는 영어 단어를 썼는데 commitment를 빼앗아 갔다. 실용주의적 시대정신 이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에게서 참된 결단과 헌신을 빼앗아 갔다. 영국적 상황 속에서 그 분이 한 얘 기지만 이것은 한국의 기독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세기 전만해도 20세기 초엽 과 중엽에 이를 때 이 땅의 그리스 도인들에게서 신앙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기억을 해봐도 교회 나 가서 제가 많이 들었던 설교가 이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 그것은 언 제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감동이 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간증 속 에서도 옛날에 자주 간증이나 어떤 신앙에 대한 고백을 듣게되면 자주 출현했던 단어들이 이런 단어들이었 습니다. 나는 결심합니다. 결단합 니다. 이렇게 각오하겠습니다. 각오. 그런데 요즘 이런 단어를 별로 들 어볼 수 없쟎아요? 물론 지금도 별 종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고 백이 종종 들려올 수가 있습니다마 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간증을 찾아 보기 힘든 시대가 되어 졌습니다.
지난 달에 월례 철야기도회가 있었을 때 주기철 목사님의 아드님, 주광조 장로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우리는 이런 순교적 신앙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뼈져리게 실 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1934년, 일제 치하에서 바야흐 로 신사참배의 폭풍이 한국 교회를 몰아 붙일 때 그때 주기철 목사님 은 평양 신학교의 신학교 부흥회에 신학교 사경회 강사로 초청을 받으 셨습니다. 그때 신학교에서 그분이 설교하신 주제, 사경회의 대 주제가 저 유명한 '일사 각오'라는 설교였 습니다. 죽기를 결심한다. 예수를 따 르는 사람마다 죽기를 결심해야 된 다. 죽으면 산다. 그들에게만 부활의 영광은 약속된다. 이 분의 메시지였 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상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 에피소 드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세번째 수난의 예고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32절 본문에 들어가기 직전에 배경 을 알려주고 있는 32절을 보시면 이런 말로 시작 합니다. '예루살렘 으로 올라가는 길에' 이렇게 시작이 되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 데 저희가 놀라고 쫓는 자들은 두 려워하며 쫓았다. 33절 다 같이 읽 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 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 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 고' 34절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 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 님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것인가를 명확하게 아 셨습니다.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 셨습니다 .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예루살렘에 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 것을 이제 한 자연스런 대화의 에 피소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에게 이런 각오가 필요했다면 오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 시대 의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동일한 각 오를 우리에게 부탁하시지 않을까 요? 우리가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라가려면 우리에 게 도대체 어떤 각오가 필요할까요? 본문은 그 몇가지의 중요한 각오에 대해 가르칩니다.
첫번 째는 세속적 영광을 포기 할 각오를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 서 처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에게 는 중요한 두가지의 동기가 있었습 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 고 개화기에 이 땅의 100년 전에 복 음이 들어 올 때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대표적이고 보편적인 이유는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회개 혁적 비젼을 가지고 기독교에 기화 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소위 엘리 트 식자 층에는 기독교 믿으면 새로 워 질 것이다. 역사도 새로워지고, 사회도 새로워지고 우리 개인도 새 로워 질 것이다. 이런 사회개혁적 비젼을 가지고 기독교에 참여한 사 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수는 아니예요. 소수의 엘리트 계칭 이 그랬고.대다수의 민중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위해서 믿었습니다. 그것은 성서적인 신앙의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 터 인가 이땅의 사람들에게 예수 믿 는 동기, 사회개혁적 동기도 아니고, 복음적인 동기도 아닌 다른 동기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땅에 많아 지기 시작했어요. 이 제 삼의 동기 를 우리는 축복의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 부터인가 예수 믿 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본질적이 메시지 대신에 이런 메시 지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 수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 으면 건강해지고 예수 믿어야 출세 하고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이 땅에 선 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 것이 실용주의적 이 시대의 가치관, 물질 중심적인 이 시대의 정신의 한 영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국인 특유의 기복 신앙에다가 또 외국에 서 수입된 소위 번영의 신학 'theology of prosperity' 번영의 신학, 예수 믿어야 번영할 수 있다. 이 번영의 신학의 영향으로써 이런 소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메시 지가 이 땅에 유행하기 시작했습니 다. 물론 예수 믿으면 축복이 없다 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 믿고 저 는 병 고치고 예수 믿고 인생이 새 로워진 사람들을 얼마든지 많이 봤 어요.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적인 메시지냐? 라는 것은 별개의 질문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 믿고 복 받고 예수 믿고 건강하기 위해 서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믿었 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고쳐지지 않 고, 부자가 되지않고 출세하지 못했 을 때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 수는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예 수, 떠나갈 수 있는 예수, 버려질 수 있는 예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저는 사실 예수님 당시의 제자 들도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다. 이 분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경험 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사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쫓 아 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가 행하시는 기 적을 보면서 마음 속에서 이런 기대 가 일어났습니다. 저런 기적을 행하 시는 분이라면 우리의 어떤 소원도 저분은 만족시켜 주실 수가 있으실 것이다. 드디어 본문이 시작되는 35 절에 보시면 두 제자가 나와서 이렇 게 주님 앞에 요청을 합니다. 자, 35 절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 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당신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는 분,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것 을 무엇이든지 좀 만족시켜 주십시 오.이러한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 그 다음 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 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 를 원하느냐 ' 이때 두 제자의 대 답, 아주 유명한 대답이죠? 37절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여기 37절에 이 주의 영광이라는 단어를 제자들 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영광 이라는 말이 본래 성서적 의미에서 사용된 영광이었다기 보다는 두 제 자들에게는 매우 세속적인 차원의, 세속적 그런 의미로 이해되는 영광 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이 좋은 날 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 게 되시면 그러니까 예수께 있어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정치적 메시 아가 대부분 그 당시 제자들이 걸고 있었던 기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주님이 온 나라, 온 세상을 통 치할 때 우리 중에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또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변질된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님을 따르는 동기가 제자들에게 있 어서 변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주의 영광이 세속적인 영광이 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본문에 41 절에 보시면 이 두제자가 이렇게 말 하는소리를 듣고 있었던 나머지 열 제자가 어떤 반응을 보였어요? 분노 했습니다. 너희들만 해먹을 작정이 냐? 그래서 다분히 이 두 제자에게 있어서 이 영광에 대한 기대는 세속 적 영광의 기대였다고 할 수가 있습 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마 가 복음에 나타난 똑같은 기사를 마 태복음에서 보면 주님 앞에 이 두 제자를 위해서 이렇게 요청하신 그 분이 다른 모습의 0菅갬?부각되어 있습니다. 한 번 비교해 보세요. 마 태복음 20장 20절 말씀,'그때에 세 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여기 보니까 두 제자가 직 접 나와서 말한 것이 아니라 마태복 음에는 누가 그렇게 말했다고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런 요 청을 했다. 그 다음절 21절을 보면 더 분명해 집니다. 마태복음 20장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 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어머니가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 니다. 저는 이 구절을 치마바람의 원조 구절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 어요. 어머니가 두 아들을 위해서 한 아들은 주님 우편에, 한 아들은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어떤 것이 맞을까요? 제자들이 말했 을까요? 어머니가 말했을까요? 우 리가 연대적으로 보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가운데 먼저 기록된 것이 뭘까요? 마가복음이예요. 마가복음 이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마 가복음이 4 복음 가운데서도 원 복 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 복음이 나중에 기록이 된 것이예요. 나중에 기록된 것은 먼저 기록된 것 을 근거로 그 자료를 보충하려는 의 도가 있습니다. 마태가 똑 같은 기 사를 기록하면서 어머니를 강조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도가 있었을 것 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와서 이런 요청, 세속 적인 요청을 한 배경속에는 누구의 영향? 어머니가 끼친 영향이다.이런 의도가 있었던 것이예요. 어머니가 끼친 영향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참 중요해요. 내 자녀들이 얼마나 경건한 방향으로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세속적 동기를 붙들고 인생 을 사느냐?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옛날에만 그랬 을까요? 이런 어머니들이 오늘은 없 을까요? 제가 한번 실험을 해 보겠 습니다. 자, 여러분의 자녀가 성경 공부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정말 예 수님을 믿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수 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 자가 되었습니다. '엄마, 나 정말 구 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 나 예수 님 너무 좋아.'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하십시다. 물론 좋아하시겠죠? 교회 나오시는 어머니인데 좋아 안하시 겠어요? 그런데 그것하고 내 사랑하 는 아들이 기도했던대로, 기대했던 대로 어느 날 드디어 입학 시험에 서 서울 대학에 합격했다. 둘 중에 하나만 골라 잡으신다면 어느것을 잡으시겠습니까? 솔직히 한번 대답 7?a맑셀? 물론 예수 믿는 어머니니 까 내 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안 좋을 이유는 없죠? 그러나 그것하 고 현실적으로 서울 대학에 입학했 다는것이 더 중요한 소식일까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소식으로 들려오겠 습니까? 많은 어머니가 이렇게 말 할지 몰라요. 우리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다고 제가 보고를 받 아요. 우리 교회에서 고등학생들이 교회 열심히 나오면 어머니들이 전 화가 온대요. 제발 좀 살살 나오게 해달라고. 지금은 일단 대학에 입학 해 놓고, 그 다음에 천천히 믿어도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서울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직업을 나중에 갖게될 것이고 좋은 명예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것이다. 이것 은 나쁜 동기는 아니지요. 그러나 다분히 그 밑바탕에는 내 아들이 남 못지 않게 이 땅에서 잘 살면 좋겠 다 그것이 영적인 동기 보다도 더 강력한 동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 습니까? 오해하지는 마세요.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아무 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저는 훌륭한 기독교 정 치가들이, 기독교 사업가들이 그리 고 기독교적 비전을 가진 교육가들 이 사회 한 복판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동기가 뭐냐? 지금 동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예요. 동기가 과연 부자되고 출세하고 이 것 때문에 믿느냐? 신앙이 이것들을 도와 준다는 사실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내 신앙의 가장 중 요한 동기는 주께서 나를 구원하셨 습니다. 나를 구원 하시고 변화시켜 주신 그 예수님이 너무 좋은 거예 요. 그것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계 십니까? 아니면 세속적 동기 때문 에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교회 나오면서도 여전히 세속적 영광에 대한 기대,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라면 내 신 앙의 동기는 아직도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요청 앞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그런 요청을 지지하거나 격려할 만한 아 무런 발언을 하지 않으셨어요. 사랑 하는 제자들이 순수하게 주님을 따 라오기를 주께서 기대하신 것이라면 오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순수한 동기를 주님은 요청하지 않으실까 요? 그렇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주 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 들, 결코 세속적 영광에 대한 기대 가 내 신앙에 가장 중f鄂?동기가 안되어 있는 사람, 이런 제자를, 이 시대는, 그리고 우리 주님은 아 직도 요구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 다. 그렇습니다. 세속적 영광을 포기 할 각오, 이 각오와 함께 주님은 또 하나의 각오를 부탁하십니다.
두번 째는 섬김의 각오를 요청 하십니다. 섬김의 각오.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는 것을 주께 서 가르치십니다. 자,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가 되어서도 우 리 마음 속에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 니라고 생각됩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그 깊은 곳에 뿌리 박 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에 하 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니 체라는 철학자는 인간 존재의 본질 을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그렇게 말했습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 에 대한 파워. 이 강력한 의지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설교하면서 그 말씀을 드 렸습니다마는 따라서 인간 관계를 위협하는 일체의 불안한 인간관계의 그 밑바탕에는 이런 권력 욕구, 지 배 욕구의 동기가 숨어있다는 사실 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 정 생활의 갈등, 부부의 갈등, 고부 관계의 갈등,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결국 그 갈등이예요. 직장에서의 갈등, 심지어 교회 생활 속에서도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우 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한 국인이 특별히 더 하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숨어있는 죄성, 타락한 성품에다가 플러스 우 리 사회가 지녀온 유교 사회의 역기 능적 요소, 그 요소 가운데 하나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계급화하려는 그런 현상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모 든 것을 계급화 시키는데 민감한 민 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 임없이 웃 사람과 아랫 사람을 나눕 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도 보 세요. 웃사람, 아랫 사람, 아랫 것들 이, 위에 계신 분이, 이런 말은 안 쓴다 할지라도 상사, 상관께서, 이런 말들이 얼마나 우리를 지배하고 있 어요. 우리가 사용하는 나라는 단어 도 내가 상대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 단어는 화려한 변신을 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그랬다가, 또 상대 방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제가 하 고 변하는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이 렇게 많은 변신을 거듭하는 언어가 있을까? 짐이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또 부하의 편에서는 신이 이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 불초소생이 이렇 게 말하다가 상대방 앞에 자기를 가 급적 비하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심 지어 이 졸자가 이런 말도 쓰쟎아 요? 아주 재미있는 말이예요. 한국 인들은 심지어 육체까지도 계급화 시킵니다. 신체까지도. 그레서 우리 부위에서 제0?높으신 부위가 어디입 니까? 머리죠? 어떤 분이 그런 얘 기를 했더라구요. 한국인들에게는 존두사상이 있다. 존두. 머리를 귀히 여긴다. 그런가하면 제일 천하게 여기는 부분이 어떤 부분이예요? 우 리 육체에서. 이 발가락 같은 것. 이 발가락 보다도 못한 인간, 인생 이 런 말을 쓰쟎아요? 그러나 여러분 발다닥이나 발가락에 고장 한 번 나 보세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아요? 내 존재의 근본을 받치고 있 는 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입니까? 사실 차별할 입장이 안되요. 하나 도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심지어 손도 오른 손에 비해서 왼손 이 얼마나 차별을 받습니까? 이 좌, 왼쪽 이것은 항상 안 좋은, 부정 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뭐가 잘 안되고 직장에서 승진을 못하면 좌천되었 다.그런 말을 쓰쟎아요. 좌익, 이 부 정적 의미로 왼손이 차별을 받는 경 향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그리 스도의 제자들에게서마는 이런 계급 의식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 설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자리를 만들지 말까요? 아닙니다. 공동체가 운영되려면 자리는 필요해요. 그러 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철저하 게 그 자리는 섬김의 자리여야 한다 는 사실이예요. 그것은 결코 지배욕 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자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섬김을 위한 자리 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크리스챤 리더쉽과 세속적인 리더 쉽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세요. 마가복음 10장에 4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 이방인의 소 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 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 세속적 리더쉽의 특성들을 상징짓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주 관한다, 지배한다,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보시면 크리스 챤 리더쉽의 차별성을 어떻게 강조 하고 있습니까? 43절에 보세요. '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는 달라야 한다. 너희는 다르게 살 아야 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 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 고' 그 다음 44절 '너희 중에 누구 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철저 하게 섬김의 리더쉽을 강조합니다.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섬길 각오를 하십시오. 내게 섬김의 각오가 없다. 지배욕0?3じ?지배한 다. 이런 사람일수록 크리스챤 리더 쉽의 자리에서 멀리 자기를 성별하 는 것이 필요할 지 모릅니다. 주님 은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기를 원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각오를 요청하십니다. 섬길 각 오를 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충족 을 위해서 따라서는 안된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높이고 그리고 자기 선전을 위해서 따르려는 사람들에 게 있어서 이것은 그대들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길 각오. 이것은 지금도 주의 제 자들에게 지금도 변함없이 요청하는 각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번 째로 어떤 각오를 말씀하 십니까? 고난의 각오예요. 모든 시 대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주께서 요구하시는 마지막 각오 중에 하나 는 고난 받을 각오입니다. 37절을 다시 읽어보시면 '여짜오되 주의 영 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 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 소서' 자,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어요? 38절,다 같 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 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 주의 우편에,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는 지금 알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있을까요? 자, 예수님이 어 디로 가고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머리를 지배 하고 있었던 생각, 가장 중요한 생 각은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십자가 였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런데 느 닷없이 제자들이 오른편, 왼편에 앉 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지금 십자 가에 가시는데 오른편, 왼편에 앉히 려면 방법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두 강도 대신 매달리면 되요. 오른 편, 왼편에 매달리면 되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도 알지 못한다.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가 마셔 야 할 잔, 무슨 잔일까요? 고난의 잔. 십자가의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39절은 일종의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 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결국은 마 시게 될 것이다. 무슨 얘기 입니 까? 고난은 피할 수가 없다는거예 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 들에게,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어 섬 김은 고난을 요청합니다. 고난없이 어떻게 섬길 수가 있을까요? 땀흘 리는 작업이 없이. 우리의 옷 소매 에 흙이 묻혀지지 않고 어떻게 우리 가 섬길수가 있을까요? 진지한 섬김 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가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씀 하십니다.
그러나 고난만 당하고 끝날까요? 그것은 아니예요. 고난 후에 얻을 영광을 주께서 본문에서도 암시하십 니다. 40절을 읽어 보세요. '내 좌우 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 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 되었든지 그 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이 그것을 결정 안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섬겼다면, 그 리고 고난까지 받았다면 그것은 당 신들의 섬김과 당신들이 받았던 고 난에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 상하시는 그 날에 그 상급을, 그 영 광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고난 저편에 주께서 예비 하신 영광, 지금 당장 그 영광이 내 게 오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고난의 저편에서 내 눈물, 내 희생, 내 섬김, 내 순수함의 동기를 아시 는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그분이 하 늘의 영광으로 나를 축복하신다. 장 차 올 그 영광에 대한 바라봄이 오 늘의 고난을 극복할 수있는 에너지 가 되었던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영광이 고난을 받을 수있는 조건부의 고난이 되지 않도 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구체적으로 그 영광을 설명하시지는 않았습니 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 저편의 영 광을 분명히 약속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18절에 보시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 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제일 좋아했던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라고 하시죠? 지난번에 그 아드님이 오 셔서 그 얘기를 했습니다. 아버님 이 제일 좋아하시던 말씀이 바로 로마서 8장 18절이었다. 생각건 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 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그 분의 순교를 향해서 갔던 그 걸음의 열 정은 바로 그 영광에 대한 바라봄 에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세속적 영광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영 광, 주께서 내 고난의 동기를 아시 고, 내 이유를 아시는 그 주님이 나를 그 영광 속에 받아 주실 것이 다. 그 길을 걸어갔던 주 목사님의 생애의 비밀이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제가 주 목사님이 마지막 순 교 직전에 감옥에서 한번 풀려납니 다. 풀려나요. 이것은 일본 경찰의 시험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모진 고난을 받았으면 저도 생각이 달라 지지 않았겠느냐? 그래서 한번 내 보냈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그 감옥에서 풀려났던 그 순간, 그 를 기다리던 교회로 직행했습니다. 온 교우들이 사랑하는 목b榮纛?만 났을 때, 그리고 일본 경찰대 3개, 경찰대 소속의 고등계 형사들이 자 리를 메우고 감시하는 그 자리에서 주 목사님의 설교, 그가 이 땅에서 남긴 마지막 설교의 제목은 다섯가 지 종류의 기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섯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 습니다. 다섯 가지 종목의 기도 제 목을 나누는 것이 그 분의 마지막 설교였습니다. 첫째로, 죽음의 권세 를 이기게 하옵소서. 그 분은 그분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 옵소서. 두번 째 제목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그는 돌 아가 다시 고난과 투쟁할 각오를 하 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기간의 고 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짧은 고난은 내가 어쩌다 견딜 수가 있겠지만, 장기간이 되면 나도 주님 부인할까 봐 두렵습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 디게 하옵소서. 세번 째로 나의 노 모와 처자와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 을 주님이 돌봐 주십시오. 그리고 네번째, 의의에 살고 의의에 죽게 하옵소서. 마지막 다섯번 째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돌아 올 수 없는 그 길 로 걸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의 생애를 보고 들으며 느끼는 것 은 아! 초인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저는 지난번에 주 목사님의 아들, 간증하시면서 제일 은혜를 받았던 부분이 뭐냐하면 그 분이 이런 얘기 를 하쟎아요. 아들의 입장에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초인적인 분이 아 닙니다. 그렇게 강한 분이 아니였습 니다. 그 분은 마음이 약하셨고, 두려워하셨고, 그리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아내의 기도, 그리고 또 하나는 교우들의 기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입 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였다 면 그 분은 그 길을 갈 수가 없습니 다. 저는 이 부분이 그렇게도 저에 게 은혜가 되었어요. 우리 모두 그 길을 갈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힘 으로 불가능할 지 몰라요. 그러나 주님이 도와주시면 그 길을 갈 수가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고난 도 견딜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두 제자, 세속적 영광을 구했던 두 제자도 변해요. 이 사람도 변합니다. 변해요. 어떻게 변합니까? 그들의 마지막을 아십니 까? 주의 오른편에, 왼편에 앉기를 구했던 두 제자의 마지막을 아십니 까? 한 제자 야고보는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최초의 순교자. 제일 먼저 죽어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그는 참수형을 당합니다. 칼이 그의 목을 떨구는 순간, 그는 피를 뿌리면서 예수, 사랑하는 예수, 마지막 예수님 을 외치면서 그의 생명을 순교의 재 단에 바칩니다. 또 한명의 제자, 요 한은 12제자 가운데서 제일 오래 삽 니다. 아주 대조적인 두 제자예요. 제일 오래 살았어요. 95세를 넘기며 살았습니다. 밧모섬에서 기도하다가 하늘의 그 감동 속에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던 요한, 그리고 마지막 에베 소 교회를 돌보면서 최후까지 교회 를 지켰던 요한, 한 사람은 일찌감 치 세상을 떠나 갔습니다. 또 한 사 람은 끝까지 남아 살아있는 순교자 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그것은 중 요한 것이 아니예요. 두 제자의 생 애를 지키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 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게 우리의 생애가 결산될 수 있느냐? 후회없 이 죽을 수가 있느냐? 각자가 걸어 가는 삶의 길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그 미션에 성취를 위해서 후회없이 살다가 영광스럽게 어떻게 삶의 길을 끝마칠 수가 있 을까요? 명절 앞두고 오늘 너무 부 담이 되는 설교일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교인들을 보면 서 마음 속에 이런 느낌이 들어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나 피상적이 아니지 안 느냐? 적당히 즐기는. 오해하지 마 십시오. 저는 휴식의 중요성을 잘 압니다. 그리스도의 안식의 중요성 을 종종 역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안식은 방종이어서는 안됩니다. 좀더 우리의 신앙은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명절 사랑하는 식구 들과 만날 때에도 좀 예수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구원이고 그 분 이 생명이라면 사랑하는 예수님을 아직도 모르는 이웃들에게 진지하게 한번 나누어 보세요. 그것 때문에 받을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다. 쉽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타협하 고 제사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 이것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 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하다 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가족들을 사랑하십시 오. 내가 핍박해도 나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오히 려 그들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 들에게, 가족들에게 아무도 감동을 받을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그 댓가 를 지불할 각오를 한 사람들에 의해 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사람들은 우리의 얘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우 릴 것입니다. 이런 간증만이, 이런 삶만이 우리의 가정을 바꿀 수 있다 고 믿습니다. 이런 삶만이 우리의 민족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 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 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 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기도하십시다. 찬양 <갈보리 십 자가에....>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변함 없 으신 그 사랑하심과 우리가 쉽게 세상과 현실과 타협하고, 적당히 우 리가 편리한 삶 속에만 은거하며, 우리의 삶의 소명과 목표와 그 비 전을 상실하고, 우리의 발걸음이 흔 들릴 때마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 다고 책망하시고 타이르시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 과 가르쳐 주심이 이 귀한 명절, 그 러나 더욱 바르게 살기로 우리 가 정이 함께 주 앞에 결단하고, 새로 운 내일 우리의 삶의 남은 날들을 주의 뜻 가운데 살기로 그렇게 결단 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래서 가 정을 바르게 세우고 이 사회를 바르 게 세우는 진지한 대화, 진지한 사 랑이 나누어지는 이 계절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 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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