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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마가복음 7:31-37

by 【고동엽】 2021. 12. 23.
에바다
마가복음 7:31-37

최근에 한 2년간 서점가에서 계속 베스트셀러로 팔려오는 책 가운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라는 책이 있죠? 이 책에 보면 춤추 는 사람이라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미국의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를 연결하는 유명한 golden gate bridge. 금문교가 있습니다. 이 금 문교로 가는 도상에 17개의 톨게이 트가 있습니다. 통행료 징수대 박스 가 17개 나란히 있는데 어느날 이 책의 저자가 그중의 한 징수대를 통 과하려고 보니까 그 박스 안에서 티 켓도 끊어 주고 돈도 받는 사람이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 면서 돈을 받는 거예요. 근데 그 모 션이 너무 재미있어서 뭘하십니까? 물어봤더니 파티를 열고 있습니다 파티라니요? 누구를 초대하셨나요? 제가 제 자신을 초대했지요 라고 대 답을 하는 겁니다.
얼마후에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징수대 사이를 박스를 통과하는데 보니까 똑같은 사람이 거기서 음악 을 틀어놓고 거의 비슷한 전에 보았 던 동일한 모션으로 또 춤을 추면서 돈을 받고 또 티켓을 내주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 오늘도 파 티를 열고 계십니까?라고 말하니까 아. 물론이지요
조금은 호기심이 발동한 저자는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파티를 열고 있지 않 습니까? 아..저사람들이요? 저사 람들 들어가 있는 박스는 말이죠. 관. 관입니다. 아침 8시 30분에 출 근해서 오후 4시 반에 퇴근하기까지 저사람들은 관속에 갇혀 있는 시체 들이란 말이예요. 시체. 이 색다른 대답앞에 더 호기심이 발동해서 계 속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저 사 람들과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요? 나는 중요한 미션이 있어요. 미션이 뭡니까? 저는요. 댄스 교수 가 될 예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 기서 돈을 받고 여기서 연습장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서 저들의 방. 저사람들의 방을 잘 보세요. 저게 닫혀있는 관이라면 제 가 있는 이 박스 안은 열려있는 무 대란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 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폐쇄된 공간. 닫혀진 공 간 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 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 은 그런 유형의 한사람을 만났습니 다.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중에 서도 중증의 겹쳐진 불행을 앓고 있 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귀가 들리 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한 거의 언어를 잃어버린 그래서 말이 거의 불가능한 그런 사람이었습니 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 통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 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 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 시다가 유명한 말 한마디를 하셨습 니다. 아람어로 에바다 본래 댐파다 라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요. 열려 라. 열려라. 이 한마디 말씀을 하셨 어요. 그러자 이사람의 귀가 열렸습 니다. 또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 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 려 온 것입니다. 극적인 기적의 상 황을 본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습 니다. 35절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 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곳 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는 분명한 말을 하기 시작했습 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예 요. 우리가 구약의 이사야서 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유명한 선지자 이사야를 백성들에게 보내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물 음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런 유명 한 대답을 하지 않습니까? 주여. 내 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 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서는 그가 가야할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은 눈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내가 소원하는 것은 네가 가서 이 말씀을 선포할 때에 일어나게 될 그 기대는 이것이다. 나는 저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고침받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합 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육체적인 장 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 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 그리고 영적인 장애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그런가 하면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러나 하 늘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 니까?
그래서 외롭고 그래서 답답한 자 기의 세계 속에 폐쇄된 채 인생을 살고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 습니까?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예요. 말씀. 그의 말씀은 권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그는 천지를 창조하셨습니 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은 있었 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이 또한 괴롭혀진, 어두워진, 그리고 모든 질서가 뒤바뀐 이 세상에 오시 사 다시 한번 세상을 고치고자 하십 니다. 치유하시고자 하십니다. 세상 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 로 주께서는 이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바다..열려 라.. 그리고 그는 열렸습니다.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렸습니다. 가슴이 열 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 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 주변에 이렇게 귀가 열려야 하고 마음이 열 려야 할 인생들. 이것이 열리지 못 하고 닫혀진 세계 안에서 괴롭게 외 로워 하면서 살아 가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어떻 게 우리가 도울 수가 있을까요? 아 니, 닫혀진 내 인생의 벽. 내 인생 의 관에서 나도 어떻게 탈출하여 새 로운 삶. 부활의 인생을 살아 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서 주님이 이사람에게 어떻게 이 기 적을 베푸셨는가를 주목해 볼 필요 가 있습니다. 에바다. 말씀으로 이 사람을 향해 명령하기 전에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예요. 치유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 이전에 주께 서 이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해 가셨 는지 만약 우리가 주님의 이 교훈을 통해서 동일한 레슨을 배울 수가 있 다면 그리고 오늘 닫혀진 세계속에 서 살고 있는 불행한 이웃들에게 예 수님처럼 접근 할 수가 있다면 이웃 들의 삶이 열리는 기적이 지금도 일 어 날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 랍니다.
자. 이웃들의 삶의 세계가 열리 기 위해서 어떻게 접근해 가야 할까 요?

첫째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접촉을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 우리가 본문의 33절을 다같이 읽겠 습니다. 예수께서 그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 의 양 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여기서 우선 33절에 보 시면 예수께서 그사람을 따로 데리 고.. 그 단어를 주목해 보세요. 따 로 데리고 자, 예수님은 무리가운데 이 많은 군중가운데 이 사람을 분리 해 내셨습니다. 따로 데리고 가셨습 니다. 공개적 접촉이 아니라 개인적 접촉을 시도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이 듣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고통스러운 상태. 만약 공개적으로 이 사람을 다루는 과정에 있어서 이 사람이 당황하지 않을까? 이사람의 처지를 배려해서 주님은 아마 개인 적으로 이사람을 분리해 내셨을 가 능성이 많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 기 사람의 처지를 깊이 아시고 이 사람을 개인적으로 접근해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요. 그리고 드디어 치유의 액션이 시작 됩니다.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여 기 아주 흥미로운 방법을 사용하셨 어요. 예수님은 사람들을 다루실 때.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아니,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도 한 방법을 고정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늘 달라 져요. 그 사람의 처지에 맞는 방법 으로 다가오십니다. 자,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하실 때 어떻게 하셨어요? 먼저, 손가락을 양 귀에 넣으셨습니 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본문에 보시면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그랬습니다. 번역이 맘 에 안들어요. 왜 침을 뱉었다고 했 을까? 우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 니까 연상하는 것이 딱 뱉어 가지고 한것처럼 그렇게 연상할 수가 있는 데 침을 묻혀 그의 혀에 손을 대시 며 저보고 번역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어요. 자, 예수님이 양 손가락 으로 그의 귀에 대셨을 때 이 사람 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또. 예수님 이 침을 묻혀 그의 손으로 혀에 손 을 대셨을 때 혀를 touch 하는 순 간. 이사람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자. 주님의 손가락이 들어오는 순 간. 비로소 그는 뭔가를 느꼈을 거 예요.아. 내 귀에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날 모양이다. 말을 하지 못했던 그의 혀.쓸모가 없었던 그의 혀. 고 통하고 있었던 그의 혀에 예수님의 손가락. 침묻힌 그의 손가락이 닿는 그 순간. 아. 내 혀에도 무슨 일인 가 생기겠구나. 그의 사랑속에 그의 친절속에 그의 구체적인 touch 속에 서 이사람은 주님을 향한 어떤 기대 감을 가질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 각합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렇게 그사람에게 꼭 필요한 방법으로 개 인적 관심속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처방을 가지고 접근해 오시는 주님 의 모습을 보십시요. 여기 주님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개인적 관심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막연히 세상 의 빛이 아니예요. 그는 추상적으로 그냥 세상의 빛이다라고 선포된 분 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시 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 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각 사람에 게.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비치는 빛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 다. 다시말하면 우리 주님은 개인적 관심을 가지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나의 처지를 아시고 나의 갈등을 아십니다. 나의 고민을 아십니다. 나의 좌절을 아시고 내가 숨기고 있는 나만의 비밀과 그리고 나만의 두려움과 내 불안을 아시면 서 주님은 개인적으로 내게 다가오 십니다. 그러면서 내 이름을 부르십 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을 때 마다 늘 제 마음에 감동이 되는 것이 예 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름으로 부르 고 있어요. 우리가 요한복음 10장에 도 보시면 10장은 선한 목자의 장이 라고 부르죠. 나는 선한 목자라. 요 한복음 10장 3절에 보시면 그가 목 자되신 우리 주님이 양의 이름을 각 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했습니 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 여 낸다. 여러분. 이름은 사람에게 붙여지고 사람말고는 아마 개에게만 붙여지는 것 같아요. 개. 그 외의 동물에게는 안붙이죠. 주로 개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한국의 개의 이름 은 대부분 서양사람들의 이름입니 다. 그렇죠? 메리, 톰. 그래서 서양 사람들의 이름을 개처럼 부르며 살 아갑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서는 양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요. 양들에 게도. 그래서 양 한마리 한마리의 이름을 부릅니다. 목자는 그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고 있다. 선한 목 자 되신 우리 주님. 여러분과 저의 이름을 이날도 부르고 있다는 사실 을 아십니까? 삭개오야, 마리아야, 마르다야, 명자야, 명자는 우리 마 누라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였던 그러 나 서둘러 떠나갔던 자기의 친구의 죽음앞에서 예수님은 아픈 가슴으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나사로 야, 나사로야 나오너라 무덤을 쏘아 보시면서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부 활의 위대한 레슨을 가르치기 위해 서 주님은 이렇게 부르십니다. 나 사로야 나오너라 그때 주님이 만약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지 않고 송 장아 나오너라 그랬다면 볼 만했을 것입니다. 지구상의 죽었던 송장들 이 그때 다 일어났을 것입니다. 아 직은 부활의 시간이 아니예요. 주님 은 대표로 이사람. 한사람을 살리고 자 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나사로야, 삭개 오야, 마리아야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처지 내 절망 내 고독 내 눈물을 아시고 나에게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내게 다가오시면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 은 나를 고칠 수가 있는 분입니다. 이웃을 고칠 수가 있는 분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내 이웃들이 주 님 만나고 그의 인생, 그의 세상이 새로워 지는 그런 경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나도 주님처럼 그들에 게 개인적으로 다가서야 되요. 그리 고 주님이 그들에게 개인적 관심과 개인적 사랑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 을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부 터 기적은 시작될 줄로 믿습니다. 이웃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세상이 새로워지는 위대한 기적을 소망하십니까? 개인적 접촉을 시도 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늘의 도움을 구해 야 할 것입니다. 자, 본문의 34절 읽겠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 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 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 '하늘 을 우러러' 그랬습니다. 하늘을 우 러러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을 구했다는 말이지요. 저는 언제부 터인가 기독교의 전통에 어떻게 해 서 사람들이 기도를 한다고 그러면 늘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는 습관 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예요. 집중한다는 차 원에서는 좋은것이지만 그것이 기도 의 유일한 형태는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성경에 보면 특별히 복음서 에 보시면 단 한번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기도할 때 이런 표현이 한 번도 없어요 사실은. 저는 기도 의 방법이 그렇게 하나의 방법으로 만 고정된 것은 유감이라고 생각합 니다.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 의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그리고 한 참 있다가 쿨쿨~ … 지금도 몇분이 눈을 뜨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기도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 다. 우리가 그것을 기도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눈 감지 않 고 있는 시간은 기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의 방법은 다양한 거예요. 눈 뜨고 얼마든지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야 항상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요. 버스안에 서도 기도할 수 있고,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가 있고… 그런데 저는 가 장 열려진 기도의 좋은 자세가 성경 에 제일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이 런 사례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얼 마나 열린 제스츄어입니까? '하늘을 우러러' 이따금씩 하늘을 우러러보 며 기도해 보세요. 얼마나 우리의 기도가 열려있고 실감을 하겠습니 까? '하늘을 우러러' - 주님은 지금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고치기 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기도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저는 하늘의 도움이 필요없을 법한 유일 한 한 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 수님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그 분은 하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습 니다. 아니,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 보면 우리는 자주 자주 예수님의 이 런 고백을 접하게 됩니다. 나는 아 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다. 아버지를 떠나 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한 다.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늘 그는 주님의 도우심, 아버지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자신의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저는 기독교인들의 봉사의 장, 크리스챤의 봉사의 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서운 비극, 아주 야릇한 비극 중 하나가 우리는 하나님의 도 움이 없어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도우 심을 구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 서운 것입니다. 열심히 많은 사람, 특별히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은 열 심히 일해요 열심히 일하다 보면 하 나님의 도움과 상관없이 하는 것입 니다. 워낙 이 사람이 능력이 있으 니까, 열정이 있으니까 그 일을 해 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만의 열정일 수가 있습니다. 종종 이런 유형의 봉사는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어요. 나중에 결과적으로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목표로 했던 것과 는 상관이 없는 자기의 성취일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은 중간에 어려운 일이 생기 면 쉽게 그 봉사는 좌절해 버리고 맙니다. 저는 우리 교회안에도 봉사 의 다양한 영역들, 봉사의 가능성의 영역들이 무한히 많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제 마음속에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분들은 일년동안 제일 수 고하신 분들은 어떤 분이냐? 물론 성가대도 수고 많이 했지만 저 바깥 에 주차장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 같 아요. 얼마나 수고가 많은지 몰라 요. 또 그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주 차장에서 봉사하면서도 얼마나 이상 한 교인들에게 핍박을 당한데요. 여 기에다 좀 차를 세우라고 그러면 세 울때가 여기 밖에 없느냐, 교회가 여기 밖에 없느냐 그런데요. 환란과 핍박중에도 열심히 바깥에서 봉사하 는 분들 너무 너무 고맙지 않아요? 격려도 해 주시고, 수고 참 많이 하 신다고 말하세요. 월급을 받습니까? 뭘 합니까? 순수한 봉사란 말이지 요. 저는 늘 또 걱정이 하나 있어 요. 저렇게 하다가 지치지 않을까, 어려움 당하면 지쳐 버리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런 봉사를 하는 분일수록 저는 더 필요한 것이 예배를 제대로 드려야 한다, 한번 예배라도 제대로 드려야 한다. 그리 고 자주 기도하면서 봉사를 해야 한 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을 쳐다보면서 봉사하게 되면 또 예 배를 드리게 되면 예배를 드리면서 얻어지는 힘이 있잖아요? 기도하게 되면 새로운 힘이 옵니다. 그 힘과 그 지혜와 그 능력을 가지고 봉사를 하시면 지치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 님이 기뻐하시는 태도로 봉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일수 록, 선교하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하늘의 도우 심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경고합 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도 하나 님의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비극, 우 리는 이 비극속에 빠지지 말아야 합 니다. 하늘의 도우심을 바라보십시 오. 주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가 있었던 유일한 분, 그럼 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향해서 도우 심을 구하면서 이웃에게로 접근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 렇습니다. 우리 이웃들, 우리 주변 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도움의 손길 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요. 그것을 내 힘. 내 source, 내 자원, 그리고 내 정성만 가지고 하다보면 조금 하 다가 지쳐버려요. 그렇습니다. 그래 서 우리는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고개를 들 어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새로운 능력이 임할 겁니 다. 내 용솟음 치는 능력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 능력, 그 기쁨으로 이 웃들을 섬기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번 째로 우리가 이웃들의 삶 속 에 그들의 삶이 열리는 기적을 제공 하기를 원하신다면 세번 째로 그들 의 고통에 공감할 수가 있어야 합니 다. 자 우리가 34절을 다시 읽어 보 시면 '하늘을 우러러' 그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옵니까? '탄식하시며 ' 그랬습니다. 제가 영어 성경 가 운데 필립스라는 번역이 있는데 그 번역 성경을 보니까 탄식이라는 말 이 그냥 탄식이 아니라 아주 깊은 탄식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더라구 요. 깊은 탄식. 'deep sigh' 깊 은 탄식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예 수님은 그냥 탄식한 것이 아니라 아 주 깊은 탄식을 하신 거예요. 왜 깊 은 탄식을 하셨을까요? 상대방의 아 픔과 연대화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공감하시면서 상대 방과 동일시 하고 있는 주님의 모 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 다. 듣지 못하는 아픔, 얼마나 괴 로울까?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고 통, 얼마나 괴로울까? 주변 사람들 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한 아픔, 얼 마나 심할까? 견딜 수 없는 그의 고 독, 그의 소외, 그의 단절의 아픔, 그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함께 느 끼시면서 주님은 그 고통을 공감하 시면서 한숨을 내쉬고 계십니다. 탄 식하십니다. 아마도 눈물을 흘리고 계셨을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니까 이런 말이 있어요. 이웃들과 고통을 더불어 함께 느낄 수가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이웃의 고통 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가 있다. 중요한 말이예요. 잘 들 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웃들 과 더불어 고통을 함께 느낄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있다. 우리가 이웃들의 고통과 더불 어 함께 같이 그 고통을 느낄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의 고통을 치 료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다 라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사람 들을 효과적으로 치유하시고자 있 었던 그 주님의 권능, 그 주님의 기 적은 먼저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지 만, 또 하나는 뭐냐면 이웃들과의 공감의 마음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4장15절에 보면 히브리 서 기자는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 렇게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 제사장,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묘사했어요. '대제사장 예수는 우리 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 가 아니요 ' 이중 부정이 나와요.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우리와 더불어 연약함 을 함께 체휼하신다. 그런데 이 체 휼이라는 단어를 어떤 영어 번역에 보니까 'sympathy' 라는 단어를 썼 어요. 'sympathy' 동정한다 이말이 죠.그 단어의 뜻은 본래 함께 느낀 다, 더불어 같이 느낀다. 함께 느낀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 통을 함께 느끼십니다. 여러분의 좌 절을 아세요. 여러분의 분노를 아십 니다. 여러분의 속상함을 아십니다. 나의 고통, 나의 눈물을 아십니다. 나의 방황을 아십니다. 나의 답답하 심을 아십니다. 나의 억울함을 아십 니다. 나의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 을 아십니다. 나의 무기력함을 아십 니다. 내 어쩔 수 없는 좌절을 그 분만은 그분만은 당신의 그 아픔을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를 고칠 수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아주 심리학자로 인기있게 활동하는 분 가운데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도 많이 쓰지요? 한국 말로 벌써 많이 번역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의 글에 보니까 이런 얘기가 나와 요. 어떤 날, 할아버지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암 진 단을 받은 그 날부터 이 할아버지가 난폭해 지셨어요. 성격이 갑자기 난폭해 지셨어요. 시구들을 향해서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 을 퍼 붓고,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고, 병실에 입원해서도 아무도 만 나지 않습니다. 간호둰과 의사들에 게도 포악하게 대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도와야 하는냐? 어떻게 도와 야 할까? 옛날 친구들을 들여 보냈 읍니다만 친구들도 도움이 되지 못 했습니다. 소리를 내서 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 이 사람과 절친하게 지냈던 은사들을 보내 보았지만, 그 것도 소용이 없었어요. 목사님을 보 냈더니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 습니다. 카운슬러를 들여 보내도 소 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그 동네에서 이 할아버지가 가끔 만나 던 동네 어린이 꼬마가 하나 있었는 데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 고 병원에 쫓아 왔어요. 식구들이 반 호기심으로 그럼 네가 들어가서 할아버지 만나 봐라 들여 보냈어 요. 그런데 이 삼십분 이 어린 소년 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그 다음에 나오더니 이 할아버지가 변한 거예 요. 태도가 갑자기 누구러지고 부드 러워지고 사람들도 만나시고 얘기도 하시고 변했어요. 하도 이상해서 그 어린 소년을 붙들고 사람들이 물어 보았습니다. '너, 할아버지하고 무 슨 얘기를 했니? '그러니 그 소년이 아무 얘기 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할아버지하고 그 이 삼십분 너는 도 대체 뭘했니? 그랬더니 그 어린 소 년이 대답하기를 '저요, 할아버지하 고 같이 울었어요.' 이 할아버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면서 함 께 우는 순간, 더불어 껴안고 울던 그 눈물 속에서 이 할아버지의 아픔 과 질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 때, 그 아픔을 함께 느낄 때 치유의 능력이 솟습니다.
저도요, 목회하다보니까 교인들 에게 기도해 주십시요라는 기도 부 탁을 많이 받쟎아요? 어떤 때는 제 몸이 피곤하고 그래서 기도해 달라 는 부탁을 받고 목사가 기도 해달라 는 부탁을 받고 어떻게 기도 안해 요. 그런데 순 형식적으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자백을 합니다. 아 주. 그렇게 기도를 하고 나면, 틀림 없이 안나요. 아주. 아무일이 일어 나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때는 제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어떤 분의 기도 부탁에 대해서 정중하게 제가 마음으로 같이 반응이 따라오는 때 가 있어요. 그래서 정말 같이 아파 하면서,정말 같은 심정으로 기도가 되는 때가 있어요. 그런데 거의 틀 림없이 그 분들에게 변화가 일어나 요, 치료가 일어나요. 우리가 이웃 들의 아픔을 공감한다는 사실은 얼 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왜 능력이라 우리는 고백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신 그분, 그렇게 죽어야 할 필요가 없고, 그렇게 고통을 받 아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 분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한 죄인의 모습 으로 매달려 가장 처참한 고통을 받 으시며, 가장 처절한 배신과 외로움 을 경험하시면서 십자가의 한복판 고통의 절정에서 '아, 내가 목마르 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 님 나를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고통하며 부르짖으시며 십자가에 돌 아가신 그 분, 저는 그래서 십자가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오해받음, 우 리의 배신, 우리의 눈물, 우리의 죄 악의 치요과 부끄러움을 이해하십니 다. 거기 그렇게 내 죄를 담당하시 고 보배로운 피를 쏫아내신 바로 예 수 그리스도 , 그래서 십자가 앞에 오는 사람을 우리 주님은 구원할 수가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십자 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 니다. 십자가는 위로입니다. 십자가 는 소망인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제가 이 에바다 오늘 본문을 중 심으로 해서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 떤 작자 미상의 사람이 에바다에 대 해서 시를 쓴 오늘 본문을 근거로 본문을 잘 풀어서 시로 쓴 시를 하 나 발견을 했어요. 무려 삼 페이지 예요. 다 읽을 수는 없고, 제가 한 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작자 미상의 시. 제목은 [에바다 이야기]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열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데 가볼리 지방에서 살고 있었지요.
눈을 뜨면 맑은 햇살과 고운 새들 을 보았지만,
이 세상의 소리는 하나도 들을 수 없었지요.
어머니의 따스한 음성도, 형제들 의 고운 노래 소리도 들을 수 없었 지요.
나의 삶은 절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유난히 햇살이 창문을 비 집고 들어오던 날,
친구들이 내게 몰려 왔지요.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붙잡고 나 를 어디론가 데려 갔지요.
친구가 이렇게 손으로 말했지요. 너도 말 할 수 있어.
너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거야.
들을 수가 있어. 들을 수 있어? 들을 수가 있다고?
미친 놈들. 말할 수 있다고? 나를 놀리는 거냐?
나는 태어나서 부터 이랬어. 나는 병신이야. 제발 그냥 그대로 놔줘.
그때 내 눈 안에 누군가를 볼 수 가 있었지요.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도 않았 고,
좋은 옷은 입고, 훌륭한 가문의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러나 무엇인지 힘이 있어 보였 지요.
막연히 이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 이 분이 내 귀를 열고, 내 입을 열어 주실 지도 몰라.
그 분은 나를 보시자 마자 나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아무도 몰래 왼손을 들어 나의 귀 를 막으셨습니다.
어떠한 따스함이 일어났어요.
그리고 오른 손을 들어 침을 무치 시고, 내 혀에 그 손을 대셨지요.
그리고 무엇인가를 말씀하셨지요.
하늘을 보며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며, 이 닫힌 세상이여, 이 막힌 사람들이여.
사랑치 못한 사람들이여. 답답한 형제들이여.
귀가 있어도 말씀을 못들으며, 입 이 있어도 전하며, 찬양치 못하는 자들이여.
닫힌 마음을, 닫힌 가슴을, 닫힌 입을 열어라. 에바다.
천지가 깜깜해 지고 온 몸이 부르 르 떨리더니
귀의 막힌 것이 열리고, 입의 맺 친 것이 풀렸지요.
아, 아. 아. 나의 말은 탄식을 토 해놓고,
그렇게 그리던 말을 하며, 그리고 그렇게 그리던 소리를 듣게 되었지 요.
할렐루야. 위대하고 전능하신 주,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의 찬양을 받으소서.

오늘 이 음성을 들어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에바다. 닫 힌 폐쇄된 공간에서 외롭고, 괴롭 고, 고통스런 이웃들. 주님은 아십 니다. 주님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고통까지도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십 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 다. 오늘 이 시간도 말씀하십니다. 네 닫힌 마음과 세계가 열릴지어다. 에바다. 에바다. 열릴지어다. 하나 님의 능력과 사랑이 임할지어다. 하 나님의 구원이 임할지어다. 에바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새로운 세상을 열 어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 도하십시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 못지 않게 외롭고 닫혀진 나의 세상 안에서 듣 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마음대 로 소리쳐 부르지 못하고, 노래를 잃어버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외로 운 형제와 자매들은 없어요? 그러 나 오늘 이 시간 내게 다가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요. 내게 손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그는 내 눈을 만지시고, 손을 만지시고, 내 마음 을 만지십니다. 내 깊은 고통의 상 처들을 만지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내가 만약 그의 손길만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치유될 것입니다. 나는 변화될 것 입니다. 내 이웃들의 세상도 열릴 것입니다. 귀도 열릴 것입니다. 눈 도 열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님, 제가 왔어요. 주님의 손길을 받 아 들이겠습니다. 주님 만져 주세 요. 답답해요. 외로워요. 괴로워요. 주님, 저에게 말씀해 주시옵소서.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 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 앞에 나왔습니다. 주의 말씀 앞에 내 가슴을 엽니다. 하나님, 이 시간 성령으로 역사하시 사 우리의 닫힌 가슴들을 열어 주시 옵소서. 우리의 깊은 예리한 상처들 을 치료해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능력이 시며,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신 것 을 경험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나의 사랑하는 주님, 이 시 간에 오셔서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 로 만져주시옵소서. 만져주시옵소 서.
능력의 이름 예수, 권능의 이름 예수. 모든 강력을 파하는 예수. 생 명 되신 예수. 치유의 이름 예수. 용서의 이름 예수. 자유 주시는 그 이름 예수. 다 일어나서 생명의 주 님을 찬양하십시다. 능력의 주님을 찬양하시겠습니다.
능력의 이름 예수...

생명이신 주님, 능력이신 주님, 오셔서 자유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 옵소서.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그러나 기도하는 이 시간, 여전 히 답답하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 히 가슴이 괴로운 분들, 쉽게 떠나 지 않는 고통이 내 가슴을 누르고 아프게 만드는 분들이 계시면 자기 가슴에 조용히 손을 얹어 보세요. 사랑하는 주님, 너무나 아파요. 너 무나 괴로워요. 쉽게 떠나지 않는 나를 억누르는 이 고통의 부담스런 짊 아래에서 신음하고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 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주님 만은 그들의 아픔의 이유, 고통의 이유, 낙심의 이유, 갈등의 이유를 아시지 않습니까? 주님, 오세요. 주님, 이시간 치료해 주세요. 그 마 음의 고통의 깊은 상처들을 만져 주 시고, 주님, 이 시간 나에게도 말씀 해 주세요. 에바다. 열릴지어다. 닫 힌 마음 열릴지어다. 에바다. 하늘 의 능력 부어 주시옵소서. 하늘의 사랑 부어 주시옵소서. 오, 이 시간 내 마음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불 안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소멸 될 지어다. 능력을 주시옵소서. 권 능으로 입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교통케 하심과 평화를 주심이 오늘 주를 예배하고 떠나가는 당신의 모 든 백성들의 삶의 발걸음 마다 능력 과 평안으로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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