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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 마 5:9

by 【고동엽】 2021. 12. 23.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 마5:9




오늘은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와 같이 50년 전 군인과 민간을 합해서 450만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내었던 악몽 같은 6.25가 발발한 날입니다. 그 날도 주일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월이 되면 우리는 마음 한 구석에 슬픔이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반세기가 지났지만 6.25 동란으로 인한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고 오히려 갈수록 더 절망에 빠뜨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15일 우리는 이와 같은 우울한 감정을 날려 버리고 엄청난 충격과 벅찬 감격을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남북의 두 정상이 북한 순안 공항에서 만나 두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서로를 반기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서 지켜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고, 그러기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연거푸 방영이 될 때마다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이번 회담을 놓고 일각에서는 미리 계산된 고도의 정치적 제스처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했든, 제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이것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우리 모두의 오랜 원수였던 북한 최고 지도자를 먼저 찾아가서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 하나만으로도 얻을 것을 이미 다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정상이 활짝 웃으면서 서로 반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아,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틀림없이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두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느냐고 물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조용히 마음에 담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피스 메이커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에 의거해 볼 때, 오랜 원한을 일시에 접어두고 손을 잡고 흔들던 두 정상과 또 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보이는 곳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한국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 임원 수련회가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있었습니다. 제가 대표로 있기 때문에 줄곧 참석을 했는데, 이번 정상 회담의 뒷바라지를 책임지고 열심히 일했던 통일부 차관 양영식 장로님을 모시고 이 회담의 숨은 이야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감개무량했습니다. 우리는 대통령 내외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북한의 영빈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보았지만 만찬석상에서 식사를 같이 할 때 북한 당국자들이 쳐다보는 바로 그 앞에서 대통령은 카톨릭식으로, 영부인은 기독교식으로 식사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놀라운 것은 이 정상 회담을 위해서 중직을 맡아 뛴 사람들이 거의 다 크리스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총 책임을 맡아 뒤에서 지휘를 했던 국정원 원장도 모 감리교 권사요, 통일부 차관도 장로교 장로요, 비서실장도 안수집사요, 그 다음에 경호실장도 집사요, 외교안보 수석도 집사요, 또 적십자의 사무총장도 집사입니다. 즉, 이번 일에 관련되어서 아주 중요한 직책을 가진 분들의 거의 90%가 크리스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 잘 믿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아서 남북한의 화해를 끌어냈다고 생각할 때,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라고 물을지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해야 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누구에게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로부터 정말 하나님 아들 같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 따로 있습니까? 원수끼리 서로 만나서 손 흔들고 화해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그러므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평화와 행복과 우리 후손들의 안녕을 위해서 가슴을 열고 대한민국 대통령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 순간만은 그 사람도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이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놀라운 일이예요. 하나님은 화평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창세기 1장 26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면서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우리 생각에는 '나의 형상을 따라 내 모양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어야지.'라고 말씀하실 것 같은데, 왜 '우리'라고 하셨을까요? 이 사실을 놓고 어떤 신학자가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해석을 했습니다. 굉장히 귀담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혼자 계시지 못하고 본성적으로 더불어 존재하시는 신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아독존으로 만족하시지를 않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살기를 기뻐하시는 인격자라는 것을 '우리'라는 말 속에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면 옳다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 품을 떠나 이미 원수가 되어 버린 인류를 친히 찾아 오셔서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자기와 화목하자고 하십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시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하나님의 이미지를 문 밖에 서서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묘사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많은 자식들로부터 사랑 받으시고 자기도 또 많은 자식들을 거느리고 사랑하면서 더불어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자기가 그런 분이기 때문에 사람을 만들 때도 자신과 닮은 존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인간은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과 똑같이 더불어 함께 사랑하면서 교제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싸우고 다투고 미워하고 등 돌리고 원수 짓고 죽이는 것은 하나님이 만들려고 한 본래 인간의 실존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의 인간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평화를 깨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원수지게 만들고, 서로 상처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하고는 닮은 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사탄의 아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이 원래 하는 짓이 가르고 나누고 미워하고 원수 짓게 하고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우리 조상을 유혹한 후에 하나님과 원수 지게 만든 것이 누굽니까? 사탄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하와로 하여금 900년이 넘도록 갈등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900년 이상씩 살았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에덴 동산에서 그렇게 밀월의 단 꿈을 꾸면서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에덴 동산 밖으로 쫓겨 나와, 땅을 파면서 더위와 싸우고 추위와 싸우며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고 원망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마귀가 계속 마음을 충동질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이 부인을 향해 이렇게 짜증내고 원망하지 않았겠습니까? '왜 선악과는 따먹어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나? 자기만 고생하면 모르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까지 못 살게 하나?' 그러면 아내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지요. '아니, 당신은 남편이 되어 가지고 내가 선악과 먹을 때 왜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요? 막았으면 이런 일이 없을 것 아니예요?' 그 당시는 사람이 90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아마 오래오래 싸웠을 겁니다.


그 집에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사탄이 가인을 또 충동질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을 질투하여 돌로 쳐죽이는 끔찍한 비극이 그 땅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사탄은 마찬가지입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닫고 등을 돌리고 서로 원수 지면서 살고 있는가 한번 보십시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한 것 같습니다. 부부 사이가 더 한 것 같고, 형제 사이가 더 한 것 같고,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친구 사이가 더 한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더 행복하게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수록 이상하게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자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기가 너무너무 부끄러울 정도의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미국 대법관을 지낸 워랜 버거라고 하는 분이 쓴 글을 보고 제가 공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미국의 대법관이면 대단한 위치입니다. 그런 그가 탄식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갈수록 소송을 이렇게 많이 하는가?' 판사들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소송 건수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가 원인이 어디 있는지 깊이 생각하고 나서 자기 나름대로 답을 얻었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그 기능을 잃어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습니다. 교회가 제 구실을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에는 웬만한 충돌이나 웬만한 갈등이 있어도, 혹은 이해 관계가 얽혀도 서로 양보하고 용서하면서 풀어 나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자기들끼리 해결하려고 했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기도하면서 해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정에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와 같은 도덕적인 힘을 잃고 더 이상 사람들의 심성을 떠 받쳐 주지 못하자 결국 문제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스스로 감당을 못하고 모든 분쟁을 다 법원으로 끌고 가서 전부 다 고소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소송건수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디 미국만 그렇습니까? 우리나라는 안 그런가요? 사람들이 점점 마귀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사탄의 아들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을 보면 수평과 수직이 있듯이, 복음을 전하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가 화목하게 되고 수평적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사랑으로 함께 이어집니다. 이것이 십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하면 그 진리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과 원수된 자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비로소 옆에 있는 형제들을 껴안을 수가 있는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는 원수된 관계를 소멸시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십자가의 복음,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원수의 담을 헐어 버리고, 먼 데 있는 자나 가까운 데 있는 자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화목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사람들을 붙들고 호소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죄 용서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면 원수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피스 메이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담대히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입 다물고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항상 여러분의 주머니에 전도지를 넣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술 마시고 비틀거리며 여자 꽁무니만 따라 다니고 날마다 쾌락을 좇아 온 사방을 헤매고 있는 저 공허한 젊은이들도 예수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을 이룬 가정이 많고, 서로 원수 되었다가 예수 믿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관계로 회복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신교회 이중표 목사가 쓴 '나는 매일 죽노라' 하는 책을 최근에 읽어보았습니다. 그 안에 참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젊은 목사 시절, 조그마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안에 참한 자매가 있었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새벽에 나와서 기도도 많이 하고, 교회 안의 봉사도 남보다 먼저 뛰어 가서 하려고 애를 쓰는 자매였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볼 때 자연히 정이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눈여겨보는데 그 자매 남편이 문제였습니다. 우편 집배원인데 예수를 안 믿습니다. 게다가 알코올 중독자입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술을 먹고 들어옵니다. 그러면 무조건 아내를 두들겨 패는 겁니다. 한번은 그 남자를 찾아가서 왜 아내를 그렇게 때리느냐고 했더니 '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느냐? 내가 내 여편네 패는데 웬 간섭이냐? 무슨 말참견이냐?' 하고 달려들더랍니다. 그러니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거지요.


어느 날 그 집 아들이 목사님에게 달려와서 엄마가 죽었다고 울고 야단입니다. 놀래서 달려가 보았더니 술을 먹고 들어와 목침으로 자기 부인을 때린 것입니다. 그래서 기절을 하고 마당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부인을 등에 업고 보건소로 뛰어 갔습니다. 겨우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목사님은 자기가 두들겨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예수 믿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 시간쯤 그 남편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선생, 오늘 저녁에 나하고 교회 갑시다.' 그랬더니 술을 안 먹고 있을 때는 멀쩡하기 때문에 '네, 그러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밥을 먹고 나더니 화장실 갔다 온다며 슬그머니 나가는 것입니다. 도망가는구나 싶어서 급히 따라 갔습니다. 목사님이 자기를 따라오자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문 밖에서 기다리는데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30분이 되도록 안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벌써 초종을 치고 있습니다. 초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옛날에는 종을 두 번 쳤습니다. 예비 종을 한번 치고 30분 후에 두 번째 종을 쳤습니다. 그래도 이 목사님은 작심을 하고 떠나지 않고 '음, 음'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견디다 못한 그 남자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정말 지독하네'라고 내뱉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의 바지춤을 잡고 교회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태권도 유단자인 두 젊은이들을 양쪽에 앉혀서 예배를 보게 했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준비한 설교는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말 눈물겨운 감정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인생이 한번 밖에 없는데 어떻게 술을 먹고 아내를 때려 가면서 사는가? 그런 짓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는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다해 갈 때쯤 해서 유심히 그 남자를 쳐다보았는데 울고 있더랍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 사람이 '목사님, 오늘부터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내일 새벽부터 새벽종 치는 것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래서 맡겨 줬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새벽마다 종을 치는 것입니다. 술도 끊고 아내를 때리던 그 나쁜 습관도 고쳤습니다. 집배원이기에 집집마다 다니면서 전도할 기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편지 왔어요.' 하고는 그 다음에 반드시 '천국에서 또 편지 하나 온 것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람이 됐는지요. 어느 날 목사에게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집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고 천사 같습니까?' 목사님이 속으로 '이제 알았냐?'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는 신학 공부를 하고 지금은 서울 삼양동 어디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정말로 팔자 고친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가정에 평화가 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원수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두 번째로,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한번 금이 간 사이는 피차 용서하지 않고는 회복되기가 어렵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마음에 서로 갈등이 생기고 갈리게 되면 지체하지 말고 피차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물론 잘못한 쪽이 먼저 와서 용서를 빌어야 되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엄청난 경제적인 피해를 주고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잘못했다는 소리 한 마디 하지 않는, 정말로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먼저 찾아가서 그를 먼저 용서해 주고 서로가 마음의 담이 높이 쌓이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너무나 큰 용서를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구 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야 합니다. 용서는 단순히 시간과 함께 잊어버리는 망각의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나도 용서해 주려는 모방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해서 자발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결단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용서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7번 정도면 됩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유명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평생을 뼈가 부스러지도록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어떤 신하가 왕에게 가서 그 모든 빚을 탕감 받는 비유였습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마치 빚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빚을 탕감해 준다는 것은 돈을 날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날리는 것이 아닙니까? 재정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라고 말합니다. 용서는 손해 보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가 받을 것을 못 받는 것입니다. 용서는 나에게 있는 좋은 것을 날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푼도 손해 보지 않고 한 마디의 말도 불쾌한 것은 듣지 않겠다는 계산으로는 아무도 용서하지 못하고, 아무도 용서받지 못합니다. 내가 희생을 감수할 때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용서로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담을 허는 것과 같습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긴 장벽이 어느 날 아침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면 무너진 것으로 끝납니까? 담이 무너지고 장벽이 무너지면 그 다음에는 그 부서진 많은 벽돌 조각들을 치워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했다고 서로 말은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앙금은 남아 있습니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서먹서먹합니다. 여전히 상한 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싸맬 수 있는 후속조치가 따라와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피차 용서한 다음에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용서를 했으면 용서했다는 그것으로 머물지 말고 더 자주 만나서 위로하고, 더 가까이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서로의 상처를 싸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후속조치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셋째로, 화평을 깨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다른 말로 하면 좋은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써 지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푸다조(spoudazo)'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피에 굶주린 군중들이 원형극장에 모여 검투사들이 싸우다가 어느 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 괴성을 지르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잔인한 문화였습니까? 자기 순번이 돌아와 손에 칼이나 창을 들고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검투사에게 그를 훈련시킨 조교가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푸다조.' '죽지 않으려면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라.'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에베소서 4장 3절에 그대로 인용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깨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 관계는 유리 그릇과 같습니다. 조금만 잘못 다치면 깨져 버립니다. 금이 가 버립니다. 한 몸이라고 부르는 부부 사이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1분이면 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잘해 주려고 하다가 나중에는 원수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입니까? 인간관계가 얼마나 예민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성을 다해서 이것이 깨어지지 않도록 지켜야 합니다. 이 노력이 없으면 우리가 피스 메이커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5장 23절 이하를 보시면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 하나가 나옵니다. 형제에게 나도 모르게 '라가'라고 욕을 했습니다. 형제에게 나도 모르게 미련한 놈이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가까운 형제기 때문에 그냥 욕을 한 것이고 저주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성전에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데 갑자기 형제에게 저주하고 욕한 것이 생각이 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끝까지 제사 지내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제사를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을 중단하고 그 형제를 찾아가서 잘못 했다고 사과하고 화목하고 용서를 받은 후 돌아와서 제사를 다시 지내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한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나중에는 그것이 악화될 때 어떤 피해와 고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막으라는 것입니다. 깨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정성을 다 기울여야 하겠지만, 깨어지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은 더 중요하고 더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인간관계를 깰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나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정성을 다해서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잘 압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지만 동시에 본 받아야 할 피스 메이커입니다. 그에게 조카 롯이 있었습니다. 두 가정이 점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재산이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의 재산이라면 가축을 의미합니다. 양쪽 집에서 다 가축이 늘어나자 초장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밑에 있는 목자들이 서로 다툽니다. 자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서 자연히 아브라함과 롯 사이도 불편해졌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조카를 불렀습니다. '우리는 골육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친족간인데 싸우면 안 된다. 싸우지 말자. 싸우지 않기 위해서 네가 동으로 가면 내가 서로 가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 우리가 갈라서자.' 제의를 했습니다. 롯은 그 말을 듣고 잘됐다 싶어 좋은 땅을 먼저 선택했습니다. 롯이 좋은 땅을 선택해서 옮기자 자연적으로 아브라함은 반대쪽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쪽은 목축하기가 그렇게 썩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가 갖고 있던 좋은 조건을 다 포기해 버리고 그 쪽으로 옮겼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이렇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평화가 재산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형제와 형제가 우애하고 사랑하는 것이 돈을 모아 놓는 것보다도 더 보람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손해보고 자기의 재산이 좀 축이 나도 형제 사이가 잘못 되지 않기를 그는 바랬던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조금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 영토를 다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피스 메이커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것 저것 양보하고 서로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애를 쓰다가도 돈 문제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켭니다. 절대 양보 안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이 없습니다. 마귀의 아들 같습니다. 돈 하면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축복해 주시겠습니까? 자기를 닮은 데가 있어야 귀여워 해 주실 텐데 마귀를 닮은 데가 더 많은 사람을 어떻게 축복하시겠느냐 그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라는 말을 듣고 살고 싶습니까? 피스 메이커가 됩시다.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복음을 전합시다. 서로 용서합시다. 그리고 힘써 우리의 평화를 지킵시다. 여러분, 가정을 돌아보십시오. 오늘 당장 가서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야 될 사람들이 없는지 한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으로 가 보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교회 안에서 구석구석을 돌아보십시오. 서로 담을 쌓고 1년, 2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없는지. 그대로 방치하면 안됩니다. 그대로 방치하면서도 날마다 기도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여 서로가 손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남북이 반세기가 넘도록 갈려 있는 이 땅, 동서가 지역 감정으로 깊은 골을 안고 씨름하는 이 불행한 나라에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피스 메이커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이 땅에 무슨 소망이 있고, 평안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명을 가지고 이 사회를 치유합시다. 이 나라를 치유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에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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