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 날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 창세기 35:1~5 (성찬식)
할렐루야! 알렉산더 화이트라고 하는 설교자가 야곱을 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가운데서 야곱만큼 하나님께 잘 보이고 용서를 자주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가 볼 때 그렇게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야곱'하면 어딘가 모르게 간사한 사람으로 그 이미지가 머리 속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 거짓말도 하고,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모태에서부터 사랑하셨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140년이 넘도록 한순간도 그를 놓지 않고 동행하시며, 그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축복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우리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야곱처럼 거짓되거나 간사한 데도 있고, 어떤 면에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만한 조건이 별로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이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곱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본문을 보면, 야곱은 자기 가족들을 전부 모아놓고 자기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해서 놀라운 간증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한번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아 음미해 보십시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놓고 이와 같이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는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환난이라는 말을 사전으로 찾아보면 평소에 알고 있던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환난'하면 날마다 신앙 때문에 쫓겨 다니면서 핍박 당하는 것을 연상하기 마련인데, 원래의 뜻은 뜻밖의 불행한 일을 만나서 근심과 불안에 싸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환난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밖의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위기 앞에서 고통하고 고민하고 근심할 때가 자주 있지 않습니까?
야곱이 자기 부모를 떠나서 이 험한 세파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순간부터 한 20여 년 동안 그가 겪은 환난을 가리켜 성경은 4가지 정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셨다는 야곱의 말에서, 우리는 도대체 그가 겪은 환난이 어떤 것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5장에서 이 말씀을 할 때까지 지난 20여 년 동안 야곱이 겪은 환난 몇 가지를 살펴봅시다.
우선 28장을 보면 자기 형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죽이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수 천만리 떨어진 자기 외삼촌 라반을 찾아서 홀로 떠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야곱에게 큰 환난이 덮치게 된 것입니다. 혼자 먼 사막 길을 걸어가다가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있었습니다. 야곱은 사막 모퉁이에 자리를 깔고는 돌을 베개하고 누었습니다. '앞으로 내 인생길이 어떻게 될까? 삼촌이 날 기꺼이 받아줄까? 내가 이 길을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그를 괴롭히며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꿈속에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 오게 할지라.' 굉장한 응답을 야곱이 받았습니다.
31장으로 넘어가면 20년 처가살이를 열심히 한 덕에 야곱은 이제 처자도 많이 거느리고 재산도 꽤 모았습니다. 자수성가하여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자 처가 댁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야곱을 질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사는 물론이고 서로의 관계가 점점 불편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곱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 집에 계속 붙어있어서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이 기회에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환난인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서 번민할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합니다.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32장에 넘어가면 한때 자기를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형이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를 향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받게 됩니다. 야곱은 그와 싸울만한 어떤 군사도, 힘도 없었습니다. 형 에서가 와서 자기를 공격하면 지금까지 20년 동안 쌓아 놓았던 모든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뿐 아니라 생명을 건질지, 건지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래서 번민하고 근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식욕도 없고 잠도 안 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떼놓고 혼자 컴컴한 강 언덕에 앉아서 고민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천사와 야곱과의 씨름이 벌어집니다.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 씨름을 하는데 얼마나 야곱이 힘이 세고 끝까지 버티던지 결국 천사가 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나중에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장애인으로 만들었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지금 치려고 오고 있는데 이제는 싸울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불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예,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 대신 내가 이스라엘이라고 고쳐주마."
이스라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 네 몸이 불구가 되었지만 한가지 알아 두어라.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긴 사람이 에서를 왜 두려워하느냐? 에서를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다. 걱정하지 말아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새로 지어준 이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35장으로 넘어가면, 야곱에게 있던 예쁜 딸이 한명 등장합니다. 아들 12명에 딸 하나이기에 대단히 귀한 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잘 생겼는지 세겜성에 관광차 들어갔다가 세겜성의 추장 아들이 그를 보고는 그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강제로 끌어들여 성추행을 하고는 "나하고 결혼하자."고 추장 아들이 매달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화가 났습니다. 나중에는 그 성 사람들을 속이고 칼을 들고 성에 들어가서 성 안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습니다. 야곱의 가정에 무서운 시험이 불어 닥친 것입니다. 세겜성과 동맹을 맺은 주변의 부락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연합공격이라도 한다면 야곱의 집은 쑥밭이 되어 멸족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야곱이 얼마나 진퇴양난의 고통을 겪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35장 1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서 벧엘로 가라. 일어나서 벧엘로 가라.' 하나님이 응답을 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이 야곱은 불확실한 미래를 맞게 될 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가정에 큰 시험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 응답해 주시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는 누구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나의 하나님이 누구시냐? 나의 가는 길에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자식들을 앉혀놓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은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하나님이신가? 야곱을 환난에서 응답하시고 도와주셨다면 그 하나님이 나도 도와주시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환난을 다 당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면 한동안 고통과 근심에 휩쓸려서 허덕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랜 기간 동안 환난의 바람이 가정에서 떠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이 나에게도 응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응답하실 때는 항상 꿈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환상 중에 야곱을 만나셨습니다. 어떤 때는 천사를 보내어 사람의 모습으로 야곱을 만나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면에서는 우리보다 야곱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이 응답하신다고 말하겠다."고 저나 여러분은 똑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가? 야곱을 도우시고 응답하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는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날마다 손에 들고 읽으면서 한가지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동일시'의 원칙입니다. 성경 내용은 하나님이 나에게 1차적으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그 말씀의 대상은 따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각각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그 당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필요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직접 주신 말씀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달리 말하면 전부다 남의 소리이지 내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 말씀을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오늘날의 내가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하겠습니까? 놀라운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그들의 귀를 열어주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고, 환상을 보게 하시고, 꿈을 보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오늘 이 성경 말씀을 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감동하고 계십니다. 또 깨닫게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령은 세월이나 시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진리가 되도록 이어주는 능력과 감동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이것이 나에게 직접 준 말씀이 아니고 남의 이야기지만, 이 말씀가운데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일시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리에 나를 갖다 세우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주신 말씀을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있는 모든 인물이 모두 다 동일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항상 나를 위한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 성령이 우리에게 동일시할 수 있는 은혜와 깨달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야, 오늘 보니까 야곱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 자신이구나. 야곱의 처지하고 나하고 똑같은걸. 전에는 이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그렇게 안 느꼈는데, 오늘은 이 말씀이 내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초상화같다." 이렇게 이상하게 그 말씀이 자기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면 그 속에 기록된 말씀이 전부 나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 들여지게 됩니다. 이런 은혜를 성령이 자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런 성령의 은혜를 우리가 믿으면 야곱이 고백한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야곱보다도 우리는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야곱은 예수님이 오시기 수 천년 전의 인물입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정도 알기는 했겠지만,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직접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직접 우리에게 그 행사와 이적을 보여주시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 영광을 드러내신 모든 사건을 우리처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많은 선지자들이 너희 보는 것을 보기를 원했지만 보지 못했다. 너희 듣는 것을 듣기를 원했지만 듣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너희 귀는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복이 있다."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한 사람 중에 야곱이 들어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끔찍이 사랑하셔서 환난 당할 때마다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말씀을 통해 만납니다. 그의 십자가를 봅니다. 그의 떡을 뗴어 먹습니다. 그의 잔을 마십니다. 그의 부활의 생명에 동참합니다. 그를 일으키신 성령의 능력을 우리 안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우리 모두가 값없이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복된 자리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환난 당할 때 수수방관하고 계실까요? 야곱도 응답하셨는데, 그의 자녀 된 우리를 그대로 두실까요?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절대 불가능합니다. 야곱에게 그처럼 환난에 응답하신 하나님이라면 우리에겐 얼마나 자상하게, 얼마나 치밀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되실까요? 우리는 이것을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응답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응답은 다양합니다. 환난이 다양한 것처럼 응답도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환난을 막아주시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환난이 조금 왔다가 큰 손해를 끼치지 않고 물러가도록 만들어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렇게 좋은 응답을 주실 때도 있지만, 반면에 욥처럼 환난의 바람에 집을 깡그리 날려버리도록 내버려 두시면서 나중에 엉뚱한 응답을 주실 때도 자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오늘 좀 더 극단적인 예를 하나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평생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난을 당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가를 듣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볼레터 스틸 크럼리(Valetta Steel Crumley)라는 부인이 계십니다. 그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출간된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Thrice Through the Valley)라는 책을 썼습니다. 나이가 68세로서 OMS 국제 선교회에서 일을 하는 아주 경건한 부인입니다. 그분의 한 생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세 자녀가 있었는데, 첫째 자녀는 4살 때 백혈병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둘째와 셋째 아들도 각기 18, 16세 되던 해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천국에 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들을 다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목사이면서 선교사였는데, 33세에 임파선 암의 일종인 호치킨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의 가족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크럼리 여사가 57세 되던 해에 그가 선교를 하던 대만에서 살인범을 만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이제 남아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끔찍한 자기 경험을 담대한 마음으로 글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들추어 가면서 솔직하게 이런 내용을 털어 놓는가?' 그는 책에서 질문하고는 스스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가지 평범한 진리, 즉 이러한 기가 막힌 고통과 환난을 통해서 자신이 깨달은 한가지 분명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진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생의 비극에서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환난에도 하나님은 결코 그의 자녀들을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펜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시기는 사람에 따라 일찍 오거나 늦게 올 수 있으며, 그 응답의 내용 또한 똑같지 않고 다양하다 할지라도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경우와 같은 응답도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고백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가 받은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은 아이들이 살아 온 일도 없습니다. 죽은 남편이 다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자신까지 성추행 당하고, 자신의 심리적인 고통을 보상 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는 위로의 힘을 체험했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품에 안고 몸부림치던 밤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을 갖고 나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남편이 숨 한번 들이 마시기 위해 죽을 힘을 다 쓰던 그 밤에도 하나님은 내게 찾아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말씀이 나의 비통함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나니 평소에 건강할 때 상투적인 성경말씀으로 들리던 말씀 하나하나도 절대 거짓이 아니고 진리였습니다. 흑암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마른 입술을 적시는 생수였습니다. 연약한 자에게 들려주시는 지팡이였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하나님은 환난 당한 나에게 말씀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남편과 자녀를 데려가시고 다시 돌려주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통해서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사정을 다 모릅니다. 그러나 근심 없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안고 씨름하지 않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남 보기에는 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도 조금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마음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하나같이 영혼에 환난을 당하고 정신적인 환난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환난 당해 근심과 고통으로 힘겨워 할 때, 우리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십니다. 꼭 응답하십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응답하십니다.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구해 자녀로 삼으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가 환난 당해 씨름하고 몸부림칠 때 가만히 계실 리가 있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념하여 성찬에 참여합니다. '오 주님이여, 주께서 찢으신 살을 내가 먹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을 내가 마십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나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자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우리를 하나님이 세상에 그냥 제 맘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하고 눈물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자식을 잃고 고통하고 몸부림 칠 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냐는 말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 시기가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 또는 응답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의 차이일 뿐,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자녀를 위로하시고 축복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모든 슬픔과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고 간증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고백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기적이 우리의 삶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세상을 산다면 아무도 우리를 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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