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생명의 신학’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신학은, 일찍이 Abraham Calov가 합성어로 표현한, ‘철학적으로 뒤범벅이 된 신학 mixophilosophicotheologie’이나, 온갖 종교의 교리를 아무런 전제없이 묶어버린 다원주의적 ‘혼합 종교 신학’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인 ‘자유와 생명의 신학’이다. 이 신학이야 말로 종말을 향한, 즉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을 지향하는 신학이다. 미국, 유럽, 아시아 그리고 이 세상 그 어는 곳에서도 필요로 하는 신학은 바로 이러한 신학이다. 이러한 ‘자유와 생명의 신학’만이 복음주의 신학의 기초이며, 대상이고, 그리고 내용이다. 이것을 지성인이건 신비주의자이건 아니면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건 모든 사람들이 추구했어야 하는 신학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주의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다. 그러나 신학이 다른 학문과 구별되는 것은 그 학문의 대상, 내용, 표현에 있어서 피조물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神, 곧 ‘하나님을 인지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언어로 표현하는’ 특수성을 갖는다. 그런데 그 神은 인간의 사유 속에서 생긴 신이거나, 이념이 형상화 된 것이거나, 혹은 자연에 그 무엇이 내재되어 있는 어떠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즉 파스칼이 이야기 하였듯이, 철학자의 하나님의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이란, ‘복음주의’라는 형용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선 신약성경과 16세기 종교개혁을 연상하게 되지만, 그러나 참된 복음주의 신학이란,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문서에 그 기원을 가지며, 신약성경의 복음서 기자들, 사도들 그리고 예언자들의 문서에 이르러 밝히 계시된 ‘하나님’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그분의 사역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은 내용상으로 보면,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도, 동방 정교회 안에도,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여러 개신교 종파들의 신학 안에도 부분적으로 증언되고 있는 신학이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적’ 신학은 모든 신학에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catholic’, ‘교회 연합적 ecumenical’ 연속성과 통일성을 갖는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이란, ‘복음’, 곧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며,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이해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복음의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 내용, 그리고 근원과 규범이 되는 것을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복음주의 신학의 학문적 특성’
첫째로, ‘복음주의 신학’의 학문적 특성은 우선 ‘복음’을 토하여 선포되어진 하나님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들의 삶’에 자비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행동은 ‘유일회적’으로 일어났으며,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에게 때로는 ‘자신이 경험하고 증언하는 하나님’이 가장 유대하다는 ‘자만심’마저 생기게 하는 하나님이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좋든지 싫든지 다른 모든 신학들과 전혀 다른 학문의 길(방법)을 제시하고, 또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정당화legitimation해 주시는 분도 역시 오직 하나님 밖에 안 계시다. 즉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 자신이 그 신학의 내용을 입증해 주신다.
둘째로, ‘복음주의 신학’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세 가지 전제를 충족시켜야 한다. 1)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실(계시하실) 때, 때로는 인간의 실존이 이해할 수 없는 ‘변증법적dialectic’에 스스로를 내어 맡기신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자신을 변증법적으로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인식하고,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3) 그렇게 될 때, 모든 믿는 자들은 신앙의 이성, 즉 특별한 인지능력, 판단능력, 언표능력을 소유하게 되어, ‘복음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며, 그 하나님께 헌신하는 신학적 노력을 실행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인간의 실존에 관여하고 계시고, 이 인간에게 자신에 대한 신앙을 불러일으키며,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실제로 이 믿는 자들의 영적능력을 증진시키시고, 활성화시키신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포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실존과 증명과 주권의 증명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 없는 인간 그리고 인간 없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없다.
셋째로,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의 행동’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를 ‘행동Akt’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행동의 연속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의 실존과 본질을 동시에 가지시며, 자신의 실존과 본질을 증명하신다.”(K. Barth, Einleitung ev Th. 30)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정체를 알리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사의 과정을 인지하고, 숙고하며 言表할 경우에는 자기의 본분을 옳게 하는 것이다.”(31) ‘복음주의 신학’는 하나님 자신의 현존과 행동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구별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통일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은 한편으로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에 노출된 신학’일 수밖에 없다.
넷째로, ‘복음주의 신학’이 이야기하는 ‘복음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 폐쇄되어 있는 하나님, 곧 모든 타자로부터 격리되어 있다는 의미의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고 ‘복음의 하나님’은 인격이든 물적이든 ‘전적 他者ganz Anderes’에 묶여 있을 수 없다.(? 32) ‘복음의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의 통일성 속에 계신 한 분이시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구별되는 실재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유하시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 안에, 인간과 더불어 계시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형님, 친구로서 인간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결코 신적인 본질을 축소시키거나,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32)-> Humanitaet Gottes - Gottes Menschenfreudlichkeit. "복음주의 신학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고귀하고 고상할 뿐만 아니라,인간 속에 오실 만큼 천하신 분이시다. 인간에 대한 이 하나님의 ‘Yes’ 속에는 하나님의 ‘No’가 내포되어 있다. 이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거하시기를 원하시며 행동하시는 일이란, 돕는 일, 치유하는 일, 바로 잡는 일, 그리고 평화와 기쁨을 일으키는 일이다. 이 하나님은 진실로 복음의 하나님이시요, 인간에게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하신 말씀의 하나님이시다.“(32f)
그러므로 ‘복음주의 신학’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복음주의 신학’은 ‘神-人學Theanthropologie’이다. 그러나 ‘신-인학’은 ‘인간론적 신학Anthropotheologie’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신학Immanueltheologie'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이라는 점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기쁨의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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