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바르트교의학개요]제5장 높은데 계신 하나님 발제

by 【고동엽】 2021. 12. 17.

제 5장 높은데 계신 하나님

 

우리의 신조에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정의를 원한다. 하나님은 신앙의 대상이다. 바르트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을 말할 때, 하나님이라 일컬어진 분은 종교적 사고가 보편적으로 만들어 낸 개념과 이념을 지속하고 보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신들의 계열에 속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선험적으로 근본적으로 타존재이며 사람의 탐구, 노력, 공상, 사변의 세계에 구속받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처럼 사람에 의해 발견 탐구되어 맨 나중에 발견해 놓은 신이 아니며, 인간이 개념적으로 추구하여 발견한 것의 완성, 최종, 최고, 최선의 완성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른 신적 존재의 모든 자리에 등장해서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제외하고, 홀로 진리라고 주장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사도 신조의 하나님에 대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란 말로 총괄한다. “높은데 계신”이란 말은 그는 우리와 우리의 최고 최심의 감정, 노력, 직관을 다 초월해 있고, 인간 정신의 산물 중에 가장 우수한 것 까지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첫째로 그 분이 우리에게 설정되거나 인간의 성향이나 가능성에 일치하는 일이 없고, 바로 자신 속에 근거를 두고, 그같이 현실 존재를 하신 분이란 것을 의미한다. 또 그가 우리 인간들에게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항상 자기를 통하여서만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그대로 인간에게 향하시고 자기를 인간에게 주시고 알게 하신다.(Selbst Offenbarung)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라고 해서 우리와 상관없고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는 분이 아니시다. 사도 신조가 말하는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높은데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고 우리의 것으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높은데 계신 하나님은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자기에게로 인도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과 구별되고 모든 존재들과 달리 홀로 하나님이라 불러지기에 합당하신 분이고 스스로 우리와 관련을 맺으시는 분이시다.

성경말씀대로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살아계시고, 행동하시고 자기를 알려주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 성서에 제시된 분이다. 기독교적 신의 정의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바를 들을 뿐이다. 구약과 신약 성서에는 털끝만치도 하나님을 증명해 보려는 시도가 없다. 이 시도는 언제나 성서적 신 개념 밖에서 행해졌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말하면서 누구를 말하고 있다는 대상의 실체를 망각했을 때 있어왔다. ‘대체 불완전한 존재에 비교해 가지고 완전한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무슨 변변한 증거명이 되겠는가?’ 바르트는 이러한 유의 신증명에는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성서는 이와 같은 논증을 하려고 아니하고, 단순히 하나님은 아무 논증도 필요없는 분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한 걸음 한 걸음 스스로를 증명하고 계신 하나님이 곧 나는 존재하고 살아있고 행동하고 있으므로 더 증명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 하나님은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우리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의 하나님은 사람이 찾거나 발견하여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논증되거나, 탐지할 수 없을뿐더러, 상상해 낼 수도 없다. 성서에는 하나님을 정의하려고 한다든지 우리의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일을 하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 땅 위에서 인간 사회에서 행동하신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성서는 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행동하심, 이 하나님의 이야기의 의미와 주체성을 증언한다. 이와 같이 성서는 철학 서적이 아니라 한 역사서이다. 즉 하나님의 힘찬 행동의 책이다. 이 하나님의 행동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성서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기록하였다. 첫째는 창조의 사업이다. 하나님은 자신과 구별되는 한 타자를 곧 피조물을 자기 곁에 있게 하셨다. 둘째는 하나님과 피조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약이 세워졌다. ‘왜 하나님은 감사할 줄 모르고, 죄인인 인간과 더불어 계약을 맺으셨을까?’하나님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버렸고, 낮추셨고, 죽는데 까지 내려놓았다. 셋째는 구속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이 한 역사에 집중된다. 이 인간과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뜻을 나타내 보이고, 이 뜻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박멸하시는 일과 신천신지의 계시와 현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인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기호 밑에서 되어지는 노정이고,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목표요, 교회의 시작과 출발점이며 동시에 구속의 계시오, 전체의 완성이다. 하나님의 모든 사업이 이 한 인격 안에서 살고 움직이신다. 성서가 말하는데로 하나님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해야 한다.

창조와 계약과 구속의 사업이 하나님께서 계시고, 살아 계시고, 행동하시고 자기를 알리신다는 현실이다. 이 사역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역사이다. 사람은 이 역사가 설명하는 현실을 즉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을 자유와 사랑이란 두 개념으로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경고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체성에서 추상성에, 역사성에서 이념의 세계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준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추상적인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창조, 계약, 구속의 역사중에서 하나님은 자유로운 사랑의 하나님이 되심을 증명하셨다. 사랑은 자기를 위하여 타자를 사모하는 것이라고 경험한다. 그러므로 한 존재가 홀로 있지 않고 전혀 타자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임마누엘). 이것이 사랑이다. 이것이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고독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시는 역사 중에 계심으로 그는 높은데 계시다. 그의 본성과 본질 또 그의 존재는 깊은데 내려가심으로 성립하고 증명되는데, 그는 자기를 피조물을 위하여 그의 피조물이 있는 나락에까지 내려가실 자비로운이신데 그가 높은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높으심은 “이럼에도 불구하고”라든지, 놀라운 역설적 배리(背理)라든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낮은데로 내려오신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본성이요, 그의 자유로운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라는 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의 독자성 또는 타자들에게 대립한 절대 타자성을 말하는 것이어서 인간이 발명한 모든 타기할 신들과는 구별된다.

“지극히 높은데 계신 하나님”을 이해할 때, 다른 신들을 섬길 수 없음을 깨닫고, 다른 형상 혹은 아무 형상도 필요로 할 수 없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