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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뿌리 칼빈] 형성하기 파트 발제

by 【고동엽】 2021. 12. 17.

<개혁교회 틀의 마련>

 

1. ‘교회규정의 제정과 영향

 

기욤파렐의 권유에 의해 다시 제네바에 돌아온 칼빈은 1538년 중단되었던 강해설교를 이어나가면서 다시 목회를 재개함과 동시에 개혁교회의 틀을 구성하는 작업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먼저 제네바 교회의 특성을 살펴보자. 칼빈의 교회는 루터나 츠빙글리의 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루터나 츠빙글리의 교회가 중부유럽에서 국가교회들을 계승한 것으로, 외형적 조직에서 국가의 지원과 통제를 받는 반면, 칼빈의 교회는 처음부터 국가나 주정부 교회가 아니라, 디아스포라 혹은 이민자들이 중심이 된 교회였다. 이러한 칼빈의 교회들은 무엇보다 박해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네바의 교회생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교회의 규정을 마련했는데 이는 스트라스부르로 추방되어 있을 때 마틴 부처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설교하는 직분인 목사, 목사를 가르치고 길러내는 박사, 또 칼빈의 교회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특성을 지는 것으로, 교회를 감독하고 교회의 법령을 수행하는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 그리고 교회 재정을 사회구제에 사용하고 봉사구성위원을 구성하는 집사를 축으로 이루는 네 직분론을 중심으로 하는데, 네 직분론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영적 유기체가 된다는 신학적 상념과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으로 인도된다는 만인 사제설을 근거로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 규정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첫째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위계질서의 구별이 심화되었던 중세 교회의 성례전적 구조가 박사, 장로, 집사에게 위임됨으로써 사제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교회 권력이 분화되고 교회 행정이 분할된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로는 정부 공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분리와 해체를 위한 기본적 사안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칼빈의 작업과 수고들은 제네바에서 온전히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교회의 중심이 되는 당회의 구성과 선출, 교회의 네 직분의 임명이 교회공동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장 아미 페랑과 반대당파등과의 갈등 등으로 인하여 칼빈은 교회공동체에게 허용된 영적, 정신적 권한이 정부의 법령 하에 종속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훗날, 아미 페랑 등을 중심으로 한 칼빈의 반대당파들이 권력을 잡기위한 소요를 일으키다 실패하자, 그제서야 칼빈주의자들은 득세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칼빈주의적인 정당이 처음으로 제네바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칼빈의 종교개혁도 비로소 세속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적 사안에 대한 시정부의 지배권은 여전히 작용하였다.

 

2. 에큐메니컬 운동

 

칼빈처럼 교회분열을 극복하고자 애쓴 종교개혁자도 없을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는 연합을 의미했다. 나누어질 수 없는 단 하나의 교회를 칼빈은 초대교회의 명칭에 따라 가톨릭 교회로 불렀으며 이것을 오늘의 의미로 전환해 보면 에큐메니컬, 교회연합을 뜻한다. 그에 의하면 이 교회의 일치는 이미 주어진 것, 하나님에 의해 이미 전제된 것이었다.

 

칼빈은 교회 연합과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것은 교회와 이단분파 사이의 비판적 경계를 특징짓는 근본신조로부터 정의하는 것이었다. “한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로 이루어진다.”를 골자로 하는 근본신조는 칼빈이 포기할 수 없는 부동의 교리적 기초로, 그는 다른 모든 교리적으로 다양한 견해는 얼마든지 포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세레의 공통성을 근간으로 개혁교회와 로마교회의 재연합이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츠빙글리파와 영국성공회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터파와는 의미있는 연합을 이루지 못했다.

 

< 신학적 기초 >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는다. 칼빈은 그 말씀 위에서 자신의 신학적 인식기준들과 교회와 사회를 형성하는 척도를 찾아내었다. 그의 신학의 기초를 이루는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권위는 그의 신학이 전제가 되었다. 그는 신학과 참 종교는 무엇보다 성경의 제자가 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성경에 참 인식의 근거가 있기에, “하나님이 성경에서 스스로 증언하려는 것을 우리는 경외감을 갖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2) 하나님의 은혜로써 인간이 의롭게 되었다는 전제는 그의 설교와 교리의 내면적 기초가 되었다.

 

3) 하나님의 인식문제. 고대 인식이론을 참조하여 칼빈은 자연신학의 가능성 문제와도 씨름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음은 요1:14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4) 그리스도의 삼중직에서 하나님 말슴의 선포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예언적 직분에 대한 칼빈의 신학적 발견은 개혁파뿐 아니라,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의 교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5) 칼빈은 율법과 복음을 루터 신학에서 행한 것보다 더욱 농밀하게 연관시켰다. 칼빈의 신학은 계약신학적인 특징을 강하게 보이는데, 구속사적 측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은혜로운 계약 연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들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상적인 유물적 역사관의 구조에도 영향을 끼쳤다

 

6) 성령에 대해 내면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진리와 의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간이 무기력하게 서 있다고 늘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인간의 무기력함은 성령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아무것도 거두어 드릴 수 없음을 의미한다.

 

7) 하나님의 역사는 자유로우시다. 하나님의 영의 중단 없는 사역은 전체 창조와 연관된다. 인간은 우주적 인과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8)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과 영으로서 인간의 실존을 그분과 연관지으시며, 다른 모든 권위와 구속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9)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선택되었다는 놀라운 확신을 준다.

 

10) 은혜는 하나님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이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에 의해 보존되거나 거부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은혜의 목표는 인간의 영원한 완성이다.

 

11) 칼빈의 예정론에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놀랍게도 그분의 섬김을 통해 우리에게 과제를 부여했음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어느 것에 의해서도 결단코 흔들리거나 의심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한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준다.

 

12) 하나님은 인간을 그분의 동역자로 선택하셨다.

 

위에 열거한 것들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선택, 계약, 성령에 대한 생각이 칼빈의 신학 전체에 깔려 있는 그의 신학적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 경제윤리와 사회윤리>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에 있는 제네바는 14세기 이후 물자와 황폐유통을 위한 아주 중요한 교차점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적 특성은 제네바에서 사역하고 있던 칼빈으로 하여금 화폐와 물자 교역의 증대가 가져다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하였다. 칼빈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필요불가결한 돈과 물자를 충족시키는 것보다 사회 생산품의 정의로운 분배에 기초하여 경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자문제, 사유재산에 대한 고찰과 대안책의 마련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6세기 전반기까지 돈을 벌고 축적하는 일이 종교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이자를 고리대금업으로 간주하여 거부했던 반면에 칼빈은 이자사업을 근대적인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식하였다. ,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의 이자사업을 인정하였으며 국가자본을 산업투자를 위해 대출해주도록 인정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돈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또한 돈은 인간을 섬기기 위해 있는 것으로 재산이나 노동처럼 돈도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우상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사유재산과 관련하여 칼빈은 공동체의 중요한 책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칼빈은 물질적 재물을 하나님 은혜의 상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물질적인 부를 자신을 위해 축적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분의 재화를 나누시듯, 사람들이 그 물질적 재물을 서로 나눌 때라야만 비로서 하나님 은혜로 여겨질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사유재산은 칼빈에게 있어서 늘 공동체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순전한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모든 사회적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였다. 칼빈은 부를 축적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청지기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주어진 재산이 곧 책임이라는 사유재산에 대한 이 같은 칼빈의 역동적 이해는 노동에 대한 긍정적 이해를 이끌어 내었다. 부를 생산하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노동은 칼빈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상징이었으며, 노종의 자리인 직업은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인 이웃을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께 소명으로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칼빈이 이자사업에 있어서 적정한 이윤을 보장해 주는 것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마련해준 것과, 노동에 있어서의 책임의식, 그리고 세속적 직업을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라는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이게 해준 것은 서구사회의 기술, 교역, 산업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었다. 스콜라주의의 세계상이 개인의 가난과 곤궁함을 미리 운명지어진,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의도된 죄악의 세계상으로 받아들였다면, 칼빈에 의한 이러한 경제윤리는 개인의 운명을 개척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사상을 심어넣어준 것이었고, 자연과 다른 삶의 과정을 비마법화, 비신성화하였다. 즉 경제, 기술 학문에서 고정적이고 추상적이었던 문제들이 역사적이고 활동적인 것으로 대체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 국가와 정치적 자유 >

 

국가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1. 국가의 역할과 교회의 관계, 2. 국가와 국민의 관계, 3. 칼빈이 생각한 이상적 정부의 형태라는 세가지 주제로 요약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국가의 역할과 교회의 관계.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헤로운 질서의 결과물이다. , 국가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공적으로 유효하게 만들고, 하나님 나라의 확대를 촉구하는 것으로 그 근원은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국가가 신적인 질서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칼빈은 국가와 교회의 권리를 엄격히 분리하고자 하였다. , 칼빈은 장로연합회를 설치하고 교회가 국가의 기준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영적 기준에 따라 개혁되고 형성되도록 시도하였던 것이다.

 

2. 국가와 국민의 관계

 

칼빈은 국가와 정부의 제도를 신적인 질서로 여겼기에 정부와 같은 공적기관이 하나님의 은혜가 흐르게 하는 통로이자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기구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국가와 국민간의 관계가 상호불가침한 자율적 의무와 권리를 가진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입장 가운데 서로가 서로에게 빚진 것을 의미하는 상호적 의무의 상태에 놓여있는 관계로 규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국가는 국민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고, 신앙적 활동을 지원하며 국민은 세금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3. 칼빈의 이상적 정부의 형태

 

칼빈은 로마서 13장에 의거하여 정치적 권력의 각 형태를 하나님의 질서로 간주하고 있기에, 현정부에 반하는 어떠한 형태의 혁명도 인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왕권 상속제를 반대했으나 절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왜내하면 인간은 창조로부터 똑같이 창조되지 않았고 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다른데, 이는 정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 은사를 받지 않은 다수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은사를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대표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더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귀족적 민주주의 혼합 형태를 자유 개념과 더불어 선호하였다. 그리고 자유가 적절한 절제력을 지니고 옳은 방법으로 안정된 지속력을 갖는 것이 가장 좋은 정부의 형태라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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