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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보소서
말씀: 요한복음 19 :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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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야기 중에 `만득이 씨리즈'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득이라는 아이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귀신과, 그 귀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만득이에 얽힌 이야기 씨리즈입니다. 귀신이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포의 대상이 아닙니다. 호칭만 귀신일 뿐 실은 사랑과 인간미 넘치는 존재입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은 아이들은 `만득이 씨리즈'를 이야기하면서 깔깔거리며 재미있어 하는데, 어른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전혀 우습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아이들이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즐기는지 이해하기조차 힘듭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식사 시간에 아이들이 서로 `만득이 씨리즈' 이야기를 하며 저희들끼리 우스워할 때, 무엇이 그토록 우스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오히려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왜 아빠는 우습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만득이 씨리즈'에 대한 정신분석학자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즉 이야기 속의 귀신은 아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며 잔소리하는 부모를, 그리고 만득이는 그러한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해방되기 원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나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만득이 씨리즈'를 서로 이야기하고 폭소를 터트리면서, 끊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들도 모르게 해소한다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만득이 씨리즈'를 들으니 저도 아이들과 함께 웃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설을 덧붙여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들입니다.
하루는 만득이가 길을 걸어가는 데 엄마가 `만득아 만득아' 하고 따라 오며 어딜 가는지 묻습니다. 귀찮아진 만득이가 얼른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 지하철을 탔습니다. 설마 여기까지야 못 좇아오겠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정에 붙은 스피커가 울려 퍼졌습니다.―`만득아, 만득아'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습니다.
이번에는 만득이가 자동차를 운전하고 갑니다. 갑자기 자동차 앞 유리창에 엄마가 나타나 `만득아'하고 불렀습니다. 짜증이난 만득이는 유리창 앞 와이퍼를 켰습니다. 그랬더니 유리창으로부터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만득-득득-아득'. 만득이를 부르는 엄마소리와 자동차 와이퍼 소리가 겹친 음향이었습니다.
만득이가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입니다. 갑자기 변기 아래쪽에서 엄마가 `만득아!' 하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기분이 언짢아진 만득이가 변기의 물을 틀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래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 `만푸-득푸-아푸'
아이들이 지하철을 타건, 자동차를 타고 가건, 심지어 화장실에 가건 끊임없이 따라다니며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 간섭 속에서 살아야하는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비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또 `삐삐'라는 게 있어, 심지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한테 까지 삐삐를 채워주고 원격조종하는 부모까지 있는 한, 만득이 씨리즈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될 것입니다.
비단 요즈음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아이들은 부모하면 먼저 잔소리를 연상할 만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아이들은 부모의 끝없는 간섭과 잔소리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부모의 자식에 대한 책임이요 의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그 숱한 간섭과 잔소리 중에 정말 자식에게 필요한 말, 자식이 격랑의 세상을 살아 갈 때 도움이 될 생명의 말, 지혜의 말, 진리의 말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2년 전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이 졸지에 생명을 잃었던 그 참혹한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던 사람 중에 유지환양이 있었습니다. 당시 18세의 어린 소녀였던 유양은 무려 13일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연약한 소녀가 무려 열 사흘 동안이나 죽음의 구렁텅이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절망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평소 엄마가 들려주던 말들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녀의 어머니는 고학력자가 아니었습니다. 넉넉한 가정의 주부도 아니었습니다. 5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병간호와 생계를 도맡은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상을 졸업하고 대학생인 오빠의 뒷바라지와 생계를 돕기 위해 취직한 딸에게, 늘 희망의 말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유양은 그 절망의 밑바닥에서 평소 어머니가 들려주던 희망의 말들을 곱씹으면서, 절망과 죽음을 끝내 이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한 어머니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어머니는 이렇게 자문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의지하여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죽은 줄 알았던 딸이 13일만에 살아 나왔을 때 어머니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딸을 대견스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라고..."
자기가 그 지옥으로부터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이란 의미입니다. 그 말을 듣는 어머니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때 서로 부딪치는 어머니와 딸의 시선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동적인 모습입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감동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에게 생명과 지혜의 말과 가르침을 줄 수 있는 부모, 그리고 그 말을 가슴 속에 새기는 자식 사이에서만 일어 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다 이러하다면, 쉬임없는 부모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는 `만득이 씨리즈'와 같은 이야기들은 발붙일 틈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벌였던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그가 100세 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라 명령하십니다. 마치 짐승을 잡듯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성경은 이렇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7~19)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리라 약속하신 이상, 이삭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믿었던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삭이 죽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시 살려 주시리라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거짓말장이가 될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이삭을 결박하여 단 위에 눕혀 놓고 칼을 치켜들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됩니다. 이때 아들 이삭은 15살 안팎의 소년이요, 아브라함은 115세 경의 노인이었습니다. 사내 아이 15살이라면 115세 노인이 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참 힘이 넘칠 때입니다. 그런데 그 팔팔한 나이의 아들이 어떻게 노인 아버지의 결박을 순순히 받고 죽겠다며 제단 위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지금 자기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게 된 이삭이 도망쳤더라면, 아브라함의 기력으로는 이삭을 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전혀 반항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결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모리아산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에게 말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아들아, 하나님께서 너를 바치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지금부터 너를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다. 그러나 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 이상, 설령 네가 죽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너를 살려 주실 것을 아빠는 확신한다. 너 내 말을 믿어 주겠니?"
"네, 아빠 말씀이라면 믿어요."
이런 과정없이 어찌 이삭이 아버지의 칼 아래 가만히 누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아들 이삭을 가르쳐 왔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이 이삭에게 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소년 이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눈에 보이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였음을 뜻합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믿었던 대로 마지막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제지하시고, 그 부자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 정도의 믿음이라면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날 아브라함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믿고 따라 주었던 아들 이삭이 얼마나 대견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빠가 말씀하셨잖아요. 하나님께서 죽어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말이에요."
함께 손을 잡고 모리아산을 내려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참으로 황홀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성경에서 가장 황홀한 부자지간을 보여주고 있다면, 오늘의 본문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자,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사지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흐릅니다. 죽어 가는 예수님 앞에서 군병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가며 예수님의 유류품을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순간입니다. 그 비극적인 현장에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다른 세 여인과 함께 서 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은 의붓 관계아이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친 어머니요, 친자식이었습니다. 자신의 태에 10달동안 품고 있었고, 자신의 젖을 물려 주었고, 자신의 품속에서 말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작했고, 자신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성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는 30년 동안이나 한 집에서 모자지간으로 살았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자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자식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갑니다.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눈앞에서 군병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옷은 자기 자식의 옷입니다. 어머니로서는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직한 광경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땅을 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뒤로 넘어져 실신하지도 않았습니다. 불한당 같은 로마군병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홀로 슬픔을 삼키면서 아들의 죽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마리아의 행동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신의 친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기의 아들로, 자신의 소유로 키워오지 않았음의 증거였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괴로와 하시던 예수님의 시선이 어머니와 마주쳤습니다. 마지막 순간 당신의 친어머니를 보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하신 말씀을 본문 26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자'란 호칭 `gunee'는 존경하는 상대에 대한 경칭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문의 뜻에 더 가깝게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돈 많이 벌어서 어머님을 호강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죽어가서 죄송합니다라는 실패자의 한탄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어머니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입니다. 아니 어머니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부터 그 모든 사실을 일깨워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켜준 스승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인이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란 예수님의 말씀의 깊은 의미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덕분으로, 어머니 아들답게,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한 아들의 긍지로운 자기 선언인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으면, 그 마지막 순간 이런 고백을 하셨겠습니까? 전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당신을 낳고 키워준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보십시오, 당신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하시는 이 장면보다 더 눈부신 모자지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위대한 자식은 위대한 부모로부터 비롯됩니다. 위대한 부모란 아브라함처럼, 마리아처럼,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자만 자식에게 참된 지혜, 참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13일간이나 갇혀 있으면서 엄마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힘을 얻었다는 18세 소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저와 제 아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한 말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가라는 잔소리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인생의 지혜를 들려줄 지혜를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이제껏 내 아이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었을까? 아이들이 훗날 역경에 처했을 때, 과연 내가 가르쳐 준 어떤 말에 힘을 얻고 일어설 수 있을까?"
부모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자식의 삶이 결정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우리는 매일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숱한 말들 가운데, 정말 자식들에게 참된 생명과 영원한 힘이 될 진리와 지혜의 말들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 이 시간 되돌아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나를 먼저 드리지 않는 한, 나의 모든 말들은 의미 없는 잔소리에 불과하며, 의미 없는 잔소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골만 넓힐 뿐임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들이 먼저 아브라함과 같은 아버지, 마리아와 같은 어머니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자식들에게 채워 주는 부모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다 산 뒤에 우리의 자식되었음을 가장 큰 긍지로 여기게끔, 지금부터 우리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참 신앙인이 되게 해 주옵소서. 내가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내 자식의 삶이 결정됨을, 늘 기억하며 살게 하옵소서.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결과가 죽음일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만 잘 살게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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