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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얻고 / 요한복음 19 : 23~30

by 【고동엽】 202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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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얻고 요한복음 19 : 23~30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해골이란 이름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두 강도들 역시 예수님의 양옆에 함께 못 박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일시적인 고문이나 체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지가 십자가에 못 박히었다는 것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결코 연습이거나 장난이 아닙니다. 시시각각 정말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자에게나 살아 있는 자에게나, 죽음보다 더 장엄하고 엄숙한 순간은 없습니다. 죽음이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 인간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거사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인간의 임종 앞에서만큼은 모든 사람이 숙연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골고다 언덕 위에서 한사람도 아닌 세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의 빛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날, 그 골고다, 그 순간이야말로 비장하고 엄숙하고, 숙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아니하였음을 본문 23절 상반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십자가 바로 아래에 서 있는 군병들이 세 사람의 죽음 앞에서 한 짓이란 예수님의 옷을 네 깃으로 나누어 각각 한 깃씩 얻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사형시킬 때에 군인 네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사형을 집행하게 했고, 사형 당하는 죄수의 유류품을 집행하는 군인들의 몫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못박은 네 명의 군인들은 먼저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네 깃에 나누어 한 깃씩 얻었다'는 표현은 얼핏, 예수님의 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씩 가졌다는 의미로 이해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증거하고 있는 마가복음 15장 24절에 의하면, 이때 군병들이 서로 먼저 무엇을 가질까하고 제비를 뽑았다는 점으로 보아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정장은, 속옷 위에 겉옷을 입고 천으로 된 허리띠를 두른 뒤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발에 샌달을 신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네 명의 군병들은 먼저 예수님의 겉옷, 허리천, 머리수건, 샌달 ― 이 네 가지를 놓고 제비를 뽑아 순서에 따라 하나씩 챙긴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속옷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뽑자 하니"(23b~24a)

 

그 속옷은 통으로 짜진 것이었기에 4등분으로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나눈다면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속옷만큼은 한 사람이 독식하기로 하고 누가 가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들은 다시 한번 더 제비를 뽑았습니다.

어디에서? 지금 숨이 너머 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언제 ? 가장 엄숙하고 숙연해야만 할 임종의 순간!

그들은 타인의 죽음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 - 지금 자신의 손으로 무엇을 움켜 쥘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군병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 요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b)

 

요한 사도는 군병들의 행동을 보면서 시편 22편 18절의 예언이 사실화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이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고 골고다 산상에서 죽어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주님의 죽음 앞에서 단지 손 안에 잡힌 소유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간 ― 그것이 어찌 본문 속의 군병들만이 겠습니까? 그것은 실은 우리 모두의 적나라한 실상이 아닙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질 권리를 가졌던 것은, 그들의 손으로 예수님에게 못질을 한 댓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우리 손으로 얻은 것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희생시킨 결과, 아니 예수님을 못질한 댓가인 것은 아닙니까?

군병들이 서로 먼저 갖기 위해 제비까지 뽑아가며 취했던 것들이 군병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갑부가 아니셨습니다. 그 분은 달 동네 나사렛 출신이었고 삶의 거점은 갈릴리의 빈민촌이었습니다. 그 분이 입고 계셨던 옷이 좋을 리가 만무합니다. 더우기 총독 관저에서 모진 채찍질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를 지신 채 골고다까지 오셨기에, 그 분의 옷은 피와 땀으로 절어 있었을 것입니다. 가져가 보아야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를 쓰고 그것을 가지려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금 손 안에 넣은 것들―그것들은 진정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며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까?

네 명의 군병들 중에서 제비를 뽑아 통으로 짜여진 속옷을 독차지하게 된 군병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자기 홀로 손에 넣었다는 것 때문에 그 순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특히 사형수의 옷은 재수가 좋다는 풍설까지 있었으니, 그는 그 속옷을 힘껏 움켜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억세게 움켜잡았다 한들, 그것은 죽어서까지 가져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무엇을 움켜쥐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관 속에 드러눕는 날에도 쥐고 갈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관속에 눕기도 전에 누군가가 앗아가 버릴 것입니까?

본문 속의 군병들은 마지막 순간 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바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누구보다도 주님 가까이에 서 있습니다. 그들이 만났고, 여전히 그들 곁에 계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인간을 죄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실 구원자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을 마지막 순간 친히 뵙는다는 것은 참으로 선택받은 자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주님을 친히 만나고서 얻은 것이라고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이 아니라, 이내 썩어 없어져 버릴 천조각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크리스천이라 불리운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그 몇 년 동안 우리가 얻은 것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영원한 진리,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언젠가 재가 되어버릴 지푸라기와 같은 것들입니까?

 

요한 사도는 이 어리석은 군병들에 대하여 본문 24절 중반절에서 `군병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런 일'이란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쓰여져 있습니다. 즉 `군병들이 이런 일들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값지고 귀한 일들을 행하였다는 칭찬의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어리석고 한심한 짓만 골라 가며 했다는 한탄의 말입니다.

만약 오늘 요한 사도가 우리를 향해 `너희들은 이런 일들을 하였다'고 군병에게와 똑같은 말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칭찬하는 감탄사이겠습니까 아니면 안타까와 하는 탄식이겠습니까?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서 본문 속의 군병들과는 정반대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혈루증, 즉 그치지 않는 하혈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던 여인이었습니다. 만나보지 않은 의사가 없었고, 써보지 아니한 약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재산마저 다 날려 버린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어느 날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뵙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1대 1로 대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파를 뚫고 나아가 예수님의 등 뒤에서 간신히 팔을 뻗친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이 닿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8장 45절을 통하여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나의 옷가'에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게' 즉 `나의 몸'에 손을 댄자가 누구인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지금 밀리고 있을 뿐, 누가 특별히 주님의 몸에 손을 댄 자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눅8:46)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인데, 그 순간 예수님의 능력 생명의 능력이 여인에게 임했고, 그와 동시에 12년 동안이나 그녀를 괴롭히던 혈루증은 씻은 듯이 치유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전혀 새 생명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 이제 골고다 위에 있는 네 명의 군병들과 이 갈릴리 여인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각각 나누어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은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한 여인에게 이처럼 놀라운 주님의 능력이 전해졌다면, 아예 예수님의 옷을 움켜 쥔 군병들에게는 태산이 진동할 만한 큰 능력이 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실날같은 능력도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움켜잡았던 것은 그 옷 자체가 목적이었던데 반해, 여인이 군중들 틈에서 팔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었던 것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생명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이나 여인이나 예수님의 옷에 그들의 손이 닿았다는 면에서는 동일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다시 말하면 군병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우악스런 손으로 소유를 움켜쥐었지만, 여인은 그 연약한 손으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붙잡았습니다.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지만 주님만은 내막을 아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말씀하시며 그 여인을 고쳐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군병들과 여인을 상상해 보십시다. 귀가하는 군병들의 손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옷이 쥐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기만 했던 여인의 손은 텅 비어 있습니다. 비어 있는 여인의 손보다는 군병들의 손이 훨씬 더 알찬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의 손안에 든 것이란 곧 썩어버릴 천 조각인데 반해 여인의 손은 비어 있기에, 그 빈손 안에는 그녀가 붙잡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 영원한 은총, 영원한 진리가 충만하게 넘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우리의 손안을 한번 들여다보십시다.

우리 각자는 도대체 어느 쪽입니까? 골고다 군병의 손입니까 아니면 갈리리 여인의 손입니까?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특별히 70명을 따로 부르셔서 훈련시키신 뒤, 2명씩을 한 조로 하여 각 마을에 전도실습을 보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전도 여행을 끝낸 제자들이 돌아와 현장에서 경험한 것들을 주님께 보고 드리는 데, 그들이 한결 같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귀신들이 그들 앞에서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할 긍극적인 목적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우리가 주님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영원한 구원임을, 우리가 우리의 두 손으로 얻어야 할 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단적으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보기에 진정 아름다운 신앙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성도님이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저는 가진 것이 많진 않지만, 늘 채워 주시는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나의 작은 것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만든 종이가 저의 전부라거나 저의 것만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할 도구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성도님이 말한, 사람이 만든 종이란 바로 돈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의 관속에 저승길 노자 돈으로 쓰라며 종이를 넣어 줍니다. 죽은 자에게 돈이란 종이 이상의 의미일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영원한 것으로, 자신의 전부로, 또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여 거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다가 어이없이 파멸해 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돈이란 하나님을 위한 종이로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글을 쓴 성도님의 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원한 생명, 그리고 흘러 넘치는 진리를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다시 우리의 손을 들여다보십시다. 내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추구하고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어서까지도 들고 갈 수 있는 영원한 것들입니까?

만약 지금 나의 손이 골고다 언덕 로마 군병의 손과 같다면, 내가 움켜 쥔 것이 바닷가의 모래알보다 더 많다 할지라도 바로 그것 때문에 몰락하고 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 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사람, 그 손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생명 영원한 진리를 얻은 사람만,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면서 혼탁한 이 세상을 맑힐수 있습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모두 무엇인가 움켜쥐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생명입니까, 죽음입니까? 하나님 나라입니까, 세상입니까? 주님입니까, 종이에 불과한 욕망의 부스러기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얻은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까? 아니면 썩어질 지푸라기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 시간 우리 모두 혈루증 앓던 그 가련한 여인의 겸손한 마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붙잡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손이,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의 치유하심으로 충만케 되기를 간구합니다. 골고다 언덕 로마군병의 삶을 청산하기를 결단합니다. 우리 모두 참된 생명의 향기를 진동하는 갈릴리의 여인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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