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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막 8:22-26 )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12.
무엇이 보이느냐
마가복음 8:22~26






사람에게는 오관(五官))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감각 중에서 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생은 보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본다'는 표현이 유난히 많습니다. 먹어본다. 생각해 본다. 걸어본다. 말해본다. 만져본다. 들어본다. 맛을 본다. 맡아본다. 심지어 죽어본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먹는다는 것과 먹어본다는 것은 다릅니다. 먹는 것은 그저 입에 넣고 씹는 것이요, 먹어본다는 것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맛이 좋은지 나쁜지, 체험하고, 관찰하고, 확인하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습니다. 백번 듣는 것이 한번 보는 것 보다 낫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는 '본다'는 단어가 하나밖에 없지만 영어에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 가령 see, look, peep, observe, watch, witness, inspect 란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에도 見, 春, 觀 , 睹, 視 등의 말이 있습니다. 서로 의미의 차이는 좀 있지만 다 본다는 뜻의 말입니다.


우리는 왜 봅니까? 알기 위해서 봅니다. 즐기기 위해서 봅니다. 느끼기 위해서 봅니다. 행동하기 위해서 봅니다. 생활하기 위해서 봅니다.


식물학자가 한 그루의 나무를 보는 것과 보통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보통 사람은 깊은 관심이 없이 봅니다. 나무가 크다, 작다, 무슨 나무냐, 멋이 있다 그런 정도로 봅니다. 그러나 식물학자가 볼 때는 무슨 과에 속하는 어떤 나무인가, 어느 나라 산인가, 몇 년 되었을까, 영양상태가 어떤가, 이 나무는 이 토양에 잘 맞지 않는다. 이런 지식과 전문 관심을 가지고 자세히 봅니다. 보는 눈을 벌써 다릅니다. 그래서 관(觀)하면 보통 눈으로 보는 것이 라니라 샅샅이 보고, 주의 깊게 보고, 의도적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인생관이라 하고,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역사관이라 하고, 가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가치관이라 하고, 국가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국가관이라 하고,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관(觀)은 하나의 분명한 견해요, 명확한 판단이요, 뚜렷한 철학이요, 자기 나름의 확고한 태도요, 명백한 소신이요, 자기대로의 평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뚜렷한 관을 가져야 한다. 보는 것은 눈의 기능이다. 그러나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볼줄 아는 눈과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정말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아도 볼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시이불견(視而不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합니까?


바로 보아야 합니다. 바로 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잘못 보면 편견이 생기고 망견(望見)이 나오고 단견(短見)이 생기고 사견(邪見)이 나오고 천견(淺見)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보았으나 잘못 본 것입니다.


바로 보려면 사심을 없애야 하고 탐욕을 버려야 하고 선입관념을 제거해야 합니다. 공명정대한 마음, 공평무사한 정신으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설 수밖에 없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향해서 "우리 앞에 넓은 들이 있다. 네가 동으로 가면 내가 서로 가겠고, 네가 서편으로 가면 내가 동편으로 가겠다. 네 마음대로 택해라'고 했습니다. 롯이 눈을 들어 동편에 있는 요단 들을 바라보니 물이 많고 푸른 초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것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곳은 푸른 초장과 많은 물이 있는 것만 보았지 거기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있고 그 성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갔다가 큰 낭패를 보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바로 보고 바로 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 일생에 성공과 실패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얼른 듣기에는 모순된 말 같지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물질 가운데도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여기 물 한 그릇이 있는데 얼른 보기에는 아주 맑고 깨끗하게 보이지만 이것을 현미경으로 보면 미균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지하수가 아주 수질이 좋아서 우리가 마십니다마는 6개월에 한번씩 수질 검사를 해서 합격해야 마시는 이유도 그래서입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을 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위생을 할 줄 몰랐습니다. 물질 가운데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미균을 볼줄 알면서부터 의학이 점점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것만 보지 말고, 먼데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만 보지 말고, 아시아도 보고, 유럽도 보고, 전세계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 위에 산다고 이 땅만 보면 안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광범한 세계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 볼 줄 알아야 우리가 바로 살 수 있습니다.]


한말에 대원군은 그 인물로 볼 때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멀리보지 못했습니다. 세계정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쇄국정책을 썼고 나라가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 동조내각의 동조를 비롯한 당시의 내각에 한 사람도 미국을 다녀온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무모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나만 보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도 보아야 합니다. 국내만 보면 안됩니다. 외국도 보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겉을 잘 보이지만 그 속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나 겉만 보지 말고 속까지 보아야 합니다.


또 현재는 보이지만 장래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래까지도 미리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새가 이 일을 하면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도 미리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 세계는 육안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적 세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속 사람, 그 영혼의 가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보이지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천지의 대주재 하나님 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이 세상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볼 수 없는 나라를 바로 볼 줄 알아야 우리가 삽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전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 마람군대가 와서 도안성을 포위했습니다. 엘리사의 종이 이 사실을 알고 두려워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그 종에게 하는 말이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나하고 같이 있는 이가 저 아람군대보다 더 많으니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종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에게 우리의 군대가 아람군대보다 많음을 보여 주옵소서'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그 종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 종이 도단성을 돌아보니 불말과 불수레가 온 성을 겹겹이 에워싸고 아람군대를 대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이 벳세다 라는 곳에 가셨을 때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사람의 지체 중에 어느 지체가 중요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마는 그 중에도 특히 눈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도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두운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고 해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찬란한 태양 빛이 비쳐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검은 옷을 입든 흰옷을 입든 보지 못하는 사람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맹인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직후부터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점자봉사회와 녹음봉사회를 조직하여 선천적으로 혹은 어려서 실명한 분들을 위해서 점자도서를 만들어 전국 시각장애인 학교에 보급 혹은 대여하고 중도 실명되신 분들을 위해 녹음테이프를 제작해서 전국에 보급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기에 다른데 보면 맹인 거리 바디메오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것을 제쳐놓고 따라 오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많은 사람들이 '떠들지 말라'고 윽박 질렀습니다. '시끄럽다'고 야단쳤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그런 것 때문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오며 계속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때 예수님은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때 맹인 바디메오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정했습니다. "주님, 보게 해 주십시오" 너무 간절하고 절박한 요청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는 것이 이렇게 절박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도 예수님께서 맹인을 고쳐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신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행하신 기적은 그 기적 자체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이 기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적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의 기적은 다른 여러 기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대부분은 고침을 받은 사람이 당장 회복이 되었습니다. 눈먼 사람이 당장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벙어리가 당장 말하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던 사람이 당장 듣게 되었습니다. 열병을 앓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아 일어났습니다. 나병환자가 그 자리에서 나았습니다. 십여년 동안 혈우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순간 고침 받은 것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8년된 환자가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새 힘을 얻어 걷게 되었습니다. 반신불수 병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누어온 들것을 가지고 걷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나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맹인의 눈을 고치시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마다 다른 방법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시간이 걸려 고치시기도 하셨습니다. 가령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는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즉각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맹인을 고치시는 일에 있어서는 점진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였다가 그 다음에 온전히 볼 수 있도록 눈이 뜨게 된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점진적으로 병의 고침을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눈은 이해하는 것은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이해시키는 일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은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바른 이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희미한 지식을 가지고 되고 그 다음에는 좀더 확실한 지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신앙생활을 할 때는 진리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점 확실한 자리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는 알리라"하신 말씀도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 하다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기적은 사람이 어두운 상태에서 밝은 상태로, 모르던 자리에서 아는 자리에 나아갈 때는 점진적인 단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래 영적으로 시각장애인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 심령에 크게 축복이 되어서 심령의 어두운 눈이 완전히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먼저, 맹인이 눈을 뜬 과정을 보세요.


맹인의 친구들이 맹인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우리 생활 주변에 영적으로 맹인인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정 어린 협력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아도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실 때 반신불수된 병자를 사람들이 들것에 메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의 믿음, 동정심, 지구력, 협력이 중풍병자가 고침 받게된 큰 동기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맹인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 것은 그의 친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는 것은 영혼의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멀리 바라보며 말씀을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와야 합니다.


설교자는 여러분의 심령을 주님께 가까이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와 더불어 만남을 가지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드리는 것이 단순히 말하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손길이 우리의 심령을 만지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접촉하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가면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생활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생활은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찬송을 부릅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나 자신이 하나님께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나 자신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맹인을 고치시는 방법이 특별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 유치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셨는데 우리는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몰약과 향로를 바르신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침으로 하셨습니다. 그 침이 사람을 구원하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심오한 사상가들에 의해서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내용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너무 단순하지만 매우 함축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방법으로 우리 심령의 눈을 뜨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맹인의 눈에 침을 뱉으신 후에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수하시므로 그 맹인에게 축복을 베푸셨고 그 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놀라운 은총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축복을 받는 것은 침을 뱉는 것이나 군중가운데서 인도해 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안수해 주시는데 있습니다. 말씀의 전파도 아니고, 영적인 축복을 받으려는 맹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축복을 베푸시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될 때 회개하게 되고 죄사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맹인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안수하시던 주님께서, 오늘 영적으로 맹인 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위에 안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안수를 받은 이 맹인은 보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이때 이 맹인은 너무 감격해서 위를 쳐다보여 말했습니다. "보입니다. 보입니다."고 소리쳤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암흑의 세계에 살던 사람이 빛을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이 감격을 무엇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전에는 맹인이었으나 이제는 봅니다" 이 기쁨이 이 감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전에는 보고 싶어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는 사람들이 말하면 더 속만 상했습니다. 그해서 맹인에게 소망이 있다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고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구원을 알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았을 때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처량한 것을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을 뜨게 되니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처량했었으나 하는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전에는 잘 보였는데 지금은 잘 안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저 영원한 세계를 밝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를 바라 볼 때는 주님이 보였는데 땅한 바라보고 나니까 주님이 희미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무엇이 보이느냐?"


왜 물으십니까? 맹인의 눈을 완전히 고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고치시다가 중도에서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온전히 고쳐 주십니다. 이 맹인은 얼마 후에 또 소리칩니다. "보입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다시 안수해서 완전히 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의 눈이 온전히 밝아 졌을 때 그가 처음으로 본 사람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사람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눈이 밝아지는 순간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한없는 은혜입니다. 말로다 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보입니다. 성가대가 보입니다. 목사가 보입니다." 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그리스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보시면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밝게 살고, 아무리 불안해도 평안하며 절망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예수님이 보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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