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의 발자취
시편 23:1~6
그 동안 우리는 다윗의 유명한 시편 23편을 주일마다 한 절씩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으로 시편 23편 6절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한 목자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양은 어떤 일이 생겨도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돌보심 아래 있는 양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되는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고 1년이나 2년이 아니라 나의 평생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구나 이 고백은 우리 인간의 생애와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랑스러운 외침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나의 선한 목자로 삼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분이 우리 가운데 몇 분이나 되시니까? 우리 삶 속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신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될 때 모든 일이 형통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내 건강이 좋고, 수입이 넉넉하고, 가족마다 평안하고, 내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어디가나 인정받는다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뭐라고 말할까요?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말할까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진학에 실패했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뜻밖에 직장을 잃고 가족들은 가난 속에 시달리게 될 때 나는 뭐하고 말할까요? 양심적으로 말해 나는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고 돌아서니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처럼 나의 성이 무너지고, 기대와 소망이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도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 말이 터무니없는 속임수입니까?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사시는 분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저도 지금까지 사는 동안 감당키 어려운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생각되었었습니다.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밤처럼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일들이 제 생애에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제한된 지식을 가진 저로서는 무한한 지혜와 섭리로 행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내 자신의 노력으로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주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 오심에 대하여 감사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심해도, 아니 주님의 품을 떠나려고 해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내서 다시 사랑과 긍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재난도, 우리를 낙심하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에 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옳은 일, 가장 좋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내가 비록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나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나누게 되는 말씀의 본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양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일을 사랑하시며, 목자로서 주님의 역할을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모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5장 13절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를 통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A Schweitzer "내가 행복할 때 '나만 이렇게 행복해서 될까?'하는 생각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에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양의 거름은 다른 가축의 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합니다.
양들이 목장 전체에 퍼져 있으면 양의 거름을 통해서 토양이 비옥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는 양을 가리켜서 '황금발굽의 가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들이 가는 곳에는 풍요와 번영이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양들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걸어간 곳에는 비옥한 목초지가 뒤따랐습니다. 양들이 살았던 곳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제 밤에밖에 눈이 왔습니다. 밤에 어떤 짐승이 자나갔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발자국을 보면 압니다. 소가지나 갔으면 소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개가 지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양이 자나 갔으면 양의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나간 길에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의 발자취가 났습니까? 우리가 다녀간 길 뒤에 축복과 은혜를 남겨둡니까? 알프렛테니슨 경이 남긴 고정 시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제 집에 들려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같이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모자를 우리 집에 두고 온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집에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내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아내의 답장 중에는 잊을 수 없는 문장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은 저에게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모자는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을 오직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았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있나? 우리는 어떤 발자취를 남기십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아니면 기쁨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차라리 잊어버리고 말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잊고 싶은 추억을 남깁니까? 우리를 아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를 아는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 일까요?
이사야 52장 7절 말씀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말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스스로 물어 봅시다.
'나는 어디에 가나 화평을 남겨두나? 아니면 불화를 남겨두고 있나?' '나는 누구에게나 용서를 남겨두나? 아니면 원한을 남겨두나?' '나는 만족을 남겨 두나? 아니면 불만을 남겨두나?' '나는 어디가나 희망을 남겨두나? 아니면 좌절을 남겨 두나?'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남겨두나? 아니면 미움을 남겨 두나?'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불결한 흔적을 남겨두기 때문에 그의 발자취를 차라리 가리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여러분, 발자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발자취를 보면 양이 지나갔는지 이리가 지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자취를 보면 성도가 지나갔는지 사기꾼이 지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신 자리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선생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시면서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이때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 사람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이미 자네 선생이나를 향해 증거하지 않았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이야'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뭐하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침 그때 예수님은 병든 자 눈먼 자를 고치고 계셨는데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나나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 하셨습니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발자취는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아무리 서전해도 다른 사람이 내 발자취를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 아프리카에는 David Livingston과 Albert Schweitzer 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검은 대륙의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취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Livingston이나 Schweitzer는 한평생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무미건조하고 미지근한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뜨거운 사람을 받았으면 우리도 뜨겁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교회를 찾지만 우리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실망하고 떠나갑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 줄 때 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목자로서는 양이 잘 자라고, 왕성하게 번식하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양들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는 것은 목자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이런 만족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주님께 대한 예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착한 행실 또는 과실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은 후에 사랑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르는 동안 주님은 우리를 계속 바라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뿐만 아니라 주님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동일한 선함과 인자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을 만족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성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넓은 뜻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안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을 때 아무리 밖에 폭풍이 불고, 요란하다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자랑스럽고 기쁨에 넘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시편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적극적이고도 소망으로 가득찬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 자기의 삶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양이 있습니다. 그는 목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에 목자를 떠나 곁길로 갈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목자의 세심한 관리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한편 목자에게도 자기 양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만족해하는 양은 목자에게 기쁨이요 재산입니다.
더구나 양이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하고, 목자 되신 주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권속이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고 다른 사람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양들은 항상 목자가 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양은 목자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안정감과 평온감을 가질 수가 있고, 자동적으로 어려움과 위험을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함께 있는 한 양에게는 풍성한 풀밭이 있고, 잔잔한 맑은 물이 있고, 신선한 들로 통하는 새로운 길이 있고, 고원지대의 안전한 여름이 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파리와 질병과 기생충을 없애는 해독제가 있고, 평온과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는 곳입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육신도 이 땅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70을 살고 강건해서 80을 산다고 해도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육신, 겉사람은 낡아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장막이 새것일 때는 색깔이 선명하고, 줄이 팽팽하여 햇빛도 가리고 비도, 바라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지면 색깔도 바뀌고 줄도 늘어져 힘이 없어지고, 여기 저기 구멍이 뚫어지고, 흔들거리다가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맙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집이 없습니다. 이 육신의 장막집 벗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갑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누가 이 집에 가서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여러분, 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셨습니까?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고 해서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 맡았다고 그 집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 다한 일 많아 부끄럽에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하나님의 집에 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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