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마르십니까?
요한복음 7:37~44
유대 사람들이 지키는 명절중에 장막절이란 명절이 있습니다. 장막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지내게 하면서 장막생활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키는 명절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이 되면 예루살렘 일대에서는 그 옛날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생활하던 것을 상기하면서 장막속에서 7일간을 지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행사는 퍽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막속에서 며칠 지내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장막생활은 임시적인 생활이요 고생하는 생활인데 그 옛날 조상들이 고생하던 것을 생각하며 지금 이렇게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영적인 해석입니다마는 장막에서 며칠동안을 지내면서 이 세상은 말하자면 장막생활과 같아서 임시적인 것이고 영원한 집이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레위기 23장 40절이하에 보면 그 절기의 이유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40년은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광야 생활하는 동안에 잊지 못할 경험 중에 하나는 6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목이 말라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며 마실 물을 찾았지만 ㅁ실 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이 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향해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했으면 마실 물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 이제 우리는 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죽게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안타까운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게 되었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손에 든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반석이 갈라지면서 시원한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과 가축이 목마름을 면하고 사경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적,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장막절을 지키는 기간에 매일 아침 흰옷 입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행렬을 지어 레위 사람으로 조직된 찬양대가 찬송을 부르며 성전 뜰을 떠나서 거리 가운데를 행진합니다.
그리고 남쪽 문을 지나 실로암 못에 도착하게 되면 제사장이 미리 준비해 가지고 왔던 물병에다가 실로암의 맑은 물을 한 병씩 담아 가지고 다시 찬양대를 선두로 해서 행렬을 지어 성전으로 돌아오는 예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성전 뜰이 있는 제단잎에 그 물을 부으면서 찬송을 부르고 손에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 예식은 물을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생생한 감사와 비를 내려 농사하게 하신 고마움에 대하여 행동으로 나타낸 기도와 기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간동안 정기를 지키고 마지막날 말하자면 장막절 행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크게 소리쳐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들의 가장 깊은 열망에 호소했습니다. '목이 마르다'는 것은 인간의 격심한 갈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물의 부족을 경험한 사람들은 언제나 생을 위한 욕망을 물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밥은 며칠 굶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물은 하루동안만 마시지 못해도 큰 고난을 당하고 생명에 위협을 느낍니다. 우리 나라는 아직도 물의 문제가 심각하지는 않습니다 마는 한국수자원공사의 발표에 의하며 앞으로 10년안에 수자원의 고갈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막지대에서는 물 갑이 가솔린 값보다 비쌉니다. 그 만큼 물이 귀합니다.
여러해전에 미국 서부 사막 지대에 사는 아메리칸 인디안이 뉴욕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뉴욕시에서는 원주민 인디안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며칠동안 뉴욕시 당국의 안내를 받으며 세계적인 관광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난후 그를 안내한 시 직원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뉴욕에 오셔서 며칠동안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때 이 원주민 인디안이 수도꼭지 옆으로 가서 수도를 틀면서 하는 말이 "제가 세계적인 도시 뉴욕에 와서 며칠을 지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언제나 마시고 싶으면 얻을 수 있는 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뚝서있는 고층 빌딩이 아니고,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가 아니고, 호화찬란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고, 평생 먹어보지 못하다가 처음 맛본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언제나 원하면 구할 수 있는 물이 그에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목마름을 뼈저리게 당하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은 유대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유대땅은 일년에 두세 차례 비가 오는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오는 거의 비가 오지 않는 메마른 땅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 그리고 야곱이 우물을 찾기 위해서 가축을 이끌고 여기 저기 헤매며 다녀야만 했습니다. 우물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얼마나 다퉜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물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생각에 생존을 위한 투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읽어보아도 물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실감 있는 표현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령 시편 42절 같은 데를 보세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올꼬" 라고 했습니다. 사슴은 물을 마셔야 하는데 그것이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포수들은 사슴이 나타나는 시냇가에 숨어 사슴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사슴은 시냇물을 찾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63편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접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니다"라고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물 없이 마른땅에서 물을 찾는 사정이 얼마나 절박합니까?
시편 23편의 말씀도 우리가 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물가에서는 양들이 쉴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원하면 물을 마실 수 있기 때문에 근심될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하신 말씀에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갈증을 암시하는 강한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시라'는 말은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에서 '물을 마시라'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장 절박한 육체적 갈망을 사람들에게 상기 시켰고 뿐만 아니라 영혼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목마른 것은 인간의 절실한 열망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들의 삶의 의미를 추구합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인간은 이런 미궁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대답은 인간이 범죄 하므로 타락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반항한 때문이라고 요약해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고독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고독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 안에서 우리의 쉼을 찾을 때까지 쉴 수가 없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미를 창조주 되시며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관련시켰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그의 삶을 위한 어떤 본래적인 의미가 없이 우연에 의해 형성된 존재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뜻 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사람이 타락은 했지만 아주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명절 마지막날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목마른 사람은 누구든지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문제의 해결자다" "나는 생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절박한 상황에서 소망을 불러일으키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문제의 해결자 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장 내면적인 갈등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제공하셨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 누구든지 내게 오면 내가 주마"하십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살던 상황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광야에서 배회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이와 같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며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수를 내어 주는 반석을 통해서 목마른 인간 심령에게 지금도 생수를 주시는 만세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 광야와 같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물이 없이 메마른 곳입니다. 그러니까 남도 거의 자라지 못합니다. 풀도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있는 것이라고는 바위와 돌들이 있고 풀도 아주 조잡한 풀만 자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광야에는 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별로 기쁨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다 보니 가시가 많기 때문에 소과 발이 스치면 피를 내고 찔러 아프게 합니다. 물이 없이 메마른 광야에서 자라다보니 자연히 그런 거친 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그런 나무라야 광야에서 살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우리 육신에 상처를 주고 심령에 고통을 주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런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시간 이 자리에도 상한 심령을 부등켜안고 지치고 시달린 심령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많으시리라 믿습니다. 길 모르는 나그네가 길을 한번 물어 봐도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하자면 모든 심령 상태가 광야에서 자란 나무처럼 되어 버려서 그렇습니다. 깔깔하고 날카로워서 조금만 건들면 상처를 주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주차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사람을 다치는 세상입니다.
더구나 메마른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는 인생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은지 모릅니다. 갑자기 불어닥치는 폭풍 때문에 모래흙이 날아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날아온 모래가 길을 덮어 버려 있던 길도 찾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분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의 생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 영혼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길 잃고 헤매며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혼의 목표, 영혼의 가나안을 찾지 못한 심령은 말하자면 아직까지 광야에서 헤메이는 가련한 심령과도 같습니다. 마음에는 평화가 없어서 불안과 초조, 원망과 시비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방황하다 보니까 자연히 그 심령이 피곤해 집니다. 따라서 육신도 지쳐 버립니다. 목이 마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인지라 사회도처에서는 분쟁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한마디로 불행한 사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반석을 칠 때 그 반석이 갈라지면서 생수가 솟아 나왔습니다. 이 반석이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렇게 쓸쓸하고 메마르기가 광야 같은 세상에 반석으로 오셔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수가 이 광야에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주님의 진리,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축복은 우리 심령에 말하자면 생수와 같습니다. 생수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닙니다. 고인 물은 썩고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생수는 새롭습니다. 생수는 맑습니다. 생수는 마시면 상쾌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치고 목마른 심령들이 웅덩이에 고인 물 같은 이 세상의 물질이나 권력이나 육신의 향락으로 심령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보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실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돈에 목이 말라 하던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도 여전히 목이 말라 합니다. 지식에 목말라 하던 사람이 지식을 얻었으나 만족이 없습니다. 권력에 목말라 하던 사람이 권력을 누리게 되었으나 목은 여전히 타고 있습니다.
저 괴에테나 나폴레옹이나 진시황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얻고 싶어하던 것을 다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영광을 말할 때 솔로몬을 곱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진정을 드러낸 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 55:1~2)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가고 있는 인생이 저 멀리 바라보이는 신기루와 호수인 줄로만 알고 달려가도 좇아가도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지쳐서 쓰러지고 마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참 해갈을 주지 못하는 다시 말해서 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는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영혼의 갈함을 해갈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종래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므로 영혼의 해갈을 얻은 심령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영혼의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 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 할 뿐입니다. 우리 심령의 해갈은 세상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간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옛시인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기만 하면 이 행복, 이 만족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주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이 생수의 강가에는 여러 가지 과일이 풍성하게 열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온 심령은 말하자면 물대인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자랍니다. 아름다운 꽃이 핍니다. 복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령에 모실 때 기쁨과 만족, 평화와 영원한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더러운 죄를 범했어도 주님은 상관하지 아니하십니다. 목이 마른 사람은 누구나 오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초청에는 어떤 종류의 기갈이라도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에 목이 마르십니까? 기쁨에 목이 마르십니까? 평화에 목이 마르십니까? 무엇에든지 목이 마르시면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혹 우리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글세, 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데, 나는 목이 마르지 않은데" 여러분,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심각합니다. 목이 마르면서도 목마른 것을 느끼지 못하면 큰 일입니다. 목이 마른 것을 느껴야 물을 찾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위궤양으로 고생했는데 며칠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했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병이 나서 못 느낀 것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안 여인은 목이 말라서 대낮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여 물을 길러 나왔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그녀의 생애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남자를 다섯이나 바꿀 정도로 세상육신의 향락을 추구하는 성적인 여자였습니다. 돈 많은 남자도, 권력 있는 남자도, 학식 많은 남자도, 잘생긴 남자도, 재간 많은 남자도 그녀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꿔 버렸습니다. 지금 사는 남자도 자기 나자가 아닌 남의 남자와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에게 받은 반지, 저 남자에게서 받은 목거리, 또 다른 남자에게서 받은 팔지, 귀거리 낄 수 있는 것은 다 끼고 걸 수 있는 것은 다 걸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이 계속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이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만났습니다. 배에서 생수가 솟는 감격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는 수가 동네에 들어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소리치며 기뻐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는 목마른 영혼이 해갈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키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인종의 차별이 없습니다. 유무식의 상관이 없습니다. 빈부를 가리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셨을 때 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삭개오란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디메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신분상으로나 환경과 조건이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실 때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부자와 거지로 보신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가련한 인간들을 보셨습니다. 속 사람을 보셨습니다. 저들이 목이 말라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들에게 해갈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목이 마르십니까? "내게로 와서 마시라."
주님께 와서 마시기만 하면 됩니다. 돈없이, 값없이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 내가 목이 마릅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고백하면서 주님께 나아오면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내어 쫓지 아니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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