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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와 개혁주의

by 【고동엽】 2021. 12. 12.

복음주의와 개혁주의 09.12.12. 박영선 목사님

수련회 강의안 녹취

 

이 강의 녹취록은

‘복음주의’를 무시하고, ‘개혁주의’를 앞세우자.. 라기 보다는

둘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현실은

‘복음주의’만 너무 강조되고, ‘개혁주의’가 거의 없어져 버렸다고 주장하면서,

둘의 건강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강의안으로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인터넷(남포교회 홈페이지)에서 직접 들어보세요.

아래 내용은, 당장 현실에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멀리 미래를 내다보며, 내 신앙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는 필요한 부분입니다.

 

※제/편집자가 보기에는,

'조나단 에드워즈 식 극단적 회심론'과 '개혁주의 신앙은'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서로 멀리 떨어진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거리를 점점 좁혀가야 하는 앞으로의 과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읽으실 때, 좌측 칼럼과 우측 칼럼(기둥)을 서로 비교해서 읽으세요.

 

신령(은혜)주의/복음주의 포함 개혁주의
복음주의란..
‘인간의 열심’을 모토로 삼으며
신앙의 주체가 ‘행위자’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이 입장을 강하게 취하고 있다.
개혁주의란..
‘하나님 주권’을 모토로 삼으며,
신앙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칼빈주의 신앙인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이 입장을
아주 약하게 취하고 있다.
▲서론:
신앙의
주체가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복음주의란, 지금 한국교회가 대부분
채택하고 있는 신앙의 색깔인데,
회심, 중생, 십자가, 구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 운동이다.


이것은 (‘~주의’가 뜻하는 것처럼)
어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명칭은 ‘~주의 ism’이지만,
실제로는 ‘운동 movement’에 더 가깝다.


'운동'이란 말은, 행동이나 액션이
많다는 말이다. '주의~ism'와 반대말


그러나 이 운동은, 점차 하나의
‘~주의 ism’가 되어가고 있다.
고착되고 있다.
복음주의가 어떤 ‘운동’임에 비해서
개혁주의는 어떤 ‘신학, 사상’에 가깝다.


행동이나 액션이 없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자는
‘운동’(행동)이고




후자는
‘사상’적


성향이
강하다.
복음주의가 회심, 중생을 강조하다 보니
신도 숫자가 증가하는 (부흥과 같은)
결과가 종종 나타난다.
교회사에서 그런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런 숫자 증가의 결과로 인해
복음주의가 더 탄력을 받고, 자신감을 얻고 있다.
반대로 개혁주의는
(운동movement이 없다 보니)
숫자가 증가하지 않고 있다.


화란, 한국 등에서
점점 쇠퇴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숫적 증가와
쇠퇴
그 와중에 생긴 복음주의의 부작용은,
복음주의가 단지 방법론으로 전락해서
‘이렇게 해봐, 그럼 교회가 부흥할거야’
이런 식으로,
복음주의가 원래 가졌던 의미와 다르게
하나의 어떤 수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것이, 저 같은 사람에게는,
‘기독교의 내용이 너무 가벼워졌다’
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기독교가..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다 담아내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도 간단하게
‘회심-중생-구원’으로 끝내버리는
어떤 극단적 행태를 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부작용은
기독교 신앙을 너무 철학적으로
접근하다보니
신앙의 역동성 점점 잃어버렸다.




(개혁주의가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흐를 수도 있다.
개혁주의, 자유주의 둘 다
이성을 강조하는 동질성이 있기 때문이다.)
▲1.성장하는
복음주의,


그 부작용이
염려된다.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어떤 큰 두 흐름으로 양분한다면,
신령(감정)주의와 이성주의다.


신령주의는.. 신학의 메마름과 공허함에 반기를 든 신앙운동이다.
즉, 신앙의 역동성vitality에 중점 둔다.




17C 독일의 경건주의,
(진센돌프, 할레대학, 필립 스패너 등)


17C~20C의 청교도주의, 복음주의


20C에 일어난 오순절운동이
이에 속한다.




한 마디로, 예수를 한 번 뜨겁게/제대로 믿어보자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신령주의에 포함된다.)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는
신령주의와 반대로
<신앙의 주체를 하나님께 둔다.
사람의 느낌/감정에 두지 않는다.>


신령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신앙의 역동성을 가지려면, 나에게 어떤 동기부여를 가져야 한다.


내 마음에 뜨거운 확신이 오던가,
아니면 외부적인 어떤 동인(체험, 신비 같은 행동의 원인)이 주어져서
‘내 역동성의 모터가 돌아가야
될 것 아니냐?’ 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제가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주체가, 나에게 있기 이전에,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뜨거운 체험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
께서 뭔가 역사해 주셔야 된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나타난
두 흐름








▲2.
신령주의만
강조되면
신앙이
균형을 잃고
왜곡될 수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 movement는
신령주의에 속하고,
그것은 회심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구원사역을 중심에 놓는다면,
(나무를 바라보기)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는
운동이 아니고, 사상과 이데올로기다. 신학이다. (숲을 바라보기)

숲과
나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복음주의, 청교도주의
이런 흐름들이 주류를 이루면서
체험과 확신을 강조하는 가운데,
‘신앙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자꾸 잊어버린다는데 있다.


‘신앙의 주체’를 자꾸 사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내가 신령주의의 강조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만약 그것이 ‘신앙의 주체자가 사람’이 된 경우라면,
여러 가지로 신앙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설교자가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이유
일례로, 하나님의 예정(개혁주의)과, 인간의 책임(신령주의 강조)을 놓고 볼 때,
그 둘 사이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우리가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신령주의),
뒤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주셨다(개혁주의)...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올바른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와 ‘인간의 반응’이 둘 다 100%씩 역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혁주의’와 ‘신령주의’가 둘 다 역사해야 한다고 본다.

▲3.둘 사이
조화/ 균형이
필요하다.

아무리 기독교가 좋고, 진리라도
‘내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내가 공감을 해야 된다’
이런 ‘인간의 느낌, 인식’을 강조한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이 구절은 창~계시록 성경전체의 가장 연속적으로 나오는 성경 주제구절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신실하심,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셔서
당신을 알리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믿게 되었다.

성경을
전반적으로
보면,
하나님의주권 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적
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해서 믿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려 한다.
그 하나님의 작정, 의지, 신실하심에
내가 붙잡혀 들어와서, 믿게 되었다.
말장난
같지만
둘은
작게 보면 작고,
크게 보면
서로 큰 차이
자신의 이해, 자신의 논리, 자신의 선택
을 강조하므로
책임있는 신앙생활을 하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단점은, 자신의 신앙이
자기 상황/기분/감정에 따라 춤을 춘다.


신앙의 근거/주체가 자기이기 때문에
근거가 매우 불안정하다.


내가 기분이 좋을 때는
하나님도 내 편인 것 같은데


다음 날, 내가 기분이 무너질 때는
하나님도 내 편이 아닌 것 같다.

신앙이 하나님께 근거하고 있기때문에
내 기분, 내 환경, 내 느낌에 따라
내 신앙이 춤추지 않는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할 때나
내가 신앙생활에 비틀거릴 때나
내 신앙의 근거가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내 자격/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따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잘/잘못에 따라서
내 구원이 왔다/갔다 하지 않는다.
▲4.내신앙이
춤출수도 있고,


반대로
견고할 수도
있다.

신령주의보다 개혁주의가 안전장치가 더 확실하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구원론)를 믿는 것이다.
큰 그림으로 숲을 보면, 내 구원이, 내 행위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나처럼 (행위가 예쁜 사람만 잘 봐 주는)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면 안 된다.
위 단락의
중간 설명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다’는 당연하고,
‘하나님은 과연 믿을 만 한가?’


당연히 하나님은 믿을 만 해야 한다.


그런데 신령주의는 이게 약하다.


신앙의 주체를 자기에게 두다 보니,
내가 뜨거울 때는
‘하나님이 믿을 만 하지만’


내가 식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내 기분에 따라
하나님도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할 때 그러기 쉽다.
개혁주의는
신앙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다 보니
하나님은 ‘항상 믿을 만 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성경의 주제구절도
창세기~계시록까지 일관적으로 흐른다.
‘하나님은 항상 믿을만 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위 잘/잘못에 따라
하나님이 반응하시지만
크게 반응하시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구원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신다.
▲5.
개혁주의의
강점
성경은, 성도의 세세한 삶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내 아기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에 구체적인 답이 없다.
내가 감기에 걸렸을 때.. ‘구구단을 거꾸로 외우라’ 이런 식의 답이 없다.




대신에 성경에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다. 믿을 만한 분, 아버지다.’
이런 (비판적으로 추상적인) 얘기만 계속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계시록에.


그런데 신령주의가 ‘삶의 적용’을 무리할 정도로 강조하는 가운데 (나무는 보는데)
성경 전체가 말하는 ‘신학/원리’는 무시하고 있다. (숲을 못 보고 있다.)


성경 전체는.. 삶의 세세한 문제에 답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신령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나/설교자는 우려한다.
‘기독교가 점점 더 가벼워지는 (좋은 말로는 현실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위 단락
중간 설명
신앙의 초창기에는, 거의 다 예외 없이
신령주의로 빠지게 되어 있다.
자기가 예수를 믿기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점점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어떤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구원의 확신’도 처음엔 단순하게 확신했는데,
믿음이 성숙할수록 도리어 아리송해진다


20~30년 전에 한국에서 수련회만 했다 하면, ‘구원의 확신’이 그 주제였다.
그래서 엉엉 한 바탕 울고, 그 은혜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만 ‘합격’되었고,
전혀 그런 울음이 없는 사람은, 따로 모아서 특별지도를 받았다. 울 때 까지!


그러나 저는 ‘이성에 근거한 믿음으로 구원 받음’을 확신했기 때문에...
수련회에서 학생들이 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도 무조건 우는 것은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을 자극해서 울도록 하는 것은.. (부작용으로) 면역력만 커질 수도 있다.


하나님이 얍복강 체험을 주셔서 우는 것은 괜찮으나,
구원과 은혜받음의 근거가 ‘나의 감정/울음’에 있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도, 불 끄고, 올갠 치고.., 이런 것은 질색이다.
하나님이 감동시키셔서 울리시는 것을 제외하고는.. 인위적 분위기 조성은 싫다.


(그러나 저와 다른 방식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일날 1부예배는 뜨거운 교회 가서 뜨겁게 손들고 찬양하고 울다가
3부에는 저처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설교를 듣는.. 그것을 좋아한다.
한 설교자가 뜨겁게도/이성적으로도... 2가지를 다 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수련회
에피소드
빌리 그레함, 요한 웨슬리가
이 신령주의의 대표자라고 본다.
‘(완전한) 성화의 삶’을 강조한다.
완전한 성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개혁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완전) 성화’보다는, 날마다
‘늘 성찰/개혁하는 삶’이다.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성도가 성화를 추구하는데,
어느 시점에 가서 한계에 부딪힌다.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는 것이다.


이때, 구원은 내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음을 믿고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주1)
▲6.
성화에 관한
관점의 차이

숲속의 나무를 보는 것이며
집으로 보면 ‘가구’에 해당한다.
작은 틀이다.




신앙적인 , 헌신.. 이런 것이 강조된다

숲을 보는 것이며
집으로 보면 ‘지붕’에 해당한다.
큰 틀이다.
지붕 없이 인테리어 아무리 잘 해 놔도
비가 오면 다 젖는다. 큰 틀이 필요하다.


개혁주의의 창시자인 칼빈 선생도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였다기 보다는
신학의 큰 틀(지붕)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개혁/칼빈주의가 태생적으로
‘신앙생활/현실 적용’에 약할 수 있다.
칼빈주의는 큰 틀/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장로교 개혁주의로
출발했다가, 점점 복음주의로
자연스럽게 바뀌어져 가고 있다)
숲과 나무,






지붕과 가구
의 비유
다시 말씀 드리거나와
신앙생활 하는 과정 중에서
내 신앙이 무너질 때가 있고,
내 신앙이 흔들릴 때가 생긴다.


신앙의 근거가
자기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신앙이 ‘모래위의 집’이 될 수도 있다.
이때 개혁주의(=칼빈주의)는
신앙의 근거,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예정과 신실하심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흔들림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신앙이 ‘반석위의 집’이 될 수 있다.
모래위의 집
반석위의 집
비유
사회 전반적인 문제보다
자기 개인적인 신앙을 더 강조한다.


타락한 세상과
성도가 구별됨을 강조한다.
창조 영역(정치, 사회, 문화, 예술)의
전반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창조영역으로 보고,
성도가 뛰어들어가야할 영역으로 본다.




타락한 세상에 성도가 뛰어 들어가
회복시켜야 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등이 특히 강조)
▲7. 세상을
대하는 관점
의 차이
오늘날 다원주의/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각 개인의 가치와 판단이 신격화되고 있다.
이런 시류 풍조와
‘개인적 신앙의 가치’를 강조하는 신령주의가
합작되어, 부정적인 방향으로
더 활발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공주의, 번영신학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신앙에 개인이 출발/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신령주의는
오늘날 유행하는 시대사조인 다원주의와
근거가 개인주의로 서로 같기 때문에
기독교가 쉽게 변질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중심신학’인
‘개혁주의’를 버리게 될 때
기독교는 이상하게 점점 변할 것이다.


▲8.
신령주의가




다원주의와
손잡기 쉽다.



 

 

주1)

과거에 어떤 남자 성도님들이 그룹성경공부를 하면서, 열심히 주님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A에게 신유의 은사가 생겼다. 그가 기도하면 신기하게 환자들이 나았다.

그러자 (자기가 믿음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던) B는, 자기도 열심히 은사를 구했으나, 받지 못했다.

그러자 ‘A가 귀신에 들려서, 병을 고칠 수도 있다’고 동료를 공격했다.

 

그러자 A는 ‘제가 받은 은사가, 하나님의 역사인지/사탄의 역사인지 가르쳐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2년이 지나도 응답을 받지 못했고, A는 몸이 바짝 바짝 여위어 갔다.

 

그러던 A가, 하루는 말씀으로 확인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다.’ 욘2:4

 

결국 자기 신앙의 근거가, 자기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2년을 방황하던 갈등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자기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 기독교 사상

자기의 모습, 자신의 어떠함 보다는..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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