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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

by 【고동엽】 2021. 12. 12.

성도는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 행28:1~10 설교녹취

 

현세적이 아니라, 내세 지향적인 삶을 산다는 뜻이고요,

성도의 삶은, 이 세상의 현세적 가치관과, 결코 같이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을 보여주는 사도바울

 

본문의 바울은, 로마로 호송되는 여행을 떠나는 입장에서, 남에게 주목 받는 위치에 있지 않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바울은 가장 절망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건은 이상하게 진전되어서, 이 사건 속에서 주인공은 바울이 되고,

모든 사람의 안위가 바울의 손에 놓여진다.

 

더구나 멜리데 섬에서 바울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부족장의 융숭한 대접도 받게 되고,

배에 탄 모두의 목숨도, 바울 덕분에 살아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신자의 삶>을 그대로 상징적으로 그려놓은 그림과 같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살 때,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

하는 문제를.. 본문이 잘 보여준다.

 

이걸 한 마디로 할 때 ‘신자의 삶은 종말론적이다’ 라고 그런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큰 대접과 환영을 못 받지만,

그래도 천국을 소망하면서, 꿋꿋이 고난을 통과하는 삶이며,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는 자이다.

 

▲세상은 주님과, 그 제자들을 대적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이 세상이 주님을 반대한다는 것을, 극명하게 잘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다.

 

사도바울의 생애도, 그것을 잘 증명한다.

 

그는 죄수로 끌려갔고, 이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편, 불행한 일을 같이 겪는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복음을 증거 하는 기회로 가졌다.

 

몇 년간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 나중 형편이 더 나아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핍박을 계속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전혀 방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끊임없이 그를 방해하고 반대했다.

그 방해와 반대로 인한 불편과 고난은.. 그가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일은, 주의 일대로 진척되어져 나갔다.

 

이것이 <신자의 종말론적인 삶의 모습>이다.

 

 

◑성도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게 된다.

 

▲고전1:26~29에 의하면, 성도의 정체성인

<성도의 종말론적 삶>을 잘 보여준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세상에는, 이 세상의 원리, 이 세상의 목표, 이 세상의 가치가 있다.

이 세상의 목표란.. (이 세상뿐이니까, 내세가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잘 살고, 높아지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다.

 

그럼 왜 하나님은, 택하신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지혜 없고, 미련하고, 가난하고, 뒤떨어지게> 하시고,

그런 성도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버리라는 것이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라는 것이다.)

세상에 탐닉되어, 세상을 흠모하고, 세상에 빠져 들어가지 말고, (이것은 가질수록 그렇게 되기 쉽다.)

세상에 있되,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며, 저 천국을 소망하라고..

성도를 세상에서 점점 정을 떼게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시작된 종말>을 산다.

‘시작된 종말’이란,

성도의 현재 생활에서, 이미 다가올 종말을 대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아직 진짜 종말은 이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오늘 현재부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성도가 미래 종말의 준비를.. 오늘부터 매일매일 준비하는 이유는,

세상의 가치와, 천국(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180도로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이 세상적 가치로는 가장 무관심한 대상이거나,

상반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문벌 좋은 자나, 지혜 있는 자나, 귀한 자가 없다.

멸시 받는 자들과, 천한 자들과, 없는 자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다 함으로써,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원리와 목표로 무장하거나, 달려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이미 저 세상(천국)에 의해서 침노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작된 종말> 이라 그런다.

 

 

◑종말적 신앙이 부족할 때, 생기는 오해

 

▲신앙생활 가운데, 자꾸 불평하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

그 복을 '세상의 복'으로 오해해서 생기는 기복신앙적인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내가 예수를 믿으니까, ‘내일 입사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든가,

‘예수 잘 믿고 헌금 잘 낼 테니까, 우리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든가’ 하는

기복신앙적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노골적인 기복신앙이 아니더라도

신자는 하나님께 자꾸 불평하게 된다.

 

우리가 가장 많이 비명을 지르는 표현이

‘예수를 믿었는데, 뭐 이래’

하는 식의 반발이 제일 많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지금 힘 좀 써 주시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서 힘 써 주시면 뭐해요?’

이런 반발이 우리에게 제일 강하다.

 

이런 식의 사상은 전부 다

종말적인 신앙관의 무지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적인 신앙생활 (그것이 성경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을

하기 때문이다.

 

▲‘종말론적인 삶’의 오해

'종말론적인 삶'이란 말은, 오늘날 가장 많이 오해되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신자의 삶이 종말론적이라 하면,

우리는 쉽게 염세적, 또는 현실도피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오해이다.

 

즉, 내세에 일어날 약속만을 바라고, 현실에서 숨어살거나,

적극적인 삶의 책임을 다 완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현실도피적>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랑평강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그것은 물질의 <세상 나라>와 구분해야 한다.

 

▲‘제가 어떤들 무슨 상관입니까? 제발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하는 신자들

언제 내버려두라 하는가 하면, 내가 내 속에 있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이다.

 

사춘기 자녀들이 ‘부모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이 있는데, 부모가 자꾸 말리니까 그렇다.

‘어떻게 하면 학교를 안 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오락실에서 하루 종일 보내며, 장차 오락실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럴 때마다 부모가 간섭을 하니까,

‘부모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어른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 하나님이 자꾸 싫어하시고 말리시니까

‘하나님, 저를 좀 내버려 두세요. 이 세상에서는 좀 내버려 두셨다가,

나중에 늙어서 천국 갈 때가 되면, 그때는 저를 아는 체 좀 해 주세요..’

 

여러분, 그렇지 않다.

이런 갈등들이 자꾸 생기고, 그것이 10~30년 계속 지속되는 것은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말론적(내세적)’으로 하지 않고

‘현세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현세적 가치로 보니까.. 자기가 너무 불쌍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세상에서 한 번 때깔(빛)나게 살아보려고.. 자꾸 하나님과 충돌한다.

 

▲종말론적 삶의 유익

우리의 삶은 어느 곳에서도,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믿는 신앙 때문에, 내 현재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

 

그때 성도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나는 뭐냐? 나는 기껏 세상에서 이용만 당하고,

이 세상에서 고생 직싸게 하고, 그러다 끝내는 것인가?’

 

아뇨!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쁨인지!

 

이 우리가 마침내 가야할 나라, 영원한 소망으로 갖고 있는 나라가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종말론'에 대한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신자가 이 세상을 모든 환란, 고통, 위협, 절망을 이겨내는 유일한 답이다.

 

왜 그런가?

롬6:3~14를 각자 찾아보시라. 그 내용을 요약하면,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보람과, 신앙을 지켜서 얻는 유익은

의를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원한 나라에서 상급을 받을 것이요,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을 쌓는다는

그런 보장이 있는 것 이외에도)

 

사람이 드디어 죄에게 종노릇하여 살던 자리로부터 돌아서서

의와 거룩을 위하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되었다.

 

신앙이란..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의와 거룩을 위하여, 진리와 생명을 위하여

그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의와 거룩을 준 적이 없다.

진리와 생명에 대한 어떤 근거도 제공한 적이 없다.

(잘 하면 물질과 힘을 줄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그것을 얻으려고 하자, 세상은 이를 악물고 우리를 방해한다.

성도의 의와 거룩을 방해한다. 진리와 생명을 방해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귀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려 한다.

그래서 성도를.. 천하게 만들고, 죄를 지음으로.. 마귀에게 경멸을 당하게 한다.

 

어느 것이 진짜 강한 것인가?

돈을 가진 것이 교회에서도 힘이 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온유한 자가 강한 것이다.

의와 거룩을 가진 자가.. 강한 자이다.

 

‘종말론적인 삶’은 바울에게만 따로 준 것이 아니다.

모든 성도에게 똑같이 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 길을 가야하는 것이다.

 

 

◑세상이 성도를 대적하는 이유

 

요16장에 예수님이 친히 이 말씀을 주셨다.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결국 종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면 예수님 초림부터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세우실 나라,

그 나라에 불러내실 신자들이 소망해야 하는 모든 것들과

이 세상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충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인 곳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인 자들이기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우리가 놓쳐서 안 된다.

 

신자된 가장 큰 증거가 뭔가 하면

성경은 핍박을 그 증거로 든다.

 

‘내 이름을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할 때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 이니라.

너희 전에 있었던 선지자들도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대접했느니라.’

 

왜 그렇다고?

삶의 원리와 목표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대접 받지 않는다.

그리고 성도도, 이 세상의 가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사단이 예수님께 건 시험 중에 마지막 시험은

‘내게 절하면 이 세상 만물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은 거절 하셨다.’

 

주님께서 이루시려는 구속사역은, 이 세상 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동업을 제의했는데, 주님께서 거절하셔서, 세상은 더더욱 적대적이 되었다.

세상의 가치, 세상의 높은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정죄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확장하시는 일에,

이 세상의 가치 없는 자들을 즐겨 쓰신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치 없게 태어나게 하신다.

 

내가 가난해서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시기 위하여, 여러분이 영원을 준비하고, 소유하고,

그것을 증명케 하기 위하여,

세상의 것을 추구하거나 세상의 것으로 무엇을 만든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굳이 못살게 만들었다고 할 때, 여러분 만족하시겠는가?

 

그 꼴을 당하는 것이 사도바울의 삶이었다.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만 이런 사실을 동의하시겠는가?

아니다. 모든 성도가 동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잘 되기는 그른 것이다.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고 예수를 믿으시라.

‘그래도 나는 세상에서 제법 괜찮은데요..’ 이런 사람은,

더 잘 될 수 있었는데, 그것 밖에 안 된 것이다.

 

세상에서 아주 안 되시는 분이 계신가? .. 잘 된 것이다.

여러분, 지금 잘 사시다가, 나중에 ‘뜨뜻한’ 곳에 가시겠는가?

 

물론 여러분의 소원은 여기서도 잘 살고, 천국 가서도 잘 사는 것인데

죄송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왜 그렇게 하신다고요?

우리의 삶은 우리 개인의 욕심을 채우고, 증명하기 위하여 있지 않다.

오직 내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도록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구원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하여 이지.. 내 개인적 복을 위하여가 아니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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