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에서 여기의 삶으로
잠 22:29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한때 사람이 통통하게 살찐 것을 선호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지닌 여성에게는 복스럽다, 맏며느리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는 사장 같다, 장군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량아 대화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시대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오늘은 무조건 날씬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오늘은 살과 전쟁을 벌이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무조건 날씬 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내면을 가꾸는 일에 등한합니다.
그런데 살이 많이 찐 상태도 좋지 않지만 너무 날씬한 것도 좋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적당하게 몸의 균형이 이룬 상태입니다. 적당함, 얼마나 좋은 모습입니까. 이 같은 이치는 모든 면에 적용됩니다. 이 같은 이치는 신앙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도 너무 뜨거운 것도 좋지 않고 너무 차가운 것도 좋지 않습니다. 신앙도 극단으로 치우치는 신앙형태는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도 두 극단의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으로 치우친 상태” 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이 극성일 때 여러분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신앙이 종말론으로 치우치게 되니까 사람들이 현실의 삶을 무시하고 모두 재림을 준비한다고 직장도, 일도, 가정도, 학교도 버리고 한곳에 모여 집단 생활하던 그 모습이 생각날 것입니다. 신앙이 한편으로 너무 치우친 결과입니다. 신앙도 이렇게 한편으로 치우치면 불건전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지난 130여 년 동안의 신앙을 되돌아보면 영적으로, 종말론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대체적으로 종말, 심판, 천국, 계시, 은사에 대해서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꾼 꿈에도 의미를 붙이려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에도 무리하게 영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그 신앙에는 중심이나 신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이 대체적으로 실제적이지 못하고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뜨겁게 하고 철야도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현실생활에서 그 신앙이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삶에 어떤 어려움이 주어지게 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임종 때가 되면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동안 천국 천국 하던 그 기도와 찬송은 허구였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구체적이지 못한 채 종말, 심판, 천국을 말하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참 좋았습니다. 그 할머니는 언제나 입에서 “감사합니다“하는 말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젠가 수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저녁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자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동네 한가운데 어느 집에 불이 났습니다. 보니까 불난 집은 자기 집이었습니다. 지금 자기 집이 불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야 합니까. 당연히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새집을 주시려고 헌집을 태우시는군요, 주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불타고 있는 집이 자기 집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그 할머니는 땅에 힘없이 주저앉으며 “나무아미타불” 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형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아이 내용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열렬한 신앙에 비해서 그 신앙의 중심이나 뜻이나 내용이 현실의 삶에 그대로 미치질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처녀가 시집을 갑니다. 직장을 다녀서 돈을 많이 모은 이 처녀는 혼수를 많이 준비해서 두 트럭에 실어 시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 혼수가 그대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시어머니의 여우목도리가 혼수에서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새로 구입해서 보냈는데 그제야 비로소 시댁에서 혼수가 접수되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흔치않은 사건을 일으킨 시어머니가 누구냐 하면 서울의 유명한 장로교회 권사입니다. 그 시어머니도 분명 종말, 심판, 천국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가며 기도하고 믿고 신앙 생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서 권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이익이나 물질 앞에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뛰어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란에 불어 닥친 지진으로 밤시가 10만 명의 인구 가운데 4만 3천명이 죽었습니다. 흙벽돌로 지은 집은 예외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런데 철근이 조금만 들어간 집은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뼈대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교회의 최대의 약점은 감정도 풍부하고 열심도 있고 부지런함도 차고 넘치는데 문제는 중심이나 의지적인 부분이 아주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일년 내내 계시록만을 가지고 심판과 종말과 천국과 계시만 설교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신앙인은 만사를 제처 두고 매일 교회에서 일한다고 왔다 갔다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계시 받았다고 직장을 버리고 신학교 간다고 나서는 사람도 있습니다. 매일 밤 기도한다고 짐 싸들고 교회로 산으로 돌아다니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두 건전하지 못한 신앙모습입니다. 그 신앙이 종말론적으로, 신비적으로, 영적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치우치게 되면 그 현실 삶을 부정하게 됩니다. 신앙이 건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치우치게 되면 그 신앙에 건강성을 잃게 되고 신앙이 현실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한편으로 치우친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지식적으로 치우친 신앙” 형태도 있습니다.
이것도 치우친 신앙입니다. 오늘은 신앙이 너무 지나치게 이성주의로, 지식신앙 쪽으로 기울어 가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한편으로 신앙이 기울게 되면 영적인 부분이 또 약화되게 됩니다. 신앙이 너무 현실에 치우치게 되면 미래가 보이질 않습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영적인 해석이 나오질 않습니다. 모두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고 타산적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이 현실적인 신앙은 오히려 종말론적인 신앙보다도 못합니다.
그 신앙은 마치 물 없는 샘과 같습니다. 샘은 홍수 때나 가뭄 때나 한결같이 물을 유지해야 그것이 샘이고 생수입니다. 그런데 홍수가 왔을 때 물이 넘치는 샘은 샘이 아닙니다. 그 물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또 조금 가물었다고 해서 물이 말라버리는 샘도 샘이 아닙니다. 샘은 언제나 한결같은 물을 유지해 주어야 그것이 생수를 공급하는 샘입니다. 오늘 현대인의 신앙인들이 대부분 여기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보면 신앙년조는 있는데 그 신앙내용이 뼈대만 있을 뿐 내용이 없습니다. 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고 눈물이 없고 소망이 약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아주 빈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는 기도로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하면 더 피곤하고 힘들고 신앙이 무력화되고 겁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상도 좌우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극좌도 극우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이 극단의 사상 때문에 50년 동안 분단을 이루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또 음식도 뭐가 좋다하면 야단법석을 떠는 것도 좋아보이질 않습니다. 이것은 안 좋다 하면 그 순간으로 뚝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다하면 물론 또 극성을 떱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경박하니까.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친구는 좋은 친구고 저 친구는 나뿐 친구다 하고 갈라놓으면 파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파벌이 조성되고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영적으로 치우치는 신앙, 매사를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생각하고 기준 삼는 신앙생활, 얼마나 불건전한 주관에 빠진 신앙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재적인 삶을 무시하게 됩니다. 현재적인 삶을 무시하고 영적으로만 살아가려고 하는 신앙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게 강조하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현실적인 것을 버리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현실적인 삶을 부정하라”고 윽박지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다 된다고 믿고 행동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 신앙은 감나무 아래에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신앙입니다. 익은 감은 누워있으면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감을 익게 하셨지만 따 먹는 것은 내가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 직장을 달라고 기도하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적당한 사람들과 만나게 하십니다. 그것이 응답입니다. 내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냥 있으면 안 된다 그말입니다. 기도한 후에는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신앙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치우치면 좋지 않습니다. 매사를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기준삼고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러면 무엇 하러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까. 신앙은 이렇게 치우치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건강한 신앙은 “조화를 이룬 신앙”입니다.
적당하게 균형을 이룬 몸은 보기도 좋을 뿐 아니라 건강미가 있고 조화가 이루어 있고 힘이 있습니다. 균형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지극히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이 이렇게 균형을 이루려면 다음 세 가지에 유념해야 합니다.
하나는 “지난날을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소위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어떤 역사냐 하면 지난날의 그 아프고 고난스럽고 어려웠던 날들을 잊지 않는 신앙입니다. 지난날 어려웠을 때를 기억해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역사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난날을 잊지 말라고 아주 강조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감동을 주신 흔적을 알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미래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입니다. 미래가 없는 신앙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신앙은 지극히 미래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소망과 기대와 뜻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그날을 위해서 오늘 수고하고 힘쓰는 생활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미래는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미래가 없는 사람은 오늘 수고하고 저축하고 인내할 이유가 없듯이 미래가 없는 사람은 오늘 공부하고 수고하고 저축을 하지 않습니다. 위를 보는 사람만이 하늘이 보이듯이 미래가 없는 사람에게는 오늘 수고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리스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andropos)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위를 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만이 위를 보는 존재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과거도 소중하고 미래도 소중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오늘을 소중히 여기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기 일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개역판에는 “자기 일에 근실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근실”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마히르” “최선을 다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현재의 삶에 충실한 모습입니다. 그 삶에 향기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그런 규모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우리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천국만 생각하며 오늘 현재적인 천국은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천국은 현재 여기에서 주어진 천국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천국을 무시하고 내일에 주어질 천국만을 생각하며 산다면 그 삶은 잘못된 신앙인의 삶입니다. 대학에 가려면 학교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대학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학교생활을 그만두고 오직 대학에만 가려고 한다면 현재의 삶을 무시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믿음의 삶은 요한 웨슬레가 잘 정의해 주었습니다. 웨슬레는 오늘은 천년 살 것 같은 계획과 기대를 가지고 살고 종말론적으로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심정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삶이 얼마나 엄숙할 것입니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 삶에 감동이 있고 향기가 있고 절제와 규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사회에 비취어진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모습은 오늘 세상에 공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는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하고 주일생활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충성스럽게 신앙생활을 다 했는데 실제로 가정과 사회와 동네와 직장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렇게 공감을 주고 건전하고 어떤 메시지를 주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그 신앙이 구체적이질 못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사회인들이 보는 기독교인상은 항상 뒤에서 말 많은 모습, 말은 많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모습, 불평이 많은 모습, 짐 싸들고 기도원에 자주 가는 모습, 믿음생활 한다고 하면서 더 불안해하고 겁이 많고 쩨쩨하고 약속 안 지키고 자기 몫 챙기는 데는 약삭빠른데 남을 배려하는 데는 아주 서툰 모습,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모두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빛 되고 앞서 간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실제적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은 많이 읽었는데 그 성경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적용이 안 되고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했는데 그 기도가 복과 형통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말은 참 잘하는데 그 말에 철학이 없고 의식이 없고 책임감이 없습니다. 이제는 기도 많이 하는 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을 구하고 형통을 구하는 기도는 자랑할 기도가 아닙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나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을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천한 자 앞에 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왕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삶에 향기가 있고 감동이 있고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삶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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