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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값은 얼마입니까? / 고전 6:19-20

by 【고동엽】 2021. 12. 10.

당신의 값은 얼마입니까?

고전 6:19-20

 

 

전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동이 다양합니다. 미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물질문명의 찬란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살기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미국의 문명의 계속적인 발전을 보면서 편리한 인간의 생활을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면 편리한 상품들을 우리들이 소유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 유럽에 가면 옛 조상들이 건축한 예술 작품을 보면서 변하지 않는 작품, 수천년 수백년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골동품을 보면서 그 작품에 대한 소중함과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문명을 개발해가는 미국의 사회와 옛 조상들이 만들어놓은 유럽의 작품을 보면서 또 하나의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면 신기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감동입니다.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인구로 말하면 우리나라와 같습니다. 우리나라 땅덩이의 16배가 인도인데 인구가 우리나라의 16배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인도가 인구가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길거리에 나와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존현장이 포장되고 화장되지 않은채 원색적으로 공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건을 살 때도 포장해서 사고, 사람도 옷으로 포장해서 감추고, 얼굴도 하루에 몇가지씩 발라서 화장을 합니다. 그런데 인도 사람들은 화장 문화가 아닙니다. 그대로 자기를 노출시킵니다. 오른손으로 먹고 왼손으로 닦고, 몸도 아래만 가리고 위는 다 노출시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인도 사람들은 미개인이 아닌가’ 그런데 문화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손으로 먹어야 맛이 나고 왼손으로 닦아야만 위생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도 화장실에는 화장지가 없습니다. 물로 닦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치질이 없습니다. 자연이 훼손될 염려가 없습니다. 나무로 화장지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요.

자유의 나라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모두가 남에 대해서 어떻게 살든 관심이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 자유하고 거지도 자유합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얼굴이 유난히 밝습니다. 저들은 죽음에서 자유하는 백성입니다. 길거리에서 나서 살아도 슬퍼하지 않고 죽어도 슬퍼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장례식장에 가면 통곡하고 우는 사람이 많은데 인도는 화장터에서 시체가 타도 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인생은 다 때가 되면 가는 것이다’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문명을 보고 문화를 보고 자연을 봅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면 사람을 봅니다. 길거리에서 나고 길거리에서 자고 길거리에서 얻어먹는 사람들을 봅니다. 문명을 보는 미국, 문화를 보는 유럽, 사람을 보는 동양, 거기에서 무엇을 보느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 있는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인도에 가면 호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가서 거지에게 적선을 합니다. 거지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거지가 우리보다 얼굴이 더 밝습니다. 주는 사람은 찡그리고 인상쓰고 받는 사람은 얼굴이 훤합니다. 거지인데도 얼굴이 밝습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한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야 됩니다. 자기 존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전부 다 상품은 비교 가치로 ‘네 물건이 좋냐 내 물건이 좋냐 네 물건이 신형이냐 내 물건이 구형이냐’ 그런데 이러한 상품의 세계를 떠난 것이 작품입니다. 유럽은 작품을 봅니다. 상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때묻은 것일수록 좋다. 우리조상들은 이런 것을 만들었다’ 그래서 가치를 높이 인정해서 그것을 팔아먹는 것이 유럽 사람들이고 새 것을 팔아먹는 것이 미국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뭐냐, 인생이 어떤 존재냐’ 하는 질문을 계속 던져주는 것이 동양 사람들입니다.

동양권의 그런 사상은 어디에서 왔느냐? 선이라고 하는 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남이야 어떻든간에 나 자신이 깊은 명상에서 도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인도로부터 거쳐온 불교의 선입니다. 깊은 명상에서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신비를 찾아내는 의미에서 다 동양의 문화가 형성된 것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간에 나는 깊이 수도를 한다.’ 그래서 인도에 가면 아쉬람이라고 하는 명상소들이 수십개가 있어서 거기에서 끊임없이 수도하는 사람들로 이어가는 것이 그들의 문화입니다.

오늘날 불교 하면 이판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판은 수도승이 이판이고 사판은 주지승입니다. 주지승들은 밥그릇 때문에 싸웁니다. 수도승들은 안싸웁니다. 수도승들은 암자에서 도를 닦기 때문에 전혀 밥그릇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싸움을 해도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서 한면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카톨릭을 보면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고 행정하고 일하는 주임 신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양면이 있어서 카톨릭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세계를 보면서 각각 양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로 나누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 존재가 한 몸에서 두 가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가 살 때는 사판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와서는 혼자 기도하면서, 예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지’ 회개하고 변화를 체험하는 과정을 우리는 한 몸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끊임없이 상품적 존재로 자기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인물이 나보다 나은가, 입은 옷이 내 옷보다 좋은가, 자동차는 내 것보다 큰가, 직장에서 높은가 이것 때문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자기 전 존재의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분명히 우리 모든 삶의 가치는 자기 존재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19절) 그러면서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물건은 상품으로서의 값을 가지고 있고 작품은 작품으로서의 값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얼마의 값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들이 자기 존재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값을 가지고 있는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 존재를 어느 정도의 값으로 인정하고 사는지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기 자신의 값을 자기가 알아야 합니다. 남이 인정하는 것으로 값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은 상품입니다. 이것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데 남이 알지 못하는 값을 자기가 지니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비교할 수 없는 값입니다. 비교하면 값이 계속 변합니다.

그래서 물건은 나오는 시간에 따라서 값이 변합니다. 그래서 중고품은 값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값이 오르는 것이 작품입니다. 작품은 하나밖에 없는 유일성 때문입니다. 기스가 나고 깨져도 값이 올라갑니다. 이것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상품으로 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값이 비쌉니다. 그런데 늙으면 값이 떨어집니다. 이것이 상품적 비교의식입니다.

한번은 IMF가 터진 이후에 부인들이 목욕탕에 앉아서 그러더랍니다. “당신 남편은 얼마짜리야?” “시시해 한 2천만원짜리 되나봐” “그래? 시시하네. 시시한 사람과 계속 살거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야”

세상이 얼마나 각박해졌는지 자기 남편을 돈으로 환산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복부인들이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연애해서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부인보다 월급이 적다는 것 때문에 부부가 다툰 후 별거한지 7년이 되었습니다. 부인은 컴퓨터를 잘해서 월급을 많이 받고 남편은 부인보다 적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부인이 남편에게 “이것도 월급이라고 받아왔어?”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자존심이 심한 상처를 받게 되었고 그 다음부터 남편은 남편 노릇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뒤부터는 남편이 기가 죽어서 남자 구실을 못하니까 자식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 왜 그러느냐?” “어머니, 안됩니다. ”우리집은 전통적인 기독교 가문이기 때문에 이혼은 절대 안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혼도 못하고 둘이 별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혼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인격적인 남편으로 본 것이 아니고 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상품적 관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존재를 그렇게 기를 죽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지위를 보면서 나를 죽이고, 사는 집을 보면서 나를 죽이고, 다 죽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합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를 값으로 샀다.’ 그 값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값이 얼마인줄 아느냐?” 이것은 예수 값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머리에 쓰신 가시관, 상한 얼굴, 창백한 모습, 창에 찔린 허리, 그리고 손과 발에 샘물처럼 흘러내린 피의 흔적을 보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이제 이 몸은 소중한 값을 지닌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고 값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간에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나 스스로의 값을 지녀야 합니다.

작품은 스스로의 값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값을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작품이고 상품은 비교하면서 스스로 절하시킵니다. ‘아, 신형이 나왔어 그러면 내 것은 고물이지’ 그럽니다. 그런데 작품은 언제나 내 것은 영원히 새 것입니다. 또 나오는 것이 없으니까요. 옛날에도 하나니까 그때 새 것이고 낡았어도 나오지 않으니까 새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새 것으로 작품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고 영원히 하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이 뭐라고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느냐, 무엇을 가지느냐, 무엇을 입느냐, 어디에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인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아닙니다.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 값을 지녔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나를 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믿음 위에서 자기 존재의 위대한 평가와, 고백과, 신성한 자존심을 갖게 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하느냐?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몸을 함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헬라 사상은 영혼은 귀중한 것이고 육체는 악한 것이라는 이원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귀중한 것이고 육체는 더러운 것이라고 학대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체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혼 구원이기 때문에 육체는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고린도 교회 타락한 교인들 가운데서도 이 몸을 창기와 더불어 더럽히는 사람들, 음란으로 더럽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당시에 성전은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모든 금은보화로 장식한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위대한 증언을 합니다. ‘똑똑히 알아라 성전은 네 몸이 성전이다.’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 선언입니까 ‘너희 눈으로 보는 신전이 큰 것이 아니고 몸이 신전이다.’

이 말은 다른말로 말하면 여러분이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존재를 가장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돈으로 평가하거나, 인물로 평가하거나, 학력으로 평가하지 말고 자기 존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거룩한 성전인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의 값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보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영원한 가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된 내 몸을 통해서 사랑할 때만 신전이 됩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은 신전입니다. 자녀들을 사랑할 때 신전입니다. 이웃들에게 사랑을 보여줄 때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성전에 임하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하십니다. 남의 죄를 사할 때 내가 바로 신전이 됩니다. 최고의 가치있는 존재가 됩니다. 이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캘커타에 가면 테레사 수녀의 자비의 집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거기에 와서 일생을 살아 세계의 성인이 되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그를 18번째 신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는 키가 1m 50cm입니다. 세상 여자로서는 크다만 여자였습니다. 그가 인도에 가게 된 것은 19살 때 다르질릉이라는 곳에 수녀로서 중학교 선생으로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선생을 하다가 그가 29살 때 캘커타에 전근하게 됩니다. 캘커타는 거지와 불쌍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곳입니다. 그가 캘커타에 전근해 와서 캘커타에서 선생을 하는데 거지와 불쌍한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이 캘커타입니다. 거기서 그가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 가난한 사람중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 이런 모임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는 선생을 포기하고 수녀로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러한 감동을 받은 것은 그가 캘커타에서 선생을 하면서 어느날 옛날 있었던 다르질릉으로 갈 때 성령께서 감동하십니다. “테레사야, 너는 캘커타에 가면 많은 거지들과 문둥병자들이 거리에서 나서 거리에서 살다가 거리에서 죽는단다. 너는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살아서는 잠자리를 주고 죽어서는 무덤을 주어라”

이런 감동을 받고 그는 월급받는 선생을 정리하고 캘커타에 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러면서 주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오늘밤 나는 어디에서 잠을 자야 할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내일 아침 나는 어디에서 먹어야 될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나는 이 한 벌 옷이 해어지면 무슨 옷을 입을지 모르고 떠나나이다. 주께서 떠나라 하시기에 나는 떠나오니 주여, 내 생애를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는 거기에서 자기 몸을 온전히 사랑의 사람으로 헌신하면서 그의 생애를 투자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위대한 여종으로 69살에 노벨상을 받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전 세계가 그를 돕는 손길을 통해서 큰 일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도 주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도 주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면 주님을 위해 쓰십시오.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제 하나님의 신전이 된 자는 걸어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서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영광인데 하나님의 임재된 모습을 보여주는 영광이 온 땅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의 가치는 자기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번은 산에 있는 여우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철수하고 잠든 사이에 시내를 관광하자’ 하고 여우들이 새끼들을 데리고 관광을 왔습니다. 관광 와서 시장을 보는데 쇼 윈도우에 여우 가죽이 진열되어 있는데 10,000$, 20,000$, 30,000$ 하고 붙어 있습니다. 그것을 여우 새끼가 보고 “엄마, 새끼가 값이 더 비싸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죽어서 여기 들어오면 값이 비싸겠다.’ 하면서 저들이 다시 산으로 갔습니다. 여우가 잡혀서 죽어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목두리로 둘릴 때 왕궁에 가서 왕비마마가 목에 두르고 키스하는 고귀품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일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죽어야 값이 오르는구나!’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므로 자기 값을 최고로 높여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으로 값을 올리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의 값을 무엇으로 올리겠습니까 자기를 죽여서 남편을 섬길 때 최고의 값이 나갑니다. 가장 값있는 남편이 어느 때 됩니까? 자기를 죽여서 아내를 섬길 때 최고의 값이 됩니다. 여러분의 값을 어떻게 최고로 높일 수 있습니까? 공부로, 인물로, 학력으로, 돈으로 안됩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별세시켜 십자가의 정신으로 자기를 내놓을 때 자기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인격으로 올려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천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몸으로 죽어 내놓아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의 값은 상상할 수 없는 가치가 붙어서 ‘아, 저 분이 저런 값을 지니다니...’ 감탄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에 모든 값진 자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위대한 여러분의 값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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