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6:3-4
어느 시대든 사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역사를 이끌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사람을 만나야 하고 또 사람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 위대한 사도 바울같은 인물을 만나서 세계 선교 역사의 장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부름받은 사도 바울에게는 필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의 선교활동에 필요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제일 필요한 것은 선교동역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가운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동역자는 ‘어떤 일에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동역자라는 구체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서로 돕는 사람,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3-4절)
여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표현으로 우리는 어떤 개인을 위한 일꾼이 아니라 하나님을 돕는 자들이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라는 말을 여러 군데서 쓰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동역자’(롬 16:9, 몬 1:1), ‘나의 동역자’(롬 16:21, 고후 8:23, 몬 1:24)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료 사역자들의 영예를 높이고 그들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권적인 사업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동업자라고 말하고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숭고한 목적을 위해 함께 희생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소아시아 본도에서 출생한 유대인 부부입니다. 그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로마에 살았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 명령에 따라서 고린도로 거주지를 옮겨서 살다가 거기에서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장막치는 일이었는데 이들과 동일한 일을 했던 사도 바울을 만나 그가 사도인 것을 알고서 바울의 동역자로 일생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들은 텐트를 만들면서 사도 바울을 만난 후에 전도에 힘쓰게 되었는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다라 다니며 그의 사역을 도왔던 것입니다. 그 후에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었을 때 로마에 다시 돌아가서 전도활동에 힘썼는데 로마에 살던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큰 건물을 가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 집을 교회로 만들고 수많은 성도들이 모이고 대접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가는 곳마다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았습니다. 로마에서도 자기 살던 집을 교회로 내놓고 거기에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문안한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뜻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목적이 같았습니다.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생각이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이 “나는 바울에게서 배웠고, 나는 아볼로에게서 배웠다”라고 하면서 서로 분쟁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5-9)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요, 하나님의 일을 돕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우리를 길러주고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라면서는 부모님을 도와줍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를 도와주는 것은 철이 들어서 인격적으로 성숙해가는 단계입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직장에서 첫월급을 타서 “어머니, 십일조 떼고 어머니에게 드립니다.” 그러면 너무 너무 좋아서 “내가 너를 길렀더니 네가 나를 돕는구나!” 하면서 대견해 하십니다.
우리가 처음에 친구 따라 교회에 나왔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셨다’ 하면 감동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면서 합니다. 그런데 차츰 교회에 나오는 횟수로 많아지고 은혜를 받게 되면 찬송해도 눈물이 나오고 말씀을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혜를 받고 보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 도와야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바쳐야지’ 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 우리 주님께서 “네가 철들었구나 고맙다. 네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구원했으며 너를 주야로 졸지도 않고 너를 보호했는데 이제 네가 나를 생각하다니 네가 나를 기억하고 나 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니 고맙다. 네가 나의 동역자가 되었구나!”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가 고백한 음성을 들읍시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기에 “누가 내 대신 입을 열고 진리를 외칠까 누가 내 대신 손이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까 누가 내 발이 되어 복음이 필요한 자에게 갈까 누가 나처럼 희생하며 십자가에 달릴까” 하고 주님의 동역자를 찾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은 동역자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날 평화의 사도로, 살림하는 살림꾼으로 일할 사람을 찾습니다. 기독교인은 살림꾼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은 나라 살림하는 자요, 교수는 학교 살림하는 자요, 사업가는 기업을 살리는 자요, 어머니는 자녀를 살리고, 선생님은 아이들의 정신을 살리고 정치가는 국가의 안전을 살리고 평화를 살리고 인권을 살리고 자유를 살리고 모두가 살림입니다. 사탄은 죽이러 왔고 예수님은 살리러 왔기 때문에 우리는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일이나,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는 일, 모든 일에서 살림꾼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집에서 살림꾼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돕는 동역자들입니다. 청소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의 청소부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농장의 농사꾼들입니다. 식당에서 밥 짓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접하는 하나님의 집의 요리사들입니다. 학교의 선생이나, 교수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동역자들입니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는 하나님의 자녀를 기르는 동역자입니다. 이렇게 소명의식을 가지면 자기 하는 일이 숭고한 일이기 때문에 성직자의 심정으로 일하면서 보람과 행복을 얻습니다.
얼마전에 제자훈련을 받던 한 자매가 아침에 일어나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면서 인생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니까 슬픈 생각이 들고 짜증이 나더랍니다. 그런데 어느날 제자훈련을 받으면서 숙제로 내준 성경구절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을 싱크대 옆에 붙여놓고 암송하다가 은혜를 받고 ‘그렇다, 설거지도, 빨래도, 청소도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기 하는 일에 대한 자세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고 간증했습니다.
어느날 세익스피어가 식당에 들어가니까 모든 사람이 일어나 모자를 벗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식당에서 일하던 소년이 그것을 보고 밖에 나가 한숨을 쉬면서 ‘나는 언제 저런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했습니다. 마침 식당을 나가던 세익스피어가 그 얘기를 듣고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소년, 그대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네. 그대가 그릇을 닦을 때 시인이 글을 쓰듯,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작곡가가 작곡을 하듯 최선을 다하게 그러면 분명히 자네가 선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날 것이네.” 하고 말했습니다.
옛날에는 목사가 하는 일만 성직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하는 모든 일이 성직입니다. 옛날에는 목사가 서서 설교하는 강단을 성스러운 곳으로 알았습니다. 이제는 강단만이 성스러운 곳이 아니고 우리 삶의 현장이 성스러운 곳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전도자의 사역이나 교회 내부 살림을 맡아 일하는 집사 사역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합니다.
행복한 부부 동역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성경에 헌신된 사람들이 많지만 부인과 남편이 동시에 나오는 이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들인지 성경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 여섯 번이나 기록하고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삶을 함께 나눈 부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자랑스럽고 행복한 부부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부부를 생각하면 너무 너무 감동이 됩니다. 두 부부가 로마에서 추방되어 로마를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황제의 추방령에 따라서 두 부부가 떠납니다. 남자들은 추방하면서도 여자들은 원하면 로마에 남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브리스길라는 남편을 따라 고린도라는 먼 곳으로, 바다 건너 에베소로 떠나갑니다.
그때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거지가 되어 구걸해도 함께 나누어 먹는 부부로, 단 하나 하나님의 동역자 되어 갑니다.
돈 벌어 좋은 장막에서 부부가 함께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나그네 되어 되어 떠나는 두 부부야말로 행복의 신비를 담은 부부입니다. 그들에게는 금은보화도 없습니다. 집도 없습니다. 단 둘이 떠나면서 얼마나 소중한 생각이 들겠습니까
제가 교회에서 쫓겨나 6개월동안 청계산에서 기도할 때 제 아내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초라한 모습으로 산에 올라와서 저를 문안하고 점심을 먹고 내려가는데 제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제 아내와 자식을 보면서 제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주는 동역자, 하나님의 종으로 고난도 즐거움도 함께 하겠다고 쫓겨난 목사를 버리지 않고 함께 살아주는 것이 너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때 정이 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든 정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음식점에서 좋은 음식 사먹고, 백화점에서 좋은 옷 사 입고, 돈 벌어다 주는 그런 정이 아니고 하늘이 주는 정이었습니다.
행복한 부부가 되려면 세 가지 면에서 함께 해야 합니다. 육체가 함께 해야 합니다.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가는 동역자로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하시고 아담을 돕는 자로서 배우자를 만나게 했습니다.
돕는자는 곧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최고의 동역자는 부부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나그네 되어 서 있을 때는 천국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하늘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직 하늘이 준 배필입니다. 이런 부부가 될 때만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네 번 이상 이사를 다녔습니다. 본도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고린도로,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다시 로마로 갔던 것입니다. 한번 이사하는 것도 힘든데 저들은 네 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이들은 여러번 주거지를 옮기면서도 더욱 행복했으리라 확신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돕는 동역자의 심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성경에 이 부부의 이름이 여섯번 기록되었는데 그 중 네 번은 부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었고 두 번은 남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부인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은 부인이 더욱 더 헌신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한 부인의 활동을 이해하고 함께 삶을 나누었던 남편의 이해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부부는 교회에서 좋은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는 주의 종을 격려해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행 18:24-26)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당시에 이 부부가 섬기던 목사인 아볼로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 주었습니다. 훌륭한 목사가 되게 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은혜를 잘 모르는 청년 목사인 아볼로를 조용히 만나서 말씀의 교제를 나누면서 온전한 설교자가 되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주의 종의 참 좋은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배워 말씀으로 무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11절에 보면 1년 6개월동안 바울과 함께 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들 부부의 헌신은 말씀으로 훈련되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된 성도만이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섬길 수 있는 동역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동역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4절)
이 부부가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였는지 바울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아니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면서 많은 핍박과 위협을 당하였으며 생명을 잃을뻔 한 적도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번 이상 그들 부부가 목숨을 걸고 바울을 구출한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이 죽게 되었을 때 목숨 걸고 구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알려져서 모든 주변의 교회들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위대한 것도 있었겠지만 바울이 얼마나 위대했으면 이들 부부가 바울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겠습니까
바울 곁에는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정신이 사도행전 교회 성도의 의식이었습니다. 이런 동역자들이 바울 곁에 있었기에 바울의 세계 선교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1세기 교회가 그 당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울 혼자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뒤에 있었던 수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절대적인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당당하게 세계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후 313년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게 된 것은 아굴라 부부와 같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목숨을 건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정에서는 행복한 부부로서 동역자로서 사랑했고 교회에서는 주의 종과 함께 섬기는 동역자였고 세상을 향하여서는 세계 복음화의 선교 동역자로서 목숨 걸고 나아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동역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은혜로운 예배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고 준비하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설교자와 성가대만 준비하고 교인들은 관람하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함께 하는 예배로 서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소수의 목숨 건 사람만 생각하다가 자신의 부족함에 열등의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능력 마저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작은 일에서부터 교회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의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지금부터 25년 전에 이북에서 월남하신 어느 목사님의 은퇴식에 참석했는데 그 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분이 월남해서 30년동안 목회를 했는데 자기가 있기까지 이 분을 도와준 동역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6.25사변이 났을 때 이북에서 목회하다가 인민군들이 죽이려고 하니까 굴 속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권사님 한 분이 몰래 나물 캐고 쑥 뜯는 것처럼 가장해서 늘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서 넣어주고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9.28 수복이 되어 국군들이 진군할 때 이 목사님은 국군들을 따라나왔기 때문에 그 이후에 여종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생명 걸고 자신을 도와 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같은 여종을 기억하고 위해서 기도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동역자들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도 주없이는 살 수 없지만 주님도 나 없이는 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세 전부터 나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하므로 살고 죽는 것도 주님과 함께 하므로 죽어야 합니다. 함께 죽어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또 모든 일에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도 주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만 주님도 나의 도움을 받아야만 주님의 일이 되어집니다.
주님께 보답하는 일은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혼자 영광 받으시고 우리들에게 손해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영광을 받도록 하십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처럼 목숨을 내놓고 주님을 섬기는 동역자 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때때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라도 내놓고, 시간을 내놓고, 마음을 내놓아 주님의 동역자로서 살아 영광스러운 하늘에 자랑스러운 이름이 기록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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