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 (시 27:1-14)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셨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니,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엿보고 있으니,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내 목숨을 내 원수의 뜻에 내맡기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성도 여러분, 연말 연시 2개월 새벽기도회 후에 52일 24시간 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슨 기도를 이렇게 무식하게 하나?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살다 보면 “역시 기도하기를 잘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왜 더 기도하지 못했을까?” 아쉽기만 합니다. “어떻게 저런 일을 할까? 저런 사람이 있을까?” 싶으면 역시 기도가 달랐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 27편에 보면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10절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실제로 아버지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혹 벌어질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을 끝까지 돌보아 주실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치열한 전쟁 중에 있습니다. 대단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2절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3절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12절 그들이 거짓으로 증언하며, 폭력을 휘둘러서 나에게 대항해 오니
그런데도 다윗은 담대합니다.
1절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6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
다윗의 믿음, 다윗의 믿음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믿음인 것입니다.
사방에 적으로 둘러 쌓인 상황입니다. 실제 상황인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몸만 조금 아파도, 재정적으로 좀 어려워져도, 인간관계가 좀 힘들어져도 낙심하기 쉬운데, 다윗은 당당합니다.
다윗의 이 믿음이 기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시편 27편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포와 간절한 기도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1-3절, 5-6절, 13-14절은 다윗의 믿음의 고백이고 선포입니다. 4절, 7-12절은 다윗의 기도입니다(이 차이는 새번역으로 읽어야 분명히 드러납니다). 다윗은 선포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해 보면 믿음이 달라지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응답해주지 않으시는지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어서 믿음이 흔들리고 시험드는 이들도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이 다 이해가 되어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7절 내가 주님을 애타게 부를 때에, 들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응답하여 주십시오.
9절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말이 꼬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낙심했다 믿었다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윗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3절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고 계신 상황인데, 주님이 노하신 것 같은데, 주님이 자신을 물리치신 것 같은데, 주님이 자신을 버리고 외면한 것 같은 상황인데, 아버지 어머니도 자신을 버린 것 같은데,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이 이렇게 믿어진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언제나 기뻐하며 언제나 감사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까?
역시 기도가 달랐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살펴보면 다윗은 그저 간절히 열심히 안타깝게 오래 기도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에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전쟁 상황이라면 무엇을 소원할까요? 마땅히 ‘하나님 적들을 물리쳐 주세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세요.’ 라고 구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4절 “…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쟁 중인데도 다윗의 한 가지 소원은 평안, 승리,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8절 주님께서 나더러 “내게 와서 예배하여라” 하였을 때 “주님, 내가 가서 예배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으니
정말 이해가 안되고, 좀 황당해 보이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다윗이 평소에 늘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평생 주님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의 소원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다 짓고 일천번제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솔로몬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그러자 솔로몬은 즉시로 대답합니다. ‘백성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솔로몬의 이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을 뿐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부와 귀와 수도 주셨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늘 그 생각만 하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가장 원하는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말하시겠습니까? 늘 소원하는 것이 결국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늘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입니까?
우리는 지난 2개월 기도, 부자되기를 기도했습니까? 24시간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52일간 24시간 기도,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합니까?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선교완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한다고 다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만 바라보고 성공만 바라보고 축복만 바라보면 기도하면서도 계속 믿음이 무너집니다.
어느 전도사님이“목회 성공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물어왔습니다. 눈이 이글거리는 분이었습니다.“큰 교회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이 분명히 주님이신가? 마음의 왕이신가?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는가? 모든 일에 예수님의 인도받고 있는가? 자신있을 정도로 훈련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증거할 복음이 분명하기만 하면 성공한 목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사를 원하십니까?
목사도 그런 교인을 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잘 되기 위하여 기도합니까? 아직 아닙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항상 응답받고 있는 것입니다.
응답이 늦어진다고 기대와 다르다고 시험될 일이 없습니다.
1940년대, 중국 가정 교회의 한 무리가 중국에서 예루살렘까지 도보 여행을 하며 길에서 만나는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려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유명한 백 투 예루살렘 운동입니다. 그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시몬 자오였습니다.
시몬이 이끈 무리는 대략 25명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이 중국 국경을 넘으려는 찰나에 중국에는 공산주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어 국경이 완전히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국경을 넘어 가려는 시몬의 일행은 반역자로 몰려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감옥은 죽음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배식은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나마 악취가 나는 음식이 주어졌습니다. 하루 14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고.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와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매일 고문이 가해졌기에 건강한 사람이라도 6개월 안에 사망하였습니다. 시몬의 일행은 다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시몬만 살아 남았습니다.
시몬과 그의 믿음의 친구들은 주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 낙망스런 상황에서 시몬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제가 예루살렘으로 갈 수는 없지만 그 비전을 완수할 중국인 성도들을 일으켜 주옵소서.”지옥같은 생활 속에서도 시몬은 주님을 믿고 사명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런 시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증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다른 죄수들이 살인적인 겨울 추위 속에서 그를 옥사 밖에 세워두고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실지 보라며 야유를 보냈습니다. 시몬은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갑자기 온 몸에 온기가 돌았습니다. 죄수들은 그의 몸에서 김이 나고 그의 발주위에서 눈이 녹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혹득한 매질을 당하여 그의 두개골에 금이 갔습니다.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태에서 주님은 환상 가운데 나타나“내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널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식을 되찾은 시몬은 맞은 부분을 손으로 만져 보았더니 피가 말라 엉겨붙어 있었지만 상처는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있었습니다.
시몬은 복역한지 40년이 지나 풀려났습니다. 72세가 된 시몬은 병든 노구를 이끌고 감옥에서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세상은 너무나 달라진 상태였습니다. 이제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단 한 가지를 실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작은 방을 찾아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신자를 만나게 되었고“믿음 때문에 감옥에서 40년을 살다가 나온 한 형제가 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당시 중국 교회에는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받아들이고 회심했습니다. 교인들은 시몬에게 그동안 겪었던 일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선생님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하나님은 중국에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하나님 나라로 대거 들어오고 있고 그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추수 밭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한 열정을 그들 속에 불어넣기 위해 선생님을 사용하시려 합니다.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됩니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시몬은 그것이 주님의 뜻임을 깨달았고, 교회들을 방문하기 시작했고, 성령의 기름부으시는 능력으로 세계 복음화에 대한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2001년 12월 7일 시몬 자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눈을 감기까지 13년이라는 사역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린 양에게 그토록 충성한 그가 받을 상급은 오직 하늘 만이 알려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였지만 그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서진하며 무슬림과 힌두교와 불교인들에게 다가가라는 비전에 사로잡혀 그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시몬의 사역은 단순히 변방의 촌락 몇 개를 찾아가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역은 큰 결실을 맺었습니다.
다윗은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4절 너는 주님을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을 기다려라.
다윗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더욱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의 이 믿음의 비결은 4절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라는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막연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기도를 해도 방향을 알 수 있고 시련을 만나도 견딜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모든 환란을 다 면하여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환란이 유익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사울 왕의 공격, 이방인들과 싸움은 한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 왕으로 세워지는 과정이었습니다. 한 순간에 어려움이 다 사라졌다면 믿음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공, 평안, 축복만 바라보았다면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 한 목사님을 만나 아름다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사모님이 암 수술을 받는 날이었답니다. 수술실에 들어간 아내를 위하여 보호자대기실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주님이 마음에 질문하시더랍니다. ‘너 힘드냐?’즉각 대답하였답니다.“예, 힘듭니다.”또 물으시더랍니다.“너 괴로우냐?”또 즉각 대답하였답니다.“예 괴롭습니다.”그랬더니 또 물으시더랍니다.“그래서 너 불행하냐?”이 질문에는 즉각 대답을 하지 못했답니다. 잠잠히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리고 대답하였답니다.“불행하지는 않습니다.”그랬더니 또 물으시더랍니다.“그러면 행복하냐?”역시 즉각 대답을 못했답니다. 깊이 묵상하게 되더랍니다. 그리고 대답하였답니다.“예, 주님 저 행복합니다.”생각해 보니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더랍니다. 구원받았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수술 받는 아내 곁을 지키고 있으니 참 행복한 사람이더랍니다. 그런데“예, 행복합니다.”하는 고백을 하고는 거짓말처럼 마음의 두려움도 고통도 다 사라지고, 감사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평소에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소원은 오직 예수님 뿐이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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