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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by 【고동엽】 2021. 12. 10.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설교녹취, 정리

 

 

◑내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2

 

▲본문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막9:23

는 구절과 함께

성도님들이 좋아하는 구절이라서, 많이 암송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

 

바울은 지금 의기양양해서 이 고백을 하지 않는다.

그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 이 말씀을 하는 상황이 아니다.

 

지금 그는 로마감옥에 있고,

빌립보 교회 안에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속수무책인 자리(로마 감옥)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빌4:13절만 따와서,

의기양양하게 외우면서 적용할 구절은 아니라고 본다. 아래에 자세히 설명함

 

▲그러면서도 바울은, 감옥에 있다고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고,

마치 모든 것을 해결했고, 무슨 문제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이 고백을 한다.

 

우리는 예수 믿게 되면, 주님의 축복으로

세상에서 더 큰 권세를 얻게 되고, 더 큰 물질적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종종 기대한다.

 

특별히 자기가 좀 헌신한다는, 스스로 기특한 생각이 들고,
신학생이나 선교사든지.. 자기에게 어떤 타이틀이 주어지면,

빌4:13절을 암송하면서

자기에게 좀 더 많은 권세와, 어떤 힘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한 번 멋있게 주님을 섬기고 싶어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더 문제가 많아지고,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런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겪다 보면,

또 그런 시행착오를 수 년 간 계속 하면서 비로소 깨닫는 것은,

내가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너무 <나 중심적, 아전인수 격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본문의 실제 내용은

바로 윗 구절에 이렇게 나온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이런 뜻이다.

빌립보 교회가 감옥에 갇힌 바울을 찾아오고 위로한 일은 고마워 하지만,

그것은 그가 어떤 물질적, 정신적 위로를 필요로 하고,

그 일을 빌립보 교회가 해 줘서 이제 힘이 난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분명히 잘라서 얘기한다.

 

넓게 보면, 이 말씀은,

바울의 평소 라이프스타일을 말씀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예수와 연합하여 살아가고 있는

바울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이!

 

▲‘내가 ①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②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③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

 

이 하늘과 땅의 차이 같은

상반되는 극단의 괴리①②③를.. 사도바울 자신은 거의 느끼지 않는단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신앙은,

이 거리 때문에 생기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왜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신가?’

‘왜 하나님은 내가 이해할 수 업는 식으로 일하시는가?’

‘왜 여전히 알 수 없는 길로 인도하시는가?’

흔히 우리에게 늘 잊을 수 없는 현실적인 갈등이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맨날 ‘이제부터 예수를 진짜 잘 믿고, 진실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런 결심도 필요하겠지만, 우리가 맨날 이러고 있다는 뜻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을 세상과 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는 삶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바울처럼,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롤러코스트를 타더라도..

주님께 대들거나 불평하지 말고.. 온순히 그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신앙’이며,

그게 영적으로 신앙심이 높은 사람의 경지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그만큼 신앙의 삶에 불평이 많다는 뜻이다.

 

▲그전에는 내가 신앙이 어릴 적에는..

하나님께 대해 불평이 많고, 질문이 많고, 하소연이 많았다.

 

이제 내가 신앙이 성숙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내가 내 인생을 철저히 열심히 살리라’는 결심이 아니라,

그거 작심삼일이기 쉽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어떤 뜻과, 어떤 작정으로, 어떻게 이루시든지 간에,

나는 항복과 순종으로 동참하고,

‘아멘! 주님이 옳으십니다. 저는 무슨 길이든지 다 갈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라고 기꺼이 고백하고, 불평 없이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들이 종종 하나님께 읍소, 하소연, 불평하는 이유는 이렇다.

 

‘주님 제가 이제 주님을 잘 섬기기로 작정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제 선교사가 되었고, 무슨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께서, 제게 힘을 실어 주실 때입니다.

이제야말로 제게 하나님이 물질/능력/기적으로 채워 주셔야 합니다.. 라고

‘거룩한 떼’를 쓰기 시작한다. 물론 거룩하지 않은 것이지만

 

내가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시고, 나에게 힘을 실어 주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기도로 요구하는데, 마치 당연히 요구할 권리라도 있는 것처럼,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배부름과 배고픔에

풍부와 궁핍에

그 상반된 차이와 괴리가

바울 자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배부름과 풍부에 처함과 마찬가지로,

배고픔과 궁핍에서도.. 얼마든지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을 예로 들어보자.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으며,

광야에 쫓겨 다닐 때도.. 똑같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했다.

 

특별히 그가 지은 시편들을 보면,

왕이 되어서 지은 것보다,

광야에 쫓겨 다니면서 지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다윗의 시편에 (전체 시편의 삼분의 2에 해당한다는)

많은 도움과 은혜를 받고 있다.

그 시편들은, 다윗이 배부름과 풍부에 있을 때보다

배고픔과 궁핍에 처해 있을 때.. 지어진 것들이다.

 

다윗, 사도바울, 모세 등등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배고픔과 궁핍에 처했어도 많은 일들을 감당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주여, 제가 목사이고, 주의 일에 투신하고 있으니까..

저를 배부름과 풍부에 처하도록 해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고 ‘거룩한 떼’를 쓰는데..

 

그들은 바울처럼, 빌4:13절을, 깊이 암송하며 기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말씀에서

‘모든 것’이란.. 고후6장과 연결해서 보면.. 이런 것이다.

 

여기 보면, 고후6:4절, 6:10절에도 ‘모든’이란 단어가 나오므로,

빌4:13절의 ‘모든’과 연결해서..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고후6:3 우리가 이 직책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여러분, 이 말씀이 내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면 빌4:13절에서 말한 ‘모든 것’이란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영광과 욕됨으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등을

내 삶속에서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사도바울이, 빌3:17에서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했던 말씀을 기억한다.

 

그 본받으라는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빌4:11~13의 본문 내용이요,

또한 고후6:3~10의 내용도 된다.

그 ‘모든 것’을 본받으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기독교 신앙이나 영성은

‘하나님을 위하여 내가 뭘 해드리겠다’고 작정, 결심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작정하신 일이, 그게 뭐든지 간에, 풍부든지 빈곤이든지,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순복하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신앙은,

내가 주님을 위해서 뭘 열심히 하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고, 요긴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minority 이고,

 

주님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나를 사용하셔서 뭔가를 이루어 가시는 것.. 그것이 신앙의 majority 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나라가 임하옵시고 Thy kingdom come!’ 이라고 기도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런 일에, 내가 사용 받아야 한다. 내 나라, 내 뜻, 내 야망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점을 많이 강조해 왔는데

 

‘주께서 나를 어떤 형편, 처지, 우여곡절로 끌고 가시더라도,

주님이 거기서도 나와 함께 계시며,

주님이 거기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평하지 말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며

당당히 끌려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앞으로 많이 강조해야 한다.

 

▲실제로 일제의 압박 속에서 신앙생활 할 때

‘옥중성도’들이나 ‘순교자’들은

가고 싶어서 그 길을 간 것도 아니고, ‘끌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빨리 풀어달라고.. 매일 조석주야로 간절히 애원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길을 허락하셨고, 자기는 이 길을 반드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 말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앙단계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우상숭배로 완전히 넘어질 뻔 하였던 한국교회는

그들 옥중성도와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기사회생하고, 오늘의 부흥을 이루었다.

 

2007년에 아프간에서 있었던 두 선교사의 순교도,

한국선교역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두 시대로 구분할 만큼

한국선교역사의 한 획을 긋는 큰 역사를 이루어냈다.

 

누가 가고 싶어서, 그 길을 갔겠는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저 끌려가다보니

 

‘그게 하나님이 주신 잔’이었음을.. 어느 날 깨닫고서,

순교 2~3일전부터, 자신을 준비하며, 남은 사람들을 격려하며,

영광스럽게 그 길을 가셨다고 한다.

 

▲물론 세상적으로 풍부하고, 존귀에 처하는 길도.. 주님의 뜻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곤핍하고 비천에 처하는 길도.. 주님의 뜻이 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 꼭 기억해야 될 사실은

‘왜 주님은, 내가 선교사까지 되었는데도.. 굶기십니까?

왜 주님은, 내가 목사까지 되었는데도.. 병이 안 낫는 것입니까?’ 하는 하소연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빈궁한 가운데,

병든 가운데,

갇힌 가운데,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운데서도..

이런 상황가운데로 내가 끌려가면서 divine driven..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또 고려해야 될 상황은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 한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은, 그 종들의 연단을 위해서

‘궁핍하거나 비천한’ 가운데로 떨어뜨리신다는 것이다.

 

사역자들이 젊어서부터 너무 ‘풍부하거나 존귀한’ 경험만 하다보면,

나중에 큰 그릇이 되기 어렵다.

 

예전에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격언을 자주 사용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다.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번 한 번만 나를 도와주시면, 내게 힘만 실어주시면,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만들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속인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계단, 한 계단 차곡차곡 연단시키셔서

나중에 존귀한 그릇으로 쓰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게 연단으로 주시는

‘궁핍’ ‘비천’도 있으므로..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원망하거나, 핑계하지 말자’는 것이다.

내가 궁핍하게 되고, 비천하게 된 것은

‘누구(그 원수) 때문이다’ 라고 한탄하는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불신자이다.

 

‘누구 때문에’ 내가 궁핍하게 되고, 비천하게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정면으로 반대했다.

내가 당한 모든 고난,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셨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실패와 고난을,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만큼 못난 짓은 없다.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 친구가 배반을 해서.. 내가 이 꼴이 되었다.. 라고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요셉이 ‘나를 애굽으로 불러오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행하셨고,

그러한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진짜 ‘믿음의 사람’이다.

 

어떤 현실이든지, 어떤 억울함이든지

그것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그것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며,

 

오히려 그 억울함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선으로 갚아 주실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일에 일체 비결을 배우는 사람>의 신앙자세인 것이다.

 

어느 교회든지, 면류관을 걸어놓지 않고, 십자가를 걸어놓는다.

그것은 ‘죽음 한 복판에서의 승리의 표’인 것이다.

 

출처 : 냉수 한 그릇
글쓴이 : 김지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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