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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 시사 읽기-목회자멘토링 컨퍼런스

by 【고동엽】 2021. 11. 27.
사회자 요새 시중에 우스갯소리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임기를 마칠 즈음에 교회 장로인데 불교로 종교를 옮겼다고 해서 찾아가는 절이 어디냐면 불법사찰이라고 합니다. 불법사찰을 찾아가는데 거기 그 사찰의 주지가 최시중이라고 하대요. 또 이명박 대통령이 그 사찰을 갈 때마다 꽃을 하나 들고 가는데 미녀화라는 꽃을 갖고 가고, 종종 가끔 가다 타고 다니는 타가 에리카라는 차라고 합니다.


아무튼 이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럴수도’를 믿는 게 아니냐, 이런 들려오는 저잣거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김회권 목사님께서 예언자적 시사읽기라고 하는 주제로 강연을 해주실 텐데 목사님 소개를 안 해드려도 다 아시죠? 요즘 무림의 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는데 목사님이 휘두르시는 권법이 회오리 권법입니다. 그래서 회권이에요. 회권. 회오리 권법. 오늘 목사님께서 아무튼 성서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개인적인 실존 속에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긴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민하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그러한 내용들을 풀어주시겠습니다. 나오실 때 큰 박수로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김회권 깊은 산속까지 오셔서 멘토링 대회에 참여해주신 여러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제가 많은 강연을 해보지는 않았습니다만, 항상 관심을 가지고 목회자들과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주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목사님들의 설교 강단에서 시사문제들이 신학적 반성과 숙고 없이 성경말씀을 지지하거나 성경말씀을 정당화할 때 쉽게 동원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에 동시대의 설교자와 예언자들의 삶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하에서 해석해보는 것이 시사해석입니다. 이 시사해석은 전공이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고대 근동의 다른 예언자들과 달리 하나님 뜻이 천재지변과 역사적 정치적 격변들을 통하여 바로 왕들과 지주들과 제후들 지배계급들에게 압박한다고 봤습니다. 하나님 뜻이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제후들을 경고하고 왕과 지배층들을 압박한다고 봤기 때문에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동시대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동선을 포착하는 것이 매우 낯익은 일입니다. 그런데 고대근동의 다른 종교의 예언자들에게서는 그 시대의 역사적 격변과 천재지변 등을 통해서 왕실과 지배층, 또는 그 당시의 종교적 권력층을 향해서 경고나 심판이나 위협으로 해석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예가 있긴 있습니다. 제임스 프리차드가 편집한 <안네트>란 책이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는데, 라는 책, 큰 책입니다. Ancient Near Eastern Text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라는 책입니다. 두꺼운 책인데 고대근동의 여러 종교문서들을 구약성경과 관련된 정도에 따라서 편집한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이집트 예언자들이 기근과 천재지변을 겪어서 왕실과 왕에게 조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조언입니다. 많아봤자 약간의 엄중한 주의경고를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천재지변, 예를 들어 3년 동안 일어난 가뭄을 가지고 왕의 죄를 직접 단죄하고 탄핵하는 것은 구약성경에만 나옵니다. 15세기 또는 14세기에 북시리아 일대에 있었던 마리라는 작은 왕국에 마리 예언서가 발견됐습니다. 마리 예언서들 또는 마리문서라는 문서에 보면 제사장 또는 예언자적 중보자들의 신탁중계 장면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마리 예언서의 신탁중계 문서에 보면 그 시대의 천재지변, 그 시대의 정치적 격변들, 민중들의 아우성들, 이런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또는 지배층과 왕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감동을 준 사람의 특징은 미가서 3장 8절에 나와 있듯이, 나는 야곱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야곱의 허물, 지배층의 허물을 대담하게 고발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맥락에서 영감 받았다는 말은 모든 지식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인 그런 무오성, 그걸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지금 실제로 권력을 가진 왕과 지배층의 죄를 탄핵할 수 있는 도덕적 담력을 영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영감 받았다는 말은 도덕적 담력, 신학적 패기를 가리킵니다. 백과사전적 무오성, 모든 지식과 모든 영역에서의 일점오류 없는 정보, 그런 통계 수준의 무오성을 담보하는 말이 성경 영감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특별히 지배층과 왕의 자기중심성을 끊임없이 규탄할 수 있는 비무장 예언자들의 영적인 패기를 영감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정말 제정신으로 하기 힘들만큼 대담한 말은 뒤에 낙인이 붙어 있습니다. 너 홈 아도나이, 라고, 이 말은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마지막에 낙관 찍듯이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너 홈 아도나이, 이 단락의 이 말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는 말과 너 홈 아도나이가 붙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문두에 나오고, 마지막 끝에 너 홈 아도나이가 붙어 있으면, 그 말은 영감 받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자기 삶의 모든 터전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선전포고입니다. 이런 겁니다. 엘리야가 비무장 혈혈단신 예언자가 아합 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3년간의 기근이 당신과 당신 마누라 때문이오, 당신 왕실이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께서 비를 거두신 것입니다,


당신 죄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바로 영감 받은 것입니다. 이때 코 아마르 아도나이,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너홈 아도나이, 이것이 야훼의 말씀이다, 이런 독특한 어법, 이 문장을 갈무리하는 이런 방식은 영감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특징은 그 당시 그들이 살아 있을 때 일어났던 시사적 사건을 가지고 지배층과 왕실과 종교권력자들을 무섭게 다그칠 때 영감에 호소했다는 겁니다. 그 근거구절은 미가서 3장 8절,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은 영감에 가득 찬, 지배층을 두렵게 만드는, 다시 말해서 상류사회 지배층 지주들 악한 제사장들 종교권력자들이 들을 때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압박해오는 거룩한 현존을 대담하게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감 받은 예언자들의 시사해설입니다.


오늘 시사해설은 지금 우리 시대의 포스트모던 탈근대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사람들의 행동거지 속에 하나님의 현존이 있는가, 이걸 발견하는 것은 너무 너무 힘든 것이고, 만일 이걸 대담하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예언자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영적대담성과 정곡을 찌르는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파토스와 그런 논리적 명분성이 같이 나와서 딱 연결될 때 이건 예언자적인 시사해석이구나, 이런 느낌이 드는 겁니다. 이건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해석이 예언자적 시사해설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언자적 시사해설을 성경의 전범위에서 찾아 연구를 많이 하다 보면 예언자적 시사해설에 순응하고 근접한 시사해설이 이런 거구나, 하고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런 것이 하나님의 예언자적 시사해설이라고 말하면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처럼 코 아마르 아도나이, 또는 너 홈 아도나이, 이렇게는 우리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성경을 쓰는 겁니다. 우리가 코 아마르 아도나이 하면 신명기가 새로 생기는 겁니다. 왜냐하면 코 아마르 아도나이는 직통계시를 받아서 쓸 만큼 하나님에 임의 되었다는 access, 하나님의 근접성,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식을 굉장히 높여야만 쓸 수 있는 말이 코 아마르 아도나이, 너 홈 아도나이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우리가 감히 하지 못하지만 이런 시사해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특수한 시공간의 맥락 속에 서는 회중에게 전파하는 사람에게 불가피하다는 겁니다.


시사해설은 불가피하다는 겁니다. 왜? 만일 하나님이 오늘 우리 시대의 현실공간에서 정치사회 경제 이런 모든 공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면, 옛날 문자 속에 있는 말로만 해석한다면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그건 성경말씀을 되풀이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을 되풀이하는 것과 설교는 다릅니다. 설교는 오늘날 역사의 격변 속에 누가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지를 꼭 집어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은 영적으로 굉장히 충만한 신적추동을 계속 받는 사람이 원래는 강단에서 설교할 수 있는 겁니다. 원래는, 신적인 압박을 받는 사람이 설교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 7장 10-17절에 보면 아모스가 북이스라엘 왕국의 무야 채플린(?)이었던 아마샤에 가서 설교합니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왕이었던 여로보암 2세, 이 사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왕입니다. 50여 년 동안 북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한 왕으로써 아주 걸출한 왕입니다. 그 걸출한 왕에게 가서 아모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제단은 무너지고 말 것이고 당신 곧 박살납니다, 당신 끝났습니다, 엄청 잘 나가는 왕에게 아모스가 그렇게 외치니까 아마샤가 와서 하는 말이, 네 나라 네 고국 남쪽에 가서 밥 먹고 살아라, 했다고 나옵니다. 예언하고 밥 먹고 살라는 말이 같은 말로 나옵니다. 그래서 예언하는 행위는 밥 먹고 사는 행위로써 일종의 생계형 저주남발자입니다.


그 당시 생계형 저주남발자, 아무한테 가서 막 공격을 하면서 돈 좀 뜯어서 사는, 옛날에 아주 타락한 지방언론사 수준의 비리 고발하면서 사진 찍어서 통장서 떼어서 다음과 같은 구좌에 돈 500만원 넣어라, 이런 식으로 하는, 이런 지방신문 아주 타블로이드 판 신문에 공갈협박범에 준하는 예언자가 많았습니다. 그런 뜨내기 예언자가 많았기 때문에 예언하고 밥 먹고 살라고 하는 말은 돈 많은 부호나 지주에게 가서 협박 공갈 치고 나서 돈 뜯어내라, 이런 식으로 들었기 때문에 아모스가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예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다, 나는 사실상 동산과 부동산이 꽤 많다, 우리 집엔 땅이 많다, 그리고 나 공부 많이 했다, 이렇게 자기 실력을 막 말하면서, 내가 <타임>지도 읽었다, 내가 <르몽드>지도 읽었다, 국제정서를 쫙 말하면서,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 것을 안다, 나는 신적압박에 추동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 먼 데까지 와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면서 자기 예언의 진정성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그때 아모스 1-2장을 보면, 아모스가 약 예닐곱 나라의 국제정서를 완벽하게 통달하고 있는 걸 봅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는 절대로 농부, 농투성이가 아닙니다. 아모스가 농사짓는다는 말은 지금으로 말하면 유산자계급에 속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7% 밖에 안 되는 농민의 자리에다 아모스를 놓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 농사짓는다는 말은 도시에 가지 못한 사람, 이런 뜻입니다. 내가 지금 농사짓는다는 말은 65세 이상 넘었다는 말이고 별 기술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만큼 오늘날 농사짓는다는 말은 너무나 역대정권에 의해서 경멸적인 용어로 전락됐습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나 농사짓는다는 말은 나 자유농민 유산자계급 나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된 사람, 이런 뜻입니다. 내가 얼마나 농사지으면서도 할 일이 많은 줄 아느냐? 나는 두보와(?) 타임스를 완벽하게 습득했다, 하면서 아람부터 국제조약을 어기는 사태부터 시작해서 모든 식물 곡물수급현황 그다음에 저 각 나라에 있는 비리들 핵심 사건들, 그걸 쫙 말하면서 이런 시리아 팔레스타인 소왕국들에 벌어지는 모든 참담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북쪽 어느 나라로부터 세계를 보편적으로 다스리는 세계적인 심판국가를 일으킬 텐데 북 이스라엘이 그 세계 적인 심판국가에 의해서 유린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딴 나라로 잡혀간다, 이렇게 막 무섭게 다그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텍스트 의존적인 설교라는 것은 텍스트를 되풀이하는 설교, 제7절은 이겁니다, 제3절은 이겁니다, 소위 말해서 역사적인 사건은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고 본문만 가지고 설교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 강해설교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철두철미하게 텍스트를 가지고 현시대 동시대의 사건들과 사태의 전면에서 말씀을 적용시켜서 바로 압박하고 회개를 유발하고 통회를 유발하는 식으로 설교한 것이지, 절대로 그 죽어버린 문자를 읊조리면서, 1절과 3절은 분사구문 관계인 거 알겠죠? 4절은 전치사구입니다, 이렇게 본문만 계속 말하는 쉽게 말해서 기계적 본문강해 설교를 한 게 아닙니다.


그들은 동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아우성치는 농민의 피맺힌 절규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대표하게 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그 땅을 빼앗긴 소작인들, 자유농민들 신분에서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의 아우성치는 그 소리 속에 당신의 임재를 대표하게 하시는, 역사 속에서 누군가의 역할 속에 당신을 identify 시키는, 그런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문 안에만 가둬놓으면요. 하나님은 항상 초월적 중립자입니다. 부자 가난한 사람 죄 많이 지은 사람 교통범죄 어겨서 3만 2천원 짜리 벌금 내는 놈과 불법사찰 하는 놈이 똑같은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초월적 중립자의 위치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언자들은 초월자 중립자, 그런 그리스 헬라적 신관을 가지고 이 세상일에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초월적 중립상태를 늘 유지하는 아파테이아적인 하나님을 말한 것이 아니라 파토스적인 하나님, 이 세상 누군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하나님, 이 세상의 국지적 현장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는 하나님을 말했기 때문에 이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 이건 자기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고, 잘못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이 대한민국의 시사를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은 본문을 가지고, 즉 성경말씀 역사 속에 살아계셨던 하나님의 현존을 논할 수 있는 설교를 못하는 겁니다. 즉 죽어버린 본문을 가지고, 이 문자만 가지고 몇 장 몇 절의 관계를 계속 읊조려서는 회개가 전혀 촉구될 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당장 오늘 용산사태, 우성사태, 쌍용자동차사태 대구지하철 사태,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사태, 이런 모든 책임을 딱 적시하면서, 이건 당신 책임이라고 말하는 위험한 당파적 발언들, 이런 것들이 매우 예언자적 시사해설에 가까웠어요. 그래서 예언자들은 초월적 중립자의 자리에 하나님을 두지 않고 역사의 국지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사건 속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말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었고 매우 당파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 제명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가 된다는 말은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예언자가 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이입니다,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가 아이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네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은 네가 구문을 구성한다, 동사의 신 텍스를 구성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아닌 걸 내가 알고 있다, 네가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네가 대담하게 왕과 지배층과 지주들에게 죄를 탄핵하는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다는 말을 내가 알고 있다, 모세도 똑같은 말입니다. 나는 말할 줄 모릅니다, 모세가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모세가 문장 구성에 어려움이 있고 연합구문도 구성하지 못하고 늘 단문밖에 구성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말할 줄 모른다는 뜻은 내가 도덕적 담력을 가지고 패기 있게 무찌르는 말을 못한다,


그걸 누가 잘했습니까? 아론이 잘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같은 무서운 사람을 만나면 전엽질적인 축소지향적인 영혼이 돼서, 너 누구냐? 이렇게 물으니까, 나... 나... 이렇게 말을 못하는데, 그때 아론이 나 모세다, 앞쪽을 쳐 준겁니다. 모세가 두 번째로, 어... 어... 내가 할 말 있는데, 우리 하나님 야훼가 내 백성을 보내래, 뭐라고? 아론이, 내 백성을 보내래! 이렇게 소리치면서 그렇게 해서 모세가 조금씩 된 겁니다. 모세가 말을 못한다는 말은 도덕적 패기, 영혼에 타전할 수 있는 강력한 퍼포먼스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말을 못한다 할 때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너에게 편만십을(?) 가르쳐줄게 구문을 가르쳐줄게, 너에게 분사구문과 전치사구를 가르쳐줄게, 라고 말하지 않고, 그래 내가 너에게 함께 하여 네 얼굴을 놋 성벽처럼 말하게 해주겠고 엄청 대담하게 만들어주고 굳센 방백처럼 만들어줄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할 줄 모른다는 말은 강단에 서서 지금 죄 지은 유력자들, 알파치노 같은 대부들, 어제 사람 14명 죽이고 와서 성호를 긋는 그런 악당들의 죄를 고발할 수 있는 대담한 능력이 모자란 걸 말할 줄 모른다, 알파치노 <대부>라는 영화를 보면, 열 명 쫙 쏘고 나서 어떻게 해요? 앞줄부터 앉아서, 로스트라 빠떼라, 하면서 죄를 용서구하잖아요. 교회의 대부, 사회를 움직이는 대부급, 열네 명씩 죽이고 그다음 날 미사를 은혜롭게 드리고 가는 살인적인 대부들이 굉장히 우리 교회에도 많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그 대부들을 딱 세워놓고, 어제 총질한 사람 나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지어다, 총을 놓지 않으면, 이렇게 막 무섭게 다그치는 걸 보고 말한다, 또는 설교한다, 우리는 나베 동사에 히피림, 힌 나베, 힌 나베라는 말은 나베 동사에 히피림(??), 강력하게 말을 하는 거예요. 내가 말할 줄 모른다, 힌 나베, 나베 동사에 히피림이 힌 나베에요. 그러니까 청중들이 우리에게 알현하러 오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아무리 잘못해도 청중은 꾸역꾸역 교회로 몰려와요. 대한예수교장로교나 조계종은 아무리 타락해도 회중들은 끊임없이 와요. 왜? 우리가 타락하는 속도보다 일반 사람이 죄 짓는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 잘못 돼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사람들이 계속 몰려오니까 결국 종교는 불황을 영원히 몰라요. 왜? 사람들은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그 간격은 너무 크기 때문에, 심지어 목사님과 장로님이 싸움을 해서 10년 동안 사고 친 교회도 4천명이 늘어요. 이 말은 대한예수교 조계종이 화투를 치다가 몰래카메라에 찍혔지만 그래도 스님들이 머리 깎고 쑥색 옷 입고 왔다 갔다 하면 또 거룩하게 보여요. 또 시주 갖다 바쳐요. 사람들은 너희들이 타락했지만 내가 더 갈증이 많기 때문에 나는 교회 간다, 하는 마음으로 교회 오는 거예요.


여기 오는 사람 모두가 우리 담임목사님 설교에 은혜 받으러 가야지, 그런 사람보다는 자기 영혼의 죄가 너무 누적되어서 일종의 치사량에 거의 가까운 독을 품고, 크롬과 비소 같은 걸 품고 죽겠다고 오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죄를 탄핵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면 참된 의사가 되는데, 그런 무고한 죄책감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이 시대의 죄와 그들의 죄를 연결시켜서 해명해주지 못하면 이 시대의 죄는 하나도 처리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 암에 걸린 사람에게 마이신을 계속 주는 설교를 계속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오늘 우리가 부동산 투기를 했거나 뇌물을 했거나 이런 모든 죄를 범했던 사람들을 한 번 만 딱 치면, 아이고 나를 위한 설교네, 하고 전부 다 나자빠질 거예요. 대부분, 그래서 우리가 그런 속담 있잖습니까? 나는 당신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즉시 런던을 떠나라, 그랬더니 엄청난 사람이 런던을 떠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날 우리가 나는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


즉시 압구정동을 떠나라, 이렇게 하면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은 우리 사람들의 죄가 너무 누적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 듣고 싶어서 오는데, 그 죄를 지적하려면 시사문제를 반드시 지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시사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저 옛날 텍스트를 가지고 지적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효과는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역사의 한복판에서 죄를 단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지 못하면 여기와 있는 우리 성도들, 교회가 비록 잘못됐지만 그렇게 교회로 몰려들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의 죄를 우리가 고칠 길이 없고, 그들의 영혼에 죄사함의 복음을 선포할 길은 영원히 없어진다는 것이죠. 죄가 예언자들의 시사, 내지는 설교의 핵심이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언자의 시사읽기는 예언자의 설교핵심이었는데 이들은 고대에 그들이 전승받았던 텍스트를 기계적으로 읊조리지 않고 그 텍스트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그 시대에 누가 하나님의 대적자이고 누가 하나님께 후원받고 있는 자인가를 판가름해서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예언자들의 시사해석의 목적은 지배층의 죄를 단죄함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왕실과 지주와 악한 종교권력자들과 거짓예언자들의 죄를 무섭게 다그치기 위해서 시사해석을 했습니다. 또 다른 게 있습니다. 또 다른 시사해석, 이런 이스라엘과 유다의 내부의 문제를 겨냥하자며 이렇게 말합니다. 두 번째로 예언자들이 국제정서에 대해서 해박한 이해를 드러내는 경우는 딱 한가지입니다. 외국동맹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즉 동맹세력에 의지하지 말라, power politics, 힘에 의존하는 동맹세력, 힘에 의존하는 국제정치에 의존하지 말라, 정의를 세우고 공평을 세운 이것이야 말로 국방의 기초단위다, 정의로운 통치 의로운 재판 하나님에 대한 참된 순종, 이것이 있는 곳은 난공불락의 시온성이다, 그런데 이사야 30장에 있는 것처럼 네게보 사막에서 짐승들이 금은보화를 싣고 이집트로 무기를 구매하러 가는 행렬을 보면서 예언자 이사야가 이집트 네게보 짐승에 관한 신탁이라는 말을 하면서 쭉 나오는 말을 볼 때, 동맹정치, 이집트의 신식 무기를 사서 앗수르와 바벨론을 막아보려고 하는 유다의 끊임없는 실수를 국제정서를 쭉 예언하면서 비판하는 겁니다. 예언자들의 모든 심판의 주목적은 무엇입니까? 국제정치 변동에 춤추지 마라, 다시 말해서 동맹을 맺으면 앗수르 군대 바벨론 군대와 맞서볼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인 바벨론과 앗수르와 한판 맞짱 뜨기 위해서 작은 소왕국들의 동맹을 획책하지 말라, 또는 이집트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두 가지입니다.


이집트의 감언이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일대의 작은 왕국들이 동맹을 믿지 말아야 한다, 왜? 앗수르와 바벨론은 하나님이 보내신 심판의 몽둥이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몽둥이에게 타격당하고 매를 맞고 고통속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야 말로 민족의 자존이다, 국가적 갱생의 길이다, 이런 메시지를 했을 때, 대개 국제정서에 관한 많은 발언들은 거짓된 동맹세력에 대한 경고입니다. 많은 외국에 관한 예언들은 한 마디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런 큰 틀에서 우리가 시사문제를 보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텍스트만 가지고 늘 공부해선 안 되겠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성경텍스트는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패러다임이고 하나의 문법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서만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본문을 읽어 놓고, 지금 존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안하면 그건 성경텍스트를안읽은 겁니다. reading의 반대가 unreading입니다. 분명히 악한 지배자와 통치자의 죄를 고발하는 예언서를 읽어놓고, 지금 특정신문사설을 읽으면서 이런 부조리한 현실을 용인하고 그걸 지지한다면 그건 예언서를 안 읽은 것이 되는 것이죠. 예언서를 읽는다는 말은 그 예언서의 정신과 예언서의 논법을 가지고 오늘 날 우리 시대에 악과 죄의 문제를 분석하는 것을 우리는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사읽기는 결국 뭡니까? 성경읽기의 두 번째 단계에요. 시사읽기는 성경읽기의 두 번째 단계이므로 우리가 시사문제에 대해서 모른다는 말은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지금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무조건 승인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성경 본문의 문자적 해설을 본문충실한 설교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현실문제를 전혀 말하지 않는 철저한 초월적 무당파성을 견지하는 것, 이걸 우리는 아주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건 설교가 아닙니다. 예언자적인 설교는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시사문제를 잘 해석하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찾지 마시고요. 누가복음 12장 54-57절에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립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런 구약예언자들 시사읽기의 총완결판입니다. 예언자 시사해석의 총완결자이신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54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이 외식하는 자라는 말뜻은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바깥에서 식사하는 사람들, 아닙니다. 자기를 실재 아닌 사람처럼 꾸미는 것,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이것이 바로 예언자적 시사읽기, 바로 이것이 이사야 5장 12-19절 말씀의 예수님 버전입니다.


이사야 5장 12-19절은 이겁니다. 네가 말한 하나님 하시는 그 것 좀 보여 다오, 하나님 일한다며? 하면서 계속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역사 속에서 보여 달라고 소리치니까 이사야가 그 자기의 적대적 청중들이 자기를 조롱하는 말을 다시 조롱하여 되받은 말을 이사야 5장 12-19절에 말합니다. 속히 네가 말한 하나님 그 일 좀 보여다오, 속히 네가 말한 하나님의 계획 좀 성취되게 해봐, 라고 했습니다. 시대를 분간하는 것, 이 시대가 결단할 때인지, 이 시대가 다리를 뻗고 안심하고 잘 때인지, 자기를 축소하고 응축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인지, 때를 분간하는 것, 도키마제인, 도키마조, 분간합니다. 도키마제인, 카이로스를 도키마제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있는 때는 무슨 때입니다.


분단조국이 된 채 67년 째 되는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때는 분단조국 67년째이고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워진 시기, 방송기자들이 데모한 지 수개월째가 되는 때입니다. 그리고 교회 상층부가 많이 썩어서 사회의 지탄을 받은지 오래된 때입니다. 그런데 조계종마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버려서 스님들이 타락해버렸습니다. 이제는 기독교 많은 사회적 상층부들이 민중의 희망이 되기에는 지쳐버린 때입니다. 그런 때, 때를 분간하는 것입니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지금 옳고 그른 것을 지금 우리 시대에서 판단해야 합니다. 텍스트에 의존해서 내가 해야 할 주체적 판단의 몫을 옛날 텍스트를 한두번 인용함으로써 그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은 시대를 분별한다는 말입니다. 히포크리타이 토 오포로소폰, 테스케스 카이 투 우라누, 오호다티 도키마제 톤 카이론 데투톤 포스, 이겁니다. 도키마제 톤 카이론 데투톤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여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페이파테인, 어떻게 행동할지를 우리가 분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땅을 사야할 때인지 땅을 팔아야 할 때인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종류의 결단과 순종을 원하는지 알아차리라는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지금 석유로 유지되는 탄소연료, 매연기관, 이거 오래 못 갑니다. 지금 자동차를 만드는 이 공장은 모든 시설통제가 필요 없게 됩니다. 저 고층 아파트 타워팰리스에는 노숙자외에는 살 사람이 없게 됩니다. 왜? 엘리베이터가 가동이 안 되는 때가 옵니다. 아파트는 27-35년 사이에 반드시 부서야 합니다.


37년된 아파트에 금이 가고 철근이 다 부서지고, 특히 노태우 정부 때 지은 분당아파트는 엉터리 모래가 들어가서 철근이 한두개씩 빠져서 굉장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분당에 계신 분들은 빨리 빠져나오셔야 해요. 그 아파트 부실 아파트 소문 다 났어요. 복부인들에게 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아파트가 35년째 시효인데 34년째 아파트를 사면 감가삼각이 다 끝나서 이미 재산가치가 없는데 그걸 사면 안 되잖아요. 때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살 분도 없겠지만 혹시 사는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분당아파트를 사면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때를 분별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자기를 엄청 선전해야 할때인지, 엄청나게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 100주년 기념을 하고 다시 여의도에 모여 상암경기장에 모여 52억을 써야 할지, 아니면 스님들 화투치는 걸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지내야 할지, 스님들 화투치는 걸 보고 얼마나 목사님들이 도덕적 우월감을 그주일에 많이 가졌는지, 그래도 우리는 화투는 안 쳤다, 이런 식으로요. 우리 목사님들 한주 내내 웃게 만들어준 머리깎은 스님들의 놀랍고 귀여운 자태, 통합측에서 이번에 100주년 기념대회를 엄청나게 크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목사님들이 지금이 어느때인데 상암동에서 다시 50억쓰면서 할 거냐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다. 작년에 우리나라 희년 815광복대회를 했습니다. 거기에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했는데, 거기에 50만 명 왔다고 선전했죠? 50만명 전혀 안 왔습니다. 10만 명도 채 안 왔습니다.


제가 현장에 직접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할머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왜 왔는지를 모르는 할머니들이 왔는데, 여기가 뭐하는 데냐고 저한테 계속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수십억 들었습니다. 헛돈이 수십억이 들었습니다. 때 분별을 전형적으로 하지 못하는 철없는 종교권력자들의 소행입니다. 때를 분별한다는 말은 지금 우리 기독교가 자기 응축모드로 낮은 포복모드로 가야 할지, 비상하는 모드로 가야할지, 선전모드로 가야할지, 없는 모드로 가야할지, 때를 분별해야 하는 거거든요. 이 때분별이 예언자들의 전문영역이었단 말이에요. 이런 예언자적 시사인식이 고전하면(?) 그들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매우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 본문 앞을 잘 보세요.


35-48절을 보면 열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열처녀 비유가 이 앞의 본문이에요. 도적같은 신랑이 온다니 지금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때를 분별하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은 신랑이 오기 직전에 열처녀가 기름이 딱 떨어져가며 기다리는 힘이 달릴 때 예수님이 오셔서 조금 만 더 기다리라고 깨어 있으라고 하신 거예요. 이렇게 신랑이 오는 때를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신랑의 도래를 맞이하라,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의 때를 기다리면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시국인식입니다. 사도바울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너무 잠정적이고 유한적이며 종말적인 걸 깨닫고 세월을 아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2장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똑같은 도키마제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때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 이게 중요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의미를 redum(?),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시간에 적법한 행동을 할, 지금 우리가 몸을 구부릴 때 몸을 구부리고 내가 비상해야 할 때 비상하는 걸 시간을 아낀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지금 몸을 구부려서 낮은 포복을 해야 할 때, 낮은 포복을 하는 걸 시간을 아낀다고 말합니다. 내가 낮은 포복을 해가지고 철조망을 뚫어야 할 때, 그 몸을 서서 라틴댄스를 추고 가면 총알이 우리 온몸을 관통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5장 15-16절에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엑사고라조이 톤 카이온, 이때도 카이로스가 쓰였습니다. 엑사 라는 말은 out of 라는 말이고, 아고라조이는 아고라에서 하는 행동입니다. 아고라조이는 사다는 뜻입니다. 엑사는 되사다, 엑사고라조이, 이 말은 시간을 되사다,


낭비했던 시간, 즉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고 분별없이 지냈던, 흥청망청 지냈던 모든 시간을 종말론적인 시간의 유한성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이 접근중이기 때문에 지금은 성도가 지극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시간을 아끼는 것이고 세월을 아끼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을 되사는 것이다, 방탕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시간을 되사는 길은 거룩한 삶을 사는 거예요. 내가 중독에 빠져서 속박상태에 빠져 살았어요. 그 사람 시간을 되사는 건, redum 하는 건 자유롭게 중독상태가 아닌 주체성을 충분히 발휘해 사는 거예요. 그게 시간을 아끼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금 2012년 대한민국 현실 속에서 우리 하나님의 동선이 어디있는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이 어디 있는가를 자세히 주목하여 그걸 추적하는 것이 시사읽기의 가장 중요한 단계 과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이 시대의 악행을 누가 하는지, 누가 아우성을 치는지, 정의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불의의 희생자가 누구인지, 누가 지금 부당한 공세로 부당한 경제적 이익으로 엄청난 천문학적 재산을 불리고 있는지, 그걸 다 보아야 합니다. 그런 걸 알고 나서 설교를 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사람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너는 왜 복음을 말하지 않고 쓸데없는 정치를 말하느냐는 오해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시사문제를 잘못 건드리면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는 종교와 달라, 정치는 복음과 달라, 라고 양도논법을 가지고 정치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 자체를 파문의 조건으로 삼아버리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큰교회 부목사님 중에서 무슨 광주사태 한 번 언급하면 그다음 날 바로, 요새는 감사장도 안 옵니다. 문자로 옵니다. 가! 이렇게 문자로 옵니다. 혹은 친북발언과 유사한 발언, 6.25전쟁 때 이제 우리가 북한을 증오하는 6.25 상기는 그만합시다, 이제 남북한 모두가 죄를 동시에 회개합시다, 우리가 같이 죄를 범한 형제들입니다, 누가 가인이고 누가 아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가인이고 우리 모두 아벨입니다, 이렇게 설교하고 나면 바로 문자가 옵니다. 친북좌파 빨갱이 났네, 하면서 바로 가야합니다. 이런 교회는 강남 S교회에서 직접 있었습니다.


여러분 설교한다는 말의 의미는 오늘날 문자로 정착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약간 장난질하듯이 매우 series 한 의미 없이, 진지함 없이 본문의 관계를 밝히는 핏기 없는 본문해설하는 것은 설교 아니에요. 지금 오늘 이 회중들, 선의 역할 악의 역할을 구별하고 분별하고 지금 어떤 사람에게 격려를 어떤 사람에게 경고를 어떤 사람에게 심판을 그걸 대변하는 걸 설교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하면 설교가 어렵겠죠? 이렇게 해도 설교를 잘 하는 사람 있습니까? 이렇게 하는 데는 안수 받는 데는 아마 이렇게 할 겁니다. 아이고 죽었습니다, I am a baby, 하면서 나는 입술이 뻣뻣한 자입니다, 이렇게 말할 텐데 설교의 개념이 원래 이것인데도 그걸 모르고 안수 받는데 막 꽃다발 사서, 가톨릭 신부님 안수 받는 날 온 가족이 통곡을 하고 검은 옷을 입고 완전히 장례식 분위기를 방불케 하는데, 우리 개신교 목사님들 특히 통합측 목사님들은 막 좋다하면서 온집안 사돈의 팔촌까지 와서 소갈비 막 뜯고, 안수 받는 날 얼마나 잘 먹어요? 이게 이해가 안 돼요.


제가 안수 받는 날 우리 온 집안이 비통에 빠졌습니다. 김회권이 드디어 형편 없는 목사의 길로 나섰다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물론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아 잘한다, 큰놈났다, 이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9급공무원을 할 걸, 저놈 어쩌다가 마음이 약해져서 종교에 빠져서 저 짓을 하나, 이게 우리 고향 사람들의, 지금도 제가 고향에 가면 저를 봅니다. 혹시 이 사람 잘못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언자적 시사해설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으로 거기 앉아 있는 청중에게 도전하고 압박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힘을 북돋는 걸 지금 이 사람에게 한다는 걸 생각할 때 이건 성령께서 매순간 강단에 세울 때 충만한 영으로 미가서 3장 8절에 그 본문이 나에게, 이사야 50장 4-5절의 그 말씀, 나로 곤핍한 사람들을 지탱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내 귀를 깨우쳐주셔서 곤핍한 영혼을 말로 위로할 뿐만 아니라 내 수염을 뽑고 내 등을 치는 사람에게 내 등을 맡기는 이런 무섭고 위태로운 사역이 바로 예언자 사역인 걸 여러분이 알게 돼요.


이렇게 되면 기도가 엄청 많아지겠죠? 여러분 무슨 호크마 헤세데스 급하게 보고 와서 올라가서 할 수 있겠어요? 딱 보고 와서 오늘 내가 이 설교를 했을 때 나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실망하고 상처 받고 나를 개인적으로 공격할 것인가? 그 생각이 들겠죠? 그게 제대로 하나님 앞에서 예언자적 반열에 드는 설교자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 내공이 안 쌓인 사람은 절대로 따라하면 안 됩니다. 안 쌓인 사람이, 특별히 목사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그냥 바로 서서, 김회권한테 들었으니 한 번 해볼까? 하면서 오늘 여기 분명히 죄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기 제 사분반에 앉은 사람은 위로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당장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사분면 사사분면 나눠서 공격하면 바로 멱살잡혀서 화장실에 가서 코피흘릴 수가 있어요.


그러면 안 되겠습니다. 아주 성령의 감동이 와서 정말로 가슴 아픈 설교를 했을 때, 제가 98년 99년에 미국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한 80여명의 교우들이 나왔는데 이민 온지 40년 30년 20년 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교회입니다. 물론 전부 다 박사학위를 가졌고 대개 의사 사업가 박사과정 마친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뉴욕에서 돈을 벌어서 프린스턴에 와서 국무총리 공관 같은 한 60만불짜리 집에 사는 분들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신림동 출신인 제가 80년 야성을 가지고 설교를 하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매번 성도들은 저에게 꽃다발을 보냅니다.


그 꽃다발 밑에는 돈이 들어 있습니다. 돈 먹고 조용히 하라는 뜻입니다. 3천불 씩 현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그 집안 동네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설교 더 이상 그만하게 하려고, 제가 설교를 이렇게 했습니다. 요한게시록 18장을 설교하면서 여러분 미국은 천당이 아닙니다, 여기는 999당도 아닙니다, 미국은 바벨론 음녀와 같은 곳입니다, 미국에 사는 여러분은 그 못 사는 조국에서 탈출했다는 안도감으로 한때 여러분이 구원의 안도감을 누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아닙니다, 미국은 세게에서 가장 혐오 받고 있는 나라이고, 미국은 1960년대부터 85년까지 13번 남아메리카를 침략했고, 미국은 2천명 이상의 아메리카 인디언을 다 죽였고, 미국은 1200만 노예시장의 모태였고, 이걸 하면 아, 못 듣겠습니다, 제발, 그런데 그 중 이화여대 경기고를 나온 분이 반발합니다. 그럼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이냐? 그분은 매우 가난한 사람입니다. 저한테 줄 돈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주 크게 성공한 분, 일종의 프린스턴의 터주대감 같은 분이 저에게 돈을 계속 냈어요. 그런데 저는 그 돈을 제 아내와 눈물로 편지를 써서 돌려줬습니다.


이렇게 성도님 하나님 말씀의 종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참 별 목사 다 보겠네, 다 받드만, 저는 별 목사입니다. 그래서 제가,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질 때가 옵니다, 요한계시록 18장 3-4절 읽어볼까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하는 날이 옵니다, 그리고 나서 1년 반만에 진짜 제 설교를 조심해야겠다고, 큰 성 바베론이 무너졌습니다. 127층 빌딩이 무너져버렸어요. 제가 그 설교를 마치고 나서 1년 4개월 만에 그게 무너지는 걸 보고, 무너진다는 설교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분들이 지금도 저한테 돈을 주면서 저를 매수하려고 했던 성도님은 지금도 제 없는 사이에 아주 엉터리 목사님을 데려다 놓고 바로 장로가 됐더라고요. 노회도 물론 안 거치고, 지금도 장로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미국을 공격하면 미국의 삶의 기초가 매우 비복음적이라고 말하는 순간 미국 사람 시민들 모두는 엄청 상처를 받고, 내가 30년 동안 미국에서 일구었던 모든 행복의 기초를 당신이 뭔데 허물어뜨리느냐는 공격을 합니다. 저는 그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미국이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천국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는데 제 진심을 언젠가 깨달을 날이 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천국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중국 러시아 아무도 천국이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어떤 나라도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천국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천국 또는 999당에 산다고 하기 때문에 저는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공격을 받는 것은 바로 여러분 자체가 여기를 천국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 겁니다, 이렇게 제가 설득했습니다. 물론 그 뒤 이분들의 믿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거 보십시오. 옥한흠 목사님이 생애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성도의 얼굴을 보고 정말 이렇게 설교해야 하는데, 그 얼굴이 번쩍 또 다른 텍스트가 돼서 나의 가슴을 위축시켜서 그 말을 못했다고, 은퇴하고 나서 힘도 없으실 때 막 그말을 하고 다니셨습니다.


만일에 그분이 은퇴하시지 않고 사랑의 교회 강단에서 그런 말씀 한 번만 하고 옥목사님이 멱살 한 번만 잡혀도 교회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예언자적 설교를 하다가 멱살잡혀서 코뼈가 부러져서 안경테가 깨어졌다, 이건 교회사 책에 나올만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얼마나 충만해야만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애매모호한 그룹이 교회 회중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때는, 그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에스겔 본문을 보면 에스겔 예언자는 아무리 설교해도 에스겔 14장 보시면 절대로 회중이 마음을 열지 않는, 그런 회중에게 난민 목회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어느 날 나에게 찾아와서 이것이 야훼의 뜻인지 한 번만 물어봐주게 말했는데 내가 야훼의 뜻을 말해준들 우상을 품고 있는 그 장로들이 과연 내게서 들려온 신탁의 메시지를 듣겠는가, 에스겔 14장과 20장에서 거짓신앙 우상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 뜻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 뜻이 온전히 매개되겠는가? 중계되겠는가? 라는 탄식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겔 같은 예언자는 한 번도 사실상 회중에게 영접된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가시와 전갈 같다고 했습니다. 에스겔과 에스겔 회중은 끝까지 가시와 전갈 속에 있는 회중, 목회자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목사님들은 가시와 전갈 같은 회중을 경험하기 보다는 너무나 아멘을 잘하는, 목사님들 공중에 부양시켜 버리는, 저 승천 위에다 올려버리는 그런 회중들 사이에서 목회하기 때문에 얼마나 자기가 부족하고 결핍된가를 모릅니다. 실제로, 그냥 공중에 떠 있습니다.


UFO가 따로 없습니다. 목사님 자체가 UFO입니다. 붕 떠가지고 사실은 100명 교회 목사님만 봐도 어디 모르게 아우라가 잡혀 있는데, 100명 교회 목사님도 그 교구 안에서는 최고 왕이고 어떤 제후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인구가 100명밖에 안 되지만, 목사님들이 설교하고 성도들이 아멘 해주니까 결국 뭉게구름 타고 올라가다가 서서히 올라가다 비행물체처럼 돼서 현실과 분리됩니다. 결국은 목사님들이 가시와 전갈처럼 자기 메시지를 대적하고 나사렛 설교를 듣고 나사렛 지주들이 예수님 멱살을 잡고 낭떠러지까지 건너가서 그냥 예수님을 밀쳐 떨어뜨려 죽여버리려고 했던 참담한 고난, 그걸 우리 목사님들이 조금이라도 경험해본다면, 한 번이라도 그런 위험한 사태의 반발을 경험해봤다면 그는 진짜 성경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고, 그는 목회자의 세계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세례요한은 예수님은 그 당대의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다가 오늘 이사야 61장 1-4절이 오늘 나사렛 사람 모두에게 당장 응했습니다. 무한 순종의 부담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드바라 아도나이, 여호와의 말씀이 지금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이사야 61장 1절, 은혜를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이 듣는 여러분에게 무한한 부담을 주면서 오늘 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요셉의 아들 예수님의 경악스러운 말을 듣고 나사렛 사람이 예수님을 잡고 낭떠러지로 데려가서 예수님을 잡고 밀쳐버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들, 아모스 이사야 에스겔 등이 당했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설교가 너무 너무 엄숙한 일이고, 성령으로 무장되지 않은 사람은 강단에 설수가 없고, 오늘 우리 시대 민중들의 삶속에 일어난 죄와 주님의 강대상에서 만나야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처절한 영적싸움의 현장이지, 양복입고 폼 잡을 수 있는 순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 너무나 우리 시대의 죄가 깊고 하나님 앞에서 이 죄가 심각하기 때문에 그 죄의 본질과 하나님의 엄숙한 진노의 정당성을 본문을 통해서 말해야 하기 때문에 비껴갈 수 없기 때문에 설교행위의 엄숙성, 그건 너무 대단하다는 겁니다. 목사님들께서 에스겔처럼 예수님처럼 특정한 본문을 가지고 오늘 이 본문이 여러분에게 임했습니다, 라고 소리치는 이런 식의 설교행위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다음날 낭떠러지까지 끌려가서 붙들려 어찌될이지 모르기 때문에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올라가야 하고, 그 전에 나는 입술이 뻣뻣한 사람입니다,


나는 어린아이입니다, 라고 하나님께 진짜 거짓겸양이 아니라 약간의 위축된 마음을 가지고 올라가야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하나님께서 과감한 말씀의 능력을 주실 수 있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전파하는 행위가 내가 잘 아는 분야야, 내가 노래 한 자리 부르는 것과 같아, 내 개인기 보여주는 것과 같아, 라고만 한다면 그건 제가 볼때는 성경적인 맥락의 예언적, 고전적인 의미의 설교행위가 아니죠. 제가볼대는 디모데도 아마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않게 처신하라는 말을 들은 걸 볼 때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는가 싶어요.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도 결국 바울의 편지를 가만히 분석해보면 나이가 어린 주니어 목회자로써 주니어 바울로써 상당히 어려움을 겪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말은 하나님 말씀을 권하고 경계하고 책망하라는 말을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에서 하거든요. 디모데후서 3장 16절-4장 2절까지를 보면, 말씀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경책하며 경계하며 격려하며, 이런식으로 하나님 말씀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갈때까지 말씀을 읽는 것과 경계하는 것과 경책하는 것과 격려하는 것을 계속하라는 말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해주거든요. 그런데 디모데가 말씀으로 권면하는 그 일, 회중의 죄를 고발하는 그 일은 심약한 디모데에게 매우 힘들었을 것 같아요. 디모데가 하다가 안 돼서 위궤양 같은 게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디모데더러 포도주를 아침에 꼭 먹어라, 위가 아침에 찬성함이라, 아침에 포도주를 통해 속을 데워라 하면서 그런 권면을 받습니다. 이걸 볼 때 디모데의 설교사역도 똑같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설교사역은 4세기 교구때 암브로시우스라는 사람이 가장 크리스천 로마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황제 앞에 데살로니가 사람을 학살한 죄를 물어서 성찬식을 하지 말라고 눈속에 세워놓았던 이런 기상이 교부들때까지 이어집니다. 제로옴이라든지 크리소스섬 까지 쭉 이어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황제와 제후의 국가공무원으로 성직자가 바뀌면서 이런 모든 예언자적 기상, 그시대의 지배층과 왕과 제후의 죄를 고발하면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후퇴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아예 그런 전통적인 교회사의 예언자적 사역과 설교사역의 중심에서 많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 날 누가 많은 사람을 모으게 하는가가 마치 성경의 설교의 정범처럼 통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예언자적 시사 읽기의 핵심은 본문주의에 빠지지 말고, 그 본문을 가지고 본문의 빛 하에서 오늘 우리시대의 하나님 말씀으로 재해석하고 분석하고 회중을 책망할 사람은 책망하고 격려할 사람은 격려하여 의로 바로 교육할 사람은 바로 교육하고, 이런 일을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언자적 시사읽기의 전형이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또 질의응답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랑하는 형제자매 앞에서 설교 선포사역의 엄숙성과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의 두려움성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우리를 응당 환영하는 회중들 앞에 말씀을 대언하지 않고 가시와 전갈 같은 회중들, 죄를 일삼으면서도 죄를 회개할 마음이 없는,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 한복판에서 메시지를 전하면서 하나님 우리가 위축되기 싶고 우리가 이 과업을 회피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무한한 용기로 성령의 능력으로 회중을 진짜 살려내는 죄를 지적하고 경책하고 경계하여 영혼을 소생케하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여기 온 모든 형제자매에게 그런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사회자 열변을 토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토론시간인데요. 30분 토론하고 그리고 오늘은 강사이신 목사님만 나오셔서 질의응답하지 않고, 김영봉 목사님, 전인수(?) 목사님 박은수 목사님 이찬수 목사님 그리고 김회권 목사님 다 패널로 나오셔서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세 가지만 압축해서 이야기를 나눠주시면 좋을 듯싶습니다. 목사님께서 영감 받았다는 것이 불의한 권력에 마주서는 신앙적인 패기라는 표현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날 이런 불의한 권력에 마주하고 종교권력을 비판하는 우리 시대의 예언자는 과연 누구일까? 이런 부분을, 꼭 교회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폭넓게 상징적인 의미에서 같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번 나눠주셨으면 좋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날 역사와 현실이 설교자로써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무엇일까? 라고 하는 그런 부분이고, 두 번째가 그렇고요. 세 번째는 사실 예언자들은 범인들이 놓치고 살아가는 역사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구라고 하는 땅덩어리에 살지만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하고 있지만 아무도 이를 체감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그 움직임의 거대한 축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거대한 축의 미묘한 움직임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존재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미묘한 변화의 축을 감지했었던 예언자들의 영성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을까? 이렇게 세 가지를 주제로 해서 같이 토론해주시고 그다음 끝나고 나서 여섯 분 모시고 질의 응답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오신 분들 중 교단이 합동측이 제일 많은 걸로 알고 있고요. 대부분 복음주의권의 목회자 목사님들이 오신 것 같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두란노서원에서 한 9년 있었고 <뉴스앤조이>에서 2년 <기독교사상> 이라고 하는 잡지에서 한 10년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복음주의권과 애큐매니컬 진영의 여러분을 만나고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 한국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논의하는데, 뿐만 아니라 기독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가톨릭이나 불교에 관련된 분들을 만나면 세 개의 종단에서 만나면 그래도 기독교에는 희망이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기독교 안에서 감리교 장로교 서로들 그래도 장로교는 희망이 있어, 감리교는 더 이상 구제불능이야,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거의 내부 안에서 자신들을 보고 들여다보면 우리 교단이 희망이 없어, 이런 식의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에 멘토링 하는 컨퍼런스 같은 경우도 거의 복음주의권 목회자님들이 오셨지만 나름대로 생각하는 교회현실도 있을 것이고, 목회 현장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오늘 이 자리에서는 물론 김회권 목사님께서 발제하신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질의응답이 있겠지만 나오신 분들 모든 분들에게 주제와는 상관없어도 괜찮고 궁금한 부분들을 질문해도 되겠습니다. 토론한 것 중에 혹시 간략하게 두세 조만 발표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없으십니까? 그러면 강연이 너무 완벽했다는 증거인지, 신앙적 패기를 보여주시죠. 영감을 받으셔서, 이렇게 요약해서 얘기할 실 분 없으십니까? 마이크 좀 드시겠습니까?


조아론 총신대 신대원 2학년 조아론입니다. 예언자적 설교를 하라는 것이 여러 함의적 뜻이 있어서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본인은 신적압박을 느껴서 시사적인 문제를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예를 들어 박원순 시장이 후보로 나오는 건 사탄을 따르는 자를 추종하는 것이다, 그게 그분에게 있어선 신적압박을 느껴서 설교강단에서 예언을 한 겁니다. 어떤 분은 용산사태는 이명박 정부가 분명히 잘못한 행동인데 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느냐? 언론에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데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이건 분명히 성경에 비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적 프레임이 다르면 본인의 진정성과 다르게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강의를 들으면 각자 분들이 느끼기에 본인의 기준에 따라서,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결론이 다른 예언적 설교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석적 프레임 같은 것, 그런 부분이 정치적 성향과 다르게 고정된 부분이 있는지, 그 부분에 대한 김회권 목사님께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회권 예레미야 23장, 신명기 13장, 신명기 18장, 에스겔 14장이 거짓예언자와 참예언자를 분별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맞습니다. 거짓 예언자들도 신적압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편한 묵시와 자기 마음의 상상에서 나온 거라고 예레미야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동시대에서는 예레미야가 패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BC 582년에 철퇴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갔던 망명객들에 의해서 죽었고요. 거짓 예언자들은 대부분 그 당시 다수파였기 때문에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을 바벨론의 앞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그 말을 예레미야는 신적압박을 받아 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게 저항하라, 애국시민들이여 총궐기하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들이 한 말이거든요. 똑같습니다. 지금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예언자들을 동시대에서 바로 현장에서 분별하는 건 매우 힘들고 죽어봐야 압니다. 우리는 모르고 사실상 우리보다 100년 후 사람들이 판단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죄라는 이 말은, 박원순이라든지, 김 무슨 목사님 이런 분들이 하는 말과 제가 하는 말은 똑같이 혼선이 돼서 사실 영적공중전파가 완전히 흐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공중에 권세 잡은 자입니다. 전파를 권세 잡은 자고요. 그래서 죽어봐야 안다는 겁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첫째, 말씀과 예언 사이의 성취기준, fulfillment criterion 이라고 합니다. 말씀이 현실에 응하면 참예언자입니다.


두 번째는 참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을 향한 충성심을 이탈시키면 그건 거짓예언자입니다. 아무리 성취가 되어도요. 그래서 허탈한 묵시가 때때로 성취가 돼서 우리를 혹세무민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에서 이탈하면 그 사람은 성취된 기준을 통과했지만 거짓 예언자입니다. 세 번째로 표절하면 거짓예언자입니다. 허탈한 묵시를 남발하는 사람들은 먼저 강력한 허탈한 묵시를 ??하는 사람들의 말을 표절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3장에 표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표절한 사람이 장관이 많이 되죠. 표절하면 장관 안 됩니다. 그다음 네 번째 기준이 중요합니다. 네 번째 기준은 신적압박감과 자기 마음의 상상력, 그다음 다섯 번째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말은 옳은 말도 거짓예언자입니다. 어떤 여인의 가산을 침탈하는 자, 여인과 칠계명을 어긴 자, 이 자들은 거짓예언자라고 돼 있습니다. 그 자들은 옳은 말을 하더라도 그들의 예언들은 맥락 안에서 자기 복무적인 self serving 하는 오른 칼이 되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경에 많이 씁니다. 다시 말할까요? 신명기 13장 18장, 예레미야 23장, 에스겔 14장 20절, 여기 보면 거짓예언자 있고, 제가 쓴 책에 대부분 다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죽지 않아도 저 사람은 거의 확실히 거짓 예언자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제가 개인적인 담화에서만 말하고 공중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혹시 궁금하면 저한테 오면 제가 밥 먹다가 거짓 예언자 명단을 발표해드리겠습니다.


김영봉 저 뒤에서 제가 몇 분이랑 토론하는 걸 봤는데 시사적 설교 혹은 예언적 설교라는 것이 무엇을 다루느냐 그 주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이, 이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 그것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생각해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면 예언적 설교 시사적 설교이고, 개인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 그건 시사적 설교가 아니고 예언적 설교가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라 무엇을 보든지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승인하고 인정하고 두둔하고 위로하는 그러한 시각을 가지느냐, 아니면 그것이 진리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꿰뚫어보고 흔들어서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흔드느냐 그것에 의해서 예언적 설교와 예언적 설교가 아닌 것이 판명난다고 생각해요. 영어표현으로 설교는 comfort the afflicted, afflict the comforted,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편안한 사람들을 흔들고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흔들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두 가지 기능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 점에서 조금 혼동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보시면 맞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이 질문에 대해서 다른 목사님 혹시 코멘트 하실 부분 있으십니까?


윤중호 안녕하십니까? 저는 제일스페인교회에서 섬기는 윤중호 목사입니다. 고신입니다. 지금 오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유럽에서 현실적으로 몇 분들, 유럽에 있는 분들이 좀 질문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 인권에 대한 문제를 직접 물어보고, 저에게도 물어보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이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북한 인권에 대해서 북한의 탈북자 소환문제라든지, 또 김정은 체제 하에서 고통당하는 북한 인권, 이런 부분을 우리 설교자들이 어떤 pushing으로 해석을 하고 또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알려주는 것이 좋은가, 그런 부분들이 궁금하기도 해서 질문 드립니다.


사회자 질문 중에 비슷한 맥락의 질문이 있어서 덧붙여서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괄호 열고 북한 괄호 닫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실 때 선지자의 입에 어떤 말을 주실 것 같습니까? 이런 질문입니다. 잘못하면 요새 종북논란에 휩싸일 수 있고, 임수경 씨의 설화 때문에도 지금 불을 붙였는데, 아무튼.
김회권 혹시 정목사님 해주실 수 있습니까? 답변.


정용섭 제가 종북좌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런 입장이죠. 북한은 체제나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많습니다. 탕자와 비슷해요. 현재거든요. 문제는 있는데 이걸 어떻게 풀 것인가가 관건이 아니겠습니까? 그 돌아왔을 때, 북한은 현재 돌아오진 않았어요. 그러나 그 전제로 우리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냐, 아니면 형의 마음이냐, 형은 나는 온전하고 재산 탕진한 걸 비판하는 자세냐? 아니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비존재보다도 악이 낫다, 저는 그런 입장입니다. 있는 거니까, 그는 변화될 수 있으니까, 북한이라고 하는 실체가 우리 형제로 있는 것이 낫다, 자기들의 문제를 풀 때까지 우리가 인내하는 게 낫지 않느냐? 참아주자, 옳기 때문에 정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참는 게 아니라 아직 잠정적이고 과도기 때문에 세습이라든가 인권문제도 있지만 제 입장은 침묵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회권 우리 정 목사님은 제가 판정해드립니다. 친북 아닙니다. 이분은 정상입니다. 양심적인 민족적 감각이고, 친북은 북한의 정치적 노선을 비판할 수 없는 태도입니다. 목사님은 지금 탕자라고 하고 김정은은 저희 볼 때 탕자 아니거든요. 저희 볼 때, 제가 볼 때 이건 자신감이 넘치는 포용주의자 입장이고요. 저는 북한인권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문제제기 하기 힘들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제기하며 된다는 입장이고, 역할분담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북한에서 내는 신문기사에 보면, 이런 겁니다. 남조선 인권개념과 우리 인권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노동교화소에서 몇 달동안 일하고 때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몇 만 명씩 계속 수련회를 한다, 우리가 볼 때 수용소라는 것이 일종의 삼청교육대보다 훨씬 더 가벼운 노동교화소입니다. 정신개조소, 그런 말을 하는데 우리는 남조선처럼 감옥에 가둬서 완전히 불구를 만들지 않고 교화를 시킨다, 이런 식으로 말하고 그들 수용소 존재를 인정합니다.


직장도 없는데 관념적 자유가 많은 것이 인권이냐고 물을 때, 인민민주주의 개념에서는 아니다, 인권의 완전한 개념은 일터가 있고 자기 자존심을 향유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는 것이 인권이다, 이 모두가 패키지가 인권인데 남조선 거주이전의 자유와 신체이동의 자유는 있지만 직장이 없다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인권이 아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인권의 개념이 약간 다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남한과 북한 전체에 최악의 점을 공격하면서 최악만 공격한다면 그건 옳지 않고 남한과 북한 속에서 정기능, function 잘 하는 그 부분도 인정하면서 그걸 인정한다면 저는 OK입니다. 그러나 북한사회주의가 이렇게 잘되고 있는 부분은 전혀 인정 안하고 북한의 최악의 부분만 공격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되고 있는 게 많은데 우리가 계속 무슨 조폭문제라든지 불법사찰 이런 걸로 자꾸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도 공평한 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죠? 제가 생각할 때는 한 국가를 도덕적 완전 구현자로서 보지 말고, 국가자체 간 빈틈을 인정하고, 남한과 북한을 동시에 인권문제를 분석해서 비판하면 저는 OK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대예배시간에 하지 말고, 예를 들어 6.25 상기예배라든지, 아니면 7월 27일 한국참전휴전 기념일예배 때 사회과학자과 토론을 시켜야지, 그걸 강단에서 수직적 계시선포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건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 제가 이 분야에 대해서 공부 많이 했지만 김병노 문영란 이런 사람을 불러다 놓고 먼저 특강을 듣고 나서 토론을 붙였습니다. 설교는 토론하지 않지만 이런 북한문제나 인권문제 같은 건 토론을 붙여서 약간 다른 사람도, 조선일보 보는 사람과 한겨레신문 보는 사람 모두 다 환용을 깨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유도하면 된다고 봅니다.


저는 북한에 가면 북한 선지자가 만일 들어갈 수 있다면 제가 볼 때 아모스 같이, 인민을 버리고 기근상태를 하는 건 큰 잘못입니다, 좋은 말할 때 고치세요, 이렇게 하게 될 거라 봅니다. 저는 예언자입니다. 북한을 사랑하는 예언자라면 북한의 나쁜 점, 약점, 그러나 북한을 모욕적으로 공격한다든지 공화국의 지존을 건드려서 도발적인 발언을 한다는 것, 이건 제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러나 북한에 가서 정말 북한 사람들에게 진심을 담아 선포한다면 감옥에 가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보람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사회자 지금 토론의 질의응답이 북한문제나 이런 쪽에 지엽적으로 국한시키지 말고 오늘 큰 주제 타이틀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질문자 제가 간사한테 물어봤더니 김회권 목사님의 강의 내용에 벗어난 질문을 해도 되느냐고 했더니 된다 해서 제가 일어섰습니다. 제가 한국교회 여러 가지 문제가운데 심각한 문제가 수평이동입니다. 수평이동, 기독교인은 늘지 않는데 수평이동 하는 바람에 거기에서 큰 교회야 좋겠죠. 그러나 개척교회라든가 서울에 있는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눈물로 보내고 있는 것이 문제인데, 더 큰 문제는 이 수평이동에 대한 큰 교회 목사님들의 인식 의식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두 분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그래도 큰 교회 하시니까, 박은조 목사님과 이찬수 목사님이 수평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찬수 저는 저녁에 말씀드리려고 준비하고 있고요. 박은조 목사님한테 넘겨드릴게요.
사회자 박은조 목사님 내일 하신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주제가 아닌데 괜찮은지,
김회권 제가 볼 때는 수평이동이 심각한 시사문제라고 보거든요.
이찬수 수평이동이 저녁에 할 건데, 수평이동이 아마 우리 시대에 제일 혼미한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굉장히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녁에 말씀드릴 걸 미리 잠깐 드리자면, 저 같은 경우는 이 시대의 죄인입니다. 전 방위적인 죄인입니다. 제가 아까 조금 전에 우리 강사님들하고 그런 말씀을 방금 나눴는데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두 달 있으니까 책이 한 권 나왔는데 그 책 제목이 <양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제목을 보면서 사보진 않았는데,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제 양심이 견딜 수가 없어서, 수평이동, 기존성도 안 받는다는 선언을 했었습니다.


개척하고 한 1년 전후쯤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기존신자 안 받는다는 걸 두 번 시도를 했는데 그랬더니 저는 그게 굉장히 큰 용기이고, 큰 결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보는 시각이 너무 다른 거예요. 어떤 쪽에서는, 너마저도 이러느냐, 이런 시각이더라고요. 처음에 기존신자 등록을 안 받습니다, 라고 선언했던 그 주간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시각이, 너마저도 이러느냐, 그게 너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그랬는데, 그 주간에 아줌마 세 명이 찾아왔습니다. 주중에 세 가정이죠. 세 가정이 오더니 울기 시작하더라고요. 울면서 한 분이 저를 향해서 분노를 가지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자기는 지금까지 개척교회에서 몸을 바쳐 충성했는데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남편이 믿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편이 난 이 교회는 안 가겠다, 선언을 한 거예요. 교회를 막 떠돌다가 분당 우리교회에 와서 남편이 마음이 들까 말까 이런 상태인데 갑자기 목사가 안 받는다는 그 말을 하니까 집안이 뒤집어졌다는 거예요. 잊히지 않는 게 울면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가 무슨 프랜차이즈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나는 교회를 위해서 이렇게 수년간 충성했는데 교회는 왜 내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막 눈물을 흘려요. 그래서 제가 그때 세분한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공개적으로는 안 받는다고 하고 뒤에서는 받을 수 없지 않느냐고 그렇게 하다가 우야무야 된 적이 있었고요. 작년에 한 번 더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분당중앙교회가 저희 5분 거리이기 때문에 자꾸 들리는 이야기가 분당중앙교회 사람들이 이제 분당우리교회로 많이 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제가 정식으로 남의 교회 이름을 거론하며 광고한 건 아마 처음일 거예요. 정식으로 분당중앙교회 성도님들은 돌아가시라고 했습니다.


자기교회로 돌아가시면, 우직하게 교회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다 이제 회복하고 수속해주실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기존교회 성도 등록은 다시 안 받는다고 광고를 했는데, 그러고 나서 새가족부가 있잖습니까? 새가족부가 갑자기 일이 없어지게 됐잖아요. 기존신자들은 안 받고 전도되어 온 사람만 받고 하니까 그걸 구분해서 받는데, 매주 가슴이 너무 아픈 거예요. 매주 눈물을 훔치면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큰 교회고 작은 교회를 떠나서 교회의 너무나 몰상식한 행태 때문에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교회에 온 초창기 성도들 중에는 자기 집을 팔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교회2층에 얹혀살고 그랬는데, 담임목사 사모님이 담임목사하고 권사님을 불륜으로 몰아서 그렇게 해서 쫓겨나다시피 한 분이 계세요. 이런 식으로 떠돌던 분이 갑자기 어느 날 분당우리교회가 등록을 안 받는다고 하니까 절망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돌아서는데, 우리 새가족부 봉사자들이 매일 주일마다 울음바다가 된다는 거예요. 등록을 못 받는 것 때문에, 그러다보니까 목사님 말씀처럼 그냥 이건 무조건 양 도둑질, 이런 시각이면 저희가 판단하기가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앵글에 따라서 이 각도로 보면 보트피플이에요. 탈북자들이에요.


너무 교회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 분당 같은 중산층이 사는 데도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말이 안 되는 성추행서부터 이렇게 해서 교회를 떠도는, 초창기에 어떤 분이 계셨느냐면 몇 번 이런 일을 겪고는 이제 부부가 우린 교회 안 간다, 우린 무교회주의자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 날 가정에서 예배드리면 되지만 사춘기 아이는 통제가 안 되는데, 이찬수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다니까 이 아이를 맡기고 우리는 교회를 안 간다, 이런 경우가 있을 정도에요. 그러니까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탈북자에요. 보트피플이에요. 못 견뎌서 나온 사람인데 내가 우리 배에는 타지 마라, 이렇게 말하기가 너무 어렵고, 결과를 놓고는 아까 목사님이 저에게 여러 말씀 중에 갑자기, 이찬수 목사님 교회에 사람 많이 모이죠? 그러면 저는 가슴이 쿵 내려앉아요. 또 죄인이 돼요. 그리고 제가 말문을 잃게 되고 변명하게 돼요. 그래서 여기서도 죄인이고 저기서도 죄인이고, 그건 저녁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오늘 우리 시대가 우리가 목사라고 한다면 작은 교회에서 고민이고 큰 교회에서 고민이고, 고민하지 않으면 전 타락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오늘 저녁에 이 부분을 다시 좀 나누기로 하고요. 목사님 용서해주세요.


사회자 찬물에 세수하는 질문은 이찬수 목사님이시죠? 그 질문을 이따 강의 끝나고 하시면 좋을 것 같고요.
지강유철 이 문제에 대해서 저도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은데요. 이 시대의 전 세계를 망라해서 인권이나 자유는 시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보편적인 가치의 문제죠. 한 국민이 어느 국가에 살든지 종교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굉장히 중요한 가치인데, 이 법은 잘못된 법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국민으로 살아가는 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 행복추구권이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문제, 이건 악법도 아니고, 악법과 신앙양심이 충돌하는 부분이 아니고, 보편적인 교양과 상식과 수평이동의 문제가 굉장히 충돌하는 것 같은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시사에 밝으신 김회권 목사님께 부탁을 드립니다.


김회권 수평이동이었죠? 제가 볼 때 개인의 행복추구권 측면에서는 저는 지강유철 선생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 발생하는 구조가 제가 볼 때는 아주 노골적으로 양 도둑질하는, 다시 말해서 양을 먹일 생각이 아니라 양을 잡아먹을 생각을 하면서 양을 만일 도둑질한다면 그건 윤리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타당하지 않겠지만, 제가 볼 때 한 성도가 느끼는 영적만족감을 수평적으로 배분하면서 너는 이 교회에 만족해야 해, 하는 마음으로, 일종의 가톨릭 교구의 개념으로 너는 이 수준이니까 이 교회 다녀야 해, 라고 하면서 그걸 정해주면서 교회 옮기는 걸 만약 비난한다면 그건 좀 지나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만일 A라는 교회에서 B로 많이 가면 재정이나 다른 모든 문제를 가지고 떠나온 그 교회를 돕는 것, 그 모델이 나오면 좋겠다고, 이찬수 목사님이나 사랑의 교회나 이렇게 큰 교회가 그 지역교회를 전부 다 하나님의 교회로 어떤 이름도 인적 재정적 구조적 교회 프로그램적으로 돕는다면, 지금 떠나온 모교회가 교육프로그램이 너무 약하고 설교가 약하기 때문이라면 약간 평준화시켜주는 방향으로, 그 목회자님들을 교육을 시켜주고 도와주고 이런 쪽으로 간다면 이 이동의 문제는 순환의 문제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이동이 하나의 A라는 지역에서 B로 가는, 위에서 아래로 가는 위치에너지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동이 아니라 순환, 비가 흐르듯이 순환하는 식으로 가는 개념이라면 저는 이찬수 목사님이 죄책감을 가지지 않고도 오는 교우들을 다른 방식으로 다시 잘 훈련된 교우들을, 예를 들어 1년 동안 장로님 권사님 100명을 그 교회에다 파송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만일 좋다면 그 교회 목사님과 계속 10년 동안 파송해서 일하는 걸 도와주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기발한 방법을 한다면, 이게 빈부의 문제도 아니고, 다만 목사님이 많은 교우들을 유발하는 그 요인은 실체가 있다고 봐요. 메시지가 하나님 앞에 영적 의사소통을 도와준다든지, 그런 건 목사님이 작은 교회나 이런 교회 가서 멘토링을 해주고, 계속 교육프로그램을 등질화시키고 균등화시켜서 이렇게 큰 교회를 찾아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조성해주는 게 필요하지 않겠나 싶은데, 저는 이 점에서 그래도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가 인적 물적 지원을 먼저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 50명씩 만일 1년 또는 2년 동안 계속 도와주는 겁니다. 가주는 겁니다. 1부 예배는 이찬수 목사님 예배를 드리고 11시 예배는 개척교회에 가 드리면, 원래 식당에도 많은 사람이 앉아 있는 데 들어가 보고 싶잖아요. 그래서 100명 정도 앉아 있으면, 물론 임대교인이긴 해요. 그러나 임대교인이지만 주 안에서는 결국 같은 거예요. 우리가 아주 미시적으로 보면 임대교인이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같은 교인이니까 그분이 100명까지 갔다가 그 중에 뜻이 있으면 자유해서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그냥 그 교회 다닐 수도 있고, 이렇게 된다면 어떨까요? 저는 이찬수 목사님이나 강남의 거의 대부분 교회 목사님이 이렇게 우리가 플랜을 만들어주면 여기에 동의할 거라고 보거든요. 제가 볼 때,
사회자 재래시장 살리기 위해서 대형마트가 의무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쉬는데 대형교회도 십일조 내는 맨 마지막 주를 이렇게,
김회권 제가 사랑의 교회에다 무얼 제안했냐면 사랑의 교회가 서초구 일대 반경 5km 일대의 작은 교회에 교인을 50명씩 보내주고, 일단 십일조를 많은 부분을 주고 거기 교회 월급을 평균케 해주고, 그걸 해달라고 저는 계속 부탁하고 있어요. 똑같이 목사님 대해주면 이건 큰 멋진 일이 될 것 같고, 충분히 재정지원 가능하거든요. 교회 목사님들 월급을 한 200만 원 정도 맞춰드리고 교우들을 계속 보내주면, 한 달에 한 번씩만 우리가 가서 지역교회를 섬기는 것, 결국은 네 교회 내교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사실을 화목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되지 않겠나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있는 교회는 참고로 작은 교회입니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안 모였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안 모이면 딴 교회 가서 하나 되는 우주적인 그리스도 몸 된 교회의 일치성을 위해서 우리가 안 모이고 딴 데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래서 드리러 간 경험을 다시 모아서 하는데, 제가 지금은 담임목사님 아니라서 못 합니다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가 구심력 적 권력집중보다는 순환을 통해서 사람도 순환하고 교회 프로그램도 순환하면 좋겠다고 봅니다.
사회자 그러면 질문지 중에서 하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시사를 언급하고 정치를 말하면 교회 내에서 찬반이 첨예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개인적 비판만이 아니라 교회 불만까지 이어진다면 과연 시사읽기에 기반한 설교를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내에는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우든 좌든 한쪽으로 편향된 설교를 할 경우, 정치적인 설교를 할 경우에 교회의 분란이 이어진다면 과연 시사읽기에 기반을 둔 설교가 타당한 것이냐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김회권 책자 24쪽 결론의 3번과 4번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3번 읽을까요? 결론입니다. ‘의도적인 우호성, 애매모호성을 적절히 구사하여서 회중분열까지는 초래하지는 않아야 한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의도적인 우호성과 애매모호성은 절대로 정당이름을 말하거나 회사 이름을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삼성이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볼 때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의 십일조에는 거의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예가 4번입니다. ‘성경적인 시사해설로 된 성경묵상과 짧은 설교가’ 찰스링마 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행동하는 신앙인에 대한 묵상> 이라고 해서 자크 엘 룰의 책을 가지고 매 시사문제를 분석해서 적용하는 조이출판사에서 2004년에 나온 책이 있는데, 이게 아주 좋은 책입니다. 그다음에 찰스 콜슨이라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분이에요. 이분이 www.breakpoint.com 들어가면 시사문제를 중동파 복음주의 관점에서 자세하게 풀어놓고 있어요. 찰스 콜슨은 시사 문제를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의 빛 하에서 푸는데 대부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이런 분은 짐 윌리스처럼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대한 교조주의적 확신에 대해서 경계를 합니다. 이건 매우 위험한 거라고,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성경적인 시사해설이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이바지하는 걸 도와주는 접목시키는 책이 찰스링마의 자크 엘 룰 묵상집인데, 이 책을 보시면 어떻게 설교를 구상하는가가 자세히 안내가 돼 있고요. 저는 대예배시간에는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왜? 대예배시간에는 일단 설교시간이 25분에서 30분밖에 안 되고 또 헌금순서라는 귀한 게 있기 때문에 함부로 이런 문제를 해서 교회재정 파탄을 내서는 안되겠습니다. 헌금순서가 없는 오후예배라든지 수요예배 라든지 특별 세션에서 이걸 다루는 게 낫다, 제가 6.25 한국전쟁 때는 꼭 김병래 교수나 전문가를 불러다, 제가 똑같이 할 수 있지만 전문가를 불러서 하고, 그다음 반드시 질의응답을 통해서 조선일보 보는 사람도 너무 억울하지 않도록 이렇게 했습니다. 제가 볼 때 시사해석에 대한 예언은 돌아가시기 직전 한 5년 동안만 하면 좋겠습니다. 바로 20대 때 하기에는 위험한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기 전에 철퇴를 맞는 게 낫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매우 완숙한 단계에 가서 해야 하고, 스펄전 같은 사람, 조나단 에드워드, 스펄전, 마틴 로이드 존스 같은 설교자를 보면 간간이 시사문제가 나옵니다. 존 스타트 같은 경우, 그런데 그들의 시사문제를 보면 매우 우화를 합니다. 표현이 매우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강대국이라 해서 약소국을 맘대로 총칼로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걸 1982년 4월에 그런 설교를 하면 그건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한 것에 대한 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되지, 예를 들어서 북한이 먼저 공격했는지 남침이 먼저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김일성 책을 읽어봤습니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그날 교회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지혜롭게 해야 하고 의도적인 애매모호성과 전문가를 활용해야 하고, 대예배시간에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저의 실천적인 권고입니다.
사회자 이런 질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나꼼수가 과연 상징적인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예언자적 메신저라 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청년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정용섭 목사님, 이 질문과 더불어서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우리 시대의 상징적인 예언자, 이런 부분도 언급해주시면 어떨까 싶은데요.
정용섭 그런 것에 대한 대답을 할 준비가 사실은 안 되어 있는데요. 제 머릿속에는 그냥 주일 대예배 때 그 설교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 관심 있어요. 주일대예배설교만, 그러니까 이 시사문제나 이런 것과 관계없는, 케리그마(?)에만 관심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말하기가 좀 힘듭니다. 예수 사건 안에서 벌어진 것들이 그게 잘 밝혀지기만 한다면 시사문제까지도 포괄하면서 어떤 걸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거든요. 어쨌든 나꼼수와 현대 예언자 말씀하셨는데 그건 우리 복음이나 설교나 여기엔 상관없는 이야기,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는 정도, 하나의 트렌드로 이해하고 우리는 조금 더 거시적인 우주론적인 하나님의 구원통치,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일단 나꼼수는 그렇게만 생각합니다. 현대예언자들, 꼭 예언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다 예언자라고 생각하거든요. 굳이 사회정의만 해야지만 예언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찔림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꼭 사회적인 무책임과 죄책감, 이런 것만이 아니잖아요? 세계 사물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고 성찬식을 할 때 빵을 습관적으로 받는다거나 한 사물 속에 들어와 있는 전체 하나님의 어떤 신비로움, 이런 것들에 확 눈이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게 찔림, 영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곳곳에서 모든 예언자들이 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현대 물리학자들 생물학자들 이들이 이 세계의 물리나 생물학적인 어떤 원리들을 풀어 준다면 그것도 예언자 역할이 아니냐? 사회과학자들도 마찬가지고요. 목사가 그런 일들을 다 감당 못하거든요. 특별히 사회과학에 안목이 있는 전문가들, 우리가 그렇게 사회를 못 봅니다. 제가 아까 북한 문제에 대해서 침묵 비슷하게 한다고 한 이야기는 북한의 메시지를 잘 모르니까,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제가 재단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간접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지는 게 있지만 그것도 왜곡된 정보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폐쇄된 사회에 대해서 같은 민족으로써 아프지만 조금 기다린다, 그런 상태입니다. 세계의 모든 것에서 진리를 향해서 구도정진의 자세로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예언자다, 목사가 모든 부분을 다 감당할 수 없으니까 주로 케리그마, 예수에게서 일어난 사건들, 부활 종말 생명 재림 대림 성찬, 이러한 것에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줄여서 다른 것들은 다른 분들이 하도록 하고 다른 것들은 서로 연대하고 우리의 고유한 일을 집중해서 하자,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회자 나꼼수가 사무실이 대학로에 있더라고요. 그 지붕이 어떻게 구성돼 있느냐면 벙커에요. 벙커원인데 거기 사무실하고 두 달, 한 달된 것 같습니다. 거기서도 교회를 시작했더라고요. 아무튼 자기 나름의 열정도 있고 몸부림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보니까 요새는 <나는 꼽사리다>라고 하는 프로그램도 있고요. 이쪽뿐만 아니라 대구에서도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저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그냥 시대를 울리는 경종, 웃음 속에서도 우리가 발견하고 눈떠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이 들고요. 박은조 목사님, 한 말씀 좀 해주시죠. 지금 논의되고 나온 이야기에 대해서.
박은조 제가 이야기를 하자면 수평이동 이야기를 해야 할 부담감도 느껴지는데, 왜냐하면 저는 수평이동을 칼로 끊듯이 중단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여러분이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는 아까 우리 지강유철 씨 이야기나 김회권 목사님께서 이찬수 목사님 이야기에 이어서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단지 제가 수평이동을 중단하고 교회를 새로 세워야겠다고 하는 것은 아주 개인적인 인도하심이었습니다. 2006년에 유진 피터슨 목사님하고 한 일주일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 우리 목회자들이 한 30여명 팀을 짜서 한국에서 갔었습니다. LA까지 오라고 했는데 이분이 비행기를 못 탄다고 해서 우리가 그분 고향으로 갔습니다. 몬태나의 그분 살고 있는 집에서 10분 거리의 수양관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한 열흘을 있다 왔는데, 그때 이동훈 목사님도 같이 갔었습니다. 그때 전체시간 열흘 정도를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주 강사였고, 이동훈 목사님이 부강사였고, 저도 한 시간 강의를 하고, 미국에서 오신 분들하고 같이 한 50여명이 같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제 고민이 하나님이 교회를 어떻게 건강하게 세워갈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한참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98년에 설현동(?)교회에 4번째 분립교회를 시작해서 샘물교회가 한 7,8년 됐을 때입니다. 새로운 건물 입주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지하실에 있다가 건물을 하나 사서 입주를 하는데 그 건물이 그렇게 큰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주차장이 130정도밖에 parking이 안 되고, 예배당 공간은 2300석밖에 안 나오고, 그때 모이고 있던 숫자가 한 4천명 모이고 있었는데 그 숫자가 들어가는 게 불가능한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세를 또 얻어야 하는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 그때 한 열흘 보내면서, 건강한 교회 운동을 위해서 개인적으로 8,9년 동안 열심히 했던 게 설교준비도 열심히 하고 교인들 만나는 것도 열심히 했지만 돈 모아서 건물 확대해 나가는 게 제 일중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걸 누가 대신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교회초기다 보니까, 그래서 그때 제가 가지고 있던 어려움 중에 하나가 내가 목사로서 내 아이덴티티가 뭔가, 맨날 건물확보하고 조직 만들고 사람들 꾸려가고 언제까지 이 일을 이렇게 해야 하나, 그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소그룹 운동, 가정교회 운동에 대한 도전을 받으면서 교회를 새롭게 가야 되겠다, 꼭 제 느낌이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앉아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돈 좀 더 만들어서 건물 좀 더 확대하고 좀 더 확대하고 여기에서 좀 자유로워져야겠다, 그러면 수평이동을 중단하기로 하고 그 이야기를 이동훈 목사님한테 했더니 이동훈 목사님이 내년부터 같이 시작하자, 그래서 두 교회가 같이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만, 저는 우리 이천수 목사님 나오는 분당지역에 같이 있는데, 모든 교회가 수평이동을 다 중단해야 한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들마다 길이 다르고 방금 이목사님이 이야기했습니다만, 사실 떠나온 교인들은 갈 데가 없습니다. 다시 못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 분들이 안정되게 자리를 잡고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저는 수평이동이 문제다, 라고 하는 표현에 대해서 문제는 문제지만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우리가 좀 더 폭넓게 보고, 또 교회들마다 받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하고 목회자들도 조금씩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가장 정직하게 양 도둑질이 아니고 정말 양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분들을 훈련을 시켜서 재파송을 하고, 이런 방향으로 우리가 방향을 잡는다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데 좋은 거름이 되지 않을까? 아까 김회권 목사님이 굉장히 좋은 제안을 하셨는데 우리 이천수 목사님께서 그런 제안을 구체화하는 실험을 해본다면 한국교회에 획기적인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정도만 제가 제 입장에서, 사실 2007년부터 아까 이천수 목사님 말씀하신 그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못 받게 했습니다. 그럼 사역자회의 때 부목사님들이 1, 2, 3, 4부 예배 담당자들이 받지 말라 그랬다고 진짜 안 받는 겁니다. 개인차도 없고 그 사람들의 사정에 대한 고려도 없고 진짜 칼 같이 안 받고 정말 문자적으로 철통 같이 막아버린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건 아닌데, 왜냐하면 제가 목욕탕에 갔더니 목욕탕 사장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우리교회 앞에 제가 단골로 지금도 가고 있는 곳인데, 그 부인이 우리교회 왔는데 등록을 안 받아준 겁니다. 그러니까 이발소 사장님이 나보고, 목사님 왜 그 교회는 우리 사장님 처음 와서 갔는데 안 받아 주냐고, 갈 데도 없고 여기서 가려고 하면 차타고 나가야 하는데, 그런 사정도 있긴 있었습니다. 결국은 어떤 동기로 우리가 상황을 바라볼 것인가? 단순히 수평이동 자체가 좋다 나쁘다의 관점보다는 목양의 동기보다는 문제를 좀 더 폭넓게 보고 좀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며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옳은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자네, 수평이동이라고 하는 부분이 논의되려면 여러 가지를 앞두고 분석하고 할 필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말씀하신 상처 받은 교인들, 수평 이동하는 퍼센테이지가 상처받은 교인들만 국한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것보다 다른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제가 두란노에 있을 때도 그런 게 있었지만, 제가 나오고 나서 <기독교사상>에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지교회 문제에 대한 부분들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분석한 내용들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쉽게 단순하게 풀어낼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좀 더 그것이 신학적인 문제든 다른 각도에서 분석이 필요하고, 목사님들과 함께 그 지역에서 같이 협의하고 머리를 맞대야 할 씨름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하는 단편적인 생각도 해봅니다. 이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어제 김영봉 목사님과 정용섭 목사님은 대원칙을 제시하고 성도가 스스로 결단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시사를 읽고 칭찬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배분해준다는 것이 설교라는 김회권 목사님의 말씀은 충돌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영봉 그것을 충돌하는 것으로 들으신 것은 아마 김회권 목사님의 화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신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까 정치적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용섭 목사님 이야기 하셨지만 목회자가 설사 주일예배에서 시사적인 문제를 다뤘다 해도 목회자의 태도는 목회자의 입장은 누가 보더라도 지금 어느 한 당파를 지적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그런 입장에 자기를 identify 시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기준은 항상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정의와 이슈에 대한 판단은 아까 정용섭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기준에 비추어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이슈를 다뤘을 때 저 사람이 우파인지 좌파인지 헷갈리게,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어디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볼 때,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결국은 현실문제에 대해서 언제나 어느 정도는 비판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러한 방식은 아마 김회권 목사님이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해요. 현재의 상황,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기준이 어디가 돼야 할 것인지를 제시하고, 그것에 따라서 각자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결정해 나가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결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김회권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현실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어떤 perspective를 볼 것인가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으로 제가 이해를 해서 큰 충돌을 못 느꼈는데, 제가 잘못 해석한 것인지 잘 못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김회권 완벽하십니다. 완벽하게 해석을 하신 것 같아요. 아까 우리가 선악을 배분하는 것이 아니고요. 구약성경이나 예수님의 설교 안에는 두루뭉술하게 관념적인 선과 악에 관한 담론이 있는 게 아니라 현재 고통을 안겨 주고 있는 악행자들의 악을 고발할 수 있는구체성이 있다고 했는데, 문제는 우리가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는 걸 그냥 부정적인 의미로, 당파적이다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미숙하게 하면 안 되죠. 그러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했고요. 히틀러 치하에 본회퍼가 취했던 입장은 그냥 히틀러에 대한 단죄거든요. 고백교회는, 그런 식으로 하지 않고 마치 이것저것 히틀러도 하나님 나라의 대언자가 될 수 있다는 독일의 도이치키르케처럼, 독일교회처럼 그렇게 해버리면 그건 신사참배도 괜찮다까지 돼버리는, 하나님이 우리한테 지시한 것을 복종한다는 개념자체의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이것저것 다 된다고 하면, 이것저것 다 가능하다는 그런 일종의 초월적 중립성이 너무 강조되다보면 아파트 부동산 투기도 되고,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고 다 용납 가능한 것으로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Bottom line, 오늘날 우리 중심죄악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 할 Bottom line이 무엇인가를 정해주고 그 Bottom line을 넘으면 범법자가 되는 것이고 악행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했더니,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골프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충남 같은 데서 4개 면 식수원이 고갈되었다, 제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골프를 치는 것이 죄는 아닐지라도 우리나라 같은 이런 지형에서, 지하수가 충분히 순환되지 않는 곳에서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서 4개 면의 식수를 앗아가는 정도의 사치라면 우리는 안할 수도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했더니 바로 제 위에 있는 형, 부산에 있는 장모님이 전화가 왔어요. 너 그 설교하고 나서 혹시 욕 얻어먹지 않았느냐? 어떻게 들었는가 봐요. 그런데 욕도 먹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이런 거죠. 오늘 우리가 골프장이 문제가 되고 이렇게 되면 그런 것 정도는 제가 누구라고 지적하진 않지만 오늘 날 대한민국에서 골프를 치는 게 일반화되고 대중화되는 것에 대해 일종의 경고를 하는 게 괜찮다고 보고요. 선인과 악인의 길은 시편에 있는 것처럼 흑백논리 같은 데가 있어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쭉 그렇게 하는데, 복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악인도 아닌 중간적인 사람들은 무엇이냐? 이런 것이 문제라 할 때, 우리가 중립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 악행에 가담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각성을 위해서 그런 문제를 지적해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볼 때 유흥업소 가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번에 대학에서 유흥업소에 간 돈의 액수를 보니까 감사원에서 감사를 해봤어요. 숭실대학은 하나님 대학인데 단란주점에 간 법인카드가 나왔어요. 7천만 원이 나왔어요. 제가 깜짝 놀라서 어떤 놈이 갔느냐고 이렇게 회의에서 하니까 감사원 감사하는 사람이, 이거 딴 대학은 5억 정도 나갑니다. 정말 숭실대 하나님 대학 맞네요, 단란주점에 7천만 원,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딴 데 10분의 1도 안 썼다면서 진짜 기독교 정신이 살아 있다면서, 이거 거의 안 쓴 대학이 삼육대학하고 숭실대밖에 없다는 거예요. 전부 다 단란주점 유흥업소 수억 단위로 썼다는 거예요. 대학당국자들이, 그런 말을 하면서 했거든요. 제가 볼 때는 이런 것도 면면이 악은 저질러지고 있는데 교인들은 마치 거기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지나가는 침묵의 음모는 옳지 않다고 본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 각성하자는 뜻에서 한 것이고, 아예 당신 악인이다, 이렇게 한다는 뜻에서 한 건 아닙니다.
김영봉 그런 문제를 다룰 때 지금 김 교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사례를 가지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 사례를 이야기를 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그리고 그것을 연장해서 다른 영역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를 해주는 것, 사람이 그렇습니다. 누가 나를 책망하면 화부터 나지 회개하지는 않아요. 반면에 자기 자신이 이거 잘못된 거였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면 훨씬 실행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주 역효과가 날 수 있는 것이고, 구체적인 사례, 좋은 사례 혹은 나쁜 사례, 얼마 전 제가 설교에서 인용한 것 중 하나는 LA의 어느 교육감이 5년 계약을 했는데, 5년 계약해서 받을 수 있는 연봉이 80만 불 정도 됐습니다. 그런데 교육감이 되고 보니까 학교일이 형편없는 거예요. 수많은 개선이 필요한데 LA이 주정부가 지금 bankrupt 상황입니다. 파산상태입니다. 그래서 아놀드슈왈제네거가 문제를 겪고 했는데, 교육예산을 따내려고 하니 주정부에서는 줄 예산이 없다고 하고, 교육사정은 형편없고, 이 사람이 사임을 했어요. 사표를 내고는 그 다음날로 이사회와 함께 retire 한 사람으로 다시 계약을 합니다. 그래서 1년 연봉을 3만 5천불로 잡았어요. 30만불 넘게 계약을 했던 사람이 은퇴하고 은퇴한 사람으로서 계약직으로 교육감을 하니까 3만 5천불이 돼서 5년 동안 거의 70만 불 정도를 세이브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 70만 달러를 교육환경 개선하는 데 사용하게 됐죠.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침례교 목사로서 교육감을 하는 사람입니다. 추측컨대 그 결정이 기독교 적인 믿음에서 나왔다고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죠. 이런 예를 제가 설교에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내 직업현장에서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 하는 그런 예를 드린 적이 있는데, 반대의 예나 혹은 긍정적인 예든지 이런 예든지 자기 자신을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그것에 빗대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해주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스스로 자신의 결단을 이끌어내고 뭔가를 결정할 수 있는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고성찬창원에서 온 고성찬 전도사라고 합니다. 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셔서 감이 잘 안 와서 그러는데요. 제가 교회에서 겪고 있는 실제적인 고민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목사님들께서 그러한 경우라면 어떻게 설교를 하시겠는가 제가 한 번 여쭤보고 싶은데요. 지난주 6월 3일, 제가 통합교단에 있는데, 통합교단에서 결정한 환경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설교문이 나왔었어요. 설교문 내용이 핵은 악이다, 이렇게 설교문 내용에 직접 나와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인들 중의 다수가 두산중공업에 다니시는 분들이고, 두산중공업의 임원도 계시고 실제로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두산중공업이 주력으로 하는 사업 중 하나가 원자로 사업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까? 환경주일에 맞춰서 설교를 해야 하는데, 핵의 문제, 이런 것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하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그 이야기는 못했습니다. 만약 목사님들께서 그런 상황에 있으시면 어떻게 메시지를 전하실 것인지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회자 어디 밀실에 들어가셨다가 나오셔야 하는 건가요? 분위기가. 한 분씩 짧게
김회권 저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보면서, 저는 핵을 악이다, 라고 말하는 거는 지나치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 썼습니다. 쓰지도 않았고 너무 조급하고 지나치다, 다만 삼성중공업은 원자로 바깥을 하고 두산은 안을 합니다. 이 두 기업은 우리나라 원자로 앞으로 하게 되는 것은 영구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겁니다. 삼성중공업과 두산, 제가 볼 때 프랑스와 독일 일본이 51개가 올 스톱이 되었는데요. 그 악이라는 표현은 지나쳤지만 원자핵 사업이 갖는 우리 후손세대의 안전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차분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악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두산중공업에 있는 사람들은 납득을 전혀 못했을 겁니다. 생업의 현장이기 때문에요. 저는 이렇게 했겠습니다. 핵이 우리의 생계를 유지하는 핵산업이 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후손들에서 470만 년의 반감기를 가지는 핵물질을 영구적으로 배출하는 핵산업, 양식 있고 이성 있는 시민들이라면 이걸로 경제활동 해서 살기가 힘들다는 걸 각성한다면 평화로운 다른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는 쪽으로 가야하지 않겠는가, 저는 이 정도로 할 수 있겠고요. 그러나 그 사람의 직업적 존엄성을 파괴하면서 그렇게 하는 건 성서적이지도 않고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합니다. 핵에 관한 일본에서 나온 자료, 독일에서 나온 자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걸 가지고 간접적으로 한다면 그분들도 두산중공업의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교수가 사외이사이고 핵심적인 간부에요. 원자핵의 안전을 검사해줘야 할 사람이 그 회사의 이익에 결탁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핵발전에 이바지하는 공대교수들 전부 다 건강에 대한 이해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거기 진보진영에서 격하게 나오는 거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는 개인적 공격의 차원보다는 470만년의 라듐 우라늄 반감기를 가진 핵을 언제까지 지을 것인가? 그것에 대한 반성적 숙고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날 그걸 안 한 것은 잘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핵 원자력이 우리의 주력산업이 되고 우리의 수출산업이 되는 것은 전 세계에서 볼 때 역행하는 겁니다. 전 세계는 지금 핵을 없애려고 합니다. 핵발전소를, 그런 부분은 해도 그분들이 충격 받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정용섭 기본적으로 똑같이 생각합니다. 제가 참여하고 있는 대구지역에 목회자그룹이 정의평화실천협의회라고 있습니다. 생태문제 정의사회 이런 것에 대해서 아주 active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 대표이자 하고 있습니다. 글은 굉장히 관념적으로 쓰긴 하는데 실제적인 목회자로서의 행동은 그러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생태 핵문제 이런 문제도 예민하게 생각하고 있긴 있어요. 작년에 있었던 일본의 재앙, 이런 것들도 설교시간도 한두 마디 코멘트 하긴 합니다. 이런 건 말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목사가,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요. 반영은 하겠지만 과연 어떤 것이냐? 어떤 결과가 될 것인지,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과학의 관계 문제거든요. 과학적인 발전을 우리가 무조건 다 부정할 수 없지 않습니까? 유전공학의 문제도 나오고 있고요. 그렇게 따져서 문제가 되는 것들을 다 제거해버리면 우리는 다시 옛날 세계로 돌아가야 하는데 역사가 회귀는 안 된단 말이에요. 그리고 조금 다른 관점인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걸 전제하면서 만약에 물 한방울을 통해서, 원소가 있지 않습니까 ? H2O 그 원소를 반응을 만들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거거든요. 깨 나가면서요. 원소 안에 있는 핵하고 전자 이런 게 굉장히 단단하게 묶여 있습니다. 그것을 반복적으로 깰 수 있으면 거기서 큰 에너지가 나오는데 수소폭탄과 핵에너지의 원료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지금은 우라늄이나 핵 쓰레기 등등 때문에 문제가 굉장히 많아요. 후손들에게 빚진 상태에서 우리가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과학이 발전해서 물 한방울로 한 가정에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에너지가 만약 가능하다, 그런 날이 온다, 그걸 우리가 완전히 부정할 수 없으니까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과학발전과 생명의 문제와 하나님 나라 통치와 그런 것들,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지금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5시가 다 됐고요. 오늘은 여기까지 순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한 분만.
질문자 김회권 교수님 시사해석은 불가피하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몇 년 전 통계입니다만, 한국교회 주일낮 예배 설교의 80% 이상이 축복에 관한 설교가 대부분을 이룬다는 그런 통계가 나오고요. 성경전체를 볼 때 우리가 성경 설교를 균형 있게 해야 한다, 물론 정용섭 목사님 케리그마 설교에 대해서 강조를 하셨습니다만, 다른 어떤 사회에 대한 평가 사회역사적 흐름이라는 걸 볼 때 사회에 대한 문제도 사실은 교회가 복음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보면 흔히 말하는 소선지에 관한, 선지서에 관한 문제, 선지서는 그 시대상황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끝난 것이냐? 아니면 오늘 날 이 시대에도 선지서의 메시지가 필요하냐? 만약에 필요하다면 왜 그걸 안 하고 있느냐? 만약에 필요하다면 목회자들의 직무 유기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고, 만약에 필요 없다면 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을까? 이런 걸 우리가 생각한다면 시사해석이나 시대의 평가, 더 나아가면 이 사회전체가 정말 소선지서의 예언이 필요 없을 만큼 깨끗하고 정당하고 문제가 없는 사회냐? 교회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그 메시지가 필요 없겠죠. 그렇지 않은 사회라면 이 메시지에 대해서 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 대해서 김회권 목사님이나 정용섭 목사님 더 이야기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용섭 일단 제 생각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결론은 우리 김회권 목사님이 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잘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잘못한 것을 선지자의 입장에서 하더라도 똑같이 반복되기 때문에 거기에 에너지를 쏟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느냐?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회권 근본적인 메시지를 전하면 예언자적 메시지가 들어갑니다. 근본적인 것 안에 예언자적인 게 들어가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 안에 예언자적인 것을 그 안에 담는 게 중요하죠. 우리가 근본적인 것을 말하면서 예언자적인 영성을 발출되도록 해야 하지, 근본적인 메시지를 놓친 사람이 시사문제를 가지고 한다면 그건 굉장히 반발을 사게 돼요. 제 말은 당연히 근본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전달하면 된다는 것인데요. 예언자적 설교의 핵심은 구원론 중심인가, 하나님 나라 중심인가의 큰 신학적인 무게중심의 이동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면 내가 구원을 소유하는 일은, 하나의 소상품처럼 구원을 소유하는 개인주의적이고 단편주의적인 구원론이 지배하는 강단에서는 구원론과 축복이 더 지배할 것이지만 저는 성경의 전체중심의 개인구원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통치, 하나님 자신의 영광, 하나님의 주권관철이라고 저는 보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시사문제가 하나님 나라 통치를 예를 들어 설명할 때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고요. 소예언서가 왜 무시되고 있는가? 소예언서만 무시되고 있는 게 아니라 소예언서 말고 대예언서도 무시되고요. 구약전체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공관복음서도 무시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밖에 없습니다. 이걸 신학적으로 Ultra paulism 이라고 말합니다. 극단적 바울주의 ,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원했다는 거의 주문에 가까운 단순한 명제가 우리 기독교를 전부 다 대신 설명하기 때문에, 구원받고 나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숱한 순종의 임상사례를 기록해놓은 복음서와 예언서가 구약이 순종을 더 땅에 살면서 해야 하는 사람에게 너무 중요한데도 그게 다 무시되는 거죠. 그 말은 순종 없이 구원의 확신만으로 순간이동식으로 천국을 가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일종의 극단적 바울의존주의라고 볼 수 있거든요. 극단적 바울의존주의가 구약성경 전체를 사실상 폐기하는 것 같은 느낌 가운데 있고, 그 중에서 예언서가 더더욱 그런 운명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구약성경은 오늘이나 지금도 하나님의 영감에 가득 찬 말씀이라고 보고 있고요. 우리가 제대로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캐논이라고 저는 믿는 바입니다. 그래서 그걸 왜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께 순종을 충분히 하지 못해서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단에 오르기 때문에, 아이 같은 상태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쪽에서 입장을 굳이 찾자면요. 이상입니다.
사회자 아무튼 구체적인 역사와 현실 속에서 논의되지 않는 영성이나 신앙은 관념이고 추상이고 허상이라고 생각이 들고요. 예언자적인 육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이고 실존적이고 은유적인 영성에서 출발하지만 그것 자체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의 지점까지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균형 잡힌 것이 어떻게 보면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단편적으로 해봅니다. 긴 시간 동안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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