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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제자도1)

by 【고동엽】 2021. 11. 27.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적 제자도1)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초대 교황으로 불리는 그레고리 1세(597년)는 제자도는 순교자와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정의하면서 국가적 단위의 공권력에 의한 순교가 사라진 시점에 순교자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은 제자도의 실천이라고 설파했다. 제자도는 땅, 보금자리, 소유, 자기 보호장치의 무소유(스티븐 니일, <기독교선교사>)를 통해 온전히 하나님 나라 복음의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성공한 성직자계급이나 중산층들의 보수적 성향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그 체제전복성과 급진성을 상실하게 되고 교회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해안을 의지하여 항해하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세계내적인 기관으로 전락해 버렸다(쟈크 엘룰, <튀틀려진 기독교>; 한스 요하힘 크라우스, <조직신학>). 따라서 갈릴리 호수가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배와 그물, 세관, 심지어 부모와 처자까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제자들의 급진적인 삶은 시대착오적인 급진주의처럼 보인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보여준 급진적 복음실천이 없이는 교회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으로 흡수병합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체제변혁성과 역사창조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의 신자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상유지적인 경건 혹은 기독교영성 유지 이상의 성과를 내기가 어렵다.

어떻게 이 상황을 돌파해 내어야 할까? 다시금 제자도의 삶의 뿌리를 찾아보고 오늘날의 삶의 맥락에서 재현하고 추체험하는 길밖에 없다(A. B. Bruce, <12 제자 훈련>; 데이빗 왓슨, <제자도>) 성경적 제자도를 재구성하려면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복음의 본래 육성을 회복하여야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공공의 이익과 생존 공동체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적인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 강의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의 공공성과 그것에 걸맞는 공공의 제자도에 대하여 다루려고 한다.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사회를 향한 사회선교적 복음 공세를 펼쳤고,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공공성이 넘치는 제자도를 형성해 왔다. 사회적 제자도의 핵심에는 정치권력의 기독교적 무장해제 활동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사회적 제자도는 항상 권력을 쥔 세력들에 의한 박해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이렇게 위험하고 복잡한 사회적 제자도 실천을 위해서는 견고하고 정치한 신학적 담론이 요청된다.2)

 

I. 서론: 사회선교란 무엇인가?

선교(mission)란 하나님께 파송받은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화해, 이웃과의 화해, 그리고 자연과의 화해를 경험하도록 촉진하는 활동이다(고후 5:18-21). 기독교 복음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십자가의 수치스런 형장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대신적 순종과 모범적 순종을 통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화해의지와 화해 결단이 바로 복음이다(롬 1:2-4; 3:24-26). 선교는 모든 적대적 경계선을 넘어 하나님의 화해의지를 증거하는 운동으로 그것의 궁극적 목적은 만유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복속시키는 것이다. 그동안 기독교회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선교는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개종 유도 행위였다. 명제적으로 선포된 구두 선포(케뤼그마)를 듣고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게 만드는 전도활동(롬 10:4-11)이 선교의 주요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전도는 하나님의 복음전파 활동의 전부를 포괄할 수 없다. 신구약 성경에 걸쳐 전개된 하나님의 선교는 개인의 개종이나 회심을 위한 전도활동을 넘어 사회 구조나 공동체의 문화나 정치체제의 거룩한 전복(顚覆)과 변혁을 기도(企圖)한다.

구약성경 첫 장인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행위라고 선포한다.3)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순종되어 현실이 되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명령이 지체없이 순종되고 현실이 되는 나라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서 왕적인 명령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나님 나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선교의 창조신학적 근거다. 또한 이스라엘 중심의 구원사도 창조시 계획한 하나님 나라 계획이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좌절되자 그 좌절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세계재창조 역사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선교의 구속신학적 근거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자체가 한 위대한 나라, 열방으로 흘러들어갈 복의 근원이 될 공동체, 의와 공도의 공동체(창 12:1-3; 18:19) 창조였으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계약백성으로 창조해주신 목적도 거룩한 백성공동체와 제사장 나라 형성이었다. 철두철미하게 하나의 자기완결적인 정치사회적 공동체 창조가 하나님의 구원사가 성취하려고 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신약성경에 와서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건설이었다(막 1:14-15).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철저히 사회적인 차원의 구원을 전제하거나 수반한 활동이었다. 심지어 개인전도의 교본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이나 사도 바울 서신도 사도 바울의 해외선교활동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를 받는 교회 공동체 창조와 이방 세계의 거룩한 체제전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도 바울의 사회선교적 활동의 진면목은 그가 자신의 궁극적인 투쟁의 대상이 혈과 육(개인)이 아니라 정사, 권세, 보좌, 주관, 능력(고전 15:24, 엡 6:12;, 골 2:15, 벧전 3:22)으로 불려지는 영적 정치적 위계질서라고 언명할 때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개별적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거의 신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치적 영적 지배구조의 실체를 혁파하고 무장해제시키는 싸움에 참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고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선교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회심이나 개종을 넘어 사회구조, 정치 및 문화체제 전반의 기독교적 변형을 기도하는 운동이다.

한국의 복음주의 기독청년들 안에서 일고 있는 사회변혁의 비전은 19세기 스위스 독일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이나 1920년대 미국의 사회복음운동과는 유사하면서도 다른 운동이다. 사회선교운동이 기독교신앙을 실천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는 사회구조를 문제시하고 그것을 혁파하고 고치려고 분투한다는 점에서 이 두 운동과 흐름을 같이 한다. 침례교 목사였던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는 독일의 자유주의자 알베르트 리츨(1860-1944)의 인류애 형제애 개념, 아돌프 하르낙(1859-1930)의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 개념에서 자신의 신학사상을 도출하였다. 라우센부쉬가 주도한 1920년대의 미국 사회복음 운동은 인간 존재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기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집단적인 죄를 회개하도록 하며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구원을 선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히브리 예언자들의 예언운동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사회복음운동의 성서적 근거를 발견하였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야고보서의 메시지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에 의하여 망가진 노동자계급과 교회가 연대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 건설 운동에 참여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특히 야고보가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고대 히브리 예언자적 전통과 당시의 유대인 공동체를 관통하는 단서라고 보았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지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그의 율법과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미국이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에서 라우센부쉬는 미국을 무비판적으로 이상화하였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기독청년들에게 일고 있는 사회선교운동은 정치적 구조를 바꾸는 운동으로 축소될 수 없는 성령의 주도적 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또한 19세기 종교사회주의처럼 하나의 정치이념을 신봉하고 그것을 법제화, 구조화하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다. 사회선교는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선을 강제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 운동은 차라리 라우센부쉬의 역사적 예수와 낭만적 이상에 근거한 사회기관에 대한 회의를 표하면서 기독교 현실주의를 주창한 라인홀드 니이버나 에른스트 트륄취의 기독교사회학을 미국적 토양에 접목시키려고 한 리쳐드 니이버의 문화변혁론에 가깝다. 라인홀드 니이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선교사명에서라기보다는 창조신학의 위임 명령(창 1:26-28)에서 사회선교의 대의명분을 찾았고 내재적 정치질서와 정의 관계에 우선적 주목을 보였다. 그는 사회복음의 기초가 되는 역사적 예수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러나 예수가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를 이 지상의 정치적 사회적 기관과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았다).4)

 

단언컨대 사회선교는 권력을 장악하여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죄악의 참혹한 뿌리깊음과 파괴적인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과는 달리 사회선교운동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으며 정치주의적인 효율성과 편의성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하여 진보에 대한 신앙, 죄의 사회적 성격 강조로 특징지워지는 사회복음 운동은 교회가 혁명적 사회운동의 프로그램을 가져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운동은 예수의 가르침을 지상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는 순진한 낙관주의를 드러냈다. 이 운동은 사회질서의 무한정한 기독교화를 추구하였다.

이에 반하여 사회선교는 인간의 전적 타락성을 예의주시하면서 개인을 지배하는 사회구조들의 비신화화를 시도하지만 교회 전체가 구비하여야 할 혁명적 사회개조 프로그램을 내세우지 않는다. 사회선교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자연과 역사, 개인의 인격과 사회구조, 관습, 법, 풍속 등 문화전반)에 관철되는 상황을 근사치적으로 촉진시키는 운동이다. 세계내적 역사내적 운동으로서 사회선교운동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이상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운동이다.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물질과 영혼, 이 세상과 이데아의 세계를 나누는 이분법을 거부하며 하나님의 구원과 통치가 이 세상의 총체적 영역에 실현되어야 한다고 믿는. 세상 모든 요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고백이 스며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태라고 본다. 이런 종말론적인 완성태인 하나님 나라를 선취하며 근사치적으로 구현하려는 사회선교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필수적 단계다. 이런 점에서 사회선교의 또 하나의 신학적 근거는 종말론 신학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종말의 시점으로 보류하는 종말론 신학은 하나님 나라운동에 투신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암울한 비관주의와 낙담에서 건져주고 하나님 나라를 친히 완성시켜 가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겸허한 시인에 이르게 할 것이다. 종말론적 신앙의 실천으로서 사회선교 활동은 역사 속에 활동하는 정사와 권세와 보좌 주관 등을 무장해제시키는 선한 싸움에 참여하지만 그것은 단기적으로 일시적인 후퇴와 패배를 맛볼 수 있다.

사회선교는 개인적, 실존적, 인격적 주체에 대한 복음제시와 하나님 나라 전파와는 달리, 개인을 지배하고 관장하는 공동체나 집단, 인간결사체나 조직의 법, 제도, 관습, 종교, 이데올로기 등 모든 초개인적인 집단이나 공동체의 운영원리를 하나님의 의와 공평의 원리 아래 복속시키고 수렴시키는 활동이다. 사회선교는 국가주의, 집단주의, 기업체 결사주의, 노동조합주의 등 언제든지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자율왕국으로 변질될 수 있는 중간 권력위계질서의 불의를 고발하고 혁파하는 운동이다. 제국 내에서 제국이 선포하는 법령의 무효화를 위해 죽음으로 불복종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이 사회선교를 수행하려는 사회선교사는 고도로 단련되고 숙달된 성령의 검투사들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분노와 증오의 희생자가 되지 말아야 하며, 악과의 타협도 하지 말아야 하는 전사적 용맹과 담력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사회선교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긴 사람들이 수행하는 운동이다.

사회선교는 자신이 철저히 성령의 충만을 맛보며 하나님의 통치의 풍성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감복된 개인들이 펼치는 운동이다. 사영리나 간단한 복음제시로 개인의 양심을 전복시키고 각성시켜 복음결신에 이르도록 돕는 개인전도와는 달리 사회선교는 정교한 사회분석이나 사회과학적 인식을 요구한다. 사회분석, 사회과학적 이해, 사회집단의 행동 및 운영원리 파악, 대안 사회, 대안공동체 대조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사회선교는 가능하다.

요약하면 첫째, 사회선교는 개인은 악하지만 개종의 대상이나 인격적 호소와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집단은 인격적 호소와 설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로지 공적인 정의와 정치과정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둘째, 개인이 악의 영에게 지배당하고 종속당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모든 단위의 인간 집단이나 결사체들은 악한 영에게 지배당하거나 종속될 수 있음을 주목한다.5) 이 세상에서 악한 영에 지배받고 있는 집단이나 결사체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하나님의 창조 주권 아래 종속되어 있지만 실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상관없이 저항적인 자율왕국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영적 중간 위계질서적 권세들인 정사, 권세, 보좌, 주관, 능력의 동맹세력을 구성할 수 있다(행 19장 아데미 여신 숭배 중심도시인 에베소의 경우). 셋째, 사회선교는 개인전도와 회심운동을 전제하고 그것의 토대 위에 사회질서, 법, 관습, 이데올로기 등을 기독교적인 이상에 수렴하도록 변혁하는 것이다. 사회선교는 사회구조만 바꾸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고 보는 낙관주의를 경계하고 오히려 개개인의 시민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살아가는 것, 즉 성령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회선교의 우선 전략이라고 본다.

 

 

 

II. 사회선교의 요건으로서의 사회과학적 인식

 

1. 사회과학이란?

인류역사 이래 줄곧 자기 자신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 지나치게 세밀하게 탐구하는 행위는 아주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지배계급의 성원이나 피지배자들이 공히 지배층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사회질서는 신의 섭리에 의해 제정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영원하다고 믿었다. <사회과학>은 사회생활과 사회적 형태의 제 측면을 관습과 위로부터 즉 종교와 도덕으로 설명하려는 전과학적(前科學的) 세계관과는 달리 사회생활의 주체인 개인과 집단, 계급이나 국가 등 역사내재적 요인들을 고려하려 설명하려는 지적 활동이다. 사회과학은 사회조직, 사회유지, 사회변동의 과정이 신적 의지의 발현이나 신의 섭리라고 간주되던 중세적 신화적 사고로부터 <과학적 이유>와 근거에 의한 사회이해를 추구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적 인식의 단초는 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전일적 기독교신앙에 지배당하던 중세 유럽을 사회과학적 계몽으로 이끈 자연과학자들에 의하여 마련되었다.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적 인식론의 타당성을 확보한 데카르트 이래 19세기 오귀스트 꽁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성사는 기독교신앙의 신학적 사회해설에 대항하여 사회과학적 인식을 주창해온 계몽주의적 지성인들의 분투의 역사였다. 이런 계몽주의적 사회과학의 절정으로 칼 맑스의 공산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근대의 초입에 등장한 사회과학자들은 세계와 역사의 변동을 신의 뜻으로 간주하고 어떤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신의 뜻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기독교적 '신앙'과 '관습'에 대항하여 역사변동의 주요 원인을 인간과 계급, 집단이나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명분들이나 이해관계로 설명하는 사회과학으로 맞섰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과학 그 자체 안에는 반(反)기독교적이고 무신론적인 주장이 개재되어 있다. 그런데 사회과학의 반대점에 서 있는 이런 기독교는 참된 의미의 기독교를 대표하기보다는 정치권력의 상부구조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정치권력화된 기독교다.

또 다른 한편 <과학>이라는 말 자체가 필연적으로 반(反)기독교적이라고 의심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과학에 대하여 은근한 적대심과 반감을 드러낸다. 사회의 변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사회과학에 대한 적의는 사회변동을 싫어하는 보수세력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기존 질서”(status quo)는 일단 신적 재가(divine sanction)를 받은 구조로 보이고 새로운 사회정치 질서는 소중한 가치와 전통을 파괴하려는 불온한 세력처럼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변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가진 기존 사회질서의 수혜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사회과학은 자연과학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성과 사유, 언어라는 일반은총으로 수행하는 학문의 한 분야다. 자연과학이 절대로 무오하거나 확실하지 않는 학문이듯이, 사회과학은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의 세계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연성이 있는 관찰이나 사실, 주장이나 인과 관계를 다룬다. 사회과학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인간 역사와 그 안에 활동하는 집단들의 동태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비밀과 신묘막측함을 탐색하는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의 신학적 활동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그 자체로 기독교신앙과 충돌하는 학문이 아니다.

 

사회조직과 유지 그리고 사회변동과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지배자들과 기득권자들의 신과 그 신에 속박되어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무신론적이고 저항적이며 위험스러운 인본주의>로 보이지만, 보다 더 나은 정의, 평등, 자유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자들은 계급사회의 원시적 갈등상을 한 점 에누리 없이 폭로해 버리는 사회과학과 어느 정도 동역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과학이 중립적인 물질세계와 연관되기보다는 오히려 일단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활동과 결합된다는 사실이야말로 <사회과학>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원천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치내포적인 사회과학적 교양으로 무장하여 모든 인간적 결사체들의 자기절대화의 경향성을 쉼없이 경계하고 경고하여야 한다. 민족, 교회, 정당, 국가, 노동조합, 주식회사 등 모든 인간적 조직체들의 조직원리, 법, 제도, 이데올로기 등은 나름대로의 영속성을 주장하지만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영구적인 기관이 될 수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역사 속에 파죽지세로 침투하는 하나님 나라의 변혁 운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나라와 조율되어 존속가능한 집단으로 자기갱신이나 변혁에 성공하지 못하는 집단은 와해되고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신학적 토대 위에 구축된 사회과학은 사회선교에 투신한 그리스도인들의 필수 교양이다.

 

2. 사회과학의 특성

사회과학이 과학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근사치적 불완전한 과학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인식의 보편성보다는 훨씬 약한 보편성을 가진 학문이 사회과학이다. 사회과학의 잠정성과 불완전성의 가장 큰 이유는 사회과학적 인식을 구축하는 자도 인간이요 그의 인식대상인 사회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이 연구대상인 사회의 일부분이므로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혼동되는 나머지 진정한 '과학적' 접근은 쉽지 않은 것이다. 또한 사회는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 이상의 것이므로 사회에 관한 연구는 개인의 심리를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사회란 실험실의 마취당한 개구리처럼 고정된 지점에서 관찰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관찰자 자신의 시점과 관찰지점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역동적인 변화와 활동 속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과학은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우발적으로 보이는 요인들이 무질서하고 다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회를 탐구대상으로 삼기에 어디까지나 어림수 과학이요 불완전하고 비자기완결적인 과학이다. 그것은 과학이지만 동시에 억측이나 속견으로 추락될 위험을 내포한 부서지기 쉬운 불완전한 과학이다.

사회과학을 덜 과학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더 근본적인 사회과학의 특성은 탐구대상과 탐구주체가 <죄>와 <자기중심성>에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도 그 궁극의 전제는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죄>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사회과학은 사회변동과 운용을 위해 불가피한 방편이지만, 그 <사회과학> 또한 죄에 오염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심지어 절대적으로 옳아 보이고 보편타당한 객관적 지식체계라고 인정되는 <자연과학>도 인간의 죄악된 죄와 오류의 세계관에 기반되어 있다. 세속적 자연과학은 법칙론적이고 기계론적 우주관에 기반한다. 오늘날의 자연과학(특히 생명공학이나 우주천체물리학 등)에는 기계적인 우주와 그 법칙의 배후에 역사하고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신앙고백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계급적 불평등 사회조건하에서는 죄와 편견에 물들지 않은 보편타당한 사회과학의 형성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칼 맑스는 보편적 사회과학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당파적 사회과학을 주장했다. 그는 지배자를 위한 사회과학(허위적 이데올로기)과 피지배자를 위한 사회과학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봉건주의 체제를 붕괴시킨 사회과학이 자유주의 경제체제 및 그 세계관이라면, 부르조아 자본주의 체제의 기저를 흔드는 대표적 사회과학은 맑시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회를 지배하던 지배계급이 누구냐(부르조아냐 프롤레타리아냐)에 사회과학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예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의 사회과학을 주창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주창하는 신학적 사회과학은 하나님을 위한 당파적 사회과학이다. 가능하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설득력을 행사하는 사회과학을 구축하는 것이 사회선교의 우선적 과제다. 자연과학은 자연의 불변적이고 반복적인 체계에 관한 지식에 점차 접근해 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회변동은 급격하고 전면적이며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숱한 자유로운 요인들, 우발적 요인들이 사회변동에 관여한다. 특정한 사회변동은 변동 주체들의 누적된 문제의식(불만, 울분, 좌절감, 분노)과 그 문제의식을 집단행동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안팎의 요인들(법, 통신수단), 그리고 또 그런 집단행동을 조직화하고 극단화하는 데 일조하는 기득권세력의 완악함과 우매무지 등이 동시에 작용하여야 발생한다. 기독교적 사회과학은 사회변동을 촉진시키고 완성시키는 과정에 참여하는 여러 요인들 중 지극히 우발적인 요인들 중 하나님의 섭리라는 요소를 또한 매우 중요한 계기로 파악하고 주목한다.

 

 

3. 사회과학의 필요성과 기독교적 대안 사회과학

인간의 구체적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사회적 뒤얽힘 속이다. 이 사회적 뒤얽힘은 현대에 올수록 복잡하고 다원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구성한 사회이기에 그 사회의 구성과정, 유지 및 변동과정은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 특정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이해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필수적 교양이 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사회라고 부르는 <사회구성체>도 분석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거나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생존이 이루어지는 사회는 인간의 꿈과 희망, 죄와 편견, 욕망과 좌절이 투사된 유기적 실체이기 때문에 마땅히 인간의 술어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사회>는 크게 보아 재화생산체제(물적 토대)와 인간의 사회적 관계유지 체제(상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반드시 칼 맑스식의 사고일 필요가 없다. 불편부당한 사회에서는 이 사회가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등의 불온한 사상일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의한 사회구조 아래 매여 있다. 모든 민족국가나 합중국, 기업, 정당 등 인간적 결사체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비하여 창조적 해체 위기에 놓여있는 과도기적 기구요 기관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가 해소시켜 주어야 할 만큼 극심한 불평등과 불의에 매여 있다. 이런 불평등하고 불의한 계급 및 계층 구조로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는 이 사회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법적 강제장치로서 국가기구 혹은 그에 준하는 기구가 요청된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바로 물적 토대와 그 물적 토대를 유지하고 관장하는 이념적 강제기구인 국가기구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도 이 사회구성체이다. 이 부당한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고 온존, 유지시키고 심화, 세습시키는 사회구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천국과 지상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낙원안의 즉자적 몽롱상태에 빠져 사는 자가 아니라 계급, 계층, 종교 이데올로기 등 각종 사회변동의 요인들이 작용하는 사회구성체 안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개인이거나 영혼일 수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의식하건 못하건 간에 혹은 치열하게 의식하건 느슨하게 의식하건 상관없이 특정한 사회계층이나 사회계급의 일부로 살아간다. 부동산 가격의 낙폭, 골프장 건설, 새만금 간척사업, 한미 FTA, 햇볕 정책 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견대립은 그들이 속한 사회적 자리(계층 계급 거주지역)의 차이를 반영한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자기”는 개인의 영혼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적인 권리, 특권 등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자기”다. 강남이나 신도시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부동산이나 아파트 값이 폭등했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그들이 부인해야 할 자기가 커진 것이다. 부자, 유력자, 출세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더욱 낙차 큰 자기하강과 비움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통상적인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그들의 신앙고백은 죽어서 가게 될 처소인 천국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죽어서 가게 될 천국과 지옥의 이분법적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현재 살아있는 순간에 온갖 종류의 욕망과 불의가 어지럽게 춤추는 사회질서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분투에 굼뜨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사고로 이 애매하고 막연한 신앙고백을 수정하면 “나는 현재 계급적 기득권을 맘껏 누리는 <지배계급>(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안에 있는가 아니면 악한 사회구성체의 희생자인가?”를 부단히 물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영생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 부당하고 불의한 계급적 계층적 위계가 엄존하는 사회 한 복판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참 제자다. 그들이 바로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뒤를 잇는 표준적 구원경험에 이른 제자들이다. 사회과학적 인식으로 세상의 종교를 보면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선언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는 신자와 불신자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의 신과 피지배자의 신이 있을 뿐이다." 이 선언은 1987년에 서울대 학생회관 앞 널따란 대자보벽에 붙여져 휘날렸던 구호다(서울대 기독학생연맹에서 붙인 대자보 중 일부). 우리는 이 선언이 극단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무효화할 만큼 한국의 기독교회의 사회선교적 실천은 견실한가? 부자들과 유력자들의 교회가 사회의 지배층과 자연스럽게 제휴하며 기독교 복음을 사회의 상부구조의 일부로 순치시키는 것이 아닌가? 자본주의적 질서,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 질서, 자원남용적 지구환경 파괴적 무한 중상주의, 농업에 대한 몰지각한 파괴와 홀대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순조롭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기독교 복음의 이름으로 자원 약탈을 위한 침략 전쟁이 정당화되는가? 국제적 합의나 외교상식을 무시하고 상대가 되지도 않는 최빈국 최약소국에 전무후무한 양의 재고폭탄을 쏟아붓는 제국주의적 횡포와 오만을 보고도 그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와 공존할 수 있는 행동인가? 아무리 사회과학을 부정하는 보수적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사회과학적 인식을 자신의 설교 속에 집어넣게 마련이다. 부당한 법과 제도에 대하여, 부당한 전쟁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이름으로 미화하기도 하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들은 다만 나쁘고 부정확한 사회과학적 인식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사회과학은 신화화되고 우상숭배시되는 사회체제의 유지를 위한 <위로부터의 강제적 설명>에 저항하는 한 도구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회체제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체에 비추어 엄청난 불의와 죄와 탐욕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직시하고 사회과학적 통찰력을 소유해야한다. 그런데 이 사회과학은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의해 통제되고 재정위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토대 위에 구축된 사회과학이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과학이나 부르조아의 사회과학이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아래 심판당하는 사회과학일 뿐이다.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주와 구속주의 이름과 자격으로 이 불의한 세계와 인간이 당신의 형상대로 회복되고 운용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 의와 공평, 인자와 자비가 넘치는 메시야 왕국의 비젼을 주신다. 기독교적 사회과학은 <완성된 사회>인 메시야 왕국의 비젼에서 솟아나는 신령한 영감이다. 이 신령한 영감과 신앙고백에 투신되어 현 상태의 모순 척결에 헌신해야 한다. 모든 사회구성체가 갖고 있는 자아중심성, 불변성, 영속성 주장에 대항하여 새로운 대안 사회의 비젼을 제시해야 한다. 이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환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온전히 관철되는 메시야 왕국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를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근사치적 접근>의 사회를 위한 기독교의 사회과학과 사회변혁의 모델은 <중간고리>의 개발에서 현실화된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도 결국 인간과 하나님의 역동적 친교가 뒤얽힘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될 가치들을 이 지상에서 선취하여 사회화시키는 자들이다.

 

III. 공관복음서의 몸소 하나님 나라 나사렛 예수의 사회선교 운동

우리는 개인구원이라는 개념에 매우 익숙한 반면에 사회구원 혹은 사회선교라는 개념에는 낯설다.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찾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구원이 실존주의적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변혁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더 나아가 역사적 기독교회가 흔히 보여주었던 바 기존사회의 통합에만 봉사하는 내재 종교 내지는 유사(類似)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넘어 낡은 가죽부대를 해체시키는 변혁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상의 상호연관적이며 또 독립적인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는 개개인의 신자가 경험하는 실존적 구원경험인 자아변혁이 사회변혁의 아르키메데스점이 되어야 하고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 중 가장 현저한 근거는 공관복음서가 증거하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나사렛 예수는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의 갈등과 긴장이라는 범주(막 2:22)를 사용하여 역사의 제 과정에서 세계변혁을 향도하고 급기야는 세계완성을 진취해가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다.6)

 

1. 사회선교와 기독교회의 변혁론적 위상

사회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사회변혁활동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변혁은 사회구성체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구성된 토대+상부구조(이데올로기ㆍ법률ㆍ국가기관 등)]의 변혁을 의미한다.7) 사회구성체론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계급관계로 보는 세계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사람들의 계급관계를 집약적으로 표현한 방법이 사회구성체인데 이 사회구성체는 개개인의 실존을 주형(鑄型)하는 선험적인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은 사회구성체 토대의 근저에 있는 <하나님과 동료인간과 자연으로부터 3중적인 소외상태, 즉 원죄상태에 빠져 있는 죄>를 가장 근원적 기저(基底)라고 파악한다.8) 누구를 숭배하는가? 하나님? 자아? 사탄? 즉 <숭배의 대상>이 모든 판단과 활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맑시즘적인 의미에서 하부구조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인데 반해 하나님 나라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예배와 신앙의 관계, 누구를 主로 믿고 섬기는가?가 가장 심층적 하부구조(이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생산양식으로 보는 맑시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돈의 신, 맘몬 「자본」신의 숭배관계가 더 근원적 토대를 이룬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구성체를 논할 때 <숭배와 신앙관계>(심층구조)와 <생산양식 : 재화의 생산, 분배>(하부구조)와 <상부구조>의 3층적 구조로 파악한다. 기독교는 심층구조에서부터, 즉 예배주체인 자아에서부터 변혁을 일으키는 변혁운동인 것이다.9)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위해 정복전쟁을 벌였을 때 이방 신들의 제단과 그 부대시설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우선적 사명으로 삼았다.

<심층구조> 즉 예배 문제는 <하부구조>, 즉 동료인간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하부구조>(계급관계)는 상부구조(국가, 이데올로기, 법률, 종교)를 규정한다. 2,000년 교회사를 회고해 볼 때 기독교회가 아주 빈번히 변혁운동의 1차적 대상으로 설정된 상부구조의 일부로 기능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10) 교회가 변혁세력의 향도기능을 감당하기는커녕 수구세력의 일부로 고착되어 있었을 때, 교회는 하나님나라와의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었다. 심층구조에서부터 상부구조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변혁을 수행하는 하나님 나라를 실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단적인 기독교변혁세력이 출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독교회가 변혁세력으로 등장할 때 정치적 급진주의나 메시야적 열광주의의 형태를 띠어서는 안 된다.11) 기독교회의 세계변혁은 3중적 구조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복된 공격과 세계 속으로 침투해오는 하나님 나라에 공명함으로써 추진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변혁운동은 사탄이나 우상이나 자아 대신에 하나님을 섬기도록 겨냥한다. 계급적 노동착취대신에 형제적 친교와 동역을 숭상한다. 사회선교는 특정 국가나 법 체제가 지배계급이나 계층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신앙적 경건(sonship, fatherhood)과 형제우애(fellowship, brotherhood)12) 를 증진시키는 종(從, minister)의 조직체로 거듭 태어나도록 분투하는 과정이다.

 

 

2.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세계의 변혁>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1) 몸소 하나님 나라(ἄυτο βασιλεὶα)13) : 세상의 변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선포의 핵심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자신이 <몸소 하나님 나라>(ἄυτο βασιλεὶα)였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모든 선포는 자기주해적(self-explanatory) 자기계시적(self-revelatory)이었다. 그는 그 실존 자체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었고, 인격화된 나라였다. 하나님 나라는 이념과 말에 있지 않고 인격과 능력 - 변혁적 능력 속에 있는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인격 속에 현존한 하나님 나라가 세계변혁의 에너지를 창출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와 더불어 왔으나, 완성점을 향해 역사적 제 과정 속에 <수난적 존재>로서 변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14) 아직 세상에는 파괴적인 세력과 반대세력이 준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시 8:3, 104:35). 마지막 때에야 모든 적대자들이 극복된다. 세상의 군왕들은 자신의 왕권을 전복하려는 쿠데타가 발생하면 초동진압을 하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종말진압을 하신다.15) 이미 현존했으나(already) 아직 완성(not yet)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새 창조를 향해 세계변혁의 과정을 줄기차게 향도해 가고 있다.16)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바로 세계변혁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우리가 주창하는 사회선교는 이미(already) 현존하고 침투한 하나님 나라를 승인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로 세계변혁의 계시 속에서 완성점을 찾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성장에 기대고 있다. 인간의 이념적 확신이나 자가추진적 변혁 노력 그 자체가 세계변혁적 사회선교의 충분한 토대가 될 수 없다.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의 선행적(先行的) 운동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하나님 나라는 급작스레 완성된 형태로 낯설게 주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변혁의 제과정속에 충실히 자라가는 유기체인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설정된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성장과정은 사탄적ㆍ옛 아담적 주권과 그 사령부인 정사와 권세의 폐위를 의미한다(비교. 골 2:15). 하나님 나라는 신(神)적 경배를 요구하는 거짓된 권위(authorities)와 정치체제(principalities)를 전복시킨다(비교. 엡 6:10-12). 누가복음은예수의 주권을 3:1-6에서 그 당시 정사와 권세의 계열을 배경으로 생생하게 대조시킨다. 가이샤(Casear)-빌라도(Pilate)-헤롯(Herod)-안나스, 가야바로 이어지는 거짓 신들의 보좌들은 나사렛 예수의 공생애 사역으로 붕괴될 운명에 처한 것이다.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의 하청계열은 예수의 메시야적 등극을 저지하려고 반메시야 연합전선을 폈으나(시 2) 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는 승귀(昇貴)된 주(Lord)로 부활하였다(행 9:1-16, 빌 2:6-11). 그리하여 나사렛 예수가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모든 반(反)메시야적 연합 블록(block)을 부수고 갱신시킨다. 자기중심적 자아, 가족이기주의, 지배계급의 연합, 국수적 인종주의, 파시즘, 노동조합주의 등 모든 반(反) 혹은 유사(類似) 메시야적 보좌들을 폐위시키는 것이다.

신(神)과 같이 되려는 개인과 집단의 자아숭배가 하나님 나라가 전복시켜 버릴 세상적 사회 체계의 핵심이다. 불변성, 영원성을 요구하는 이 세계 체계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붕괴될 운명에 처하였다.17) 세계는 이제 신적 활동의 능력(δυναμις, 다이나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에너지: 롬 1:16-17)의 작용권 내로 디밀어 졌다. 새 인류, 새 삶, 새로운 공동생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 복종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아숭배와 죽음의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했고 3위 1체 하나님과의 복된 친교로 부르셨다. 그 복된 친교의 현실적 표현이 바로 성만찬과 세례로 입교하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상 교회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현재의 낡은 세계 속으로 뚫고(breaking-in) 들어온다. 그의 말(dābār)과 행위18) 로부터 <강력한 시간의 역류>가 일어나 종말의 시간이 현실의 시간 속으로 역진(逆進)해 온다. 즉 자유가 속박의 그물 속으로, 사랑이 증오의 흐름 속으로, 메시야적 치유가 병자의 고난과 고통 속으로, 생명이 죽음의 세계 속으로 쇄도해 온다. 많은 현대인들에게도 걸림이 된 예수라는 사람의 나약한 인간성과 인격 속에 <숨기워진 채> 하나님 나라가 현재화된다. 이처럼 인격은 하나님 나라가 현존하는 신비체이다. 이처럼 세계변혁은 인격적 실존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새 세계가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앞세워 이 세상의 영역에 침투하면 이 세상의 불변시되던 거짓된 권좌들은 분쇄되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틈새에서 드라마와 종교적 흥행을 전개하는 모든 종교적 신화는 분쇄된다.19) 때때로 역사적 기독교회는 여타의 자연종교들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사이의 틈새에서 종교적 흥행에 골몰한 나머지 세계의 변혁력을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 나라의 줄기찬 변혁의 견인차에 연결되지 못한 교회는 이데올로기나 세상풍습의 부속물로 전락하는 보수의 아성이 되는 것이다.

 

 

(2) 세계변혁의 능력 : 하나님의 전투적 사랑 아가페20)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아가페를 통한 변혁의 나라이다. <저 세상>에 가기 위해 율법과 선행과 수도생활의 사닥다리로 상승하는 에로스(eros)적 표현물이 자연종교라면, 하나님 나라는 이런 자연종교를 분쇄하며 역전시킨다. 종교는 낡아빠진 세계상의 대표적 표상이요 자기신격화(self-deification) 자기의화(self-sanctification)이며, 타락한 인간성의 가장 교묘한 변장술이다. 자기영화와 영원성을 추구하는 타락한 종교성은 거짓된 권좌의 자기영화추구와 악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삶과 공동생활속에 깊이 개입하는 변혁의 능력이요 사랑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혼의 종교적 감정이나 고양된 정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에서 드러나는 사랑은 분열과 적대관계, 이기심과 증오, 거짓과 잔인함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비참함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공격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교적 감정이나 윤리적인 규범의 영역으로 밀려날 수 없는 세계변혁의 에너지요, 전투적 사랑이다.21) 이 사랑은 사탄(Satan)의 통치에 휘둘린 채 자아숭배에 빠져드는 삶과 공동생활과 문화와 종교의 토대에 대한 공격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은 마지막 때에 세계변혁의 견인차이며 이런 종말론적 관련 속에서만 우리는 그 사랑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세상을 채우며 단절을 극복하고 적대성을 종결짓고 이기주의와 집단 이권에서 세상을 해방시킴으로써 혁명적으로 구현된다. 하나님 나라는 개인들의 나라가 아니며 사랑의 표지 안에서 새로운 공동생활의 토대이며 시작이다. 곧 새로운 사회를 동트게 하는데 기여하지 않는 새로운 개인성 따위는 성서에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스토아적 정밀한 감정의 교류가 아니다. 그 사랑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전투적 사랑이요, 아주 심각하고 처절한 사랑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구약에 나타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구원 속에서 체감되고 터득되는 것이다, 실존 속에 역사하는 이 하나님의 전투적 사랑을 즉 세계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과 불타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크기를, 길이를 사도 바울은 터득한 것이다(엡 3:18-19). 세계변혁은 세계완성의 윤곽 안에서 일어나는 종말적 표지이며, 실존적 구원은 세계변혁의 아르키메데스점(point)인 것이다. 그래서 <개인>의 구원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차원

결국 공관복음서에서 이뤄지는 예수의 낡은 가죽 부대 변혁 운동은 하나님 나라 완성의 과정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임을 살펴 보았다. 낡은 체제의 변혁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사랑과 우애로 가득 찬 공동체 생활, 즉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기착지다. 사회체계를 틀어쥐고 있는 결속력은 율법과 권력의 원시적 강제력에서 기인하며, 이 권력은 이데올로기나, 신화나 종교의 미명 아래 작용한다. 그런데 공관복음의 하나님 나라는 그 권력(權力)작동과 행사에 이의 제기를 하고 나선다. 그 「권력」장악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기반의 무근거성을 드러낸다. 마가복음 10:41-45에서 예수는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나 권세자들은 카타규리오(κατακυριεuω), 카타엑수시아조(καταεξουσιαzw)한다고 한다.22) κατα는 강세접두사며 κυριεμω(主[κυριος]노릇하다를 의미하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예수께서는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당시에 억압적인 권력으로 주(主) 노릇하는 로마제국의 가이샤(Casear) - 총독 빌라도(Pilate)-유대의 위탁통치 왕 헤롯(Herod) - 대제사장 안나스(Annas)와 가야바의 악한 위계통치체제를 공격한 것이다. 카타엑수시아조(καταεξουσιαzw: 권세[εξουσια]를 무리하게 행사한다는 의미)라는 단어를 예수께서 사용하신 목적은 예수 자신의 <섬기는 왕권> 즉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들을 대조하려고 함이었다. 카타큐리오 카타엑수시아조로 특징지워지는 모든 세상 나라는 섬기는 왕권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는 필연적으로 대결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운동은 정치적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23) 섬기는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는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와 보좌의 하청적 수직위계질서와 적대적으로 조우하며, 그것들을 중심으로부터 붕괴시켜 버린다. 따라서 지상의 권력체제들과 하나님 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으며 몸소 하나님 나라,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고난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 세상 나라들이 주는 박해와 적의를 온 몸으로 감싸안고 싸우는 선한 싸움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무장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 나라운동, 사회선교에 참여할 자격을 얻지 못한다.

교회사의 오랜 시대는 <하나님 나라>보다는 교회의 체제확대와 유지에 더 충실했다.24) 하나님 나라 완성의 희망을 따라 모험에 찬 창조적 순례를 하기보다는 그 시대의 정사와 권세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관에 순응해 왔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오랫동안 실종된 주제였고 장례식 때의 플라톤적 천당이 하나님 나라와 유사한 개념으로 들릴 정도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한국교회의 망각증세는 어떤 사회변혁적 에너지 창출도 하지 못하는 영적 무기력으로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사회변혁은커녕 자신마저도 변혁하지 못하고 중생대의 거대공룡인 스타우루스처럼 소멸될 운명에 처해있다. 2,000년 교회사가 보여주듯이 선도적인 자리에 서서 세계변혁에 기여하지 못하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장애물로 역기능해 왔다. 한국교회가 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변혁과정에 동참키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갖는 정치적 차원, 역동적 차원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 교회는 복마전이 되느냐(막 11:17, 렘 7:11, 사 56:7) 세계변혁의 전진기지가 되느냐? 기로에 놓여 있다.

 

공관복음의 몸소 하나님 나라인 예수는 실존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세계변혁의 아르키메데스포인트가 될 수 있음을 승인하고 있다. 세계변혁의 첫 과정은 실존적 변혁이다. 개인의 실존적 구원체험은 내면화, 타계주의화의 방식으로 사적 경험으로 축소될 수 없는 하나님 나라 도래 사건이다. 따라서 개인구원은 반드시 세계변혁의 능력으로 질적 비약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체험은 이웃 구원과 세계 변혁에 대해 아무런 접촉점도 갖지 못한 창(窓)없는 단자적(單子的) 체험이 아닌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세계변혁의 단초로서 실존적 변혁이 세계변혁의 운동으로 승화되어 간다는 우리의 논지를 예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의 다메섹 구원 경험(행 9:1-10, 22장, 26장)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사도 바울의 구원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인의 단자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구원이해를 세계변혁적 지평에서의 구원이해로 전환시키는 데 적절한 근거가 될 것이다.

 

IV. 사도 바울의 이방 선교운동 속에 나타난 사회선교 운동

1. 사도 바울의 회심과 사도직에로의 소명 속에 나타난 세계지향성

(1)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특수한 사도적 소명체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신자의 구원경험의 모범적 사례이기도 하다. 구원사건과 소명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메섹 도상의 구원경험을 언급할 때마다 그의 사도적 소명사건을 동시에 언급한다(고전 9:1; 15:8-10; 갈 l:13-17; 빌 3:4-11; 롬 10:2-4; 고전 9:16-17; 고후 5:16; 엡 3:1-13; 골 1:23-29; 롬 12:3, 15:15; 고전 3:10; 갈 2:9).25) <나는 구원받았다. 중생을 체험했다>는 식의 특정시간의 회심과정만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구원 사건속에 내포되어 있는 구원자(선물[Gabe]을 주신 주시는 분[Geber])의 의도에 깨어 있었다. 그의 실존적 구원사건을 선물을 주시는 분(Geber)의 주권자적 계획의 빛 하에서 해석했다. 그는 로마서 1:14에서 빚진 자(οψειλητης ειμι)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구원하실 더 큰 구원계획속에서 중간단계로 자신을 구원하셨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지가 아니라, 이방인 구원이 궁극적 목적지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 무할례자의 사도가(갈 1:15-17)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의 실존적 구원사건 속에는 기독교적인 구원체험이 겨냥해야 할 보다 궁극적 목적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 당시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포한다는 것,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구원을 선포해 주는 바울의 복음(롬 2:16은 “나의 복음”이라고 지칭)은 바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십자가 고난이었다. 바울의 복음은 단지 단자적인 개인 영혼만을 구원하는 천국행 티켓 발매행위가 아니라 바리새적인 신학과 구원관이라는 낡은 가죽부대를 찢고 바리새적인 종교의 근저를 부수는 하나님 나라의 공격무기였다. 먼저 유대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울의 복음전파 행위는 성전과 회당 중심의 유대 기득권 체제(the Establishment)에게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다. 성전-율법-할례로 이어지는 유대사회의 정사와 권세는 불변성을 고집하는 낡은 가죽부대였다. 세계 만민까지 구원의 잔치에 초청하여 나사렛 예수의 보편적인 메시야 왕국을 전파하는 바울의 이방 선교는, 민족주의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유대인들의 국수주의적 기대와 이방인에 대한 경멸을 거룩하게 분쇄하는 복된 공격이었다(행 10:28, 11:1-5).26) 세계의 구원은 거룩한 시온과 그 성전에서 시작되어 이스라엘을 만국의 제사장 나라로 등극시키고 열방을 이스라엘의 외곽에서 봉사하도록 하는 청사진이 바리새인적 신념이었다(사 60:1-14, 61:4-7). 바울 당시 유대인의 유월절에는 100만 마리의 희생양이 봉헌되었을 만큼 메시야 왕국의 꿈은 임박한 실현을 앞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유대인 사회에 “사형수 예수가 부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었다는 선포는 견딜 수 없는 공격이었다. 예수는 참 대제사장이요(히 4장) 참 성전(히 7-8장)이요, 참 희생제물이고 참 율법의 마침이며(롬 10:4)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은 유대 선전 기득권 체제를 뒤흔든 것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갈 3:28)고 선언함으로써 기존의 유대 종교 체제를 혁파하려고 하였다. 이런 사도 바울의 대변화에는 다메섹 도상의 구원경험이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유대 바리새인 청년 사울(Saul)이 사도 바울로 변화된 사건이고, 이 체험 속에는 바울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세계선교의 경륜이 게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 바리새인의 실존 속에 일어나 자아변혁의 사건은 바리새적 낡은 체제의 변혁사건으로 점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2) 실존적 구원 속에 내포된 세계지향성

물론 사도 바울의 이방선교 활동의 1차적 목표는 개인들을 향한 전도활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유대교 그레코-로만 문명에 속한 도시들을 싸고 있던 낡은 체제의 변혁활동이었고 그의 사회변혁 활동은 주(主)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의 세계적 확장을 위한 투신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확신을 위한 투신은 그 시대의 낡은 가죽부대의 해체작업을 수반하였는데 그 과정에 바울은 엄청난 고난과 박해를 감수하였다(고후 4, 6, 11장). 바울의 고난은 우발적인 고난이 아니라 낡은 세계와 하나님 나라가 충돌할 때 발생하는 적대와 긴장감의 개인적 경험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그랬고 바울의 이방선교 활동이 그랬듯이 사회선교는 반드시 수난과 박해를 초래한다.

그리스도인의 사회변혁적 사회선교의 동기는 정치권력의 획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변혁세력의 동기와는 판이하다. 그러나 외형상 매우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사도 바울 이방 선교단 일행은 천하를 어지럽히는(turn upside down) 자들로 오해받았다. 로마 황제 가이샤가 아닌 “다른 임금” 예수를 전파하는 정치적 모반자들이라고 간주되었다(행 17:6-7). 에베소 선교시에는 바울 일행이 큰 성령의 권능으로 에베소인들의 정신적 경제적 사회적인 삶을 지배하던 아데미 여신 숭배체제와 마술의 세계를 혁파하자 모든 에베소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가?(행 19장).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복음전파 행위는 넓은 의미의 정치운동이라서 기존 정치권력과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선교사는 정사와 권세들의 저항을 예상하며 그것들이 가해오는 폭력적 저항의 희생자가 될 각오를 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도상에서 수행하는 선교적 사역이지 특정한 정치이데올로기를 즉각적으로 실행가능한 현실정치 프로그램으로 제시하는 운동은 아니다. 낡은 체제의 소멸에 사회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지만, 사회선교가 그 낡은 체제를 1:1로 대체할 구체적 정치사회적 대안 프로그램을 제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자본주의 대안으로 사회주의라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 반대로 사회주의 대신에 자본주의를 제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변혁 동력을 특정 지점에서 고착시켜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사회변혁력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쉼없이 달려간다. 하나님 나라의 세계변혁은 특정이데올로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이념과 모델의 이데올로기화(化)를 저지하고 다가오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역류하는 변혁에너지에 자신을 늘 개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구원체험은 세계만인의 구원계획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무릇 기독인의 구원체험은 단자적이지 않고, 대신 세계적 연대성과 지향성을 견지하고 있다. 특정시대의 기독인의 구원 체험 속에는 그 시대의 주요 모순(낡은 가죽부대)을 찢고 새 가죽부대를 형성케 할 능력이 공급되어진다. 바울의 구원 사건 속에는 그 시대의 주요 모순인 이방인과 유대인(선민)의 갈등을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로마서 1:16-17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몸소 체험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요 박해자였던 자신을 찾아 오셔서 화해와 용서와 위임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이처럼 용서하시고 새 피조물로 창조하시겠다는 복음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대하신 화해와 용서의 태도는 바로 이방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태도였던 것이다(고후 5:18-20).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죄인의 벽이 무너지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는 적대적인 쌍방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이 화해의 경험이 교회공동체를 배태한 것이다. 「교회」는 제도이기 전에 화해경험이고 사건인 것이다(엡 2:10-12).

사도 바울의 구원은 결국 세계만인의 구원을 위한 중간공리이며, 이 하나님의 궁극계획을 깨달은 바울은 이방구원의 사도로 부름받은 것이다. 모든 기독인의 구원 경험 속에는 이방지향적, 궁극적 지향성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27)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극심한 한반도에서의 구원 사건 속에는 이 모순을 극복할 능력이 공급되어져 있게 마련이다.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다메섹 체험에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기반된 낡은 가죽부대를 파열하고 새 가죽부대를 형성할 능력이 제공되는 것이다. 한반도 기독인이 맛본 해방과 구원의 경험은 한반도 사회변혁의 수준을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실존적 다메섹 구원체험은 사회변혁의 동력을 용출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발전소이기 때문이다.

계급갈등이나 계층 갈등 더 나아가 이념갈등이 극심한 한반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갈등들의 한편에서 서서(특히 지배계층이나 지배계급)의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나팔수로 머물 수 없다. 이런 갈등들의 근원적 원인들을 제거하고 공평과 정의, 인애와 사랑이 가득 찬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진하도록 부름받고 있다. 노사갈등에 관한 우리 나라의 법은 제3자 개입금지를 명하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는 제3자란 없다. 하나님은 결코 제 3자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도 갈등과 모순의 제 3자적 방관자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낡은 가죽부대를 찢고 새 가죽부대를 엮어가는 데 투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체험은 사적 소유가 아니라 세계적인 자산(資産)인 것이다.

 

2. 이데올로기적 변혁운동과 하나님나라의 변혁운동

이데올로기적 변혁이 중앙집권적 권력의 장악을 통한 <위로부터의 전복>(superversion)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변혁론은 권력의 장악이 아니라 인격과 마음의 설복과 지배로서 심층구조부터 변혁시키는 <아래로부터의 전복>(subversion)이다. 이데올로기적 변혁론이 계급갈등과 계급비화해성의 원칙에 근거한 투쟁과 분열의 역학(dynamics)에 기초한 변혁론인데 비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해 신-인간, 인간-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화해와 평화의 역학에 기초한 성령적 변혁론이다. 하나님 나라(다스림)에 들어온 개개인의 성육신적 자기비하로 변혁의 열과 빛을 내며 화해를 엮어내는 자기희생적 변혁론이다. 하나님 나라 변혁론은 타자희생이나 증오의 에너지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 희생과 설복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변혁론이다. 원자들은 에너지 준위가 높은 궤도(하나님)에서 낮은 궤도(인간)로 진입하면서(성육신) 열과 빛을 발산한다. 더 높은 준위에 있는 개개인들이 자기 기득권의 궤도를 탈출하여 낮은 궤도로 내려오면 변혁의 열과 빛(energy)을 발산한다. 기독교회가 자신이 마땅히 누려도 되는 기득권 계급의 궤도에서 섬기는 계급으로 진입하면(빌 2:6-11), 이 세상을 향한 엄청난 양의 변혁적 열과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변혁론이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체제에 안주하려는 변혁론인데 비해 하나님 나라의 변혁론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의 완성 앞에 자신을 개방시키는 종말론적 유보에 바탕한 영구변혁론이다.

그런데 현실 기독교는 변혁운동인가? 이 질문이 새삼스럽게 제기되어야 할 만큼 한국교회의 현황은 경직된 보수주의로 닫혀있다. 민족 모순과 계급모순을 부둥켜안고 싸우는 변혁운동권을 공안당국자의 시선으로 쳐다보는가? 아니면 메시야적 기대감으로 쳐다보고 있는가? 세계는 이념의 빗장이 풀리고 분열과 증오로 얼룩진 원수들이 통합의 역동성을 드러내면서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 가는 이 때, 한국 교회는 이 급변하는 형세를 자본주의의 무한 승리로 태어난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질서에 편승하고만 있을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누가 대통령이 되는 일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것인가?

이 세계 안에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통치를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종적 이념적 블록(block)의 단결체제가 이합집산을 하면서도 여전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회는 메시야적 통치에 저항하는 세계상 앞에서 완성을 향해 줄달음치는 하나님 나라의 지축에다 그 자신의 운명을 결박한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완성점을 향해서 분초를 다투며 달음질하는 하나님 나라 앞에서는 낡아진 가죽부대로 드러난다. 하나님 나라는 낡은 가죽부대 속에 항상 새포도주를 발효시켜서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여명을 선취토록 하신다. 기독교회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정당한 수용체가 되기만 하면, 그것은 낡은 가죽부대 안에서 일어나는 발효력 왕성한 새 포도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왕왕 교회사는 교회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 조작의 도구로 전락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기능하였음을 증시(證示)하고 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교회공동체의 구원 체험 속에 그 시대의 주요 모순을 돌파하고 죄악된 사회구성체를 변혁하고 새 가죽부대를 창출할 수 있는 에너지와 권능을 허락하셨다.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감춰진 채 누룩처럼 발효하고 있다. 겨자씨는 잠시 동안 숨기워 진채 보존되듯이, 새 가죽부대의 청사진은 갑자기 현상되는 것이다. 자아구원 속에는 사회구원, 생태계 구원의 대경륜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교회공동체의 변혁목표는 유일회적인 사회혁명이 아니다. 한 정권이나, 체제의 소멸과 옹립도 아니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점에 대한 근사치적 접근이다. 반(反)변혁세력의 대오에서 출애굽하여 - 계급갈등의 방관자적, 초월자적 입장에서 -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헌신하면 자연히 사회변혁의 향도적 리더쉽을 행사할 수 있다. 교회가 직면한 사회는 하나의 특정사회구성체로서 그것 자체를 옹호하고자하는 강고한 권력의 하청질서를 이루고 있다. 특정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궁극적 승인은 종교에 의한 신적 재가이다. 따라서 교회가 변혁세력이 되고자 할 때, 교회내에서 종교개혁적 자기 갱신을 먼저 맛보아야 한다. 실존을 찍어낸 사회구성체의 틀을 변혁하지 않는 한 <구원>은 증장되지 않는다. 실존 속에서 일어난 자아변혁적 중생체험(conversion)은 사회구성체를 변혁시키는 내연재료로 기능한다. 체제변혁의 관건은 실존적 구원사건(변혁)에서 비롯되고, 사회변혁의 실존적 구원 내용 속에 선취되어 있다. 사회변혁은 실존구원의 자라감과 완성을 증장시키고 촉진시킬 것이다. 죄악된 사회구조는 자기충족적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자신을 신처럼 경배해 줄 것을 요구한다. 성숙하고 정교한 이데올로기일수록 이의제기를 허용치 않는 정언명법으로 신적 권위로 장식되어 있다.28)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세계 질서의 쇄도를 보면서 이런 우상화된 이데올로기의 총공세를 보고 있다.

 

 

3. 하나님나라 운동의 객체이면서 주체인 교회공동체

앞서 말했듯이, 사회변혁론적으로 조망하면 한 사람의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은 이미 사회변혁 에너지를 발산하는 과정이며 이 낱낱의 개인들의 구원경험은 귀납적으로 교회의 사회변혁 에너지로 고양된다. 이것이 정상적이고 표준적인 구원경험이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이기 때문에 그것은 반드시 사회변혁적 이상에 눈뜨는 경험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교회됨의 핵심은 실존적인 구원경험(indicative-하나님나라의 수용성)이며 이 구원경험은 타자지향성, 세계변혁 지향성을(imperative-하나님 나라의 발산성) 내포하는 구원 경험이다.29)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살펴 보았듯이, 그의 다메섹적 체험은 기독신자의 실존적 구원 경험의 핵이요, 세계지향적 변혁력이 발산되는 아르키메데스점이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노동당과 같은 강철같은 전위당이나, 무력시위 등을 통해서 역사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은 나약한 인간성, 자기를 비운 연약성속에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가장 약한자 속에서 현존하고 발효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는 토양과 같이 어떤 작위적 조작도 허용치 않는 지극히 “수용적인 실존” 속에서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받기만”하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방법은 십자가의 길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 참혹한 무기력성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침투하고 현존한다. 어떤 시대든 교회는 그 시대마다의 독특한 죄와 죽음의 메카니즘과 맞대결하면서 해방과 구원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한다. 경천동지할만한 혁명의 함성속에서 발산되는 변혁의 열기는 개개인의 윤리적 결단이나 실존적 변혁을 거치지 않는 경우에는 허수의 열기로 판명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기독교회의 변혁력은 겨자씨와 누룩의 생명력과 같다. 누룩은 겉모습은 작고 미약하지만 낡은 가죽부대를 터치는 발효력이 있다. 노동당과 같은 강철같은 조직속에 하나님 나라는 현현하지 않는다. 겨자씨처럼 자기 스스로를 비우고 축소시켜 거의 눈에 띄지도 않은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은 발산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사회변혁은 이 작은 겨자씨나 누룩같은 실존적 변혁사건에서 연원된다.

1-3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이 뿜어낸 그 엄청난 변혁의 에너지는 <누룩과 겨자씨>같은 <다메섹의 구원사건>속에서 발원되는 것이다. 바울은 겨자씨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였고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진 자였다. 바울의 다메섹 구원사건은 그의 내면에 일어난 실존주의적 구원사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이웃에게 스며드는 역사적, 객관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유럽과 소아시아 즉 세계선교라는 그 거대한 변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바울 한 사람의 마음 속에 다메섹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다. 군중적 열기나 집단주의적 이해관계가 창출하는 변혁에너지는 치열한 듯 하나, 하나님 나라가 보유한 창조적 변혁 능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미약하다. 교회됨의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과의 삼중적 화해를 경험하는 데 있다. 기독교회는 자신이 속한 시대의 분열적 대극을 핵융합적 에너지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창립된다는 것은 그 교회가 속한 사회의 분극화 작용을 배태하는 총체적 메카니즘을 분해하는 화해의 진지 구축을 의미한다. 교회의 현존 자체가 적대적 쌍방의 극적 연합의 에너지를 발산시켜 그 여세로 여타의 분열적 대극을 와해시킨다는 것이다. 혁명적 사건들보다 한 실존의 내면속에서 시작되는 내밀한 구원경험과 그에 상응하는 윤리적 결단은 훨씬 더 엄청난 변혁의 에너지를 발산해 낸다. 변혁의 대상은 제도, 이념이기 전에 인격이다. 변혁의 에너지는 이념 속에 보관되어 있지 못하고 인격 속에 화육되어 있다. 인격의 변혁은 인격만 할 수 있다.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운동 수용체(객체)가 될 때만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주체로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격사건이며, 각각의 인격이 오토 바실레이아가 될 때 사회변혁의 능력이 생성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참된 기독인이 되는 길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가 되는 길보다 더 어려운 길이다. 사회구성체의 변혁은 물적인 권력의 강제(superversion)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격의 변혁(subversion)에 의한 것일 때 그 변혁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할 수 있으리라.

 

요약하면, 우리는 이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복음의 자아변혁적 구원능력이 실존주의적인 주관주의로 축소되지 않고 세계변혁과 타자 구원으로 치환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서적 범주를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오토 바실레이아(ἄυτο βασιλεὶα)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사도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사도직 소명체험에서 발견하였다. 부가적으로는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교회론적 진술(행 2장, 4장, 9:15, 고전 9:1, 갈 1:12-17, 빌 3:4-15) 속에서 실존적 구원이 내포하고 있는 타자지향성과 세계변혁성을 포착하였다.

또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변혁운동 - 정치권력 획득에 일차적 목표 - 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도상에서 일어나는 종말론적 변혁운동의 일환인 사회선교 활동과의 차별성을 지적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우주적 구원사속에서 교회는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운동의 객체이며 수용체이자, 또 한편으로 세계변혁의 주체일 수 밖에 없는 교회공동체의 이중적 특성을 취급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기독교회의 세계변혁운동은 정치적 급진주의나, 메시야적 열광주의와는 다른 종말적 유보위에서 일어나는 신앙적 선취과정임을 분명히 했다. 변혁운동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근사치적 접근과정을30) 각 시대마다 창조적으로 열어가는 <신앙 운동>인 것임을 주지시키고자 한 것이다.

 

Ⅴ. 결론 : 세계변혁의 향도인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의 사회선교는 제자도의 주요 실천항목

사회변혁의 관심은 맑시즘이나 정치적 저항자들, 직업혁명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세계변혁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역사적 현존의 반영임을 확인했고, 가장 본질적인 성서적 주제였음을 확인했다. 하나님은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자(Neuer)로서 미래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갖고 시간을 역류하여 이 현재속에 침투한 이다. 특히 사회경제적 체제의 변혁은 성서의 주요한 관심 중에 하나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세계가 죄와 불의속에 왜곡되어 탄식하는 것을 외면치 않으신다. 개입하시고 변혁하시되 마침내 세계를 재창조하여 완성하실 때 계속 변혁하신다(계 22:1-5).

구약성경의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은 사회변혁의 예전적 긍정(sacramentalization)을 잘 보여준다.31) 50년만 지나면 <팔린 토지와 전답, 가옥, 노예>는 원주민에게 회복된다. 부와 가난의 세습을 막으시는 긍휼의 손길이다. 희년법 제도는 구약시대의 주기적인 사회혁명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성례전(sacrament)이었다. 성례전은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매개물이다. 희년법제도는 주기적 사회변혁을 예전적 수준에서 적극 명령하고 있다. 재벌의 영구상속과 토지의 사적 소유는 바알 토지제도의 후예들이지 희년법의 정신을 전혀 담지 못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 4장에서 초대교회는 이 희년제도(cf. 눅4:16-18 은혜의 해)를 실천했다.32) 교회사의 첫 시작부터 <사회변혁의 예전화>라는 명예로운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나 왜곡된 교회사는 하나님 나라의 추상성과 피안성을 강조했다. 하나님 나라를 정신화했고 신학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과정을 밝히기 보다는 은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교회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 표준적인 구원경험을, 표준적인 교회경험을 맛보아야 한다. 지금 이 땅에 교회 간판을 붙이는 교회들이 아니라 신약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잣대로 교회됨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계에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낡은 세계의 변혁이나, 세계갱신을 목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한 양태다(렘 31:33, 사 43:25, 44:22, 겔 36:26-27).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보지자이거나 구원의 창고가 아니다. 변혁된 삶을 살며 변화를 일으키도록 기대되는 이 집단은 스스로 하나님나라의 위대한 혁명을 수행할 주체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수용체다. 따라서 사회변혁은 교회갱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삶을 돈의 지배 안에 그리고 소유물의 획득과 증대를 위한 열망안에 가두어 놓는 속박과 황금사슬을 깨뜨리는 능력(dynamics)을 지닌 자유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터오며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결사적인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한다. 이 나라는 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안에서 자본주의적 악마적 권능을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안에서는 물신숭배가 더 이상 위광을 발휘하지 못한다.33) 자본주의 체제하의 교회는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하여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다. 참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바다에 침몰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는 마침내 돈은 물신(物神)의 위광을 잃고 형제적인 친교의 토대를 놓아주는 데 사용된다.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염려(마 6:25) 탐욕(눅 12:15, 딤전 6:10, 히 13:5)에 사로잡힌 세상안에서 돈은 성스런 광채를 지니며 치명적 힘을 구사한다. 돈의 신 맴몬(Mammon)이 세상과 삶을 지배하는 듯 하다. 맘몬의 경제적 현현양식이 자본주의다. 자본주의 하부구조인 자본가 - 임노동자의 관계는 맘몬숭배 위에 터하고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입장에서 보면 맘몬숭배가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모순인 것이다. 맘몬 신(靈)은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성체를 물적(物的) 토대로 삼아 자신의 가치관을 개개인들 속에 내면화시킨다. 더욱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의 분류속에서 삶은 더욱 더 비인간화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복음은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사회학, 정치학의 모든 예상과 기대를 초월하여 변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자족적이고 정지된 사회구성체가 아니다. 모순이 극에 달한 사회구성체를 그 시대마다 창조적으로 해체해가도록 추동하는 모든 영적인 통찰(insight)이요 지적 정위요 도덕적 결단이요 재정적 투신이다.

사도행전 2-4장의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koinonia)는 맘몬 지배적 인류역사의 마지막 성숙의 목표를 잘 보여준다. 소외된 삶의 와중에서 위세를 떨쳤던 모든 물질적 수단은 형제적 친교의 토대가 된다. 형제애로 엮어진 이 공동체는 성령안에서 사적 재산권(신성불가침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규약)과 소시민적 소유영역의 울타리가 무너져 내린 하나님의 가족들이었다. 모든 풍요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 속에서 강력하게 현존하셨다. 이 초대교회의 참회와 회개는 돈 지갑과 소유물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교회공동체는 말과 행동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세상의 빛이다(마5:10-11, 10:17, 요 15:18, 16:1-2, 마 13:33). 그러면서도 교회는 주변세계의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적응하는 길이 항구적인 유혹으로 열려있다. 안타깝게도 종교개혁에 의해 생겨난 교회들(자유교회, 경건한 집단들)은 중산층의 대변자이며 생활 및 사고 방식에 있어서 집요하게 중산층의 경계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비판적 분석과 검토를 통해 교회체제안에서 주변세계의 권력체계가 어느정도 반영되고 종교적으로 재가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의 삶에 자기비판적 분석과 검토는 시민적인 계급체제의 속박에서 새로 해방되는 일과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교회공동체가 당대의 주류의 지배질서와 계급사회의 바다속에 함몰되어 버린다면 낡은 세계를 변혁하고 해방하는 하나님 나라의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한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와 정치의 죄악된 메카니즘을 복음의 광채로 공격함으로써 변혁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열광적 종교전쟁이나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찬미가 아니다. 국수주의적이고 독선적인 십자가 행진도(Crusade Parade)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기존체제와 사람들을 쉴새없이 변혁에너지로 공격하는 변혁운동인 것이다. 시대, 장소, 체제, 인종을 불문한 변혁운동인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 완성의 희망에 대한 투신인 것이다.

한국교회는 현재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광풍에 직면하여 야웨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맘몬과 바알신으로 혼동되는 지경에 당도했다. 이익 추구, 물질적 풍요를 우상시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이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 명의 크리스챤으로 살아가는 일은 한 명의 공산주의자로 살아가는 일보다 더 어렵고 위험에 찬 일이다. 참된 신앙적 실존은 비길 수 없는 고난과 죽음의 심연에로의 끌려가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확실히 참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의해 지지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쓰라린 고난의 길(Via dolorrosa)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아변혁에서 시작된다. 이 그리스도인됨이 동료 인간에 대한 사회적인 책임에 있어서 혁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제자도는 자아변혁적이면서 동시에 사회변혁적이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이뤄질 때까지 쉼없는 갱신운동이자 변혁운동이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고 따라서 새 인간, 새 상황, 새 정치를 창조하시는 성령! 땅의 불의 가운데서 하늘의 정의를 세우고 모든 죽은 것이 살아나고,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지기까지 쉬지도 않고 잠잠하지도 않으시려는 성령이시다(Karl Barth).

 

토의를 위한 질문

1. 어떤 점에서 개인 구원 경험 안에는 이웃 구원과 세계 변혁의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는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이 주장의 타당성을 토론해 봅시다.

2. 몸소 하나님 나라란 개념이 어떤 점에서 사회선교의 성서적 근거가 될 수 있을까?

3. 한국교회가 왜 사회변혁에 앞장서지 못하고 수구 혹은 보수세력의 온상처럼 기능하고 있을까? 위의 글을 중심으로 토론해 봅시다.

4. 성서적 사회선교 운동이 어떤 점에서 종말론적인가? 하나님 나라운동의 일환이 사회선교운동이 열광적 메시아운동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참고고서 목록

Hans Joachim Kraus, 『조직신학』, 박재순 역(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86).

Gustavo Gutié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New Yo가, NY: Orbis book, 1983).

하우쯔 바르트, 『현대ㆍ우상ㆍ이데올로기』, 김영철 역(서울 : IVP, 1988).

Karl Heim, 『세계의 완성자 예수』, UBF 간사회 역(서울 : UBP, 1985).

 

 

 

 

 

 

 

 

 

 

 

 

 


1) 이 글의 주요 부분은 <성서한국>이 발행하는 책(사회선교)에 기고된 글임을 밝힌다.

2) 짐 월리스(Jim Wallis)의 The Soul of Politics가 정치의 개종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3) 김회권,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읽는 모세오경 1. 김회권 교수의 창세기, 출애굽기 강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30-41.

4) 이 둘은 본격적인 의미의 기독교 사회학 담론을 주도한 에른스튀 트륄취(1865-1925,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의 사상을 반향하고 있다.

5) Walter Wink, Engaging the Powers: Discernment and Resistance in a World of Domination (Philadelphia: Fortress, 1992).

6) Hans Joachim Kraus, 『조직신학』, 박재순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본 고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그 골격을 크라우스(Kraus)의 『조직신학』에서 취했다.

7) 양상철, 『경제사학습』 (서울: 세계, 1987) 중 “사회구성체의 기본문제," 73-90.

8) 프란시스 쉐퍼, 『현대사상과 기독교』 (서울: 성광, 1984); J.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 Ⅰ- Ⅵ, trans. Henry Beveridge(Grand Rapids, IN: Eerdmans, 1981).

9) Karl Heim, 『세계의 완성자 예수』, 장국원 역(서울 : UBP 1985), 55-67.

10) 라인홀드 니버, 『맑스 엥겔스의 종교론』, (서울: 아침, 1988), 52-56, 160-167.

11) Kraus, 같은 책, 476.

12) G. Gutié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Maryknoll: Orbis book, 1983), 51-52.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의 핵심은 Sonship-Fatherhood와 fellowship-brotherhood와 자연 과의 fraternity(친화성)의 획득이다.

13) 교부 오리게네스가 마태복음 주석서에서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Origenes, Mattäus Commentary ⅩⅣ. 9).

14) Karl Heim, 같은 책, 228-230.

15) Heim, 같은 책, 27-28.

16) Kraus, 같은 책.

17) Emil Brunner, Man in Revolt, trans. Olive Wyon(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4), 145-159.

18) 같은 책, 91. dābār는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event-word, effective word를 의미한다(사 55:10-11).

19) 같은 책, 64;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2), 24-60.

20) Kraus, 같은 책, 129-132.

21) Hans Joachim Kraus, 같은 책, 20-38.

22) Nestle-Aland 26th Novum Testamentum Graece, 125:

οἴδατε ὅτι οὶ δοκούντες ἄρχειν τών ἐθνών κατακυριεὐουσιν αὐτών καὶ οὶ μεγἀλοι

αὐτών κατεξουσιἀζουσιν αὐτών.

23) Hans Joachim Kraus, 같은 책, 470-480.

24) 이신건, “하나님 나라와 세계변혁Ⅰ,” 총신대보 142호.

25) 이런 절들에 사용된 바울의 공식문구는 χαρισ+부정과거(aorist) 수동태 동사(διδωμι)+ μοι인데, 이것은 구원사건과 사도직소명사건의 일치를 드러내 주는 구절이다.

26) W. Barclay, The Mind of St. Paul(London: Collins Clear-type press, 1958), 9-31.

27) 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Grand Rapids, IN: Eerdmans, 1981), 56-66.

28) 하우쯔 바르트, 『현대ㆍ우상ㆍ이데올로기』, 김영철 역(서울 : IVP, 1988), 30-50.

29) Walter E. Conn, Conversion(New York: Society of St. Paul, 1978), 281-314

30) Juan Luis Segundo, “The Proximity of the Kingdom,” in The historical Jesus of the Synoptics (Maryknoll: Orbis book, 1985), 101-112.

31) 대천덕, 『토지와 자유』(서울: 생명의 샘터, 1986).

32) 장 뜨로그메, 『예수와 비폭력혁명』 (서울 : 한신연, 1986), 19-40.

33) Kraus, 같은 책, 450-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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