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에 나타난 이단(異端)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구약성경은 “이단(異端, heresy)”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으나 그것과 유사한 용어들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다른 신들(엘로힘 아헤림)”(출 20:3), “새긴 우상들”(페셀, 터무나)(출 20:4), “거짓 예언자들”(한너비임 한니뻐임 퀘쉐르) 등 일탈된 영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주어진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샤붸, 퀘셈 콰잡)(겔 13:6; 신 13장과 18장; 렘 23:9-40; 겔 13:1-16, 17-23), 그리고 “하나님을 입술로 공경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불순종 행위”(사 29:9-14)가 “이단”과 의미상의 동등어 혹은 유사 용어들이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이단”은 유일하신 야웨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충성을 가로채거나 흐트러뜨리는 영적 가르침이나 교훈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이단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신들을 예배하라고 가르치는 이단이다. 제 1계명 에 도전하는 이단이다. 그 다음으로 치명적인 이단은 야웨를 이교도적인 방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치는 이단이다. 새긴 형상을 야웨 하나님이라고 동일시하여 예배하게 만드는 이단이다. 셋째,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허탄한 묵시를 남발하는 이단이다. 이와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이단은 스스로 하나님께 속아서 거짓 예언자가 된 자들의 영적 지침도 이단이다.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시드기야와 400인의 예언자는 야웨께서 보내는 거짓말하는 영에 꾀임을 받아 아합 왕을 길르앗 라못 영토 전쟁으로 몰아넣은 이단자들이었다. 예레미야 28장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의 적수 하나냐의 경우도 하나님께 속아 거짓 예언을 선포한 이단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예언을 완화시키는 예언자로서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저항하는 불신앙자, 불순종자도 심각한 이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배교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단자라고 단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이상의 대표적인 이단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하면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에 빠지고 않고 정통적인 성경신앙을 견지할 수 있는지를 숙고할 것이다.
1. 배타적 일편단심의 예배의 시금석, 거짓 선지자 혹은 배교 유혹자(신명기 13장)
신명기 13장은 이스라엘을 배타적 야웨 예배로부터 이탈시켜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배교를 부추길 수 있는 잠재적 유혹이 공동체 내부에서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지자/꿈꾸는 자, 친인척/친구, 온 공동체 모두 배교 방조 혹은 배교 사주의 죄를 범할 수 있다(13:1-8). 아무리 신령한 선지자나 신령한 꿈이나 신탁 중개자라 할지라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웨 예배로부터 이탈하도록 부추기면 이단자로 단죄된다. 그런데 왜 이런 유혹하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안에 일어나는가? 3절에 따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다. 거짓 선지자들과 악한 영매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의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법도와 규례를 어기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결국 구약성경의 가장 중대한 이단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도록 조장하는 가르침이나 영적 세력이다. 이단이 일어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해야 할 조치는 영분별의 능력을 갖고 일편단심의 야웨 예배로부터 이탈시키는 선지자나 꿈꾸는 영매(靈媒)들을 죽여버리는 일이다. 이 극단적인 대책만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존립을 가능케 한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교화시킬 수 없는 이단이라면 일단 공동체로부터 쫓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상적인 사실은 이단적인 배교 유혹이 또한 형제, 배우자, 그리고 친구를 통해서 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방의 다른 족속들의 신들을 섬기자고 부추기는 가장 가까운 골육지친이나 친구들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신다(출 32:26-29과 신 33:9의 레위 지파들처럼). 배교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행동이기에 일벌백계로 심판하셨던 것이다. 심지어 한 도시가 배교죄를 범하고 다른 도시에게 배교를 부추기면 성 전체가 파괴될 것이라는 선언이 추가된다. 주전 7세기의 사마리아 파괴와 주전 6세기의 예루살렘은 배교죄에 대한 징벌의 결과 참혹하게 파괴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 배교가 일어난 도시의 모든 물건들도 하나님을 위하여 진멸되어야 한다(헤렘). 그래야만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고 복주심의 역사하심이 시작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은 인구번성이다. 가나안 정복시 파괴된 가나안의 토착도시의 파괴도 잠재적 배교유혹의 죄를 범할 것이기 때문에 응분의 대가를 지불받은 것이었다(민 25장의 바알브올의 사건). 이단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의 유무를 검증하는 시금석이므로 이단이 발호할 때 정통교회는 자신의 영적 생활에 말씀의 다림줄을 갖다 대어 자신이 하나님과 깊이 결속되어 있는가를 심각하게 검증하여야 한다. 이단에 대한 경계와 대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통교회가 이단발호의 환경을 조성하지 않았는가를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2. 거짓 선지자(신명기 18:9-22; 참조. 13:1-5)
신명기 18:15-22은 이스라엘 인근의 토착 족속들 중에 만연한 영매술들을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이교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는 어떤 잠재적인 시도도 배척한다. 이스라엘은 고대 가나안 문명에 퍼져있던 어떤 종류의 영적인 중개작용도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신들의 뜻을 알아내려고 시도하는 일곱 가지의 상이한 영매술들(유아 인신 희생제사는 아마도 영매술과 더불어 다른 또 하나의 가증할 만한 종교관습)은 몇 가지 마술적인 방법으로(제비뽑기, 활을 통한 영매술, 잔 속에 있는 찌꺼기를 읽고 해석하기, 자연현상 관찰을 통한 길흉 징조 판단, 혹은 죽은 자들의 영들과 상담)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려던 다양한 인간적 노력과 주도권을 대표한다. 이 긴 목록의 나열은 신적인 뜻이나 계획을 마술이나 영매술을 통해 알아내려는 모든 상투적 방법들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이교도적인 방법에 호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무슨 일을 행하게 하실 것인가를 어떻게 식별하고 알아낼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모세적인 권위를 가진 정경적 예언자가 대답이라고 말한다. 모세적인 중개자요 예언자가 영적 지도력의 중심에 서 있다면 이단 발호를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적 주도권과 노력에 의해 특징지워진 고대 가나안 문명의 영매작용과는 달리(10-11절) 모세적 예언자의 활동에서는 하나님의 주도권이 강조된다. “내가” 그들을 위해 예언자를 일으키며 “내가” “나의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그가 “내가 그에게 명하는 모든 것들을” 무리에게 다 고할 것이다(18절).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두 명 이상의 예언자가 동시에 나타나 각각 자신이 모세적 예언자요 그래서 각각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일반 백성들은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 즉 어떻게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식별할수 있는가?(왕상 22장 이믈라 벤 미가야와 시드기야; 렘 27-28장 예레미야와 하나냐; 또한 렘 14:13-16)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신명기 18:20은 거짓 선지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유형은 야웨의 이름으로 “거짓되게”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이며, 두번째 유형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이 두번째 유형의 선지자는 식별하기가 쉽지만(신 13:1-5), 야웨의 이름으로 서로 대립되는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갈등은 일반 백성들에게 곤란을 초래할 수 있다. 22절이 물론 “야웨께로부터 나온 말씀이란 현실 속에서 사건으로 나타나며 성취되는 말씀이다”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당장 현장에서 하나님의 참 예언을 식별하여야 할 현장 사람들에게는 우활(迂闊)한 처방일 뿐이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출현에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대개 당시의 예언자들의 예언은 30-40년 후에 성취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에는 누구의 말이 참된 예언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예언마저도 23년 이상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그가 야웨 하나님께 기만당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던가?(렘 20:7-13)
그래서 전체 구약성경은 본 단락이 제시하는 기준 외에 참 예언자를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다른 기준들을 제시한다. 첫째, 신적 강압으로 소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소명일화의 존재유무다. 야웨의 강압에 의해 예언자적 역할을 떠맡았다고 증거하는 예언자들의 소명기사들이 예언자의 신적 기원을 입증하는 데 유력한 근거가 된다. 둘째, 이미 참 선지자로 판명된 앞선 시대의 예언자의 예언과 일치하는 예언을 선포하는 예언자는 참 선지자다(렘 28:6-9; 26:19-19). 셋째, 야웨의 천상 어전 회의에 참여한 예언자(렘 23:21-22; 왕상 22:19-22; 삼6:13, 특히 8절)가 참 예언자로 인정받았다. 마지막으로, 야웨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예배를 강조하는 모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예언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참 선지자다. 설령 성취여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참 선지자로 판명날 지라도 그 예언자의 의도가 야웨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을 이탈시키는 것이라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즉 야웨 하나님에 대한 유일신적 예배 기준이 성취 기준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13:1-5에 따르면 거짓 선지자의 꿈이나 예언(징조나 표징)도 단기적으로 성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명기 18:22의 성취기준으로 보면 그는 참 선지자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의 말이나 징조가 현실 속에서 성취된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야웨의 백성들을 야웨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예배로부터 돌이켜 배교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말씀은 결코 야웨로부터 나온 진정한 하나님의 예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13:1-5의 경우에서는 어떤 예언자에 의하여 선포된 예언 성취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참 예언이 아니고 백성들의 내적 신실성을 시험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3.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의 갈등(예레미야 28장; 열왕기상 22:1-40)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갈등
예레미야 28장은 구약성경 이단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시드기야 재위 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B.C. 594-593년) 추정된 사건을 다룬다. 다양한 선지자들에 의하여 시드기야 왕에게 보고된 의견들의 갈등 상황은 구약성경의 이단이란 거짓 예언자의 허탄한 묵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주전 597년과 586년 사이에 유다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종주권에 대한 대응방향을 놓고 심각한 국론분열이 일어났다(합 1:3). “바벨론 제국의 야수적인 국제질서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를 놓고 예레미야와 하나냐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예레미야는 확고부동하게, 그리고 절대적으로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에 대한 반역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와 상반된다고 선언하며 반역 음모에 가담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멍에를 메는 예레미야의 행위 예언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계속적으로 고분고분해야 할 불가피성을 암시하면서 바벨론에 대한 반역이 곧장 하나님의 의도에 저항하는 셈이 된다는 요점을 결정적으로 각인(刻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브온 출신의 하나냐라는 예언자가 전혀 상반되는 메시지를 갖고 나타났다.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왕의 멍에는 곧 부서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도 2년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벗겨 부숴 버리는 하나의 극적인 행위 예언을 가미하여 그의 메시지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켰다. 그의 행동에 의하여 진정으로 혼란을 느낀 예레미야는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확신마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28:12)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 하나냐의 메시지는 거짓이며 하나님 자신은 결코 그를 통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확신을 받았다(15절). 그 확신으로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예언을 거짓이라고 단호하게 단죄하며 하나냐 자신은 그 해에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일어난 하나냐의 죽음은 그의 선포의 거짓됨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추가적인 증거로 보도되었다(17절).
역사적으로 볼 때 결국 거짓 예언자로 판명난 하나냐는 당시의 유다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중들의 애국적 정서를 대표한 여론수렴형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을 놓친 채 대중들의 종교적 열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유다를 향하여 내려진 결정을 경청하고 그것을 당시의 지배적인 계층의 백성들에게 중개하는 두려운 사역을 감수할 용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주전 8세기 경에는 모세적 예언자들이었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 외에 훨씬 더 많은 수의 여론수렴형 혹은 여론조작적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미 3:7-12). 단기적으로 볼 때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고 갔던 지도자들이었다. 때때로 그들은 극적인 행위 예언의 실연(實演)에 호소해가기까지 하면서 자신들이 선포한 예언의 진정성을 옹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을 오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단적 일탈 예언자들로 판명되었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대결에서 쟁점은 “누가 과연 하나님의 메시지가 갖는 본질적인 영적인 내밀성(內密性)과 신학적인 통전성(統全性)을 드러냈는가?”였다. 즉, “누구의 예언이 하나님의 성품과 내적인 일치를 이루는가?”였다. 하나야와 예레미야 중 누가 참 예언자인가를 알려면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정통한 이해를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결국 예언은 보다 큰 모집단(母集團)인 이스라엘의 구원사 전통 특히 예언전통과 분리되지 않고 깊이 관련되면서 경청되고 실행되어질 것을 요구하였던 셈이다. 새로운 예언은 이전의 예언들과의 관련성 하에서 점검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미 발생하고 있는 실제적인 사건들과 관련되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미가야 벤 이믈라와 시드기야의 갈등
열왕기상 22:1-40도 구약성경의 전형적인 이단으로 분류되는 거짓 예언자 집단의 활약을 보여준다. 본문의 주인공 아합은 거짓말 하도록 위임받은 야웨의 영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기만당한 예언자 400명의 말을 믿고 길르앗 라못으로 출정했다가 패배한다. 1-6절은 적어도 아합에게는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하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자신감 넘치는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겼던 영토였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을 의향을 피력하고 그의 옆에는 남유다에서 올라온 동맹, 여호사밧이 있다. 비록 악한 왕 아합을 도왔다고 선견자 예후에게 비난을 받았으나 여호사밧 왕이 얼마나 위대하고 선한 왕인가는 역대하의 여호사밧 부분에 잘 그려져 있다(대하 17, 19-20장). 그래서 독자들은 선한 왕 여호사밧의 지지를 얻고 전쟁을 기획하는 아합의 대의명분이 정당하다고 느끼며, 국경 도시인 길르앗 라못이 이스라엘의 영토이기 때문에 회복되어야 한다는데 쉽게 동의하도록 유도된다. 그런데 전쟁 개시 전에 임전(臨戰)시 신탁을 얻어내는 평상적인 관습(20:13-14, 28; 삼상 23:1-4)이 동원된다. 아람에 대한 최근의 두 차례의 마지막 군사적인 작전들 때와 똑같은(20: 13, 28) 메시지가 접수되었다. 신탁의 결과는 하나님의 전쟁 지지 결정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의의를 제기한다.
두 번째 의견을 구하는 여호사밧의 의례적인 질문은 전쟁집행을 지연시키며 약간의 갈등을 일으킨다(7-15절). 그래서 다른 신탁을 제시하는 한 다른 예언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소환된다. 미가야가 발견되어 소환되는 동안에 400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첫 번째의 긍정적 신탁을 한층 더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미가야와 있게 될 나중의 갈등 상황에서 이 400명의 예언자들을 대표할 대변인으로 소개되는 시드기야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공세성을 표현하는 상징물을 가지고 그들을 지원한다(11절). 그들의 두 번째 신탁(12b절)은 6절에 비해 한 단계 더 진전된 예언으로서 보다 더 확실한 승리 약속이다. 여호사밧의 망설임을 제외하고는 독자들이 이 400 명의 선지자들을 의심하거나 그들의 예언을 깎아내려야 할 만한 어떤 암시도 아직까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는 “상서로운 예언을 하라”고 경고한다(13절). 놀랍게도 미가야의 예언은 예상 밖으로 상서로운 말씀으로 판명난다(15절). 시드기야와 미가야에 의하여 이중으로 지지를 받은 아합의 전쟁기획은 마침내 승리를 가져올 것처럼 보인다.
그 때 이 전쟁보도문의 진행을 가로막고 아합과 미가야 사이의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 아합과 하나님 사이의 적대 관계를 확정하는 제 3의 갈등상황이 도입된다(16-23절).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8절) 아합 왕이 오히려 미가야에게 또 한번의 신탁을 요청한 것이다. 적어도 아합은 겉으로는 진실(16절)을 요구하며 상서로운 결과를 주장하는 거짓을 배척한다. 미가야는 아합의 진정한 신탁 요구를 듣고 진정한 신탁을 중개한다. 아합의 패배와 몰락 환상이다. 17절에 나오는 미가야의 환상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목자(삼하 5:2; 슥 13:7)의 부재(不在)와 평화롭게 귀가하는 백성들의 대조적인 귀향 상황이다.
미가야의 두 번째 하나님의 천상 보좌의 환상(욥 1:6-12; 사 6:1-8)은 아합이 참 선지자 미가야의 말 대신 왜 거짓 예언자 400명의 말을 따르려고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천상어전 회의의 음모 때문에 아합은 거짓을 따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천상의 음모는 10-12절에서 반영된 아합의 지상의 보좌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반어법(反語法)적으로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가야의 환상은 400명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거짓의 영에 의하여 기만당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400명의 예언자들은 의도적인 “거짓” 예언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거짓말하는 영에 속임을 당하여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합을 속여서 혹은 유인해서(렘 20:7; 겔 14:9) 길르앗 라못에서 쓰러지도록 섭리하시려는 하나님의 계략의 한 부분을 집행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24-28절은 일반적인 예언자적인 논쟁을 날카롭게 벼려서 시드기야와 미가야간의 개인적인 반목으로 변형시킨다. 시드기야는 그의 경쟁자의 뺨을 치고 대신에 하나의 위협적인 신탁을 대신 받는다. 그가 볼 것은(25절) 미가야가 이미 본 것을(17, 19절) 뒷받침할 것이며 그의 모욕적인 질문(24절)에 대한 대답을 줄 것이다. 시드기야가 골방으로 도망칠 상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야는 그의 불길한 신탁의 위력을 약화시키려는 아합의 계획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아합은 또 하나의 한층 더 심화된 경고를 받는다(28절). 왕의 운명은 미가야의 말씀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왕이 안전하게(“평안히”)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대조적으로 17절에 나오는 미가야의 첫째 환상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29절에서 전쟁 이야기는 다시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의 계획(20절)은 성공하였다. 자신의 계략으로 이미 예언된 심판을 피해 보려는 아합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아합의 변장 속임수는 그가 아람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우연히 맞아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34-36절).
22장의 가장 인상적인 신학적 쟁점은 거짓말을 통하여 이뤄지는 하나님의 이상한 일이다. 하나님은 사건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적인 속임수나 무장(武裝)은 말할 것도 없이 심지어 하나님의 계략 노출마저도 그것의 성공을 저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심지어 가장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도 섭리하시고 주장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이상한 하나님이요 또한 부패한 목자들을 향하여 계략을 통해서라도 심판을 집행하신다. 아합은 거짓 예언자들을 따름으로써 파멸되었다. 열왕기상 22장이 증거하는 이단은 일차적으로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지배당한 거짓 예언자들의 신탁이지만, 그 거짓된 신탁을 촉발시킨 인간의 일탈이다. 즉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그것에 복종할 수도 없는 영적 아합의 파탄상황이야말로 이단적 가르침을 발호시키는 임자몸인 것이다.
4. 하나님의 예언에 불순종한 예언자(열왕기상 13장)
열왕기상 13장은 또 다른 유형의 “이단”을 다룬다. 이 장의 이야기 안에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심 줄거리는 자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유다 출신 예언자의 비참한 파멸이다. 하나님의 예언을 가볍게 여기고 스스로 그 예언의 지침을 어겼을 때 받게 될 응징이야기가 이 13장의 핵심이다. 13장은 통일 이스라엘을 분열시켜 북 이스라엘 왕국의 태조가 된 여로보암 II세의 벧엘 성소에 대한 하나님의 단죄 예언이다.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 성소를 향한 파멸 예언을 위탁받아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이 벧엘을 향해 집행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연 그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II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여로보암 II세는 그에게 향응을 베풀어 그가 쏟아낸 참혹한 심판예언의 신적 유래 여부를 알고자 시도하였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뇌물을 먹여 위협적인 신탁의 위력을 약화시켜 보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 II세의 초청을 거절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벧엘 성소와 관련된 사람들의 향응이나 접대를 받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로보암 왕의 초청은 잘 거절하였으나 벧엘의 한 늙은 예언자의 은근한 초청에 응하고 말았다.
늙은 예언자의 초청 동기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지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유다 출신 하나님의 사람의 심판예언이 이제 갓 개시된 벧엘 성소에 대한 예루살렘측의 질투어린 반발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의 협박과 위협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인지 를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석연치 않는 이유로 자신의 격렬한 벧엘 파멸 예언의 신적 후광을 흐릴 만한 온순한 태도를 드러낸다.
처음에는 그 유다의 예언자가 왕이나 그 늙은 예언자에 의해 회유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는 한 불순종한 행동이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그의 성격을 왜곡하고 벧엘에 대한 그의 부정적 신탁을 의심스럽고 위험스럽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벧엘의 늙은 예언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벧엘의 늙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예언이 유다의 예언자를 정확하게 겨냥하여 쏟아졌다(13:20-22). 불길하고 비정상적인 죽음이 유다 출신의 선지자에게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과연 그 유다의 예언자는 귀로에 사자를 만났고 사자는 그를 물어뜯어 죽였다. 그러나 사자는 그의 시신에 입을 대지도 않았다.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먹기를 거절함으로써(28절) 하나님의 사람도 존중치 않았던 하나님의 금지 사항을 지킨다. 사자의 이상한 행동은 이 죽음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그 늙은 선지자는 그가 처음 그 소식을 듣자마자(26절), 벧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예언이 진실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직접 전달했던 계시가 성취됨으로써 벧엘을 향한 파멸의 신탁에 부대 조항으로 추가된 금지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32절). 일의 결말을 다 파악한 그 벧엘의 늙은 예언자는 유다 출신 예언자의 참변 소식을 듣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기를 위하여 준비된 묘실에 그를 묻었다. 그가 정녕 하나님의 예언을 증거한 예언자임을 확신한 것이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비참한 결말은 자신을 통해 쏟아진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어길 때 어떤 결말이 준비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이단은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예언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유다 출신 예언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벧엘에 선포한 예언이 하나님의 예언이었음을 확증한 셈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빌미를 제공한 벧엘의 늙은 예언자는 역설적이게도 그 유다 예언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가 정녕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의 주검을 매장하는 그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벧엘을 저주하는 파멸의 예언을 항구적으로 일깨우는 표적이 되도록 매장한다. 이제, 그 늙은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사람과 그가 전한 메시지의 진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그의 행동들은 앞선 그의 행동들과 정반대가 된다. 유다 출신 예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기만적인 환대의 장본인이 정작 형제적인 우정을 과시하는 장례식을 집행한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위협적인 예언(“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은 그 늙은 선지자 자신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결국 그 자신이 유다 출신 예언자가 발설한 그 위협적인 예언의 꼼꼼한 집행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 옆에 그 늙은 예언자가 묻힌 것은 벧엘을 향한 저주의 신탁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하나의 새로운 동시에 이중적인 증거능력을 드러내는 표지이다(31절). 두 예언자들은 이제 무덤에 가서야 서로 형제가 되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말씀의 종들이 된다.
결론
이단에 대한 구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 보면 이단발호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과 순종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고 그를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그 텅 빈 마음이 야웨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허탄한 묵시가들의 공격대상이 됨을 보여준다.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부추기는 이단, 야웨를 이교도처럼 섬기고 예배하자고 유혹하는 이단, 파멸로 이끌 지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이단도 치명적이지만, 구약이 가장 빈번히 단죄하는 이단적 행태(行態)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알면서도 불순종하는 태도다. 입술로는 야웨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먼 신앙생활이 가장 큰 이단이다. 밖에 있는 이단을 향하여 거룩한 전쟁을 벌여야함과 동시에 우리 안에 암약하는 이단, 정통교회와 정통신자들 삶속에서 암약하는 이단들의 박멸과 제거하는 일에도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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