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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고동엽】 2021. 11. 27.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I. 요한계시록의 메시지와 구조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으로 분류되는 문서다. 묵시문학은 소수자 의식(the minority consciousness)을 가진-이 경우 소수자(the minority)는 박해받은 집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주류 신앙과 자신을 과도하게 구별시키는 분파주의적(sectarian) 신앙단체(Qumran community)일 수도 있다- 집단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밀스럽게 계시받은 내용들을 기록한 문서다. 묵시문학 세계관의 핵심에는 낡은 세상(this world= se culuum=secular=세속적인)은 해체되고 새 세상이 도래(창조)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전통적인 묵시문학에 더하여 기독교적인 묵시문학 전통이 강조적으로 추가한 내용은, 이 낡은 세계와 새 세계의 과도기는 성도의 고난으로 채워지며 마치 임산부(임산부)의 고난과 고통이 창조적인 고통과 고난이듯이(요 16:20-21; 롬 12:1-2; 고전 7:21-27) 낡은 세계를 해체시키고 새 세계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박해받고 소외된 성도들의 고난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독교 신앙이 천지개벽적(天地開闢的)인 체제변혁을 초래하는 신앙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기독교 묵시문학의 최고봉이다. 묵시는 예언과 다른 쟝르다. 예언은 주로 당대의 사회, 경제, 정치적 쟁점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지의 빛 하에서 분석하는데 비하여, 묵시문학은 거의 결정론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하며 잠깐 동안의 혼돈과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낼 것을 격려하고 지탱시키는 문서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 중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서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활용하여 재주형하며, 박해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고난의 불꽃을 견디어 갈 것을 촉구한다.
사실 요한계시록으로 불리워지는 이 책의 내용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교회를 주관하며 교회 한 복판을 오가며 다스리는 왕되신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묵시다(1:1). 묵시 혹은 계시란 전에는 감추어졌던 것을 밝히 드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저자는 세베대의 아들로서 야고보의 동생인 사도 요한으로 알려져 있다. 본문의 여러 군데서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부르며(1:4, 9; 22:8), 거의 예언자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1:3; 22:6-10, 18-19). 저자는 팔레스틴의 성전 및 회당 전승에 정통한 자요 구약성경과 타르굼(아람어 성경)에 정통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요한계시록과 사도 요한의 다른 문서들과의 언어적/개념적 유사성(말씀[요 1:1; 계 19:13], 어린 양, 생명수, 목마른 자[요 7:37; 계 22:17],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에 의하여 받은 계명[요 10:18; 계 2:27], 선과 악의 대조와 갈등 등)도 사도 요한을 본서의 저자로 믿도록 유도한다. 1:9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지중해의 밧모(Patmos) 섬에 유배당하여 있으면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장래를 깊이 고민하다가 받은 묵시의 기록이다.
저작 시기는 도미니티안 황제(AD 81-96년)의 박해시기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AD 98). 본서에 의하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이미 나름대로의 상당한 전통을 세우고 있었다(2:4; 3:1). 도미니티안의 박해는 네로의 박해보다 더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17:8, 11에 의하면 네로 환생 신화(the Nero redivivus myth)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네로 이후의 최악의 박해 황제인 도미니티안을 환생한 네로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수신인(편지형식으로 된 문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다. 그러나 일곱이라는 완전수의 상징성을 고려하면 모든 초대 교회 및 그리스도인들이 이 묵시록의 수신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책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악에 대한 궁극적 승리다.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에 저항하고 그것을 전복하려고 하는 사단과 귀신들(마귀에 의하여 조종당하고 힘을 덧입는 지상 권력가들은 마귀의 대리자들)이 이제 갓 태어난 아이(교회)와 산모(그리스도/마리아)를 향하여 전면적으로 가해오는 파멸적 공격이 요한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악의 왕국을 전복시키고 이 지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로 절정에 이른다(19-22장). 요한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와 권세자(국가권력-계 13장과 롬 13장의 차이)들의 폭력적인 지배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들의 반역적 준동(蠢動)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유다 지파의 사자인 하나님의 어린 양-일찍 죽음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의 궁극적인 승리와 왕좌 등극을 그린다. 그리스도는 왕이며 구속(1:5; 5:6; 7:14; 12:11)의 주(主)일 뿐만 아니라 심판(14:77; 20:11-15)의 주(主)도 되신다. 그는 온전한 왕이시다. 사랑과 자비와 공의와 정의를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왕이시다((5:10; 11:177; 12:10; 20:4).
요한계시록은 구약성서에서 이미 예언된, 지상세계에서 준동하고 활동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 정복을 그림으로써, 요한계시록이 구약성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예언의 목적지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저자는 세속화, 박해, 배교 위협과 위험, 분파와 분열 등 온갖 문제에 직면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붙들어 주기를 열망한다. “지금 현재 권력을 휘두르는 박해자들은 불원간에 그리스도에 의해 무장해제될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이여! 거룩한 삶을 살아 이기는 자가 되라!” 이런 점에서 볼 때 매일 순교하듯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악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을 말하는 요한계시록은 참으로 위로와 소망의 책이 아닐 수 없다. 선악의 경계지점에 서서 회색 빛깔을 띠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들으면 불쾌하거나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죄와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적으로 분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절정이며 최고봉이 아닐 수 없다. 산상수훈의 위로와 팔복 선언은 요한계시록적인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 낡은 세계(21:3, 4)의 창조적인 해체(일곱 단계로 창조된 세상은 이제 일곱 단계로 해체된다)는 신앙적 결단을 요청한다. 요약하자면,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의 명확한 종말론적인 시좌(視座)의 최고봉이다: 낡은 세상은 해체되고 새 세상이 동터온다. 그런데 이 동터오는 새벽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에게는 낡은 세계의 부정과 자기부인과 고난은 불가피하다.




II. 요한 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 과거주의적 해석(The Preterist school): 본서를 AD 312년 경에 일어난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 (회심)으로 이미 성취된 예언들의 기록이라고 보는 입장이다(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3장의 짐승들은 로마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사제계급을 가리킨다고 본다. 본서에는 어떤 미래적 종말론은 없다는 주장이다. 이 책은 박해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싶은 목적만 가지고 있을 뿐 미래 예언에는 관심이 없다고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은 유대교의 묵시문학 문서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다. 황제숭배와 양심을 지배하는 국가권력의 폭압적인 다스림 속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킬 것을 호소하는 묵시문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입장의 장점은 본서를 동시대의 역사적 배경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본서에 일어나도록 예정된 일 중에서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 입장을 취약하게 만든다. 본서의 많은 구절들은 분명히 저자 당대의 시대와 너무나 먼 미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만물을 새롭게 하는 천지개벽의 역사는 당대에 실현된 사건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2. 교회사를 관통하는 예언으로 보는 입장(The Historical school): 요한계시록을 요한의 시대부터 이 세대의 마지막 순간까지 펼쳐질 교회사의 파노라마로 보는 입장이다. 종교개혁자들 혹은 개혁신학 전통에 선 사람들이 이 입장을 취한다. 본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교회의 탄생시점부터 해석자의 시점까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고 본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황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효시요 원형이라고 본다(히틀러, 샤를마뉴, 뭇솔리니, 일제 천황주의). 이런 경우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사건들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주관적으로 연결시키려는 무리한 사변을 낳는다.


3. 관념론적 입장(The Idealist school): 본서를 비역사적 요인들을 가진 책으로서 영원히 계속되는 선과 악의 오래된 대결 원리를 극화하는 책으로 본다. 본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실제 역사적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직 교회사와 그리스도의 재림시기까지 계속되는 선악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데 사용될 뿐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학파: Clement 와 Origen)의 우의적 해석과 별 다르지 않다. 이 입장의 장점은 역사적 사건과 본서를 연결시키려는 무리한 시도들로부터 건져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박해받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문학 자체가 역사 안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질 일들에 관련된다는 기본 명제를 고려하면 이 입장은 어려움에 처한다. 또한 그것은 본서의 여러 군데서 분명히 육하원칙에 따라 일어난/일어날 일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과 정면 충돌한다(4:1).


4. 미래주의적 입장(The Futurist school): 본서의 4장 이후의 내용들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일들을 예언하는 예언들로 보는 입장이다. 3:10은 분명히 미래 일에 대하여, 다가올 시련의 시간을 말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시련의 시간은 6-18장에 기록된 심판사건들을 가리킨다(살전 4:16). 다니엘의 70 이레와 관련된다(9:24-27). 최후 대환란의 절정은 음녀 바벨론의 파멸이다(17-18장). 그리고 최후 순간에 그리스도는 재림하신다(19, 20장). 이 해석은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구별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교회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계획을 둘 다 심각하게 고려하는 입장이다(롬 9-11장과 비교가능; 고전 10:32). 이 입장은 본문의 문법적-역사적 맥락을 존중하고 2-3장의 내용들을 거의 사실적으로 이해한다.
이 입장을 다소 완화시킨 입장도 있다(Ladd). 래드는 일곱 인 심판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당신의 구속사역과 심판사역을 동시에 추진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온갖 세력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한다. 일곱 인 심판들은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적 진행중인 셈이다. 나팔과 대접 재앙은 마지막 시점(하나님 나라 완성시점)에 일어날 심판임을 강조한다(마 24장).


III. 요한계시록의 구조
I. 서론(1:1-20)
1. 서언(1:1-3)
2.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를 거니시는 예수(1:9-20)
II.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들(2-3장)
IV. 보좌, 두루마리,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4-5장)
V. 일곱 인 재앙들(6:1-8:1)
VI. 일곱 나팔 재앙들(8:2-11:9)
VII. 전투에 참여한 다양한 등장인물들과 전투적인 성도들의 회집(12-4장)
VIII. 일곱 대접 재앙들(15-16장)
IX. 음녀, 큰 성 바벨론의 최후(17:1-19:5)
X. 정결한 신부 교회와 어린 양의 혼인잔치(19:6-10)
XI.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XII. 1000년 왕국의 돌입(20:1-6)
XIII. 사탄의 파멸(20:7-10)
XIV. 백보좌 앞의 심판(20:11-15)
XV.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21:1-22:5)
XVI. 결론(22:6-21)


IV. 요한계시록은 지구탈출적, 지구포기적 휴거구원론을 지지하는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4:13-18에 근거해서 요한계시록이 마치 지구탈출적인 종말시나리오를 증거하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히 땅/지구갱신적, 천지개벽적 종말론을 말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세 가지 구원론적 상념 중 하나다. 첫째, "구원은 개인의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다." 이 경우 몸의 구원에 대한 강조나 물리적 환경, 지구환경 등의 구원에 대한 강조는 이뤄지지 않는다. 개인구원은 사회적 성화나 구조악의 척결 등과 어떤 관계도 없는 순전히 고립적이고 단자적인 경험일 뿐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심각한 오류다.
둘째, "구원은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다." 구원은 육체이탈, 지구이탈을 통한 영적 혹은 혼백상태의 구원을 중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바울 당시부터 이단으로 이미 정죄된 영지주의 구원교설교다. 영지주의 가짜복음서들의 특징은 십자가 고난과 예수님 따르는 제자도의 고난없이 순간이동식으로 천국직행하는 데 치중한다는 데 있다. 셋째, "세상 마지막 날 실현될 천국은 지구를 탈출한 우주적 새 거주처이며 이 지구는 어차피 불타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지구 환경 운동, 생태계 살리기 등은 다 헛된 짓이다." 이것이 지구멸절론적, 지구탈출적 구원시나리오다. 이 종말시나리오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 것이 <휴거>라는 책이다. 어스니트 앵글리라는 사람이 쓴 <휴거>라는 소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새 지상에서 잠적해버린다. 천사들에 의해 공중으로 부양되어 주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소설적인 상상력으로 읽을 수는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은 기독교종말교리를 설명하는 책으로서는 부적합하고 심지어 위험하다. 옥한흠 목사의 아들 옥성호라는 사람이 그의 아버지가 이 책을 교인들에게 선전하는 것을 보고 조롱(?)하고 대드는 일이 있었다. 그때 옥목사는 천국의 실재성을 확신하게 하는 데는 이 책이 얼마나 유용한지를 아느냐고 반문하며 이 책의 가치를 옹호하기도 했다. 천국의 실재성을 확신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만 기독교구원의 종말론적인 양상을 말하는 교리를 설명할 때는 이 책의 인용이나 인증은 자제하여야 한다. 이 책은 지구탈출적인, 지구멸절적인, 지구포기적인 종말시나리오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지구보다 더 멋진 새지구를 신비한 또 다른 은하계나 신 태양계 어디에나 만들어 두셨을수도 있다. 그러나 죄많은 이 세상을 놔두고 공중으로 올라가 주를 영접하며 불타는 지구를 바라보며 천국으로 유유히 비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이 세상과 땅에 대한 지극히 무책임한 기독교라는 인상을 심어줄 가능성이 매우 커 전도와 선교의 문을 닿아버릴 가능성이 크다. 존 버년의 <천로역정>, 롯의 탈출한 소돔성 이야기 등은 확실히 죄많은 세상을 떠나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구원의 시나리오로 적합해 보이도록 이끄는 것이 사실이다. 칼 헨리가 쓴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은 전천년설적 종말론에 빠진 사람들이 지구와 인간역사를 포기하는 행태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교회 대다수가 휴거론적인 지구탈출적인 종말구원시나리오애 빠져있지만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이 지구를 포기하거나 멸절시켜 버리는 그런 종말론 구원시나리오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지구갱신론적인 구원시나리오를 말한다. 지구가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곳임을 알려주는 많은 성경구절들을 보자.


1.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습니다.(창 1장)
2. 하나님은 육신의 세계로 들어와 영광을 발하십니다.(요 1:14)
3.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육신을 덧입는 부활, 즉 공간점유적인 몸을 가진 채 맛보는 구원입니다. 영이나 혼백들의 구원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부활 후에도 생선을 드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구원입니다.
4. "아버지 나라,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 주기도문 자체가 하나님나라의 종국적 기착지가 땅임을 암시합니다(마 6:8-10).
5. 다만 이 지구는 갱신되어 다시 하나님나라의 영토가 됩니다. 벧후 3장에 따르며 하늘과 땅은 불사름을 당한 후, 정화되고 단련된 후에 새하늘과 새땅으로 거듭납니다(11-13절).
6. 새하늘과 새땅이 처음하늘과 처음 땅을 완전 대체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졌습니다(계 21:1; 사 65:17-19).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은 사람의 장막과 함께 하여 하나님의 총체적인 신원하심, 위로사역, 힐링이 일어납니다. 땅에서 일어난 모든 악행, 고난, 슬픔을 전제할 때 위로가 되는 위로, 신원사역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예루살렘성의 목적지는 갱신케 된 땅,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계시록 21:4-5은 뭔가를 새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기보다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처음 것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사망, 애통, 통곡을 말소시켜 주시고 만물을 새롭게 하십니다. 지금의 태양계 대신에 하나님 자신이 친히 빛이 되어주시는 새하늘과 새땅(참조. 사 60:20-21)을 창조해 주신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은 의롭게 된 하나님백성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하나님백성이 주인이 되는 땅이 새하늘과 새땅이며 온유한 자가 차지할 그 땅은 바로 새하늘과 새땅입니다(마 5:5). 요한계시록의 새하늘과 새땅비전은 이사야의 새하늘과 새땅 비전을 계승합니다. 이사야 65:17-25은 지구갱신적인, 세상질서 갱신적 새하늘과 새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는 세상이 바로 새하늘과 새땅입니다(잠 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살전 4:13-17은 지구탈출적 구원시나리오 옹호자들이 가장 자신있게 인증하거나 인용하는 성경구절이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부활복음, 예수님의 재림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죽기 전에 일어날 줄 알았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데 왜 고난이 임하냐고 묻자 쓴 편지다(1:6; 2:14-16; 3:3-4). 바울은 하나님의 장차 진노하심에 구원을 받게 하는 구원의 복음을 받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동족에게 박해와 고난을 받는 상황에 처해 신앙중심이 흔들리자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1. 우리 주 예수도, 그 이전의 선지자들도 고난을 받았다.
2. 우리도 가는 곳곳마다 고난과 환난, 박해와 궁핍을 겪는다.'
3.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우리가 아첨하거나 교언을 한 적이 없다.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도 환난이 올 것이라고 이미 말해두었다.
4. 우리가 주의 재림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임박한 주의 재림을 말한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의 강림하실 때까지 흠없고 거룩하게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맥락에서였다.
5. 주의 재림을 기다리다가 죽은 자들에게 대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


이런 권면의 맥락에서 오늘 본문이 등장한다. 본문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예수 안에서 죽은 자들은 자들이다. 부활을 기다리며 자는 자들이니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는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데살로니가 교우 중 죽은 자들도 데리고 오실 것이다.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여 이 땅에 오실 주님을 따를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 즉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보다 주안에서 자는 자들이 단연 앞설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호령, 천사장의 나팔소리,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강림하시면 땅에서 죽어 묻힌 자들(즉 주님 안에서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 살아있는 우리 성도들보다 먼저 부활되어 구름속으로 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그 결과 우리 살아있는 자나 주안에서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이 항상 주와 함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구름속으로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이 휴거론자들에게 휴거를 예고하는 결정적인 구절로 인증된다. 그러나 이 말의 구약성서적 용도와 의미를 살펴보면 그런 말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싸는 외피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완곡어법이다. 시내산에도, 모세의 성막에도, 솔로몬의 성전에도, 이사야의 환상속 성전에도 항상 구름이 있다. 이동중인 성막 위에도 구름기둥이 있었듯이 말이다. 단 7:13에서 구름타고 오시는 인자같은 이가 등장한다. 에스겔서에도 하나님의 이동식 보좌인 메르카바도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 구름속으로 끌어올려진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끌려," "하나님의 영광에 휩싸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화되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영접하고 대면하려면 영화롭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빌 3:12-21).
공중은 대기권 너머 우주공간이나 혹은 대기권 최상층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이말은 에베소 6:12-14이 말하는 그 공중, 하나님과 인간 중간의 영적 존재들, 정사, 권세, 보좌, 주관세력의 거소를 가리킨다. 하나님께 굴복하여야 하지만 잠정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질서에서 벗어나 자율왕국을 이루는 반역적 세력들이 존재하는 영역이 바로 공중이다. 이 "공중"은 플라톤적 세계관에서 익숙하게 알려진 중간하늘이다. 오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11-12권에서도 자세히 다뤄지고 있는 중간계 피조물인 영적 피조물들의 영역이다. 사탄을 공중 권세잡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천사들과 영적 세력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단죄하는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린 주 예수를 참된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영접한다는 말의 헬라어는 아판테시스이다. 이 말은 왕의 행사를 의미하는 파루시아와 짝을 이루는 의전용어다. 이 지상(인간세계)의 통치권을 완벽하게 되찾아 행사하기 위해 자기 땅으로 오는 왕을 영화롭게 된 성도들이, 사탄적 반역세력들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나사렛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는 의식을 한다는 것이다.(파루시아와 아판테시스의 관계를 더 자세히 보려면, 김세윤, 데살로니가전서 강해, 두란노, 2002, 190-195참조). 따라서 이 데살로니가 전서 본문은 공중 휴거, 지구포기적 우주천상계로의 잠적이나 증발을 가리키는 본문이 아니라 이 땅에서 성도들과 함께 사시기 위해 이 땅으로 내려오시는(파루시아) 주님을 영접하는 성도들의 공개적이고 우주적인 왕 영접의전을 가리키는 본문이다. 지구탈출적인 구원이 아니라 지구갱신적 구원의 시작을 의미한다. 주님의 재림에는 요한계시록적 창조적 파괴, 해체가 수반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우리가 이 땅,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이 땅이 새롭게 되어 주님과 우리 성도의 거처가 되는 것이 창조주 우리 하나님께 극대영광이 될 것이다.


지구갱신론적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영과 몸 모두의 구원을 즐깁니다. 하루에 열 다섯시간 직장에 매여사는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무효화하는 자기착취적 삶입니다. 자기파괴적 파라오에고가 지배하는 개인의 삶은 하나님의 구원을 능멸합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구원을 넘어 사회, 생태계 전체의 구원과 영화를 지향합니다. 세상의 운명에 대한 책임적 성도가 기독교회의 본류를 이룹니다. 세계만민의 운명에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3. 하나님이 주신 하늘상급을 위해 분할된, 미시적 순종을 축적을 하다가 주님의 재림시 결정적인 변화를 맛봅니다(빌 3;21). 양자물리학적 대도약이 이뤄집니다.


4. 주님의 구원을 즐기는 과정은 인격적 성화과정임과 동시에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선교적 봉사적 삶입니다.


5. 지상에서 분투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 주님의 재림시에 부활하여 영화롭게 변형되어 마침내 주님을 사탄을 단죄하듯이 공적으로 왕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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