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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by 【고동엽】 2021. 11. 27.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명령과 인도 지침, 약속)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교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집단, 공동체에게 임한 하나님의 다스림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모든 공동체의 삶을 운영하는 데 반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 나라는 십계명과 부대조항에 대한 자발적 순종을 의미한다. 이 자발적 순종을 유도하기 위해, 모든 신정통치의 대리자들이 등장한다. 제사장, 왕, 재판관, 사사, 예언자 등 모든 신정통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국가/공동체 생활에 관철시키는 데 도구가 되는 대리자들이다. 모세오경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고이 카도쉬)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백성(암 아도나이)로 삼는 데 있다. 이 다섯 책은 이스라엘(한 때 히브리 노예들) 영토, 주권, 국민으로 구성되는 고전적인 나라로 성장하기 위해 초기 단계를 다룬다. 하나님의 통치 근거는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언약(십계명)이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요소는 하나님의 율법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암 카도쉬(아도나이)

모세 오경은 히브리 노예들이 하나의 신앙공동체(언약/혹은 계약공동체)인 이스라엘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다룬다. 모세 오경은 왕과 상비군과 관료조직이나 세습 왕조 등에 의하여 지탱되는 국가공동체로 발전되기 이전 단계의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한편 또 다른 한편 이미 그런 의미의 국가공동체를 단계를 거친 후 다시 광야로 내몰린 시대를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보여준다. 모세 오경 안에는 역사적으로는 아주 다양한 시대에 기원한 자료들과 문학적으로 다양한 삶의 자리들을 가진 문학 작품들이 절묘하게 교직되어 있다. 모세 오경은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자료들과 기억들을 담고 있지만 가장 늦게는 포로기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집단적인 전기(傳記)가 들어있다. 즉 모세 오경 안에는 BC 13세기(혹은 혹자들은 15세기)의 히브리 노예들의 신앙적 고투도 있고 사사시대와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리멸렬한 배교의 역사 기억도 있고 포로기 시대의 회한에 찬 왕국시대 역사 회고와 미래 갱신과 회복에 대한 열망도 포함되어 있다. 모세 오경 안에는 결국 BC 13세기부터 BC 6세기까지 약 700년간의 구속역사와 신학적 자기 이해가 압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경을 꿰뚫고 흐르는 주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는 창조주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왕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이다. 모세 오경은 천지만물의 창조사건과 이스라엘의 창조(선택과 계약사건) 사건을 동일한 사건의 순차적 전개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삼라만상와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열방의 왕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을 세계 속에서 흩어져 소멸되는 것을 막아준 결정적인 신앙자산이었다. 결국 모세 오경은 어떤 인간 왕도 개입되지 않았던 모세 시대의 신정주의적 이상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과거(인간 왕들이 다스리던 파라오 시대 또는 이스라엘 왕국시대)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모세 시대를 기준으로 볼 때는 가나안 정착시대요 포로기 독자들의 관점에서는 포로기 이후 시대, 회복시대). 모세 오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통치(명령)와 이에 응답하는 이스라엘의 순종 혹은 불순종의 결과를 아주 도식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역사 속에 결정적으로 승리하고,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완성될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

 

모세 오경 읽기의 해석학적 틀로서 하나님 나라 신학

모세 오경을 비롯하여 구약성경을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처음 읽어내신 분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읽을 때 구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고 비로소 신약성경과 의미 깊게 연결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 즉 모세의 글과 시편의 글과 선지자의 글들이 자신에 대하여 말한다고 주장한다(눅 24장). 이 말은 구약성경이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오리게네스가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자신을 철두철미하게 복종한 걸어 다니는 하나님 나라, 즉 몸소 하나님 나라(auto basileia)였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자신을 극소화, 즉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분이다. 그 분이 하나님 나라를 말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순도높은 복종을 담보했던 셈이다. 모세 오경의 신학적 주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통치(하나님 나라)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을 요청하는 기도다.

 

 

 

모세 오경 24 마당과 개괄적 소개

앞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관점에서 모세 오경을 24마당으로 나누어 연구할 것이다. 절 단위 혹은 장 단위의 해설을 시도하지 않고 주요한 문학적인 단락을 중심으로 해석할 것이다. 24마당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창세기 일곱 마당 하나님 나라는 창조사건이며 새 출발을 의미한다.

1-2장 천지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시작

3-5장 인간 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좌절

6-11장 창조질서(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대항세력들-정사와 권세들의 세계

12-25장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 속에 자라는 하나님 나라

22-27장 온유한 이삭의 무기력과 수동성 안에 머무는 하나님 나라

28-49장 야곱 안에서 성장하고 번성하는 하나님 나라

37-50장 요셉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 세계를 향하여 동터오는 하나님 나라

 

출애굽기 다섯 마당 하나님 나라는 억압과 노예근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1-12장 출애굽과 하나님 나라

13-17장 해방과 탈출의 도상에서 만나는 하나님 나라

18-24장 계약체결과 율법수여 속에서 정착되는 하나님 나라

32-34장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정사와 권세들의 세계

25-40장 상사로우면서도 불길한 하나님의 성막 현존-

이스라엘 장막들 한 가운데 성육신하신 하나님 나라

 

레위기 네 마당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연합과 동거다.

1-7장 레위기 제사신학(가까이 나아감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

8-17장 성막에 가득찬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

18-20장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백성

21-27장 안식년과 희년 절기의 경축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 나라

 

민수기 네 마당 하나님 나라는 자유를 위한 연단이요 자기부인이다.

1-10장 조직화와 훈련 그리고 하나님 나라

11-20장 하나님 나라 질서에 저항하는 대항 조직들(광야의 반역행위들)-

출애굽에 저항하는 환(還)애굽 운동

20-25장 하나님 나라의 자유에 이르는 혹독한 연단과 징계 여정

26-36장 가나안 정복 전쟁을 향한 세 새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징집령-

 

신명기 네 마당: 하나님 나라는 땅위에 건설되고 확장된다.

1-11장 약속의 땅 정복전쟁의 성격과 공세적인 하나님 나라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계약의 변증법적 긴장

12-26장 약속의 땅을 누릴 백성들의 품격. 자유케 하는 율법과 하나님 나라

27-30장 은혜 안에 누리는 하나님 나라-모압언약의 신학적 의의

31-34장 이스라엘의 실패와 배교를 넘어서는 하나님 나라. 모세를 넘어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는 신명기 약속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명령, 초청, 약속, 계약)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왕적 권능과 다스림을 예의주시할 것이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말씀(명령)과 그것에 순종하는 삼라만상의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시작됨을 선포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무 방해받지 않고 집행되는 영역이다. 역사와 자연 속에 뿌리를 내리려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과 반역에 의하여 좌절되는 듯하지만 다시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다시 역사의 궤도를 타고 복귀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삶 속에 일어난 모든 하나님 나라 사건은 세계사적인 의미를 가짐을 예해(例解)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억압과 노예근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1-12장에서 하나님 나라는 거짓 된 애굽 신(신적 왕들)들에 대한 무장해제를 통하여 구축된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즉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수 있는 자유의 획득임을 알게 된다. 출애굽기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십계명 수여와 성막 건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과의 친밀한 동거와 연합을 시도하지만,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배교는 하나님의 의도를 좌절시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임이 드러나고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기 위하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품성적으로 거룩한 백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과제를 남기며 출애굽기는 끝난다.

레위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과의 연합과 동거를 의미한다. 레위기 제사신학(가까이 나아감의 신학)은 가까이 나아감의 신학이다. 죄로 인하여 멀리 떨어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성을 확보하는 도구가 제사다. 제사 자체의 효력은 제물에 있지 않고 하나님 자신의 죄용서 의지에 있음이 드러난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가득찬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사회, 정치, 경제, 일상생활, 종교 제의/절기 등 모든 사회적 개인적 삶의 영역에 가득 차기를 열망한다. 레위기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공존이 일상생활에서 구현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밝힌다.

민수기는 하나님 나라는 자유를 위한 조직화요 쉼없는 연단이요 자기부인의 광야여정임을 밝힌다. 히브리 노예들이 법적 자유를 얻었지만 품성적 자유를 얻기까지 치르는 혹독한 대가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대가임이 드러난다. 민수기에서는 또한 하나님 나라 질서에 저항하는 대항 조직들(광야의 반역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운동력에 의하여 어떻게 분쇄되는지를 잘 예시한다. 민수기는 끝으로 조직화되고 정예화된 용사들이 하나님 나라의 전쟁명령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종말의 시대를 사는 전투적 교회(church militant)의 모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향한 세 새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집하시는 하나님의 징집령에 응답하는 데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신명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을 향한 복된 공격이요 거룩한 육박으로 이해된다. 신명기는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돌입하면서 치르게 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을 밝힌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전쟁이다. 그러나 신명기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인종청소와 같은 민족학살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적들에 대한 거룩하고 공변된 심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적들 명단에는 불순종하고 의롭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한편 신명기에서 하나님 나라는 보금자리에서 추방되어 광야를 전전하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보금자리로 불러들이는 죄용서와 회복과 갱신의 희망으로 다가온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의 복귀가 허락된다. 신명기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지평선에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배교를 넘어서는 미래, 즉 모세를 넘어가는 하나님의 미래 그리스도 예수가 아주 희미하게 동터온다.

 

창세기 1-2장 천지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시작

창세기 창조사건은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창조기사로 보도된다(1:1-2:4a; 2:4b-25). 1장은 하나님의 추상같은 명령에 의한 천지창조 사건을 다루고 2장은 토기장이 같은 가내 수공업 노동자 같은 하나님에 의한 인간 창조를 다룬다. 1장은 추상같은 명령으로 아주 질서정연하게 우주만물과 그 안에서 있는 삼라만상을 창조하는 전제군주형 하나님을 제시하고 2장은 시행착오를 거치는 듯한 실험적인 예술가형 하나님을 제시한다. 두 창조기사(1:1-2:4a; 2:4b-25)를 서로 다른 저자와 서로 다른 출처와 연대를 대표하는 독립적인 자료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절묘하게 상호보완적이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 저자의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드러낸다고 보는 것이 더 낫다(E. J Young, Vos, 그리고 다수의 유대인 성서학자).

 

 

창세기 1장에 대한 요한복음 1장의 기독론적인 읽기: 창세기 1장을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라고 보아야 하는 더 깊은 이유(사 55:10-11; 시 33:6-11)

창세기 1장의 말씀창조 사건은 요한복음 1:1-3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아들)의 즉 그리스도 순종사건을 드러낸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에 의하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 자체였다. 요한복음 1:1-3과 빌립보서 2:6-11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창조사건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이었다. 창조 사건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들 하나님의 순종 사건의 결과다. 창세기 1장의 말씀에 의한 창조사건이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 자체의 순종에 의한 창조사건으로 바뀐다. 하나님의 “가라사대”가 요한복음에서는 독립적인 위격(位格)을 갖는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말씀은 완전한 순종의 화신이며 완벽한 대리자(심복). 영어성경 Living Bible에서는 요한복음 1:1을 아예 처음부터 “In the beginning was Christ”라고 번역한다. 따라서 요한복음 1:1을 새로 번역하면 “태초에 한 순종이 있었다” 혹은 “태초에 한 순종하는 아들이 있었다”로 풀이된다. 이 순종하는 대리자(아들)는 하나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누리고 있었는데 본질 면에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었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따라서 피조물이 아닌 자(아리우스 교리의 위험성은 “한 때 성자 그리스도가 안 계신 적이 있었다”라는 주장)- 그 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만물(가라사대)이 창조되었다. 한 순종하는 말씀(아들)이 없이는 어떤 피조물도 생겨날 수 없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함께”로 번역된 전치사 pros는 인격적 연합과 교제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pros는 단지 물리적인 거리의 가까움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격적 친밀성을 가리킨다. 이 전치사 규칙적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인격적 현존을 나눌 만큼 가까이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C. H. Dodd)("The Gospel of St. John," 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1:684)(막 6:3; 마 13:56; 막 9:19, 갈 1:18, 요이 12절). 이것은 성부와 성자간의 위격(位格)을 구분하면서도 인격적인 일치와 연합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요 10:30; 17:11; 8:58).

결국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창조사건은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순종 사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적인 결단의 사람들에 의하여 창조되고 확장됨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창조기사(2:4b-25)-하나님 나라의 미래는 사람의 순종/불순종 여부에 달려있는가?

두 번째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실험적인 창조 이야기다. 단성인류 아담 창조 후에 하나님의 또 다른 심사숙고가 이뤄진 후에 하나님은 양성 인류인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신다. 엄격하게 말하면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단성인류 아담으로부터 남자와 여자가 창조적 분리를 거치면서 창조된 것이다(프랜시스 쉐퍼의 <창세기의 시공간성> 참조).

첫 번째 창조기사는 하나님 중심 기사다. 우주만물과 삼라만상 위에 명령하시는 고독한 대왕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임과 동시에 혼돈과 흑암세력을 제압하는 질서부여행위다(혼돈 세력 활동 제한). 그러나 2:4b-25에는 1장에서 느껴지던 일사불란한 질서와 안정감이 희미해지고 “불확실한 상황”이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1:1-2:4a와 2:4b-25 사이에는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명령에 대한 우주적 반역이 있었음이 전제된다. 2장의 음울하고 비장한 하나님의 신신당부(동산을 지키라)를 고려해 보면 하나님께 당혹스러운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Jon D. Levenson, 같은 책 참조).

두 번째 창조기사에서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에 들이는 공과 정성이 부각된다. 땅의 티끌로서 인간을 창조하신 토기장이(2:7)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2:8)로 묘사한다(van).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은 몸으로 현재의 남자를 창조하신 육체노동자다(2:22). 2:4b부터는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 옆에 “야웨”라는 말이 처음으로 덧붙여진다. 이제 하나님은 초월적인 명령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우주적인 왕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의 순종에 당신 나라의 미래를 맡기시려고 율법을 주시고 언약을 맺으신다. “야웨”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과 약속 관계에 묶어주는 지극히 겸손하신 하나님이다. 1:1-2:4a에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등거리에 있는 삼라만상과 우주의 창조주 “엘로힘”으로 소개되지만, 2:4b에 소개되는 야웨 하나님은 “사람들과 특별하고 집중적으로 교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 동산에 두셨다. 2:16에서는 1:27-28의 추상적인 사명선언보다 훨씬 구체적인 사명이 주어진다. “동산을 잘 다스리며 지키라.” 1장에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사람(1:26)은 이제 “에덴 동산을 잘 다스리며 지키라”는 구체적인 사명위임을 받았다. 에덴 동산은 인간의 다스림과 지킴을 받으며 관리되어야 한다. “다스리며 지킨다”는 말은 정치적인 행위이며 잠재적인 반역과 반항과 침략을 은근히 예기하며 대비하는 명령이다. 2:16-17의 명령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본문에서 다 기록되지 않은 동산 밖의 사태(뱀과 관련된 사태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에 대하여 미리 말해 주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2:16-17의 신신당부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돌연스럽다. 2:16-17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담은 그 금지명령(동산 중앙의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라)의 함의를 이해했어야 했고 적어도 “죽는다”는 말을 이해했었어야 한다(3:17-19).

1장에는 하나님의 추상명령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삼라만상, 천체들이 열병하듯이 왕의 명령에 따라 순서대로 출현하였다. 1장에서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시 103-104편). 하나님은 페르샤 군주(단 5장)와 로마 황제 가이사처럼(눅 2장) 명령으로 천하만민을 움직인다. 1장에서 하나님의 어떤 잠재적 대적자들도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는다. 바벨론 창조설화에서 창조주 신의 통치를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바다”마저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뭍”을 낸다(출 14-15장). 혼돈, 흑암, 바다 등은 다른 고대근동 창조설화에서는 신적인 실체로서 창조주 신의 질서부여 행위(창조행위)에 격렬하게 저항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피조물로 격하된다. 해, 달, 별, 일월성신, 하늘의 천체들은 인간의 경배를 가로채기 위하여 감히 하나님과 경쟁할 마음을 먹지 못한다. 다른 어떤 신들도(신 32:8 별들은 다른 이방인들의 주관하는 신) 하나님과 동등한 모사가 아니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복종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명령을 믿으면 창조사건이 일어난다. 1장에서는 어떤 반역이나 저항의 낌새도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다.

그러나 2장에 오면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이 약화되는 상황이 예상된다. 격하고 위협적인 용어들이 등장한다: “정녕”, “죽는다.” 1장의 하나님의 절대적 “안식”은 잠재적 도발자의 도래를 대비하는 엄숙한 명령에 의하여 중화된다(2:16-17). 에덴 동산은 아담이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에 입각하여 잠재적인 침입자로부터 지켜내어야 할 영토가 된다. 아담이 만일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데 실패한다면 아담은 “죽는다”는 가히 충격적인 선언을 듣는다.

하나님의 엄숙하고 추상같은 금지명령을 지키기에는 인간의 내적 취약성이 금방 암시된다. 아담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아담의 재료가 흙(아파르)-흙 너여!(3:19) 흙으로 돌아가라-이라는 사실은 사람의 존재론적인 취약성을 암시한다. 흙은 깨어지기 쉬움성, 내적 취약성, 변질되기 쉬움 상징한다. 시 103편은 인간의 체질이 진토라는 사실이 창조주의 신적 동정심을 자아내는 근거가 된다고 본다.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은 동물스러움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 쪽으로 저울눈금을 돌리는 사건이다. 또 다른 한편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위험천만하게도 “하나님의 생기”를 받고 생령(a living soul[=nepesh])이 되었다. “영”으로 번역된 네페쉬는 욕망이라고 번역할 만하다. 아담은 욕망추구적 존재가 된다. 만지려고 하고 먹으려고 하고 금지된 경계를 넘으려고 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에 휘둘리는 존재가 된다. 자신 안에 충만하게 넘치는 원시적 생명의지로 가득찬 존재가 되었다. 그 자체로 중립적일 수 있는 이 드센 욕망을 인간은 노동(에덴 동산 관리와 보호)을 통하여 통제하고 연소시키고 승화시키도록 부름받는다. 창조적 억제를 통하여 욕망은 스칼라(scholar)에서 벡터(vector)가 된다. 그래서 금지명령이 등장한다. 하나님의 금지명령은 “탐스러운 열매맺는 나무의 모습”을 하고 서 있다. 삶이 이루어지는 한 복판에 시험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가 서 있다. 아담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를 보면서 자신의 욕망을 금지하고 한계를 지우는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과 늘 대면한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욕망덩어리였던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단 하나의 금지조항도 다른 모든 동산의 실과를 따먹을 수 있는-하나님이 강조하는- 그 자유를 질적으로 초라하게 만드는 강렬한 금지였을 것이다. 다른 나무들의 실과를 따먹을 수도 있다는 자유마저도 그 강력하고 근본적인 금지명령의 상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담은 100의 자유와 1의 금지를 두고도 자유보다는 억압을 느끼는 존재였다. 그 선악과나무가 동산 중앙에만 있지 않았더라도!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 두 나무의 병렬(립)은 마치 종속절과 주절의 관계처럼 읽히는 하나님의 명령을 드러낸다. 만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면-시험을 극복하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수 있다. 이것이 아마 언표(言表)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을 것이다(요한계시록에서 시험/환난을 이긴 자가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다)(비교 창 3:22). 선악과 계명의 핵심은 아담의 자기부인과 시험(probation)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본성 속에 과연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몰라서 하는 시험이 아니라 아담의 영적 도덕적 감수성을 한 단계 고양시키기 위한 시험이다. 어떤 자격을 얻기 위한 시험이다(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그러나 선악과 계명은 이런 선하신 하나님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진토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항구적 유혹이었으며 그의 전락을 부추기는 도구였다.

 

 

창조주 신앙의 실제적인 힘: 창조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다(이사야 44:6)!

창세기 1장의 변증적(apologetic=faith-defending) 기능은 이집트와 바벨론의 창조설화와 창세기 1장을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유일무이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수 천년을 견디어온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다른 어떤 고대 근동의 민족들은 창조를 자신들의 역사와 관련시키지 못한다. 고대인들은 그들의 세계를 각기 서로 다른 힘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영역들로 나누었기 때문에, 고대 근동의 다른 종교들은 어떻게 만물이 서로 각각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해와 달, 채소와 뇌우의 신들은 각각 존재하였으나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해, 달, 별, 들, 바다, 채소, 다산과 풍요, 생명과 죽음 등 자연 안에 일어나는 모든 힘들을 통합하고 주관한다. 창세기의 창조신앙에 의하면 이 세계는 통제할 수 없는 우주적 힘들이나 운명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역사와 자연 속에 일어나는 일들에 일관성을 부여하신다. 창조사건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자연질서와 계약을 체결하신 사건이다(렘 33:25).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계약(berith)은 규례(ḥûqqôth)와 병행을 이룬다(욥 38:33; 렘 31:35; 렘 31:36[ḥûqqîm]). 시 148편 또한 하나님의 왕적 통치(창세기 하나님 나라 시작임을 가리키는 또 다른 시편은 103편 19-22절)를 반영하는 개념들인 “명령”과 “규례” 또는 “확정된 법칙”(ḥōq)이라는 용어들을 사용한다. 하늘의 피조물(천사, 천군, 해, 달, 별)들과 땅과 바다에 사는 피조물 모두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명령하고 호소하기 위하여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기 위하여 “명령” 또는 “규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이 설정한 객관적인 규칙과 원리에 따라 삼라만상을 신실하게 다스린다. 따라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변덕스런 신들이 갈등하는 그런 우주란 성경에 없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통치하신 왕이시다.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도다”(시 113:6).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은 창조사건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 사건임을 알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지체없이 집행되고 실행되는 영역이다. 하나님의 말씀(명령)은 하나님의 뜻하는 바를 이루신다(사 55:10-11). 하나님이 발설하시는 모든 말씀은 명령이며 그것은 순종과 믿음을 요구한다(시 119; 신 30:15-16; 시 29편; 시 33:6-11).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 하나님의 말씀(명령)은 그것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에 의하여 완성되고 성취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화신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다. 그는 자신이 걸어 다니는 하나님 나라, 몸소 하나님 나라다(auto basileia).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충만한 다스림이 세상 안에 실현된다. 창조시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마침내 절정의 단계에서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히 1:3-4; 3:1-6).

위에서 인증(引證)된 예레미야서와 시편 구절들은 창조세계 일반에 대한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법칙적인 관심에 대한 언급에서 출발하여 이를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으로 확장시킨다. 그것들은 천지만물과 맺은 낮밤과 계절 언약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원류임을 선언한다. 창조사건과 이스라엘의 구속사와 등치시킨다(특히 43:1-9). 이스라엘은 먼저 집단적으로 출애굽의 하나님, 시내산의 하나님을 먼저 알았다. 구속자, 이스라엘의 선택자, 그리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야웨가 바로 천지만물의 창조자, 세계열방을 다스리는 대왕임을 알게 되었다(사 41:1-29).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이스라엘을 다른 열방들을 구별짓는 가장 특이한 점이었다. 이러한 창조주 신앙은 하나님 외에 어떤 존재나 기구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비판하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사랑, 찬양, 그리고 경배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은 반(反)우상선언이요 십계명 1-3 계명와 쉐마(신 6:4-5)의 신학적 근거가 된다.

 

이사야 40장 12-17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초라해 지는 모든 피조물들을 열거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왕은 우주에 비길 수 없는 절대적으로 크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전적인 순종과 신뢰를 드려야 한다. 큰 바다, 태산과 같은 큰 산, 땅, 거대한 피조물(혼돈/무질서 세력, 국가, 조직)은 하나님의 가장 작은 저울(간칭과 명칭)에 달아도 오히려 가볍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 바벨론, 폐르샤 등 제국들은 한 방울의 물처럼 보잘것없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여야 한다. 강대국, 열국들, 태산들, 그리고 대양들을 의존하거나 그것들의 힘을 의지하려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위력은 이사야 40:21-31에서 잘 표현된다. 특히 40:28-31은 창조주에 대한 신앙고백이 갖는 실제적인 함의를 집약한다.

 

적어도 이사야 41:5-7, 41:21-24, 29, 42:14-17, 44:9-20, 45:16-17의 우상숭배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은 포로기 청중들의 삶 속에 우상숭배적인 삶의 습속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침투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우상숭배적인 종교가 얼마나 창궐하였으며 바벨론 땅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요소들에 의하여 얼마나 그 마음이 분열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사야 46:1-9은 구체적으로 포로기 동안의 창조주 신앙은 바벨론의 신 벨(Bel)과 느보(Nebo)와 그것들과 관련된 우상숭배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신학적인 공격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 나라는 우상숭배에 대한 복된 공격이다. 우리 마음의 보좌를 틀어쥐고 있는 거짓 신들을 폐위시키고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모시는 것이 창조주 신앙이다.

요약하자면 이사야 40:21-31은 우상숭배적 삶에 대한 대안적, 대항적 삶의 창조주 신앙임을 선포한다. 우상숭배를 피하고 참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앙 안에 거하려면 (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나)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역사변혁(국가의 흥망성쇠), 사회변혁(방백은 무로 전락)의 주관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역사변혁의 상수(Constant)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건져준다. (다)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룩하심, 비길 수 없음을 알아야만 우리는 우리의 나눠지지 않은 전심의 충성심을 야웨께 바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의 이름을 알고 계심을 알아야 우리는 역사 안의 염세주의 허무주의 비관주의, 피곤과 탈진,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다. (라) 하나님이 영원히 젊은 창조주 하나님, 지혜와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임을 알아야만 우리는 야웨 하나님만을 앙망할 수 있다. (마) 그래야 독수리가 직승(直昇) 비상하듯이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다. 바벨론 땅에서 팔레스틴까지 돌아가는 포로들의 여정은 1200km에 걸쳐있다. 이 여정은 장정이라도 피곤하여 탈진케 되는 길이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앙망없이는 도저히 걸어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나님은 걸어 갈 수 없이 너무나 먼 길을 날아갈 수 있게 하신다. 창조주 신앙은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우상숭배적인 삶에 대하여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삶을 제공한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지만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삶은 진실로 우리의 삶을 원기왕성하게 한다. 바벨론에서 다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는 그 길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초점잡힌 앙망에서 솟아나는 날아오르는 힘으로 답파할 수 있다. 1200km 대장정은 소년, 장정, 젊은이의 이름으로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앙망함으로 완주할 수 있는 대장정이다.

 

창세기 3-5장: 인간 창조와 하나님 나라의 좌절

 

2장 공부를 통하여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기를 입고 나서 생령(욕망추구적 존재)이 되었다는 것을 공부하였다. 3장의 시험기사에 와서 비로소 독자는 사람의 욕망추구적인 본질을 만나며 동시에 사람이 진토로 창조되었다는 진실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2장에서 동물을 다스리라고 신신당부하셨는가를 3장에 와서야 깨닫는다.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사람 부부의 등장으로 불확실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2장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다. 2:16-17의 선악과나무 계명은 인간의 독특한 사명을 부각시키는 반면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취약성을 예기케 한다. 에덴 동산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사람의 순종 여부에 달렸다!

 

창세기 6-11장: 창조질서(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정사(政事)와 권세(權勢)들의 세계

노아시대의 항신적(抗神的) 세대(창세기 6장)

가인 계보와 셋 계보라는 두 줄기의 계보는 노아시대에 와서 나쁜 방향으로 통폐합된다. 노아 시대는 음란, 잔인, 성도덕의 문란, 인구 폭발적 증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 소멸(마 24:37-40; 벧전 3:20-22)로 특징지워진다. 노아시대는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음성을 희롱하는 세대였다. 땅이 패괴하여(윤리와 도덕의 붕괴) 짐승들/동물들마저도 악독해져가는 세상이었다. 이러한 노아시대의 성적 타락과 폭력-힘 숭배 문화를 주도하던 세력이 네피림(하늘에서 떨어진 자들-영적 존재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들(천사급 존재들 [욥 1장 등])이었다. 이들과 인간 딸들의 결혼에 의하여 고대 거인 족속(헤라클레스류의 인간)이 탄생된다. 창세기는 신화적 이야기를 통하여 인간 타락의 우주적 기원을 설명한다. 즉 인간의 타락은 우주적 반역천사들의 꾐에 넘어간 결과임을 강조함)임을 강조한다. 그리이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호색적인 신들의 원조격인 네피림들과 인간 여자들의 결혼을 통하여 노아 시대의 죄악된 인류들이 생겨났다는 이러한 신화적 주장은 죄악의 팽창역사의 발전에 대한 과학적-인류학적-역사적 설명이 아니라 신학적 설명이다. 그리이스-로마신화는 페니키아를 통하여 전승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단편이다. 호색적인 영적 존재들의 피(하나님께 반역한 천사들)가 섞인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여지가 없는 존재로 정죄당한다. 성경은 고대의 거인족의 출현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을 아무 거리낌없이 사용함으로써 당시의 독자들의 문화적-인식의 틀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설명은 현대인에게 다소 우스꽝스럽고 불합리하다. 그러나 분명한 메시지는 노아시대의 거인족에 의하여 주도되던 음란, 잔인, 폭력 문화는 우주적-사탄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 홍수-창조 이전의 혼돈으로 되돌아 간 세계(창세기 7-9장)

하나님의 창조사건은 원시바다에 잠겨 있는 땅(뭍)을 건져내신(구원해 내신) 사건이다. 1:2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여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그 때 땅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원시바다의 수면 위에 하나님의 바람(신)(큰 바다, 신적 바람)이 격렬하게 불고 있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은 하나님의 바람에 의하여 원시바다의 물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지면 그 중간에 뭍(육지)이 드러난 사건이다. 창조는 원시바다 아래 잠겨있던(물과 뭍이 뒤엉켜 있는 상태) 땅, 그래서 어떤 땅 위의 피조물도 살지 못하던 공허한 땅을 바다 물 가운데 분리해 내시고 그 위에 온갖 종류의 생명체로 충만케 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의 원시바다 위에 격렬하게 불어닥친 바람이 바닷물을 한 곳에 모아들이자 뭍이 드러났다. 땅이 창조되었다. 물과 뭍이 뒤엉켜 있던 창조 이전의 혼돈은 이제 사라졌다. 창조사건은 땅의 구원 사건이다. 나일강 창일한 물결에서 건져냄을 받은 모세는 "창조되면서 동시에 구원받은 인물"이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바다를 땅을 뒤덮는 혼돈과 창조질서의 반역세력의 근거지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창세기의 들짐승 뱀은 궁극적으로 바다에 사는 거대한 용 리워야단(Leviathan)과 동일시된다(사 27장; 계 20:2-3). 노아홍수는 땅과 그 위에 사는 인간과 동물계에 대한 심판으로서 땅을 다시 원시바다 아래로 침수시키는 심판이다. 6:1-13에서 하나님의 환멸과 실망, 그리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땅"이라는 말이 아주 빈번히 언급된다(1, 4, 5[세상], 6, 7[지면], 11, 12, 13절). 홍수심판은 땅을 다시 원시바다 속으로 침수시키는 반(反)창조 사건이다. 하나님에 의하여 원시 바다로부터 건져냄을 받은 땅은 다시 바다 아래로 침수된다. 결국 노아 시대의 홍수심판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질서를 스스로 무효화시킨 조치였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원시우주는 물과 뭍이 뒤엉킨 혼돈 상태였는데 노아 홍수에 의하여 세계(뭍의 세계, 육지)는 다시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었다. 인간의 잔인함, 폭력성, 그리고 음란함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극도의 실망과 환멸은 노아 홍수라는 참혹한 재난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감정을 잃은 뒤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감정을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기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하나님은 주도면밀하며 의도적으로 분노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워하심의 표현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예언자들>). 하나님의 죄에 대한 미워하심과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시는 일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은 소박한 인도주의적 감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 같은 면을 가진다. 노아 홍수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진노의 폭발을 만난다. 어떤 인간의 의와 선행도 하나님의 폭발하는 진노를 멈출 수 없다.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퍼져나간 인류의 인종적-지리적 확장과 분화역사(창세기 10-11장)

10-11장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확장된 인종들 및 종족들의 지리적 분화와 이동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노아의 세 아들들로 대표되는 노아 인류의 후손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퍼져간 인류들로서 그 당시 성경 기자들에게 알려진 세계의 전부였을 것이다. 창세기 10장의 열국 도표는 약 70여 민족을 열거한다(신 32:8-9: 이스라엘의 자손의 숫자[애굽에 내려간 70명의 야곱]와 같은 열국의 숫자를 언급한다). 창세기 10:1-5는 노아의 아들 야벳 족속의 후예들이 지중해 일대에 퍼져간 경로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주로 유럽 쪽의 인종이다(야완, 두발, 메섹, 금의 집산지로 유명한 달시스, 엘리사 등). 10:5은 야벳의 후손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라고 증거한다. 여기서 방언(언어), 종족(문화적 단위), 그리고 나라(정치적 단위)를 기준으로 야벳의 후손들이 분화되어 간 것을 알 수 있다. 10:6-20은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들의 지리적 인종적 정치적 확장 및 분화과정을 다룬다. 여기서 금방 눈에 띄는 나라는 미스라임(애굽)과 구스(이디오피아)다. 또 10:10은 시날(바벨론 평지-다니엘 3장 참조)에 본거지를 둔 함족의 영웅호걸인 니므롯을 특별하게 소개한다. 그는 BC 20세기 이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에 휘황찬란한 토목건축 문명을 주도한 영도자다(거대한 바벨탑의 원형이었을 지구라트 문명의 전신). 니므롯은 BC 20세기 이전의 고(故)바벨로니아 고(故)앗수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토목건축 문명 창조의 영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니므롯이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10:9).

이 함 족속의 한 갈래가 팔레스틴땅을 두고 수 천년에 걸쳐 갈등하고 대결하던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10:14)이며 가나안 7부족의 일원이었던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10:15-16)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팔레스틴 땅에 출현하였을 때는 이미 함족의 한 갈래인 가나안 자손의 일파가 시돈(Sidon)에서부터 가자(Gaza)와 그랄(Gerar)과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창 10:19). 야벳 족속과 마찬가지로 함족의 후예들은 아주 자연적인 방법으로, 즉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 단위로 흩어지고 확산되었다(10:20).

아브라함의 원줄기 인종을 이룬 셈족의 지리적 인종적 분화과정은 가장 나중에 소개된다(창 10:21-32). 셈족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 창조세력을 형성하였다(10:22). 아마도 에벨은 함족의 영웅 니므롯이 바벨로니아의 시날 평지에서 주도하던 바벨탑 건설에 동조하였던 셈족의 지도자였을 것이다(25절). 마찬가지로 셈족도 앞의 두 형제들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지리적 인종적 분화 및 확산과정을 거친다. "이들은 셈의 자손이라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31절).

인상적인 사실은 아직도 이스라엘은 세계사에 독자적인 하나의 민족으로 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BC 20세기는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우면서 동시에 고바벨로니아-고앗수르 문명 창도세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는 문명주도권력의 교체기였다. BC 18세기 함무라비 시대의 바벨론은 전성기를 지나면서 다시 약 300년간의 역사적 격변기를 겪게되는데 이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팔레스틴과 애굽 지역으로 대규모 인종/민족 이동을 감행한다. 아브람의 고향 갈대아 우르는 우르 3왕조(Ur III)의 중심지로 고바벨로니아 세력에 의하여 대체된 고대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였다. 아브람이 그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인 갈대아 우르(Ur of Chaldea) 출신이라는 점이 바로 창세기 1-11장을 고대 수메르-고바벨론 지역의 창조설화와 홍수설화와 비교해보도록 유도하는 역사적 접촉점을 제공한다. 아브람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애굽 및 팔레스틴 이주가 한창이던 BC 18-15세기 사이에 어느 한 시점에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자연적 지리적 이유 때문에 확장되는 종족역사의 한 부분으로 분류될 수 없는 이유로 가나안 땅 이주에 나선다(창 12:1-3). 아브람의 가나안 이주는 하나님의 명령이자 약속(초청)에 대한 순종에 의하여 이뤄졌다. 여기서 이스라엘 민족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가 내포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나 민족들의 형성과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노아 홍수 후에 홍수 심판을 받은 후 세계 속으로 흩어졌던 노아의 세 아들들과 같은 방식으로-지리적, 자연적, 정치적, 문화적, 언어적 분화과정을 거쳐서-형성된 나라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또한 바벨탑 축조 세대들에 대한 심판의 끝에 이뤄진 종족들의 심화된 정치적 분화 및 문화적/언어적 분화과정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창 11:8-9). 이스라엘은 인류/인종들의 "아래로부터"의 족보의 한 마디에서 생성된 민족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독특한 목적과 약속에 대한 순종으로 형성된 "위로부터 생성된" 민족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구속사(救贖史)와 세계사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성경의 역사나 이스라엘의 형성사도 분명히 자연적인 원인으로, 인류학적 정치적 지리적 원인들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니콜라이 베르쟈에프, <역사란 무엇인가?>). 아브람의 가나안 이주는 BC 18-15세기 동안 진행된 메소포타미아의 아모리 족속의 대규모 서진(西進)-팔레스틴/시리아/애굽 이주 행렬-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에 전혀 다른 신학적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11:10-32은 셈족의 한 지류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아브람이 겪었던 불임(不姙)의 세월을 보도한다. 아브람은 셈족을 생물학적으로 계승하는 후손을 생산하는 데는 실패한다. 아브람은 전혀 다른 씨를 생산하고 전혀 다른 민족을 이루는 조상이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불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세계 만민을 복되게 할 민족, 큰 민족의 조상으로 삼고자" 셈족 아브람은 죽고 "새로운 민족"의 조상 아브람이 다시 살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역사의 일부에 지나지 않던 아브람의 가족사, 구원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저류처럼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데라가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자 했던 시도는 자연적 세계사의 일부였을 것이다(창 11:25-29). 그러나 아브람의 가나안 이주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과 명령이 작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는 세계사의 좌표 속에 한 지점에 자리매김될 수 있는 인간적인 행동차원과 이성으로는 포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지가 서로 엮어져 만들어진 직조물(織造物)이다.

 

 

창조질서(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대항세력들-정사와 권세들의 세계

창세기 1-2장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계시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장 성취되는 세계다. 하나님의 명령이 집행되고 실현되는 세계가 하나님 나라다(시 33, 103편). 그런 의미에서 1장은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모습이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제 자리에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선한" 혹은 "적절한" 피조물들이었다(엡 2:10). 2장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사람의 순종이 이뤄지는 곳에서 세워진다. 하나님 나라의 서고 무너짐이 인간이라는 변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2장이 인간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유지의 견인차이며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선악과나무 계명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이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인 대항세력을 형성한다. 창세기 3-4장은 선악과 계명 준수에 실패하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좌절을 보여준다. 4-6장을 거치면서 하나님 나라에 저항하는 반역세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팽창한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대한 의심과 조롱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스림에 대한 고의적 반역으로 결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3-11장은 다섯 가지 유형의 "죄인"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시편 1편의 도식에 따르면 3장은 악인의 꾀를 좇는 단계의 죄인(아담형 죄인)을, 4장은 죄의 길에 들어선 죄인(가인형 죄인, 4:1-14)을, 4:23-24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죄인(라멕형)을 보여준다. 6장 1-12절의 노아시대의 반인반신적 거인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조롱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패역한 단계의 죄인 유형을 보여준다. 노아 시대의 인류는 과연 네피림의 후예들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타락한 자손들이다. 11장은 바벨탑 축조형 죄인들로서 그들은 저항적 일신교 유신론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알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내어 흩어지지 않으려고 버틴 세대다. 이상의 다섯 유형의 죄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 다스림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반역한 인간형을 대표한다.

 

창세기 3-11장은 하나님의 다스림(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의 성장사를 다룬다. "정사," "권세," "보좌," "주관," 그리고 "능력"은- 봉건제도 하에서- 황제의 제후들로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가진 제후국들을 가리킨다. 황제의 통치 아래 있지만 잠재적인 반역자들이며 많은 경우 황제의 다스림에 반역하며 자율적인 대항 국가체제를 세우려고 한 적이 많았다. 중국과 서구 유럽의 봉건 제도의 역사를 보면 정사, 권세, 보좌, 주관, 능력으로 불리는 작은 공국(公國, 제후국)들이 황제의 통치에 얼마나 자주 그리고 집요하게 반역을 시도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이 용어를 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통치에 반역하는 천사적-영적 세력을 가리킨다(고전 15:24; 골 2:15; 엡 1:21-22; 6:12; 벧전 3:21-22). 그것은 역사의 마지막 날에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반역상태를 유지하도록 허용된다. 3-11장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이런 저런 모양으로 거부하는 "정사"와 "권세"들이 세력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담의 죄는 단독자가 범한 죄였다. 가인이 저지른 죄는 농사짓는 자의 대표자인 가인이 양치는 자의 대표인 아벨에게 가한 폭력과 살해 범죄다. 약간의 사회적 성격을 띤 죄다. 라멕이 소년과 사람들에게 가한 대량학살 죄는 집단적 부족적 단위의 죄악이다. 노아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전생태계적인 현상임을 목격한다. 3-9장까지 진행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저항은 11장 바벨탑 축조사건에서 가장 명백한 자기 반역자의 목소리를 표출하면서 세계적 정치세력화의 길로 접어든다.

11:1-9은 3-11장까지 이어지는 반역적 인간의 역사를 이끌고 가는 반역적 인간의 집단적 목소리를 담아낸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3-4). 언뜻 보면 이 말이 하나님을 향하여 무슨 저항적인 태도를 표출하는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10장에서 살펴보듯이 노아의 세 아들들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분산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추정할 수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는 명령은 지리적 확장의 명령을 내포한다. 노아의 세 아들들이 지면에 흩어짐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함족의 영웅 니므롯이(셈족의 에벨[10:25]) 자신의 영지(領地)에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메시지를 보내려고 한다(10:10-12).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세계에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하나님의 흩으시려는 의도에 반대의사를 피력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이름(사람의 권능)을 내어 온 지면에 흩어짐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지면을 유리방황하는 벌을 내리신다. 가인은 이에 대항하여 자신의 아들 에녹 이름을 따서 에녹성을 쌓는다. 바벨탑을 쌓는 세대도 "지면에 유리방황하는 대신에" 성채와 탑을 쌓는다. 구약성경과 고대 근동의 문명에서 성과 대(탑)는 항상 교전 상태를 의미한다. 잠재적인 전쟁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하늘)을 향하여 성과 대를 쌓았다는 행위는 하나님과의 원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하나님에 대한 도전인 셈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나온 후예들이 한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런 전지구적 반역행위가 가능하였다고 보아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신다. 성과 대를 중심으로 인류를 하나되게 만드는 행위는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대항하는 찬탈자와 반역자들의 호전적 태도를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태도는 심판을 초래하고 바벨탑은 "언어와 의사소통의 일치"에 근거하여 시작된 프로젝트였지만 이제 영원한 혼란과 혼잡, 의사소통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심판의 잔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하나님에 대항하는 인간의 전지구적 혹은 집단적인 일치와 단결은 항신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세계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려는 모든 시도는 바벨탑을 축조하는 신학적 오만이다. 각 나라, 각 종족, 언어단위의 부족의 개별적 정체성이 유지되는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는 종말의 특징이다(계 7:9; 11:9). 결국 세상 나라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에 의하여 접수될 것이다(계 11:15).

 

 

아브람/사래의 순종과 믿음 속에 자라가는 하나님 나라(창세기 12-15장)

1-11장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인 동시에 인간(1장)의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에 따라 좌절당할 수 있는 역동적 실체(2-3장; 6-11장)임을 배웠다. 창세기 12-25장은 아브람과 사래의 순종과 믿음 속에서 자라가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사를 보여준다. 그 동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비롯한 족장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개인경건의 모범을 보여주는 본문으로만 읽히거나 이해되어 왔다. 믿음과 순종의 문제를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으로만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창세기 12:1-3의 원(原)아브라함 약속은 땅, 후손, 임재와 보호, 이름의 창대 등에서 보여지듯이 하나의 정치적-공동체적 실체를 지향하고 있다. 즉 의와 공도를 이루는 나라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창 19:19; 히 11:10, 16).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 12:1-3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을 세계사적 지평 속에서 반추(反芻)하는 신학적 성찰이 들어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사가 세계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구속(救贖)계획의 도구임을 예리하게 의식하였음을 보여준다. 10장(11장)에 나오는 열국 도표에는 ‘이스라엘’이 누락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자연적-인종적-언어학적 차이 때문에 생성된 여러 민족 중 하나가 아니라는 주장이 깔려있다. 결국 12장의 아브라함의 등장과 그것의 구속역사적 의미는 창세기 3-11장이라는 긴 서론을 전제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3-11장은 인류의 원역사(原歷史) 혹은 범례적 역사(範例的)를 다룬다. 이런 의미의 범례적 역사는 모든 문명의 시초 역사 속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 범례적 역사에 의하면 인간역사는 한 “선한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나빠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3-11장은 죄와 심판의 악순환이 인류가 문명사의 초창기에 경험한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3-11장은 아무런 목적이 없이 순환하기만 하는 역사를 기록한다.

아브라함형 인류의 출현은 아담형 인류, 가인형 인류, 라멕형 인류(4:23-25), 노아시대의 네피림 자손(아낙 자손), 바벨탑 축조형 인류와 전혀 다른 유형의 인류의 출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셈족(창 9:24-27, 특히 9:26)을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데라를 택하시고 그 중에서도 아브라함을 택하신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만민시대를 끝내고 선민시대를 여는 말씀이다. 아브람은 이제 “한 새로운 위대한 나라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와 그의 후손은 세계 만방을 복되게 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창세기 3-11장에서 인류 원역사가 경험한 저주와 심판의 악순환 구조를 전제하지 않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다. 여기서 바로 만민의 역사와 선민의 역사가 갈라진다.

요약하면, 아브람의 등장의 구속-역사적 의미는 아브람의 순종과 믿음이 죄와 벌이라는 악순환으로 반복되는 원역사 시대를 종결짓는다는 데 있다. 선민의 역사가 등장하기 전에 있었던 죄-벌의 순환론적인 역사는 선민의 믿음과 순종의 역사에 의하여 포섭된다. 이 과정에서 인류역사는 불가피하게 선택과 비선택(배제)의 논리에 의하여 나뉘어 질 것이다. 그러나 선민과 비선민의 구분은 잠정적이다(롬 9-11장; 엡 1-3장). 선민은 만민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민의 역사는 선민의 역사 바깥으로 배제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 선민의 역사는 만민의 역사를 내포하고 견인한다. 아브람의 순종과 믿음의 생애는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작용하는 장(場)으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지렛대 역할을 한다.

 

모세의 하나님나라 복음: 출애굽(유일회적인 해방과 계속적인 해방), 레위기(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유의 삶), 민수기(광야의 연단과 징계), 신명기(열매맺는 삶)

 

1. 구약성경에 약속된 하나님나라 복음

하나님나라는 복음으로 시작되고 복음으로 완성됩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는 말로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1:15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복음의 핵심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헬라어로 복음은 유앙겔리온입니다. 유(eu)라는 말은 ‘좋다’라는 말입니다. 앙겔리온(angelion)이라는 말은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eu)+앙겔리온(angelion)은 ‘좋은 소식’ 곧 복임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여 기독교, 특히 개신교신앙의 핵심으로 떠오르는 ‘복음’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신 사건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래 진행된 인류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구약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 백성의 집단적 불순종과 배교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의 선고를 받고 아들을 잉태하여 생명의 어머니가 되었고 급기야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칠 것이라는 원시복음을 듣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세대들은 자신 세대의 죄악을 해결해줄 ‘후손’ 기다림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패를 만회할 하나님의 아들, 인자의 도래를 학수고대한 역사입니다. 바벨론 포로살이를 끝내고 고토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간 것도 하나님의 아들의 출현과 그가 가져올 회복과 구원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전쟁하되 뱀의 머리를 치명적으로 손상시켜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이 인류에게 들려진 최초의 원시복음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위로의 아들 노아가 태어나 죄악과 폭력으로 관영된 세상이 종식될 날 것이 올 것이라는 소식이 복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위대한 복의 근원 공동체를 창조해주시겠다는 약속이 복음이었습니다. 모세시대에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구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시겠다는 약속이 복음이었습니다. 앗수르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구속과 해방이 있을 것이라고 선포하는 전령의 소식도 복음이었습니다. 이처럼 인류사나 이스라엘 역사는 멸망의 위기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개시를 알리는 복음의 영향력으로 유지되고 존속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없이 돌봄 받지 못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음은 어떤 시대에서였든 아무 공로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선포되었고 약속되었습니다. 이사야 40장, 52장, 다니엘서 2, 7장, 예레미야 31:31-34, 그리고 에스겔 36:25-26 등은 구약에서 하나님나라 복음을 선포하는 대표적인 본문들입니다. 먼저 이사야 40:1-11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백성들의 바벨론유배를 촉발시켰던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토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바벨론 유배 동안에는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진리는 흐려졌고 의심되었습니다. 대신에 바벨론 제국의 신 마르둑이 세계를 통치한다는 말이 진실인양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둑 대신에 ‘네 하나님!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통치하신다’는 칙령이 선포된 것입니다. 이 하나님 통치의 첫 증좌가 바로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사함의 복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죄악과 압제로 점철된 바벨론 감옥의 복역 때가 끝이 납니다. 우리를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어둠의 세력, 즉 죄가 해결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입니다(골 1:13-14).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기업의 땅에서 감미로운 순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동행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이 단락이 말하는 복음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호위하고 고토로 귀환하는 포로들의 앞잡이가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복음은 ① 죄사함의 복음 ② 치료와 회복의 복음 ③ 감미로운 순종의 복음 ④ 은혜롭고 자발적인 동행의 복음입니다. 죄사함, 치료와 회복, 감미로운 순종, 은혜롭고 자발적인 하나님 동행, 이런 일들이 하나님이 우리는 통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사야 52:1-12입니다. 특히 7절이 중요합니다. 7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마숴미아 샬롬 므빠세르 톱 마스미아 여슈아)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말라크 엘로하이크)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집트와 앗수르 종살이 하는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해방과 속량이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전령의 소식입니다. 복된 좋은 소식의 내용은 “네 하나님이 황폐화된 시온을 다스린다”는 소식입니다. 황폐케 된 시온을 다시금 이집트와 앗수르의 귀환포로들로 가득 채울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는 공동체로 만들어주실 약속의 선포입니다. 이 단락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로잡힌 딸 시온의 속량입니다(1-4절). 사로잡혀 간 땅에서 이방인들의 관할을 받으며 사는 시온에게 영적 각성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속량에 응답하여 시온도 깨어나 힘을 내어야 합니다. 둘째, 이방인들 가운데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성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이름 성별이 복음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5-6절). 셋째, 복음의 핵심은 황폐화된 시온 통치 재개입니다. 예루살렘과 시온에 대한 신원하심과 구속하심이 이뤄집니다. 이 시온 위로와 신원은 열방들 앞에서 펼쳐진 야웨의 팔을 통해 이뤄집니다. 복음은 열방의 목전에서 선포됩니다(7-10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복음은 부정한 이방제국을 벗어나 탈출하여야 합니다. 복음에는 분리와 탈출의 요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호위을 받으며 탈출하기 때문에 출애굽탈출처럼 황급한 탈출이 아닙니다. 늠름하고 장엄한 탈출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구약성경을 2분할 때 사용하는 말이며, 모세의 글, 예언자, 그리고 시편은 삼분할 때 쓰는 말입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100% 하나님께 순종해서 이 땅에 열어젖힐 하나님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모든 구절은 이상적인 순종, 이상화된 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의 이상화)의 온전한 순종과 그것이 이 땅에 가져올 하나님의 100% 순도의 직접통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이 선포한 모든 약속, 명령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것이 초래하는 하나님의 직접통치를 내다보며 가리키고 있습니다.

 

2. 출애굽기 19:1-6에 나타난 구원의 목적=자유, 하나님의 통치

오늘 출애굽기 19장 4절부터 6절을 자세히 보려고 합니다.

 

4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특히 4-6절이 참 중요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삼중적으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 이 세 가지 정체성에 이스라엘 백성을 묶어놓기 위하여 활동하신 언약중보자들입니다. 이 세 가지 정체성, 열국 중에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세 가지 근본전제를 갖고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질타하고 비판하고 심판의 예언을 퍼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고 열국 중에서 하나님의 특별 보호를 받는 백성이 된 것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온 세계가 하나님께 속하였지만 하나님께 특별히 속한 이스라엘 백성이 덜 거룩한 백성을 하나님께 이끌어 드리고 인도하기 위하여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는 나라입니다. “거룩한 백성”에서 “거룩”이라는 뜻 자체는 “전체로부터 구별된,” 그리고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구별된”을 의미합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말입니다. 배타적인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집중적으로 순종하여 이 세상의 나라들과는 전혀 다른 나라를 건설할 사명감을 부여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배타적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 보호도 받지만 하나님의 특별 심판도 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까운 거리에서 하나님의 직접 관할을 받고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사장 나라가 되기 위함이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해야 할 이스라엘의 과업이자 목적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거룩한 목적을 이루고자 이집트의 노예들로 전락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이집트 땅에서 끌어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목적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겁니다. 우리가 노예상태에서 해방되는 목적은, 우리가 속량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통치받기 위함입니다. 출애굽 15:17-18과 골로새서 1:13-14은 각각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 목적을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17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죄사함 곧 속량(贖良), 노예 상태로부터 몸값을 지불하고 해방시키는 것을 속량이라고 말합니다. 돈을 주어 양민(良民)의 신분을 획득케 한다는 말입니다. 노예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속량이라고 말합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 통치의 복음, 곧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 전제군주 파라오의 노예였습니다. 파라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극악무도한 고역을 통해 그들의 생명력을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자, 파라오의 노예백성으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은 뭡니까? 생명의 소진과 죽음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너무나 고달파서 하나님께 아우성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히브리노예들의 간고를 친히 목도하셨습니다.

절대 압제자 파라오의 철권통치 밑에서 쉴 새 없이 고역당하면서 주체성을 완전히 박탈당한 노예들이 소리질렀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모세를 보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1-25절을 보십시오. 히브리 노예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못살겠다고 부르짖으니까 ‘그들의 고역과 아우성이 상달한지라 이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사 권고하셨습니다.’ 3장 1절부터 하나님의 구원사는 급발진합니다. 히브리인 레위인 중에 한 사람이 장가들더니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경우에 따라 시차가 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르짖으면 그 사태를 타개할만한 하나님의 중보자, 예언자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예언자는 밑바닥 기층민중이 못살겠다고 부르짖으면 그 부르짖는 음성을 대신하여 듣고 하나님 마음으로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의 조건이 히브리 노예처럼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은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어야만 모세 같은 중보자가 나타나고 예언자가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6-12입니다. 특히 8-10절이 중요합니다.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통해 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을 역사 속에 실행시킬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모세야! 네가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이름으로 건져내라.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이 내지르 아우성을 정녕 듣고 보았다. 나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을 맺었다. 그들의 후손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그 땅을 그들에게 천불불가양의 보금자리로 하사하기로 약속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지르는 아우성은 나로 하여금 이 언약을 상기하게 했다. 나는 이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다오. 모세야! 내 대신, 내 이름으로 이제 네가 가서 네 손으로 그들을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후손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기억하사 모세를 보냅니다. ‘내가 정녕히 보고 듣고 내려가서 직접 경험해보니 그들은 이집트인의 손에서 즉각 건져내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전멸의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내가 모세 너를 보낸다.’ 이것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놀랍게도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모세라는 사람이 하나님 마음과 합하여졌을 때, 하나님의 부름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념이 모세에게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이 모세를 통해 집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어느 정도 눈을 뜬 상태에서 이런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아우성이 내게 상달했다, 그들의 고난의 극심한 지경을 나는 다 보았다. 네가 파라오의 손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끌어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임과 동시에 모세의 마음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특정 사태의 중보자적 해결자가 되려면 특정 사태에 대한 문제의식의 공유, 예비적 공감을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자체를 파악하고 공감하는 데 실패한다면 하나님나라복음의 선포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한 시대의 중심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갖추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간절함과 그 문제로 인해 고통당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동정으로 단련된 사람들에게 모세적 사명이 하달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을 통하여 파라오 체제를 세세하게 심판하십니다(7-12장).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려고 하지 않는 파라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파라오는 인격화된 죄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우리를 노예처럼 부리는 죄가 바로 우리를 그렇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11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2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13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롬 6:11-20)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24-35)

 

우리가 죄 가운데 있으면 파라오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유인이 되려고 하면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장악력을 실감하게 됩니다.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우리를 보내주지 않으려고 하는 강력한 기득권자, 우리를 옛날처럼 부려 먹기를 원하는 강력한 주인이 있습니다. 파라오, 인격화된 죄악권세입니다. 파라오는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을 묵살하고 배척하다가 열 가지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큰 재앙은 아홉 째 재앙 흑암재앙과 열 번 째 장자 전멸재앙입니다. 장자 재앙의 무슨 뜻입니까? 파라오 체제의 영구적 멸망을 의미합니다. 장자는 원래 계승자입니다. 따라서 이집트인의 장자 재앙은 이집트 사회는 계승할만한 가치가 없는 세상이라는 심판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파라오 체제, 노예제사회를 산산조각 내시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은 우리의 옛 주인을 무력화시키시고 무장해제 시킨 후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장악하는 거대한 죄와 악한 습관을 무력화 시킨 후에 우리를 끌어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강권적인 구원방법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내듯이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강권적으로 인도했습니다. 이 말은, 절대주권적인 방식으로, 우리가 충분히 동의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강권적으로 구원했다는 말입니다. 독수리 날개로 업어냈다는 비유법을 이해하기 위해 이집트-팔레스틴 지역의 독수리 생태를 알아야 합니다.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대의 독수리는 새끼 독수리에게 날개로 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 날 수 있는데도 둥지에 남아 어미 독수리가 갖다주는 먹이에 의존하는 새끼들을 다소 거친 훈련에 내몰아갑니다. 둥지를 세차게 흔들어 둥지에 남아있는 나무꼬챙이 등이 새끼독수리 몸을 아프게 찌르게 합니다. 그럴 때 새끼들은 어디론가 날아 도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 공중 높이 던졌다가, 새끼들이 땅에 떨어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시 낚아채서 공중에 집어던집니다. 이런 자유낙하 훈련을 숱하게 시켜 날게 하는 겁니다. 공중에 집어던졌다가 땅에 떨어질듯 할 때 다시 낚아채서 공중에 들어 올리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끌어내 시내산까지 데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독수리 새끼 자유낙하 훈련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을 광야를 거쳐 시내산까지 데려왔습니다. 이게 출애굽기 14-15장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스본 맞은편, 홍해 건너편에 배수진을 쳤습니다. 앞에는 죽음의 물결 홍해요 뒤에는 무섭게 추격해오는 애굽의 육백 승 철병거 부대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죽겠다고 소리질렀습니다. 그 때 모세가 백성을 안심시켰습니다. “너는 절대 안심하라. 우리 야웨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볼지어다. 잠잠히 기다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볼지어다.” 과연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마른 땅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공중에서 자유낙하 훈련 중인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내는 방식, 즉 새끼가 땅에 떨어져 죽기 직전에 다시 낚아채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수리가 새끼를 업어내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독수리 날개로 업어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방식으로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전과 위기와 문제 상황의 한복판에 집어던졌다가 자유낙하 훈련하듯이 데려왔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강권적으로 데려왔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데려왔다는 뜻입니다. 홍해 물을 가른 것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지 못했던 방식입니다.

 

3. 레위기와 민수기: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구원과 율법순종

우리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홍해 물을 통과하게 만든 사건은 신약성경 용어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세례 사건을 예표합니다. 고린도전서 10:1-2을 보십시오.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바울에게 세례받는 것이 바로 홍해를 건넌 거나 같습니다. 바울은 홍해 도강에서 이스라엘이 집단세례를 경험했다고 본 것입니다. 노예근성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강에서 빠져 죽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닷가에서 빠져 죽은 노예근성, 죄악된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났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심을 회복한 새 백성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보호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채 파라오의 채찍 아래 소멸돼 가던 그 노예는 죽고, 자유인 이스라엘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도강이 세례받은 사건으로 해석됩니다. 이것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수세사건으로 보편화시킵니다. 옛 자아가 세례를 받을 때 죽고 새로운 자아로 다시는 원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여러분, 이처럼 모든 사람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 자아의 죽음을 포함하는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되고 옛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홍해 강 속에 침잠하여 익사하여야 됩니다. 로마서 6:3-4과 갈라디아서 2:20이 바로 이 진리를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합니다.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구원경험의 본질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의 본질은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함께 장사되고 함께 죽었다가 부활해야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홍해를 건너는 도중 맛본 세례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옛 자아의 익사를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몸서리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의미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내 인생을 향한 신적 호의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례받는 사건은 매우 직관적인 경험이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홍해를 건넌 사건이 일회적이듯이 옛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함께 부활하는 것은 일회적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고 성령의 내주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 세례는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우리 하나님께서 내가 부인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보이셨다는 영접하는 것입니다. 죄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100% 순종하는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 너저분한 인생을 되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깨닫고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호의를 깨달을 때, 우리는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세례받고 광야로 들어와서야 하나님의 율법을 차근차근 순종하도록 훈육받고 연단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모세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선구원 후순종 구조입니다. 먼저, 먼저 구원받은 사람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먼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 율법을 지속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나서야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 즉 구원의 감격을 부단히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하여서는 율법의 멍에를 지고 감미로운 순종을 계속 드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세오경이 말하는 하님나라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하나님나라 복음이 바로 모세와 예언자들의 복음을 완성시키는 복음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모세와 예언자들의 강령을 지킬 능력, 즉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모세와 예언자의 강령을 완성케 하십니다.

출애굽기 19:1-6이 바로 선구원, 후순종 구조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자유민으로 만드신 후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도록 율법의 멍에를 메게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 율법을 자유케 하는 율법이라고 말했습니다(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언약의 율법이나 십계명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민이 된 구원받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지키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길은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인의 멍에인, 자유케하는 율법의 멍에를 지는 언약에 속박된 백성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속박된 것이 자유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 속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율법을 지키도록 초청받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을 보세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이 조건이 충족될 때 ‘너는 열국 중에서 내 특별 보호를 받는 백성이 될 것이며 하나님과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하나님 모르는 백성들을 하나님께 이끌어오는 제사장 백성, 선교사 백성이 될 것이며, 세상 만민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순식간에 일깨워주는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영단번에 받은 구원에 터하여, 하나님의 언약적 속박에 추동되어 부단한 율법준수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되어가야 한다는 겁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은 세상 만민을 세상 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가기 위한 영적 흡인력, 강력한 영적 자력을 발출하는 나라입니다. 제사장 백성은 자기희생적 삶을 통해, 거룩한 백성은 고도로 높은 선과 의의 삶을 통해 거룩하지 못한 만민을 하나님께로 끌어가는 천국향도 백성입니다. 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은 군사력이 아니라 강력한 영적 마그네틱 파워를 발출해 세계만민을 하나님께로 이끌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능력을 발출하는 데 있습니다. 왕같은 제사장 교우의 말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의 심장에 하나님께 돌아가고픈 소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복음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5:16입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 충만한 사람 옆에 있으면 성령의 통치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은 강력한 영적 흡인력을 발출하고 강력한 영적 자력을 발생시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데려와 화해시키는 사명자 백성입니다.

이 거룩한 백성다움, 제사장나라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한 율법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통치 안에 머물게 만들어주는 그 율법이 바로 십계명과 시행세칙입니다. “내 말과 내 언약”은 출애굽기 20-23장까지 나오는 십계명과 그 시행세칙 율법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모두 613가지입니다. 그 613 가지 계명을 압축하면 십계명이 됩니다. 십계명을 두 으뜸 계명으로 압축하면 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입니다. 이 두 가지 긍정계명을 하나로 압축하면 쉐마가 됩니다. 이스라엘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한분이시니 너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입니다. 바로 시내산 언약에 나오는 “내 말과 내 언약”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국가의 형법, 민사소송법 등 모든 실정법과 관습법들은 십계명 대강령 아래서 생겨난 법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다 십계명의 요구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인간 행동을 규제합니다. 훨씬 더 낮은 도덕적 하한선을 예상하고 만들어진 법들입니다. 십계명이 어떤 국가의 법들보다 높은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십계명을 지켜버리면 모든 국가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내적 자유에 이른 셈입니다. 국가의 법들을 초과준수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십계명을 지킨다면 우리 대한민국 형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같은 조직이 온 세상에 퍼져버리면 이 세계는 비무장시민사회, 마을공동체 단위로 나눠져 버립니다. 강력하고도 압제적인 중앙정부가 집행하는 법령에 묶인 나라가 아니라 성령충만한 주민들의 자치자율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도민중 자치자율시대가 성경이 그리는 하나님나라의 근사치적 모습입니다. 로마서 13:8-10은 이것을 가리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전폭적으로 실천하면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이런 모든 계명들을 강제로 지키도록 요구하는 억압적 국가체제가 불필요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투신하게 되는 시민적인 자율공동체가 탄생한다면 국가행정기구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런 나라가 바로 구약 예언자들과 우리 주님, 그리고 사도 바울이 생각했던 하나님나라의 근사치적 미래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고 나서 하나님께 부단히 순종하여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를 이루면 그것의 세계적 파급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죄와 허물로 죽었던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주는 제사장 공동체가 존재하면 그 주변사회가 입는 혜택은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께 가깝게 밀접하게 교제하는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삶을 사는가를 시범 보여주는 공동체, 이런 강력한 사랑자력 공동체가 탄생하면 폭압적, 파라오적 전제 군주권을 휘두르는 국가가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학습효과가 얼마나 클까요? 기독교신앙을 실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 큰 도시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작은 마을에서부터 기독교적 종말윤리와 이웃사랑 실험이 가능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19:5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세 가지 정체성 중 첫째 정체성, 하나님의 특별소속 백성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의 친정통치와 보호를 받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친정통치란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폭압적 국기기구들과 그것을 중심으로 포진한 외래적 지배자들을 몰아내는 고도의 성령추동적 자율자치공동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셔서 우리의 자유를 심화시키시고 우리가 점점 하나님의 심장에 가깝게 가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면 율법 순종은 절대로 노예살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양과 질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의 자유를 질과 양에서 심화시킬 수 있을까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4-7).

 

예수님 안에 거하는 제자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께 포박된 제자가 자유를 누립니다. 율법과 언약은 하나님의 심장에 우리의 심장을 붙들어 매주는 거룩한 포박입니다. 하나님께 속박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은 율법순종이 감미로운 경험이 되고 그 결과 우리가 받은 구원이 심화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부단히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무효화 되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구원파라는 이단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구원파는 영단번의 구원을 하나님의 자유보다 더 큰 원리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번 구원을 받으면 구원은 우리의 운명이 된다. 우리 구원은 아무도 손댈 수 없다. 우리가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라면 내가 살인을 해도 내 구원은 끝나지 않는다. 내가 살인범으로 몰릴지라도 내 구원은 끝나지 않는다.’ 구원파는 구원결정을 하나님처럼 여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결정, 예정보다 크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별자리운명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해주시기로 결정하면 하나님도 구원을 빼앗아갈 수 없다는 생각은 이단사상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보다 우리 하나님이 더 크시고 자유로우시고 의로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이론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원천봉쇄된 것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우리 구원의 감격을 앗아 갈 수 있는 숱한 유혹이 있는 광야가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만 여전히 이방인들은 광야 여정 내내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의 올무가 되고 유혹자가 됩니다.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 보세요. 가나안 땅 입구에 와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미디안 여인들과 행음하고 바알브올 제의에 빠져버리지 않습니까? 이 말은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구원을 냉각시키거나 우리 구원의 감격을 앗아가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유의 멍에를 지지 못하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이탈시키는 세력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단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는 이 조건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자마자 우리 단계에 맞는 언약의 말씀들, 계명들을 반드시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셔서 우리를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세례를 받게 하신 그분이, 그 뒤에 아무런 말씀을 안 주시면서 우리를 방치하실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4. 민수기와 신명기의 과제: 성화, 성령충만에 이르게 하는 광야훈련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홍해바다를 건너게 하신 후에 자유인의 품성을 갖추도록 긴 훈련과 연단기간을 작정해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40년의 광야여정과 같은 세상살이를 거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40년의 광야 생활은 의롭게 된 성도가 거룩한 성도로 화하는 과정에 필수적인 교육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단번의 경험입니다. 홍해를 건넌 경험은 영 단번에 일어났습니다. 내가 세례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사건은 한 번 일어났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세례받은 후, 홍해를 건넌 후 40년이라는 과도기 단계를 거친 후에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간다는 사실도 똑같이 중요한 진실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 통치를 온전히 받기 위하여 매우 긴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죄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영원히 박탈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시험에 넘어져 쓰러질 수가 있고 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광야여정의 의미입니다. 출애굽 구원은 법적 구원과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품성적 구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법적 구원이란 말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약사범 혹은 상습도박범으로 투옥되었다고 칩시다. 형기를 마치고 혹은 특별감형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풀려나면 더 이상 법적 구속에서 풀려나 법적으로는 자유를 얻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도박판이나 카지노 광고판이 빙빙 돌아가는 것을 보고 손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이제는 돈을 딸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다시 집을 담보 잡혀서 10억 빌려서 도박판으로 질주한다면 그는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품성적으로 도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도박 때문에 형을 살고 나와서 자유하게 되었지만 도박판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 마음이 막 부자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아내 몰래 집문서를 잡혀가지고 10억을 대출받아서 도박판으로 다시 달려가면 그는 품성적으로는 도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긴 광야과정은 법적으로 자유하게 된 하나님 백성이 품성적으로도 자유로운 백성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유혹을 받아도 죄악된 충동으로부터 자유하게 됨을 유지할 수 있는 훈련을 받는 과정이 40년이나 필요했습니다. 이 말은 품성적 자유인이 되는 데는 매우 긴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인생이 짧기 때문에 40년의 광야훈련 기간은 너무 깁니다. 예수 믿자마자 40년 동안 전갈이나 물리고 뱀에 물리고 지진에도 막 쓰러지는 광야생활을 문자적으로 40년을 감내하는 것은 불가능한 과업일 것입니다. 다만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교체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을 통해 옛 자아가 완전히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구원받고 나서 광야에서 품성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많은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단번에 홍해를 건넜지만 우리가 아직까지 속량받지 못한 ‘몸’을 가지고 살고, 구원받지 못한 환경 안에 살기 때문에 우리는 유혹받을 수 있고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께 징계와 책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광야에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할 정도의 엄혹한 징계와 연단, 훈육어린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것은 구원을 잃게 만드는 징계나 책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했을 때는 죄를 지으면 죄책감으로 침몰합니다. 죄를 지으면 이왕 버린 몸이니 더 타락해보자는 자포자기 심정에 빠져버립니다. 이왕 버린 몸이란 말은 죄책감의 가장 치명적인 자존심 파괴언동입니다. 이러한 자존감을 파괴하는 언동이 죄책감에 찌든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나빠지는 행동을 하게 몰아갑니다. 그러니까 죄의 경험이 가중될수록 점점 악해지고, 극한까지 죄를 짓는 실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이후에, 한 번 죄사함 받은 이후에는 죄를 짓더라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구원받은 후에도 성도들은 여전히 크고 작은 실수와 죄를 범하지만 그런 경우의 죄와 허물은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을 심어주기보다는 성화를 촉진시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짓는 죄는, ‘내가 하나님의 부단한 돌보심과 사랑의 감미로운 터치를 당하지 않으면 도저히 홀로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구나, 내가 거룩하게 성화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내가 성령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구나’라는 각성을 일으켜 성화의 필요성을 확신시켜줍니다. 이 경험이 왕왕 쓰라린 경험이고 징계를 동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구원받은 새 자아를 무너지게 하거나 파괴하는 죄책감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성도를 성화시키고 구원을 이루게 하는 후회와 근심을 자아냅니다.

 

구원을 이루게 하는 후회와 근심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책망을 받으면서 성화되는 경험입니다. 그래서 광야여정 가운데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가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홍해 도강이 끝나고 광야의 성화훈련 과정 중임을 어떻게 압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신 8장)와 먼저 간 믿음의 선진 발자취(히 11장)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의 내적 확신과 우리 가운데 맺히는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모세오경의 네 책(출애굽기-신명기)이 보여주듯이 홍해 도강이 끝난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에 죄짓고 징계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살면서도 죄와 허물을 범하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근심하시고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성령충만을 갈구하는 기도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자주 넘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를 항상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한 점을 이기게 만드는 새로운 환경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런 내밀한 성령의 보혜사사역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진 성도들에게는 감지됩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범한 죄와 허물이 성화를 촉진시킨다는 것을 또한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맺히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자녀의 품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어쩔 수 없는 죄의 관성에 의해서 죄를 짓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령은 종국에는 성화를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그리하여 죄를 점진적으로 이겨가도록 도우십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런 자기 조롱에 빠지면 안 됩니다. ‘내가 기도를 한두 번 했어? 그런데 내가 또 도박판에 갔어! 내가 팔을 잘라버려야지.’ ‘아, 정말 스타크래프트 할 때는 미친 듯이 움직이는 이 손이 문제로구나. 손을 잘라야 돼.’ 이런 경우 도끼를 사서 손을 잘라도 죄는 죽지 않습니다. 남은 손목으로 도박을 하게 됩니다. 죄와 죄책감의 악순환은 죄인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자기 조롱도 극복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죄와 혈투를 벌이는 자신에게 불신자 친구들이 우리를 조롱할 수 있습니다. ‘야, 너는 죄 짓고 또 교회 가냐? 참 네 하나님 속도 좋네. 똑같은 죄를 그렇게 고백하고 똑같은 짓을 하는 너를 받아주시다니!’ 이 조롱은 사탄의 조롱입니다. 성도들을 참소해서 성도들이 거룩해지는 것을 좌절시키려는 사탄의 참소입니다. 성도들은 자기조롱 뿐만 아니라 타자의 조롱도 이기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해야 합니다. 일곱 번 쓰러지고 여덟 번 일어나면서도 기도해야 되는 겁니다. 칠전팔기! 남들은 쉽게 조롱할지 몰라도 칠전팔기 하는 것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같은 죄를 짓고 또 같은 기도를 하는 것,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남들이 볼 때는 죄 짓고 또 기도하고 죄짓고 기도하고, 죄짓고 또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도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총이 없이는 힘듭니다. 기도하고 죄 짓고 또 기도하고 하는 것마저도 굉장히 복잡한 사유를 거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코 쉬운 게 아니지요. 하나님께 속해 보려고 발버둥 쳐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파라오의 죄성이 얼마나 뿌리 깊게 우리를 따라다니는가를 모릅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운명처럼 본성처럼 따라다니는지 모릅니다. 파라오의 채찍에 맞고도 살아내던 그 노예근성이 얼마나 견고하게 인간성의 일부가 되었는가를 처절하게 아는 사람, 하나님께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 숱한 날밤을 기도로 보내본 사람만이 죄의 힘이 얼마나 강한 가를 압니다. 로마서 7:19-23을 보세요.

 

 

그래서 구약성경은 실패한 현실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통해 언젠가 하나님의 율법을 이상적으로 순종할, 가장 완벽하게 순종해줄 사람과 그의 시대를 내다보며 말합니다. 구약성경의 모세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상적으로 순종할 때, 그 이스라엘의 이상화된 순종을 향도를 이상화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학수고대하며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의 삼중적 정체성(하나님께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을 실현시켜 줄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킬” 개인과 공동체의 출현을 대망하고 대망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구절들에서 하나님은 전부 다 이스라엘의 이상적 순종을 설정하고 말하기 때문에 결국 구약성경은 하나님 마음에 백퍼센트 순종할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면서 항상 말씀하신 셈이 됩니다. 그렇지요?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대강령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러한 말은 누군가가 하나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하여 말씀을 성취하는 자가 나온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만방을, 세계 만민을 하나님께 끌어들이는 그런 제사장 나라가 된다는 말이지요? 구약성경은 이런 조건적 성취구조를 가진 말씀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약성경이 종말에 올 이상적인 순종을 바칠, 완벽한 순종을 바친 이스라엘을 관한 예언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자신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결론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나라의 우주적 비전이나 사회변혁 비전 등 거대담론을 아무리 논해본들 우리 각각의 개인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노출되지 못하고, 성령의 사역이 왕성한 거룩한 교제권 내에 속하지 못한다면, 성령충만한 교회 안에서 성령의 바람에 흔들려보고, 제한당해보고, 고양되어 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의 지극히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위로, 돌봄, 책망, 권계, 조명과 인도, 고양과 환상고취를 맛보지 못한다면 나의 우주적이고 사회적 비전은 증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해방시키고 속량시키는 능력을 한번이라도 몸서리치게 경험한 사람들은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동아리가 엄청난 헌신을 합니다. 이것이 무섭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의 시간의 헌신, 물질의 헌신, 인생 전체를 바쳐버리는 그 급진적 투신이 한데 모여 움직이면 이 세상은 깜짝 놀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집단 순교자가 되고 거룩한 사랑의 집단 화신이 되어서 하나님 모르고 흑암의 권세에서 시달리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홍해를 가르는 역사가 도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흑암의 권세에서 주체성을 박탈당한 채 행하던 죄악된 행동을 반복하는, 자기 존엄성을 파괴하는 숱한 죄에 연루된 사람들을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십니다. 속량된 개개인의 신자들을 언약 율법을 납득하고 이해하고 율법을 지키는 순종의 기쁨을 아는 성도들의 동아리로 소속케 하십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파편화되고 노예화된 개인들을 속량하셔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시켜 주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죄악된 노예체제로 되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통치 아래 머물며 하나님을 붙좇도록 언약을 중보하고, 율법을 중개하고 가르치고, 책망하고, 위로하고, 권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언약백성은 어떤 전제군주도 마음대로 압제하지 못하게 경고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복음은 첫째 선구원 후순종의 복음입니다. 부단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성취해 가야할 부담을 안고가는 구원입니다. 구원감격은 감미로운 순종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둘째, 파편화된 개인들은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룰 과업을 부여받습니다. 셋째, 개인단위로 성령의 감화감동과 그로 인한 율법순종을 맛보지 못한다면 하나님나라 비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넷째, 모세와 예언자의 하나님나라복음은 이상적인 순종을 바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실체화되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말한 속량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이뤄졌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을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이 예고한 죄사함과 속량의 실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해방사역과 교회창조 사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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