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차: 거룩한 공회, 성도의 교통,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 미래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승천으로 이어졌다.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우편 보좌-섭정 왕, 버금왕의 자리)에 앉으시는 왕위 등극을 의미한다. 주와 그리스도에로의 영광스러운 복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온갖 굴욕을 참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음부에까지 내동댕이쳐진 비하의 경험을 거친 후 다시 하나님의 우편보좌로 복귀하신 것이다. 이것은 성육신하시기 전, 즉 십자가를 지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히 복종을 드리기 전의 지위와는 다른 지위를 의미한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역사와 개인의 삶을 심판하시는 주(主)가 되신 것이다. 구약성경(다니엘 7장 13절)과 외경 에녹서 등에는 심판의 권세를 가진 미래의 메시야를 인자(人子)라고 부른다(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부른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시고, 거기에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은 역사의 종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라고 고백한다. 미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시작되는가? “저리로서(저기로부터)”이다. 어디가 “저리로서(저기로부터)”인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이 바로 “저리로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르다,” “앉다,” “다시 오시리라”는 세 개의 연속적 동사와 그것과 연결된 약속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세 가지 동사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사역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언급되어 있다. 그는 부활 승천하셨고(유일회적 과거완료사건), 현재 보좌 우편에 앉아 주와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시고(그 다스림이 감춰져있다-성령충만한 자의 눈에만 환히 보인다!), 미래에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이 최후 심판-미래적 심판에 대한 전망은 거짓된 정치적 종교적 판단과 인간적인 심판으로 멍들고 고문당하고 박해당한 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평강으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된다.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마 26:63-68),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 나라의 일제 치하의 신사참배의 경우에서 보듯이 악마적 국가권력을 비신화화하고 상대화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였다(딤후 4:1-2).1) 한국교회사가인 박용규는 일제신사참배 강요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탱해 온 두 가지 원동력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전천년설 종말론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신사참배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교단들인 장로교 동양선교회 성결교 동아기독교선교회 등이 모두 전천년설 재림종말론을 신봉하는 교단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1935-1945년 전천년설이 이 10년간을 특징짓는 중요한 주제였다는 것이다.2)
특히 전천년설적 재림신앙은 요한계시록 20:4에 근거하고 있는 재림설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비하여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도록 노력해야 하나 재림 이전의 대배교 사건, 전쟁과 기근, 지진, 적그리스도의 출현 대환난 등이 재림의 징조로 나타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그의 왕국은 갑자기 불가항력적인 능력으로 실현될 것이며 이 때 유대인들은 회개할 것이며 매우 중요한 존재로 등장할 것이다. 천년기 왕국 동안에 악의 세력은 그리스도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말기에 가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죽었던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고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하여(고전 15:52; 살전 4:16-17) 공중으로 올라가 예수를 영접하고 내려와서 그와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주장이다.3) 한일합방 이후부터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과 전천년설 종말론에 심취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 때 묵시록 주석서들이나 예수의 재림에 관한 저서들이 다수 출간되었다.4) 이 가운데서도 1920-1930년대 한국교회의 말세의식을 심화시킨 인물은 길선주다. 그의 재림론은 전천년설주의 재림론이었으며,5) 그는 죽어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지구상에 이루어질 지상낙원 변화무궁세계 무궁안식계를 주장했다.6)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확고한 재림신앙과 천년왕국신앙으로 일제의 천황숭배사상에 맞설 수 있었다. 대부분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장로교와 관련된 전천년설주의자들이었다. 일제는 이 역사적 전천년설에 입각한 그리스도인들의 재림신앙을 가장 위험시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에 해당하는 국체변혁의 죄목에 해당하도록 조작했다.7)
장로교 전도사였던 방계성의 예심종결서와 박관준 장로가 1935년 신사참배 반대를 위해 평안남도 도청을 방문하여 일본인 학무국장과 나누었던 회담내용 가운데 신사참배 저항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예심종결서에서 일제는 방계성을 가리켜 일본제국의 국체변혁도 필연 초래할 “그리스도 독재와 지상천국 소위 천년왕국의 실현을 기망하고 이 건설에 협력할 목적 하에서 신사참배 등 반신의적 정책에 반대하여 기독선교적 교리 선명에 노력해 온 자”라고 말한다.
박관준은 일본인 학무국장과의 대화에서 “당신은 현세에 나타나 있는 지상 국가만 눈에 보이는 모양이오. 눈을 밝히 뜨고 만국 만왕을 호령하시는 하나님의 영적 왕국의 세계를 한 번 바라 보잇오.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불경하면 진노의 채찍을 면치 못하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지상 심판을 당신뿐 아니라 일본 제국도 면할 길이 없을 것이오”라고 선포했다.8)
이것은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신사참배 저항 동기가 기독교의 재림신앙과 천황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말세관이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림신앙 때문에 신사참배 저항자들은 검거되어 심한 박해를 받았는데, 성결교, 동아기독교 및 안식교는 심지어 교단이 해산되고야 말았다. 재림신앙과 관련된 말세론과 천년왕국신앙은 전쟁에 대한 심판적 시각과 기독교적 평화사상을 대변하고 있으며 당시 일제의 전쟁수행과 침략정책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암묵적 비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리스도의 왕권과 천년왕국의 지상 건설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일제의 통치, 즉 국체에 대한 암묵의 도전을 상징한 것으로 여겨진다.9)
그러나 신사참배 강요를 비롯해 황민화 정책이 심화되고 중일전쟁과 총동원체제가 진행되면서 말세적인 상황이 조성되었을 때, 기독교의 재림신앙이 타계주의적 현실도피를 조장하기보다는 현실비판적 예언자적인 기풍을 드러냈다. 따라서 일제는 기독교의 재림신앙을 철저히 억압하려고 교리를 자세히 연구했으며 종교법안에 의해 주요 교파들을 통합하면서 동시에 소종파들을 해산시켜 일체 검거했을 만큼 자신들의 정책에 어긋난 어떤 교리나 신앙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의 재림신앙은 타계주의적인 신앙이 아니라 역사변혁적이고 체제전복적인 신앙을 대표하였다. 예수 재림에 대한 신앙이 겉으로는 내세지향적인 모양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그 알짬에 있어서는 강렬한 현실변혁적 역동성을 발산했다는 것이다. 예수 재림 신앙에 대한 합리적이고 현세주의적인 비판은 초월신앙의 역사적 동력을 축소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10)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한국교회가 붙든 재림신앙은 다미선교회나 소종파가 외치는 재림신앙이 아니라 공공성과 역사성을 작렬시킨 재림신앙이었다. 재림신앙은 예수의 재림을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일제에 대한 주 예수의 심판을 요청하는 예언자적 신앙이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계 22:20)라는 외침은 기독교신앙을 박해하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신속한 심판집행을 열망하는 기도언어였다.11) 따라서 일제가 한국교회의 재림신앙을 일본 국체변혁 음모라고 보는 것은 어찌보면 정곡을 찌른 관찰이요 우려였다.
한국장로교회의 재림신앙은 김익두, 주기철, 손양원 목사 등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김익두 목사는 종말적 희망의 설교로 일제의 압박에 찌들려 허탈해진 이들에게 의기를 심어주었다. 실제로 그 자신이 ‘태양신과 싸운 이들’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예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 희망과 그리스도의 우주적 왕권 회복을 절대 신뢰하여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극복하였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종말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12)
겁내지 말고 결사문에서 서서 요단강 저 언덕을 보시라! 저기서 예수님이 생명의 면류관을 들고 기다린다... 천국은 이 육신을 벗고 불노하는 영혼이 장차 갈 나라이니, 그 나라는 영원이요 무궁이다. 오늘이야말로 참 천국이 가까웠다. 그러므로 부디 회개하라.
주기철 목사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저항하면서 신자들에게 종말적 희망으로 확실한 소망을 주었다. 부흥설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성경 구절을 많이 보여주면서 재림에 대한 확고한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했다. 특히 그는 종말에 대해 기다림과 인내의 신앙을 길러 어려운 삶에서 승리할 것을 역설하곤 하였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근본적인 삶의 목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심판에 따라서 성취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재림을 통한 종말적 희망 가운데서 그가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신사참배를 단호하게 거부한 손양원 목사의 굳은 신앙 절개도 재림주 예수 그리tm도의 왕권과 재림을 통한 종말의 영광에 대한 확고한 신앙에서 나왔다. 특히 그는 마태복음 24장의 말세의 징조에 대한 예언을 통해 재림을 소망하였다. 그의 유명한 설교인 “주의 재림과 우리의 고대”에서 재림의 임박성을 강하게 표현했는데, 손 목사는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곧 도래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손양원 목사의 경찰 심문조서에 따르면 손양원 목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천년왕국이 시작되면 “천황제인 우리 국체도 변혁을 면할 수 없는 운명에 있는 것이다....천년간 이상왕국시대가 출현하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신다...이 때 우리 일본 국체도 완전히 멸망하게 되어 통치권을 소유하는 천황 폐하도 불신자이기 때문에 그 지위를 상실당하고....”라는 증언을 한 것으로 소개된다.13)
예심종결서14) 에 나타나는 이기선 목사의 국가관은, “또 일제의 천황이라도 여호와 신께로부터 통치권을 부여 되어서 일본을 통치하도록 명령을 받고 잇는 것에 불과 하므로 신의를 전해서 이것을 빼앗을 수도 있으니 필경 일본제국의 정망도 한갓 여호와 신의 뜻대로 된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이기선, 예심종결서).15)
또 일제는 한상동을 천국왕국 실현운동의 소동을 하는 동시에 정치에 관한 불온한 언론을 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를 기소했다.16) 한상동 목사도 예수의 재림으로 일본은 멸망당할 것이며 기독교포교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국체변혁의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17)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한상동 목사는 말세가 이미 도래하여 악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현 사회는 조만간에 멸망하고 지상신국(地上神國)이 건설될 것이므로, 동지들이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다수 동지를 획득하여 목적을 달성하자고 했다(“예심종결결정문”).18)
마지막으로, 재림신앙은 성결교단을 일제가 해산시킨 이유가 될 정도로 일제에 위협적이었다.19) 1943년 12월 29일에 선포된 성결교 해산성명서는 재림신앙이 일제의 치안유지에 위해를 가했다는 자책이 담겨있다. “재림으로 그리스도가 왕권을 장악하여 온 세계를 다스린다는 사상은 국체의 본의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신관에 대해서도 성서의 해석에 기초하여 여호와 이외에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현재의 우리의 심경으로 보면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20) 이처럼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천년왕국 신봉자들이라고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21) 한국장로교회와 성도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환란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곧 재림하신다는 확신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역설적인 사실은 1920-1930년대에 부흥운동을 주도한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외에 성결교회의 이명직과 정남수, 감리교회의 김종우 유석홍 신흥식, 장로교의 김인서 등은 말세 재림을 강조하는 타계적 내세지향적 설교와 회개 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 신비주의적 설교를 한다는 이유로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는데 십년 후에 전개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는 이 재림신앙이 오히려 강력한 일제 저항의 무기요 역사적 변혁세력의 통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22) 박정신이 잘 지적한 것처럼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는 종말론적 내세주의 신학은 오히려 하나의 ‘희망의 신학’으로 기능하였다.23)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고백은 주 예수가 현재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시고 계심을 믿는 신앙고백의 논리적 귀결이자 일단의 신앙적 도약의 결과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행위가 거의 소멸된 것처럼 보이는 환난기요 시험의 시간이 지배한다. 이 때 성도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그 극한 환난을 초극해야 한다. 사도신경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를 철수시킨 종말의 시간(하나님의 임재의 썰물 시간이 끝난 직후에 오는 밀물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시간에 역사 속으로 들어오실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사 18장). 이 밀물같은 쇄도하심으로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내실 것이다. 지금 세상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자, 롬 6:10-13)와 하나님을 향하여 죽은 자(눅 15:32)가 섞여 있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마 13:24-30). 알곡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추수가 되겠으나 가라지에게는 심판의 바람이 되어 허공 중에 흩뿌려져지는 시간이 될 것이다(시 1:4-6).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은 앉아계심의 결과 최적의 시간이라고 산정되는 시간에 일어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은 무엇보다도 순교적인 신앙으로 지상의 악마적 권력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감수하며 영적 지조와 절개를 지킨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로의 시간이 될 것이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61:1-3).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종말의 시점에 다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이 역사의 중간기는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역동적 임재를 철수시킨 것처럼, 세상의 운명이 악한 자들의 손 안에 맡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역사의 중간기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무기력하고 패배당한 신인 것처럼 행동하신 후에 즉 심사숙고와 정중동의 휴지기를 보낸 후, 돌연히 마침내 종말의 시점에 당신의 역동적 현존을 역사 속에 드러내실 것이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주권적 통치행위를 썰물처럼 철수시켰을 때 이방 왕들과 이방주권자들이, 즉 이방신들이 마치 역사의 중심 무대를 활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아니 종말이 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강력한 현존을 역동적으로 드러내신다. 이처럼 다이내믹하게 역동적인 현존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일시에 모든 무신론자들과 도덕적 허무주의자들을 날려버리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철수되는 역사의 중간기인 썰물시기에는 많은 무신론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갯벌이 훤히 드러나기에 배가 떠날 수 없는 때인 것이다. 종말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은 이 썰물과 밀물의 순환을 중단시키시고 무차별적으로 당신 자신의 역동적인 심판행위를 환히 부각시킨다.
그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심판은 무엇을 위한 심판인가?: 주 고백의 완성인가? 영원한 갈라냄인가?(빌립보서 2:6-11)
1.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고 가르고 구분하는 심판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십자가에서 이미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다시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 3:16-21; 딤후 4:1-6, 7-8). 알곡과 가라지를 나눌 심판이요 양과 염소를 나눌 심판이요(마 25:31-46),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나누는 심판이다(마 7:24-27).
2.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자와 의의 면류관을 받을 자를 특별히 구별하여 상주시기 위하여 심판하신다. 공력을 검증하기 위한 심판이다(고전 3장).
3. 지상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은, 곧 어린 양의 인을 이마에 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들리움을 받아 공동 심판자가 된다(마 19:28-30; 고전 6장 1-6; 골 3:1-40; 계 14장; 참조 전도서 11-12장; 심판의 지연을 이유로 죄를 담대하게 짓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보려면 잠 8:11).
4. 심판은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정에서 필수불가결한 절차다. 따라서 인자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이 심판하실 리가 없다는 일부 서구 신학자들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고 잔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죄용서와 구원의 은총이 위대하고 찬란한 것이다.
5. 그리스도인들의 미래는 심판하실 그리스도다. 심판을 두려워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천상의 세계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순교자급 성도들이 하나님의 신원하심을, 즉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계 4-5장).
6. 우리는 최후 심판의 예비적인 경험들을 이미 생전에 경험하고 있다(죄와 죽음, 질병, 재난 등...이런 것들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판의 징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인류 일반에게 닥치는 재난과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배타적으로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비행기 추락으로 순직한 다그 함마술트 유엔사무총장, 44세에 목포 앞바다에서 한 소녀를 구하려다가 익사한 아펜젤러).
그런데 그리스도의 심판은 단지 미래 사건인가? 아니다. 미래의 사건임과 동시에 현재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통제하고 조정하고 방향짓는 현재적 사건이다. 그 의미가 이미 우리의 현재의 삶을 틀지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현재가 된 사건이다. 단지 그리스도의 심판의 확실성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다(요 3:31-36).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판의 확실성을 믿는 성도들은 지혜로운 청지기(불의한 청지기-눅 16장)처럼 거룩하고 냉정한 이해타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성도들은 최후 심판(백보좌 심판-계시록 20장)에서 자유로운가?
정상적인 성도의 경우라면 우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꿈꾸는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사유화되는 독점물이 아니고 전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 인류를 지탱할 공동의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교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는 교회의 현재를 폐기시키지 않고 갱신시키며 주변 세계를 변화시킨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발산하는 변혁에너지의 발전소가 되도록 초청받는다. 하나님 나라는 늘 성령충만(성령범람)을 통하여 지역과 당파적 교파적인 교회를 상대화하고,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 관심사항(공평과 정의)에 눈뜨게 한다. 교회가 예수님과 하나님, 그리고 성령을 독점한 것처럼 오만하게 주장하지 않고 전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다스림에 가장 진실하게 자신을 복종시키고 전 우주적인 심판을 통해 새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출발하게 한다.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여가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죄사함과 영생의 확신은 단지 주관적인 신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죄 용서 경험은 죄악의 형벌과 죄악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는 경험이다. 따라서 죄악의 권세와 형벌로부터 자유케 된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살수 있고 자신의 품성 혁신, 인격성장, 이웃사랑의 심화, 세계갱신을 위한 대의명분에 참여할 에너지를 충분하게 공급받는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의 사죄의 확신은 세례에 의하여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성만찬은 죄사함의 확신 속에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한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축제의 계약체결적인 식사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공통체험은 죄의 용서경험이다. 죄사함을 받고 난 성도에게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의 요구요, 성장을 위한 요구요, 상급을 얻도록 격려하는 요구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왜 많은 교회중심의 신자들에게는 죄사함의 확신이 결여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죄사함 선언 속에 이웃에게 지은 죄로부터의 죄용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죄의 근본과 본질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자기를 신격화시킬 정도로 자기 주장의지를 관철시키는 행위라고 본다. 자기주장 의지가 바로 죄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계약파괴가 죄의 본질이라면 이웃과의 관계 단절은 그 본질이 외형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의 극단이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죄사함이란 말은 이웃과의 관계단절로부터의 돌이킴을 포함한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매번 고백될 때마다 시민의식-정치의식(공평과 정의의식)의 성숙을 가져다준다.
마침내 성도들이 지상에서 누리는 죄사함의 확신은 영생의 확신으로 승화되고 발전된다. 기독교인의 영생은 몸의 부활을 통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성도의 미래는 몸의 부활을 통한 신령한 사회공동체 생활이다. 사도신경은 그 당시 만연하게 퍼져있던 희랍적인 영혼불멸을 배척하고 몸의 부활신앙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몸의 부활사상은 물질적 육체적 차원의 삶이 가지는 항구적 가치를 고양시키는 결정적인 지렛대가 아닌가? 육체의 부활은 기독교적인 구원에 대한 기대의 통전성을 나타난다. 성서적인 사고는 인간과 세계의 이해에 있어서 전적이고 통전적이다. 영혼과 육체, 물질과 정신을 이원론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육체의 부활이란 기독교적 희망이 전체적인 현실과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역사참여적인 에너지가 발생될 수밖에 없다. 영혼 불멸의 이념과는 달리 사도신경은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 이 관점은 사회적인 의미에서도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 바라는 영생이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의 진술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첫 진술없이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하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이 역동적인 최후 심판에서 신자는 궁극적 구원(이전 죄의 용서와 장차 아예 죄지을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되는 구원)을 약속받는다. 죄사함은 단지 영혼의 정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신령한 육체를 덧입는 몸의 부활로 절정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면 우리는 내면적 경건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를 매개하여 사는 사회적 인격적 관계 안에서도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누리는 능력을 덧입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몸의 부활을 긍정하고 강조하는 고린도전서 15:35-57과 빌립보 3:20-21은 너무나 중요한 본문이다.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창 2:7)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사 25:8)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호 13:14)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35-57)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0-21)
사도신경은 그 당시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하던 영혼 불멸 이념과는 달리 몸의 부활 희망을 인간적인 전체 현실성과 관계시킨다. 이 관점은 육체를 매개하여 이뤄지는 사회적인 삶의 총체적 갱신을 예고한다. 기독교인은 죽음의 그늘에서 살지만, 죽음을 믿지 않는다. 그는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고백에 충실하려면 물질적 육체적 생존 조건 아래서 이뤄지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착근시키려는 노력을 배가시켜야 한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을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대조시키는 것은 성서적인 사고에 전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몸을 갖고 영위하는 사회생활에서의 천국과 영생, 죄사함을 경험하여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룰 하나님 나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죄사함의 은혜는 몸을 갖고 사는 삶(사회적 인간관계적인 삶)에서 더 이상 죄악에 연루되거나 참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인간의 역사를 향해서 온다. 지상적인 삶과 영원한 삶 사이의 이 순위 질서는 성서적으로 분명하다. 영원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만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사도신경의 최후 고백은 “나는 전능하사 땅과 하늘(물질계과 육신계 공간세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첫 진술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 하나님 없는 영원한 삶을 성서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과 생명의 해체될 수 없는 이 밀접한 결속은 생명의 시초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방향과도 관계된다. 사도신경에서 고백되는 영원한 삶은 사랑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 사랑은 영원한 삶의 기초이고, 근본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미래는 종말에 오실 그리스도가 지키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론적으로 음울하고 참담해 보이는 이 역사 세계를 거룩하게 해체하시고 창조적으로 재주형하셔서 만물이 그의 다스림 아래 순복할 때까지 온 세계를 다스리실 것이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를 하나님께 갖다 바칠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되는 순간이 미래의 진면목이 될 것이다(고전 15:20-25).
1) 한국교회의 전천년설 신봉과 재림신앙 중시는 전적으로 한국선교의 첫 25년간 한국에서 선교한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2) 박용규, 『한국교회사 2. 1910-1960』(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731-733.
3) 이만열,『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 운동』(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225.
4) 이만열, 같은 책, 251-271.
5) 이만열, 같은 책, 262-263.
6) 이덕주, “영계 길선주 목사의 말세신앙,”『초기한국기독교사 연구』(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7) 이만열, 같은 책, 265-266.
8) 박영창,『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서울: 두란노, 1998), 118(정동성, 같은 글, 52에서 재인용).
9) 구라타 마시히코(藏田雅彦),『일제의 한국기독교탄압사』(서울: 기독교문사, 1991), 66.
10) 김용복, “민족사와 예수 재림신앙 - 기독교 종말론의 역사적 인식을 위한 신학적 단상,”『활천』(2004년 6월호).
11) 이광진,『요한계시록 연구』(서울: 크리스천헤럴드, 2003), 256-257.
12) 정동성, 같은 글, 56.
13) 藏田雅彦,『일제의 한국기독교탄압사』, 72-73. 손양원 목사와 일제의 심문관 사이에 오고간 박진감 넘치는 대화는 박용규, 같은 책, 725-727쪽에 소개되어 있다.
14) 예심종결 결정서의 한국어 번역문은 조수옥 증언, 와따나베 노부오 목사 기록, 김산덕 역,『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일본 통치 하에서 저항한 증언』(서울: 엘맨, 2002), 119-122쪽에 실려있다. 이 예심종결 결정서는 일제의 시각으로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기독교신앙을 비판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천황숭배를 우상시하는 이유, 천황을 단지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 필멸적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의 주장, 십게명에 근거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의 주장, 예수의 공중 재림 신앙과 말세관에 경도된 기독교인의 태도 등을 기술하고 있다. 마지막에 가면 신사참배 기독교인들의 활동 양상에 대한 전망이 나온다(121-1220: “이와 같은 독선적 성서관에 의한 말세론에 근거하여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현존 각국의 멸망과 천년 왕국의 건설의 필연성을 확신하고 이에 실현은 신의 예정이라 신의 뜻을 체득하여 예수교 충신자의 협력도 역시 예정 중에 있고 충신자들은 반드시 이에 협력할 책무를 신에게 대해 부담하고 있고 그 협력방법은 저들 신의 계명을 준수하여 참배는 물론 그 외의 반(反)신적 정책에는 극력 반대하고 앞서 말한 독선적 해석에 기초한 교리의 선명성에 따라 이에 공명하는 동지를 다수 획득하여 이에 이르고 우리 나라 개국 이래의 국가관념 및 국민감정을 요란케 하고 현존 질서의 혼란, 동요를 유발시켜 궁극에는 현질서를 붕괴하고 만세일계의 천황이 계시는 우리 일본의 국체변혁을 필연적으로 초래하여 기독 독재의 소위 천년 왕국 건설을 실현시키려고 익망하고 그 건설 협력의 목적으로 그 주의 사상의 선포에 광분하고....... .”
15) 안용준, 같은 책, 256.
16) 김양선, 같은 책, 242.
17) 박용규, 같은 책, 726-727.
18) 안용준, 같은 책, 318-319.
19) 이만열, 같은 책, 267.
20) 김승태 편역,『일제강점기 종교정책사 자료집. 기독교편, 1919-1945』(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384.
21) 조수옥 증언, 와따나베 노부오 목사 기록, 김산덕 역,『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일본 통치 하에서 저항한 증언』(서울: 엘맨, 2002), 115.
22) 이만열, 같은 책, 189;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편,『한국기독교의 역사 II』(서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1), 189-192.
23) 박정신,『근대한국과 기독교』(서울: 민영사, 1997),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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