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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2강

by 【고동엽】 2021. 11. 27.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 신학

 

I. 스탠리 하우워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미국의 실용신학에 대한 소박한 반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리려면 용기와 담대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런 청원이 만일 땅에 이뤄지게 될 때 벌어질 일이 기도자에게 엄청난 박해와 반발과 적대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성공회 예배에서는 사제가 주기도 순서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담대히,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립시다.”

스탠리 하우워스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이들, 올바른 질문하기를 배우려는 이들이 가장 먼저 배울 것은 기독교교리가 아니라 주기도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는 어떤 일련의 교리나 자발적 조직체나 바른 행동 목록 등이 아니라 어떤 백성이 걷고 있는 여정의 이름이다.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늘 어딘가를 향해 길을 가고 있었다는 사실, 어딘가로 숨 가쁘게 움직여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마을들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을 둘씩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명하시기를,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 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마가복음 6:6-8)

이 여정은 모험이다. 이는 예수와 함께 가는 길이며, 세상이 우리에게 신뢰하라고 가르쳐 준 그런 안전 수단들 (가령, 빵이나 자루나 돈)이 아니라 예수를 신뢰하며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를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은 한 백성이 되어 가며, 백성으로서 그들의 여정은, 이 세상 변혁적인, 거룩한 체제전복적 활동에 참여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제멋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고, 움직이는 한 백성으로서, 옛 길과 수단을 버리고 나온 한 백성으로서, 악의 영역에 대한 신적 공격의 일부로서 비범한 권위를 부여받은, 즉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수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서 병을 고쳐” 주는(막:613) 권위를 부여받은 한 평범한 백성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신다. 이 백성의 특징은 그들이 주기도문을 삶으로 살아낸다는 데 있다.

주기도문의 청원 여정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길은 위험한 여정이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일이 행해질 때면 마귀도 행동에 들어간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라는 임무를 맡기셨다고 말한 뒤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님 나라의 활동상은 세상 주권자들의 눈에 위험한 반체제활동처럼 포착된다. 예수의 강력한 하나님 나라 활동은 헤롯 왕의 귀에 위험한 소식으로 타전되었다(막 6:14). 헤롯이라는 한 정치인의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마가는 예수와 함께 길가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이 또한 십자가를 향해 가는 여정임을 말해준다. 통치들과 권세들(Principalities and Powers)은 일단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세상의 안전을 버리고 예수와 함께 길 떠나는 것을 좌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서의 마지막에 일치단결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에게 철회될 수 없는 적대적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항구적 적대자는 지금 이 세상의 분봉왕들, 총독들, 정사와 권세, 왕적인 존재들과 세력들이다.

 

예수는 또 하나의 뜬구름 잡는 신조들의 체계를 제시하신 철학자가 아니다. 예수는 자신이 설교하신 것을 몸소 삶으로 가르치신 스승이다.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고 뒤쫓는 것은 단순히 그분이 하신 말씀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살고, 죽고, 부활하신 방식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예루살렘을 향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서, 어떤 나라를 향해서 길 떠나게 하신다. “나를 따라오너라”(막 1:17)는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결코 들어가려 하지 않았을 그 나라를 향해서 말이다. 예수를 따라 가는 여정은 바로 주기도문을 드라마로 소화하여 삶 속에서 실연하고 실행하는 삶이다.

 

이렇게 기도하라-체제전복적으로, 현상타파적으로 살아가라.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결단의 자세로 나아가라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다 보면,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자연적 성향을 거슬러 하나님을 향해 전향하게 되고,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바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롬 8:15; 갈 4:4). 이러한 순복, 하나님을 향해 우리 삶을 이렇게 전향시키는 일은 결코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선행적인 격동으로 인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이 부르짖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기 위해 겪는 고난 중에 터뜨리는 아우성이다.

 

1장 “우리 아버지”(Our Father)

“우리”라는 말은 우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을 그저 미국적 방식(the American way)을 응원하는 치어리더나 우주의 페더럴 익스프레스(Federal Express: 미국의 거대한 항공 화물운송회사) 정도로 치부하려는 이들이 많다. “우리”라는 말은, 하나님 곧 우주를 창조하셨고 행성들을 자기 진로에 따라 움직이게 만드신 분,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위대한 하나님께서 놀랍게도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로 뜻하셨음을, 우리가 인정하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소유권을 주장하셨고, 우리 하나님이 되기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약속하셨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은, 우리가 누구라서 혹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라는 이 작은 단어에 들어 있는 의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친구와 창조주이심을 기쁘게 선포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는 이 “우리 아버지”를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인류의 연대성, 좁게는 기독교인의 범가족적 연대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우리의 친구가 단순히 현재 우리와 함께 걷고 있는 이들뿐 아니라 “성도들의 교제”(the communion of the saints)라고 불리는 모든 이들, 곧 이 신앙 길에서 우리 앞서 걸어간 이들 전체를 포함하는 거대한 공동체에게까지 확장된다고 믿는다. 교회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일 수 없다. 우리가 기도하는 매 순간, 성도들(saints)이 우리와 함께 기도한다. 천국 성벽 위에서 그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찬양에 함께 참여해 주는 것이다.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의 싸움에 그들이 응원을 보내 주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명심해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이라는 것이다(독생자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을 성부(the Father)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성자(the Son)로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삶 안의 어떤 관계를 “성부”와 “성자”로 명명하도록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용어들이 남성을 가리키는 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언제나 믿어 왔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성(gender) 개념들보다 크신 존재이기 때문이다(C. S. Lewis의 경우 아버지의 남성성을 용인한다).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름들은 하나님 자신의 삶의 일부인 그 가족적 관계를 묘사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것은 현재 우리의 가족 문화에 결정적인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다. 주기도를 드리기를 배우는 이들에게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족은 우리의 생물학적 가족이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를 기도하도록 가르쳤던 이들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아라.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 한분뿐이시다”(마 23:9). 하나님이 아버지시다. 교회가 가족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우리의 가족 너머를 보라고, 우리 자신을 세례를 통해 모든 가족, 나라, 종족, 문화들로부터 불려 나온 참 가족-즉, 교회--의 지체들로 보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적으로 보자면 우리와 전혀 친구가 될 수 없는 이들과 함께 교회로 모일 수 있는 이유, 그들을 “자매”와 “형제”로 부를 수 있는 이유다.

이처럼 삼위일체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에 본질적인 것은,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관계적인 존재이심을 분명히 가리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예수께서 우리를 그렇게 친구 삼고자 원하시는지를 이제 깨닫는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관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우정이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명명하는 것은, 온 세상은 관계 맺기 위해 창조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으로서의 하나님--는 온 세상은 우정을 향해, 관계를 향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그래서 그 어느 것도, 딱정벌레도 피리새도, 신자도 불신자도 결코 삼위일체적 하나님과 격리되어 있지 않음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준다(시편 84).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를 하나님과 관계맺도록 움직여 가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로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며, 예수는 성령으로서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를 기도하는 것은, 자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만드신(롬 8:25)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무궁무진 풍성하신 삼위일체에 의해 이끌림 받았기 때문이다.

 

 

2장 “하늘에 계신”

“여러분이 나아가서 이른 곳은 시내 산 같은 곳이 아닙니다. 곧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흑암과 침침함이 뒤덮고, 폭풍이 일고, 나팔이 울리고, 무서운 말소리가 들리는 그러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더 말씀하시지 않기를 간청하였습니다...우리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히브리서 12:18-19, 29).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늘은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가 왕노릇하는 은혜의 왕국을 의미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우리와 예수 사이의 일은 단순히 개인적인 일이 아님을 말해준다. 주기도는 우주적(cosmic)인 차원의 소통이다. 그것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온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과업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 지진과 바람과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다. 여기에 못 미치는 신은 별 볼일 없는 신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일들--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중에서도 가장 아픈 이들, 절망적인 이들 중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일들--은 단순한 사회적 활동이나 자선이나 정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현실의 문제는 우리가 도무지 손쓸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cosmic)하다. 악은 단순히 우리가 서로서로에게 행하는 그런 사소한 저급행동들이 아니다. 악은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이고, 교묘하고, 심원하고, 우주적인 무엇이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

 

만일 예수께서 그저 우리의 유익한 도덕적 본보기, 지혜로운 윤리 교사, 공감어린 친구에 지나지 않는 존재라면, 도대체 왜 우리는 기도하겠는가? 아무리 최고의 도덕적 본보기이라도, 그가 지금 덫에 빠져있는 우리에게 대체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최선의 도덕적 노력을 다 기울이고, 아무리 좋은 일을 다 행한다 한들, 여전히 고통과 아픔이 넘쳐나고, 악은 여전히 건재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행동하시는 분이냐 아니냐는 실로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기도는 전투가 아니라, 그저 자기암시, 자기치료에 불과할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어디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냐 하는 것도 실로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다. 만일 예수께서 그저 우리의 마음속에 안전히 계시는 존재라면, 만일 하나님이 그저 인간의 최선의 열망과 경험의 투사에 불과한 존재라면, 그 때는 그런 존재는 그저 무시해 버려라. 그런 시시한 신들은 우리가 가진 이 커다란 문제들을 다뤄줄 만한 상대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위한 빵, 세계 평화, 결혼관계의 회복, 암의 치유, 비와 같은 그런 엄청난 선물들을 달라고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한다. 우리가 담대히 그러한 선물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께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계시는 장소, 위치, 주소가 있다. 바로 하늘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혹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은--분이시라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로서, 실은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 분이 아니라, 특정한 장소에 계신 분이시다. 이 장소들에게는 이름이 있다--어느 별 총총한 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 이스라엘과의 언약, 모세가 받은 율법, 이스라엘이 받은 땅, 다윗 왕이 받은 소명, 예언자, 성전, 나사렛 예수, 사도들, 세례, 성만찬 등.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장소들에 계시는 분인데,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들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늘이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영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사도신경은 예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과 공유하신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여기 이 땅에서 겪는 일들 중 예수께서 이미 겪지 않으셨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져가는 어떠한 간청도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 등에서 드리신 그 기도들을 넘어서지 못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분이시기에 예수께서는,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듯이,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실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그녀가 당신께 정말로 하고 싶어 하는 말은....입니다” 혹은 “그들이 감히 간청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신을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러나 실은 지금 우리는 [참 하나님이 아닌] 어떤 신을 더듬어 찾는 것이며 그런 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고, 그런 신을 “내가 필요한 친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어떻게든 하나님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어내려 하고, 그래서 급기야 어떤 이들은 교회를 “사용자 편의 위주의(user-friendly)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카펫이 깔린 침실 같은 본당, 푹신한 의자들이 놓여 있고 부대시설로서 농구장을 갖춘--교회는 주변 문화와 너무도 흡사한 것일 수밖에 없고, 그런 교회들에서는 우리는 무언가 낯선 것, 기묘한 것과 마주칠 일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하늘은 기묘한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자기 취향에 맞게 길들이려고 하는 현대인들에 대한 경고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우리가 가진 최선의 열망들의 희미한 반영이 아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사는 분이 아니며, 우리의 성소를 집으로 삼는 분도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로부터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운운하며 그런 것--하나님과 편해지는 것--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전부인양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지 말라. 우리가 친밀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다. 나사렛 출신 그 유대인, 즉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히브리서 4:14-16)

 

성부와 성자께서 하늘과 땅에서 영원 무궁히 다스리고 계시기에, 삶은 그저 일들의 연속, 심지어 행운들의 연속도 아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하시고 행동하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이루어진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부에게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참새가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신다--마태복음 6:26.) 또 하나님에게는 열린 손이 있다. (우리가 두드리기만 하면 문은 열린다--마태복음 7:7-8.)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성자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도 성자의 계시를 통해 우리를 아신다. 하늘에 계신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계신 성자께서 우리를 위해 성부께 말씀드려 주시기 때문이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게다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대단히 잘 조망하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물들을 볼 때는 우리의 시야는 근시안적이기 쉽다. 대개 우리의 시야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다 넓은 시야를 갖고 계신다. 세상을 보실 때, 하나님의 시야는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하늘은 전체 그림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는 높은 고지를 제공해준다.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사람들을 낱낱이 살펴보신다.

계시는 그 곳에서 땅 위에 사는 사람을 지켜 보신다.

(시편 33:13-14)

 

그러나 “하늘에 계신” 분이시기에, 우리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자이시지,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옆에 서시기 위해 우리로부터 떨어지신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우리를 대하신다. 하늘에 계신 분으로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창조물들에 친밀히 관여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창조세계와 동일한 존재는 아니다.

 

3장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며”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은 어떤 개념이며, “성부, 성자,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개념에 붙인 라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인간에게 있는 최고 최선의 열망들의 총계, 혹은 도덕에 대한 원시적 사고방식, 혹은 우리가 혼자 생각에 잠길 때 갖게 되는 어떤 경험의 표출 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기도를 기도할 때,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고, 살아계시고 행동하시며, 이름을 가진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하다. 이 이름 앞에 모든 창조물--흰장수 고래(blue whale), 앵무새, 사람들--이 무릎 꿇는다(계 4-5장).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은 곧 우리의 참된 자아들과 근본적으로 갈등하며 산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름 아니라 찬양을 위해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당신이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는 평화를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창조물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찬미의 멜로디를 배워야 한다. 주기도를 배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는 법을, 하나님을 바르게 찬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이름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찬양이 우리의 정체성을 이룬다. 따라서 우리 중 누구도 그저 자기 자신이 자기 삶의 전부인 사람은 없다. 우리 중 누구도 “그저 한 남자”에 불과한 사람, “그저 한 여자”에 불과한 사람, “그저 회계원”에 불과한 사람은 없다.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징집되는 것이다. 이러한 징집은 숙명(fate)에 묶여있던 우리 삶을 하나님의 선한 뜻(destiny)에 따른 삶으로 변모시켜 준다. 우리는 보다 큰 그림 안에서 우리 자신의 중요성을 찾게 되며, 사적이고 개인적인 삶을 뛰어넘는 커다란 모험에 참여하게된 것을 기뻐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창조물들의 목소리에 우리 목소리를 보태게 된다. 그 하나님은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찬양을 즐거워해 주시며, 심지어 우리의 노래를 좋아해 주시기까지 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것을 가르쳐 주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참된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주기도를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징집되고, 성별되고, 구별되고, 서임 받고, 성화되었다. 우리는 온 세상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 모두를 향해 자신의 정당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자신의 정당한 영토를 얼마간 원수로부터 되찾으셨다는 사실 등을 분명히 나타내 보여주는, 그런 삶을 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하나님이 다시 되찾으신 그 영토란 바로 우리들을 말함이다.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우리들 말이다.

시편 전체를 한번 훑어보라. 그러면 당신은 시편이 얼마나 자주 이스라엘과 교회를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이다. 마치 찬양이 이스라엘과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 목적이라는 듯이 말이다. 찬양은 우리의 자연적 성향과 맞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찬양하라는 초대를 받고, 찬양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할렐루야.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찬양하여라.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나팔 소리를 울리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거문고와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소구치며 춤추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현금을 뜯고 피리 불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오묘한 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큰소리 나는 제금을 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숨 쉬는 사람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시편 150)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소서”는, 뒤따르는 기도인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적합한 응답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찬양은 윤리, 즉 하나님의 거룩의 빛 안에서 사는 삶과 연결되어 있다.

제2 바티칸 공의회는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신자들을 성화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는 성화된다. 일상생활 가운데 거룩해진다. 성화는 거룩해진다는 뜻의 교회 용어다.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형성되게 된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가 찬미하는 대상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는 다소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말은 헬라어 ‘텔레이오이’로서, 목표, 완성이라는 의미의 “마침”(end)이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즉, 이 완전이란 최종적 성숙이라는 의미에서의 완전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배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미할 때, 우리는 보다 거룩해진다. 주기도를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가 기도드리는 대상을 더욱 더 닮아가게 된다.

 

4장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천국과 거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는 왕국(나라) 운운하는 어떤 정치적인 이야기의 한복판에 들어서게 된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옛 영역들이 문제시되고 우리는 전혀 새로운 영역에 발 디디게 된다. 우리의 기도는 “주님, 우리 나라에 복을 주소서”라거나 “주님, 우리 가정에 복을 주소서”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께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 지점에서 주기도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를 향해 움직여간다. 앞으로 이 기도는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에서 땅에 대한 이야기로, 떡에 대한 이야기로 곧 옮아가기 때문이다. 소위 영적인 것들에 열광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기독교가 실은 대단히 물질적인 종교라는 사실은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는 온갖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로 당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당신을 공중에 붕붕 떠다니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목표는, 정치나 빵 같은 물질적 문제들을 영적인 문제로 삼는 그런 기도를 당신에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대해 어떤 사상을 갖도록, 어떤 깊은 감정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이 우리들을 제자들로 부르신 것은 우리의 소위 “영혼"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나라에 참여케 하려고 오셨다. 그분이 사람들을 치유하고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 1:14-15)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응답을, 결단을 요구한다. 이러한 응답과 결단을 일컬어 우리는 회개라 부른다. 이 나라에 우리는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참여하지 않을 것인가?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예수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어떤 관념이나 감정이 아님을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참여해야하는 구체적인 실재이며,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 새로운 실재에 발맞추러 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우리는 “회개하고 [즉, 변하고, 예전 나라들의 시민권을 버리고] 복음을 믿어야 [즉, 이 혁명에 동참해야] 한다.”

기독교는 언제나 종교와 정치를 서로 관계시킨다. 예수는, 주기도가 묘사해주듯, 대단히 “정치적인” 분이시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알아볼 줄 알았다. 그들은 그분이 큰 골칫거리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마태는, 예수께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헤롯왕이 자신의 정치적 조언자들을 소집하는 등, 당황해 했고,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당황해 했다(마 2:3)는 사실을 전해준다. 오랫동안 권좌에 있던 헤롯에게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을 금방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헤롯은, 베들레헴에 태어난 이 아기가 자신의 왕국의 토대를 뒤흔드는 위험인물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흔히 통치자들이 하는 그런 통상적인 방식으로 반응했다. 바로 폭력 말이다. 헤롯은 군대를 불렀고, 그 군인들은 유대의 모든 남자 아이들을 학살했다(마 2:13-18).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이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유대인들의 도전을 제거하기 위해 정부들이 행한 많은 끔찍한 일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우리를 권력 투쟁의 한복판으로 인도한다. 이 투쟁은 흔히 폭력적인 성격을 띠는데, 왜냐하면 세상 나라들은 한사코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지상 사역 초기부터, 심지어 자신의 첫 번째 설교를 하시기 전부터, 예수께서는 자기에게 경배만 하면 완벽한 정치적 힘--세상 모든 나라들--을 주겠다는 사단의 도전을 받으셨다(“세상 모든 나라들”이 사단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랬더니 악마는 예수를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이것은 나에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준다. 그러므로 네가 내 앞에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누가복음 4:5-8)

 

예수께서는 사단을 경배하기를 거부하셨다. 경배만 하면 완전한--세상 나라들이 정의하는--권력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세상 나라들을 지배하기보다는, 예수께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셨다.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그분이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던 나라를 말이다.

루터가 전에 말했듯이, 우리가 우리 딸을 바쳐서라도 위하려고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신이다. 무언가를 위해 자기 아이들을 죽여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녀들을 군복무시키는 일이 실은 그런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아무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이렇게 희생시키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실은 이는 경배와 기도의 문제일 수 있다.

 

예수께서 받으신 사단의 유혹 이야기가 보여주듯, 나라(kingdom)는 우리가 누구를 경배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어떤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의 다스림을 받으며, 누구의 뜻을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다. 어떤 신앙들은 신자 개개인으로 하여금 이 땅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든다. 칼과 방패, 포도주와 빵, 정치와 권력 같은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일들을 관심의 바깥으로 밀어내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당신의 전체를 원한다. 당신의 몸과 영혼 전체를 원한다. 사실, 우리는 당신의 몸이 곧 당신의 영혼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돈을 쓰는 방식, 당신의 시간을 투자하는 방식, 당신이 투표하는 방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나라에는 경계가 있다. 자기 시민인 이들과 자기 시민이 아닌 이들이 나뉜다.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기에 주기도는 포용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소서”라는 기도이기에 또한 주기도는 어떤 배타성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자신은 이 세상 나라들과 전혀 다른 어떤 곳에서 온 존재임을 분명히 하신다. 전에 C. S. 루이스가 말한 바처럼,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방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제자가 되게 만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분을 미친 사람으로 여기게끔 만들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분의 나라에는 회색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경계를 긋는 일 자체를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하나님 나라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경계들을 긋는--성(gender), 계급, 인종, 경제, 혹은 발음 악센트 등에 기초한--모든 방식들을 반대할 수 있게 해준다. 서로 경계선을 긋고 그 경계선을 지키기 위해 온갖 살인적인 방법들을 다 동원하는 현대 국가들의 행태만큼 편협한 일도 또 없다. 하나님 나라의 경계들은,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경계선들을 지워버린다. 여기 모두에게 열려진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서는 세상이 그어 놓은 모든 경계들을 허물어진다. 우리가 긋는 경계선은 세례다.

 

여러분은 모두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3:27-28)

 

실로 “당신의 나라를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기도자의 현실 속에 역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충만한 모습으로 여기에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오고 있는 중이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지만, 어렴풋하게 있는 것이지 아직 충만한 모습으로 있지 않다.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미래 지향성, ‘이미 그러나 아직’의 성격을 짚어주는 단어가 바로 종말론(“마지막 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지금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먼 과거를 발굴해 그것으로 무의미한 현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적이며, 언제나 몸을 미래를 향해 기울이고,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일으키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기대 가운데 산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최고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이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존재목적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이 그런 모습이 아니라는 것, 적어도 아직은 아니라는 것은 이 세상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를 기도하며, 바로 그런 날,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의 힘찬 찬양의 기도소리로 가득 채워질 그 날을 향해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뛰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미래의 날을 기다리며 그저 멀뚱히 하늘만 쳐다보며 서있진 않다(행 1:11). 주기도를 기도하며 우리는 이미 그 종말 때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 기도가 되었다. 주기도를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은, 세례를 통해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는 이 새로운 나라에 있음을 천명한다. 우리는 세상 나라들에 했던 충성을 그만 두고 이제 새로운 주권자에게 충성을 서약한다. 교회가 모여 함께 주기도를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어떤 가시적인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사람들을 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해서 형성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종말(the end)이다. 우리는 이 “the end"라는 말을 최소한 두 가지 방식으로 사용한다. 먼저 우리는 “the end”를 선의 끝, 이야기의 마지막 장, 종결(finis)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이 “the end"를 삶의 목적, 우리가 향해 하고 있는 목적지, 전체의 취지라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주님의 기도”를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된 목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 속으로 우리는 이미, 지금 벌써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를 고대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서 인정하게 될 날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주기도를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우리가 갈망하는 바로 그것이 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종말”--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성취하고자 애쓰는 어떤 이상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사회적 행동주의(social activism)는, 물론 큰 유익을 가져올 때도 많지만,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무신론--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일 수도 있다. 종말론적 백성이 된다는 말은 그보다는, 하나님이 지금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 하나님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통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믿고 산다는 의미다. 우리는 받은 세례를 통해 이미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게 되었기에 지금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확실한 통치에 대한 확신, 장차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희망의 백성이 된다는 말은 세상의 냉소주의로부터 구원 받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는, 이 야비하고 불의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파티를 즐길 수 있는, 예배라고 하는 파티를 즐길 수 있는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매 일요일마다 마음 놓고 경축을 행할 수 있는 은총을 받는다는 것은 위대한 신앙 행위다.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자기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사람들을 잔치에 불러오게 하였는데,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로 가서, 음식을 다 차리고,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라고 하여라.'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떠나갔다.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한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종들을 붙잡아서, 모욕하고 죽였다. 임금은 노해서, 자기 군대를 보내서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도시를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자기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 그러니 너희는 네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종들은 큰길로 나가서,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대로 다 데려왔다. 그래서 혼인 잔치 자리는 손님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마태복음 22:2-10)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 여기 있지만 또 여기 없기도 하며, 지금 현존하지만 아직 완전히 현존하지는 않는 그 나라는 잔치다. 예수 이전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과 아무 상관이 없던 아웃사이더들에게도 이 커다란 잔치가 베풀어졌다. 놀라운 신적 관대함으로, 예수께서는 우리 같은 이방인들도 초대받는 잔치를 가능하게 만드셨다. 하나님 나라는 초대 받은 모든 좋은 사람들이 오기를 거부했던 잔치며, 그래서 주인이 밖에 나가 모든 나쁜 인간들더러 오라고 초대한 잔치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지금 우리는 두 시대 사이에서 살고 있음을 아는 은총을 받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충만을 보았지만, 또한 모든 세상이 아직 하나님의 세상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한 긴장 속에 사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갖고 있는 것과 아직 약속 상태에 있는 것 사이에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역할이다. 우리는, 당신과 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를 호흡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하며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아직 충만하게 하나님 나라가 아닌 모든 모습들을 정직하게 직시할 수 있고, 더 큰 충만을 희망하며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님 나라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현 상황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은 얼마간 적의 영토를 탈환하셨고, 악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얼마간을 구해내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되찾아지고 회복된 영토가 바로 우리다.

 

 

 

II.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의 “주기도문”-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기독교는 하나님의 성육과정(하나님이 인간이 되심-예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관과 만물을 해방시키기 위해 스스로 모든 짐을 졌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 피조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모든 것 속에 성육하는 일을 추구해야 한다. 기독교는 영적 초자연적 실재들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에도 관심을 가지고 가치를 부여한다. 주기도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올바른 관계를 실천적으로 만나게 된다. 주기도의 첫 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 뒷부분은 인간의 관심과 관련되어 있다. 즉 일용할 양식, 용서, 늘 따라 다니는 유혹,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는 악 등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나라 자신의 신적 의지 등 그에게 속한 것만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일용할 양식, 용서, 유혹, 악과 같은 인간사에 대해서도 관심한다.

주기도에 담겨 있는 현실은 아름다운 정경이 아니라 처절한 투쟁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대결한다. 아버지는 가까이 계시나(그는 우리의 아버지이므로) 또한 먼 곳에(하늘에) 계시다. 이 세상 안에서 사람들은 신을 모독하는 말을 퍼붓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야 할 의무를 이 세계는 또한 우리들에게 지운다. 세계는 온갖 종류의 악이 지배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더욱 간절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가 형제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우리는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한 처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는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주기도는 모든 시대에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개인적 사회적 실존과 관련된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의 실존적 환경에는 이 세계의 역설적 상황, 하나님의 선한 피조세계가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희망을 위협하는 악마적 권세의 지배아래 있는 그 상황이 자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상황의 전복(subversion)을 뜻한다. 이 세계의 고통스런 현실 한 복판에서(무신론을 강요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1) •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의 보편성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보편적 뿌리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내면적 자리의 가장 원초적인 깊이에까지 이른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누렸던 기쁨의 독특하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아버지는 창조주로서의 역할과 최고권위자 내지 군주로서의 역할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섭고 두려운 주인이 아니라 가까이 할 수 있고 친절이 가득한 분으로서이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 한 민족으로 선택되었다.-야훼가 이집트에서 해방시켰고 가기 것으로 삼았다-는 경험 때문에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출 4:22; 참조.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구절들: 신명기 32:6; 이사야 63;16; 64:8; 말라기 1:6; 예레미야 3:1, 4, 19-20; 31:20; 호세아 11:1; 말라기 1:6; 하나님 어머니 구절: 이사야 49:15; 66;13).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이미지는 많지 않고 결정적인 호칭이 아니다. 아버지-아들 관계는 특별히 개개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민족에게 적용되어 사용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듯이 자기 자신을 자녀로 인식하는 관계를 가장 심오한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였다.

 

2) 예수 체험의 독창성-아바(Abba)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는 것은 예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아바라는 말은 어린아이와 가정의 언어이다. 그리고 성인들도 그들의 아버지나 노인들에게 존경과 친밀감을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애칭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익숙하고 평범한 표현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아바)라는 표현으로 선포했다. 복음서에 예수의 입으로 이 표현을 170여회나 말하고 있다. 아바는 예수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예수 자신의 사역의 비밀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아바라고 할 때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 복판에 계신다. 그는 자비와 친절과 온유함으로 우리 가까이 오신다”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돌봄을 확고하고 침착하게 신뢰하듯이 우리도 그의 돌보심을 신뢰한다. 우리가 이렇게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로 접근할 때 하늘나라의 문이 열린다(마 18:3). 아바라는 표현에 내포된 하나님과의 이러한 가까움과 친밀함은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과 일치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갖게 되는 확신은 이 세계의 편견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며,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한 가지 필연적인 사실, 곧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게 되는 것이다(눅 12:29-31).

3)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란?

그 분은 어떤 거룩한 장소에, 하나의 민족에게 인류의 일부 사람들에게 매이지 않는다. 모든 가족과 족속이 그에게서 나온다(엡 3:14-15). 그 분의 아들 예수는 말한다: “너희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 한 분 뿐이시다”(마 23:9). 하늘은 초월의 상징,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무한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다. 그러나 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아적 요구만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곧 우리의 욕구와 이익을 잊어버릴 것을 요구하시며, 땅위의 모든 선악을 초월하는 의미의 왕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 세계를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키는 싸움에 우리를 부르신다. 가까이 계시면서 또한 여전히 멀리 계신 하나님만이 하늘에 이르는 세상적 삶의 길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땅이 아니라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다.

4) 아버지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주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기도로 기도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많은 요소를 경험하게 된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희망과 신앙을 잃어버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기를 써도 그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그런 현실이 있다. 우리는 고작 그것에 저항하거나 아니면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삼키려는 파도에서 끌어내주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위기 속에서 용기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도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분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의 희망이 사라지거나 실존적 균형이 깨어질 대는 소멸하거나 거부당할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바로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는 반대와 박해와 저주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우리가 아버지-하나님과 이룩한 관계는 유아적이고 신경증적 의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율과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싹튼 것이다.

기독교는 그 발단에 있어서 노예들과 소외된 자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기독교는 그들을 예속과 소외상태에 방치하지 않았다. 그들을 자유케 했고 새로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 모습으로 일으켜 세웠다. 예수는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기도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신실하기를 추구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가까우면서도 먼 분이셨다. 십자가로부터의 고통에 찬 탄식은 아버지의 부재에 직면한 예수의 고통스런 체험을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또한 그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옵니다”(눅 23:36).

 

나.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사회의 부조리와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묻고 있다. 이 사회의 끔찍한 억압과 비통한 살육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은 과연 무기력하게, 우리를 도울 수 없는 박제와 같은 분으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간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시여, 마침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소서! 하나님 아버지시여, 종말론적으로 개입하셔서, 당신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것을 끝장내버리소서.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용기를 가지고, 이 세계를 변혁시키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침내 이 세계가 당신의 나라가 되게 하소서”(계 11:15).

1) “거룩하게 받들다”와 “이름”의 의미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은 거룩한 분으로, 즉 우리 세계의 일부가 아닌 전적으로 다르신 분이다.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분으로서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우상숭배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상숭배란 세계의 어떤 일부분을 하나님으로 예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과 마주하여 인간이 추할 수 있는 태도는 다만 숭배와 경외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는 멀리 있으되 윤리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분이시다. 또한 그는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들을 구출하시고, 억압받는 자들의 원수를 갚으시고, 가난한 자들과 연대를 맺고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현실과 인간의 세속적인 현실 사이에 가로놓은 심연을 몸소 건너오신다. 영원한 아들의 화육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이 민감한 사랑을 역사화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있는 이 거리를 극복하셨으며 인간들로 이 거리를 극복하기를 원하신다. 그가 거룩한 것과 같이 인간도 거룩해지기를 원하신다(눅 11:13; 20:22).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에 참여할 것을 윤리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을 것을 요청받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타자 속에서, 전적 타자 속에서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거룩한 것같이 거룩한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이다. 윤리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룩하듯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정의롭고 선하며 완전하고 순수한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거룩한 분과 관계되어 있고 그분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한에서 우리는 거룩하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성화되기를 원하신다.

이름은 한 인격을 지칭하며 그의 내적 본질을 규정한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아는 것은 바로 그를 아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아버지의 결정적인 이름이 최종적으로 계시된다(요 17:25-26). 아버지는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이름이다. 거룩하신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제약을 뚫고 하늘에 계신다. 의로운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비천함에 대한 연민을 느끼시며 자신의 장막 집을 우리 가운데 세우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순수한 마음, 정의에 대한 목마름 그리고 완전에의 지향 등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성화된다. 하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현실 속에 존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과 연대적 행동을 통하여 보다 평화롭고 보다 정의로운 인간관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하며 폭력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수단을 제거할 때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폭력이 가하질 때는 언제든지 분노하신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의 성화는 억압받는 자들과 나란히 서서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한 그들의 싸움에 가까이 참여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성취된다(이사야 5:16; 이사야 33장). 세계와 인간이 성화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분출한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 즉 교회의 원초적 임무다. 교회는 그의 임재 그의 위대함 그의 승리를 축하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적대적으로 보이는 어떠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도록, 그리고 그의 전지전능하신 해방의 능력과 눈부신 영광을 계시하시도록 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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