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호흡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탯줄이 끊깁니다. 탯줄적 연합이 끊기자마자 아이는 혼자 호흡합니다. 아이의 심장에 피가 흐르고 호흡이 시작되면 아이가 출생한 것입니다. 기도는 호흡이기 때문에 영적 출생의 여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세례를 받기 전에 수세자는 기도의 의미를 제대로 세례 받은 후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해 져야 합니다.
1. 기도란 영적 출생의 증거입니다(로마서 8:1-15, 26-29).
기도는 태어난 아이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녀됨의 증거로 아바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원을 우리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라고 하지 않고 주(主)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고전 12:4). 성령이 우리 개개인에게 임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면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신 그 예수님이 주요 그리스도임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쉼없는 성령의 증거를 경험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여기서 기도가 시작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부단하게 증거합니다(롬 8:11-16).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저주나 심판아래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냉담한 거절 속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의 확신 속에 살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이런 감미로운 증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우리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2. 기도생활은 자연적인 현상임과 동시에 우리의 매순간 결단을 통하여 순종하여야 할 과업입니다.
기도는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뤄지지만 또한 동시에 매순간 우리의 결단을 통하여 이뤄지는 결단의 산물이요 의지적인 노력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이 이뤄지는 매개물로서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좋은 뜻이 이뤄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눅 18:1-17; 살전 5:16-18; 참조 빌 2:13).
3. 지속적인 기도생활은 영적 성장과 진보의 지름길입니다.
만일 출생 후 성장과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출생 자체가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호흡이 지속되어야 하듯이 기도생활은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생활을 친히 지속하게 하십니다. 지속적인 기도생활은 응답받는 기도생활의 지름길입니다.
4.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아뢰는 일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드리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시간에 자신들의 필요를 아뢰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필요를 아뢰는 일은 기도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필요는 우리가 요청하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 알고 계시면서 당신의 때에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다만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일관성 있는 동기와 소원과 의향을 검증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오히려 우리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오시도록 동의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주님, 이제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무엇을 구하고 간구해야 할지를 친히 알려주십니다. 우선순위도 조정해 주십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눈을 감고 우리의 마음의 호숫가에 일고 있는 파문을 관찰해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주기도문의 정신을 본받아 우리의 기도지경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주기도문
주기도문은 여섯 가지의 청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세 청원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나머지 세 청원은 피조물인 인간 즉 기도하는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한 청원입니다(마 6:9-13).
(1). 부름-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가 우리 공동체 형제자매들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온 인류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인 하나님이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적인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 부름은 신뢰와 기대에 찬 부름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신뢰와 기대에 찬 부름 후 기도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 하나님 아버지는 이제 구만리장천에 계신 3인칭 하나님이 아니라 2인칭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하나님과의 감미로운 사귐이 시작됩니다. 이 전제 위에서 뒤따라 나오는 청원이 아뢰어집니다.
(2). 하나님을 위한 세 가지 청원
1)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오며(Thy Name be Hallowed)
수동태로 된 청원문입니다. 능동태의 주체는 기도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냄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성별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어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에스겔 36장 20-27에 의하면 바벨론에 유배당한 디아스포라, 즉 유배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고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어 모시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고 주장되고 믿어지는 어떤 잡신들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임을 당신의 백성들이 삶으로써 행위로써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입증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를 능동태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어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다른 하나님인지를 입증하는 한 무리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각 자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빛과 소금으로 살아감으로써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오늘도 세상 한 복판에서 우리(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어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사는 모든 교우님들에게 이 간절한 열망이 일어나기를 간구합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책임적인 신앙표현은 삶과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거룩한 삶과 행위로 열매맺는 신앙만이 참 신앙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명예(이름)를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 속에는 어떤 이기주의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뿌리 내릴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교회공동체 및 교우들 각자 자신을 돌보고 점검하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교회갱신을 위한 기도가 바로 이 첫 청원에 속합니다.
(가) 교역자들의 회개와 영적 갱신
(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영적 갱신과 세상 한 복판에서의 영적 분투를 위하여
(다) 교회/교단/교파간의 일치와 연합을 위하여, 개교회주의를 극복할 힘을 달라고
(라) 일반 기독교신자들의 윤리적 도덕적 감수성을 고양시켜 달라고
-사회에서 지탄받는 죄악들에 참여하지 말도록
2)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Thy Kingdom Come)
여기서 하나님은 또 다시 이인칭 단수로 표현됩니다. 당신의 나라는 당신의 다스림, 통치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도 수동태는 아니지만 기도하는 하나님 백성의 능동적인 순종과 복종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려면(하나님의 다스림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한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스며들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원은 기도하는 자신을 다그치는 자기요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곳곳에 저항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중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는 길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사랑하고 그 전폭적인 하나님 사랑으로 전폭적인 이웃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웃 사랑의 한계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웃 사랑의 계명이 부과됩니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듦으로써 기계적으로 이웃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에 크게 붙들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큰 공급을 받는 사람이 이웃 사랑에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한편 이웃 사랑의 의지를 불태우고 이웃 사랑을 위하여 숭고한 소원을 간직한 영혼에게 하나님의 큰 사랑의 능력이 제공됩니다.
(가)세계유일 무이한 적대적 분단국인 우리 나라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기도가 여기에 속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나)30만명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도 여기에 속합니다.
(다)장애인들을 비롯하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돌보심의 표현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라)아직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들어오지 못한 미전도 종족을 위한 해외선교도 이런 범주의 청원에 속합니다.
3)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Thy Will be Done on the Earth as it is in heavens)
시 103:19-22은 하늘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수종되는 천군천사들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집행되고 실현되는 곳이 하늘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청원은 제 2의 청원과 잇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속한 집행, 구체적인 복종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은 하나님의 명령과 다스림에 반역하고 불복하는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청원을 통하여 자신들의 복종의지를 다짐하고 벼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위한 세 청원은 기도하는 사람의 능동적인 순종과 거룩하고 바른 삶을 다짐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청원이 수동태로 표현된 것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추동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들어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명령에 순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환경, 문화, 교육, 경제활동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분투하는 것이 바로 이 청원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은 위의 세 가지 청원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이 세 가지 청원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에도 연장됩니다.
(3). 우리 자신을 위한 세 가지 청원
1) 일만 달란트 빚탕감의 요청(마 18장)-죄용서의 청원
인간생활은 공동체 생활입니다. 가정, 교회, 직장 등 모든 사회는 공동체적입니다. 즉 수많은 사람들과 뒤얽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수한 실수와 허물을 범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범한 실수와 허물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됩니다. 용서는 사회생활의 기본 조건입니다. 원만한 대인관계와 친밀한 공동체 생활을 위한 용서는 너무나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을 향하여 일만 달란트 빚진 자였음을 늘 기억하고 우리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즉 용서받은 /탕감받은 감격으로 사회생활/가정생활을 시작하자는 말입니다.
2) 일용할 양식을 요청하는 기도-탐욕적 사유재산 축적경계
이 청원은 일차적으로 종교지도자/교단/교회/수도단체 등이 사유재산을 축적해 놓고 매일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생활을 중지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직장과 생계유지를 위한 일터를 위한 기도입니다. 죠지 뮬러나 허드슨 테일러, 프랜시스 쉐퍼 등은 자신이 운영하는 고아원, 선교단체 등을 위하여 기부금을 모아놓고 재산을 증식시킬 기회들을 맞이하고도 거부하였습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의 경우를 보더라도 초기의 순수한 선교단체들이 재정비리 부동산 축적문제 등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일용할 양식의 원조는 광야의 만나였습니다. 제자공동체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도한 사유재산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2:16-21의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간을 늘려가면서 재산을 쌓아놓고 "내 영혼아 이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부자는 유통의 부자입니다. 자신에게 모아준 물질이나 재산을 하나님의 필요를 위하여 언제든지 내어드릴 수 있는 유통과 내어줌의 챔피온들이야말로 참된 부자요 하나님 나라의 부자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간구는 정당하며 늘 응답받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청원은 일용할 양식을 위한 청원을 드릴 필요도 없게 만드는 과도한 부의 축적을 경계합니다.
하나님은 직장과 일터의 안정적 유지를 위하여 기도하는 모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악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선악간에 유혹받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영적 피조물임을 드높이는 특징입니다. 자유를 가진 모든 사람은 악의 유혹 속에서 선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겸손이야말로 아침마다 우리가 되되뇌여야 할 기도제목입니다. 우리는 진토로 빚어진 질그릇입니다(시 103). 깨어지기 쉽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적 취약성을 늘 의식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 동료 교우들의 내적 연약함을 동정하고 체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위한 중보기도의 근거를 봅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는 교우들을 위한 동정심 가득찬 중보기도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기도문의 정신은 하나님의 다스림이 기도하는 우리 자신과 이 세상에서 세밀하게 확장되고 펼쳐지도록 우리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정신입니다. 이런 주기도문 정신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기복적인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 정신의 기도헌신자는 수도사요 사회개혁자요 교회갱신자요 영적 지도자입니다. 기도 많이 할 수록 이 세상은 빛과 소금으로 더욱 더 가득찰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가장 그늘진 영역까지 스며들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하고 고달픈 영혼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시다고 인정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4. 송영-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송영은 호티라는 헬라어 접속사에 의하여 시작됩니다. 호티는 "왜냐하면" 정도의 의미입니다. 이런 이상의 여섯 가지 청원의 근거를 밝히는 말입니다. 이런 여섯 가지 청원을 드리는 이유는 나라, 권세, 영광이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라, 권세,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수도단체/교회 등의 가장 큰 유혹을 다시금 경각시킵니다.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수도단체가 권세와 영광을 가로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광야에서 시험할 때 예수가 마귀 자신에게 절하면 나라, 권세,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거짓말임이 드러납니다. 나라, 권세,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임된 것입니다;. 마귀에게 절하여 나라, 권세, 영광을 얻은 마귀의 자식들, 즉 적그리스도들이 역사 속에 출현하였습니다. 스탈린, 히틀러, 모든 악마적 독재자들, 전쟁광들이 누린 나라, 권세, 영광은 마귀에게 절한 대가로 임시로 찬탈하여 누린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 그의 권세, 그의 영광을 드높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 뿌리박은 개인과 공동체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번성하여 자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주기도문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것처럼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신학이라는 맥락안에서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핵심사역은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림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선포는 단순히 사실 전단이나 기상예보 같은 막연한 예보가 아니라 결단의 요청이며 양심의 소환입니다. 가던 길을 중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이 세계의 활동 중지를 요청하는 예언이자 신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뜻, 나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먹는 문제, 관계성의 문제, 구조악과 세계 속에서 시험받는 연약한 인간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이름, 뜻을 위한 대의명분에 투신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예를 드높이고, 하나님의 의지, 통치를 삶의 모든 영역에 구체화하는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지 입술이나 입이나 말의 소관이 아니라 경제적인 행동, 정치적 선택, 이웃과의 인간관계의 올바른 정향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 묵상-기도를 조롱하는 세상에서 내던져진 그리스도인의 질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것일까? 과연 세계는 이성적이고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자애로운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대로 운영되고 있는가? 이런 질문이 만일 기도와 동떨어져서 제기된다면 그것은 푸념이나 넋두리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질문들이 기도 가운데 제기된 질문들이라면 분명히 응답받을 수 있는 가치있는 질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하나님의 결재를 요청하며 상달되는 인간적인 청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소유지향적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아가려는 존재지향적인 대화입니다. 인간의 기도는 자연질서 안에 내재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피조물에 부과되고 기대된 신성한 노동이면서 동시에 피조물적인 제한 속에 갇혀 살다가 누적된 피로를 벗어버리는 안식인 것입니다. 안식없는 노동이 비인간화를 가져오듯이 기도없이 계속되는 일상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피폐하게 합니다.
따라서 기도는 일정이 바쁘다고 생략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라 존재하는 순간 그칠 수 없는 호흡입니다. 기도는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엄숙한 복종행위임과 동시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심층적으로 맛보는 감미로운 사귐입니다. 기도시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지만 또한 동시에 기도시간은 우리의 속생각을 두려움없이 아뢰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영혼 속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의 정체를 해부하는 시간이며 우리를 에워싼 영적 흑암세력을 빛으로 제압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메마르고 황폐한 사막 같은 가슴을 적시는 눈물의 시간입니다. 기도는 그동안 오해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벗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 위에 뒤덮고 있는 녹을 씻어내는 행위입니다. 기도는 무감각해져버린 우리의 동정심과 관찰력을 복구시킵니다. 일에 밀려 흐려졌던 가족의 얼굴, 친구의 얼굴이 기도시간에 줌업(zoom-up)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도 감격을 잃고 한 마디 사랑의 언어를 고백하지 못한 삶을 뉘우치게 됩니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대지의 기운과 하나가 되며 땅과 물과 그리고 수없이 스쳐지나간 무표정한 이웃들과 하나로 연결됩니다. 이처럼 기도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행위이며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경험입니다.
또한 기도는 군중적인 소란스러움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깊은 고독과 적막 속으로 잦아지는 자기은닉 행위입니다. 이 적막한 자기은닉 속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고 하나님 아버지께 초점잡힌 간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미친듯이 돌아가는 분주한 일정을 십자가에 못박고 가장 바쁜 일마저도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고 숨고르기를 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영적 단전호흡입니다. 기도할수록 우리 존재의 질량축소, 부피축소를 경험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무한대로 커져 보이고 자신은 우주의 한 작은 점으로 축소되는 사건입니다. 기도시간은 우리 자신이 우주의 한 작은 미물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우주를 가득 채우는 거대한 의미임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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