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2장 22-38절은 다섯 가지 사건을 시간순서에 따라 배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목격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적과 표적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이것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예루살렘 너희 가운데 일어난 일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예수가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낸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질투하면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는 것은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마저도 다 인정하는 바입니다. 예수의 생애를 거의 다 날조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들마저도 예수가 큰 권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왜? 예수가 큰 권능을 갖지 않았다면 갈릴리에서 그렇게 많은 추종자가 그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표적과 권능과 기사는 만민이 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은 사건도 로마제국의 재판사건이기 때문에 로마제국이 존재했다면 예수의 죽음도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까지는 모든 만민이 인정하는 역사적 실재성이 있는 사건이지만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 주장은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이 사건을 왜 믿기 힘드냐?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증인이 아닙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빌라도의 법정에 나타나거나 안나스와 가야바의 법정에 나타나서 예수님이 유유히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에게만 목격된 사건입니다.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졌기 때문에 유령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우리나라에도 유령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건이 굉장히 많았고, 동양에서는 유령사건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또 심지어 외국에도 유령이 나타났다 사라진 사건이 많습니다. 유령은 입증하기 힘들지만 사람들에게 계속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사건을 불러일으킵니다. 제가 몇 달 전에 말했죠? 칼 하임이라고 하는 너무나 중요한 물리신학자에게 이사도라 던컨 유령이 나타난 이야기, 성경의 세계상이라는 책에 보면 이사도라 던컨이 유령의 상태로 나타나서 한 이야기를 이 유명한 물리 신학자가 자기 책에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령일 수 있는 거죠.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문을 노크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은 유령이죠. 보통 유령이 아닌 사람들은 노크를 하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방에 와서 머리를 푸시고 하면 너무나 놀랍니다. 그다음 새벽에 바다 위를 걸으시는 것도 유령적인 모습이죠. 정상적인 사람은 바다 위를 걷지 않죠. 헤엄을 치거나 배를 타거나 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소리쳤던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힘들었던 충격을 고스란히 기록함으로써 성경은 거짓말 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자꾸 유령이라고 하니까 답답해서 생선을 막 드시면서 유령은 살과 뼈가 없으되 나는 먹는다, 하시면서 자기와 유령의 차이를 칼슘성분의 섭취 여부에 달렸다고 하면서 생선을 드십니다. 이 장면이 굉장히 민망한 장면입니다. 원래 드실 마음이 없다가 자기를 자꾸 유령이라고 하니까 드신 거거든요. 굉장히 우발적 사건이에요.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려고 감람산에서 그 순간까지 믿지 못한 자가 있었다고 했거든요. 이 말은 지금과 옛날이 똑같이 믿기 힘들다는 겁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기 힘든 것은 초창기 제자도 힘들었지만 우리는 더 믿기 힘듭니다. 예수의 부활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려면 육하원칙에 따라 연속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에게 중립적 관찰 작용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 과학적 사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나타났고 그것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했기 때문에 굉장히 힘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영구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미제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도 매우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예수님이 중력의 법칙, <그래비티>의 법칙을 초월하여 600KM 이상 미로 우주정거장 쪽으로 올라갔다는 것도 굉장히 믿기 힘듭니다. 어쨌든 제자들이 볼 때 승천인데 이게 로켓처럼 어쩌든지 하늘로 올라갔거든요. 올라가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 올 때도 이렇게 온다, 잘 봐라, 하면서 올라가셨기 때문에 이것도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굉장히 믿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시면서 내가 하나님 우편 보좌에 가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자마자 통치를 시작할 텐데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이 내 통치행위의 첫 사건이다, 성령을 너희들이 받는 순간 내가 하나님 우편보좌, 성운층으로 올라가서 구름이나 대기권 어딘가를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보좌로 올라가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면서 요한복음 14장 26절 15장 26절 16장 7절 세 군데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보내줄 텐데 성령이 임하면 너희는 믿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정상적으로 착석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도킹 상태에 성공했고 바로 통치를 시작했음을, 주와 그리스도가 됐음을 믿어야 한다, 그런데 부활과 승천은 미궁에 빠진 난제이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은 33절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또다시 너희입니다. 공생애를 본 사람은 오순절 성령 사건도 보았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은 질풍노도와 같은 바람이 임한 사건이었고 방언이 터져서 술주정뱅이 같은 사람, 오전 9시에 120명이 방언을 하고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적대자들 까지도 다 그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공생애사건 십자가 죽음사건 부활사건 승천사건 오순절 성령 받은 사건, 이 다섯 가지는 A B D, 십자가 못 박혀 돌아가신 사건과 공생애 사건 오순절 성령이 임한 사건은 다 만민이 본 사건, 이건 다 그 당시 예루살렘 타임즈에 나오는 기사입니다. 그런데 부활했다는 말과 승천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고 추측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증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예수가 가자마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는 약속을 지킨 것을 볼 때 추론해봅니다. 아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구나, 왜냐하면 성령을 받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기 시작하니까 예수는 성령을 보내어 우리 마음을 감화감동시켜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주와 그리스도가 된 겁니다. 예수님은 오순절 성령을 보내심으로 부활하셨을 때는 부활하는 몸을 보여줬을 때는 믿지 않던 제자들에게 완전히 100% 확신시켰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식사를 했을 때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자마자 부활을 100% 확신했으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만지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성령이 임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가 부활했음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제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옆에서 생선 드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책에 있는 것만 보았지, 그리고 예수님이 머리 풀고 다닌 것 못 보았고 문 노크하지 않은 사건도 제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성령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어 나를 통치하면서 세계를 통치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앞의 두 가지, 부활과 승천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부활과 오순절 성령 사건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이건 다음 주에 하기로 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한 것은 다음 주에 하는 겁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신 사건과 부활 사건이 왜 인류에게 구원사건이 되는가를 설명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쓴 <하나님의 도성> 19권 23장에 보면 AD3세기에 신플라톤 철학자 중 포피린이라고도 알려지고 프로피리우스라고 알려져 있는데, 포피린 치면 기독교 적대자라고 나옵니다. 위키피디아에 치면, 포피린이 쓴 <신탁의 철학>에 보면 자기 아내가 기독교 신앙에 목을 매고 맹렬하게 믿자 한 남자가 아폴론 신전에 와서, 어떻게 하면 내 아내가 기독교 신앙에서 헤어나올 수 있을까요? 이렇게 물으니까 아폴론 신이 대답합니다. 그 여자는 제멋대로 미련한 거짓말을 믿고 죽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며 헛되이 슬퍼하게 내버려두라, 그의 하나님은 정신이 똑바른 재판관들의 유죄선고를 받고 부끄러운 죽음을 죽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공정한 로마의 법 집행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400년대보다 100년 전에 로마의 지성인들에게 퍼져 있던 생각입니다. 로마의 지성인들은 예수가 곧 로마법에 의해서 집행돼 죽었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았습니다. 죽은 그 사형수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따라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조롱한 겁니다. 이 조롱의 앞잡이였던 사람이 포피린 세레투스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당시에 약 AD 25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교부였던 오리겐은 그의 책에서 지금 기독교가 여자 노예 무식쟁이 비렁뱅이 등등의 동아리에 구성되었다고 조롱하는 자들이여, 100년이 못 되어 로마의 귀족 왕들 모두 이 부끄러운 죽음을 죽은 예수 앞에 무릎 꿇는 날이 온다,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약 80년 만에 예언이 성취됐죠. 이 세계의 종교사 첫 출발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신의 아들이라고 추종한 경우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이건 해명해야 할 신비고, 이성은 수긍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걸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이성은 이걸 수긍하지 못하게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께서 여러분이 추종하는 사람이 이렇게 경력도 나쁘고 도덕적 혐의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소개하고 싶겠어요? 너희 교회 담임목사 이상하다면서, 이상한 병에 걸려 있고 온갖 설교할 때 발작도 한다면서 정말이야? 아니면 사생아라면서, 이런 등등의 소문이 퍼져 있는 그 사람을 추종할 때 여러분 자신도 존재감이 축소되는 거거든요. 이 세계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은 정신이 명료한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정신 나갔을 때만 믿을 수 있는 게 기독교 신앙이거든요. 여러분이 그래서 이 예수님이 제대로만 알려지면 중랑구 금천구에서 더 기독교인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가 잘못 알려지면 강남구가 더 유리합니다. 그래서 강남구 30% 넘는 사람이 기독교 다니면 중랑구 금천구나 노동계층이 많은 곳에서는 예수를 믿기 힘듭니다. 원래 오리지널 예수의 초상화가 너무나 흐려져 있습니다. AD 118년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저스틴이라는 사람이 트라이누스 황제에게 심문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트라이누스 황제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저스틴이라는 사람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어디 사는가? 로마 공중목욕탕 찜질방 2층에서 삽니다. 뭐하는가? 제게 오는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칩니다, 주로 누가 오는가? 회당노예가 옵니다, 퇴역군인이 옵니다, 집 없는 사람이 옵니다, 주로 몇 명 모이는가? 5-10명씩 모입니다, 재미있는가? 재미는 말하지 마십시오, 너무 재미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수사 과정이 진행됩니다. 초창기에 교회를 다녔던 사람은 퇴역군인 회당노예 채무자로 고국을 떠난 망명자들, 어린 아이, 여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훨씬 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십자가라는 그 뜻을 역사적으로 조사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를 압니다.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가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의 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우리가 하나님 아들로 믿은 겁니다. 죽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포피린이 말하죠. 그것은 남들이 볼 때 너무 이상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 경력자체가 화려하지 않는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이성과 양심에 거슬리는가를 알아야 해요.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으면 예수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척도 하면 안 됩니다. 믿어지지 않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지 말고 성령이 임하도록, 내가 헷가닥 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는 저주 받은 자이거나 하나님 아들이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습니다 하는 것은 그냥 죽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수치스러운 사형수, 가장 약하여 죽은 예수, 그 연약한 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음을 믿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살았음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여 가장 약한 자가 세상을 구원함을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믿습니다, 일반원리로 말하면 다른 사람의 죄를 뒤집어 쓴 그 자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부활의 화신이 될 것을 믿습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로마제국이 아니라 로마제국 황제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식민지 유대 백성 가장 천한 목수, 그 당시 로마황제는 티베리우스 황제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근대5종 철인경기의 금메달리스트입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땄습니다. 황제인데 금메달을 딴 사람이 티베리우스 황제입니다. 육체가 아주 강인하고 굉장히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로마황제가 첨탑에 있을 때 그런 로마 황제의 가장 대척점에 나사렛 예수가 있습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은 권력정치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정치를 포기하고 힘을 포기하고 가장 약한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 이런 일반 원리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믿음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몰라요. 삼성반도체가 세상을 구원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 포항제철이 우리를 구원한다, 이렇게 엄청난 중화학공업이 우리나라를 구원한다?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 때문에 달러를 많이 벌어들였습니다. 대신 국토가 다 망가졌습니다. 우리나라가 만일 자동차공업과 철강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정말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일 겁니다. 자동차가 너무 많습니다. 포항제철과 자동차공업 조선은 다 쇳물을 끓여 만든 거거든요. 우리나라 번영은 다 죽음으로 몰아넣는 번영이거든요.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번영을 이렇게 사랑하는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정신적 토양위에 살고 있어요. 대한민국은 정통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가치관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대한민국적 가치관에 Yes, 아멘이라고 소리칠 수 없는 사람만 예수를 믿는 정신적 게토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만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입에 어떻게 남용되고 오염되든지 상관없이 우리 삶 전체가 기독교 십자가 원리를 배척하면 우리와 함께 거하질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기도하고 우리와 함께 있어달라고 임마누엘 요청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현존을 철수하고 당신의 임재를 거두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은 나는 가장 약한 자가 평화의 왕임을 믿습니다, 힘을 포기한 자, 권력을 포기한 자가 세상의 왕임을 믿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죽어 힘없이 축 늘어진 그 자가 하나님께 되살림 받아서 하나님 우편보좌에 있는 그 자는 가장 약한 자였던 그 자, 일찍 죽임을 당한 그 어린 양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있는 주와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이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우리 죄를 즉각 응징하는 전능자의 표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우리 죄를 즉각 금지시키거나 원수의 손을 꺾어 부서뜨리기를 바랍니다. 그건 하나님의 성품과 너무 다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너무 사랑이 많기 때문에 전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은닉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말도 믿어야 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씨가 엄청 좋은, 사랑이 너무 많은 분이기 때문에 사랑이 너무 많은 분은 전능을 쓰지 못하여 무능한 자처럼 보이는 것이 진짜 참사랑의 원리거든요. 전능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는 서로 배척하고 대응하고 있습니다. 전능이 많은 부모님은 매를 가지고 애를 때리지만 사랑이 많은 부모님은 매를 가지고 때리지 않고 감화를 시킵니다. 전능한 교장 선생님들은 평교사들을 점수를 가지고 들볶아서 사람을 죽이지만 사랑이 많은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감화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능력숭배 사상, 힘숭배 사상은 로마제국 숭배적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는 힘과 능력과 돈의 힘을 숭배하지 않고 진리가 갖는 힘, 사랑이 갖는 힘만 믿으면 돼요. 사랑을 믿는 사람이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일반적으로 원리를 말하면 그래요. 가장 쉽게 말하면 전능하지만 사랑 때문에 능력을 쓰지 못한 채 무능한 자처럼 그 엄청난 상상력과 여유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전능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위하여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가 되었고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는 분이에요. 십자가는 원래 능력이 있는 분의 자발적 낮춤입니다. 능력이 없는 자가 낮추는 것 아닙니다. 게을러서 공부를 못하고 가난케 된 사람은 십자가를 지는 게 아닙니다. 율법의 의에 의해서 온전케 되고 흠 없는 어린 양만이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개차반으로 산 사람들은 십자가를 질 수가 없어요. 이미 삶 자체가 자기 인생을 로마제국의 황제처럼 낭패하게 자기를 유린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그 자체가 로마제국이에요. 자기 인생을 낭비하고 탕진한 사람, 로마제국적인 자아를 가진 자에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한 번밖에 없는 자기 인생을 고혈로 바쳐서 그 순결을 축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뜻에 자기를 바치기 위하여 순결하게 자기를 낮춘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누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있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진술로 들리지 않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아 있어야 하거든요.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는 대리 통치 그룹이 땅에 필요해요. 그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거든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가 말한 것처럼 인간욕망의 투사물로써 신을 섬기지 않고,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을 섬기면 칼 마르크스와 루드비히 포이에르 바하가 기독교를 조롱할 수 없는 거예요. 기독교는 인간의 일차원적 욕망, 권력욕, 쾌락욕, 이런 모든 악한 욕망을 초월한 사람들이야, 그들은 공중에 떠 있어, 그들은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야, 이런 평가를 받는 것이 하나님 우편보좌에 있다고 말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이 땅에 그리스도의 우편보좌 통치를 대리할 만한, 자기 욕망을 초월함으로 로마제국 가치를 초월하는 순결한 공동체, 자애로운 공동체, 사랑이 많은 공동체, 능력 많지만 스스로 가난케 하여 자기를 헐벗고 굶주린 자와 동일시한 교회가 없단 말이에요. 교회는 모든 헌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다 줘야 합니다. 남는 모든 것을 다 줘야만 가난케 됩니다. 매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래야 가난케 된 그 교회,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한 그 교회가 반전을 경험하는 거거든요. 우리는 그래서 우리 개인단위도 그렇지만 우리 공동체도 극단적인 실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관여해줄 만큼 극단적 실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금을 하면, 건축헌금은 어떻게 할 거야? 그렇게 계산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만, 만일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교회 쇄도해서 김회권 목사님, 강보선 형제님, 운영위원장님 이 교회 은행잔고가 3천만 원 남았다는데요, 수술비 좀 주십시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줘야지, 아버지 교회 건물을 구하는데 1년만 참아주십시오, 아프더라도 수술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안 되죠. 나타나면 다 드려야 합니다. 누가 내 재산, 모든 것을 달라면 우발적인 순간에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 우발적 결단은 평소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재미난 겁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안 하면 신적우발성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 계획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없는 사람들은 돈도 자기 마음대로 써도 아무런 자기 마음의 거리낌이 없어요.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 속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 돈도 자기 마음대로 못 씁니다. 쓰려고 하면 갑자기 더 급한 곳이 나타납니다. 순식간에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 지금 한 3천만 원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누군가 나타나지 않으면 교회 임대료에 보태려고 하죠. 누가 알고 오든 모르고 오든, 장로님 미안합니다, 그러면 즉각 승낙해야 합니다. 아이고 이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런 게 나타나지 않는 게 슬픈 겁니다. 도와달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교회는 슬픈 교회입니다. 교회인데 아무도 도와달라고 SOS를 치지 않으면 그건 성령의 능력 안에 없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진짜 불쌍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나에게 도와달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톨스토이로 말하면 신의 친척에서 끊어진 자입니다. 톨스토이 민담신학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거지가 와서 문을 두드리게 돼 있습니다. 내 대문에 와서 두드리는 거지가 한 명도 없다면 내가 하나님 친척이 아니고 가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건 우발적인 것이고 순식간에 결단으로 응답해야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우발적이고 긴급한 현기증이 날만큼 순식간에 결단해야 할 순간이 나타난다는 말이에요. 교회단위도 나타나고 개인단위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고결하고 순결한 삶을 산 사람이 순식간에 자기 삶을 하나님에 바치는 죽었다고 느끼는 극 정점에서 대 반전이 일어나고 엄청난 고양이 일어나고 하나님 우편보좌에 앉혀지는 사태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극단적인 가난 낮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철두철미하게 아무 것도 못하는 사형수가 됐습니다. 이건 엄청난 변신과 변신을 거듭하신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열두 영이 넘는 하늘 천군천사 사단을 부릴 수 있는 그 분이 일체 아무 것도 못하는 사형수가 돼서 대부분 아무 것도 못하는 사형수 같은 인류의 운명을 100% 동일시하셔서 못 박혀졌습니다. 예수님이 힘을 한 번 주면 원래 못이 튕겨나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야 하면 로마의 군병의 창이 쨍그랑 하면서 휘어지고 창도 쓸 데 없었다, 예수님의 식스팩이 나오고, 그런 정도의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찔려 주셨고 피 흘려 주셨고 죽어 주셨고 매장당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생매장 당했다는 말을 쓰죠? 너 나 생매장 하려고 그래? 자기 명성이 생매장 당한다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의로운 사람들은 명성이 생매장 당하면 뒤에 엄청 더 좋아집니다. 여러분께서 여러분을 매몰시키려고 험한 말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자리에서 창검을 식스팩으로 막아내지 마시고 일단 창검에 찔려주시고 피 흘려주시고 죽어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시는 게 낫습니다. 그래야 완전히 평화가 옵니다. 십자가의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순결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너무나 무기력하게 심판의 잔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완벽한 하나됨은 왜 부활로 응답 받았습니까?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던 죄인들의 운명을 부활로 되살려 주실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우리 부활의 확신을 도와주기 위하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십자가가 가져간 내 죄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영생의 확신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는 증언은 구체적으로 내용이 세 가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내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로마서 6장 3-4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를 믿는 겁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졌다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것이고 내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믿는 것이고 내가 주님과 함께 부활했음을 믿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겁니다. 김회권은 죄 사함 받아 어떻게 됐습니까? 옛날에 속하던 그 동아리와 달리 주님의 우주적인 몸인 교회에 접합됐습니다. 제가 부활한 겁니다. 주님의 우주적인 몸인 교회에 접합됨으로 저는 부활했습니다. 제가 옛날에 살던 동아리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라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이 지배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소속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흑암의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에 살다가 저는 십자가에서 제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자마자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영광스러운 몸에 접붙임 되어 성령의 종횡무진의 역사가 있는 몸 된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게 부활입니다. 제가 부활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인 교회에 와 있다는 뜻이고 성령의 역사가 현저하게 자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동아리의 일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의 일원이 된 것 자체가 부활의 가장 임시적 현재적인 향유입니다. 뭡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진리를 이 세상에 실천하다가 우주적 고독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내가 우주적인 공교회인 교회와 딱 접할 때 다시 내 영혼이 고양되고 그리스도의 우편보좌에 앉은 통치를 의심할 수 없게 확신하게 되는 것, 이게 바로 내가 부활하는 겁니다. 이걸 반복하는 것은 내 육신이 죽어 쓰러지고 썩어 없어지더라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살 것을 믿는 개인적인 부활확신까지 고린도전서 15장 43절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그 부활, 개인적인 그 부활이 어떻게 믿어져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성령의 역사를 많이 경험하면 할수록 내 육신이 썩어 부활할 것을 믿게 된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너무 엄청납니다. 너무 엄청나서 하늘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 신앙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이 세상을 우리는 이미 정복한 겁니다. 이긴 겁니다. 그런데 바른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알려주는 학교가 없고 처소가 많지 않습니다. 이번 종교개혁 기념일에 신약성경을 1독하십시오. 만일 시간이 없다면 마가복음 8-16장까지만 읽으시고, 더 시간이 없다면 로마서 1-16장, 더 시간이 없다면 로마서 8장만 암송해주십시오. 만일 종교개혁기념주일에 내가 우주적 고독감은 쓰라리지만 내 영혼을 붙들고 내 삶을 견인해가고 내 삶을 향도해가면 내 삶의 종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확신시키는 성령의 견인의 역사 이끄는 역사 접목의 역사, 우주적인 몸에 붙어 있다는 확신을 주는 강력한 결속감을 느낄 수 없다면 설악산 단풍을 아무리 구경해도 하나님께 감사가 안 나옵니다. 내장산 가도 안 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내일부터 하는 종교개혁 기념강좌는 강력한 두 시간짜리 강좌입니다. 오늘은 45-50분밖에 설교 못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두 시간 연속으로 강의합니다. 실명제로 등록하니까 반드시 예복 없이는 오면 안 됩니다. 이름을 미리 등록하고 명찰을 미리 받아야만 입장 가능합니다. 김회권 압니다, 입장 No, 빨리 등록해야 하고 돈은 안 내도 됩니다. 막판에 몸만 오면 바로 연결됩니다. 몸만 오면 안 되고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고 돌아가야 합니다. 이 가을에 많은 젊은이들은 남친을 통한 구원 또한 여친을 통한 구원을 기대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가정을 통해 결혼하면 구원 받을 것을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주적 고독감을 쓰라리게 만들고 예수님만이 참 우주적 구원임을 확신시켜 줍니다. 취업도 아닙니다. 취업 해봤자 노예살이의 시작입니다. 취업 안 한다고 구원 받은 게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경험들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영적 견인의 힘을 경험할 때까지는 우리는 정말 우주적 고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 번 이 가을에 여러분의 죄가 주님과 더불어 청산되었다면 여러분 죄가 주님과 함께 죄사함 받았다면 성령의 감화감동을 부단히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하고, 성령의 부단한 감화감동이 여러분을 목적지향적으로 천상의 순례길로 끌어간다는 확신이 없다면 여러분은 이탈된 것이고 궤도가 틀린 겁니다. 여러분 돌아와야 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어디서부터 길이 끊어졌는가 다시 회개해야 합니다. 이 가을에 우리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영적인 감수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일대 일로 역사하는 영적 견인의 힘, 성령의 감화감동의 힘, 이걸 느껴야 종교개혁을 한 겁니다. 종교개혁은 개인의 양심을 지배하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야만 성령 안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이 종교개혁의 위대함입니다. 종교개혁은 일곱 가지 성사가 쓸 데 없습니다, 특히 고해성사마저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루터가 일으킨 겁니다. 고해성사는 신부님께 죄를 지은 걸 다 토해내는 겁니다. 옛날에는 고해성사하면 죄사함의 확신이 왔는데 마틴 루터는 아무리 훌륭한 신부님께 죄를 고해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을 감화감동시키기 까지는, 우리를 우주적 공교회로 붙들어 매어 줄 때까지는 죄사함의 확신은 없는 겁니다. 이 가을에 여러분이 부활했다면 우주적 공교회의 여러분을 영적으로 분양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몰아가고 십자가의 도를 격려하는 신령한 동아리가 옆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동아리에 소속감을 느끼는 곳이 전혀 없습니까? 우주적 무소속감이 여러분의 소속감입니까? 그럼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했고 세상에서도 구원받지 못한 겁니다. 차라리 세상에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다가 막판에 반전을 일으키는 게 낫습니다. 제일 불쌍한 것은 성령의 견인도 받지 못하고 세속적인 삶도 살아보지 못하고 난봉도 한 번 부려보지 못하고 성자도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십자가와 부활의 도를 믿지 못한 채 세상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 덜 불쌍한 사람은 세상에서 죄를 실컷 짓다가 마지막에 우주 같은 벼락 같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물론 성령을 꼭 받는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비참한 상태로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갈급함도 사라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상태는 극복 가능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가을에 십자가와 부활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면 할수록 우주적 공교회로 여러분을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받아서 신적인 우발성, 여러분에게 수시로 지침을 내리고 수시로 갈 바를 알려주는 일상생활이 하나님 영의 역사에 접속되는 경험이 있길 바랍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 백성 영토에 들어온 것입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지 49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성도들은 신부님 밑에 있는 노예들입니다. 목사님 믿고 성경 읽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성경 읽지 않습니다. 영혼을 살펴서 말씀을 살펴서 죄사함의 확신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마틴 루터의 양심의 불안이 없습니다. 이 땅에 참된 종교개혁을 일으켜주시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양심을 진동할 때까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잠들지 못하는 진정한 양심의 가책자들이 일어나서 대반전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거짓된 구원의 확신 속에 머물지 않게 하시고 우주적 공교회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뿌리 뽑힌 성자들 없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기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 대한민국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따라가기가 힘든 문명입니다. 예수님을 옳게 믿으면 주류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할 것 같고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돈이 좀 있어야 할 것 같고 세력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유력자들과 교제를 나눌 정도로 출세할 정도가 돼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 진리 때문에 가난케 되고 존재감이 없어지는 무서운 현기증을 감당할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는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헛된 용기 내려놓습니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신자의 길을 유지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도와주소서. 믿었던 것처럼 말했던 것 회개하오니 도와주소서. 뼛속깊이 주님의 십자가 수치스러운 십자가 참 정신 납득하게 도와주시고 이해하게 도와주소서. 주님 존재감 없이 이 땅의 청년들이 실업자로 내몰리고 노예 같은 노동에 내몰리는 사태가 계속됩니다. 가진 자의 탐욕과 법의 폭력성 앞에 이 세상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시고, 간섭하여 주시고 야당도 시민단체도 좌절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 크신 팔로 이 땅의 정의를 회복시켜 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새누리당에도 양심 있는 의로운 국회의원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국정원에도 주님의 백성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청와대에도 주님의 백성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이 땅을 향한 주님의 뜻을 펼치는 도구가 되게 도와주소서. 이 땅에 너무나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끝도 없는 벼랑으로 달리고 있사오니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소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다시 서울광장에 나타날 때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기세가 가득 찬 이 땅에서 예수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깨닫습니다. 주님이여 도와주소서. 이 귀한 헌물이 긴급한 주님의 백성들 위해서 아낌없이 낭비되길 원합니다. 주님이여 우리가 거지 같은 천사의 방문 받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도와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넘치는 교회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아버지 하나님 거대한 도시 속에 점점 작아져 가는 저희들 앞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을 확실하지 못하는 을씨년스런 겨울이 문턱에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유를 설명해주시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룬 엄청나고 장엄한 구원사역을 세세히 펼쳐서 가르쳐주시길 원합니다. 뼛속깊이 구원을 확신하며 강력한 성령의 확신으로 세상을 이겨가게 도와주소서. 출장중인 교우들 아파서 나오지 못한 사랑하는 교우들 낱낱이 어루만져 주시길 원합니다. 아이를 키우는 교우, 가정과 직장의 문을 두드리는 아들딸들,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한 대답을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죽음을 강요하면서 우리 양심을 위협하는 악한 지배자들과 악한 세력들을 이기기로 다짐하는 교우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계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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