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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청년의 고민(마태복음19:16-22)

by 【고동엽】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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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고민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며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19:16-22)

성 프란시스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이러면서 찾아옵니다. 그런데 제자가 된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너무나 간곡하게 간청을 합니다. 그의 이력을 보니 자기가 감당을 하기에 너무나 벅찬 사람입니다. 그래 그는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로 한번만 시험을 보세요. 그렇게 간청을 합니다. 그래 그럼 두 번도 아닌 한 번만 당신을 시험한다. 자 그러면서 내가 외출을 할 터인즉 저기 배추모종을 이 쪽으로 옮겨서 심어라. 그런데 모두 거꾸로 심으시오. 그런 연후에 돌아와서 보니 전부다 반듯이 심겨 있습니다. 아니 이 제자가 되겠다던 젊은이가 자기가 보니 말을 잘 못한 게 아닌가 싶어서 그리 심었노라고 아니 나는 너에게 거꾸로 심으라고 했다. 그런 것을 하나 순종을 하지를 못한 다면 어찌 나의 제자가 되겠는가? 난 너의 스승의 자격이 없노라 그러니 가라고 했다고 합니다.

강영우박사의 이야기다. 그는 미국의 역사상 최고의 가문을 부시의 가문이라고 한다. 그가 이런 말을 한다. 그의 가문과 자기의 가족의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고. 바로 신앙과 가치관을 이야기합니다. 신앙과 결심 끈기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 우리의 가치관을 깊이 생각을 해 보자.

오늘의 한 청년이 예수님께서 유대 지경에 머물고 계시는 동안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시의 엘리트로서 관원이었고 특별히 부자였습니다. 교양, 지식, 명예, 권세가 있고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한낱 소문으로는 예언자라고 하나 초라하게 느껴지는 예수라고 하는 갈릴리 청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 소유를 전부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엘리트 청년은 훌륭한 종교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미쉬나'를 통하여 율법을 알고 그 율법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언제나 평온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생의 깊은 세계와 자신의 영원한 미래 또한 운명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마다 그는 몹시 답답하였습니다. 또한 인간은 물질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 청년은 갖고 싶은 것은 다 가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 물질이 그를 위로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청년의 고민은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그 가치관의 변화를 주님이 원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내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럽디다. 내가 이러니 저 사람들도 그런다고 생각을 마세요. 내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을 합니다. 내 지식을 중심으로 생각을 합니다. 나의 소유를 중심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고민으로 생을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영생이 보장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만일 내세가 없고 영생이 없어서 인생이 하나의 물질에서 물질로,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공과 명예와 자유를 위하여 애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한 평도 채 못 되는 땅이면 충분한데 새벽부터 밤까지 뛰어야 한다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일로만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의 문화적 입장에서 본다면 굉장한 차이가 나지 않는바 아니었지만 그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 와서 그 앞에 꿇어앉아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흔히 성공은 3P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인내력(Patience), 실천력(Practice), 평화(Peace)입니다.

이 청년도 인내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적극적인 사람이었지만 항상 불안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무엇인가 가진 것도 같고 손에 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비록 그 청년은 아니지만 배운 것이 분명합니다. 청년이 갖고 있는 것만큼 재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굶지는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활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사실 자신의 내부에는 남이 모르는 절망적인 고민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 고민이 존재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였습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낮춘 인도적 인간관계를 갖기 전에는 마음이 평화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듣고 이웃을 아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전의 자기중심적인 생활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고집스러운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키는 생활로 방향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생활을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고민은 내가 중심이기에 생기는 겁니다. 버리기가 싫어지고 희생이 싫고 무엇인가 욕심은 이루고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매우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께 찾아왔다가 오히려 더 깊은 고민에 빠져서 되돌아갔습니다.

왜 청년은 걱정하며 돌아가야만 했습니까? 자기의 소유권을 버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따르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의 소유라는 개념을 버리기가 너무 힘들어서 불안한 것은 아닙니까? 지식의 소유권이 그렇습니다. 물질의 소유권이 그렇고요.

외경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더운 날 아주 걷기도 힘든 그런 날에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하필이면 높은 산에 올라가자고 하십니다. 그것도 그냥 가는 게 아니라 커다란 돌들을 가지고 올라가자는 겁니다. 베드로는 그저 말씀대로 커다란 돌을 들고 갑니다. 그런데 가룟인 유다는 처음에 커다란 돌을 들고서 가다가 점점 돌이 작아집니다. 아니 생각하니까 예수님이 답답합니다. 그냥 올라가도 힘들어서 그런데 왜 하필이면 돌을 들고서 가나 그런 생각이 드니까 점점 작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다 올라가서는 빙 둘러 앉아서는 예수님이 식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후에 보니까 돌이 떡이 된 겁니다. 베드로는 나눠주면서 먹고 유다는 마음에 이런 말을 합니다. 왜 그때 그럴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마음을 가지고 불평을 합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죽은 후에 유다의 질문이 그때 다시 부활을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성공적인 사람이지만 그는 실수가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꼭 기적을 체험 합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려라. 그가 내가 밤이 새도록 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경험을 버립니다. 내가 가진 소유가 당신이 말씀을 하시니 버립니다. 이런 겁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과거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 청년은 재물이 많은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도리를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높은 자리에 있는 엘리트였습니다. 이와 같이 지위와 명예가 있고 돈이 있고 더구나 남에게 존경을 받다 보면 자기를 낮추어 겸손하기가 힘들고 진실하기란 더욱더 어려워집니다. 자신을 가난한 사람으로 알고 지위가 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평범한 사람이 진실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본래 고민이란 피상적인 고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될 때 피상적인 고민은 자연히 해결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부부간에 조그마한 의견 충돌로 다투는 중에 밖에서 "불이야"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면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다툼은 더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때때로 각 가정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있다가도 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질병이나 혹은 환난 등의 어려움은 때로 모든 피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좋은 열쇠(Key point)가 되기도 합니다.

청년은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는 이 말씀을 기억했다면 적어도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실 때 근심하며 되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젊은이는 영생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생명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재물 때문에 영생을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청년의 고민은 참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된 고민이었고 상식적인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화평하지 못했습니다. 진실로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효가 되는 이 생명을 위하여 여러 날 밤을 새워가며 고민한 사람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그는 감격했을 것이고 오히려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과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킨 율법은 의례적인 하나의 규례에 의해 지켰던 것뿐이지 깊은 진실에서 그것을 지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에 그는 "예수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 보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깊이 생각해볼 때 도적질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바로 볼 때 간음 아닌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 율법에 그대로 비추어 본다면 영생을 얻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겠습니다"라고 솔직히 고백 드려야 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그 청년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청년이 진실을 찾으려면 그 돈이 없어져야 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 진실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돈에 대한 마음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반면에 이 청년은 너무나 값싼 영생을 구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둘이 아닙니다. 종은 두 주인을 한꺼번에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를 얻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에 버금가는 것을 잃게 됩니다. 사랑의 종류가 다르기는 하여도 가정에서 아이들을 열심히 사랑하다 보면 남편에게 소홀하여지고 남편만을 전적으로 뒷바라지하다 보면 아이들의 밥 먹는 시간도 잊게 됩니다. 이와 같이 간절하게 영생을 얻으려고 한다면 부득불 여기에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생명이 가장 귀한 것이라면 그만큼 고가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샤마라고 합니다. 그 어원을 들여다보면 듣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선지자인 사무엘이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샤마엘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겁니다. 그의 어머니 한나가 샤마엘을 한겁니다. 자 고민이 많은 그 청년은 샤마엘을 듣고서는 외면을 합니다. 거 고민이 있느냐? 그럼 나의 말 좀 들어볼래?그런 겁니다. 고민이 사라진다는 것은 음성을 들었다는 겁니다. 샤마엘을 외치세요.

위클리프 성경번역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아주 특별한 일을 하는 그런 단체입니다. 선교사님들이 현지에 나가서 언어를 배워서는 성경을 번역을 합니다. 한번은 남미에서 이분들이 성경을 번역을 하는데 조그마한 부족을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런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그런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주 특별한 은혜로 그들에게 영감을 주십니다. 부족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그러면서 이일은 꼭 해야 한다. 나가서 네 마음을 나누지를 말고서 해야 한다고 당부를 합니다. 그때 성경을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순종이란 단어가 나오면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 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그런 일에 서있습니다. 지금 당신의 일에 무엇이 들립니까? 거기에 순종을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으면서 순종을 어떻게 해석을 하십니까? 어떤 소리보다도 주님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결단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그 어느 것보다 그것을 중요하게 보는 겁니다. 그것만 생각을 하는 겁니다.

목적지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침몰하게 된 배가 있었습니다. 심한 풍랑 때문에 배가 점점 밑으로 가라앉으므로 모두 구명선 으로 바꿔 타야 했습니다. 구명선 까지는 가는 줄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빈 몸으로 줄만 붙들어야 합니다. 모두들 목숨만 건지기를 원하여 앞을 다투어 구명선 으로 가는 데 마침 금괴를 싣고 여행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귀한 금괴를 망망대해에 버릴 수가 없어서 몰래 허리에다 잔뜩 매고 마지막으로 구명줄을 붙잡았습니다.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절반쯤 왔을 때 그만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생명만 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영생을 위한 길은 결코 안일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하였다면 모름지기 이전보다 백배의 부자가 되었을 것이고 더 큰 일을 하는 훌륭한 엘리트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믿음이 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육신과 함께 재물도 잃어버리고 영생의 기회도 놓쳤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나의 전부를 바칠 때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백배의 축복을 받게 되고 겸하여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바티칸에 가면 꼭 확인을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증개축을 한 성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머릿돌의 글이 있답니다. 누가복음 22장 32절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더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거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고 부인했을 때 그 사건을 기억을 하게 하시려고 주신 말씀입니다. 아니 베드로라면 초대교회를 일으킨 그런 인물입니다. 주님의 수제자가 아닙니까? 너는 반석이라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노라 그래도 되는데 숨기고 싶고 감추어 주었으면 그런 성경을 가지고 온 겁니다. 겸손 하게 되는 길은 거기에 있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인 그런 것을 보는 것 보다는 그래도 거기서 겸손을 가지는 그런 음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프리카의 리처드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을 다해서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결신자가 없는 겁니다. 많이 애쓰고 오랜 시간을 복음을 전했지만 그게 잘 안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가르칩니다. 어느덧 누가복음 6장 30절에 걸리는 겁니다.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이거 그대로 번역을 할까 그대로 알려줄까 말까 그러다가 이 토인들 아무래도 비인격적이고 무지해서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달라고 할 거다. 그래서 건너뛰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너무나 불편합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영 답답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고는 그대로 전합니다. 아니나 달라요 토인들이 봐라 너 그럴 줄 알았다. 여기에 적힌 대로 네 꺼 다주라. 그는 정말로 다 줍니다. 그런데 이때 정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 사람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자기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다 주었으니 정말이다. 그들이 다 그리스도를 영접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이 깊은 고민에 빠지면서도 그 고민의 원인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또 참된 생명의 문제를 등한히 할 때가 많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 하옵는 것은 우리에게 더 확실한 믿음을 주셔서 이 영생을 위하여, 신령한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위하여 깊은 고민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며 또 주님 앞에 나와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주님만을 긍정하는 가운데에서 하늘로부터 주시는 큰 위로를 받게 하시고, 백배나 주시는 축복을 영육 간에 받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긍정을 위해서는 부정이 필요하며 적극적인 신앙을 위해서 소극적인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하보다 귀한 이 생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앞에 복종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셔서 영생을 얻고 평화를 얻고 겸하여 모든 축복을 함께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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