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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마태복음 15장 1절~10절)

by 【고동엽】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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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마태복음 15장 1절~10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강남 지역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대의 버스가 지방으로 오가기 때문에 터미널 대합실은 무척이나 혼잡합니다. 그런데 이 대합실에 종종 나이 많은 어른들이 버려지곤 한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터미널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기력 없이 서성대는 노인 내외분을 발견했습니다. 이분들은 정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여관에 모셨다가 절차를 밟아 양로원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이분들 말씀이, 자식들이 터미널에 모시고 와서는 노인들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자기들만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낯간지러운 체면은 있어서 신원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겠지요. 이분들 역시 자식들에 관해서는 함구무언(緘口無言)입니다. 자식들에 대한 질문에는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버려지면서도 그 자식을 감싸려는 부모의 이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나를 버린 내 자식, 이렇게 패역한 놈이 누구요"라고는 결코 밝히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식들의 체면을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이유를 저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우선, 옛날에는 삶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부모에게서 배웠습니다. 부모님이 스승입니다. 부모님이 모든 일에서 자녀보다 우월했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부모가 가르쳤습니다마는,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스스로 지식을 익혀나갑니다. 급변하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부모는 오히려 뒤떨어지고 무지하기 십상입니다. 그러한 부모가 자식이 보기에는 무능하게도, 그 생이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또한 옛날에는 기업과 기술과 삶의 모든 토대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목수는 그 아들에게 목수의 기술을 전수하여 그것으로 생을 잇게 합니다. 농부는 아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땅을 기업으로 물려줍니다. 말하자면 부모가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부모에게서 쫓겨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집을 떠나야만 자유로울 것 같다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부모의 체면을 보아서 당분간 함께 살아준다는 패역한 자식마저 생기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회 구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녀들은 일찍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팽배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희박합니다. 저 혼자서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고 저 혼자서 해도 다 될 것 같습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모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소홀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엄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를 섬기지 아니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은 전혀 없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무조건이다.' 경제적인 구실, 사회적인 여건, 교육적인 이유, 정치적인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도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부모를 소홀히 대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은 장로의 유전(遺傳)입니다. 예수님의 어조는 매우 분명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절)?"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는 심지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라는 변명조차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 효(孝)의 절대성입니다.

'어버이주일'을 앞두고, 저는 성경에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식을 어떻게 다루라고 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상고(詳考)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엄하게 말씀합니다---"반드시 죽일지니라." 이스라엘의 처형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끌어내어 성밖에 나가 온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침내 커다란 돌무더기가 될 때까지 돌을 던집니다. 이 돌무더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됩니다. 이 같은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신 21:21)." 그렇다면 어떤 죄에 대해서 이 같은 심판을 내립니까? 먼저는 출애굽기 21장 15절입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를 치는 자식이라 면 구태여 잘잘못을 가릴 여지도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식은 끌어내어 쳐죽입니다. 이유 불문입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신명기 21장 18절입니다. "그 아비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세 번째 경우는 출애굽기 21장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더러 빨리 죽으라는 사람, 말로써 저주하는 자식은 그대로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4절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로써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실 만큼 확고한 계명의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니 우리들 가운데도 죽을 사람이 참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가 했더니 이렇게 죽을죄를 지은 탓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죽지 못해 살면서 말끝마다 '죽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회 또한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공경(恭敬)한다'는 일반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라 함은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든가 자녀를 향하는 마음과 같이, 내려가는 마음입니다.

긍휼입니다. 그러나 '공경'은 높이 우러르는 마음입니다. 존경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친구간에 부부간에 동등한 자격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친애'라 합니다. 그러나 공경은 높이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직적 긍휼의 사랑에 대한 응답의 사랑입니다. 이미 사랑을 받은 데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과 경건을 합쳐서 응답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이것을 통하여 복을 받겠다든가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계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응답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네 종류의 부모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나 루터는「대요리 문답(大要理問答)」이라는 교리서(敎理書)에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교인들에게 암송하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나를 낳아준 부모입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교역자, 목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교역자를 일러 신부(神父)라 하지 않습니까? 영어로는 'Father'----글자 그대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나이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교인들을 대할 때 '하게'를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마땅히 '하게'를 하지 않겠습니까? 교역자와 교인이 수직적 관계에 있습니다. 셋째로, 내게 지식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위 사부(師父)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승을 일컫는 말입니다. '랍비'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정치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왕을 훼방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른들을 함부로 매도합니다. 함부로 훼방하는 언동을 일삼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파괴되고 맙니다. 질서가 무너집니다. 잘하든 못하든 일단 그 자리에 있는 한에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들이 곧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금년 5월 8일 밤 9시 종합 뉴스 보도 시간에 한 앙케트가 보고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효도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한 조사에 응답한 내용의 60퍼센트를 차지한 답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효도란 부모의 속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즘 세태에서 생각하는 효도입니다.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6.2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서 속이나 썩이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정도로밖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그보다 더는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존경을 겸전하고, 특별히 부모의 존재와 그 큰 은혜와 희생과 수고를 인정하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수고를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입은 바 그 큰 은혜와 희생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고 쌓아온 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강한 이유를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교육적으로 여러 가지로 설명들 합니다마는, 사회적 이유로는 오직 한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승(tradition)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존경합니다. 이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부모님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가도 '이것은 전승이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노 코멘트(NO comment)---더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타민족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른들이 겪고 경험한 것을 전해주는 것이 전승이므로,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지키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서 몇천 년의 세월이 소용되었습니다. 다만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교훈이 아닙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수도 없이 지내 내려오면서 얻어진 지혜입니다. 그 값비싼 지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부모님의 지혜와 그 우수함을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또한 꼭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존재의 가치,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루 세 번씩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우리집에 어머니는 꼭 필요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꼭 계셔야 합니다." 저도 장모님을 모시고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늘 일어나셔서 저를 맞아주십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꼭 한마디 말씀을 드립니다. "집에 들어올 때에 어머니가 안 계시면 영 재미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한마디 말이 어머니를 그처럼 기쁘시게 합니다. '이 집에는 내가 필요하다'---바로 이것이 어머니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들집에서도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고 딸도 내켜하지 않을 때, 부모님들은 자기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인생이 서러워집니다. 꼭 무엇을 해드려서가 아니라, '어머니는 우리 집에 꼭 필요합니다'라는 한마디에 존재 가치와 삶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들의 말씀은 언제나 선합니다. 설령 자신은 악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실패했더라도 자식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거짓되이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이 같은 마음을 두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다." 부모의 선하심과 인자함을 인정해드리면서 감사와 존경과 순종과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 기가 막힌 일이로다' 싶은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동양적인 사고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노아'라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분입니다. 육백 세가 넘은 할아버지였지요. 아마 그러니 인생에서 별다른 낙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셨습니다. 대낮부터 술을 잔뜩 마시고는 취해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대낮에 술을 그렇게나 마셨으니 오죽이나 더웠겠습니까? 옷을 훨훨 벗어 부치고 수치를 다 드러낸 채 세상모르고 낮잠을 주무십니다. 그때 마침 '함'이라고 하는 아들이 들어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망신스런 모습 아닙니까? 이 아들, 뛰어나와서 형제들에게 아버지 흉을 봅니다. "아버지가 노망이 드셨나보다. 대낮에 벌거벗고…… 대체 저게 무슨 꼴이람!" 동생들이 이 말을 듣고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가만히 이불을 덮어드렸습니다. 부모님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수치를 덮어드리는 마음---아름답고 소중한 마음이 아닙니까? 마침내 아버지가 잠이 깨어 그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저마다의 마음씨대로 복을 빌어줍니다. 함에게는 어떠한 복을 빌어주었습니까? '너는 형제들의 집에서 영원히 노예가 될지어다.' 전설에 따르면 함의 후예들이 흑인이라고들 합니다. 어떠한 마음가짐이 복을 받습니까? 부모를 순종하라는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기에 효도하는 만큼 복을 주시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그분의 자녀 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저는 아무개의 자녀입니다, 제 부모는 누구누구입니다'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가깝게 지내던 동료 목사님 한 분이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한번은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목사님 내외가 점심을 들다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중에 잠시 그 댁 어머니께 인사드리는 것을 잊었다가 퍼뜩 생각이 미쳐서 "아, 어머니가 어딜 가셨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골방에 계셔요. 이젠 노망이 드셔서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며 인사를 드리러 들어갔습니다.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마는 예전부터 아는 분이라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저를 쭈르르 따라나오더니 식탁에 앉아서 자꾸 이 얘기 저 얘기 말을 시킵니다.

말상대가 그리운 것이지요. 아들 며느리가 마구 면박을 주어서 골방으로 쫓아버리는데, 가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눈물이 어린 것 같았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안좋던지요.

여러분, 늙으신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시다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졌기로 그토록 보기 싫은 것입니까? 그분의 자녀됨을 자랑합시다. 잠언 23장 24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덕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집 자식이 아니냐'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의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 어려운 시집살이를 효도하는 마음으로 견디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좋은 며느리가 되어야 친정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다. 내가 좋지 못한 평을 듣는다면 친정 부모님과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효도의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우리네의 전통입니다. 저 하나만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내가 진실하고 부모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덕있는 사람, 진실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효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효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가르치십니다. 부모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곧 자녀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면서 자녀를 잘 가르쳐보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부모에게 효하는 것을 자녀에게 보여줄 때에 자녀들은 올바른 인격으로 성장해갑니다. 공부 몇 자(字) 가르치고 일류대학에 입학시켰다고 사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를 가르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키워놓은 후에 뒤늦게 눈물 흘리며 후회하지 마십시다.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옛 선조 들은 부모를 위하여 자식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효도를 했습니다. 당장에는 자식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마침내는 자식을 바로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어떠한 구실도 필요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에는 또한 형제의 화목이 필수적임을 기억합시다. 형제의 불화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게는 좋지 못한 형제라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모두 소중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형이 그를 기쁘게 영접하지 못한 것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드렸습니다.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이것은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거든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일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어째서 내 자녀가 이렇게 비뚤어졌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 자신이 깊이 회개하고 신앙적인 효를 다하여야 합니다. 한 눈먼 소녀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머니와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진정한 참회와 함께 진정한 성서적 효를 다시 세울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범사에 형통할 것이요, 장수할 것이요, 축복된 생애가 가정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마태복음 15장 1절~10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강남 지역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대의 버스가 지방으로 오가기 때문에 터미널 대합실은 무척이나 혼잡합니다. 그런데 이 대합실에 종종 나이 많은 어른들이 버려지곤 한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터미널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기력 없이 서성대는 노인 내외분을 발견했습니다. 이분들은 정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여관에 모셨다가 절차를 밟아 양로원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이분들 말씀이, 자식들이 터미널에 모시고 와서는 노인들의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자기들만 돌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낯간지러운 체면은 있어서 신원이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겠지요. 이분들 역시 자식들에 관해서는 함구무언(緘口無言)입니다. 자식들에 대한 질문에는 절대로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버려지면서도 그 자식을 감싸려는 부모의 이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나를 버린 내 자식, 이렇게 패역한 놈이 누구요"라고는 결코 밝히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식들의 체면을 생각합니다. 오늘의 세태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입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이유를 저는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우선, 옛날에는 삶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부모에게서 배웠습니다. 부모님이 스승입니다. 부모님이 모든 일에서 자녀보다 우월했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부모가 가르쳤습니다마는,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스스로 지식을 익혀나갑니다. 급변하는 사회 모든 분야에서 부모는 오히려 뒤떨어지고 무지하기 십상입니다. 그러한 부모가 자식이 보기에는 무능하게도, 그 생이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또한 옛날에는 기업과 기술과 삶의 모든 토대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목수는 그 아들에게 목수의 기술을 전수하여 그것으로 생을 잇게 합니다. 농부는 아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땅을 기업으로 물려줍니다. 말하자면 부모가 절대적인 의존의 대상이었습니다. 부모를 떠나면 당장 생활에 어려움을 느낍니다. 부모에게서 쫓겨나면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집을 떠나야만 자유로울 것 같다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부모의 체면을 보아서 당분간 함께 살아준다는 패역한 자식마저 생기는 세상입니다. 이런 사회 구조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녀들은 일찍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팽배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공동체 의식이 희박합니다. 저 혼자서 무엇이든지 다 할 것 같고 저 혼자서 해도 다 될 것 같습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부모에 대해서도 자연스레 소홀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명령입니다. 엄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부모를 섬기지 아니할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될 구실은 전혀 없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무조건이다.' 경제적인 구실, 사회적인 여건, 교육적인 이유, 정치적인 변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도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부모를 소홀히 대하여도 무방하다는 것은 장로의 유전(遺傳)입니다. 예수님의 어조는 매우 분명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3절)?"부모를 공경하는 일에는 심지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라는 변명조차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바 효(孝)의 절대성입니다.

'어버이주일'을 앞두고, 저는 성경에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식을 어떻게 다루라고 하셨는지를 다시 한번 상고(詳考)해보았습니다. 성경은 엄하게 말씀합니다---"반드시 죽일지니라." 이스라엘의 처형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끌어내어 성밖에 나가 온 동네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마침내 커다란 돌무더기가 될 때까지 돌을 던집니다. 이 돌무더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가 됩니다. 이 같은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신 21:21)." 그렇다면 어떤 죄에 대해서 이 같은 심판을 내립니까? 먼저는 출애굽기 21장 15절입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를 치는 자식이라 면 구태여 잘잘못을 가릴 여지도 없습니다. 어떠한 이유를 막론하고,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는 자식은 끌어내어 쳐죽입니다. 이유 불문입니다.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신명기 21장 18절입니다. "그 아비나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세 번째 경우는 출애굽기 21장 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더러 빨리 죽으라는 사람, 말로써 저주하는 자식은 그대로 끌어내어 죽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4절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말로써 부모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돌로 쳐죽이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인용하실 만큼 확고한 계명의 말씀이요,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니 우리들 가운데도 죽을 사람이 참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죽겠다 죽겠다 하는가 했더니 이렇게 죽을죄를 지은 탓입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그 고통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니 죽지 못해 살면서 말끝마다 '죽겠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회 또한 이 모양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공경(恭敬)한다'는 일반적인 사랑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이라 함은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든가 자녀를 향하는 마음과 같이, 내려가는 마음입니다.

긍휼입니다. 그러나 '공경'은 높이 우러르는 마음입니다. 존경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친구간에 부부간에 동등한 자격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친애'라 합니다. 그러나 공경은 높이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수직적 긍휼의 사랑에 대한 응답의 사랑입니다. 이미 사랑을 받은 데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과 경건을 합쳐서 응답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이것을 통하여 복을 받겠다든가 무엇을 이루어보겠다는 계산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응답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자들은 네 종류의 부모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나 루터는「대요리 문답(大要理問答)」이라는 교리서(敎理書)에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여 교인들에게 암송하도록 할 정도였습니다. 첫째는 나를 낳아준 부모입니다. 둘째, 영적인 부모가 있습니다. 교역자, 목사를 말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교역자를 일러 신부(神父)라 하지 않습니까? 영어로는 'Father'----글자 그대로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나이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교인들을 대할 때 '하게'를 합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마땅히 '하게'를 하지 않겠습니까? 교역자와 교인이 수직적 관계에 있습니다. 셋째로, 내게 지식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소위 사부(師父)라고 하지 않습니까? 스승을 일컫는 말입니다. '랍비'라는 말에도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정치가를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정치를 잘하든 못하든, 왕을 훼방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른들을 함부로 매도합니다. 함부로 훼방하는 언동을 일삼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마저도 파괴되고 맙니다. 질서가 무너집니다. 잘하든 못하든 일단 그 자리에 있는 한에는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들이 곧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금년 5월 8일 밤 9시 종합 뉴스 보도 시간에 한 앙케트가 보고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효도란 무엇인가?'라는 설문에 대한 조사에 응답한 내용의 60퍼센트를 차지한 답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효도란 부모의 속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요즘 세태에서 생각하는 효도입니다. '부모를 극진히 섬기는 것이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6.2퍼센트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해서 속이나 썩이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정도로밖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하여 그보다 더는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존경을 겸전하고, 특별히 부모의 존재와 그 큰 은혜와 희생과 수고를 인정하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부모의 수고를 인정해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입은 바 그 큰 은혜와 희생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경험하고 쌓아온 지혜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도인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처럼 강한 이유를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교육적으로 여러 가지로 설명들 합니다마는, 사회적 이유로는 오직 한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승(tradition)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존경합니다. 이 전승이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부모님들의 교훈을 말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가도 '이것은 전승이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노 코멘트(NO comment)---더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타민족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어른들이 겪고 경험한 것을 전해주는 것이 전승이므로, 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지키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서 몇천 년의 세월이 소용되었습니다. 다만 그대로 지키는 것이 유익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교훈이 아닙니다. 파란만장한 생을 수도 없이 지내 내려오면서 얻어진 지혜입니다. 그 값비싼 지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부모님의 지혜와 그 우수함을 인정해 드려야 합니다.

또한 꼭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언제나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존재의 가치, 그분의 능력을 인정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루 세 번씩 이렇게 말씀드리십시오. "어머니, 우리집에 어머니는 꼭 필요하신 분입니다. 어머니는 꼭 계셔야 합니다." 저도 장모님을 모시고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늘 일어나셔서 저를 맞아주십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꼭 한마디 말씀을 드립니다. "집에 들어올 때에 어머니가 안 계시면 영 재미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 한마디 말이 어머니를 그처럼 기쁘시게 합니다. '이 집에는 내가 필요하다'---바로 이것이 어머니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아들집에서도 달가워하는 것 같지 않고 딸도 내켜하지 않을 때, 부모님들은 자기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인생이 서러워집니다. 꼭 무엇을 해드려서가 아니라, '어머니는 우리 집에 꼭 필요합니다'라는 한마디에 존재 가치와 삶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선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들의 말씀은 언제나 선합니다. 설령 자신은 악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실패했더라도 자식은 성공하기를 바라고, 자신은 거짓되이 살았다 하더라도 자식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이 같은 마음을 두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분이다." 부모의 선하심과 인자함을 인정해드리면서 감사와 존경과 순종과 기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효도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참 기가 막힌 일이로다' 싶은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동양적인 사고의 차원에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노아'라는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분입니다. 육백 세가 넘은 할아버지였지요. 아마 그러니 인생에서 별다른 낙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느날 술을 잔뜩 마셨습니다. 대낮부터 술을 잔뜩 마시고는 취해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대낮에 술을 그렇게나 마셨으니 오죽이나 더웠겠습니까? 옷을 훨훨 벗어 부치고 수치를 다 드러낸 채 세상모르고 낮잠을 주무십니다. 그때 마침 '함'이라고 하는 아들이 들어가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망신스런 모습 아닙니까? 이 아들, 뛰어나와서 형제들에게 아버지 흉을 봅니다. "아버지가 노망이 드셨나보다. 대낮에 벌거벗고…… 대체 저게 무슨 꼴이람!" 동생들이 이 말을 듣고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가만히 이불을 덮어드렸습니다. 부모님의 수치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그리고 수치를 덮어드리는 마음---아름답고 소중한 마음이 아닙니까? 마침내 아버지가 잠이 깨어 그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에게 저마다의 마음씨대로 복을 빌어줍니다. 함에게는 어떠한 복을 빌어주었습니까? '너는 형제들의 집에서 영원히 노예가 될지어다.' 전설에 따르면 함의 후예들이 흑인이라고들 합니다. 어떠한 마음가짐이 복을 받습니까? 부모를 순종하라는 계명은 약속이 있는 계명이기에 효도하는 만큼 복을 주시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 대해서는 늘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이 그분의 자녀 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저는 아무개의 자녀입니다, 제 부모는 누구누구입니다'하는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님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가깝게 지내던 동료 목사님 한 분이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한번은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마침 목사님 내외가 점심을 들다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중에 잠시 그 댁 어머니께 인사드리는 것을 잊었다가 퍼뜩 생각이 미쳐서 "아, 어머니가 어딜 가셨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골방에 계셔요. 이젠 노망이 드셔서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소리냐며 인사를 드리러 들어갔습니다. 방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마는 예전부터 아는 분이라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저를 쭈르르 따라나오더니 식탁에 앉아서 자꾸 이 얘기 저 얘기 말을 시킵니다.

말상대가 그리운 것이지요. 아들 며느리가 마구 면박을 주어서 골방으로 쫓아버리는데, 가시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눈물이 어린 것 같았습니다. 어찌나 마음이 안좋던지요.

여러분, 늙으신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다.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시다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아무리 초라해졌기로 그토록 보기 싫은 것입니까? 그분의 자녀됨을 자랑합시다. 잠언 23장 24절에서는 말씀합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덕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집 자식이 아니냐'라는 칭송을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의 우리네 어머니들은 그 어려운 시집살이를 효도하는 마음으로 견디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내가 좋은 며느리가 되어야 친정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다. 내가 좋지 못한 평을 듣는다면 친정 부모님과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효도의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 우리네의 전통입니다. 저 하나만 생각하고 마음대로 해버린다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내가 진실하고 부모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겨 덕있는 사람, 진실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효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효에 대하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가르치십니다. 부모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곧 자녀를 교육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면서 자녀를 잘 가르쳐보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부모에게 효하는 것을 자녀에게 보여줄 때에 자녀들은 올바른 인격으로 성장해갑니다. 공부 몇 자(字) 가르치고 일류대학에 입학시켰다고 사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를 가르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키워놓은 후에 뒤늦게 눈물 흘리며 후회하지 마십시다.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옛 선조 들은 부모를 위하여 자식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효도를 했습니다. 당장에는 자식에게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마침내는 자식을 바로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어떠한 구실도 필요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에는 또한 형제의 화목이 필수적임을 기억합시다. 형제의 불화처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게는 좋지 못한 형제라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모두 소중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에 형이 그를 기쁘게 영접하지 못한 것이 아버지를 섭섭하게 해드렸습니다.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이것은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거든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이 일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어째서 내 자녀가 이렇게 비뚤어졌는가?' 심은 대로 거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 자신이 깊이 회개하고 신앙적인 효를 다하여야 합니다. 한 눈먼 소녀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와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어머니와 같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웁니다.

진정한 참회와 함께 진정한 성서적 효를 다시 세울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범사에 형통할 것이요, 장수할 것이요, 축복된 생애가 가정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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