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최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초대 기독교의 배경 속에서도, 그리고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글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핵심 주제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은 초대 교회 수세기 동안 줄곧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시작된 성부와 성자 관계에 대한 논쟁은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이다.
니케아 종교 회의는 바로 아리우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런데 니케아 회의는 이 논쟁의 불씨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진일보하여 성령과의 관계 문제까지로 확대됨으로써, 결국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 교리 정립으로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본 졸고의 관심은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각각 도출된 두 신조를 역사적 맥락에서 서로 비교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회의에 이르까지의 역사를 고찰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아리우스 논쟁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리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핵심에 도달하는 첩경이라 사료된다.
아리우스의 논쟁은 니케아 회의를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통상 두세 부분으로 세분된다. 본 졸고에서는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견해를 좇아 아리우스 논쟁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논쟁의 발발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일시적 승리를 확인해 준 니케아 회의까지 ; A.D. 318-325
2.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티우스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3.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본론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 되고 있었던 신학적 발전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가깝게는 오리겐의 기독론이 갖는 모순적인 요소들과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 간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멀게는 속사도들에게까지 소급된다.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싱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안디옥의 감독 익나티우스(Ignatius)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나신 분이면서도 나시지 않은,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고 했으며, "에수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고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변증가들에게로 오면서 한층 더 분명해졌는데, 변증가 유스틴(Justin)은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되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성부와 성자간의 차별을 두는 종속설적 경향이 따라다녔다.
한편 교부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이 자신의 솜씨를 연합하여 감성있는 인간이 되셨음은 이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 태어났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모든 반박을 일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존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한 어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공존을 언급함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확증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면에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레니우스보다 훨씬 앞선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두 용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했다. 즉 세 개체는 하나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질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세 개의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셋은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고 정도에서이며, 본질에서가 아니고 형식에서이며, 능력에서가 아니고 그 양상에서 나뉘인다. 그렇지만 그 분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들과 형상들과 외양들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 그러나 터툴리안이 사용한 용어들은 그 뜻이 모호했다.
한편, 오리겐(Origen)은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보다 훨씬 발전된 견해를 피력했는데, 로제(Bernhard Lohse)에 의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들과 성령에도 적용시킬 수는 있어도 아버지 한 분만이 하나님이며,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한 행위로써 산출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듯이 성령도 아들에게 종속된다"고 하였다.
신격의 세 위격에 대해서 오리겐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개별적 요소 혹은 개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이고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 위격은 의지와 조화와 통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류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오리겐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이처럼 오리겐은 아들을 아버지의 피조물이라고 아들의 종속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들과 아버지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위 간의 차이점을 말하는 쪽이 항상 우세해서 삼위 간의 통일성을 말하는 쪽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리겐의 죽음과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던 몇 십년 사이에 오리겐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하든지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창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을 엄격하게 주장하든가 아니면 오리겐을 넘어서서 상이한 실체 간의 본질적 하나됨을 강력하게 주장하든가 하는 두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에 등장하는 모든 신학이 오리겐의 좌파에 서든지 혹은 우파에서 그의 주장을 폈다.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아리우스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오리겐 좌파인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와 오리겐 우파인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역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에 의하면 이렇게 발단되었다.
디오클레티안 박해 하에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베드로를 승계하여 아킬라스(Achillas)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고, 다시 아킬라스를 이어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그가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하면서 야심적이고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감독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해 버렸다. 아리우스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며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들의 존재는 성부와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 소크라테스가 장로라고 언급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12교구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Baucalis)를 담당한 수석 사제였다. 아리우스는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의 제자였던 루키안(Lucian)의 문하생이었다. 루키안의 지적 세계는 오리겐의 많은 사상을 계승했는데, 아리우스는 루키안보다 훨씬 더 오리겐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로 보건대 아리우스는 동방에 유행하던 두 가지 신학 사조, 곧 알렉산드리아와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전파된 오리겐의 사상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전파된 루키안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우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신앙고백을 보면, "우리는 홀로 유일하게 비출생적이고 홀로 유일하게 영원하시고, 홀로 유일하게 시작이 없으시고, 홀로 유일하게 주님이시며, 홀로 유일하게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라고 쓰는 아리우스의 사상에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뜻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불변적이므로 다른 어느 존재에게도 전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월하신 한 분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되었음이 확실하고, 무에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와 같은 사상 형식은 하나님의 육체적인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이상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하나님을 '복합체'로 만들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아리우스도 자기 앞의 변증신학자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처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로 더불어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과 지혜를 위격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시간의 시작 이전에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 의하면 아들은 완전한 피조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피조물이라고 할 때, 아리우스는 아들의 산출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아들과 아버지가 너무도 가깝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파생적인" 의미에서 아들의 "출생"의 뜻을 사용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인 동일성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다.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은 혼자 계신 때가 있었으며, 아직 아버지가 아닌 때도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경우와 같이 아들의 불가변성을 주장할 수 없다.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을 속성에까지 연장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수여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 312?-328 재위)는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 발생 교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성자는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 발생된 동일본질의 위격적 존재라고 보았다. 즉, 말씀은 한 위격으로서 성부와 구분되며, 또한 성부는 말씀 없이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성부와 동등 영원하다. 그러나 말씀의 아들됨은 실재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 불가한 두 실재이며 완전히 같으나 하나는 아니다는 것이다. 그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릇되며 그는 더이상 그 견해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기 견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 실제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다. 그 중에서 제국의 동방 수도의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라는 유력한 인물이요 루키안의 동료 제자를 지지자로 만들었다.
아리우스는 한동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함께 지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탈리아'(Thalia)를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알렉산더도 이에 못지 않은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감독 알렉산더는 성자가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발생하며 '무로부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며 불변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 당파는 모두 성경으로부터 뽑아낸 증빙 구절들과 아울러 상대방의 위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논리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우선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주장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 있게 되므로 결국 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결국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320년경 약 100명의 이집트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을 파면하였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안디옥에서 그와 함께 수학하였던 동방 제국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요절들을 외치며 행진하는 일반인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의 호소를 받은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알렉산더의 이론이 오류라는 서신들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지방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 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이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제국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원했던 콘스탄틴은 우선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Cordova) 감독 호시우스(Hosius)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 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
1.2. 니케아 회의
후세인들에 의해 최초의 에큐메니칼 즉 세계 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된 모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감독들이 모인 것은 A.D. 325년 5월 20일이었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을 동반토록 했으며 왕복 여비와 체재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없으나 약 3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 사가(史家)들이 기록한 318명은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를 받은 숫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왔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6명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이 회의를 대하는 감상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대회의에 참석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귀양을 갔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자기들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육체적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러한 시련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감독들이 황제의 융숭한 대접 속에 니케아에 초대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소문과 서신 왕래를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 회의의 의사 진행은 호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하였다. 희열에 찬 분위기 속에서 감독들은 박해 후에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많은 안건들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절차와, 장로들과 감독들의 선출 및 안수, 그리고 여러 교구들의 우선 순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 회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후 이 논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 이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은 물론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 일파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장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만 한다면 회의 석상에서 아리우스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알렉산더가 정죄받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소수의 집단은 정통파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정통의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단지 오리겐의 추종자인 동방 교회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 터툴리안이 선포한 바대로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에는 겨우 세 명, 혹은 네 명으로 구성된 또 다른 집단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므로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감독들 - 이러한 감독들 가운데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와 안키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가 있다 - 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데 동의하였으나, 이들 자신의 신조 역시 그 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는 과정 속에서 정죄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참여하지 않았던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들 가운데 어느 집단에도 소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드디어 박해가 겨우 종식되고 새로운 기회들과 수많은 문제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이처럼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의 초기에 이들 감독들은 우선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모든 이들의 타협책을 찾기에 부심했던 듯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제한 대표적 인물은 동료 감독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학식있는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유사할 뿐 본질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고, 그 연설문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져 발에 밟혔다. 그러자 중간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의 규율'을 낭독했는데, 아리우스파는 그 정도 신조라면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통파는 아리우스파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의 작성을 원했으며, 두 귀절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성자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귀절이고, 다른 하나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귀절이었다.
궁정 감독 호시우스는 서방사람으로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연고로 정통파의 '호모우시오스'가 니케아 신조에 삽입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마침내 회의는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였던 신경에 합의하였다. 이 신조 말미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한 기본 명제들을 직접 정죄하는 짧은 저주 문구들을 덧붙였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소망하여 이에 서명하였다. 단지 두 명의 감독만이 서명을 거부하였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저주 문구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회의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이 내린 처벌을 첨가하여 면직된 감독들을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해 버렸다.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2.1 니케아 신조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2.2 니케아 신조 분석
니케아 신조는 그 후에 첨가된 부분들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저주 부문을 삭제한 형태로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모체를 이룬다. 원래 로마에서 기원하였던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서방에 기원을 둔 교회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반면 니케아 신경은 이러한 서방 교회들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 즉 그리이스 정교, 러시아 정교 등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
이 신조에서 주목을 끄는 귀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동시에 "유일하신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곧 아버지라고 해서 아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주"이시요 같은 하나님이다.
둘째, 성부는 불가견적이고 성자는 가견적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그노시스 이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터툴리안보다도 일보 진보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처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성경대로 말한 것이다(골 1:16).
셋째,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라고 하지 않고 "보이는 모든 것"( )을 창조하셨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음 받음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로고스( )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터툴리안까지만 해도 로고스의 영원 전(前) 존재에 대한 사색을 했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전혀 없고 로고스라는 용어까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아들이 말씀이심을 부인코자 함이 아니고 스토아 철학이나 누스( ) 혹은 무인격적 사유나 논리와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조한 점이다. 홀로 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성부에게서 나셨다고 한 후, 홀로 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성부와도 다르고, 성령과도 다른 위격임을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독생하심은 성부와 성령에게 없고 성자에게만 있는 특성이다. 이로서 사벨리우스의 동질동격설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다.
여섯째, 이 독생하심이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는 것, 즉 신성의 근원이 성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 '는 근원을 의미한다. "성부에게서" 독생하셨다고만 하다가 이것을 다시 헤석하여 성부의 "본질로부터"라고 한 것은 본질은 불가분리하나 위격은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일곱째,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은 무에서 지음 받은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것, 그러나 보통 흔히 재판장에게도 붙여지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를 할 우려가 잇었음인지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라고 덧붙여서 피조물이 아님을 완전히 못박았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피조설을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여덟째, 피조물이기는 커녕 오히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을 강조하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이것만 고백해도 충분하나, "성부와 동일본질"이란 말을 덧붙인 것은 니케아 신조 전체의 상징(symbol)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모호하고 비전문적인 단어이어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장차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다시 말해, 본질의 동일성을 어떠한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오리겐이 의미하는 바대로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오리겐이 단일신론자들을 반박하면서 주장했던 대로 성부와 성자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구별되지만 본질의 동일성으로는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본질의 숫자적인 동일성의 의미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하는가?
오랫동안 니케아의 결정은 두 번째의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경우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은 신성의 각 위격들이 공통적인 신적 존재로서 하나임을 뜻한다. 이러한 해석은 후기 정통 이해와 일치하지만, 이 표현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와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3세기 신학자들 사이에서 동일본질이란 "똑같은 본질"을 의미했다. 이 때까지는 숫자적인 동일성이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에서 갑자기 그리고 준비도 없이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는 추측할 수 없다.
니케아 회의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다"는 표현을 강조하였으며 결국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회의는 신성의 통일성과 각 위격의 독특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일종의 반신(Demigod)으로 만들었던 아리우스와 그의 주장들에 대한 반대로서 아들의 완전한 신성을 주장하려고 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인하여 교회가 약 120년간 연단을 받은 후 계속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집약된 신앙고백으로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만 배격한 것이 아니고 오리겐주의의 종속설도 완전히 극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조는 세 위격,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이 정죄만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결정적으로 정죄하기까지는 또 다시 5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친 논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의 신성 문제는 다루지 아니했으며, 후미(後尾)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문을 포함하면서 맺고 있다.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부 감독들이 니케아 신앙 형식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고 또한 황실의 정책이 돌변하는 데, 즉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이 모든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데 있었다. 니케아 결정 사항에 대한 감독들의 불만은 일찍부터 예상하던 대로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주안점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해석한 아리우스주의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회집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언급되지 않은 채 아리우스만 정죄했던 신앙형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로 돌아와서 실정을 살펴보니까 아리우스주의는 아직까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되고 사벨리우스주의가 여전히 골치거리로 성가시게 굴자, 회의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니케아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함으로 파급된 관심사는 서로 다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오리겐 우파,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반(反)오리겐주의 일파들, 그리고 서방세계의 반(反)사색적 관심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동맹관계로 아리우스주의의 사색에 대항해서 서로 이해관계 없이 뭉치게 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의 개별적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뛰어난 정략가로서, 교회 고문 자리에서 해임된 호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킨 행위로 유배를 당한 유세비우스는 감정을 억누른 콘스탄틴의 부름을 다시 받으면서 아리우스 반대 세력 제거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황실 고문 유세비우스의 용의주도한 반대파 제거 계획은 특히 세 인물에게 초점 맞추어졌다.
유세비우스가 벌인 공세에 희생당한 첫 번째 사람은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였다. 그는 오리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던 인물로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단일신론자로 공식적인 고소를 당했었다. 유스타티우스가 교회 평화의 파괴자이고,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게 가혹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고문들로부터 전해 들은 콘스탄틴은 330년경 안디옥에서 오리겐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교회회의가 그를 폐위하도록 묵인하였고, 그를 트라케로 귀양보냄으로써 그 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그 다음 희생자는 328년 알렉산더의 사망으로 그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였다. 결연하고 요지부동한 니케아 신조 옹호자이자 전임 감독 알렉산더의 대변자로 대변자로 자임한 아다나시우스는 과거에 멜리티우스파들을 다룰 때, 그리고 이집트 교회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때 사용한 강압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비판의 포문을 열였다. 335년 아다나시우스는 철저히 신학적인 정적들로 구성된 두로 교회회의에 소환당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죄목들 중에서 아르세니우스(Arsenius)라는 멜리티우스파 감독에 대해 살해를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였다. 이 고소 내용은 거짓이었지만 (아다나시우스는 아르세니우스를 폐위하였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후임자로서는 그러한 교회회의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직접 황제를 만나 호소하기 위해 두로를 몰래 빠져 나왔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호소도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아다니시우스가 수도에 대한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했으며, 그 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독일의 트리어로 귀양보냈다. 바로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귀양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또 다른 반(反)오리겐주의자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를 폐위하고 귀양보내는 일이었다. 그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며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동방 감독이었으나 단일신론적 경향을 분명하게 지님으로써 쉽게 정죄받고 말았다.
이상 요약하면, 330년부터 7년 후 콘스탄틴이 죽는 때까지 니케아 회의의 옹호자들은 빈번히 패했다.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이론이 사벨리우스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니케아파의 패배는 콘스탄틴 자신이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손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맏아들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는 주로 영국, 갈리아,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를 차지했다.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콘스탄스는 338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시켰다. 33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로 약 백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
340년 장자 콘스탄틴 2세가 막내 동생 콘스탄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여 전사하자 콘스탄스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제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동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서방의 통치자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의 통치자가 되자 아다나시우스는 두 번째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되었다(339년 혹은 340년).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재기를 노리는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 구축에 나섰다. 그런데 이즈음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 등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폐위한 바 있는 감독들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일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했다.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동정을 호소했고, 율리우스는 340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에 대한 페위조치의 부당함을 공포하였다.
자기들이 요청한 교회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동방교회 지도자들, 특히 동방에서 세력을 장악한 반(半)아리우스파는 341년에 안디옥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 97명의 감독들은 모여서 네 개의 신조를 발표했는데,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회피하였다. 안디옥 회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공식적인 교리적 반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회의였다.
반(半)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는 지루한 논쟁을 해결해 보고자 343년에 현재의 소피아에 해당하는 사르디카(Sardica)에서 동서방을 다 포함한 대규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 서방의 감독들이 주종을 이룬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고, 동방측은 아다나시우스의 감독 복직,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 중단이라는 화해안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일부 동방의 감독들이 사르디카 회의에 폐위된 감독 아다나시우스가 참석한 데 반발하여 사르디카 근처에 있는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에서 별도의 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선언한 감독들에게 강한 분개심을 표현하였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콘스탄스의 압력에 의해서 346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350년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는 왕위찬탈자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53년부터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361년까지 8년 동안은 니케아파의 철저한 패배기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Valens)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이어 황제 고문에 위촉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취한 첫 버째 조치는 아다나시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351년 시르미움(Sirmium) 회의, 353년 알레스(Arles) 회의, 355년에 밀라노(Milan) 회의 등의 일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는 감독들에게 아다나시우스를 포기하고 동방 교회들과 충분한 교제를 재개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니케아파 감독들을 폐위 혹은 추방시키고 반아리우스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아다나시우스도 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추방이었다. 그는 감독직에서 쫒겨난 뒤 6년 동안 이집트 오지의 수사(修士)들 틈에 피신해 있었다. 황제는 반대자들을 처리한 뒤 아리우스파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교리 문제에 손을 댔다. 357년 시르미움(Sirmium) 황궁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실재'(substantia), '본질'(ousia), '동일본질'(homoousios) 같은 성경에 없는 용어들과, 또는 성자가 "성부께 종속된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을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배척하고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에 여지를 남겨 준 것으로, 갈리아의 감독 포이바디우스(Poebadius)가 붙인 명칭대로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런데 아리우스 지지자들의 내부에도 두 파로 분열되어 다투기 시작했다. 좀더 온건한 우익파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Homoiousios)임을 주장했다. 이들 가운데 사실상 니케아 신조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는 양태론적인 냄새를 너무나 풍긴다고 하여 유사본질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이들은 니케아 종교 회의 이후 좀더 온건해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342년 사망)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세비우스파"(Eusebians)라고 불리기도 하고, "반아리우스파"(Semi-Arians)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키라의 바실(Basil of Ancyra)과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Gregory of Laodicea)가 반아리우스파의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좀더 과격한 좌익파는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不同, Anomoios)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였다. 이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에서 발생을 주장하는 파"(Exukontians)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안디옥의 감독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안디옥의 집사 아에티우스(Aetius)가 이런 주장을 했고, 특히 시지쿠스의 감독 유노미우스(Eunomius of Cyzicus)가 이 사상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유노미우스파(Eunomians)라고도 불리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12권의 책을 저술함으로 유노미우스의 사상을 심층분석하여 반박했다.
이 두 파는 자체 내에서 일어난 분열을 치료해 보고자 358년부터 360년 사이에 여섯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열었으나 해결점을 얻지 못했다. 콘스탄티우스는 권력을 이용해서 해결해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이즈음 아다나시우스는 박해의 와중에서도 니케아에서 사용한 '동일본질'을 변호하였는데, 아다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며, 비록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을 무엇이든 성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속성상의 불변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과 안키라의 바실 학파가 주장한 '호모이우시오스' 교리 사이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제휴는 이루어졌고, 이것은 아리우스주의를 타파하는 데 그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이 즈음에 아리우스 논쟁은 또 다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촌 율리안(Julian)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콘스탄티우스 사후 황제가 된 줄리안은 플라톤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안에 헬라의 이교 사상을 다시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를 도입한 것이 콘스탄틴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방 종교를 다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기독교인들끼리는 서로 다툼이나 하다가 망하라는 의미로 대립하고 있던 감독들을 모두 용인했다. 그래서 362년 추방되었던 아다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줄리안은 아다나시우스를 "이방신들의 원수"라고 하며 다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네 번째 추방이었다. 줄리안은 361년부터 363년까지 두 해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역사 속에서 '배교자 줄리안'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줄리안 사후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율리안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우스의 지원을 받던 아리우스파는 세력의 약화를 겪었다. 아다나시우스가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유사본질파에게 화해를 제안한 것도 그 한몫을 했다. 그가 제시한 화해안은, 먼저 동방 보수주의자들의 구호인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삼신'(三神) 또는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들'을 뜻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그 다음에 '호모우시오스'가 '본질의 동등'을 뜻하되 성부, 로고스, 성령이 구분된다는 진리를 부정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회회의는 아울러 성령도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갖고 계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로써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 아래 공포하기를, 분파들의 화해 조건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니케아의 거룩한 교부들이 고백했던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줄리안의 후계자인 죠비안 황제(Jovian, 363-364)는 다양한 기독교 분파에 대해서 관용 정책을 썼다. 죠비안의 사후에 통치권은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I)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동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아우인 발렌스(Valens, 364-378)에게 동방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발렌스는 니케아파를 완강하게 적대하여 365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추방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아다니시우스는 이듬해에 발렌스의 후계자 그라티안(Gratian)에 의해 다시 직분이 회복되었고,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과 투쟁하다가 373년에 사망하였다.
아다나시우스가 죽을 무렵에는 아리우스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지적-정치적 지도권이 이른바 '신니케아파'(new Nicene)라는 새로운 집단에게로 넘어갔다. 이 파의 주역들은 '세 명의 위대한 캅바도키아 교부들' 즉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이다.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옛' 니케아파와 호모이우시오스파로 대표되는 동방전승에 대해 이루어 놓은 화해의 열쇠는 '본질'(ousia)과 '본체'(hypostasis)라는 단어의 뜻을 조심스럽게 구분한 데 있었다.
이 두 단어는 철학적 문헌 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서도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본질(substantia)로 번역되었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서 본체(hypostasis)는 사물의 개별적 존재를 언급하는 뜻으로, 본질(ousia)은 같은 종류의 모든 개체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로 분리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안에 세 개의 본체(hypostasis)가 있으나 한 본질(ousia)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세 개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신 존재 또는 본질의 통일성은 신의 행위 또는 작용의 통일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세 '위격'이 서로 다른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독특한 방법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모든 신적인 행위에 세 위격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였다. 위격들을 서로 구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 각각 한 신성의 원천(source), 출생(offspring), 발출(procession)로서 -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성령의 신성을 분명히 한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니케아파 내에서도 아리우스주의의 상이 본질에 지나치게 반동하다가 다른편 극단인 양태론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안키라의 감독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그의 제자이자 안키라의 집사였던 포티누스(Potinus)는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졌다. 이들은 로고스와 성자를 구별하여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 하였고,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여 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자로서 구속 사역을 다 마치면 로고스는 다시 성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성자의 발생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는 성육신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원발생설을 부인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과는 정반대되는 전제에서 시작했으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자직은 임식직으로 생각했고, 로고스와 성령은 위격적인 의미가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신성의 다양한 표현이라 함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양태론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파는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이 결합된 형태의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또 다른 이단 사상에 빠졌다. 인간 구성의 삼분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는 영만이 로고스의 영을 취했고, 혼과 육은 인간의 혼과 육을 취했다고 하였다. 영이 죄의 자리인데,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의 영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아폴리나리우스 사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고 결국은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니케아파조차도 처음에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라우스파나 반아리우스파는 성령의 신성을 처음부터 부인하였다. 특히 반아리우스파에 속하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세도니우스(Macedonius)는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령론]을 저술하여 마세도니우스 사상을 공박했다.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세도니우스파"(Macedonians) 혹은 "성령훼방론자"(Pneumatomachi)라고 불렀다.
결국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리우스주의, 반아리우스주의, 마르셀루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마세도니우스파 등의 이단적 사상과의 투쟁 속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발렌스 황제 이후의 황제들은 대체로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발렌티니안 1세의 아들 그라티안(Gratian, 375-383)은 발렌스의 사후(378)에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라티안은 동방을 효울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를 동방 통치자로 임명했다. 데오도시우스1세는 급한 성격으로 인해 암브로스(Ambrose)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기독교를 국교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제국 내의 모든 이단과 이방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는 이런 동기에서 데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서방 교회 감독들은 참석치 아니했으나 동방 교회 감독들은 약 150명 참석하였다. 이 중 36명은 반아리우스주의인 마케도니아파 곧 성령 훼방론자들이었다.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325년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와 381년에 작성된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기본 내용을 같이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니케아 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삭제된 내용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니케아 신조>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니케아-콘스탄티노믈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게아 신조를 기본으로 하되 확대된 부분도 있고 삭제된 부분도 있다. 니케아 신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이 두 신조의 형식상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니케아 신조에 "성부의 본질( )로부터 태어나신"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생략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확실치 않은 철학 용어를 삽입함으로 공연히 물의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표현과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으로도 성경의 진리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반드시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니케아 신조에 있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탈락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건재함으로 사실상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제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니케아 신조에 없던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성부에게서 태어나셨고"라는 말 가운데 삽입시켰다. 이는 성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존재론적 추리방식을 포기하고 형상적 표현방식으로 대치한 것이다.
넷째, 기독론 마지막 부분에 니케아 신조에 없는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는 문구를 삽입했는데, 이는 로고스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한 안키라의 마르셀루스의 가르침을 배격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종말 완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인격성이 완전히 보존된다. 이로써 교리적 진술이 바울의 단일 진술, 곧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고전 15:24-28)라는 진술 위에 승리하게 된다.
다섯째, 니케아 신조에서 너무나 간단한 고백("성령을 믿노라")으로 그친 성령론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성숙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1)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 "은 주권자 곧 피조물과는 구별된다. "거룩한 영"이라고만 하여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거룩"이 그 본성이므로 신(神)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위에 "주" 혹은 "하나님"이란 말이 덧붙여져서 더욱 강조되었다.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영의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성부와 성자와 동질(同質)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넘침과 같이 성령 안에 생명이 넘친다. 생명의 영이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에게 생기를 주시며,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일시에 다시 살리신다. 3)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란 성령이 주권자요 생명의 수여자로되, 독자적인 신성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분임을 말해 준다. 4)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란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완전히 동질일 뿐 아니라 동등(同等)임을 결정적으로 단언한 것으로서, 성령 자신이 다른 두 분과 함께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5)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란 말씀하신 이가 성령이라는 뜻으로서, 구약에 항속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섯째, 성령 발출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점만을 밝히고 성자와의 관계는 침묵하였으므로 후대 동서방 교회 간에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아들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는 589년 스페인의 톨레도(Toledo) 종교 회의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교황 니콜라스 1세(858년) 때부터 전 서방교회에서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에서도 인정되는 교리가 되었다.
일곱째,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경대로"라는 귀절을 삽입함으로써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전통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더욱 높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아울러 그 내용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들의 "신앙의 규율"의 내용을 니케아 신조보다 더욱 많이 반영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한 저주문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와서 삭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한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문구 속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첨가시켰으며, 구원의 길로서 "죄 사함을 통한 세례"를, 그리고 내세와 과련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을 추가하였다.
이로써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여러 이단들을 정죄하였다. 과격한 아리우스파로서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Anomoios)을 주장한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아에티우스(Aetius), 유노미우스(Eunomi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마세도니우스(Macedonius)와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ans)을 정죄하였다. 또한 순수 양태론을 가르친 사베리우스(Sabellius)파를 정죄하였으며, 그리고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져 로고스를 성부의 계시방식으로 본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포티누스(Potin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어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를 정죄하였다.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공존하다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로는 점차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보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니케아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이본질'로 일단락 지어졌다가, 니케아 이후에 계속된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이 문제로 부각되면서 삼위일체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런 면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회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에 있어서의 일치와 위격에 있어서의 명확한 구별이 정통 교리로 선언되면서, 상이본질론, 유사본질론, 양태론, 성령훼방론, 종속설 등 모든 이단들이 정죄되었다. 아을러 성자의 불완전한 인성을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도 극복하였다.
그러나 본질의 일치성이 숫자적 일치성이냐 총칭적인 일치성이냐 하는 문제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완성된 것이냐 아니면 미완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 그리고 성령의 발출이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선언했는데, 성자로부터의 발출을 내포한 것이냐 배제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후대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하라. 그러면 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라. 그러면 네 영혼을 잃을 것이다"라는 격언이 시사한 바대로, 신비의 영역을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온전히 파헤치려는 교만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비교할 때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내세론의 면에서 크게 진보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크게 인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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