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 | 월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 1494-1536)이 번역한 영어 신약성경을 영국에 소개하다. |
1536 | 헨리 8세와 국회, 영국 교회와 로마 교회를 분리하다 |
1547 | 에드워드 6세 왕위에 오르다. 영국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이 극적으로 불붙다. |
1553 | 로마 가톨릭인 메리가 여왕에 즉위하다. 영국 청교도들 300명이 순교를 당하다. 800명이 대륙으로 망명하다. 거기서 대륙 종교 개혁자들의 교리적 진수를 흡수하다. |
1558 | 엘리자베스 1세 즉위하다. 엘리자베스의 중재안을 내놓다. 청교도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개혁안은 아니었다. |
1559 |
국교령이 공표되고 영국 교회의 기도 집이 공 예배 공식 문서로 채택되다. 이 기도집 사용을 거부하거나 비방하는 자를 범법자로 규정하다. 그런데 청교도들을 사용을 거부하였다. |
1567-1568 | 오랫동안 영국 교회 내에서 논쟁의 제목이었던 성복(옷) 시비 절정에 이르다. 교회 예배시 설교자가 지정된 복식을 착용해야 하는지 즉각 질문이 쏟아지다. 이것은 국교회 안에서 벌어진 의식, 제의, 그리고 예배 예식에 관한 치졸한 논쟁을 짐작하게 하는 단면에 불과하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청교도들은 "반쯤밖에 개혁 안 된" 교회에 대해 더 심한 염증을 느끼다. |
1569-1570 | 캠브리지 교수 토머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ight, 1535-1603), 사도행전 1, 2장을 강론하면서 영국성공회에 반기를 들다(그 결과 해직당하다). 그는 이 강론에서 단순질박한 그리스도교와 장로교적 교회 정치 형태를 주장하다. |
1583 | 존 휘트기프트(John Whitgift,),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다. 영국 국교회식의 예배 의식에 순응할 것을 명령하다. 청교도 비국교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반대를 확산시키다. |
1603 | 제임스 1세 즉위하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으로 들뜨다. 1604년 그들의 소청을 제출하기 위해 햄프턴 궁 대회에서 새 왕을 알현하다. 그러나 왕은 "국외로 추방시켜버리든지, 아니면 그 이상도 불사하겠노라"고 위협하다. |
1618 | 청교도들의 안식일 준수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운동경기서(the book of Sports) 출간되다(1633년 개정). 이 책은 주일 오후에도 운동 경기를 즐길 수 있다고 권장하다. 토머스 풀러(Thomas Fuller) 같은 사학자는 이 책이 영국 내전을 부른 뚜렷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지목하다. |
1620 | 청교도 분리주의자들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순례자 식민지를 세우다. |
1625 | 청교도들에게 냉담했던 찰스 1세가 왕이 되다. |
1628 | 월리 엄 로드(William Laud)가 런던 주교가 되다(이어 1633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다) 비국교주의자들을 영국 국교회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냉혹한 조치를 취하다. 로드의 억압은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다. |
1630 | 존 윈스롭(John Winthrop)이 많은 청교도들을 이끌고 일차 매사추세츠 만으로 떠나다. |
1636 | 하버드 대학 설립 |
1640 | 찰스 1세 의회 소집하다. 장기 국회(Long Parliament),왕의 권한에 제동을 걸다. 뉴잉글랜드 행 이민이 전체적으로 뜸해지다. |
1643 ~1464 | 의회가 소집한 종교 회의인 웨스트민스터 총회(Westminster Assembly)가 교회 정책과 교리에 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자문 위원회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모이다. 여기서 예배 모범(Directory of worship),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대요리 문답서(Larger Catechism), 소요리 문답서(Shorter Catechism) 등을 마련하다. |
1645~1646 | 올리버 크롬웰의 국회군이 왕의 군대를 무찌르고 내전을 종식시키다. |
1646 | 영국에서 감독제 교회 정치가 폐지되다. |
1647 | 군대가 풋니(Putney)라는 곳에서 어떻게 투표를 일반에게 확대할 것인가를 놓고 난상 토론을 벌이다. |
1649 | 찰스 1세 처형당하다. 이때부터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죽을 때까지 영국 통치자로 자처하다. 크롬웰은 호국경(護國卿)으로서 교회와 국가에 청교도 사상을 심으려고 노력하다. 1660 찰스 2세가 즉위함에 따라 영국에 왕정이 복고 되고, 영국 교회에 감독제가 재정착되다. |
1662 | 새로운 통일령이 공포됨으로 개정된 영국 국교회 공동기도문(Anglican Book of Common Prayer)의 시행이 강화되다. 2천 여 명이 넘는 청교도 목사들이 사퇴하거나 쫓겨나다. 비국교도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학위를 딸 수 없게 되다. 이 결과 많은 비국교도 학원들이 설립되다. |
1688 | 월리엄과 메리가 영국의 왕과 여왕으로 공포되고,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 일어남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하고 독립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다시 주다. |
출처 :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 "청교도 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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