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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설교가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

by 【고동엽】 2021. 11. 16.

청교도 설교가 근대사회에 미친 영향

 

박명수/서울신대 교회사 교수

 

청교도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청교도 운동이란 참된 기독교는 신약성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신념에서 시작된 신앙운동이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는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지향한 운동이다. 기독교의 역사상 수많은 운동들이 순수한 신앙공동체를 목적으로 하고 나타났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청교도운동 역시 16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18세기 초에는 막을 내렸지만 기독교 역사상 순수한 교회에 대한 열정이이만큼 꽃피운 예가 드물다.


청교도운동의 특색은 순수한 교회만을 지향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신앙의 원칙이 사회 속에서도 나타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운동들은 자신들을 세상과 분리시켜 자기들만을 순수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원칙을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시키려고 노력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변두리에서 분파적인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성공회를 청교도식으로 개혁하고자 하였고, 미국으로 이민와서는 미국사회를 완전히 청교도 사회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그렇게 노력하였다.


청교도들이 그들이 바라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도구는 설교였다.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했을 뿐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기독교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가를 외쳤다. 따라서 청교도의 설교는 한편으로는 가장 복음적인 설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시사적인 메시지였다. 페리 밀러(Perry Miller)의 주장에 의하면 청교도에 있어서 설교란 오늘날에 있어서의 신문과 같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거기에 대한 해석을 듣는 것처럼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그 당시 사회문제에 대한 해석을 들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의 설교는 그 당시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감당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청교도운동에서 설교의 위치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아울러서 청교도들의 사회, 경제, 과학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고자 한다.

청교도와 설교

개신교회들 가운데서도 설교를 목회의 핵심으로 가장 많이 강조한 사람들이 바로 청교도들이다. 청교도신앙의 핵심은 회심이다.1


청교도는 영국 성공회의 명목적인 신앙에 반대하여, 진정한 신앙인은 인간의 죄성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죄에서 벗어나 참된 구원에 이르는 전환점이 회개이며 이것이 청교도신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회심을 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설교라는 것이다. 심프슨(Alan Simpson)은 청교도에게 있어서 인간을 회개케 하는 은총의 수단은 다름이 아닌 설교라고 말하였다.2


신자는 설교를 통하여 인간의 죄성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회심하기 때문이다. 청교도 뿐만이 아니라 회심이 강조되는 만큼, 또한 교회의 순수성도 강조된다. 이것은 청교도의 성경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성공회는 성경이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되지 못하고 단지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만 대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성경은 많은 부분이 모호하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모호한 부분을 판단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 외에는 성경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성공회는 많은 비성경적인 제도와 관습을 용인하려고 했다. 여기에 비해서 청교도는 다른 생각을 가졌다. 성경은 구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준다고 믿었다.


특별히 청교도가 영국 성공회와 큰 차이점을 가졌던 부분은 교회의 제도에 관한 부분이다. 성공회는 성경에 교회의 제도에 관하여 일관된 언급이 없기 때문에 교회제도는 인간의 이성의 판단에 의하여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된 반면에 청교도는 성경, 특히 신약이 현재 교회의 모델이 되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청교도는 인간의 이성을 불신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에 의지하기 보다는 성경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3


청교도 설교는 성서적인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청교도는 처음부터 천주교의 오류는 성경에 무지한 데서 출발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성서를 바로 알려면 어떻해야 하는가?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이다. 개신교, 특별히 칼빈주의적인 개혁교회는 "오직 성서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원칙에 충실하였고, 성경을 모르고서는 개신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을 알려면 문자를 읽어야 하고, 따라서 청교도는 처음부터 문자를 읽게 하기 위해서 학교를 세웠다. 사실 문자의 위력은 인쇄매체의 등장과 더불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잘 활용한 것이 청교도들이다. 청교도들은 사단은 무지를 통해서 역사한다고 생각하였고, 천주교적인 미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자를 교육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는 하나님께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문자를 만드셨다고 말하면서 "종교에 대한 관심과 좋은 책은 흥망성쇠를 같이 한다“고 주장하였다4


삶의 최종적인 권위가 성경에 있다면 가장 훌륭한 설교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서에 씌여진 고전어를 잘 알아야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성직자는 필수적으로 성서가 씌여진 고전어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성서의 본래의 뜻을 일반 평신도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인문교육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바로 이것이 보스톤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일찍이 하버드대학을 세워야 했던 이유이다. 즉 교육받은 성직자가 없이는 성경을 바로 해석할 수 없고, 그렇게 될 때 청교도의 신앙적인 원리는 충분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평신도들은 이런 성직자들의 설교를 진지하게 들었다. 보통 청교도의 설교는 2~3시간씩 걸리는 것이었지만 이 설교를 통해서 구원의 도리와 삶의 지침을 배웠던 것이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총

청교도의 설교는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교도의 설교가 단순하게 교리의 나열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잘못이다. 청교도들은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예정과 같은 교리적인 내용을 가르쳤지만 이것을 학문의 용어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설교로서 가르쳤다.


페리 밀러는 청교도들이 외친 설교의 언어는 신학교과서의 용어가 아니라 거리의 언어요, 시장의 언어라고 주장한다. 칼빈주의 신학 체계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요,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청교도 설교자들은 이것을 생생한 거리의 언어로 바꾸어 놓았다. 청교도인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5

여러분들은 개가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인이 왔을 때에도 주인이 먹을 때까지, 그리고 고기를 자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부두막에서 한 조각의 고기도 먹어서는 안됩니다. 주인이 모든 일을 마쳤을 때에도 개는 단지 부스러기밖에 먹지 못합니다. 죄로 가득한 인간의 운명도 이와 비슷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호의적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정과 자비의 부스러기에 만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스러기를 주실 때까지 식탁 아래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청교도들의 설교는 인간의 죄성의 강조와 하나님의 은총의 필요성에 대해서 드라마틱하게 강조하였다. 청교도의 설교가 인간의 참된 회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데 회심이란 인간의 죄성을 철저하게 깨닫고 십자가의 은총 아래 머리를 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자들은 인간의 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청교도 신학자 퍼킨스(William Perkins)는 율법을 인간의 본래성을 깨닫게 하는 쇠망치에 비유하였다. 그는 이 쇠망치를 통하여 법을 깨닫고, 죄를 인식하고, 마음으로 참회를 하고 인간의 무력에 대한 좌절을 느낀다고 주장한다.6 퍼킨스는 율법이라는 바늘이 없이는 복음이라는 실이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율법을 통하여 인간의 죄악을 깨달은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묵묵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인간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이런 인간의 행위조차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져오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것이다.

청교도와 근대사회

위에서 지적한 대로 청교도들은 한편으로는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나타난 순수를 지향하는 수많은 교회와는 달리 세상과 타협하지도 분리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철저하게 회심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도 그렇게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밀톤(Milton)은 청교도인 크롬웰(Cromwell)이 먼저 자신을 정복했기 때문에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7


그 크롬웰은 그의 영혼에 가득 차 줬던 모든 헛된 소망, 두려움, 열정들을 제거하였거나 아니면 훈련에 의해서 억제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먼저 자아의 통치를 이루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가장 분명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에서 처음부터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투에 있어서 베테랑이다.


청교도들은 이런 신념 아래 기독교 역사상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 사회를 건설하여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8


이런 청교도의 사상의 배후에는 칼빈주의적인 문화관이 사로잡고 있다. 루터교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여 정치의 영역에서 종교의 판단을 배제한 반면, 칼빈은 사회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원칙을 사회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려고 했다.9


예를 들면 칼빈은 항상 제네바의 시의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회를 통치하는가를 주의깊게 관찰하였고, 잘못된 국가의 행동에 대하여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러면 칼빈주의의 후예로서 청교도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 경제, 과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라고 설교했을까?


여기에서 우선적으로 지적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진정한 근대사회는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이다.10 물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를 붕괴시키고, 근대 사회를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였다. 근대 사회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 경제, 그리고 과학에 대한 새로운 태도는 오히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로 이 시기는 청교도들이 활동하던 시기인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중세사회가 끝나고 근대사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청교도들은 어떤 공헌을 하였을까?

청교도의 사회관

청교도들의 사회관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중세적인 사회관을 갖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인 사회관을 갖고 있다. 청교도들은 중세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를 사회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종교의 선택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청교도 외의 다른 신앙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청교도 사회에서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한 사회에 두 개의 신앙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몸에 두 개의 머리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저 월리암스(Roger Williams)가 매사추세츠의 회중교회에 반대해서 침례교회를 주장하였을 때 그는 매사추세츠를 떠나서 로드 아일랜드로 이주하여야 했다. 이린 점에서 청교도 사회는 아직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청교도들은 인간을 집단적으로 이해했다. 청교도 사회에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의 욕망은 사회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통제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최소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제퍼슨(Jefferson)의 생각이나, 경제 활동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의 자유방임주의는 청교도와는 거리가 밀다. 존 코튼(John Cotton)은 "인간의 모든 측면에서 공동 사회는 혼자 있는 것보다 낮다“고 말하였다.11


트뢸치(Emest Troeltsch)는 근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서 개인주의를 들고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청교도들은 아직도 중세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들의 사상에는 근대 시민 사회의 뿌리가 되는 중요한 개념들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통치권력에 대한 제한이다. 청교도들은 원래부터 박해받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가권력의 남용에 대해서 민감하였다. 청교도들은 이런 국가권력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을 내렸다. 기독교의 정통신학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아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즉 국가의 기원은 인간의 타락에 있다 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일반 백성뿐만이 아니라 지배자에게도 해당되며 지배자의 욕망은 더 엄청나기 때문에 적절하게 견제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통치자 권력의 견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것은 근대 민주시책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코튼은 “땅에 있는 모든 권력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2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은 계약사상이다. 청교도 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에서 유래하지만 청교도들은 이 계약사상을 사회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했다. 청교도들은 계약을 은혜의 계약과 율법의 계약으로 나누고, 은혜의 계약은 구원을 위한 계약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약이지만, 율법의 계약은 일반사회를 위한 계약으로서 쌍방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합의된 내용에 의해서 다스려져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국가의 통치는 통치자의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진 계약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 만일 통치자가 이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통치자의 정당성은 사라진다.


청교도 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진정한 시민은 거듭난 신자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죄 아래 있는 존재이며, 타락한 그대로의 자연인은 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진정으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연인이 아니라 중생한 신자이며, 중생한 신자만이 청교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청교도 사회는 원래 칼빈이 꿈꾸었던 신정정치를 구현하여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원칙은 이상적이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중생한 신자 대신에 세금을 내는 시민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지는 일반 사회로 바뀌어지고 말았다.13

청교도의 경제관

청교도들은 인간의 모든 삶 가운데 신앙의 원칙에서 제외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중세사회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행동이 종교적인 재가를 받아야 하듯이, 청교도 사회에서도 그렇다. 이런 점에서 청교도들은 중세 사회와 같이 신앙이 사회의 기본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청교도가 근대적인 경제 발전에 공헌한 것은 인간의 경제행위에 대한 재해석이다. 중세 사회는 농업에 근거한 사회였으며, 노동이 사회의 중요한 요소였다. 여기에서 상업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부도덕한 행위로 보았고, 더욱이 이자를 받는 행위는 신자가 마땅히 피해야 할 죄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후에 국제적인 무역이 발전하였고, 이것은 금융업과 상업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런 금융업과 상업은 새로이 생긴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이때에 새로 부상한 상인 계층을 대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이 칼빈이다. 칼빈은 농업사회에서 땅을 빌려주고 지대를 받는 것과 상업사회에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새로 부상하는 상업사회에 신학적인 정당성을 제공하여 주었다.14


청교도는 이런 칼빈의 정신을 계승하고있다. 사실 청교도들 대부분은 봉건영주나 농민계급이 아니라 16세기 17세기에 걸쳐서 새롭게 부상한 시민계급이며, 이들의 주요 직업은 상업이었다. 중세사회는 청빈의 윤리를 강조하여 돈 버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였다. 그러나 청교도 사회에서는 돈 버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열심히 일해서 부요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은 항상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청교도들은 구원받은 신도들은 성실하게 살아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부요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경제적인 부요를 하나님의 축복이며, 구원받은 증표라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15


그러나 청교도들이 경제적인 부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인간이 욕망의 동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의 무절제한 경제적 욕구는 제한되어야 하며, 건전한 상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청교도들은 무조건 상행위를 비판하는 천주교적인 자세에서 서 벗어나서 어떤 상행위가 건전한가를 생각하였다.


이것은 청교도의 대표적인 학자인 윌리엄 아메스(William Ames)의 「양심론」에서 잘 드러난다. 에임즈는 대금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정당한 이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차용자만이 일방적으로 모든 위험을 부담하는 제도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차용자와 대부자가 같이 위험을 부담하는 제도가 이상적인 제도라고 말하였다. 또한 그는 판매의 원칙에 대해서도 신앙의 원칙을 지킬 것을 말하였다. 그는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관행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죄악이다”고 말하면서 구매자의 어려운 입장을 이용해서 비싸게 팔아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16


청교도는 경제적인 행위는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비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해야 하되 책임을 져야하는 책임적인 행위라고 생각하였다. 즉 부요한 것은 좋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그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청교도와 근대과학

청교도는 근대시민사회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과학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근대과학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서 비로소 발전하게 되었는데 바로 이 때가 청교도들이 활동하던 때이다.


그러면 청교도의 무엇이 근대과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적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성서적인 창조관이다. 중세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을 살아있어서 스스로 움직이는 유기체로 생각하였고, 신도 인간도 그 자연의 법칙 아래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인간이 자연물 연구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불가능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청교도들은 자연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로 보았고, 인간을 그 피조물의 관리자로 인식하였다. 여기에서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관리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연구와 개발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서적인 창조관이 근대과학의 발전에 근본적인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청교도가 근대과학에 미친 또 다른 요소는 노동에 대한 태도이다. 고대 그리이스에서는 인간이 본래성을 찾으려면 여가를 즐겨야 하고, 따라서 노동은 노예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노동은 노예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노동을 천박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안식일을 강조하면서 엿새동안 열심히 일할 것을 권했다. 그들은 예수가 목수의 아들임을 언급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을 찬양하였다. 청교도신학자인 퍼킨스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유익을 위해서 행해지는 수공업은 행정관이나 성직자 못지 않게 축복된 직업이라고 생각하였다.17


이런 태도는 이성의 사변이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실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근대과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청교도들이 근대과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자연에 대한 태도에서이다. 칼빈의 후예로서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연이라는 책을 통하여 창조질서를, 성서라는 책을 통하여 구원의 질서를 보여 주셨다고 믿었다. 개신교는 중세의 잘못된 인위적인 교리에 대하여 성서로 돌아갈 것을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청교도 과학자들은 중세의 잘못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으로 겸손히 돌아가서 거기에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교도인 토마스 스프랫(Thomas Sprat)은 이런 점에서 개신교와 근대과학은 같은 성격을 가진다고 보았다. 스프랫은 양자 모두 "엉터리 사본을 내어 버리고 배움을 위해 완전한 원본으로 향하였으니 전자는 성서요, 후자는 자연이라는 피조물이다"고 말하였다.18
즉 근대과학은 신학자가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섭리를 찾으려고 노력한 것처럼, 과학자가 자연을 통하여 창조섭리를 찾으려는 자세에서 시작되었다.

오늘의 설교를 위한 청교도의 교훈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삶 전체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보다도 청교도신앙의 핵심은 회심이다. 청교도신앙은 인간의 죄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맡기는 회심이 핵심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자아의 회심은 사회에도, 경제에도, 과학에도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청교도의 신앙은 결코 오늘날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도피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고, 그것을 실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청교도 신앙을 구체화시키는 도구가 바로 설교였다. 설교를 통해서 청교도들 은 회심을 경험하고, 설교를 통해서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배웠다. 오늘날의 설교가 신앙의 문제만 언급하고, 신자의 세속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청교도의 하나님은 주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일주일 전체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하셨다.


지금 우리는 청교도들이 살고 있던 16,17세기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사회도 경제도 과학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청교도들이 가졌던 신앙, '진정한 신자는 철저한 회심을 경험해야 하며, 회심한 신자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 다'는 청교도적인 자세는 계속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을 외치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이다.



1.여기에 대해서는 본인의 논문. "청교도 신학과 회심", 「회심」, 홍성철 편저(서울:도서출판 세복,1994),63-87를 참조하시오
2. Alan Simpson, Puritanism in Old and New England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4.
3. Perry Miller and Thomas H. Johnson, The Puritans, 2vols(New York: harper and Borther,1963),I:55.
4.Increase Mather, A Discourse Concerning The Danger of Apostacy(Boston: 1679), 101; Miller and Jhonson, The Puritanism, I;21에서 재인용. cf. David D. Hall, Worlds of World, Days of Judgement: Popular Religious Belief in Early New England(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0), Chapter 1, The Use of literacy.
5. Thomas Hooker, The Soules Humiliation(London: 1638), 127; Miller and Johnson, The Puritanism, I: 282에서 재인용.
6. William Perkins, "Golden Chaine," The Works of that Famous and Worthy Minister of Christ in the University of Cambridge(London: 1631), I:76
7. John Milton, "The second Defence of the People of England, "The Prose Works of John Milton, ed. J. A St. John(London: G. Bell& Sons, 1910), I:286, Cf. Simpson, The Puritanism in Old and New England, 6.
8. Ibid., 17.
9. W. Stanford Reid(ed.), (ed.)「칼빈이 서양에 미친 영향」, 홍치모, 이영혼 옮김(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15~33.
10. Miller and Johnson, The Puritanism, I:181.
11, John Cotton, A Briefed Exposition …upon …Ecclesiastics(London: 1964), 85, Miller and Johnson, The Puritanism, I:183
12. Miller and Johnson, The Puritanism, I:187.
13.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하시오: Puritan Idea(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63).
14. Botulism, John Calvin, 191~203
15. R. H. Tawney,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김종철역,(서울:한길사, 1983), 205~220.
16.Ibid.,227.
17. Hooykaas,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127
18. Ibid.,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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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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