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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운동과 한국 장로교회

by 【고동엽】 2021. 11. 16.
청교도운동과 한국 장로교회
김 영 재 (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교수)

1. 청교도의 신앙 전통과 청교도의 경건

한국 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에서 온 선교사들이 1893년 장로교 공의회를 형성하여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장로교회들이 다 청교도의 전통에 속하며 선교사들은 그들의 후예이다. 그리고 한국 장로교는 1907년 독로회로 출범하면서 12신조를 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하는 한편, 웨스트민스터 대, 소 요리문답을 성경과 교리문답을 위한 책으로 채택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채택은 한국 장로교회가 성장한 이후에 스스로 결정할 숙제로 남겨두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목사 장립에서 웨스트민스터를 신조로 받는다는 서약을 하게 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여러 분립된 장로교회들이 으레 교회의 신앙고백서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거나 총회의 결의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교회가 주일 성수를 강조한 것은 청교도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오늘에 와서는 장로교 내에서도 많이 해이해지고 있는 것은 유감이다. 한국 교회가 주초(酒草)를 금하게 된 것도 청교도적인 영향이라고 말하나 청교도들이 일반적으로 다 주초를 금기시하는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은 청교도뿐만 아니라 경건주의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므로 한국 교회도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복음적인 교파들에게 공통적인 것이지만,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주관적인 성경해석을 지양하고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는 가운데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다. 한국 장로교는 초기부터 사경회(Bible class)를 열었으나 1960대 이후부터는 성경공부를 하는 집회의 성격이 희석화 되고 있음은 유감이다. 한국 교회의 설교가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강해 설교이기보다는 제목 설교였던 점도 반성해야 할 점이다.

한국 교회가 청교도들이 핍박을 견디면서 경건한 생활을 영위한 그런 신앙적인 자세에 대하여는 많이 언급하면서도 그들의 신앙이나 사상 내용에 관해서는 간과하는 것이 있음을 반성한다. 그것은 아마도 청교도 운동이 한 세기 반에 걸쳐 있었던 것이므로 청교도 운동에 관하여 아마도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게 된 때문일 것이다. 청교도 운동이 잉글랜드에서 1560년대부터 시작되어 1689년 명예혁명이 일어나기까지 한 세기 반에 걸쳐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본다. 1620년대부터는 미국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의 삶도 함께 고려한다.

초기 청교도들의 주요 관심사는 영국 교회 안에서 카톨릭의 잔재가 일소되는 것이었던 반면에, 17세기 때의 주요 관심사는 신학적으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반대하는 것과 사회적으로는 압제하는 세력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일이었다. 17세기 중반에 나온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깔린 신학적인 기조는 아르미니우스의 사상에 반대하는 예정론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장로교가 청교도들의 귀한 유산을 전수 받은 것이라면 청교도들이 신앙을 바로 지키며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 신앙그룹이라는 정도로 알아서는 안 되고 청교도들의 신앙과 신학이 곧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임을 알고 더 깊이 연구할 뿐 아니라, 청교도운동이 왜 일어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발전하게 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청교도 운동의 발단에 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2. 청교도 운동은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이다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로마 카톨릭의 교황주의와 잘못된 신앙과 사상 및 관행에 반대하여 일어난 운동이다. 루터의 개혁 내용을 말하자면, 교황, 종교회의, 교회의 전통 등 카톨릭 특유의 권위를 배제하며, 목사를 제사장이라는 사제주의, 교계주의(敎階主義, hierarchy), 교회법을 신성시하는 것, 연옥을 믿는 신앙, 미사의 제물 사상, 카톨릭의 성례 개념,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카톨릭의 다른 성례들, 그리고 이차적인 종교적 질서들, 즉, 성자(聖者)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성상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순례, 예배시의 행렬, 성수, 부적 등등을 제거하였으며, 공로 쌓는 일, 수도원, 환상을 보거나 황홀을 추구하는 일, 풍유적인 성경해석 등등을 반대하였다.

1523년에 일어난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역시 루터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 쯔빙글리는 카톨릭의 종교의식과 법을 과감히 버리는 것임을 말하고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지킬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의 미사, 오르겐, 찬송, 제단, 예배 시에 입장하는 행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성상들, 임종을 당한 자에게 행하는 종유성사(終油聖事) 등을 제거하거나 폐지하였다. 구제기관(救濟機關)을 세우고 학교교육을 쇄신하며 노예제도를 철폐하였다. 금, 은, 보석 및 화려한 옷 등을 착용하지 않거나 구제를 위하여 팔도록 하였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 저주하는 일, 술집, 연극 등도 없이하고, 간음과 매음을 금하였다. 취리히에서 시작한 이러한 개혁운동은 베른, 바젤, 상트 갈렌, 샤펜하우젠, 글라루스 등 스위스의 여러 칸톤(州)과 도시로 확산되었다. 제네바는 칼빈이 목회를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쯔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을 단행한 도시국가였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은 1534년 헨리 8세가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잉글랜드의 교회의 교황 교회로부터 결별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헨리 8세 치하에서 시행된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은 유럽 대륙에 있었던 교회 개혁에 비하면 미비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1547년 헨리 8세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 하에서 개혁은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1547년 성찬에서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 송을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노래하는 화답송이라는 이유에서 폐지하고, 연옥을 지칭하는 일체의 문구나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사제복(vestment)의 착용을 금하였으며, 사제(priest)는 목사로, 제단은 성찬상(聖餐床)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성찬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떡과 잔을 허락하였으며, 기부금을 낸 영혼을 위하여 미사를 드리는 채플을 폐지하였다.

1553년 에드워드를 이어 매리(1553∼1558)가 왕위를 계승하자 잉글랜드의 종교적인 상황은 완전히 반전되었다. 여왕은 1554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고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반종교개혁 운동에 고무를 받아 종교개혁 운동을 탄압하였다. 크랜머, 리들리를 포함하는 300여명의 개혁자들이 처형되었으며, 800여명이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 취리히,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


3. 사제복의 거부가 청교도 운동의 발단이었다

1558년 매리 여왕이 사망한 후 엘리자베스(Elizabeth, 1559∼1603)가 왕위에 오르게 되자 유럽 대륙으로 망명했던 개혁자들이 속속 귀국하였다. 그들의 대다수가 칼빈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자였다. 800여명의 피신자들 가운데 제네바에 머문 이들이 230여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주로 잉글랜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경 말씀을 따라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종교 획일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1560년대에 일어나게 된 청교도들은 성공회 사상에 반대한 것이므로 교황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보다는 로마 카톨릭의 유물과 관행을 일소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것이 사제주의(clericalism)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중세의 사제주의는 목사를 제사장으로 간주하는 사상이므로 16세기의 여러 종교개혁 신앙고백서들은 사제주의를 반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청교도 운동이 외면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예배에서 사제복을 입기를 거부함으로써 엘리자베스 여왕의 칙령을 어긴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옷 입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이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청교도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의 신앙과 개혁의지와 관계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예배 의식상의 문제만이 아니고 목사를 제사장을 보는 로마 카톨릭의 사제주의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청교도들은 한사코 반대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루터나 쯔빙글리가 먼저 주장하고 실천한 것이며 이미 종교개혁 교회의 전통이 된 것이다. 루터는 목사가 제사장이 아니고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라는 뜻에서 예배에서 사제복은 마다하고 대신 교수 가운을 입었다. 쯔빙글리의 67개 조항의 제 17조에서 교황을 비판하여 "그리스도께서 유일하며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대제사장으로 자처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명예와 권위를 거스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실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명예와 권위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쯔빙글리는 67개 조항(1523년)에는 이런 말도 있다. "외식보다도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사람의 눈에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모든 것은 외식이고 불명예스러운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말하자면, 수도사가 입는 가운이라든지 휘장을 다는 것이나 삭발하는 것 등의 일이 다 이에 속한다."

쯔빙글리의 후계자 불링거는 그가 쓴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년) 제18장에서 목사의 직분에 관하여 논하면서 '만인제사장'에 관하여는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하지 교회의 직분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교황주의적인 제사장 제도를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폐기했을 때에도 교회의 봉사직을 없이한 것은 아니었다. 여하튼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는 구약적인 언약의 백성에게서 불 수 있던 그러한 제사장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름 붓는 일이라든지 거룩한 제사 제복이라든지 수많은 의식 등이 폐지되었다. ..."


4. 한국 교회의 중세 교회화를 반성해야 한다

청교도들이 사제복을 거부한 것은 대륙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미 강하게 주장하고 실천한 개신교의 전통을 좇아 했던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카톨릭의 것과 구별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성찬의 화체설과 사제주의에 대한 반대인 것을 우리 한국 장로교회는 간과해 왔다. 아니 간과했다고 하기보다 옳게 인식하지 못해 왔다. 목사를 제사장으로 알고 있으므로 거기에 걸맞게 강단을 성역화 하는 등 예배당 내부의 구조가 이러한 이해에 맞는 방향으로 발전해 오게 되었다. 강단에 줄을 치거나 울타리를 치는 일, 신을 벗고 올라가는 일 등이 그러한 것이다. "제단", "예물", "기름부음 받은 종" 등 구약의 용어를 즐겨 사용한다. 1970년대부터는 목사는 물론 장로와 집사까지 가운을 입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목사나 장로를 장립하면서 가운을 입혀 주는 것을 의식화하는 교회가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한국 교회의 이러한 여러 면들은 로마 카톨릭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더 구약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구약을 신약을 통하여 보는 신학적인 안목이 없어서 그러하고 토착적인 샤머니즘의 배경 때문에도 그러한 것으로 안다.

한국 교회는 로마 카톨릭의 관행에 무분별하게 접근하면서도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을 지나치게 이질적인 종교로 잘못 알아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100년이란 시차를 두고 제가끔 선교되었을 뿐 아니라, 개신교를 기독교라고 부르는데 반하여 로마 카톨릭을 천주교라고 하며, 하나님을 비롯하여 예배당, 목사, 성례 등 유럽에서는 같은 명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그 명칭을 달리하고 있다. 유럽의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과 여러 개념의 명칭이 같으므로 내용의 차별화에 민감한 반면에, 한국의 개신교는 명칭이 다르므로 내용의 차별화에는 둔감한 것 같다.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경우 청교도적 개혁 신앙을 표방한다는 한국의 장로교 역시 중세교회가 범한 오류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청교도의 운동의 역사와 내용을 외면한 채 그들의 경건만을 귀하게 여긴다면 청교도의 유산을 옳게 전수 받은 것일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청교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교회 역사상에 있었던 비슷한 유형을 가진 신앙인들의 무리를 인식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이 된다. 이를테면, 중세 말기의 형제 교단(devotio moderna)에 속해 있던 토마스 아켐피스와 그의 친구들, 혹은 메노나이트나 아르미쉬, 17세기 후반의 경건주의자 등과 같이 경건하게 살려던 여러 신앙 그룹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될 뿐이다. 반종교개혁을 이끌며 교황주의에 철저했던 로욜라의 예수회만 하더라도 교회의 도덕적인 정화를 시도하고 종교적인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한 점에서는 개혁자들이나 청교도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한국 교회는, 특히 장로교회는 청교도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전수 받은 것을 잘 보존하며 발전시키려면 청교도 운동이 예배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높이는 개혁신앙에 충실한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로마 카톨릭적인 사제주의와 교권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늘 반성하며 새로워지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행 복 충 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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