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대학교는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의 동남부 외곽에 있는 불러란(Boelelaan)에 소재하고 있다. 1105번지에 있는 본관 건물은 지상,지하를 합쳐서 15층이 넘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로 되어 있고, 이 본관 건물에 대다수의 학부들이 밀집해 있다. 겉에서 보자면 건물은 전혀 매력이 없게 지어져 있다. 원래 신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대학을 설립할 때에는 시내 중심가에 흐르고 있는 케이저스흐라흐트(Keizersgracht) 운하가에 소재하고 있었지만 35년 전 쯤에 현위치로 확장 이전하였다. 좁은 터 위에 많은 공간을 창출하려고 하다 보니 현재처럼 멋없는 맘모스 건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중심가에 가면 수 백년 된 건물들이 즐비하게 있는데, 자유대학도 구 건물이 훨씬 더 고풍스러워서 좋았던 것 같다.
자유대학교(화란어로는 프레이어 위니페어시떼이뜨 Vrije Universiteit, 영어로는 Free University)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1880년에 설립한 대학이다. 물론 출발시에는 보잘 것 없는 규모에(첫 신학부 학생이 5명이었으니) 정부의 학력 인가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시기에 학교 유리창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버리라"는 단테 <신곡>의 구절이 낙서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졸업해 봐야 학력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에 극도로 세속화되고 자유주의화된 국가 교단과 그 신학부들에서 자유로운 그리하여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근거한 신학과 학문을 수립하기 위하여 자유대학교를 개교하였다. 현재는 29학부에 학생수는 만 수천명에 이르고 있고, 내가 재학하고 있을 당시에 우수 대학으로 상을 받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개혁주의 진영으로 부터 자유대학교 신학부가 좌경화하였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왔다. Harry Kuitert와 같은 과격한 신학자 덕분에 그 의혹은 더욱 더 증폭되었지만, 그 시작은 헤리트 베르까워(Gerrit C. Berkouwer, 1903-96)로 부터 비롯된다. 베르까워는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카이퍼와 바빙크를 잇는 신칼빈주의자로 명성을 휘날렸지만, 1954년에 출간한 바르트 신학 연구서(1956년에 영역되었는데, 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로 인하여 바르트 신학에 대하여 우호적이다는 것을 드러내었고, 1964년에는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비판을 했고, 성경관에 대한 두 권의 책을 통하여서 그가 바르트의 성경관에 경도되어졌음을 드러내었다. 베르까워의 신학적인 영향하에 개혁 교단은 WCC에 가입을 했고, 여성안수를 이미 1970년에 시행하였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Kuitert나 속죄의 도덕적 감화설을 주장하는 비르싱가(H. Wiersinga)같은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까워의 신학적인 공헌들을 간과할 수 없으며, 그가 지도한 46명의 박사 제자들 가운데는 자국 내에서나 혹은 미국이나 남아프리카등지에서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공헌을 하여 온 이들이 많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교의학 연구(Studies in Dogmatics)화란어로 18권, 영역본으로 14권>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Kirchlcihe Dogmatik),13권,1932-1967>에 버금가는 20세기 조직신학계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으로 가려 먹으면 영양가 있는 것들이 많다. 바르트의 글에 비하자면 읽기가 훨씬 용이한 것은 물론이다.
신학부의 첫 조직신학교수는 아브라함 카이퍼였다. 카이퍼는 20여년 동안 신학 교수로 있은 후에, 1901년에 화란 수상이 되었다. 카이퍼는 진작에 여러 차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1854-1921)를 신학부 교수로 초청한 바 있었는데, 그 때 마다 바빙크가 사양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초청을 받아들여서 깜뻔신학교에서 자유대학교로 와서 2대 조직신학교수가 되었다. 이미 그의 주저요, 화란 개혁신학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4vols.1895-1901>을 완간한 바빙크는 자유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수정판을 내어놓았다(1906-1911). 1902년에서 1921년 갑자기 서거하기 까지 약 20년 간 교의신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바빙크는 많은 저술들을 남겼고, 또한 20명의 박사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바빙크의 갑작스러운 별세이후 세 번째 조직신학 교수로 지명된 사람은 발렌떼인 헤프(Valentijn Hepp, 1879-1950)로서 그는 1922년에서 195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바빙크의 지도하에 <성령의 증거 I>에 대하여 학위논문을 썼던 헤프는 28년여에 이르는 교수 재직 기간 동안 학문적인 저술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가 재직하던 시절 동안 개혁 교회내에는 많은 신학적인 논쟁들이 일어났고, 그 중심에 헤프와 카이퍼의 장자 H. H. 카이퍼가 있었고, 또한 2차 대전 기간 중에는 독일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3년간은 대학이 문을 닫기도 하였다. 참으로 불행한 시기였었다. 1945년에는 깜펀의 교의신학 교수였던 끌라스 스킬더(Klaas Schilder, 1890-1952)의 치리와 정직 결정으로 말미암아 또 한번의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스킬더와 그의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은 Vijgemaakte Kerken라고 부르는데, 고신대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세 번째 조직신학교수는 헤프의 제자인 베르까워(Gerrit C. Berkouwer, 1903-96)교수이다. 그는 1932년에 독일신학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고, 1927년에서 1950년까지 두 곳의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1940년에 현대신학 교수로 모교에 부임하여 목회와 겸하였고, 1945년에 교의신학 정교수가 되었고, 1950년 헤프의 사후에 카이퍼-바빙크-헤프를 잇는 석좌의 주인공이 되었다. 1973년에 은퇴하기까지 베르까워는 수 많은 업적을 남겼다. 46명의 박사 제자들, 수 십권의 무게있는 저서들을 남겼고, 자유대학교의 양적 성장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50년대에 전교생이 2천명인데 신학부 학생이 500명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박윤선 박사가 9개월간 학생으로 가 있었고,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 탐방중에 베르까워와 만나서 면담하기도 하였다.
베르까워의 후임자는 뜻밖에 그가 기른 제자중에서 나오지 않고, 앞서 말한 Vrijgemaakte Kerke 출신의 얀 페인호프(Jan Veenhof,1934-)가 임명되었다. 페인호프의 아버지는 스킬더를 도와서 (소) 깜뻔 신학교를 설립한 C. Veenhof(1902-83) 교수였다. 그리고 얀 페인호프는 독일 괴팅겐 대학교에서 오토 베버의 지도하에 헤르만 바빙크의 계시와 영감에 대한 학위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르까워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그의 저서들을 신학교 시절부터 탐독하였다고 한다. 바젤에서 목회와 교수 사역을 하면서 만년의 바르트와의 교분도 두터웠다. 그러나 페인호프 교수는 자유대학교에 와서 1989년까지 약 15년 동안 조직신학 교수를 한 후에 돌연 조기 은퇴하여 스위스에 목회하러 가 버렸다. 아무튼 얀 페인호프에게서 박사학위 지도를 받은 이가 바로 서철원 교수이다. 그는 1982년에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 중보직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스승의 친 바르트적인 성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곤 했으며, 스승은 그의 해석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고 한다.
페인호프의 조기 은퇴후에 조직신학 교수직은 2-3년 공석으로 머문다. 물망에 오를 만한 부교수, 조교수(화란어로는 그냥 도센트 docent라고 한다)들이 있었다. 그와 같은 공백기를 지내고 나서 아트 판 에흐몬트(Aad van Egmond, 1940-)가 다섯 번째 조직신학 교수로 1992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앞선 얀 페인호프와 울리히 게블러의 공동지도로 1986년에 신고난설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2년에서 지병으로 인하여 역시 조기은퇴하는 2001년까지 약 9년을 교수직에 머물면서 비교적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그중에 한국인으로는 이정석교수(1995,미국풀러신학교), 한수환교수(2001,광신대학교), 유태화교수(2002,천안대학교)등이 있다. 나는 16개월 동안(1995.12.-1997.3) 판 에흐몬트 교수님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지만, 박사학위의 꿈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무골호인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으나, 저작 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도 바르티안이다. 바르트 신학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여러번 반론을 제기할 때 마다, 그는 인자하게 웃으면서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고, 본토 학생들에게는 바르트는 골통 보수주의자로 통한다고 지적하였다.
판 에흐몬트가 은퇴한 후에 2년여가 지나가고 있지만 교의학 교수직은 공석이다. 현재 브링크만M. E. Brinkman,1950-) 교수가 에큐메닉스 교수로, 판 더 베이크(A. van de Beek,1946-)교수가 신조학 교수로 사역하고 있고, 프롬(A. Vroom) 교수가 종교 철학교수로, 판 데어 꼬이(C. van der Kooi,1952-) 박사가 교의학 도센트로 사역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판 데어 꼬이가 카이퍼-바빙크-베르까워를 잇는 일곱 번째 교의학 교수가 되지 않겠는가 예견하고 있다. 아무튼 그를 비롯하여현재 조직 신학 분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은 모두 왕성한 저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대학 신학부의 조직신학 분과는 활동면에 있어서 다시 한번 리바이벌을 경험하고 있다는 평도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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