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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개혁신학
김영규 지음
·개혁주의 성경연구소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17세기 개혁신학
차 례
머리말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노선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VI. 레이든 대학 신학자들의 신학
VI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1.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배경
2. 총대들의 신학적 입장들과 그 고백서의 성격
3. 에라투스주의와의 논쟁
4. 독립교회주의와의 논쟁
VI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
1. 코케이우스 이전의 언약신학
2. 코케이우스 언약신학과 그 후기역사
맺는 말
참고문헌
머리말
20세기 초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인 H.Bavinck와 K.Barth가 자신의 신학의 기초를 세울 때, 17세기 개혁신학으로 돌아가 시작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7세기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떻게 돌아가고 누구에게 돌아가느냐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H.Bavinck는 17세기 개혁신학의 오랜 교과서와 같은 『순수신학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를 재편집하였고 K.Barth가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강의할 때 17세기 개혁신학에 대해서 편집한 H.Heppe의 책(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으로 돌아가서 강의하였다. 그 당시 Ernst Bizer가 재편집할 때 K.Barth가 그 머리말을 썼다. 문제는 그의 신학은 로마서주석을 통하여 잘 알려져 그런 명성 때문에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교의학에 대해서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미 그의 신학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여 교의학을 강의할려고 했을 때, 비록 그가 성경이 그 교의학(eine evangelische Dogmatik)에 있어서 성경이 그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자기의 신학으로 17세기 신학을 평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런 칼 바르트의 시작은 세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로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바로 성경으로 가는 프로테스탄트 교의학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목적에 이르는 도상에 정통주의라는 한 정거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ein Zurückgehen auf die Orthodoxie)은 그에게 그 안에 머물러 있고 그것과 동일하게 행하고자(um bei ihr stehen zu bleiben und es ihr gleich zu tun!)는 뜻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H.Heppe의 정통주의 참고자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Heppe의 역사적 관점은 칼빈을 개혁주의의 아버지로 돌린 것이 아니라 후기 멜랑히톤을 개혁주의의 아버지로 돌린 셈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더구나 Heppe에게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된 코케이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언약신학의 돌입이 깊은 문제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19세기 정신에 종속함을 표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놀랍게 H.Bavinck의 유산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교의학자들 사이에 이루어 놓은 신학적인 차이는 후진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도록 한다. 즉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든, 17세기의 정통주의로 돌아가든, 돌아가는 자의 신학적 근본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은 17세기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17세기로 돌아가도 많은 길들이 있다는 점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어떤 이해를 통하여 돌아가느냐가 가장 문제이고 17세기의 어떤 신학, 어떤 인물로 돌아 가느냐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지금 돌아가고자 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개혁주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런 우리의 참여가 있다.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퓨리탄형의 인물들이였음이 잘 인정되고 있다. 춤추는 것, 담배피우는 것, 카드놀이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주일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등이 그런 퓨리탄형을 상징하고 있었다. 공동성경번역사업,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갑자기 형성되기 전후의 선교정책의 분위기는 복음주의 교회(one evangelical Church)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만들려는 분위기이였다. 이런 합동운동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감리교의 집회운동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후 한국교회부흥의 모범이 되었고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말은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선교사들을 보낸 교회에서 한국에 있어나는 일년의 분위기를 1901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과 같은 운동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교회연합운동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장로교 선교회(영어공의회)에서 1908년에 독립적으로 장로교를 세울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 계획과는 달리 그 보다 먼저 1907년 9월 17일 독노회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독노회가 세워질 때 임시로 신경과 정치에 의해서 세워졌다는사실이 주목된다. 1907년에 임시로 채용된 신경과 정치가 1908년에 신경과 정치를 위한 특별위원회(한 석진과 Samuel A.Moffett)로부터 보고 받아 완전히 채용되었다. 여기에서 채택된 신경이 바로 12개조 신경인데, 그러나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고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나타나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선교지 신학의 한계이면서 사실 아르미니아누스주의가 빠졌던 같은 사고위험성을 허용하는 성격이 다소간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교파를 가릴 것 없이 단일교회형성에 대한 요구가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요구이였고 우리 교회는 유아기 교회로서 역사적인 개혁교회 고백득의 입장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교회이였다. 다행히도 부흥운동이 갖는 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그 외국선교회로부터 장로교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처음 그런 12개 신조정도의 개혁주의신학이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교회들은 공의회시대로부터 영향을 행사했던 이눌서 박사의 모교회인 남장로교회를 제외한 선교사들의 모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백하면서도 교회부흥과 선교운동으로부터 요구되는 온건하고 진보적인 입장을 수용하는 분위기이였다. 특별히 북장로교의 경우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개정하면서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해서 각 34장과 35장으로 첨가하였고, 16장과 22장,25장을 수정하였는데, 맹세거절에 대한 죄를 부정하고 카톨릭 입장을 적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고백하였고 이방인들에 선이 있음을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처럼 무시해서는 않된다는 입장을 찬양할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와 이방세계의 종교와 대화하고 수용하고자 준비로서의 수정이였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과 10장에 관한 해석으로서 선언문을 첨가하였는데, 이 선언문이 바로 그 당시 미국 장로교회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선언문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영원한 작정교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유화, 구원의 은혜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교리와 조화한다는 선언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죄인의 죽음을 원치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충분한 구원을 제공하셨고 그 구원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시며(adapted to all) 복음 안에서 값없이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셨다는 선언이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에 대해서 유아로 죽은 자는 누구나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때와 장소, 및 방법에 의해서 중생되고 구원받는다는 선언이였다. 비록 해석의 차원에서 선언한 것이었지만, 아르미니우스보다 더 진보적이고 웨슬레주의에 가까운 선언이였다.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되지 않는 입장이였고 이것이 선교지의 분위기와 잘 맞는 실제적인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된 인도 장로교회의 12개 신조는 선교지의 분위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모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축복은 그런 선교사들의 강한 보수주의 경향에서 나온 이런 정도의 신앙유산도 있었지만,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에 가르쳤던 박 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의 특이성에 있었다. 김 양선 목사는 박 형룡 목사에게 “평양 숭실대학의 창설자 방위량박사, 마포삼열박사, 등의 가장 철저한 보수주의 신학자에의 사사와 한국 최대의 보수신앙가 실 선주목사의 신앙적 도야와에서 기초지어진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사실 그의 유학시절의 배움에 있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신학문제가 발생한 1920년대 이전에 한국 선교사들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입장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1919년에 출판된 A.J.Brown의 책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 유학생들이 돌아오는 시기인 1920년에 그런 자유주의적인 입장이 교회 안에 나타났고 역시 다른 물결들 즉 막스주의운동, 사회 복음주의, 다른 현대사상들이 현저하였다. 더구나 그가 돌아오기 전에 한국교회에 일부 선교회에 변화가 있었다. 즉 카나다 선교회의 모교회가 1925년 감리교와 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연합교회를 형성하고 한국에 있는 카나다 장로회 선교회를 카나다 연합교회 선교회로 바꾸고 이미 한국에 와 있었던 선교사들 중 장로교 신조를 고수하려는 선교사를 제 15회 총회가 단절시켜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해 봄에 새로 온 서고도 선교사의 자유주의 사상이 알려졌다. 즉 서고도 선교사가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 다수의 역사적 오류가 있음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다시 같은 선교사가 그 해에 미국에 돌아온 김 관식 목사와 조 희담 목사 등의 응원을 얻어 교역자회를 소집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고자 기도하였는데, 거기에서 조희담 목사 역시 성경의 문학적 오류는 물론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음을 주장하여 큰 혼란이 일어났던 일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박 형룡 박사가 그런 강의들과 출판되거나 출판되지 않은 논문들을 모아 편집하여 『신학난제』를 출판하였던 시기는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에 대한 평양신학교 교수진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위원들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던 시기와 동일한 시기이였다. 물론 1935년 가을에 출판된 박 형룡박사의 평양신학교 강의들과 논문들은 그의 학위논문의 내용과 밀접히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가 한국에 처음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사이의 대립양상을 강하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대립양상이 바로 그 한국 보수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대립과 관련하여 『신학난제』의 서문에 ‘세계의 기독교 전체가 사상적 혼란으로 인하여 수난하는 바’ 그 ‘사상의 무정부시대’로부터 ‘불과 5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소년교회로서’ 조선교회가 ‘적지않은 이사상의 가지가지가 유혹의 촉수’에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의 책을 출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세계의 사상적 혼란이 지금 한국에도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이제 한국의 소년교회에도 ‘천태만상의 이사상은 바야흐로 정통신앙의 존속을 위협하려 한다’고 진단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표현된 정통신앙 혹은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의 성격이 무엇이냐이다.
이런 신학적 틀에 대해서 세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다.
첫째로 박 형룡박사의 유학시절 쯤에 두드러지게 보수주의 기수의 역할을 하였던 메이천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대조시킨 그런 틀이 그의 틀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박 형룡 박사가 1928년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곧 1929년에 메이첸 박사의 『신앙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가 Floyd Hamilton에 의해서 번역되었고, 그가 친히 자유주의 신학과 전통신학을 대립하여 다양한 신학적 조류들을 비판할 때 메이천의 1921년 작품인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과 1923년 작품인『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대조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조와 같은 대조일 가능성은 있었다. 이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와 대립하여 싸우되 역시 근본주의와 싸우는 Louis Berkhop의 틀과 박 형룡 박사의 틀과 비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L.Berkhop가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이 모세오경저작설 문제와 성경무오설의 변호를 위해 Janssen과 싸웠지만, 언제든지 전천년설을 부정하고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무천년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박 형룡 박사의 후기 신학발전과 조직신학 체계에 있어서 L.Berkhop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면, 박 형룡 박사의 양 대립 현상은 이런 정통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난제』을 출판할 당시 근본주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1910년이래 5년 동안에 출판된 『근본교리들(The Fundamentals)』의 입장들을 자신의 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박 형룡박사가 싸워 오고 있었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싸워왔던 동일한 주제들이었다. 즉 진화론, 비교종교학,고등비평, 사회적 복음신학 등에 대한 주제들이다.
셋째로 그의 대조는 개혁주의 전통의 입장에서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 사이의 대립이었다는 가정이다. 이미 이미 언급한 메이천의 양대립도 이와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형룡 박사는 조직신학 기본자료와 관련하여 Charles Hodge와 A.H.Strong의 조직신학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James Orr의 저서들을 중요한 기초자료들로 사용하였을 때, 그가 단순히 근본주의자이였기 때문에 사용한 것같지 않고, 오히려 그가 스코틀란드 장로교의 보수주의자이였기 때문에, 그가 쓴 모든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James Orr와 같은 스코틀란드 장로교 보수주의자인 James Denney의 『예수와 복음(Jesus and the Gospel)』도 사용하고 있음이 주목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신학난제』란 책을 쓰고 난후 1937년 초 그가 Loraine Boettner의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를 번역출판 하였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그가 정통의 어원적 정의를 절대적이고 불변의 인식학적인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그 권위가 성경에 있는 있는 모든 옳은 의견을 정통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런 일반적인 정통신학이 가장 명확하게 개혁주의 신학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정통신학은 비정통신학 곧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그 결정의 내용들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입장들과 만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신학에 양보하지 않는 내용과 그 선이 박 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의 내용과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나 개혁주의 신학 내에서의 다양성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았다. 비록 후에 그가 Louis Berkhop의 『조직신학』에서 정통신학의 진수를 발견하였을지라도, 개혁주의 신학의 올바른 노선이나 그 다양성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았다. 후에도 계속 신정통주의,신복음주의, 신 중립주의를 논할 때, 그런 건전한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한국보수주의는 박 형룡 박사의 근본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노선의 요점
한국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강조해 왔으나, 실제로 정통신학의 계보에 대해서 잘 소개되지 않았다. 최근 퓨리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개되었어도 회중교회적인 퓨리탄들이 대부분이 소개되었고 진정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많이 소개되지 않고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고 더구나 칼빈 이후의 유럽개혁주의자들의 소개들은 극히 적었다. 이런 면에서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진정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잘못 본 셈이 된 것이다. 하물며 전체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어느 것이 바른 노선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사실 웨스트 민스터 신학자들 중 죠지 길레스피가 품고 있는 ‘가장 좋은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처음 진정한 어거스틴을 재현한 종교개혁자들에게로 돌아가서 베자, 쨘키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피스카토르, 유니우스, 파레우스에 이어진 선까지와서 도르트회의 당시의 다양한 개혁주의 신학자들 안에 들어와야 16세기말과 17세기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다양성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런 비교와 노선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점들이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그 논쟁점에 대해서 각각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를 보고 바른 노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1. 그리스도는 택자들 위해서 죽으셨다.
개혁주의를 대표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아르미니우스와 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사상이다. 즉 선택의 대상에 대한 싸움이 중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달리 그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성직자들이 중세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예정안에 구원의 방편까지 포함한다하여 행위로 구원하는 방식을 예정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절하였다. 예정론은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과 확증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예정론은 예정의 대상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구원의 방식들에 대한 것도 예정론 안에 포함한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과 의지는 작정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에서의 논쟁점은 예정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정론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좀 더 예리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셨을 때, 과연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16세기 후기에 개혁주의 신학 내의 쟁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도르트회의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이미 칼빈이 이런 문제들을 그의 요한一서 2장 1-2절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냈다. 직접적으로 칼빈이 제한속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확충으로 인하여 여기에 덧붙힌 것은 신자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 속죄는 믿음으로 복음을 수용하게 될 모든 이들에게 미친다고 확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온 세상의 죄들이 속죄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것을 핑계로 모든 유기자들, 따라서 사탄까지 구원을 인정하는 미치광이들의 잘못들을 생략한다. ...... 이 모순을 피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서 충분히 고난을 받으셨으나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일반적인 해결은 학교에서 확고히 되고 있다. 비록 그럴지라도 그 말은 진리임을 나는 고백한다. 그런데도 현 구절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요한의 의도가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이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들 아래서 유기자들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앞으로 믿을 자들이고 세상의 다양한 재난들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자들을 의도하였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 당시 학자들 사이의 건전한 해결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에 대해서 충분하되 그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택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주장이였음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그 해결에 조건을 더 달았다. 즉 거기에서 칼빈은 모두란 말을 문맥의 정확한 뜻과 상관없이 유기자들을 제외한 택자들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칼빈의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다시 확증되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인 “그리스도는 영생을 위해 택한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고 죽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았다(Christum pro iis, quos Deus summe dilexit, et ad vitam aeternam elegit, mori nec potuisse, nec debuisse, nec mortuum esse)”는 명제를 그들이 공히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이런 입장은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본원리가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카톨릭은 세례관(화체설)을 통하여 신앙없이 모든 지역주민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지역의 국가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역시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임하였던 루터주의자들도 세례관에 있어서는 카톨릭적인 정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삼는 길을 열어 놓았고, 그것에 의해서 독일의 국가교회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웨슬레주의와 침례교도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전자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취한 것이고 침례교는 같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침례교적인 퓨리탄인 죤 스미스와 같은 이는 어거스틴의 참된 신앙의 개념을 받아드려 역사적 신앙 혹은 지식신앙, 기적신앙, 일시적 신앙을 비판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런 비판의 최소한 선에서라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안에 일어나는 신유 은사들을 바로 참된 신앙의 결과인 것처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에게 계시나 이상이 임하였다면, 그것이 두 사람 이상의 검증없이 교회안에 공적으로 선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계시가 종결되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기초로서의 그런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성경밖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종결되었다는 말이다. 참된 신앙의 정의에 대한 퓨리탄 침례교인의 좋은 어거스틴주의에도 불구하고,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재세례를 주장하는 경우, 혹은 가시적인 중생의 체험과 확신을 요구할 때, 거기에 아르미니안주의를 열어놓은 것이 된다. 그에 반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열매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루터주의는 이신칭의 교리만 가지고 어느정도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와 그런 종교사회를 비판하는데 성공하였어도, 구약을 파괴하였고 성화(구원의 서정)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척된 교회에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 준다. 권징에 있어서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권징의 목적은 사람앞에 정죄되어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안에서는 영원히 정죄받지 않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아르미니안주의, 혹은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함으로 개혁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도 도르트회의의 타락후 선택설 정도만 허용하였다. 이런 고백의 선은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선명하고 확고한 것이다. 19, 20세기와서 선교에 방해된다고 하여 구미의 보수주의 개혁교회안에서도 제한속죄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이미 확인한 바있고 한국장로교회도 그런 위험을 안고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유기자를 위해서도 죽으실만큼 충분한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유기자의 구원까지 그리스도와 교회밖에 구원을 허용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웨스트민스터 성직자중에서도 평화주의자인 리차드 박스터와 절친한 에드문트 칼라미(Edmund Calamy)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기자를 포함한 모두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이에게 충분하다 하였으며 그에 의해서 택자를 위한 절대적 의도, 유기자에 대한 조건적 의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그의 주장은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구원과 거리가 멀고 일부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죠지 길레스피에 의해서 카메론과 아미롤드가 그와 비슷한 조건적 구원을 주장하였다고 논박하였을 때, 칼라미는 해명하기를 자신의 말은 유기자에 대한 은혜의 어떤 경륜(ea administratio)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웨스트 민스터 총회석상에서 이런 칼라미의 언변이 유일한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칼빈을 발견하려는 자가 칼빈연구의 대표자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칼빈 자신에 의해서 섭리에 관한 특별논고(De occulta Dei providentia)를 통하여 종결된 것이고 17세기에 비로소 리베트(A.Rivet)와 불란서 쇼무르학파(J.Camero, M.Amyraut)사이에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에서 종결된 것이다. 역시 같은 경향으로서, 비록 창조전 선택설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속죄를 포기하려는 바르트주의는 루터주의(종교개혁 주저서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언약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상)는 될 지언정, 역사적 정통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2. 언약의 통일성
칼빈의 신구약 통일성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통일성이요 구원의 길과 서정에까지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비록 칼 바르트가 유태인을 배척하는 독일의 국가교회에 대해서 바른 성령론이외에도 신구약 통일성 즉 칼빈의 예레미야 주석에 따라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요 율법보다 복음이 먼저이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저항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에 관한 견해는 기독교 강요의 증거에 머무른 기독론적인 통일성이였다. 일찌기 독일 칼빈연구자들의 대표자들과 오토베버(Otto Weber)의 제자들의 학위논문들은 이 선에 굳게 서 왔다. 그러나 칼빈의 증거 전체를 볼 때,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경륜적 통일성이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뒤에 깔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칼빈의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이 정통 개혁주의안에서 계속 되었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현저히 고백되고 있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에서는 루터주의가 대화하기를 원하고 만나기를 원하는 코케이우스의 성경신학적 언약론을 비판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 사이에 죄의 용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 언약들이 신구약을 통해서 발전된 것(doctrina de triplici foedere)도 아니다. 계시의 점진성이 신구약 사이의 실체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게 개혁주의가 독특하게 주장해 온 신구약의 실체적 통일성이 복음주의 신학아래에서 현금 상당히 약해지고 있다. 즉 신구약 서론, 성경의 낱 권의 개별적 신학 연구, 계시의 점진성, 유기적 영감론의 광대한 적용, 적응계시 이론(Accommodation-theory)아래 보수주의 서구 신학계에도 가블러(J.Ph. Gabler)의 성경신학(theologia biblica)의 개념등과 같은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루터주의적 신신학(Neologie)의 영향이 이처럼 강도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3.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기독론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통일적인 고백인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는 보존되어야 한다. 칼빈에 따라 여호와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현현(manifestatio)은 인정하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육체(substantiale corpus)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루터주의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이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통일성으로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루터주의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와 칼케톤 신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톡특성(Extra illud Calvinisticum) 사이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주의는 두 본성의 실제적 통일성을 주장하되 육체밖에 로고스가 없다(nec λóγος extra carnem)는 주장이지만, 쯔빙글리 이래 개혁주의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성(totus)이 인성안에 거하는 인격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신성(totus)은 인성밖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기독론적인 전통에 있어서 구약의 그리스도와 성육신된 그리스도 사이에는 난제가 있다. 그러나 그 난제에 대한 해결에 있어서 개혁주의 내의 다양한 노선과 관련하여 또렷한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런 입장은 개혁주의의 독특성이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개혁주의의 보편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큰 논쟁이 되었거나 모두에 의해서 또렷이 주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부들의 입장에 머물고 이런 방향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uni)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당시 문서출판을 통해서까지 장외논쟁한 인물중에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적 입장을 변명한 가장 대표적 인물들로서 샤무엘 러더포드와 스티븐 마샬, 죠지 길레스피등을 들 수 있겠다. 샤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란드 교회개혁시에도 아르미니안주의와 싸우는 글을 발표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논쟁과정에서도 회중교회의 입장과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반박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후에도 러더포드와 뜻을 같이하여 또한 다니엘 코드레이가 회중교회를 비판하는 중요한 논쟁의 책을 썼다. 극단의 분리주의자들인 브라운주의들과 달리 상당히 건전한 회중교회의 입장은 화란과 신대륙에 있는 회중교회들이었다. 이미 화란에서 장로교입장에 강한 John Paget(?-1638)과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에 의해서 독립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의 근원으로 돌아가, 좀 더 건전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의 교회관들도 비판받게 되었다. 주 비판의 대상인물들은 Henry Ainsworth(1570-1622), Willam Ames(), Henry Jacob(1563-1624), Francis Johnson(1562-1618), John Robinson(1575-1625), Thomas Hooker(1586-1647), John Cotton(1584-1652), John Davenport(1597-1670), Hugh Peter(1598-1660)등이었다. 이 논쟁의 중심은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 교회언약(Church-Covenant)으로 연합되어 날을 정하여 공적인 예배와 성례를 위해 모인 조합(company)으로서 교회 회중자체가 완전한 교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교회(one head-Church) 혹은 주교회(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히 사무엘 러더포드에 따르면, 회중교회의 교회관은 G.Voetius의 동의이외에는 전유럽개혁주의들(J.Calvin, Th.Beza, Peter Martyr, H.Zanchius, F.Junius, D.Pareus, W.Whitaker, Tilenus, Professors of Leyden-J.Polyander, A.Walaeus, A.Thysius, A.Rovetus - J.Piscator, W.Bucanus, )로부터 인정이 되지 않는 주장으로서 그 근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소키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돌리고 있다. 한편 같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란드 총대인 Robert Baillie는 독립교회의 참된 근원을 재세례파에게 돌리고 있다.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비판 서적들 중에서도 죠지 길레스피의 「아론의 싺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London 1646)이란 책이 개혁주의 장로교 입장을 변명한 결정적인 책이었다. 거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고작으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에서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정치원리들을 비판하는 장로교의 원리를 한 마디로 장로회 자체(unitas)에 교회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원리로 설명하였다. 이 회 자체(unitas)에 주어진 권리와 회중교회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그것만이 교회직원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본질적인 교회전체(Totum essentiale)에게 주어진 권리 사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 예를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라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이나 위원회들,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5. 세속정치와의 교회의 독립성
칼빈에게 있어서 저항권은 교회안에서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관원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방식이란 오직 성경 이외에 다른 저항방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이런 저항정신에는 전제해야 할 특별한 원리들이 있었다. 첫째로 칼빈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Spirtuale Christi regnum)과 시민정체(civilis regimen, civilis ordinario, regnum politicum) 사이를 왜 구별하였는가가 중요하다. 이 구별은 단순히 질서와 법의 차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것들은 크게 구별된 것들이다는 것(res esse plurimum sepositas)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왕국, 참된 의, 영생의 축복에 관련된 하나님의 순수한 지식(pura Dei notitia), 참된 의의 본성(verae iustitiae ratio), 하늘의 왕국의 신비(regni coelestis mysteria)와 같은 하늘의 것들(res coelestae)이라 부르고 후자는 정치(politia), 경영(aeconomia), 모든 기술들(artes omnes mechanicae)과 자유학문들(disciplinae liberales)등과 같은 땅의 것들(res terrenae)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후자의 요소들 안에서 전자의 것을 찾거나 그 안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왕국에서는 땅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냐 공화정이냐, 왕정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즉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너가 어떤 조건에 있든, 어떤 땅이나 종류의 법아래 살든 중요하지 않다(nihil referre, qua sis apud homines conditione, cuius gentis legibus vivas)”. 그러나 이런 지식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부패된 인간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다. 따라서 윤리적 혹은 정치적 질서의 씨로서의 인간이성(humana ratio) 혹은 이성의 빛(lux rationis)이나 그로 인한 인간활동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어떤 영원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성격에서 포용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있다. 셋째로 이것과 함께 저항방식으로서 오직성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5장 29절에 근거하여 지배자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님 만이 왕의 왕이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 복종의 질서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주님은 “모든 것 전에 동시에 모든 것 위에 들어야 할 자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복종하되, 그 분 안에서 외에는 복종해서는 않된다(Dominus ergo rex est regum, qui ubi sacrum os aperuit, unus pro omnibus simul ac supra omnes sit audiendus. Iis deinde qui nobis praesunt hominibus subiecti sumus: sed non nisi in ipso)”. 이런 사도행전 5장 29절에 대한 입장이 후에 개혁주의 안에서 John Poinet, Christopher Goodman(1520-1603)과 John Knox의 저항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유럽개혁교회(우르시누스이래)와 장로교 전통에서 교회의 주권을 관원에게 허용하는 에라스투스주의를 단호히 거절해 왔다. 특별히 그리스도 만이 교회의 유일한 왕이시오 머리이시라는 고백이 장로교회의 확고한 입장이다. 이런 식으로 정경분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개혁교회의 입장이었고, 그러면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에 대한 그 분리의 정신도 칼빈의 정신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세속세계에 대한 이해도 적극적이다. 창조계시 혹은 일반계시에서도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고자 하나, 그 계시의 본질적인 성격을 오직 성경에서만 인식한다는 점에 강조를 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조의 주체와 창조의 근원과 방식, 목적 및 그 종결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성경계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 계시는 모든 계시의 기초이다.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정당하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사회윤리나 과학적 의식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오직 성경만 먹고 마시는 삶의 차이일 것이다. 사실 사회나 국가가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함께 운동하고 같은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 궁극적 해답을 주는 것이다. 칼빈의 욥기주석에서 나타난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차원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리는 것이다. 인간들도 일하고 영적인 실체들도 일하고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시는 차원과 방식이 다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분안에서만이 시작과 종결이 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원수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범위와 관련하여 칼 바르트(에밀부르너와 파울 알타우스에 반대하여)처럼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란 이원론을 거절하고 철저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신학에 대해서 현금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칼빈의 경우처럼 보편은혜 혹은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이나 입장이 성경에 대한 고백에 대한 도입의 성격에서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이 결코 민족주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근거로서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아래 복음만 포함한 것이 아니라, 율법, 심판, 죽음과 지옥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치 바울(고후 3:1-12)과 어거스틴의 정신인 것처럼, 그것은 그가 성경이란 개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을 더 좋아하는 정신과 비슷한 정신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점에서 또한 바르트주의와 거리를 갖는 조심한 기준이 된다. 문화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방식은 이미 과거 미국 북장로교가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때부터 시작하였다. 중생되지 못한 자들에 의해서 행한 것들도 하나님이 명령할 것일 수 있고 유익할 수 있다는 부분을, 1902-3년이후 그것들은 찬양할 가치가 있고 그런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요 하나님께 불쾌한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또한 사랑과 은혜 사이의 구별, 유아로 죽은 모든 택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아로 죽은 모든 아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그 때이래 장로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을 포함하여 현금 보편은혜안에 일반적 총애(favor in general)와 일반적인 선물들(gifts in general)사이의 구별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대화의 방식에서 나오고 있다.
6.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칼빈에게 있어서 의식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이해하였고 십계명안에 포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생된 이후에 그 법의 사용(usus legis tertius)을 열어 놓았다. 그와같이 제 4계명 안식일 준수도 도덕법으로 해석하였고 중생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의식적인 성격을 제외한 주일의 개념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퓨리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들은 주일만 지키고 도덕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의식법에 속한 유대절기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드여왕시대에 이미 주일날 백성들의 오락을 위해서 공적으로 스포츠가 허용된 이래(1583) 퓨리탄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안식일 논쟁은 Mr.Bound가 안식일에 관한 논문에서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지켜져야 하며 그 법은 도덕적이고 영원한 법이라 하여 주일을 세속화하는 스포츠나 오락게임들을 버릴 것을 발표하자, 대주교인 Whitgift가 출판된 그 책들을 회수하고 더 이상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던 일이 있는 후에도 계속 은밀히 읽혀졌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역사적으로 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에 의해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첫째로 퓨리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1618년 8월 25에 처음 법정과 주교들이 결정되어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이 결국 목회자들에게 강요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5개 조항은 성례를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할 것, 사적으로 병자에게 성례를 집행할 의무, 필요에 따라 사적인 세례집례의 허용, 이미 세례받은 어린애들은 주교에게 데리고 가 견신례(Confirmation)와 주교의 축복을 받을 것,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을 지킬 것 등이다. 둘째로 개혁주의 퓨리탄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소위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s and Sports on the Lord's Day)」을 출판하여 목회자들로 하여금 읽도록 강요한 사건들이 제임스 1세 때(1618)와 챨스 1세 때(1633)에 있었다. 특별히 퍼스의 5개 조항은 스코틀란드 총회에서 불법으로 통과되었기 때문에 계속 스코틀란드 교회의 저항의 대상이 되어 왔다가 1638년 총회개혁에서 처음 그 총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퓨리탄들의 순수성(non-conformity)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오락의 책에 대한 저항정신과 퍼스의 5개 조항에 대한 거절은 모든 퓨리탄들(장로교적인 퓨리탄들과 독립교회적인 퓨리탄들)에게 공통된 정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의 확고한 정신이었다. 유럽대륙에서도 이런 퓨리탄정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G.Udemanus, W.Teellinck, J.Spiljardus)이 1612년이해 강한 주일성수를 강조함으로 논쟁이 되기 시작하여 도르트회의에서도 논쟁이 되었고, 1620년 이후 G.Udemannus, W.Teellinck와 Jacobs Burs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거기에 꼬리를 이어 1621-1627년 사이에 남홀란드(Zuid-Holland)의 특별대회에 논쟁이 있었고, 계속해서 A.Thysius, A.Walaeus, F.Gomarus, A.Rivetus, G.Amesius등으로 이어지는 Hoornbeek, Heidanus, Coccejus사이의 논쟁, Utrecht대학, Groningen대학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퓨리탄들의 기본입장은 카톨릭주의와 영국국교회자들의 주일의 세속화와 재세례파, 퀘커교도, 다른 이단들의 주님의 날을 버리는 운동, 또한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 관대하고 관용함으로 상업도시들이 세속화됨으로 주님의 날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반대하여 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중 William Gouge는 사도행전 20장 7,11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24시간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서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장로교인들은 예식서의 사용을 불법적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정해진 예식서에 제한하는 것을 거절한다.
둘째로 장로교인들은 주일이외에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다. 부활절은 Eostre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하였고 성탄절은 로마의 신 Saturn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을 축제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례시 십자가의 상징을 하지 않는다.
넷째로 견신례(Confirmation)의 의식을 거절한다.
다섯째로 성만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지 않느다.
여섯째로 성만찬 예식을 사적으로 집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장로교의 경우 지금까지의 예배의식들의 전통으로 보아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인식되거나 바르게 가르쳐 왔다고 보기 힘들다.
부록
I. 퍼스(Perth)결정에 대한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결정의 회록 (1638년
12월 10일)
“퍼스의 5개조항들은 버려져야 되고 말살되어져야 할 것을 선포하는 그라스고우 총회”
“총회는, 그 때에 들어와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커다란 불화인 퍼스 조항들이전에 이 교회안에 있었던 예배의 통일성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목사들과 교수들 모두에 반(反)하여 야기해온 슬퍼해야 할 결과들로서 이미 이 총회에서 선포된 퍼스총회의 불법성과 무효를 (기억하면서), 1638년 2월 신앙고백의 필연적 쇄신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배에 소개된 갱신의 실천이 자유총회에서 결정되기까지 연기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해에 관원들의 명령으로 어떤 사람들이 처음 서명하였을 때 고백된 대로 신앙고백에 서명했다는 것. 이런 이유들 때문에 총회는 전의 조항에 대해서 1580년, 1581년, 1590년과 1591년에 의도되고 고백된대로 그들이 신앙고백에 모순적인지 힘겨운 조사에 임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일반적인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즉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고백하기를, ‘우리는 기꺼이 오랫동안 왕의 권위에 의해서 공적으로 고백된 종교의 형식과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의심되지 않은 진리로 여겨진 대로 오직 그의 쓰여진 말씀에 근거한 이 영역의 전체를 우리의 양심으로 동의하고 따라서 대적적인 모든 종교와 교리를 거부하고 미워한다.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란드 교회에 의해서 멸시되고 논박된, 일반적이고 특별한 카톨릭 의식들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적그리스도, 모든 의식들과 제식들을 포함한 다섯가지 가짜 성레들,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고 참된 성레집례에 덧붙혀진 거짓 교리들, 성레없이 죽은 유아들에 대한 잔인한 심판, 세례의 절대적 필연성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마지막으로 공허한 비유들, 제식들, 상징들,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리고 우리가 친히 기꺼이 그것의 교리, 신앙, 경건, 권징을 기뻐하는 참된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와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안에서 같은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로서 약속하고 맹세하는 등 참된 성례들의 사용에 반대되는, 교회안에 들어온 (그런) 전통을 싫어한다’고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이 다섯가지 조항들이 그때 고백된 종교에 모순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란드 교회에 의해서 논박된 것들이다. 참된 성례들의 집례들에 덧붙혀졌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는 제식들과 의식들이거나 혹은 성례없이 죽은 유아들에 대한 교황의 정죄를 고양하거나 혹은 세례의 절대적 필연성을 고양하거나 혹은 제식들, 의식들,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런 참된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 밖에 혹은 반대하여 교회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으로 특별히 절기들에 관해서 발견하고 있다. 첫 항목, 권징의 첫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크리스마스 축제, 할례절, 현현절은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축제들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에 명령된 것도 아니고 보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대로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전적인 폐지가 요청되고 있고 오용의 개혁만이 아니다. 그런 축제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보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556년 에딘버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스위스의 대고백이 인정되었으나, 특별한 예외로서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같은 다섯 절기에 대해서 반대되었다. 기각되었던 것은 예배와 공로에 대한 로마 카톨릭적인 견해와 함께 교황적인 경축만이 아니라, 단순히 모든 경축들이다(그렇게 스위스 개혁주의 교회가 그들을 경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목적 때문에 그 당시 이 목적에 관련된 이 부분들에 있어서 어떤 성직자들에게 우리의 성직자들이 보낸 라틴어로 된 편지가 읽혀졌다. 1575년 8월 총회에서 아버든 밖에 있는 목사들과 강독자들을 반대하는 상소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축제때 설교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날에 한 그 설교와 기도들은 책망받을만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들자신의 강독자로부터의 거절로 인하여 서판과 호각을 가진 교회의 강독자에게 기도서를 읽도록 강요하고 전달하였기 때문에 드럼프라이스(Drumfreis)란 도시의 섭정자에 대한 상소가 있었다고 똑같이 규정되었다. 이 총회에서 섭정자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주일을 제외한 거룩하게 지키는 율레데이(Yooleday = 크리스마스날)와 같은 모든 성일들과 성자의 날과 그와같은 다른 날들은 폐지되었음이 요청되었고 이들날에 연회를 열고 기도하며 잔치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징벌들이 정해졌다. 1577년 4월에 개최된 총회에서의 일이다. 공의회의 권고를 행할 시찰자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날과 동일한 미신적인 때에 설교하고 성찬을 집례하는 목사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박탈을 처한다는 조건으로 그만두라고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 1 권징조례 제 9항에 근거가 부활절 성찬식에 대한 반대가 기록이 되었다. 너희 고관들은 백성들이 그 때가 마치 그 성례에 효력을 주는 것과 같이 그 유월절에 얼마나 미신적으로 그 행동으로 달리고, 일년전체의 나머지는 마치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그 때에만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이 얼마나 조심없고 무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때문에 거룩한 행동을 위해 다른 때가 그 책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다. 1595년 3월에 시작되었고 그 때에 언약이 갱신된 1596년에 개최된 총회에서 축제의 날들을 지킬때 쏟어져 나온 미신과 우상, 화톳불을 집히고 카롤을 노래하는 것은 개선되어야할 부패들에 속한 것으로 사려되고 있다. 주일을 제외한 어떤 축제의 말이든 그것을 지키는 모든 징후들에 반대하여 강단들이 자주 선포하여 왔다.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해서 시편의 글의 머리말에 있고 종교개혁 초기에 우리의 교회에서 공인된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말이 있음이 발견되고 있다. 즉 성례집례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따라 행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정하신 그대로 그들이 집례되어야 한다. 대 신앙고백 23장에서 올바른 성례집행을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요소들로 그리고 그 방식대로 그들이 집례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있다.그 사람들은 그들의 자신의 날조로 성례를 조악(粗惡)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행동의 어떤 것도 원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고백을 작성한 우리 개혁자들의 판단은 분명한 증거에 의해서 성례를 받는 행동에 있어서, 시편의 글의 머리말에 앉아서 성만찬 집례자들에 의해서 나누어진다고 한 성만찬을 거행하는 질서에 있어서 이런 행동에 반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똑같이 권징조례 제 2항에 그리스도 자신의 행동과 그의 실천에 가장 가깝고 그의 거룩한 행동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사람에 의한 고안된 모든 창안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규례에 대한 변질과 죄과이다. 목회자들은 1562년 12월의 총회결의에 의해서 향유되고 있다(?) 제네바의 질서를 준수하는 것, 낙스선생이 성례집례시 거기에서 종종 목사로서 섬겼던 제네바의 영국교회의 질서인데, 그 행동은 1564년 12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갱신된 것이다. 거기에서 목사들은 시편전에 세운 질서로 성례의 집례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전자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네바의 영국교회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1567년에 개최된 의회에서 이 개혁주의 교회에서 공적으로 집례된대로 성례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이 교회의 지체들에 의해서 비난되어야 한다고 선포되고 있다. 제위식에서 성례의 의무적인 집례를 주장하는 왕들의 맹세 행위는 그들이 1567년에 집례되었던 대로 1581년에 재가되었다. 그 때에 성례의 유용을 지지하는 짧은 신앙고백은 스코틀란드 교회에서 서명되었다. 신앙고백에 대한 두번째 서명이후인 1592년에도 마찬가지이다. 1572년 의회에서 성례들이 바르게 집례되었는데도 그들에 참여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받을때 무릎을 꿇는 모습은 이 교회에서 사용된 성례의 집례의 짜임밖에 있다. 그로 말미암아 분명한 것은 어떤 모습이나 의식도 전에 집례되었고 종교개혁이래 1618년까지 계속 집례되어 온대로 성례집례와 항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성례의 참된 집례에 덧붙혀진 의식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 개혁주의교회의 교리에 반대되는 의식이나 전통처럼 우리교회에서 멸시됨에 틀림없다.
셋째로 견신례에 관해서
다섯가지 거짓 성례들이 멸시된 고백서의 문장에서 그것이 이해됨을 발견하였다. 주교제도가 멸시되었기 때문에 주교들에 의해서 안수도 실패로 돌아간다. 성만찬 입회허락전에 가르치거나 시험하는 모든 과정에서 안수의 암시는 없다.
넷째로 사적인 장소에서 성례집례와 사적인 세례와 성만식에 관해서
시편전에 기록된 예식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음을 발견한다. 마술사와 마법사가 습관적으로 하듯이 성레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적인 장소에서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 아니라 공집회를 위해서 남기신 것이다. 1581년 10월 에딘버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앙고백서가 서명된 같은 해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그 당시 트라넨트의 목사는 정직되었다. 왜냐하면 개인집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위반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면되기전에 트라넨 교회에서 공적회개를 하도록 규정되었다. 다른 목사가 사적으로 세례를 주고 유월절에 성만찬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1580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조사되고 책벌되었다. 그 결의와 책벌이 명백히 밝히는대로 우리교회는 세례의 필연성에 대한 견해를 육성하고 바티칸처럼 성례를 주는자는 누구든지 그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들과 길게 호소되었고 심사숙고하여 사려된 다른 많은 결의들과 근거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의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수여된 자유, 좀더 언급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의 충만한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 문제는 이런 말로 표현되고 있다. 1580년, 1581년, 1590년, 1591년에 의도되고 고백된 대로 신앙고백에 의한 퍼스의 5가지 조항은 어느 것이든 이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총회는 위에서 세분된 다섯 조항들은 이 교회에서 고백안에서 포기되고 그렇게 그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고 가결하였다. 그러므로 (총회는) 그들에 대해서 논하고 오는 모든 시기동안 그들이나 그들중 어느 것을 지키는 것을 금하고 누구든지 책임을 물으며 (당회 혹은) 노회(Presbyteries)로 하여금 모든 범과자들에 대해서 교회의 책벌에 의해서 재판할 것을 규정한다.”
II. 오락에 관한 포고문서(1633년 10월 18일)의 내용에 대해서
1) 명목상 주일날 오락을 허용한 것은 민생복지에 목적을 두었다.
신민(臣民)들은 주일내내 심하게 일하는 천한 자들이다. 그들을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락을 허용해야 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된다는 논리이다. 더구나 찰스 1세의 포고는 자신의 아버지 제임스 1세의 포고를 기억하는 것이므로 그 오락을 법적인 오락(lawful recreation, lawful sports)이라 칭하였다. 그 찰스 1세의 포고는 제임스 1세의 포고문에 따른 것으로, 후자의 포고문에 그 선민에게 일요일이나 다른 성일에 그 법적인 오락과 정숙한 운동(honest exercises)을 금하거나 방해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물론 이런 포고문을 낸 것은 어떤 관구(Lancashire)에서 시발되었던 것이고 왕국전체로부터 백성의 일반적인 불평에 근거하였다. 그 오락의 내용을 보면 남녀 모두에게 허용되는 춤, 뛰고 넘는 남자의 경마 스포츠, 메이게임, 시골축제, 모리스 춤등 다른 해없는 오락들이었다.
2) 실제로 그 포고문서의 동기는 퓨리탄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이였다. 동시에 퓨리탄운동의 확산(... is much infected)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고 다른 종교세력인 교황주의(로마 카톨릭 국교기피자들: Popish Recusants)를 견제한 것이였다.
3) 그 당시 오락과 스포츠의 금지는 주일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성일에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왕명포고문서는 주일성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였고 다만 일요일 저녁기도후(after evening prayer), 일요일 오후 (upon the Sunday's afternoon) 혹은 모든 신적인 예배종결후(after the ending of all divine service) 그런 오락이나 스포츠를 허용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 당시 청교도인들(Puritans)과 엄격한 이들(Precisians)은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동시에 어떠한 정숙한 오락이나 건전한 놀이(honest mirth or recreation) 까지도 관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퓨리탄 정신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예배모범에 정확히 반영되여 있다.
4) 주일날 오락을 허용하는 법은 최고 재판권을 가진 자들인 왕과 주교가 일체하여 일어난 핍박형태이였다.
그런 퓨리탄정신은 종교의 오용이였고 그 포고문에 의해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그것이 종교의 오도임을 설득시키고 개혁하는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법적인 효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어길 경우 법정에 넘겨졌다. 그 법적인 제재효과는 퓨리탄들이 스스로 그 법에 순응하거나 그 나라를 떠나야 하는 택이었다.
5) 따라서 이런 법들때문에 퓨리탄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이런 법에 순응하는 자들(conformist)과 순응하지 않은 자(non-conformist)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순수한 퓨리탄의 원개념은 사실 후자의 개념을 의미한다.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신학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Theodor Beza(1519-1605)는 17세기초까지 살았다. 그가 80세의 노년이었을 때,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대부분 태어나는 시기이였다. 이 성직자들이 대부분 40대로서 총회에 참석할 때는 대륙에 아직도 많은 유명한 개혁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때이였다. D.Tossanus에 따르면, 17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16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개혁주의자들 중에서 베자와 제네바의 다른 신학자들외에도 J.J.Grynaeus, Stuckius, Zanchius, F.Junius, B.Copius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이면서 직접적인 제자로서 Th.Beza이외에도 불란서 출신인 Pierre Biret(1511-1571)가 칼빈과 함께 종교개혁자이었지만 칼빈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되지 않아 부름을 받았다.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주의자들 안에서는 이 세 사람은 중요한 인물들이였다. 베자처럼 삐에르 비레 역시 칼빈의 참된 제자이였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단순성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서 창조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다. 예정과 유기에 대한 작정도 하나님의 의지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목적도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데 두었다. 섭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에 의해서 다스리신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도와 같은 약속과 같은 은혜에 기초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에 의해서 거룩히 된다는 칼빈주의적인 신학이었다. 성만찬도 교회에 아주 유익되지만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였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던 칼빈의 제자들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특별히 칼빈의 입장에 서 있었던 자들로서, 벨직고백(네델란드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던 Guido de Brès(1522-1567)와 Petrus Dathenus(1532-1588), Gaspar van der Heyden(1530-1586), Pierre de Cologne(Petrus Colonius, 1530-1571), Jean Taffin, Herman Moded(1520-1603),Adrianus Saravia(1532-1613), Johannes Helmichius(1537-1568), Jean Polyander(1535-1598)등이 있었다. 초기 네델란드 신교 개혁자들은 Zwingli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알려지고 1530년초 재세례파들의 영향이 폐해가 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540년대로부터 칼빈이 알려지지만, 예를들어 Jan Gerritz Versteghe(Ioannes Anstasius Veluanus, 1520-1570)의 경우, 개혁자들 중에 재세례파를 비판하고 칼빈을 선택하지만,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는 쯔빙글리의 입장을 따랐고 예정론을 버리고 중생과 새생활을 강조하며 어느정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쪽이였다. 그러나 초기 개혁자들 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F.Junius가 레이든대학에서 가르치기 전에 레이든에서 가르쳤던(1587-1592) Carolus Gallus(Karl de Haan, 1530-1616)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베자아래서 공부하였는데, 그가 제네바에서 공부하기 전에 역시 화란의 초기 개혁도시인 Keulen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미 목사로서 봉사하였다는 자로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 칼빈주의 개혁자는 Guido de Brès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벨직고백서는 그에 의해서 작성되어 A.Saravia와 H.Moded에 의해서 인정되고 수정되었다. Daniel Colonius의 아버지 Petrus Colonius는 칼빈의 신실한 제자로서 교회를 세울 때 칼빈으로부터 배운 그 정신으로 목회하였다. 특별히 Petrus Dathenus는 네델란드 남부가 칼빈의 영향권아래 있을 때 수도원 생활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자가 되어 18,19세의 나이에 수도원을 박차고 핍박을 피하여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유량설교자가 되었다. 여러 도시를 따라 유량하다가, 헨리 8세가 신교인들에게 개방성을 보이면서 런던으로 피신하면서 그 곳 피난민 교회를 섬기는 폴란드 개혁주의자 Johannes à Lasco를 만났고 다시 영국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완전한 자리인 엠덴을 거처 프랑크푸르트에 이르렀을 때, 루터주의 설교자들을 방해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 피난민들의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아세례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성만찬과 세례에 관해서 루터와 칼빈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세례는 은혜언약의 표징이고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그들의 이미에 세례의 표를 받기 전에 이미 은혜언약 속에 받아드려 진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어린아이가 잃지 않는 것이 그 아이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루터주의자들은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세례의 필연성을 가르쳤다. 이런 확고한 입장을 초기 지도자들은 사실 피난민 목회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목회생활 가운데에서도 네델란드를 위해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를 번역하고 예배를 위한 시편들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초기 개혁세력들에게 칼빈과 베자의 영향이 크지만, 바로 이어지는 세대에게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칼빈에게서 배운 바있는 F.Junius를 제외하고 Daniel de Dieu(1540-1607), Johannes Fontanus(1545-1615), Wernerus Helmichius(1551-1607)등은 모두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고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지배시에(1559-1576) 그 선제후가 개혁주의자들을 보호함으로 이런 새로운 분위기가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스위스에 있는 다른 개혁중심지들과 함께 점점 더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개혁주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 대학은 1386년에 세워진 대학이지만, 선제후 Otto Heinrich 하에 있는 사람들이 온건하게 루터주의 신교에 기울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이미 스위스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교수들(Martinus Frechtus, Simon Grynäus, Sebatianus Münsterus, Hieronymus Buschius)이 있었고 철저히 개혁주의적인 사람들인 Petrus Martyr Vermiglius, Musculus가 그 교회의 관리들과 친밀해 상태이였다. Johannes à Lasco에 대해서 신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한 Petrus Colonius등 화란 개혁주의자들을 영접할 준비가 된 도시이였다. 그러나 그 선제후가 죽자(1559년 2월 12일), 44세 나이로 프레데릭 3세가 그를 계승하였다. 그기 즉위하자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토론이 주선되고 논쟁이 일어났는데, 거기에서 선제후 프레데릭 3세가 칼빈주의에 강한 인상을 받아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개혁주의 학자들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모이게 된다. 더구나 1560년 4월에 멜랑히톤이 죽자 대학이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미 선제후 Otto Heinrich의 때에, 프랑스 피난민으로서 Petrus Boquinus(Pierre Bouquin)가 1557년 하이델베르그로 와서 1558년에 세 번째 신학교수가 되었던 이래, 이제 1561년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추천으로 Zacharias Ursinus가 대학교수로 부름을 받고, 같은 해에 Caspar Olevianus가 대학교수로 옮김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Z.Ursinus와 Caspar Olevianus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그것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Z.Ursinus도 Wittenberg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에서 멜랑히톤과 밀접히 교제하다가 그의 추천에 의해서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칼빈, 부쪄, 불링거와 교제하였고 특별히 Petrus Martyr Vermiglius와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C.Olevianus는 법학자가 되기 전에도 칼빈의 책들을 읽었고 신학을 할 때 처음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쮜리히의 Petrus Martyr Vermiglius, 로쟌에서 베자의 강의를 듣다가 마지막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다. 그 후 자신의 고향인 Trier에서 선생과 설교자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카톨릭주의자들의 저항으로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치게 되었고 제후들의 청원에 의해서 풀러나게 되었고 자신이 프레데릭 3세의 가족과의 인연과 프레데렉 3세의 신용이 두터웠던 Peter Martyr의 추천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로 오게 되었다. Z.Ursinus도 역시 1558년 Breslau에서 가르치다가 최종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Caspar Olevianus가 합세하였던 것인데, 이들이 공동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함으로 다음 세대의 개혁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이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교수해 왔던 Hieronymus Zanchius가 1568년 이래 하이델베르그에서 교의학이 가르쳐지기 시작하여 유럽의 많은 신학생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려 유학할 때 필히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이 Hieronymus Zanchius는 이태리 출신 종교개혁자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제자로서 그 스승처럼 이태리를 떠나 Geneva, Strassburg등으로 피난민 생활을 하였다가 1553년이래 교수생활을 하였으나, 1561년 Martin Bucer가 죽은 후 스트라스부르그를 루터주의로 몰고간 Johann Marbach와의 성만찬과 예정론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Johann Marbach의 편에 있었고 인문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J.Sturm과 일부 교수들만이 H.Zanchius의 편에 있었지만, 결국 관원이 연합적 입장을 만들어 두 편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하였으나(1563. 5.28), H.Zanchius는 자신의 기본입장을 고집함으로 평화를 깨뜨린 자로서 그 곳을 떠나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Chiavanna에서 짧게 목회하다가 지금 Heidelberg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역량을 가진 개혁주의 교수들이 하이델베르그에 모여 개혁주의 신학을 꽃을 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3세가 죽자 그를 이은 선제후 Luwig VI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그 도시는 다시 루터주의의 시대로 변하여 개혁주의자들이 쫏겨나게 된다. 이 루터주의 복고시대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개혁주의 교수들은 물러나고 피신하여야 하였을 때, 선제후의 동생인 Johannes Casimir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Johannes Casimir에 의해서 관할하고 있는 곳에 학교를 세워 하이델베르그에서 피신온 자들을 받아 드렸다. 이 학교가 유명한 Neustadt의 대학이다. 이 대학이 Johnnes Casimir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의 아들 프레데릭 4세에 이어지면서 개혁주의자들의 산출지가 되었다. Z.Ursinus는 하이델베르그에 있을 때부터 로쟌으로부터 교수청탁을 받았으나 선제후의 거절로 옮기지 못하였으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런 예감이 선제후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현실화되었다.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14일 후에 Daniel Tossanus가 개혁주의에 강한 반대자인 Paul Schechsius에 의해서 교체되었고, 그 다음 Caspar Olevianus가 교수자리를 잃었다. 다른 교수들도 거주지와 생계비가 거절되어 버렸다. 1577년 Petrus Boquinus가 추방된다. 그는 추방되어 Lausanne에서 목회자와 교수로서 섬기다가 거기에서 1582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1578년 봄까지 600명이상의 설교자들과 교수들이 내쫏김을 당하였다. 그러나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새로운 보호지역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 곳이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들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 Neustadt가 새로운 중심지가 되는 것은 그 도시로 Z.Ursinus를 포함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이 옮기기 때문이었다. Z.Ursinus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어서 어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선제후 Ludwig VI의 힘에 의해서 떠날 수 없게 되었다. Neustadt로 옮겨 이사야주석에 대한 강의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남은 생애를 거기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가 하이델베르그의 시기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시기에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석(Explicationes Catecheticae)』과 『기독교적 권고(Admonitio christiana)』이 출판되었다. 특별히 후자의 작품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 확고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책은 루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은 인성과의 본질적인 속성을 실재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이 비난하기를,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재적으로 공유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들의 각각에 대한 독특한 것이 그리스도 인격에 공유적이다는 주장이다는 변증이다. 그래서 우르시누스는 루터주의자들이 본성과 위격사이의 차이를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둘째로 성만찬론에 있어서 개혁주의자들이 성경귀절이 애매하여 다른 구절과의 관계속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고 또한 말씀들이 새롭고 외래적인 의미를 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르시누스는 그 반대로 매 말씀이 철저히 판명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칼빈의 독특한 주장으로서 우르시누스가 그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개혁주의자들은 그 말씀들은 유사와 전체 성경의 해석에 따라서 설명한다며 거기에 더하거나 감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른 비난 즉 쯔빙글리와 함께 오해된 해석 즉 몸‘이다’에서의 ‘이다’가 단순히 ‘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고 강화하며 제공한다는 표시로 해석하면서, 칼빈처럼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혹은 장소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관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relativa et spiritualis) 현존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셋째로 예정론에 대해서 섭리론과 구별하면서 전자는 인격체에 관계된 것이지만, 후자는 모든 피조물들에 관계한다고 하면서, 그 예정의 실제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는 것이다. 그와같이 유기의 원인도 죄에 원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있다는 것인데, 만약 유기의 원인이 죄에 있다면 만민들이다 죄인들이므로 버림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582년이 기울어지면서 Z.Ursinus는 병을 얻어 오랜 하이델베르그 친구이였던 F.Junius앞에서 1583년 3월 6일 사망하기까지 교회를 섬겼고 이 때에 David Pareus, Fr.Gomarus, Lubbertus Sibrandus 등의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다음 세대 개혁주의들 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 되었다. 즉 그를 하이델베르그에서 쫏아냈던 선제후 Ludwig VI가 같은 해 10월 12이 사망함으로 그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Friedrich가 개혁주의를 다시 받아드림에 따라 Ursinus의 하이델베르그 옛 동료인 F.Junius가 하이델베르그 교수직을 다시 얻었고 또한 그의 수제자인 Davis Paraeus가 1584년에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역시 Daniel Tossanus도 1586년에 교수직을 회복하여 돌아와 1602년까지 가르치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는 헤르보른(Herborn)이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칼빈주의 대학으로 만든 두 기둥 중 하나인 Caspar Olevianus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쫓겨나 선제후 Johann von Nassau의 영역인 Berleburg에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고 이 때 베자의 편집아래 중요한 책들을 펴냈다. 그 후 선제후 Lugwig VI세가 사망한 후 1584년 4월에 학문이 많고 외국어들에 능한 선제후 Ludwig von Wittgenstein가 그를 Herborn으로 데려와서 거기에서 가르치도록 하였다. 같은 해에서 일찍이 하이델베르그 철학교수이였다가 쫓겨나 Neustadt로 피신하였다가, 헤르보른(Herborn) 교수로 부름을 받은 자가 Johannes Piscator(1546-1625)이다. 이 Johannes Piscator는 원래 스트라스부르그의 학창시절에 H.Zanchius의 강의는 들었으나, J.Marbach의 신뢰받는 제자이었고 역시 그 당시 Zwingli의 경향을 가졌다고 알려진 Wittenberg를 피하고 Tübingen를 택할만큼 루터주의의 입장에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H.Zanchius의 강의에 대한 기억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 연구를 통하여 개혁주의의 입장으로 바꾸어 졌던 인물이다. 비록 J.Marbach의 신뢰 속에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으나, 자신의 개혁주의 입장을 감출 수 없었고, 따라서 강의 중에 나타난 소위 Extra-Calvinisticum의 입장과 예정론의 입장 때문에 강제로 강단을 떠나야만 하였던 자이였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된 것은 루터주의자들의 권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Sturm의 보호는 길지 못함에 따라서 1573년 봄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던 하이델베르그에서 철학사강사로 자리를 얻어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별하였던 것이며, 하이델베르그 시절에 Tremellus, Junius, Ursinus와 우대관계를 얻게 되었다. 특별히 그 생애에 가장 영향을 끼쳤던 Caspar Olevianus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Ludwig VI의 등장으로 갑자기 자리를 잃고 거리에 방항하여야 할 처지가 되었으나, 마침 Caspar Oleviansus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자리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Caspar Olevianus는 1587년 3월 12일 사망하면서부터 그가 Herborn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독일 개혁주의 신학의 두 기둥이 사라지고 그의 제자들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의의 원인(causa meritoria justificationis)이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고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입장이 Beza, Grynaeus, Polanus 등에 의해서 거절되었고 1603년 갑대회(Synode von Gap)에서 협오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라로셀 대회(Synode von La Rochelle)에서 그 입장이 변경되었어도 그와 같은 입장을 주장하였던 세당(Sedan)의 Daniel Tilenus(1561-1633)로부터 지지를 받았어도, 시간에 지남 따라 몰리내우스(Pierre du Moulin)의 반대를 받았다. 그 외에 Herborn 대학에서 의미있는 학자로서 Johann Heinrich Alsted(1588-1638)가 있다. 그는 헤르보른에서 철학을 10년 가르치다가 1619년 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신학의 성격 때문에 그는 Keckermann의 제자로 불리어 지고 있지만, 천년주의의 옹호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 전체를 , 선지식(Praecognita),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 요리문답(Catechesis), 스콜라 신학(Theologia scholastica), 실천신학 혹은 교회신학(Theologia practica sive ecclesiastica), 변증신학(Theologia controversa sive polemica)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의 개념에 있어서 모든 계시진리의 샘으로서 성경이외에 다른 것을 신학의 원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Sadeel, Zanchius, Junius, Danaeus 등의 자신의 선행자들을 가지는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념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itionis)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 그 말씀의 부분들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둘째로 하나님의 행위들(actiones Dei)에 대해서로 나누고, 이 후자를 다시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즉 작정과 그것의 집행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서 예정의 집행(executio praedestionationis) 아래 은혜언약과 그것의 다양한 경륜들로의 발전이 다루어지고 있고 여기에 기독론이 종속하고 있다. 자연언약(foedus naturae)과 은혜언약(foedus gratiae)로 나누는데, 멜랑히톤과 관계하는 성격이 있지만, 은혜언약 안에 구약과 신약경륜을 포함하여 기초와 실체에 따라서 동일한 복음을 내포하며 다만 선포와 경영의 양식(modus promulgationis et administrationi)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다.
Herborn에 대학이 생길 즈음에 화란의 Franeker에 대학이 1585년에 생겼다. 그 대학의 첫 학장은 Martinus Lydius(1539-1601)로서 Ursinus의 제자이다. 이미 Ursinus의 제자이면서 동료로서 1567년부터 1576년까지 praeceptor collegium sapientiae로서 봉사였다가 루터주의의 회복시에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 피난생활을 하다가 Franeker 초대학장으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동료교수들인 Henricus Antonides Nerdenus(1546-1614)와 Sibrandus Lubbertus (1555-1625)도 같은 시기에 부름을 받았던 자들이다. 특별히 Sibrandus Lubbertus는 브레멘(Bremen)에 개혁주의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J.H.Molanus의 라틴학교에서 베자의 책을 교재로 하여 개혁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여기에서의 배웠던 동료들이 다시 Heidelberg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에 같이 레이든 교수가 되었던 Johannes Polyander가 같은 라틴학교 출신이다. 다만 Johannes Polyander는 J.H.Molanus를 계승한 Christophel Pezelius 밑에서 공부하였을 뿐이다. 그런 시기를 지나 1575년 Wittenberg, 1576년 Genève에서 공부하였고 이 곳에서 Ubbo Emmius, N.Casaubonus와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1577년 Marburg을 거처 1580년 Ursinus가 있었던 Neustadt에서 Piscator, Pareus, Gomarus와 친분을 갖게 된다. Luwig VI세가 죽고 개혁주의가 Heidelberg 대학에 회복된 이후 Daniel Tossanus이 학장이 되었을 때, 1587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이 학위를 받기 전에 Franeker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상기의 세 교수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로 교수직을 얻었다. Ursinus, Grynaeus, Sadeel의 언어와 스타일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일생의 특이성은 도르트회의에서 정리되기 전에 그의 친구인 Petrus Bertinus와 아르미니우스의 계승자인 Conrad Vorstius와 논쟁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체 내의 동료들인 Johannes Drusius와의 잠언 8장 22절에 관한 논쟁, Johannes Maccovius와의 ‘그리스도의 부활, 마지막 심판, 칭의, 그리스도의 화목의 죽음의 충분성과 그 영향’ 등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의 오래된 친구인 Menso Alting과 함께 대표적 칼빈주의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같은 Franeker 동료인 H. A. Nerdenus(van der Linden)는 Bullinger의 입장을 따르고 새로운 젊은 사람들 Cocceijus, Episcopius등에 대해서 우호적이였다. 또 다른 Franeker 교수로서 Johannes Maccovius(1588-1644)가 유명하다. 그는 하이델베르그 히브리 교수이였다가 30세쯤 되어 폴란드로 옮겨 Dantzig에 있었던 Bartholomäus Keckermann(1571/3-1609)의 제자인데, 폴란드를 떠나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lelberg, Marburg, Leipzig, Wittenberg)을 거쳐 예수이트교도들와 소키니우스주의와 논쟁들을 통하여 개혁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1613년 이래 네델란드에 와서 1613년 10월 21일에 Franeker에 등록하여, 그 다음 해 1614년 3월 8월에 Franeker에서 학위를 받았고 거기에서 사강사로 봉사하다가 1614년 상기 H. Antonides Nerdenus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1615년 1월 28일 extraordinarius Professor, 1615년 6월 16일 ordinarius Professor). 그러나 도르트회의를 기점으로 약간의 차이가 4년 후에 많은 점들에 있어서 자신의 학위논문 지도자인 Sibrandus Lubbertus와의 갈등을 갖는 결과를 얻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해석의 차이가 있으나, 아마 신학적인 근본적 입장에 있어서 차이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Maccovius는 F.Gomarus, Rivetus, Festus Hommius W.Amesius, G. Voetus처럼 강한 타락전 선택설을 입장을 가져, ‘유기자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 결국 파멸한다’(Reprobos necessario peccare ac tandem perire),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과 개인들의 구원을 원치않았다(Christus non vult omnium et singulorum salutem)’는 주장이다.
반면에 Sibrandus Lubbertus는 Hidding의 입장에 반대하여, ‘죄들의 은혜로운 허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인 긍휼일 수 없고 시간상 하나님의 외적역사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형벌로 정하셨다’(Deum destinare aliquos ad poenam)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죄를 의도하셨고 죄가 하나님께서 시준한 목적이었음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non possumus negare, quin Deus intendat peccatum, et peccatum sit finis, ad quam Deus collimat)고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세상을 위해 충분하고 유효하다는 데에 더 강조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Satisfecit igitur Christus pro omnibus homnibus, sed non eodem modo. Nam pro electis merito et efficacia simul; pro caeteris, merito. 그래서 그의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이들의 죄를 위한 만족이였다는 것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의 힘과 열매는 택자들에게와 나머지에게도 유익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일치한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후에 1617년 교수로 부름을 받은 Johannes Acronius(1565-1627)는 Neustadt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Lubbertus의 영향으로 Maccovius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는 Lubbertus의 입장을 지지한다기 보다, Conrad Vorstius(1569-1622), Arminus, Socinus의 입장들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추천하였다는 점에서 Lubbertus의 입장과 다르다.
일찌기 세워진 Franeker대학 이외에 네델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Leiden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Franeker보다 10년 전인 1575년에 세워졌다. 이 대학에서 칼빈과 베자의 제자인 Carolus Gallus(1530-1616)와 Lucas Trelcatius가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으로 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592년 F.Junius가 거의 청강자들을 잃은 C. Gallus 대신 professor primus로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옮긴 이후부터이다. 그가 1602년 흑사병으로 갑자기 죽기까지 레이덴 대학에 머물면서 가르쳤다. 이미 신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레이덴 대학에 와서 신학의 전성시대에 도달하여 많은 저서를 써서 남겼다. 그리고 2년 후에 F.Gomarus(1563-1641)가 교수로 오게 되는데, 후에 도르트회의에서 크게 활약하는 Festus Hommius(1576-1642)는 이 두 신학자들 밑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제자이다. F.Gomarus는 스트라스부르그의 Johannes Sturm 밑에서 공부하였고 1580년 Neustadt에서 Z.Ursinus, H.Zanchius, D.Tossanus, F.Junius(히브리어), S.Stenius(헬라어), L.Pithopoeus(라틴어), F.Crellius 와 J.Jugnitius(철학)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82년 Oxford로 가서 J. Reinoldus의 강의를 들었고 1583년 Cambridge로 옮겨 칼빈의 직계인 W.Whitaker밑에서 B.A.와 M.A.를 마쳤다. Cambridge에서 라무스주의에 접촉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라무스 이론 사이의 종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루터주의로부터 개혁주의로 다시 회복된 하이델베르그에서 D.Tossanus, F.Junius, 바젤에서 와서 루터주의 신학자 Timotheus Kirchen의 자리를 대신하였던 J.J.Grynaeus, Marburg 대학에서 구약교수로 있다가 루터주의 신학자 Marbach 대신해서 그 곳으로 옮긴 Georgius Sohnius(구약, 신조학, 설교학)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피난민 교회를 섬기다가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자 마자 레이든 대학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학창시절의 동료이였던 Antonius Thysius(1565-1640)도 후에 레이덴 대학으로 부름을 받았다. 나이가 조금 많은 Jacobus Arminius(1560-1609)는 F.Junius의 후계자로 1602년에 그 당시 궁중설교자이였고 제네바 유학시절의 같은 동료이였던 Johannes Wtenbogaert(1557-1644)의 압력에 의해서 레이든 대학으로 오게 된다. Arminius는 첫 레이든 출신 교수인 셈이였다. 그리고 초기 레이든 교수이였던 Lucas Trelcatius의 아들인 Lucas Trelcatius(1573-1607)이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elberg, Bazel, Zürich, Genève)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자아래서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1603년부터 레이든에 옮겨 거하는 동안 1606년 교수로 임명된다. 이렇게 최근 교수들이 된 젊은 세 학자들이 공동저서를 낸 것이 『Syntagma disputatiorum theologicarum』이다. 그러나 Arminius와 긴 논쟁으로 말미암아 Gomarus가 레이든 대학을 떠나자 큰 변화가 있었다. 그 자리에 Steinfurt의 Gymnasium Academicum 교수이었던 Konrad Vorst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 학자는 특별히 그의 최근 저서 『Tractatus theologicus de Deo sive der Natura et Attributis Dei』에 의해서 영국 뿐만 아니라 하이델베르그 등의 모든 학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지만, 레이든 교수가 되었다. 이는 역시 아르미니우스를 레이든 교수로 오게 하였던 Johannes Wtenbogaert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궁중설교자로 있는 동안(1601-1617)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초기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인 Jean Polyander(1535-1598)의 아들이요 부레멘의 라틴학교 출신이면서 하이델베르그와 제네바에서 공부하였던 Johann Polyander(1568-1646)가 1611년 10월7일에 새로운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임명이 후기 레이든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념강의 제목은 『De vera S.S. Theologiae existentia ac sublimi natura』이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제자인 젊은 Simon Episcopius(1583-1643)가 그 대음해 1612년 2월 23일에 교수직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갈등의 상황은 도르트회의가 열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고 그 회의에서의 승리가 칼빈주의 신학이 항존적으로 정착이 된다. 바로 도르트회의 이후에 건전한 교수진들로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즉 1619년 7월 20일에 Antonius Walaeus가 Middelburg 대학에서 Leiden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recta instiutione studii theologic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고, 2달 안되어 Antonius Thysius가 Harderwijk대학에서 레이든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theologia eiusque studio capessend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다. 그 다음 해 이어서 Petrus Molinaeus 때문에 Andreas Rivetus가 레이든 대학 교수로 오게 되는데, 이런 변화된 레이든 교수진들에 의해서 차후 네델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력 있는 기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변화가 개혁주의 신학사 전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Z.Ursinus와 C.Olevianus 때문에 Heidelberg 대학이 의미를 얻게 되었고 그가 Neustadt를옮김으로 거기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 옮겨지며, 또한 C.Olevianus가 Herborn으로 옮김으로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처럼, 네델란드에서는 F.Junius와 함께 F.Gomarus가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가 레이든 대학으로 떠나 Middelburg으로 초대받았을 때, Middelburg에는 레이든 대학의 초기제자들인 Castellanus, A.Aurelius, Antonius Walaeus나 G.Voetius 같은 그의 제자들이 목회하거나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으나, 가르치는 일에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Gomarus가 Groningen에 있을 때, 도르트회의에 Middelburg 대학교수로 Antonius Walaeus가 대표하여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Saumur대학에서 자신의 조국으로 갔던 Robert Bodius 자리에 Gomarus를 초청하였을 때, Gomarus는 학장으로서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이든 대학의 자신의 자리를 Conrad Vorsitius가 계승하였던 것처럼, Saumur대학에서의 자신의 자리도 John Camero가 계승하였다. 다만 Groningen 대학의 계승자는 S.Maresius이었다. 어떻든 Gomarus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특징과 그 노선을 알려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신학의 특성을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구별되고 있다.
첫째로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다.
주님 앞에 신비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해서 신중하게 논하여야 하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정은 보편적으로 모든 만물들에게 미치고 특별히 지적피조물 즉 천사들과 인간들에 대한 것이다고 보았다. 인간에 대한 특별한 예정에 있어서 문제는 어떤 인간들을 택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예정의 대상(objectum praedestionationis)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명확히 예지되고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 혹은 창조되고 타락하게 될 인간을 그 예정의 대상이었거나, 명확히 예지되지 않은 인간 혹은 좁게 창조될 수 있었던 인간을 예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마루스의 경우 그들의 입장들에 대한 약점들을 인식하면서도 마지막 견해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변명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의
죽음은 하나님으루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었다는 칼빈주의 독특성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역시 모든 택자들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도르트회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순종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그의 순종의 시작이라 보았다. 역시 Piscator의 입장에 반대하여 그의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였고, 그의 수동적인 의가 그의 자발적인 순종이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에 기초하였다는 입장이다.
셋째로 영국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영향으로 주일성수를 하였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Perkins의 입장에 따라 엄밀한 안식일 성수를 주장하였던 자들이 Middelburg의 설교자 William Teellinck와 Zierikzee의 설교자 Godefridus Udemannus이였다. 역시 A.Walaeus가 그들의 편에 있었다. Godefridus Udemannus는 처음 1612년에 주일성수에 관한 글을 출판하여 1621년에 제 2판을 내었다. 주일성수에 대한 William Teellinck의 또 다른 글이 1622년에 출판이 되고 다시 1627년에 출판되자, 이에 대한 Tolen의 목사 Jacobus Bursius의 반박의 글이 같은 해에 출판됨으로 그 논쟁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논쟁이 W.Teellinck의 편에 있었던 G.Voetius가 같은 해에 자신의 글을 펴냄으로 크게 되었다. 이미 도르트회의에서 논의된 유대 안식일은 지금 폐지되고 주일날만 그리스도에게 지켜져야 한다고 결정하였었는데, 그 때의 결정은 예배에 방해되는 모든 종류의 오락의 금지정도이였다. 지금 Jacobus Bursius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완전하 유대주의를 심을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씨뿌리고 쟁기질하며 수확하고 여행하는 일등은 사람이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Jacobus Bursius의 입장을 Gomarus가 수정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즉 일반적인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나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타당하지만, 특별한 안식일 계명은 주님의 임재까지 유대민족에게만 관련된 것이다. 영원한 언약은 유대적인 안식일이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님의 날 혹은 주일의 첫날은 사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영적인 안식일 지켜야 하고 계시된 예배의 날을 어떠한 더러힘이나 우상숭배함이 없이 거룩하게 경애해야 한다는 온건한 정도의 주장이였다.
위의 세 대학들 외에도 Groningen대학이 1614년에 세워졌다. 첫 primus professor로서 헤르보른 대학에서 신학공부하여 거기에서 잠시(1612년) 교수직을 얻어 봉사하였던 Herman Ravensberger(1586-1625)가 1614년에 이 곳으로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F.Gomarus가 1618년 부름을 받아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후 1625년에 Emden의 유명한 목회자 Menso Alting의 셋째아들인 Henrich Alting(1583-1644)이 Herman Ravensberger를 계승하였다. Henrich Alting도 역시 Herborn 출신으로 Johannes Piscator, Mattias Martinius, Wilhelmus Zupperus 밑에서 공부하였다. 세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Paltz의 선제후 자녀들의 개인교사로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자녀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하이델베르그에 함께 거하기 시작하여 거기에서 학위로 받고 1616년에 교수자리를 얻게 된다. 거기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Abrahamus Schultetus, Paulus Tossanus와 함께 도르트회의에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1622년 하이델베르그에 폭동이 일어나 제수이트교도들의 수하에 들어감에 따라서 갓갓으로 그곳에서 숨어 생활하다가 도시를 떠나 여러 곳으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627년 6월 16일에 Groningen 대학에 자리를 얻어 봉사하였고 1634년에 다시 하이델베르그에 들어 가고자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Groningen에 다시 돌아와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특별히 그의 아들인 Jacob Alting(1618-1679)이 1643년 1월 13일에 Groningen 대학의 히브리서 교수가 되었다. 신학교수는 1667년에 비로서 되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코케이우스와 같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따라서 동료교수인 Samuel Maresius에 의해서 펠라기수주의자, 소키누스주의자, 카톨릭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Groningen 대학의 다른 대표적인 학자는 Samuel Maresius(1599-1673)이다. Samuel Maresius는 F.Gomarus가 Leiden 대학을 떠나 프랑스의 Saumur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후 1643년 Groningen대학에 교수로 옮으로 오랫동안 여기에서 가르쳐 왔던 F.Gomarus의 신학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Gisbertus Voetius와 화합하지 못한 것은 개인적인 성격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J.Alting과 J.Cocceijus에 대한 "Novatores"로서의 비판은 정통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A.Rivetus와 제네바의 동료이였던 F. Spanheim(1600-1649)의 뿌리에 서서 역시 Saumur 대학의 아미롤드주의(Amyraudisme)에 반대하였고 역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사이의 통일성을 추구한 학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의 중요한 인물인 Gisbertus Voetius(1588-1676)는 Gomarus와 Arminius가 레이든 교수로 있을 때, 그들의 제자이다. 1611년부터 계속 목회생활을 하였다가 1619년 여름에 도르트회의의 부름을 받았다. A.Rivetus의 추천에 의해서 Utrecht 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은 것은 1634년이었다. 그 다음 해에 목사로서도 부름을 받았는데, 이 곳에서 42년 동안 섬기게 되었다. 그는 그 학교에 8가지 강좌를 열어 강의하였고 주 중에 사적으로 공적토론들을 이끌었다. 우선 그는 코케이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과 같이 죄의 완전용서를 주장하였고 역시 구약성도들도 신약에 성도들과 같은 방식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Coccejus는 παρεσις와 ἀφεσις 사이의 차이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구별은 Johannes Chrysostomus, Photinus, Theophylactus, Beza, Johannes Cloppenburg에 호소하였으나, Voetius는 시대나 인간의 어떤 구별없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고 시편 103편 3절, 시편 65편 4절, 시편 85편 3절은 ἀφεσις의 용서(ἀφεσις-remissio)를 말한다고 대변하였다. Voetius의 이런 논증과 반대는 코케이우스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 사이의 질적이고 양적인 차이(Spiritus servitutis ad metum, Spiritus adoptionis)에 대한 반대논증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건전한 선교신학의 효시자가 바로 Voetius의 선교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교회개척론에서(De plantatione ecclesiarum) 선교의 목적은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되었던 것은 그의 섭리에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였다. 이에 따라서 선교의 대상에는 이방인들, 유대인들, 모슬렘인들을 포함하는 불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이단들(haeretici), 분리주의자들(schismatici)을 포함하고 있었다. 파송인들에 대해서도 선교사들, 조사들(adjutores), 다른 조력자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구체적인 선교의 수단들도 다양하게 논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화란 땅의 신학적 분위기와 그 배경과 함께 다른 유럽지역에서 발전을 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Marburg 대학은 17세기 초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1584년 Heidelberg 대학의 교수로 발탁된 Georg Sohnius(1551-1589)는 이미 1574년에 사강사로 1575년에 구약교수로서 활동하였으나, 늦게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음이 알려지고 있고, 칼빈주의에 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부쪄의 신학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성격처럼 처음부터 대학은 칼빈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예정론에서 그러하였는데, 그런 요소는 Lambert von Avignon, A.Hyperius 등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그 중에서 아주 독립적으로 사고하였던 A.Hyperius의 저서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1569년이래 Wilhelm IV세 아래 Georg Sohnius의 신학적 입장이 더 신뢰를 얻게 되어,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와 비텐베르그 교리 사이의 중용입장이 유지되어 왔었다. Willelm IV세의 다른 형제 Luwig IV세가 죽은 후, 그를 선제후 Moritz에 의해서 계승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선제후는 팔방의 학자(시인, 작곡가, 수학자, 건축가)로서 여러 언어들(불어, 영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히브리어)을 구사하거나 알았던 제후이었다. 그가 루터주의의 성례론을 결정적으로 싫어하였다. 그래서 베자와 친말한 관계를 가졌고 선물을 가지고 84년의 노년의 베자를 두 번의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1605년에 3 가지 점들을 개혁하도록 하였는데, 첫째로 그리스도의 위격 중에서 신성이 다만 구체적으로 즉 인성자체가 아니라 전 그리스도로부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로 상들을 없애고 십계명이 가르쳐 져야 한다는 것, 셋째로 성만찬에서는 규정에 따라서 빵이 떼어져야 한다는 것등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었다. 또한 교수들 중에서 루터주의자들인 두 교수들(Winkelmann, Balthaser Mentzer)이 경질되고 그 대신 Mother와 Caspar Sturm이 그 자리를 얻었다. 2년 후 궁중설교자로 Schönfeld가 들어 왔다. 이렇게 하여 이 지역에서 개혁주의 대표자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는 총대들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멜랑히톤의 신학이 대표해 왔기 때문에, A.Tholuck은 예정론에 대한 판단도 멜랑히톤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 후 Schönfeld가 Johnnes Croc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는데, 그는 궁중설교자이면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료 헤센주 궁중설교자 Neubauer와 함께 보편적 은혜를 좋아하여 절대적 작정(decretum absolutum)을 던져 버렸다. 네 번째 신학교수는 Eglin이었다. 이 사람이 바이겔리우스주의 즉 신비주의 혹은 천년주의를 반대하여 싸웠다. 이를 이어 Sebatian Curtius, Johannes Heine, J.G.Crocius등이 활동하여 루터주의나 데카르트주의를 경계하였다.
그 다음은 개혁주의자들의 도시 Bremen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이 도시는 Jena에서 공부하였고 멜랑히톤 신학의 대표자인 Christoph Pezel이 이 곳에 라틴학교에 온 이후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 Nassau에 와서 교회의식에 대한 입장에서 칼빈주의로 변화하였다. 그 지역은 멜랑히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그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가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레이든 대학의 부름을 거절하기까지 브레멘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도시가 칼빈주의의 다른 한 중심지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더 발전은 Emden에서 부름을 받은 Matthias Martini가 1610년 학장으로 옮으로 시작되었다. 역시 Marburg의 J.Crocius의 형제인 Ludwig Crocius가 같은 해에 구약교수로 왔고 1612년에 Isselburg와 Pierius가 교수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대표하여 Matthias Martini와 Lugwig Crocius가 참여하였다. A.Thouck이 지적하기를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온화한 입장으로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입장이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강제로 서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교회회의가 악을 크게 하였다는 입장이였다는 것이다. Lugwig Crocius는 후에 1641년의 한 편지에서 그들은 보편은혜 혹은 충분한 은혜를 좋아하였다는 고백을 인용하고 있다. 그 밖에 특별히 J.Coccejus가 브레멘 출신이였고 화란으로 옮기기 전에 브레멘에서 상당한 기간동안 철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위스의 개혁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먼저 Zwingli의 개혁도시인 Zürich의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Zwingli외에도 Leon de Juda, 히브리어 학자인 Pellicanus, Theodore, Bibliander, Bullinger, Ludwig Lavater, Gualter, Petrus Martyr, 교회사가 Rud.Hospinian등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되었고 계속 인척관계 속에서 계승되었다. Zwingli의 사위가 Gualter이고 Gualter의 사위들이 Ludwig Lavater와 Jose Simler이다. 또한 Ludwig Lavater의 사위가 Hospinian이었고 그의 사위인 Wilhelm Stucti가 1563년 신학교수가 되었고, Jose Simler의 사위가 Casper Waser인데 그는 1651년에 신학교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Bullinger가 타락후 선택설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스트라스 부르그의 Zanchius는 1561년 자신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을 Bullinger, Ludwig Lavater, Jose Simler, Gualter등으로부터 동의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etrus Martyr의 예정론의 경우에도 엄밀한 예정론이 실천적 의미에서 온화하게 자리를 잡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와서 신학교수들로서 1625년 조직신학 교수가 된 Johannes Jok. Huldricus, 1642년 22세로 교회사 교수가 된 Johannes Hein. Hottinger, 1649년 히브리어와 요리문답 교수가 된 Caspar Suicer, 1651년에 논리학 교수가 된 Johannes Wirtz, 1661년 윤리학 교수가 된 Caspar Heidegger 등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Wittenberg와 같이 Genf나 Zürich의 경우에도 성경주석이 교육의 시작이요 모든 것이었다. 이런 훈련의 예가 소위 예언회(Prophezei)라는 모임의 경우이다.
바젤에서는 맨 먼저 J.Jak.Grynaeus(1540-1617)는 바젤의 루터주의자인 Antistes Simon Sulzer(1508-85)의 제자이였고 튜빙겐의 유명한 루터주의 신학자들(Andreae, Heerbrand, Schnef) 밑에서 공부하였으나, 70년대에 교회교부들의 독자적 연구들에 의해서 개혁주의로 옮겼던 자인데, 이로 인하여 화해가 없이 열렬한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미움을 받게 되었던 인물이다. 1575년 이래 바젤의 구약교수이였으나, 아마 역시 그로 인하여 하이델베르그로 옮기게 되었으며, Sulzer 사망이후 그의 후계자로 1586년에 다시 바젤로 돌아와 구약으로부터 바꾸어 신약교수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젤을 칼빈주의적인 사상으로 바꾸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가 1534년 바젤고백을 칼빈주의적으로 1589년에 재해석하여 출판함으로 반루터주의적인 성격으로 바꾸게 하였고 1598년에는 모든 목사가 그 바젤고백을 의무화하도록 하였다. 그의 제자로서 그의 사위로서 후에 유명하게 된 자가 Amandus Polanus(1561-1610)이다. 이미 Gymnasium in Breslau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친밀하게 되었고 튜빙겐 대학에의 연구초부터 루터주의적인 성만찬론에 대한 반대자로서 동시에 개혁주의 예정론의 신봉자로서 증거되고 있다. 바젤, 제네바,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그렇게 Polanus는 베자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 드렸던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비록 멜랑히톤의 소요학파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받아 드렸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근원적으로 비판한 Ramus의 논리를 일부 받아 드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J.J.Grynaeus의 영향하에 1590년 바젤에서 학위를 마쳤고 그 후 9년 후에 Johannes Brandmüller(1533-1596)의 후계자로 구약교수로 자리를 얻게 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Piscator, Olevianus, Beza의 제자로서 Basel의 교수가 된 사람은 Johnnes Buxdorf(? -1629)이다. 1590년이래 히브리어 교수이였는데, 영감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입장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진보적인 Saumur 대학의 Ludwig Cappellus의 영감론과 갈등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 Johnnes Buxdorf가 같은 대학에서 1630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 1647년에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고 1659년 아버지를 계승하여 구약교수가 되었다.
2.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고 볼 수 있다. 영국국교회의 신학인 감독주의 신학 혹은 아카데미 신학도 오랫동안 카톨릭주의와 첨예하게 싸우는 종교개혁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 신학이였다고 볼 수 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죤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죤 낙스의 친구이었던 죤 폭스의 칭의론은 루터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에드워드 6세때(1550) 런던주교 리들리(Ridley)의 종교개혁은 성만찬에 있어서 제단대신 테이블로 바꾸는 것도 큰 개혁이었다. 그 개혁은 루터주의로부터 더 나아간 개혁이었지만, 부쩌, 오에콜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피터 마르티르, 라스코, 헤디오, 카피토등이 공히 개혁하고자는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쮸리히에서 돌아온 후퍼(Hooper)는 1550년 7월에 왕에 의해서 주교로 임명을 받았을 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나는 맹세의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과 성령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론적인 복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단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리들리는 복장문제는 별문제가 아니다고 법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후퍼의 이런 개혁정신은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와 같은 정신이였다.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가 그 땅에 피신하여 있었어도 그렇게 종교개혁은 유아기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여왕 집정 초기에 완성된 영국 국교회 39개조항은 바로 이런 유아기 시기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던 42개조항에 의해서 기틀을 잡은 것을 다시 수정한 고백이었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난후 메리여왕의 핍박시대에 대륙으로 피신한 종교개혁적 성직자들이 엘리자베트 여왕 즉위와 함께 영국 땅에 들어오나, 엘라자베트 여왕의 종교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의 회복에 불과하였다. 에드워드 6세때의 종교개혁인물들(Rogers, Hooper, Ridley, Latimer, Cranmer)은 메리여왕시 화형을 당하였고 그 때 277명이상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유산을 보존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핍박으로 인하여 지하교회가 형성되게 되었고 800명 이상이 바젤, 프랑크푸르트, 엠덴, 스트라스부르그, 두이스부르그, 알로우, 쭈리히등으로 피신하였다. 루터주의자들은 이들을 받아드리 않았고 오히려 쫓아냈다. 그 말은 그들 피난민들이 개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프랑크푸르트에 피신한 자들중에 단순히 에드워드 6세 때의 고백과 의식들을 넘어서 좀 더 개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이 죤 낙스, 죤 베일, 죤 폭스등의 인물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칼빈의 개혁사상과 가까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무스쿨루스, 마르티르, 불링거, 비레)의 정신들과 연결되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의 개인교수이였던 콕스(Dr.Cox)를 중심으로 에드워드 왕의 예배모범을 고집함으로 분열이 생겼고 더구나 이들이 타국 관원의 재가를 받아냄으로 여기에서 개혁하고자 하는 자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일부의 인물들이 거기를 떠나 바젤, 제네바로 떠나게 됨으로, 엘리자베트 여왕시대의 퓨리탄들과 융화자들(conformists)이 분리되는 상황이 형성된 것이다. 그때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제네바로 간 인물들이 교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후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의 교회정치원리와 예배모범(The Service, Discipline, and Form of Common Prayers and Adminstration of Sacraments used in the English Church of Geneva, Feb, 10th 1556)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들로부터 또한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발생(1560년)하였다. 이들이 바로 영국이나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의 주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자베트 여왕 시기의 철저한 종교개혁정신이 있었다면, 그것은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퓨리탄이란 개념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을 회복한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에 영국의 종교개혁의 법적인 통일성에 동의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비난의 용어(주후 3세기의 용어, Cathari 혹은 Puritani)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네바쪽에서 온 퓨리탄들의 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때의 종교개혁을 더 철저히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란드 장로교 신학이 그것의 전신인 제네바의 영국교회으로서 한 맥을 이룬다면,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의 제네바 종교개혁정신이 장로교 신학의 다른 본맥을 결정하고 있다. 그 예로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싸웠던 동료교수 화이트깁트(John Whitgift)는 일부 교리에 있어서 철저한 칼빈주의자이였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더 철저한 칼빈주의로 나아갔던 카트라이트의 신학적 입장과 싸우고 과격한 핍박자가 되었기 때문에, 장로교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그런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지 않은 칼빈주의와 구별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넓게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영국 국교회주의자들이란 개혁주의자들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이름아래 우리와 구별되면서 서로 고통과 피를 흘려야 하는 신학적 다양성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개혁주의는 에드워드 6세때(1547년이후 1553년 메리여왕의 등
지)의 토마스 크렘머(Thomas Cranmer)의 개혁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카트라이트 논쟁이고 세째로 같은 화이트깁트와의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바로우주의자들의논쟁, 네번째로 람베트 선언서(Lambeth Articles)의 중요한 사건이다. 크렘머는 에라스투스주의자로서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봄이 좋다. 그런 에라투스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 장로교 운동이다.
교회정치형태로 보아 장로적인 노회가 처음 생긴것은 1572년이지만 그런 노회의 전신이 장로교 성직자들의 모임인 ‘예언회’(The Prophesyings)가 그 전부터 있어 왔고 카아트라이트의 주장들은 그 당시 새로운 것들이 아니였음을 이미 Daniel Neal의 퓨리탄 연구에서 증명되었다. 오히려 그 때의 교회개념이 70년 후에도 여전히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 웨스트 민스터 회의 정치론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그 ‘예언회’들은 주교아래서 활동하였고 발전되었다. Edmund Grindal 대주교 당시 1582년 4월 6일 스코틀란드 장로교에서 임직을 받았던 성직자 John Morrison에게 강도권을 받음으로 장로교적 형태의 임직이 인정되게 되었다. 역시 목회자들의 모임에 스코틀란드 성직자들도 포함되었다. 즉 이런 성격은 주교정치형태아래 장로교 성직자들이 포섭되는 타협주의 노선의 모습이다.
장로교의 근본적 성격이 드러난 것은 비타협주의 운동이 갖는 신학적 다른 입장들과 함께 드러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란 철저한 칼빈주의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란, 첫째로 에드워드 6세 때 Cranmer의 개혁유산인 ‘공동예식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받지 못하는 정신에서 나타났다. 그 예식서는 성례식, 공적 사적 기도, 임직법에 대한 규례들에 대한 것으로서, 그 예식이 교회법으로 강요됨으로 퓨리탄 정신이 일어났다. 예식서의 가르침과 반대로 퓨리탄들은 생각하기를, 세례시 무릎을 꿇고 서서 받거나 상관이 없다. 십자가 사용할 필요가 없다. 입교문답을 하고나서 주교에게 안수받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않된다. 카톨릭주의자들처럼 예복(Gown, Cap, Tippet, Supplice)을 입을 필요가 없다, 주일을 온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외경을 읽을 의무가 없다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그 예식들에 대한 타협주의자들과 비타협주의자들이 일어났다. 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성직의 정직, 옥살이,도피,추방, 침묵이 퓨리탄들의 역사이다. 이런 반대입장이 확장되지 않도록 그 예식서를 강요하고 일반가정에서 퓨리탄들이 설교, 가르침,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역시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싸웠던 Whitgift가 대주교가 되어 발령된 5가지 금지령이 퓨리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여기에서 그가 ‘공동예식서’와 ‘39개조항’을 내세웠을 때, 에드워드 6세의 개혁정신을 계승하고 고집하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반면 브라운주의자들인 Elias Thacker과 John Copping도 비타협주의자들로서 정죄되여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거의 10년후에는 강하게 그 브라운주의 운동이 일어나 투쟁하여 영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 인물들로 Henry Borrowe, John Greenwood, John Penry등이었다. 이런 브라운주의자들과 다른 이단, 예를들어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신성화 되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소위 ‘사랑의 가족’(Family of Love)과 혼합되여 혹은 그런 이단의 오해 아래 퓨리탄들도 핍박을 당하였다. 그래서 외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같이 비타협적인 길을 간다 하는 자들에 의해서 또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고통이 정리된 것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인데, 첫째로 1586년에 ‘공동 예식서’에 대응하는 장로교의 원리에 따라 정치와 권징에 관한 새로운 고백서가 작성되어 서명되었던 사건이다. 이 고백서는 월터 트레버스의 라틴본, 이것이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번역된 월터 트레버스의 영어역본, 일반적으로 사용을 위해서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간단히 정리된 장로교 정치지침서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고백서에 서명한 인물들은 퓨리탄의 아버지인 Thomas Cartwright와 Walter Travers이외에 Edgerton, Barber, Gardiner, Payne, Fenner, Field, Snape, Lord, Farmer, Rushbrook, Wilcox, Whitaker, Perkins, Gellibrand, Cawdery, Udall, Dyke, Paget등과 더불어 500명이상의 인물들이였다. 그러나 아직 이들 대부분이 에라스투스주의를 포용하는 자들이었고, 일부는 온건한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스코틀란드 개혁에 자극을 받아 그 개혁에 부응한 종교개혁이 웨스트민스터총회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이 때 비로소 에라투스주의자들과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장로교회주의자들과 분리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열매들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리와 그들의 새로운 고백서로 말미암아 그리고 왕정고백으로 인하여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정통 개혁주의 노선과 관련하여 판단할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 전까지 단순히 비타협주의자들 혹은 퓨리탄이란 말은 바른신학적 노선에 관련된 말로 이해할 수 없다.
3. 화란 땅에서의 장로교적인 개혁주의 신학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더불어 영국에서 정식 임명되었어도 실제 쫓겨났다고 할 수 있는 왈터 트레이버스(Walter Travers)가 장로교 성직자로서 처음 Antwerp에서 힘있고 부요한 의복상인들의 설교자로서 부임하여 섬겼으나(1578-1580), 스페인과 전쟁 때문에 그 버려야 하기 때문에 1582년에 Middelberg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Thoams Cartwright가 와서 그 교회를 섬기게 되고(1582-1585), 그 다음 Dudley Fenner(1585-1587)가 섬겼다. 급진주의자인 Francis Johnson(1590-1592) 전까지 그 곳 상인들의 교회는 장로교 교회로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로교는 이 후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예배모범이나 고백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강하게 거절한 역사를 가진 교회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미 카트라이트가 여기에 와서 섬기는 과정에서, 그 도시의 다른 피난민 회중교회가 있었든데, 이 교회를 이끌었던 로버트 부라운(Robert Browne)가 1584년에 영국으로 돌아가고 그의 조사이였던 로버트 헤리슨(Robert Harrison)도 1585년에 사망하자 그 교회는 해체되었고, 그 해체된 30 내지 40면의 회원들이 카아트라이트가 이끄는 상인들의 장로교회에 합세하였다. 이런 부라운주의자들은 그 교회의 내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별한 이 상인들의 교회에 스코틀란드 출신의 비타협주의 장로교 성직자인 죤 폽스(John Forbes, 1558-1638)가 부임하여 그 교회를 계속 맡았는데, 그는 토마스 카아트라이트나 월터 트레버스와 친밀하였던 Andrew Melville의 제자이였다. 스코틀란드의 왕이 칼빈주의적인 스코틀란드 교회를 영국국교회 정치형태로 바꿀려는 맹렬한 와중에서, John Forbes가 총회의장으로서 있었던 1606년 7월의 총회의 기점으로 교회위기에 들어섰었고, 그로 인하여 1606년 11월에 여러 동료들과 함께 유배되었다.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니다가 1608년 초에 Zeeland에 정착하게 되었다. Vere에 있는 스코틀란드 교회의 설교자로서, Vlissingen의 군인교회에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독일 북쪽 Stade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에서 설교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Middelburg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를 맡고 있었던 Lawrence Potts의 부목사로 섬기게 된다. Lawrence Potts가 그 곳을 1612년에 떠나자 그 교회를 그가 맡게 되었다. 그 후 1621년에 상업적 이유로 Delft로 옮겨 섬기게 되었는데, 그가 퓨리탄들의 핍박자인 윌리암 로드 주교에 의해서 임명된 성직자(George Beaumont)에 의해서 1635년 교체될 때까지, 뚜렷히 장로교의 성격을 가진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교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이 교회가 영국교회의 예배모범과 달리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배모범(Booke of the Forme of Common Prayers,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 Agreable to Gods Worde, and the Use of the Reformed Churches, Edinburgh 1584, reprinted at Middelburg)이 칼빈의 것(La forme des prières et chantz ecclesiastiques avec la maniere d'administrer les Sacraments et consacrer le Mariage selon de coustume de l'Eglise ancienne, 1542)이나 스코틀란드의 예배모범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의 교회형태가 메리 여왕시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하여 피난민 교회형태와 함께 역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부분이다. 이미 Walter Trewers가 섬겼던 시기인 Antwerp의 상인교회에서부터 피택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모범의 특성 중 세 가지가 화란개혁교회와 다른 것들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로 목사나 장로임직이 17세기의 장로교의 표징이 되었던 목사의 안수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 점, 둘째로 교사들(doctores)에 대해서 더 많은 책임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 셋째로 노회의 근원이고 영국 퓨리탄들과 스코틀란드에서 보편적인 소위 ‘예언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예배모범의 특성들 이외에도 이 지역에서 처음 1621-1628/1633에 소위 장로교 노회(‘English Classis’, ‘Presbytery’, ‘ Delph Classis’)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노회는 처음 1622년 4월 20일에 개최되었는데,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화란교회로부터 자유를 선언하였다. 자신들의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값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선포하였고 매 노회마다 새로운 회장과 서기를 선출하였고 자신의 노회보다 더 높은 교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미 첫 회집에서 목사회원권 문제를 다루어 다음 회기까지 그 목사의 소명에 대한 증서를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1623년 4월 12일에 개최된 제 2차 영국노회에서는 John Forbes가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고 John Wing이 서기로 선출되었는데, 17명의 목회자들 중에 12명만 증서들을 제출하고 다섯 목회자들은 제출하지 못했다. 그 중에 레이든에서 목회하였던 Hugh Goodyear가 첫 집회에만 참석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참석하지 않았다. John Paget가 목회하고 있었으나 화란교회에 속해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는 제 1차 집회에서 방청객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퓨리탄으로서 유명한 John Paget 역시 그 노회를 분리주의자들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John Paget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의 후임을 위해서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에 속한 회중교회파들이 본국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Thomas Hooker를 초빙하였을 때, John Paget가 이를 막았다. 왜냐하면 Thomas Hooker가 회중교회의 입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부 반대자가 있었을지라도,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있었으면서 Thomas Scott(Utrecht에 교회목사로), 그의 사위인 John Oswald(Dordrecht에 있는 교회목사로), Steven Paine(종군설교자로), Jeremiah Elborough(Thomas Scott의 후임목사로), Henry Sibbald(Nijmegen에 있는 교회목사로), George Clark(종군설교자로), Maximiliaan Teellinck(John Wing의 후임목사로) 등이 임직을 받아 장로교 목회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임직은 노회장과 다른 두 목사회원의 입회 하에 노회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목사시험으로서 이미 설교과목이 알려져 있고, 그 임직방식도 설교 이후 강단에서 내려와 임직을 받은 자로 하여금 무릎을 꿂게하여 안수하였다. 그밖에 제 2 차노회에서는 도르트회의의 결정에 모든 회원들이 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예배모범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한 두장의 성경봉독, 시편송, 설교의 순서를 확증하였으며 성만찬 집례시 전달하고 받는 일 만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회활동은 본국의 영국교회로부터 늘 압력이 있었는데, 1623-24에 제임스 1세는 그 노회에 ‘항존의장(perpetual moderator)’을 임명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1624년 4월 17일 노회에서 John Forbes를 보내기로 결정함에 따라 런던에 와서 도르트회의에 참석했던 George Carleton의 중재로 왕에게 그 사정들을 전하였는데, 그 노회에 주교를 임명하면 보르스티우스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유익을 얻을지 모르는 큰 불안을 야기할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 점에 있서 왕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1627년에 와서 그 노회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소개하고 새로운 목사들을 시험하고 임직하는 것을 금하였고 결국 1628년 8월은 그 노회의 마지막 회집이 되고 말았다. 1632년 4월에 다시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관원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소집이 되지 않은 1633년 3월로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장로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 당시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아직 젊거나 태어나지 않은 때이므로 이런 교회들의 신학들은 화란 신학의 분위기를 형성시켜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화란교회와의 관계에서 출판한 John Forbes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글이 중요하다. 그가 그 논쟁의 글에서 나타난 입장은 Johannes Maccovius에 의해서 최근에 야기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열띤 논쟁동안에서 나타난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가 이 글에서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보증을 얻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과 성정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정되었다는 사실이 선행의 생활을 인도하였다. 역시 참된 신자만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중생의 필요, 택자의 소명과 성화에 강조가 있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교회정치에 반대하여 딤전 6:13에 근거하여 목사들의 군주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성직제도를 비판하였다. 한 때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인 Thomas Hooker(1586-1647)가 이 John Forbes밑에서 조력 목회자로 일하였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경건한 신학자들이었을지라도, 여러 가지 점에서(회중의 권위에 대해서, 분리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교인이 아닌 자들의 유아들의 세례에 관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칭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 견해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4. 스코틀란드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서 두드려진 신학자들은 죤 낙스, 죤 크래그(John Craig, c.1512-1600),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등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종교개혁자들 중 신학적인 종교개혁한 자는 앤드류 벨빌이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성경에서 주교와 장로의 개념은 같다는 칼빈의 개념을 도입하여 장로교의 뿌리되는 입장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제네바에서 베자나 카아트라이트와 회우와 밀접히 관계한다는 사실도 주목되고 있다. 그 후 그의 제자들이 에딘버러 대학과 글라스고우 대학에 엄밀한 칼빈주의 신학을 심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과 로버트 보이드(Robert Boyd),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1618년 퍼스 선언이후 반동이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도르트 회의 선언에 반대되는 사상인 조건적 선택사상과 보편구원론을 글라스고우의 로버트 보이드를 계승한 카메론(John Camero)이 주장하여 그 추종자를 얻게 되었고 그는 다시 불란서의 소무르(Saumur) 대학으로 가 유럽에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아밀로드(Amyrauld)를 제자로 길러내었다. 이런 입장은 리차트 박스터에 의해서 다시 주장되어 박스터주의를 영국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글라스고우에만 퍼진 것이 아니라 에버딘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들고 일어난 사람이 1618년에 폽스(Wm. Forbes)와 로버트 베이론(Robert Baron)이다. 그리하여 이런 주장에 넓게 인정되었고 받아 드리게 되었으나 1636년에 비로서 사무엘 러더포드에 의해서 논박되기에 이르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에게 제한된다는 강한 칼빈주의 주장으로 반박하게 된 것이다. 결국 1638년 스코틀란드가 장로교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정죄됨으로 장로교 신학의 뿌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1638년 총회의장인 데이비드 디킨스(David Dickson)에 의해서 강하게 그런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 비난되었고 그 다음 총회의장인 알렉산더 헨더슨의 직임기간에 앤드류 멜빌의 제자이기도 한 로버트 롤록까지도 그런 보편주의 구원론에 관한 주장에 대한 의혹속에 정죄되기도 했고 죤 폽스는 아르미니안주의로부터 자신이 떠날 것을 선언하였어도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에 대해서 맹세하지 못하여 1644년에 화란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이론를 추종하는 자들도 1639년에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렇게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전에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신학적 깊은 뿌리에 도르트회의 신조가 확고히 정착되였고 그 위에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은 장로교의 정치원리에 대한 스코틀란드의 신학적 뿌리와 함께 장로교의 중요한 신학적인 입장이 되고 있다.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앞 단원에서 칼빈의 직접적인 제자들로서 베자(Theodor Beza)와 다네우스(Lambert Danaeus), 비렐리우스(Matthaeus Virellus)등이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그늘에 있던 자들은 그들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여러 종교개혁 신학자들로부터 동시에 영향받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종교개혁 2세들은 대개 루터로부터 물론 쯔빙글리,오클람파디우스, 불링거,부쩌, 피터 페어밀리우스, 멜랑히톤등의 개혁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나 불링거는 조직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책을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영향은 당연히 이런 조직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좀 더 교의적 소재들에 따라 외적으로 더 잘 정리한 개혁주의 학자는 피터 페어밀리우스라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칼빈의 영향권아래에 있다. 비록 피터 페어밀리우스가 칼빈보다 조금 어리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항상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고 그의 총명과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불링거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바젤의 오에클람파디우스는 불링거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페어밀리우스에 의해서 꽃이 피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을 포함한 많은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페어밀리우스처럼 이런 교의적 소재에 따라 교리를 조직화한 인물로서 베른학자들인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와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를 들 수 있다. 무스쿨루스의 교의적인 입장은 절충적이었고 언약론에 있어서 두 언약론을 주장하였어도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과 자연보편적인 노아의 언약 사이를 구별하였다.
후대 스콜라적인 신학체계는 케커만(B.Keckermann), 폴라누스(Polanus), 알스테드(H. Alsted)등이지만, 알스테드는 이미 이런 스콜라적인 신학을 샤델, 쨘끼우스, 단니수스, 유니우스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스콜라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령자신의 신탁들로 정의되고 있다. 가르침의 체계에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가진 자는 안드레아스 휘퍼리우스(Andreas Hyperius)이다. 물론 그가 외적으로 교의학소재들에 따라 기술하고 있으나, 그러나 내용상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얻은 인상처럼 예정론에 근거한 교회론위에 그의 신학체계의 골격을 잡고 인간타락전 교회(Ecclesia ante lapsum), 인간타락후 교회(Ecclesia post lapsum), 영광의 교회(Ecclesia gloriae)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취리히신학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역시의 칼빈이 취하였던 취리히신학적인 요소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사상을 이어 체계화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롬 쨘키우스는 엄밀한 칼빈주의자로서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1560년동안 마르바흐(Marbach)와의 예정론에 논쟁이 알려지고 있다. 물론 루터주의안에서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적인 것이 드러난 것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백된 ‘협화신조’(Konkordienformel)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펴낸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안우스의 신학들이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는 루터주의적인 그리스도의 보편편재(Ubiquität)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독특성(Extra-Calvinisticum)이라 부르는 기독론 논쟁이 그것이고 둘째로 이 기독론과 연결된 성례론 논쟁이며 세째로 우르시누스와 논쟁이 된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처음 두 가지 논쟁점들은 루터주의로부터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고정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개혁주의 신학 다양성안에 논쟁되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밖에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루터주의적이고 제세례파주의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us)에 대한 반대입장인 율법의 제 3사용은 이미 종교개혁주의 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성이다. 문제는 이 우르시누스의 제자들(F.Gomarus, Lubbertus Sibrandus, David Pareus)사이에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논쟁으로 첨예화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내에 남아 계속된 논쟁점이다. 우르시누스는 언약론에 있어서 Olevianus나 F.Junius의 자연의 언약의 개념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을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고 예정론에 있어서도 칼빈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택자를 위한 구원임을 세웠고 유기의 최종원인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찾았다. 이 논쟁점은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논쟁과 언약론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논쟁점들 하나로 남아 있다. 어떻든 이들 제자들은 그가 루터주의자들(루이 6세 때) 때문에 피신하여 프리데릭 3세의 아들인 Johann Casimir의 보호받아, 신학교가 세워졌던 노이스타트(Neudstadt)나 헤르보른(Herborn)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 중 특별히 브레멘의 Matthias Martinius와 Ludwig Crocius의 제자중에 Johannes Cocceius가 그들의 제자이였음을 관심할 필요가 있다. Samuel Rutherford는 Crocius를 루터주의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예정론논쟁이 개혁주의 신학의 이전과 이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 중요한 도르트회의는 이미 화란 땅에서 예정론논쟁의 배경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까지 칼빈을 따랐다가 1544년 아가서와 그리스도가 지옥까지 비하하신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 바젤로 떠나게 되었던 세바치안 카스텔리오(Sebatian Castellio, 1515-1563)가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을 비판하였는데, 사후에 출판된 그의 글(De Presdestinatione, 1578)이 화란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서 번역되었다. 1578년 그 번역자(Dirck Volckertszoon Coornhert)와 델프구역의 설교자들(Donteclock, van der Linden)사이에 생긴 예정론에 대한 논의가 화란에서 예정론 논쟁의 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의과정에서 델프지역의 설교자들이 칼빈과 베자의 견해를 포기하고 불링거 입장인 타락후 선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칼빈과 베자의 입장에 의혹적인 델프의 설교자들은 타핀(Taffin)과 바스팅기우스(Bastingius), 그 당시 레이든 교수이였던 단네우스(Danaeus)와 우트레히트 설교자 헬미키우스(Wernerus Helmichius), 그리고 프라네커 교수 리디우스(Lydius)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자문한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칼빈의 생각에 만족해도, 정확하게 그를 모범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였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간입장이 개혁주의 신학내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 젊은 설교자 아르미니아누스(Arminius)가 있었다. 그는 제네바의 베자밑에서 공부하였고 그 당시 그의 소문은 좋지 않았으나 신용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리디우스로부터 호의를 받은터라, 자신의 스승인 베자의 개혁주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를 기대하여 그에게 그 문제를 맡게 되었던 것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논쟁의 시작이였다. 아르미니우스에게 있어서 문제되었던 점은 예정의 대상이 누구이었느냐에 대한 것이였다. 1604년이전에는 다만 개혁주의 전통에 있어서 칼빈, 베자, 유니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논평하는 선에서 참여하였으나, 1604년에 처음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였다. 그 때는 대표적인 창조전 선택론자들인 유니우스와 트렐카티우스가 흑사병으로 죽게 되어 그 유니우스를 대신하여 아르미니우스가 되었을 때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의 근거는 예지된 신앙(fides praevisa)이요 따라서 예정의 대상은 타락한 인간(homo lapsus), 창조해야할 인간(homo condendus), 창조된 인간(homo conditus, homo creatus)이 아니라, 믿을 사람(homo fidelis)이다는 것이다.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설이란 이런 낱말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화하였던 사람들이 Helmichius와 Plancius이다. 그들의 비판앞에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위해 Sohnius와 Polanus에게 호소하였다. 아르미니우스의 동료이였던 고마루스는 이 당시에 그렇게 비판적이 아니였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였다. 그런 견해는 스콜라신학에서도 추적할 수 있고 이미 영국에서 화이테이커(Whitaker), 퍼킨스(Perkins)와 틴달(Tindall)에 의해서 반박된 바로(Baro)의 주장과 네델란드에서도 레이든의 노장교수중 한 사람인 홀만(Holman)의 주장에 그 선례가 있었다.
이런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빈, 베자, 피스카토르, 마르티르 페어밀리우스, 쨘키우스, 우르시누스의 선에서 이어지는 주장과 벗어난 주장이였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들(Confessdio Gallicana 1559, Art.XII; Confessio fidei et doctrinae per Ecclesiam Reformatam Regni Scotiae professae 1560, Art.XVII; Thirty-Nine Articles 1552,1562, Art. XVII; Lambeth-Articlels 1595, § 1;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 § 12-13)과도 벗어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회의가 열릴 쯤에는 고마루스, 페스투스 홈미우스(Festus Hommius), 트리글란드(Trigland)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 그 외에 고마루스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Hieron. Vogelius와 Casp. Sibelius가 그런 옛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도르트회의 참석자들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든 학파의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Walaeus, Thysius, Lubbertus)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이였고 도르트회의에서 그의 글이 거의 채택된 Bogerman의 경우우 항변파들이나 영국과 브레멘 대표들에 대해서 반대하였다고 하여 타락전선택설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였다. 브레멘 대표들은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온화한 멜랑히톤주의자들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Martinius가 Gomarus과의 언쟁이 있었고 아르미니안 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진 Vortius과 교통을 가졌다. 이 Martinius와 일치하였던 자들이 또한 영국에서 온 Joh.Davenant와 Samuel Ward이였다. 주교이였던 Balcanqual 만이 타락전 선택설의 경향을 가졌으나, 다른 원인 때문에 Gomarus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특별히 Gomarus가 과거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타락전 선택설 입장을 표명하였을 때, 영국 대표자들이 감히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판단한다고 하여 불쾌해 하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진술의 과정에서 영국의 39조항 17조에 있는 ‘eos quos in Christo elegit ex hominum genere’까지의 귀절에 근거하여 영국교회가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인데, 바로 이어진 ‘a maledicto et exitio libere’이란 어귀를 놓쳤던 것이였다. 이 문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유일하게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genus hominum lapsum)이었다고 해석할 있는 고백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쟁점이 되었던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영국 대표자들, 하이델베르그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덴, 벨직, 북부 홀란드, 젤란드, 우트레이트, 프리스란드, 흐로링겐에서 온 대표자들이 거의 예정을 대상을 타락한 인간(homo lapsus)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다만 Gomarus만이 전인류로부터(e genere universo humano) 택하였다고 주장하고 남쪽 홀란드 대표자들은 결정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Gomarus도 다수의 결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었던 것이나, 이런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으로 몰아가게 한 주 인물이 Molinaeus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타락전선택설에 대해서 도르트회의가 부정적으로 결정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첫째로 영국 대표자들과 Gomarus 사이에 생긴 논의는 결정없이 Gomarus의 침묵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후에도 계속 Gomarus가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강의하자, 1640년 흐로링겐의 Joncker Clant가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타락전선택설에 대한 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는 것에 대해서 금지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때 고마루스의 대답은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의문은 예정론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항상 교회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질서에 관한(de ipsa Praedestinationis doctrina sed de ordine, de quo semper varia fuit et libera in ecclesia Dei) 문제로 대답하였으며 그 당시 도르트회의에서 자기만 그 타락후선택설의 반대한 것도 아니였고 역시 예정에 대상에 대해서 그 회의가 결정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화란 땅에서는 교회가 갈라져 있을 정도로 미묘한 문제이다. 둘째로 Maccovius와 Lubbertus와의 논쟁이다. 물론 그 사건은 Lubbertus가 고소한 것이 아니고 프라네커 노회에서 소원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도르트회의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나 그에 대한 학자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식의 발언이였다. 오히려 Lubbertus의 제자인 Hommius조차도 스승과 반대하여 마코비우스의 입장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고 자문에 참여한 Amesius도 Parker의 입장과 일치하다 하여 그의 주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였다. 비록의 마코비우스는 예정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라 보인다는 진술까지 확인(quod fatetur se dixisse ad discipilos videri sibi erroneum et falsum docere genus humanum lapsum esse objectum praedestinationis)하였어도, 그 논쟁은 마코비우스와 루베르투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악수하고 끝났다. 결론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결정이지만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혼합적 정통주의(syncretismus orthodoxus)라고 결론되고 있다.
후에 1626년 라이덴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Rivet, Walaeus, Thysius)은 아르미니안주의자인 Episcopius에 반대하여 칼빈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옹호하였다. 그런 노선문제는 다시 1645과 1649년 마레시우스(Maresius)와 보에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이어진다. 보에티우스는 고마루스의 입장에 호소하여 우리 교회 안에서 예정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흐로링겐의 고마루스를 계승한 마레시우스는 타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예정의 대상을 창조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되었고 타락한 인간(homo creatus et lapsus)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에 참여한 퓨리탄들은 아르미니안주의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확고히 타락전선택설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다만 1645년 10월에 있었던 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성직자들의 발언 배후에 있는 타락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것은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한편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언약론 논쟁은 Johannes Coccejus로부터 시작한다. Johannes Coccejus는 어릴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언어에 능했지만, 그의 독자적인 성향은 다른 종교에 대한 개방성에서 찾아야 될지 모른다. 그는 신학을 배우기전에 코란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글을 쓴 일이 있다(Oratio de religione Turcarum). 브레멘에서 Matthias Martinius와 Ludovicus Crocius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에도 1625년 함부르그에 가서 유대 랍비의 글들을 배웠다. 프라네커에서 Georgius Pasor, Johannes Maccovius, Gulielmus Amesius, Sixtinus Amama(근동 언어학자)와 가까이 접촉한 후에도 쓴 책들은 유대 랍비문헌들에 대한 연구들이다. 흐로링겐에서 Gomarus와 레이든에서 Polyander, Rivetus, Heinsius등 다른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배웠어도 그들과는 다른 독자성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Johannes Coccejus는 세 가지 논쟁점에서 문제의 신학자로 남게 되었다. 첫째로 Johannes Coccejus는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와 더불어 안식일을 도덕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단지 예표로만 생각하였다. 그의 히브리서 주석(Explicatio Epistolae ad Hebraeos, L.B. 1659)에서 처음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그의 견해는 더 일찍 알려져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가 그의 견해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de Sabbatho et de Die Dominica). 이런 주장들 때문에 Essenius(de perpetua moralitate Decalogi adeo specialiter)와 Hoornbeek(Theses de Sabbato)와의 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코케이우스(de indagatione naturae Sabbati et quietis Novi Testamenti, Typus concordiae amicorum circa honorem Dominicae, L.B.1659)와 하이다누스(Consideratien)와 호른벡(Nadere bewering van 's Heeren dagheiliging) 사이에 논쟁이 계속 되었고 결국 코케이우스와 하이다누스는 소씨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으나 1659년 관원의 명령에 의해서 레이든에서의 논쟁은 중지되었고 구다 공의회에서 끝나게 되었다. 둘째로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와 관련하여 ἀφεσις ἁμαρτιων(완전한 용서)과 παρεσις ἁμαρτιων (불완전한 용서) 사이를 구별하는 Johnnes Coccejus의 주장에 대해서 1665년 Gijsbert Voetius(onderzoek over den waren aard des Sabbaths)가 반박해 나셨다. 코케이우스의 작품(Moreh Nebochim; utilitas distinctionis duorum vocabulorum scripturae παρεσις et ἀφεσις Amsterd. 1666)이 나왔다. 세째로 Samuel Maresius와 논쟁이 일어났다.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의 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빙크의 일반적인 비판을 참조해야 한다: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제세례파와 대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안에서 만나게 된다. 쯔빙글리로부터 그것은 불링거와 칼빈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안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에글린(Eglin), 보쿠비우스(Boquinus), 휘퍼리우스(Hyperius)등 독일 개혁주의자들안에서 받아 드려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신학에서는 롤록(Rollock),하우(Howe), 카아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Perkins), 아메시우스(Amesius), 죤 볼(John Ball), 제임스 우셔(James U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등에 의해서 받아 드려졌다. 네델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 와 아들 트렐카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거(Ravensperger)등에게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클로펜부르그와 코케이우스보다 오래전에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안에 고유적이다. 그러나 후자 인물들이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고 동시에 원리적인 변화를 야기케하였다.
코케이우스와의 싸움은 직접 모든 이들에게 인정된 언약론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에센니우스와 호른벡의 경우 안식일에 대한 것이고(1655-1659), 마레시우스의 경우 두 가지 경영에 있어서 교회의 상태에 대한 것이며(1662), 보에티우스의 경우 구약에서의 용서(παρεσις)에 대한 것이다(1665). 코케이우스에서 논쟁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법이다.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코케이우스는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성경연구를 주장하며 그의 교의학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성경으로부터 끌어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ex Scripturis repetita)을 원하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의 책 ‘언약에 관한 교리대전’(Summa doctrinae de foedere)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의 입장을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속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교의학은 구원사이고 거기에서 성경은 원리와 규범이 아니라, 대상과 내용이었던 역사학적인 형식을 띤 성경신학이 되고 있다. 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하였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의 다양한 경륜들아래에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신약에서보다 객관적으로 더 빈약하였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안에(cessatio operis) 있었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vera et permanentia bona)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용서( ἀφεσις)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 용서(παρεσις)만 가지고 있었다. 동물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칭의는 불완전하였다. 신자들의 위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과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의 실재성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그때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연에 있어서(in accidentia)뿐만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in substantia)도 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었다. 참으로 코케이우스가 은혜언약을 다만 부정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이며 계속적으로 발전된 행위언약의 폐지로서 파악하였을 때, 친히 언약론 전체를 근절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이고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태이었다.
그렇게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 보다는 부속적인 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드려지면서 여러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의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이런 바빙크의 판단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비판학적 방법의 근원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가 한 역할은 개혁주의 신학안에서의 정통신학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미 대학의 학문세계에 깊게 파고든 코케이우스주의와 데카르트주의로부터 극복을 위한 노력이란 분파주의를 낳게 되었을 뿐, 정통주의의 완전회복을 불가능하였던 역사가 유럽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이다. 회복된 개혁주의는 온건하고 중용적이었다. 그후 개혁주의 안에서의 보수주의란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재흥이라기보다는 분리하게 된 신학적 노선 위에 머물려 있는 보수주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유럽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심되는 노선의 결정은 예정론에 대한 입장과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입장이 결정되고 있다.
2. 영국, 스코틀란드, 아일랜드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 즉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 그런 개혁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와 같은 종교개혁의 한 입장들일 수 있었으나 계속적인 철저한 종교개혁은 바로 철저한 칼빈주의를 의미하였다. 실제적으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죤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죤 낙스의 친구이었던 죤 폭스의 칭의론은 루터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죤 브레드포드(John Bradford, 1510-1555)의 기본적인 예정론(1555년 7월 1일 순교하기 약 8개월전에 쓴 1554년 10월 22일의 한 편지에 따라 )에 대한 이해는 칼빈과 같이 실천적이다. 그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확신에 강조를 둔 예정론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앙은 행위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같은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얻는) 영원히 영생의 유산자들임을 믿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예정론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 중에서 원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총체’라 하였다. 하나님의 선택교리로부터 유익들은 셀 수 없다고 하면서 간추리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신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며 신실하게 사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예정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가장 신뢰할만한 목자이였고 연약한 양과 같아도 이런 예정론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사자와 이리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믿었고 그가 죽고 태워져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덕이나 악도 외적인 행동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따라 판단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려되었다:
1.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 그 분의 선한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그 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태초전의 일이다. 3. 그 선택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이다. 4. 그 선택은 아담의 후손중 어떤 이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택자가 아닌 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0장, 13장, 사도행전 13장, 요일 5장, 살후 3장인용). 5.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도록 택한 자들을 예정하셨다(롬 8장, 눅 10장). 6.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찬양이다. 우리가 예정받은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7. 예정은 하나님의 때안에 소명, 칭의없이는 없다. 즉 예정이나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속한 것이 아님은 모든 이가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선택은 그렇게 확실하고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고 예정된 자는 최종적으로 결코 파멸하거나 정죄에 이르도록 잘못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그의 의의 찬양도 아니요 그의 지혜의 찬양도 아니며 그의 능력의 찬양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머리가 없는 선택, 목적이 없는 선택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종의 보존이 선택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가 제자로 부름을 받았어도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사울도 왕의 직책으로 택함을 입었어도 영생을 위해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예정론의 성격이 바로 정경인 성경책의 전체내용과 책들안에 세워져 있다고 보았다. 비록 리들리 밑에서 그와 가깝게 지냈고 부쪄와 친했던 그였지만, 이런 예정론에 따르면 정확하게 칼빈의 사상위에 서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정치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메리여왕의 등극이후 유럽으로 피신한 인물중 죤 폭스(1517-1584)의 신학사상의 일부를 소개하면, 위의 브레드포드와 잘 비교할 수 있고 죤 낙스와 친한 신학자로서 알려졌지만 제네바로 가지않고 바젤로 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교회권징과 영국의식에 대한 죤 낙스의 프랑크푸르트 논쟁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논쟁에 대해서 후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칭의론은 루터의 실천적 칭의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율법에 대한 입장도 죤 낙스가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그는 루터주의를 대표하는 자로서 사려할 수 있다. 언약의 두 방식과 두 가지 의를 강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즉 복음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율법의 준수로 말미암지 않으며 우리편에서 어떤 의무의 수행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참된 의를 옹호하지 않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신적인 은총의 모든 문을 닫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은혜의 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강하게 그 차이를 강조하였다. 물론 그는 우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주장하면서 이성도 가장 맹아이고 신적 지식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의 산물인 39개조항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예정론에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후에 Lambeth Articles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 선언은 Mr.Barret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설교에서 칼빈의 예정론의 교리를 반박함으로 생긴 것이다. 그는 그의 청강자들에게 칼빈의 책을 읽지 말라고 하하고 다른 신학자들(P.Martyr, Beza, Zanchius)을 문제를 삼았는데, 그로 인하여 퓨리탄들의 반박을 받아 논쟁이 되었다. 마지막 카톨릭으로 전환하였던 Mr.Barret는 타협적인 고위 성직자들과 카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으면서 Lambeth에 있는 대주교 앞에 소환되었는데, 그 때 대학을 대표하는 Dr.Whitaker와 Dr.Tyndale가 도와 작성된 것이다. 이 선언서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유기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었다는 것, 둘째로 예정의 원인을 인간의 예지된 믿음이나 행위나 기타 어떤 것들에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기뻐하심에 돌렸다는 것, 셋째로 참되고 의롭게된 신앙의 영구성, 구원에 대한 충만한 보증, 죄용서에 대한 확신이 선언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적인 입장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여 동의할 수 있었던 배경이였다.
특별히 일찍부터 양심의 자유를 따라 퓨리탄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아일랜드지역에서 자체의 신앙고백이 고백되었다. 여기에서 독자적인 장로교파(Presbyterian Persuasion)가 형성되었다. 그 대표적 목사들은 스코틀란드에서 온 Mr.Edward Bryce, Mr.Robert Cunningham, Mr.Robert Blair, Mr.Hamilton, Mr.Levingston, 영국에서 Thomas Cartwright 등에 의해서 훈련받은 Mr.Ridges, Mr,Henry Calvert, Mr.Hubbard등 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관구의 주교와 화해가 이루어져 공적으로 장로교 성직자들이 임직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대주교 Dr.James Usher때(1615년)에 자체적인 신앙고백서가 고백된 것이다. 이 고백에는 위의 Lambeth Articles가 흡수되었고 주일성수가 고백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고백이 1634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대주교 Laud 때에 와서 화해가 깨지고 약화되어 버렸다. 결국 이것이 카톨릭의 힘을 성장시켜주었고 마지막 거의 모든 신교인들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아일랜드 고백서에의 일반적인 틀과 내용이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예정론의 경우 첫째로 Lambeth Articles과 달리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과 예정과 유기에 대한 고백을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즉 예정과 유기는 인격체에 제한 하였고 만물에 대한 영원한 작정은 먼저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에 대한 고백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셋째로 그 예정의 목적과 그 효과에 대해서도 고백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기초들임에 틀림없다. 신구약의 통일성의 경우 첫째로 신구약의 차이는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이라는 것, 둘째로 신구약 모두에서 영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것, 따라서 그들 사이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 중에 의식법과 시민법을 제외하고 도덕법에 해당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적이라는 고백이었다. 즉 율법의 제 3 사용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들어있었다.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1. 논쟁점들에 따라 합의된 신학적 입장
1.1. 신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1) ‘믿고 그 신앙과 신앙의 순종 속에 견고히 하는 자들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구원에 이르는 선택에 대한 완전한 결정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오직 이 결정에 대해서 계시되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성경은 믿을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어떤 확실한 사람들을 영원전부터 선택하셨음이 증거되었다는 대답이다(요 17:6; 행 13:48; 엡 1:4).
2) 영생에 관련된 하나님의 선택은 다양하여, 어떤 경우 보편적이고 명확하지 않거나, 다른 경우 특별하고 명확한 것이다는 것, 다시 이 선택은 불완전하고 철회할 수 있으며 결정적이지 않고 조건적이거나, 혹은 완전하고 철회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완전하다는 것, 똑같이 신앙에 이르는 선택, 구원에 이르는 선택,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인 선택없이 의롭게 하는 신앙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성경에 증거하지 않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요 선택의 교리가 부패되고 우리의 구원의 금고리들(롬 8:30)이 파괴되고 있다.
3) 성경이 선택교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의도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 앞에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였다는데 있지 않고,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 혹은 만물의 모든 질서로부터 하나님은, 은혜롭게 어떤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고자 하셨고 영생의 보상에 가치가 있다고 여긴, 신앙의 기본행위와 불완전한 순종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여 선택하셨다는데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은 비판하기를, 이런 해로운 오류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가치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무익한 물음을 통하여 은혜로운 칭의의 진리와 성경의 단순성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사도의 교훈(딤후 1:9)에 위배된 것이다고 하였다.
4) 신앙에 이르는 선택의 경우 이 조건이 미리 요구되었다는 것, 마치 선택이 사물들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빛을 정당히 사용하고 경건하며 작고 낮으며 영생에 적합하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기호하는 것이고 사도의 가르침(엡 2:3-9)과 충돌한다고 하였다.
5)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사람들의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신앙으로부터 처음 시작하였거나 계속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는 회심, 거룩,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일어났다는 것,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궁극적 견인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그 때문에 선택된 그가 선택되지 않는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성이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 신앙의 순종, 거룩, 하나님의 구원, 견인은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의 열매들이 아니라, 그것은 미리 요구되고 성취된 것으로서 완전히 선택되었던 자들 안에서 예지된 조건들이고, 그것 없이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들이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전 성경(롬 9:11; 행 13:48; 엡 1:4; 요 15:16; 롬 11:6; 요일 4:10)에 충돌된다는 대답이다.
6) 구원에 대한 모든 선택이 불변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들이 잃을 수 있으나,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그러한 대 오류에 의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변적으로 만들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위로를 훼파하는 것이며 성경에 상반되다(마 24:24; 요 6:39; 롬 8:30).
7) 이 삶에서 영화를 위한 불변의 선택에 대한 열매나 느낌들이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선택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사도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런 기뻐하심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경험에 충돌적이다(눅 10:20;롬 8:33).
8) 하나님은 그의 순수 의롭게 하시는 뜻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에서와 죄와 저주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신앙과 회심을 필요로 하는 은혜의 경륜 속에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이것은 확고하다고 대답하였다(롬 9:18; 마 11:25).
9) 하나님은 다른 민족보다 어떤 한 민족에게 복음을 보내시는 원인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어떤 기뻐하심이 아니라, 한 민족이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다른 민족보다 더 좋고 가치있기 때문이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은 이를 모세(신 10:14,15)와 그리스도께서(마 11:21) 부정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인간구원의 신적기원을 가능한 한 인간론(인간의 자유)에 기초하고자 하여,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심한 손상을 주고 있고,그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반대되게, 그들이 하나님의 민족차별성을 민족우위성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예정론에 대한 파괴와 성도의 보존에 대한 파괴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공동고백의 일반적인 틀에 의하면, 죄론 다음에 기독론을 언급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적용차원에서 신앙의 자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와 영생의 개념을 고백하고 있다. 즉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머물고 그것을 받아 드리고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구주 예수를 받아 드리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그 부패로부터 구속되며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는 고백방식이다. 칼빈처럼 여기에서 예정론에 대한 열쇠를 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시간상 어떤 이들을 신앙으로 선물하셨고 어떤 이들을 선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행 15:8; 엡 1:11).
비록 강팍할지라도, 이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고 굽히어 믿도록 하시고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강팍케 됨으로 내버려 두신다. 여기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깊은 인간의 차이, 긍휼히 여기시고 의로우신 차이, 선택과 유기의 결정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식의 고백은 하이델베르그 고백의 순서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의 차원인 듯한 인상을 얻게 된다.
1) 그 선택은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롭고 불변하며 전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선택도 불변하고 번복되지 않으며 깨지거나 이미 택한 자들이 다시 버려지거나 수에 있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기초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택자들의 수가 확실하다.
4) 그 택자들이 다른 자들보다 더 좋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5)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곤비한 자들, 즉 처음 정직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죄와 부패안에 있는 온 인류로부터 택하였다.
6)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향들이나 역사들을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어떤 사람들을 일반 죄인들의 수로부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데 있다.
7) 순수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8)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영원전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구원의 기초로 세우셨다.
9) 구원의 길 혹은 수단까지 결정하였다. 즉 택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그가 친히 그를 주시고 능력있게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하여 같은 교통으로 부르시며 만나시며, 혹은 그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선물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거룩히 하시고 그의 아들과의 교통 가운데 능력있게 보존하여 마지막 그의 긍휼을 증명하도록 영화롭게 하시어 그의 사랑스로운 은혜의 부요성을 찬양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은 원인과 조건으로서 예지된 신앙과 신앙의 순종, 거룩 혹은 어떤 다른 좋은 성향이나 능력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고 택함을 입을 인간 안에서 미리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의 순종과 거룩에 이른다. 즉 선택이 구원의 모든 은택의 샘으로서 그로부터 신앙과 거룩, 다른 구원의 은사들, 마지막 영생까지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엡 1:4).
역시 택자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과 다른 방식일지라도, 그의 때에 그들의 구원의 영원하고 불변의 선택에 대해서 확신하게 된다. 그 지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폐되고 깊은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을 때 지각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 죄를 넘어 의를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선택의 실패할 수 없는 열매들을 자신들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이나 마음의 확실한 신뢰, 양심의 평화, 자녀다운 순종에 대한 숙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이 자신 안에 아직 힘있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 일들을 이루도록 약속하셨던 수단들을 사용하는 자가, 유기에 대한 언급을 들었을 때, 낙심되거나 자신을 유기자들 안에 사려해서는 않되고, 수단들을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히 진행하고 넘치는 은혜의 때를 열렬히 열망하며 그 같은 것들을 경애와 겸손을 가지고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0) 그 선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하나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기뻐하신 뜻은 하나요 유일하며(een eenig welbehagen, voornemen en raad des willens Gods) 그것을 통하여 영원전부터 우리를 택하시되,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영광과 구원과 그가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11) 성경에 증거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선택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간과되었다(voorbijgegaan). 즉 스스로 자신의 죄책으로 말미암아 곤비함에 뛰어 들어간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전혀 자유롭고 의로우시며 무제한적이고 불변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 일반 곤비함에 내버려 두시고 구원의 신앙과 회심의 은혜를 얻지 못하여 자신의 길과 그의 의로운 판단아래 내버려 두시며 결국 불신앙과 다른 죄들 때문에 징계하시고 영원히 벌하시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유기에 대한 결정이 결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een auteur van de zonde)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섭고 흠없는 의로운 심판자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택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열망하나, 하나님과 구주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정욕에 빠진 자들에게만 무서운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
우리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만족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로 벌받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와 성령과 똑같은 영원한 무한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 완전히 만족된다. 그런데 바로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사람들에게 차별없이(zonder onderscheid) 보내신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관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없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완전 자유로운 하나님의 도모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택들이 주어진 것이라고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택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표현방식으로 고백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만을 모든 민족들과 혈족들, 종족들, 방언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였다는 표현으로 고백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는 분명히 택자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 택자들을 죽으셨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로 택자들에게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될 구원에 관한 도모가 세계의 시작부터(van het begin der wereld) 실패함이 없이 지금까지 성취되었고 역시 계속 성취될 것이다는 논점이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 비로서 구원의 백성이 실제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상이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 아니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 중 첫째로 ‘실패함이 없이(onfeilbaarlijk)’ 혹은 ‘능력있게(krachtiglijk)’라는 표현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도 실제적으로 전유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입장이다.
둘째로 창조 전 택자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도모에 대한 언급은 그런 도모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이 단지 은혜의 새 언약을 사람들과 체결할 수 있는 순수한 권리를 얻고, 구원의 성취와 적용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어떤 새로운 조건 즉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힘이나 완전한 의지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얻는데 있었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이였다.
셋째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든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죄책을 지셨다는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아무도 저주의 원죄에 대한 죄책이 없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고백이다.
1.3.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에게로 회심과 그 방식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원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전인류를 저주하거나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들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의지에는 영적인 은사들이나 선한 성향, 선과 거룩, 의와 같은 덕들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의지 자체는 결코 부패되지 않았다는 것,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죄로 완전히 죽지 않고 영적인 선에 완전 무능하지 않는다는 것,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보편은혜(de gemeene genade)나 은사들을 부패된 자연인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좋은 사용에 의해서 좀 더 즉 복음적이나 구원적인 은혜, 구원 자체까지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참된 회심의 경우 의지에 어떤 새로운 성향, 능력이나 은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게 된 은혜는 부드러운 충고 외에 다른 것이 아니거나 이것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역사의 방식이며 충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성과 가장 일치한다는 것, 하나님이 힘있게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신앙과 회심으로 기울게 하는 그의 전능의 그런 능력들을 인간의 중생에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 은혜와 자유의지가 회심의 시작을 행하는 영적인 원인들이요 역사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가 의지의 역사에 앞서지 않으며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이기 전에는 하나님이 회심에 이르도록 힘있게 인간의 의지를 돕지 않는다는 것등이다.
이에 대해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뿌리를 굳게할 필요가 있었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특한 역사를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타락 전과 타락 후 그 변화에 대해서 분명히 고백하였는데,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의 의지 안에 의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고백하였고, 타락 후에는 오성(verstand)과 의지와 마음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전적타락은 그런 것이였다. 즉
첫째로 모든 인간들은 죄 안에서 태어났고 진노의 자녀들로서 태어났으며, 어떤 구원하는 선에 이르기에 무능하고, 악으로 기울러져 죄들 가운데 죽으며 죄의 종들이다. 따라서 중생케하는 성령의 은혜없이는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으며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개선하지 못하며 스스로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는 대답이다.
둘째로 원죄와 관련하여 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아담의 부패성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모든 그의 자손에게 이르되, 모방(navolg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패된 본성의 전가(전이, voortplanting)에 의해서 자손들에게 이른다는 고백이 되었다. 이런 아담의 죄의 전가(imputatio peccati Adami)는 후에 직접적인 전가(imputatio immediata)와 간접적인 전가(imputatio mediata)방식으로 나뉘이지만, 도르트회의에서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입장으로 정리된 셈이다.
셋째로 타락후에도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 빛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거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기에는 아주 멀다. 그러나 자연의 빛이나 첨가된 율법에 의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통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것의 메시야의 복음이며,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그것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기뻐하셨다.
넷째로 하나님의 이런 뜻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신약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런 다른 경륜의 원인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맗은 가치성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완전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과 넘치는 사랑에 있다는 고백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택자들에게 구원이 때가 되어 적용될 때, 크고 놀라운 은혜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변화는 새 창조의 역사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깨어나는 것이요 살아나는 역사인 중생이란 전혀 초자연적인(een gansch bovennatuurlijke) 역사이요 큰 능력의(een zeer krachtige) 역사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적이면서 비밀의 역사이다. 이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 자신 만이 일하신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영원히 하나님에게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에 제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고 불어넣으며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능력을 주어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동의나 직접적인 신앙을 기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의지를 일으키고 산출하시는 그 분이 참으로 모든 것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믿고자 하는 의지와 신앙 자체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동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하여 구원의 성취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섯째로 중생의 이런 신적인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속성들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요 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요, 그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고, 자발적이고 바른 영의 순종이 우세하게 하는 것이다.
1.4.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참된 신자들의 견인은 선택의 열매이거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beslissende verkiezing)과 칭의 앞에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성취해야할 새 언약의 조건이다. 반증: 롬 11:7; 롬 8:32,33,34,35
하나님은 견인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예지하시며 친히 그 안에 보존하기로 준비하시사, 그는 자신의 직무를 행하실지라도, 지금 신앙가운데 견인하는데 필요로 하고 하나님께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어 그가 견인하든지 견인하지 않든, 그것이 항상 의지의 믿는 행위에 의존하도록 하였다고 가르쳤다. 반증: 고전 1:8
참된 신자들과 중생한 자들은 의롭게 하는 신앙으로부터, 동일한 방식으로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실제적으로 그로부터 타락할 수 있고 영원히 버릴 수 있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반증: 롬 5:8,9; 요일 3:9; 요 10:28,29
참된 신자들과 중생한 자들도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 훼방죄에 빠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반증: 요일 5:16,17,18
사람들이 특별계시 없이는 이 생에서 미래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증: 롬 8:39; 요일 3:24
구원의 보존에 대한 확신의 교리는 그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육체의 베개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두려움과 선한 덕들과 기도와 다른 거룩한 실천들에 해된다고 가르쳤다.
다만 일시적으로 한 때 믿은 자들의 신앙은 의롭게 하고 구원케하는 신앙으로부터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증: 마 13:20; 눅 8:12
첫 중생됨을 잃었던 인간이 다시 새롭게 참으로 여러번 다시 중생되었다는 사실은 모순이 아니다고 가르쳤다. 반증: 벧전 1:23
신자들이 신앙가운데 실패함이 없이 보존될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결코 기도하지 않으셨다고 가르쳤다. 반증: 눅 12:32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된 자는 죄의 지배와 노예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육체와 죄의 몸으로부터 완전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이로부터 일상의 죄들이 나오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케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그들이 도피하도록 하며 기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실천들에 의해서 죽도록 하며,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그들이 다스릴 때까지 완전의 한계선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한 항존적인 원인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의 이런 잔여 때문에 그리고 세상과 사탄의 시험으로 인하여 회심한 자들이 그 은혜 가운데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고 그들 자신의 능력들 안에서 내버려둠을 당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사, 그들에게 단번에 주셨던 그 은혜 가운데 친히 자비로 확증하시고 끝까지 능력으로 보존하신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을 은혜가운데 확증하시고 보존하시는 그의 능력이 얼마나 더 큰지,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께서 비참한 타락에서조차도 선택의 불변의 의지에 따라 성령을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거두시지 않는다. 그들이 영접의 은혜와 칭의의 신분으로부터 타락할 만큼 혹은 죽음의 죄에 이르거나 성령을 해방하는 죄에 이를만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 고백과 함께 그런 견인과 보존이 갖는 뿌리와 특성들이 고백되었다. 그런 보존의 조건이 인간으로부터 전혀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긍휼로부터 옮을 고백하고 따라서 그런 구원의 방법과 서정조차도 헛되거나 없이될 수 없다는 성격과 함께 고백되었다.
2. 각 대표자들의 신학적 입장들
2.1. 영국의 신학자들
3-1)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힘에 대해서
i)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무죄의 상태에서 은사로 받았던 초자연적이고 구원적인 은사(엡 4:24)가 결여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이제 은혜의 힘없이 영적인 사역을 전혀 할 수 없다(요 15:15; 롬 5:6; 고후 3:5).
ii) 타락한 의지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짓기에 능한 경향이 있다(잠 2:14; 창 6:5; 롬 6:17; 엡 2:1).
3-2) 회심에 선행하는 것들에 대해서
i) 중생이나 회심의 상태로 되기 전에 보통 인간으로부터 요구되는 어떤 외적인 행위들이 있다. 그것들은 종종 자유롭게 쉽게 행하고 종종 자유롭게 그대로 있다. 교회에 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듣는 일 등등이 있다(롬 10:14; 막 6:20; 행 13:46; 시 58:5).
ii) 아직 중생되지 않은 자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회심이나 중생에 선행하는 어떤 외적인 결과들이나 행위들이 있다.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죄에 대한 느낌, 진노에 대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생각, 용서에 대한 어떤 소망이 있다(행 2:37; 고전 4:15).
iii) 하나님께서 말씀과 그의 영의 수단을 통하여 그와같이 접하였던 자들을 그가 부르시고 참되고 진지하게 신앙과 회심을 필요로 하게 하신다(고후 5:2; 고후 6:1;갈 1:6; 계 3:3,20).
iv) 그와같이 하나님께서 접하였던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께서 의도적인 무시나 이런 초보적인 은혜의 거절에 의해서 그들을 내버려 두기 전에, 쉬지않고 회심에 이르는 바른 길에 있도록 요구하신다(마 25:28; 히 3:7; 전 1:24; 왕하 24:20).
v)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진행하는 선행의 역사들은 반항적인 의지의 죄책에 의해서 질식되고 단번에 소멸되어 버리고 역시 많은 자들의 경우 쉽게 소멸된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그 마음들 속에 신적인 진리의 어떤 지식, 그들의 죄에 대한 어떤 슬픔, 부패되는 어떤 욕망과 어떤 조심이
2.2. 팔쯔의 신학자들
2.3. 헤센의 신학자들
2.4. 스위스(쮜리히) 신학자들
2.5. 나사우와 베터라브 신학자들
4) 성도들의 견인과 구원의 확실성에 관해서 6 가지 쟁점들을 항론파들과의 견해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
구원의 신앙은 모든 은사 중 은사요, 혼 중의 혼이요, 이성 중 이성이요, 거룩의 산 뿌리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징표이며 하늘의 보고의 열쇠이요 간결한 위로의 어머니이요, 선한 양심의 유모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손과 입과 귀이며 우리의 영원한 유산의 담보요 배려자요 하나님과의 평화의 보증이요 선택의 표이며 하늘의 사다리, 믿는 영혼의 방패,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연합되는 띠이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영원전부터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보존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우리 중에 만물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네델란드 그대들을 특별하게 인도하신다.
2.6. 제네바 신학자들
4) 성도의 견인에 대한 입장
i)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선택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고 미리 이루어진 도모에 의해서 죽으셨으며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고 그들을 그의 영적인 몸 안에 자신과의 강한 결합으로 연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시는 자들을 결국 성령의 인도와 살아있는 통치에 의해서 영접하여 보존하시고 증진하시며 완전케하시고, 동일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 그들을 의롭게 하심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탈하지 않게 하신다(사 55:22; 롬 8:29; 빌 1:16; 살후 2:17; 고전 1:7; 살전 3:12; 렘 24:6; 사 6:13; 딤후 2:18; 눅 22:31; 요 17;12; 요 10:17; 요 6:39; 롬 8:33; 요일 3:9; 요 8:35; 요 14:16; 렘 31:33; 렘 32:40).
ii) 견인이 비록 우리의 구원의 유익(건덕)을 위해서 모든 신자들로부터 요구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뜻에 합하고 자신의 모든 부지런함과 노력과 배려를 그것에 사용하시는 그런 자들을 외에 소유되거나 보존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에 확실한 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특별히 하나님의 탓으로서 순수히 은혜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참된 은사가 거기에 있다(히 3:13, 6; 롬 11:22; 요 8:31; 골 1:22; 요 3:27; 히 13:21; 엡 5:10).
iii)자연과 인과의 질서에 따라 참되고 고유한 결과나 열매로서 견인은 선택과 칭의에 뒤따른다. 그러나 지식과 감정, 우리의 양심을 고려할 때, 견인의 방식, 증가와 확고성에 따라 선택의 은폐성은 고백되고 있고, 견인의 마지막 행위는 육체의 의심들과 이중성들을 넘어 마지막 승리임을 우리는 고백한다(계 22:11; 벧후 1:10; 요일 3:19).
iv) 견인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부끄럽게 되는 자는 둔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되며 스스로 은혜하고 후퇴한다.
2.7. 브레멘 신학자들
2.8. 엠덴 신학자들
2.9. 화란의 신학자들
2.9.1. 네델란드 교수들
Johannes Polyander, Antonius Thysius, Antonius Walleus는 같은 입장으로 발제하였고 거기에 Sibrandus Lubbertus가 그들의 발제문에 서명하였으나, Franciscus Gomarus는 서명하지 않았다. 반면 Sibrandus Lubbertus의 독립적인 발제에 대해서 앞의 세 교수들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Franciscus Gomarus의 발제에 대해서 그런 판단이 없이 발제 전문이 그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Franciscus Gomarus의 첫 번째 조항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조항들은 모두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 3, 4 조항과 제 5조항의 경우 다른 네 교수들이 같은 발제로 나오고 Sibrandus Lubbertus가 좋다고 동의하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Sibrandus Lubbertus의 독립적인 입장은 다른 네 분에 의해서 동의되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 첫 번째 조항에 대해서
2) 두 번째 조항에 대해서
다섯 교수들이 이 조항에 대한 고백이 있어서 일치를 보고 있다. Sibrandus Lubbertus도 이 조항에 대해서 자신의 독립적인 입장을 발제하지 않았다. 이 발제에는 그들의 판단부분 4조항과 거절부분 5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그들이 거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런 이의들에 근거하여 그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몇 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공로와 만족은 완전하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그들이 다만 참된 신앙을 가지고 포용하는 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없이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행 20:28; 히 9:14; 벧전 1:18; 요일 1:7; 요 3:16; 롬 3:22; 고전 6:11).
2. 이것이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뜻이며 계획이었는지, 주께서 그렇게 큰 속전을 치루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행하셨던 무엇이든지, 그가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다(요 5:30; 14:31).
3.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런 속전을 그리스도 백성과 복음이 전파된 모든 자들에게 그러한 것으로서 차별없이 선포하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공하여야 하며, 그 자신을 진지하게 그리고 성부의 도모에 따라서 그러나 그의 감추어진 경륜들을 그가 원하시는 만큼 광대하고 많이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이런 은혜를 분배하시고 적용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면서 제공해야 한다(행 13:38,39; 고후 4:20; 행 11:20; 고전 3:6; 요 3:8; 고전 12:3).
4.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특별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원의 능력을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자신의 도모에 따라 유기자들이고 잃어버릴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택함을 받고 믿을 자들을 위해서, 능력있게(krachtiglijk) 죽으셨다, 즉 주께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의 공로에 의해서 얻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시는 그의 강한 은혜를 전하셨다. 분명한 많은 증거들에 의해서 증명될지라도, 다음 몇 가지로 충분할 것이다.
첫째증거: ‘다만’(alleen) 이란 말이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다음 인용된 말씀들(마 1:28; 요 10: 11,12,14; 행 20:28; 엡 5:25; 계 5:8,9)에 의해서 표시되고 있는 그 사실 안에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귀결들과 결과로부터 만들어 내는 모든 힘이 단번에 사라짐에 틀림없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주 정확하게(even gelijk en even na) 모든 백성들의 구주이다면, 천사가 공허하게 거기에 ‘그의 백성’을 첨가하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꼭 동일하게(even glijk) 모든 이들을 위해서 세우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나 자신의 양떼를 위해서’라고 말하였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과 각 사람들을 그의 피로 샀다면, 바울이 ‘그의 피로 그가 성취하였다는 것’을 거기에 첨가하였다는 것은 아무런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2.9.2. 헬더란드의 신학자들
2.9.3. 남홀란드 신학자들
2.9.4. 북홀란드 신학자들
2.9.5. 제란드 신학자들
2.9.6. 우트레이트 신학자들
2.9.7. 프리스란드 총대들
2.9.8. 오버레이셀 총대들
2.9.9. 흐로링겐과 옴메란드 총대들
2.9.10. 드렌테 총대들
2.9.11. 발쯔 대회의 총대들
VI. 레이든 대학 신학자들의 신학
VI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1.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배경
2. 총대들의 신학적 입장들과 그 고백서의 성격
2.1.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해서
첫째로 17세기 일반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처럼 작정(decretum)과 예정(praedestinatio)을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작정의 대상들로 인하여 구별된 것이다. 일어나고 존재해야 할 모든 것들(omnia qui fieri et subsistere debent)에 관련하여서는 작정아래 기술하고 있고 사람들과 천사들에 관해서는 예정이란 용어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예정 안에서 선택(electio)과 유기(reprobatio)가 구별되어 있다. 이런 신학적 입장을 따라 H.H.Heidegger는 전자를 일반적인 하나님의 작정(decretum Dei generale)이라 하고 후자 즉 예정의 작정(decretum praedestinationis)을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decretum Dei speciale)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덱거의 경우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선택에 대한 작정이 창조와 섭리에 대한 작정이 앞서고, 선택에 대한 작정보다 역시 타락의 허용에 대한 작정이 앞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이 바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따르고 있는 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같은 도르트 결정을 따르는 레이든 신학자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 방식이다.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둘째로 창조와 섭리, 타락에 앞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자들의 예정과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예정에 대하여 말하고 이에 따라서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타락의 허용에 대한 작정이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는다. 창조나 섭리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는다. 작정과 예정이란 근본적으로 대상에 따른 구분이고 전자는 넓고 후자는 좁은 대상이며 그 수효가 확증된 예정이다. 이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전 선택설임에 분명해 지고 있다.
셋째로 정확히 칼빈의 입장에 따라 창세전의 예정에 택자들의 구원의 성취방법도 포함하고 있다. 즉 택함을 받은 자들이 타락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적으로 부르심(내적소명=중생)을 받고 의롭게 되며(칭의) 양자가 되고 성화되어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보존되(견인)는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3장 6항, 11장 4항).
넷째로 중세 스콜라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예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자유롭고 불변의 자신의 뜻에 따라 작정되고 예정되었으며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가 오시고 죽으신 것은 이런 택자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11장 4항).
2.2. 언약의 통일성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에 서로 ‘다르게 경영되’었으나, ‘그 실체에 있어서 다른 두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륜들아래서 하나요 동일하다’는 고백을 웨스트민스터 고백서가 아주 확고히 했다(7장 5-6항). 언약의 실체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어제나 오늘아니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다.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도 그의 사역의 공로과 효과와 혜택이 유사이래 모든 시대에 살전 택한 백성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다고 고백하고 있다(8장 6항).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의 구원의 방식들에 있어서도 신약시대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입장(11장 6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케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하여 율법시대에도 그 예식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충분하고 유효하여’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충분한 사죄(full remission of sins)와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을 받았’다는 입장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7장 5항).
3. 에라투스주의와의 논쟁
4. 독립교회주의와의 논쟁
VI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
1. 코케이우스 이전의 언약신학
2. 코케이우스 언약신학과 그 후기역사
맺는 말
한국교회 안에서 정통개혁주의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종교개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갈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가 193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신학적 논쟁에서 그 논쟁점의 신학만을 유산으로 받은 것만이 아니라, 고 박형룡 한 사람의 신학과 그 신학이 배경으로 삼는 그 벌콥신학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갈 때, 지금의 보수주의 개혁주의 신학 혹은 어떤 보수주의 신학자를 통하여 돌아가는 것이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16세기나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더구나 단순히 도르트 신앙고백서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돌아가면 바로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우리가 돌아갈 때 어느 인물을 통하여 어느 선을 따라 돌아가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쯔빙글리, 부쪄, 불링거, 칼빈으로 바로 돌아간다는 것조차도 신학의 다양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속에 잠깐 도달한 것일지라도 가장 완전한 정통개혁주의를 통하여 인물을 따라 거슬러 가야 한다. 이렇게 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참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참된 개혁은 그 시대에 헤르만 바빙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더포드, 스테반 마샬, 다니엘 코드레이, 카아트라이트, 월터 트래버스, 멜빌, 베자, 칼빈등과 같은 인물들이 한 교회 안에서 수 없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다. 그런 선물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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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개혁신학
김영규 지음
·개혁주의 성경연구소장
·남포교회 협동목사
·뉴욕과학아카데미(NYAS),
·미국과학 진흥협회(AAAS),
·미국화학학회(ACS) 초청회원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17세기 개혁신학
차 례
머리말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노선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VI. 레이든 대학 신학자들의 신학
VI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1.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배경
2. 총대들의 신학적 입장들과 그 고백서의 성격
3. 에라투스주의와의 논쟁
4. 독립교회주의와의 논쟁
VI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
1. 코케이우스 이전의 언약신학
2. 코케이우스 언약신학과 그 후기역사
맺는 말
참고문헌
머리말
20세기 초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인 H.Bavinck와 K.Barth가 자신의 신학의 기초를 세울 때, 17세기 개혁신학으로 돌아가 시작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17세기 개혁신학에 있어서 어떻게 돌아가고 누구에게 돌아가느냐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H.Bavinck는 17세기 개혁신학의 오랜 교과서와 같은 『순수신학통론』(Synopsis Purioris Theologiae)를 재편집하였고 K.Barth가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강의할 때 17세기 개혁신학에 대해서 편집한 H.Heppe의 책(Die Dogmatik der evangelisch-reformierten Kirche)으로 돌아가서 강의하였다. 그 당시 Ernst Bizer가 재편집할 때 K.Barth가 그 머리말을 썼다. 문제는 그의 신학은 로마서주석을 통하여 잘 알려져 그런 명성 때문에 궤팅겐 대학에서 처음 교의학에 대해서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이미 그의 신학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 당시 17세기 개혁신학을 공부하여 교의학을 강의할려고 했을 때, 비록 그가 성경이 그 교의학(eine evangelische Dogmatik)에 있어서 성경이 그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그가 자기의 신학으로 17세기 신학을 평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런 칼 바르트의 시작은 세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첫째로 종교개혁자들을 통하여 바로 성경으로 가는 프로테스탄트 교의학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목적에 이르는 도상에 정통주의라는 한 정거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ein Zurückgehen auf die Orthodoxie)은 그에게 그 안에 머물러 있고 그것과 동일하게 행하고자(um bei ihr stehen zu bleiben und es ihr gleich zu tun!)는 뜻이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H.Heppe의 정통주의 참고자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Heppe의 역사적 관점은 칼빈을 개혁주의의 아버지로 돌린 것이 아니라 후기 멜랑히톤을 개혁주의의 아버지로 돌린 셈이 되었다는 점을 비판하였다. 더구나 Heppe에게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된 코케이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의 언약신학의 돌입이 깊은 문제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19세기 정신에 종속함을 표한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놀랍게 H.Bavinck의 유산이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교의학자들 사이에 이루어 놓은 신학적인 차이는 후진들에게 많은 것을 깨닫도록 한다. 즉 종교개혁자들에게 돌아가든, 17세기의 정통주의로 돌아가든, 돌아가는 자의 신학적 근본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은 17세기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에서 17세기로 돌아가도 많은 길들이 있다는 점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어떤 이해를 통하여 돌아가느냐가 가장 문제이고 17세기의 어떤 신학, 어떤 인물로 돌아 가느냐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정통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지금 돌아가고자 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개혁주의 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그런 우리의 참여가 있다.
I. 한국장로교회와 정통개혁신학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퓨리탄형의 인물들이였음이 잘 인정되고 있다. 춤추는 것, 담배피우는 것, 카드놀이하는 것을 죄로 여기고 주일을 엄밀하게 지키는 것등이 그런 퓨리탄형을 상징하고 있었다. 공동성경번역사업, 합동찬송가를 만드는 작업에서 증명되듯이 1907년 장로교 독노회가 갑자기 형성되기 전후의 선교정책의 분위기는 복음주의 교회(one evangelical Church)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그리스도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Korea)를 만들려는 분위기이였다. 이런 합동운동에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감리교의 집회운동이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후 한국교회부흥의 모범이 되었고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말은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적 근저에는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선교사들을 보낸 교회에서 한국에 있어나는 일년의 분위기를 1901년 이후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오순절운동과 같은 운동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된 교회연합운동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장로교 선교회(영어공의회)에서 1908년에 독립적으로 장로교를 세울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 계획과는 달리 그 보다 먼저 1907년 9월 17일 독노회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독노회가 세워질 때 임시로 신경과 정치에 의해서 세워졌다는사실이 주목된다. 1907년에 임시로 채용된 신경과 정치가 1908년에 신경과 정치를 위한 특별위원회(한 석진과 Samuel A.Moffett)로부터 보고 받아 완전히 채용되었다. 여기에서 채택된 신경이 바로 12개조 신경인데, 그러나 예정론에 있어서 유기론에 대한 고백이 없고 그리스도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고백이 분명하지 나타나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선교지 신학의 한계이면서 사실 아르미니아누스주의가 빠졌던 같은 사고위험성을 허용하는 성격이 다소간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교파를 가릴 것 없이 단일교회형성에 대한 요구가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요구이였고 우리 교회는 유아기 교회로서 역사적인 개혁교회 고백득의 입장에 대한 분별력이 없는 교회이였다. 다행히도 부흥운동이 갖는 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그 외국선교회로부터 장로교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처음 그런 12개 신조정도의 개혁주의신학이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모교회들은 공의회시대로부터 영향을 행사했던 이눌서 박사의 모교회인 남장로교회를 제외한 선교사들의 모교회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고백하면서도 교회부흥과 선교운동으로부터 요구되는 온건하고 진보적인 입장을 수용하는 분위기이였다. 특별히 북장로교의 경우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개정하면서 성령에 대해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대해서 각 34장과 35장으로 첨가하였고, 16장과 22장,25장을 수정하였는데, 맹세거절에 대한 죄를 부정하고 카톨릭 입장을 적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고 비성경적이라고 고백하였고 이방인들에 선이 있음을 인정하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처럼 무시해서는 않된다는 입장을 찬양할 가치가 있고 유용하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이것은 카톨릭교회와 이방세계의 종교와 대화하고 수용하고자 준비로서의 수정이였다. 더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장과 10장에 관한 해석으로서 선언문을 첨가하였는데, 이 선언문이 바로 그 당시 미국 장로교회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선언문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영원한 작정교리는 온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유화, 구원의 은혜가 만인에게 미친다는 교리와 조화한다는 선언이었고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죄인의 죽음을 원치않으신다는 것, 하나님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을 위한 충분한 구원을 제공하셨고 그 구원을 모든 이들에게 적용하시며(adapted to all) 복음 안에서 값없이 모든 이들에게 제공하셨다는 선언이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 3항에 대해서 유아로 죽은 자는 누구나 은혜의 선택 안에 포함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가 기뻐하신 때와 장소, 및 방법에 의해서 중생되고 구원받는다는 선언이였다. 비록 해석의 차원에서 선언한 것이었지만, 아르미니우스보다 더 진보적이고 웨슬레주의에 가까운 선언이였다. 가장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서 감리교와 장로교는 구별되지 않는 입장이였고 이것이 선교지의 분위기와 잘 맞는 실제적인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백된 인도 장로교회의 12개 신조는 선교지의 분위기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의 모교회의 분위기를 반영한 고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장로교회의 축복은 그런 선교사들의 강한 보수주의 경향에서 나온 이런 정도의 신앙유산도 있었지만,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에 가르쳤던 박 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의 특이성에 있었다. 김 양선 목사는 박 형룡 목사에게 “평양 숭실대학의 창설자 방위량박사, 마포삼열박사, 등의 가장 철저한 보수주의 신학자에의 사사와 한국 최대의 보수신앙가 실 선주목사의 신앙적 도야와에서 기초지어진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나, 사실 그의 유학시절의 배움에 있었다고 봄이 더 타당하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신학문제가 발생한 1920년대 이전에 한국 선교사들 사이에 자유주의 신학입장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1919년에 출판된 A.J.Brown의 책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한국 유학생들이 돌아오는 시기인 1920년에 그런 자유주의적인 입장이 교회 안에 나타났고 역시 다른 물결들 즉 막스주의운동, 사회 복음주의, 다른 현대사상들이 현저하였다. 더구나 그가 돌아오기 전에 한국교회에 일부 선교회에 변화가 있었다. 즉 카나다 선교회의 모교회가 1925년 감리교와 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연합교회를 형성하고 한국에 있는 카나다 장로회 선교회를 카나다 연합교회 선교회로 바꾸고 이미 한국에 와 있었던 선교사들 중 장로교 신조를 고수하려는 선교사를 제 15회 총회가 단절시켜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같은 해 봄에 새로 온 서고도 선교사의 자유주의 사상이 알려졌다. 즉 서고도 선교사가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에 다수의 역사적 오류가 있음을 가르쳤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다시 같은 선교사가 그 해에 미국에 돌아온 김 관식 목사와 조 희담 목사 등의 응원을 얻어 교역자회를 소집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유포하고자 기도하였는데, 거기에서 조희담 목사 역시 성경의 문학적 오류는 물론 역사적 과학적 오류가 있음을 주장하여 큰 혼란이 일어났던 일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박 형룡 박사가 그런 강의들과 출판되거나 출판되지 않은 논문들을 모아 편집하여 『신학난제』를 출판하였던 시기는 창세기 저자문제와 여권문제에 대한 평양신학교 교수진 중심으로 구성된 연구위원들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던 시기와 동일한 시기이였다. 물론 1935년 가을에 출판된 박 형룡박사의 평양신학교 강의들과 논문들은 그의 학위논문의 내용과 밀접히 관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가 한국에 처음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사이의 대립양상을 강하게 소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대립양상이 바로 그 한국 보수장로교회의 신학적 특성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대립과 관련하여 『신학난제』의 서문에 ‘세계의 기독교 전체가 사상적 혼란으로 인하여 수난하는 바’ 그 ‘사상의 무정부시대’로부터 ‘불과 5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소년교회로서’ 조선교회가 ‘적지않은 이사상의 가지가지가 유혹의 촉수’에 움직이고 있다고 진단하고 그의 책을 출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세계의 사상적 혼란이 지금 한국에도 나타난 것에 불과하고 이제 한국의 소년교회에도 ‘천태만상의 이사상은 바야흐로 정통신앙의 존속을 위협하려 한다’고 진단한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표현된 정통신앙 혹은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의 성격이 무엇이냐이다.
이런 신학적 틀에 대해서 세 가지 가정을 할 수 있다.
첫째로 박 형룡박사의 유학시절 쯤에 두드러지게 보수주의 기수의 역할을 하였던 메이천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대조시킨 그런 틀이 그의 틀과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박 형룡 박사가 1928년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곧 1929년에 메이첸 박사의 『신앙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가 Floyd Hamilton에 의해서 번역되었고, 그가 친히 자유주의 신학과 전통신학을 대립하여 다양한 신학적 조류들을 비판할 때 메이천의 1921년 작품인 『바울종교의 기원(The Origin of Paul's Religion)』과 1923년 작품인『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대조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대조와 같은 대조일 가능성은 있었다. 이 문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와 대립하여 싸우되 역시 근본주의와 싸우는 Louis Berkhop의 틀과 박 형룡 박사의 틀과 비교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L.Berkhop가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이 모세오경저작설 문제와 성경무오설의 변호를 위해 Janssen과 싸웠지만, 언제든지 전천년설을 부정하고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무천년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박 형룡 박사의 후기 신학발전과 조직신학 체계에 있어서 L.Berkhop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면, 박 형룡 박사의 양 대립 현상은 이런 정통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난제』을 출판할 당시 근본주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1910년이래 5년 동안에 출판된 『근본교리들(The Fundamentals)』의 입장들을 자신의 입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더구나 박 형룡박사가 싸워 오고 있었던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싸워왔던 동일한 주제들이었다. 즉 진화론, 비교종교학,고등비평, 사회적 복음신학 등에 대한 주제들이다.
셋째로 그의 대조는 개혁주의 전통의 입장에서의 정통신학과 자유주의신학 사이의 대립이었다는 가정이다. 이미 이미 언급한 메이천의 양대립도 이와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 형룡 박사는 조직신학 기본자료와 관련하여 Charles Hodge와 A.H.Strong의 조직신학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또한 James Orr의 저서들을 중요한 기초자료들로 사용하였을 때, 그가 단순히 근본주의자이였기 때문에 사용한 것같지 않고, 오히려 그가 스코틀란드 장로교의 보수주의자이였기 때문에, 그가 쓴 모든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James Orr와 같은 스코틀란드 장로교 보수주의자인 James Denney의 『예수와 복음(Jesus and the Gospel)』도 사용하고 있음이 주목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신학난제』란 책을 쓰고 난후 1937년 초 그가 Loraine Boettner의 『예정에 대한 개혁주의 교리(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를 번역출판 하였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 그가 정통의 어원적 정의를 절대적이고 불변의 인식학적인 권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그 권위가 성경에 있는 있는 모든 옳은 의견을 정통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런 일반적인 정통신학이 가장 명확하게 개혁주의 신학에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정통신학은 비정통신학 곧 자유주의 신학이 무엇이냐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 그 결정의 내용들에서 근본주의자들의 입장들과 만나고 있다.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신학에 양보하지 않는 내용과 그 선이 박 형룡 박사의 정통신학의 내용과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나 개혁주의 신학 내에서의 다양성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았다. 비록 후에 그가 Louis Berkhop의 『조직신학』에서 정통신학의 진수를 발견하였을지라도, 개혁주의 신학의 올바른 노선이나 그 다양성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았다. 후에도 계속 신정통주의,신복음주의, 신 중립주의를 논할 때, 그런 건전한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한국보수주의는 박 형룡 박사의 근본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II. 역사적 정통개혁신학의 바른노선의 요점
한국 보수주의 교회에서는 정통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강조해 왔으나, 실제로 정통신학의 계보에 대해서 잘 소개되지 않았다. 최근 퓨리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소개되었어도 회중교회적인 퓨리탄들이 대부분이 소개되었고 진정 장로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많이 소개되지 않고 미미한 정도에 불과했고 더구나 칼빈 이후의 유럽개혁주의자들의 소개들은 극히 적었다. 이런 면에서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면서 진정 정통개혁주의 신학을 잘못 본 셈이 된 것이다. 하물며 전체적인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에서 어느 것이 바른 노선인지에 대해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실정이다. 사실 웨스트 민스터 신학자들 중 죠지 길레스피가 품고 있는 ‘가장 좋은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처음 진정한 어거스틴을 재현한 종교개혁자들에게로 돌아가서 베자, 쨘키우스,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피스카토르, 유니우스, 파레우스에 이어진 선까지와서 도르트회의 당시의 다양한 개혁주의 신학자들 안에 들어와야 16세기말과 17세기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다양성들과 비교되어야 한다. 그런 비교와 노선결정에 있어서 중요한 논쟁점들이 있다. 이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여 그 논쟁점에 대해서 각각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를 보고 바른 노선이 결정되는 것이다.
1. 그리스도는 택자들 위해서 죽으셨다.
개혁주의를 대표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아르미니우스와 동의한 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시되 타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사상이다. 즉 선택의 대상에 대한 싸움이 중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달리 그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한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역시 같은 성직자들이 중세의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예정안에 구원의 방편까지 포함한다하여 행위로 구원하는 방식을 예정안에 포함시키는 것을 거절하였다. 예정론은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의 구체적인 내용과 확증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예정론은 예정의 대상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구원의 방식들에 대한 것도 예정론 안에 포함한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뜻과 의지는 작정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안에서의 논쟁점은 예정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정론의 내용에 대한 것이다. 좀 더 예리한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죽으셨을 때, 과연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물음은 16세기 후기에 개혁주의 신학 내의 쟁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여 도르트회의에서 첨예한 문제가 되었다.
이미 칼빈이 이런 문제들을 그의 요한一서 2장 1-2절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냈다. 직접적으로 칼빈이 제한속죄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확충으로 인하여 여기에 덧붙힌 것은 신자들 즉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 속죄는 믿음으로 복음을 수용하게 될 모든 이들에게 미친다고 확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온 세상의 죄들이 속죄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것을 핑계로 모든 유기자들, 따라서 사탄까지 구원을 인정하는 미치광이들의 잘못들을 생략한다. ...... 이 모순을 피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서 충분히 고난을 받으셨으나 택자들을 위해서만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일반적인 해결은 학교에서 확고히 되고 있다. 비록 그럴지라도 그 말은 진리임을 나는 고백한다. 그런데도 현 구절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요한의 의도가 모든 교회에 공통적으로 이것이 선한 것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이들 아래서 유기자들을 이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앞으로 믿을 자들이고 세상의 다양한 재난들로 말미암아 흩어졌던 자들을 의도하였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 당시 학자들 사이의 건전한 해결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세상에 대해서 충분하되 그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택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주장이였음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은 그 해결에 조건을 더 달았다. 즉 거기에서 칼빈은 모두란 말을 문맥의 정확한 뜻과 상관없이 유기자들을 제외한 택자들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칼빈의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다시 확증되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인 “그리스도는 영생을 위해 택한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 없고 죽어서는 안되며 죽지 않았다(Christum pro iis, quos Deus summe dilexit, et ad vitam aeternam elegit, mori nec potuisse, nec debuisse, nec mortuum esse)”는 명제를 그들이 공히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미니우스는 칼빈의 예정론과 같은 전통적인 예정론이 선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앞세웠다. 이런 입장은 웨슬레주의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본원리가 인간론 중심으로 되어서는 안된다. 카톨릭은 세례관(화체설)을 통하여 신앙없이 모든 지역주민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삼아 지역의 국가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 역시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을 가지고 종교개혁에 임하였던 루터주의자들도 세례관에 있어서는 카톨릭적인 정신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여 실제로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인으로 삼는 길을 열어 놓았고, 그것에 의해서 독일의 국가교회로 발전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웨슬레주의와 침례교도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전자는 아르미니우스의 입장에서 이신칭의 교리를 취한 것이고 침례교는 같은 믿음의 원리에 의해서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있다. 다만 침례교적인 퓨리탄인 죤 스미스와 같은 이는 어거스틴의 참된 신앙의 개념을 받아드려 역사적 신앙 혹은 지식신앙, 기적신앙, 일시적 신앙을 비판하여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런 비판의 최소한 선에서라도,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안에 일어나는 신유 은사들을 바로 참된 신앙의 결과인 것처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에게 계시나 이상이 임하였다면, 그것이 두 사람 이상의 검증없이 교회안에 공적으로 선포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계시가 종결되었다고 믿는 것은 교회의 기초로서의 그런 계시가 종결되었다는 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성경밖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성경과 더불어 성경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의미에서 종결되었다는 말이다. 참된 신앙의 정의에 대한 퓨리탄 침례교인의 좋은 어거스틴주의에도 불구하고, 침례교가 유아세례를 부정하거나 재세례를 주장하는 경우, 혹은 가시적인 중생의 체험과 확신을 요구할 때, 거기에 아르미니안주의를 열어놓은 것이 된다. 그에 반해서 개혁주의자들은 신론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과 교회에 관련해서도 예정론을 강조하였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령의 열매이며 그 근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에까지 올라간다는 것이다. 예정론을 통하여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였고, 그런 예정론은 보이는 교회안에서 아무도 하나의 지체를 오용하지 못하게 하는 근본뿌리가 되었으며, 동시에 잘 믿는 자에게는 큰 위로와 확신을 가져오는 교리이다. 특별히 순전히 영적이고 오직 하나님안에서 감추어진 비밀로 남아 있는 예정론 사상은 믿지 않는 일반 시민에 대해서도 진정한 인간 존중의 기틀이 되는 것이요, 가난하고 무시받는 자에 대해서도 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하고, 반면에 보이는 교회의 부패와 사회부패에 대해서 비판정신과 혁명정신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루터주의는 이신칭의 교리만 가지고 어느정도 의식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와 그런 종교사회를 비판하는데 성공하였어도, 구약을 파괴하였고 성화(구원의 서정)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칼빈은 예정론에 의해서 참된 교회를 정의함으로 복음의 순교자들과 나그네된 자들을 변명할 수 있었다. 즉 예정론은 개척하는 교회에 신실과 정성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개척된 교회에 내적인 성숙을 가져다 준다. 권징에 있어서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되게 한다. 칼빈의 주장대로 권징의 목적은 사람앞에 정죄되어도,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안에서는 영원히 정죄받지 않고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는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아르미니안주의, 혹은 일명 카메론주의와 박스터주의를 정죄함으로 개혁하였으며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도 도르트회의의 타락후 선택설 정도만 허용하였다. 이런 고백의 선은 장로교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선명하고 확고한 것이다. 19, 20세기와서 선교에 방해된다고 하여 구미의 보수주의 개혁교회안에서도 제한속죄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우리가 이미 확인한 바있고 한국장로교회도 그런 위험을 안고 시작하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유기자를 위해서도 죽으실만큼 충분한 은혜를 강조하다보면, 유기자의 구원까지 그리스도와 교회밖에 구원을 허용하는 식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미 웨스트민스터 성직자중에서도 평화주의자인 리차드 박스터와 절친한 에드문트 칼라미(Edmund Calamy)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대한 논쟁에서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기자를 포함한 모두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이에게 충분하다 하였으며 그에 의해서 택자를 위한 절대적 의도, 유기자에 대한 조건적 의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그의 주장은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보편구원과 거리가 멀고 일부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죠지 길레스피에 의해서 카메론과 아미롤드가 그와 비슷한 조건적 구원을 주장하였다고 논박하였을 때, 칼라미는 해명하기를 자신의 말은 유기자에 대한 은혜의 어떤 경륜(ea administratio)에 대한 것이라 하였다. 웨스트 민스터 총회석상에서 이런 칼라미의 언변이 유일한 예외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고 에큐메니칼적인 칼빈을 발견하려는 자가 칼빈연구의 대표자들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칼빈 자신에 의해서 섭리에 관한 특별논고(De occulta Dei providentia)를 통하여 종결된 것이고 17세기에 비로소 리베트(A.Rivet)와 불란서 쇼무르학파(J.Camero, M.Amyraut)사이에 칼빈의 예정론에 관한 논쟁에서 종결된 것이다. 역시 같은 경향으로서, 비록 창조전 선택설이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정의 주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하여 제한속죄를 포기하려는 바르트주의는 루터주의(종교개혁 주저서에서 희미하게 나타나는, 언약의 주체가 그리스도라는 사상)는 될 지언정, 역사적 정통개혁주의와는 거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2. 언약의 통일성
칼빈의 신구약 통일성을 말할 때, 단순히 기독론적인 통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통일성이요 구원의 길과 서정에까지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비록 칼 바르트가 유태인을 배척하는 독일의 국가교회에 대해서 바른 성령론이외에도 신구약 통일성 즉 칼빈의 예레미야 주석에 따라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요 율법보다 복음이 먼저이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저항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에 관한 견해는 기독교 강요의 증거에 머무른 기독론적인 통일성이였다. 일찌기 독일 칼빈연구자들의 대표자들과 오토베버(Otto Weber)의 제자들의 학위논문들은 이 선에 굳게 서 왔다. 그러나 칼빈의 증거 전체를 볼 때, 터툴리안의 삼위일체의 통일적 경륜과 어거스틴의 삼위일체의 경륜적 통일성이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뒤에 깔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칼빈의 신구약 실체의 통일성이 정통 개혁주의안에서 계속 되었고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현저히 고백되고 있다. 따라서 정통 개혁주의에서는 루터주의가 대화하기를 원하고 만나기를 원하는 코케이우스의 성경신학적 언약론을 비판없이 지나치지 않았다. 구약의 성도와 신약의 성도 사이에 죄의 용서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 언약들이 신구약을 통해서 발전된 것(doctrina de triplici foedere)도 아니다. 계시의 점진성이 신구약 사이의 실체의 통일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이렇게 개혁주의가 독특하게 주장해 온 신구약의 실체적 통일성이 복음주의 신학아래에서 현금 상당히 약해지고 있다. 즉 신구약 서론, 성경의 낱 권의 개별적 신학 연구, 계시의 점진성, 유기적 영감론의 광대한 적용, 적응계시 이론(Accommodation-theory)아래 보수주의 서구 신학계에도 가블러(J.Ph. Gabler)의 성경신학(theologia biblica)의 개념등과 같은 계몽주의 시대의 산물인 루터주의적 신신학(Neologie)의 영향이 이처럼 강도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3. 유한이 무한을 받지 못한다(finita non recipiunt infinita)
기독론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통일적인 고백인 구약의 여호와에 대한 기독론적인 이해는 보존되어야 한다. 칼빈에 따라 여호와 이름아래 그리스도의 현현(manifestatio)은 인정하되 구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체적인 육체(substantiale corpus)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루터주의처럼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이 신성과 인성의 실제적인 통일성으로서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즉 신은 죽었다는 신학이 루터주의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와 칼케톤 신조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톡특성(Extra illud Calvinisticum) 사이에는 약간의 충돌이 있다. 다시 말하면 루터주의는 두 본성의 실제적 통일성을 주장하되 육체밖에 로고스가 없다(nec λóγος extra carnem)는 주장이지만, 쯔빙글리 이래 개혁주의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성(totus)이 인성안에 거하는 인격적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래도 신성(totus)은 인성밖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의 기독론적인 전통에 있어서 구약의 그리스도와 성육신된 그리스도 사이에는 난제가 있다. 그러나 그 난제에 대한 해결에 있어서 개혁주의 내의 다양한 노선과 관련하여 또렷한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있다. 아마 이런 입장은 개혁주의의 독특성이었다고는 할 수 있으나, 개혁주의의 보편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이런 입장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 사이에 큰 논쟁이 되었거나 모두에 의해서 또렷이 주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교부들의 입장에 머물고 이런 방향에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장로교 정치원리는 성직자 개인에게(uni)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직자 회자체(unitati)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당시 문서출판을 통해서까지 장외논쟁한 인물중에 개혁주의 장로교 신학적 입장을 변명한 가장 대표적 인물들로서 샤무엘 러더포드와 스티븐 마샬, 죠지 길레스피등을 들 수 있겠다. 샤무엘 러더포드는 스코틀란드 교회개혁시에도 아르미니안주의와 싸우는 글을 발표하였지만, 웨스트민스터 회의의 논쟁과정에서도 회중교회의 입장과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반박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총회후에도 러더포드와 뜻을 같이하여 또한 다니엘 코드레이가 회중교회를 비판하는 중요한 논쟁의 책을 썼다. 극단의 분리주의자들인 브라운주의들과 달리 상당히 건전한 회중교회의 입장은 화란과 신대륙에 있는 회중교회들이었다. 이미 화란에서 장로교입장에 강한 John Paget(?-1638)과 회중교회주의자들 사이의 싸움이 잘 알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에 의해서 독립교회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의 근원으로 돌아가, 좀 더 건전한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중심인물의 교회관들도 비판받게 되었다. 주 비판의 대상인물들은 Henry Ainsworth(1570-1622), Willam Ames(), Henry Jacob(1563-1624), Francis Johnson(1562-1618), John Robinson(1575-1625), Thomas Hooker(1586-1647), John Cotton(1584-1652), John Davenport(1597-1670), Hugh Peter(1598-1660)등이었다. 이 논쟁의 중심은 교회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가, 교회언약(Church-Covenant)으로 연합되어 날을 정하여 공적인 예배와 성례를 위해 모인 조합(company)으로서 교회 회중자체가 완전한 교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의 비판은 교회의 열쇠가 믿는 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도 아니요 교회나 사도를 대표하는 한 개인 베드로에게도 아닌,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어졌다는 대답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제정된 공직자들을 가진 지교회들로 구성되되, 한 고위성직자(one Lord prelate)나 한 머리교회(one head-Church) 혹은 주교회(the chiefe Church)와 결합된 매어있는 교회들이 아니라, 한 정치형태아래서 다스리는 직책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여러 지교회들로서, 그들이 모여 가시적으로 교통하는 지역교회, 국가교회, 세계교회가 완전한 교회라는 것이 장로교의 근본사상이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정에서와 같이 성경에서 증거된 대부분의 교회들은 회중교회나 관구교회가 아니라, 장로교 정치형태를 가진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히 사무엘 러더포드에 따르면, 회중교회의 교회관은 G.Voetius의 동의이외에는 전유럽개혁주의들(J.Calvin, Th.Beza, Peter Martyr, H.Zanchius, F.Junius, D.Pareus, W.Whitaker, Tilenus, Professors of Leyden-J.Polyander, A.Walaeus, A.Thysius, A.Rovetus - J.Piscator, W.Bucanus, )로부터 인정이 되지 않는 주장으로서 그 근원에 있어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 소키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돌리고 있다. 한편 같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스코틀란드 총대인 Robert Baillie는 독립교회의 참된 근원을 재세례파에게 돌리고 있다.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비판 서적들 중에서도 죠지 길레스피의 「아론의 싺난 지팡이」(Aaron's Rod Blossoming: or The Divine Ordinance of Church Government, London 1646)이란 책이 개혁주의 장로교 입장을 변명한 결정적인 책이었다. 거기에서 뿐만 아니라, 유고작으로 출판된 그의 논문집에서 카톨릭 교회와 영국 국교회의 정치원리들을 비판하는 장로교의 원리를 한 마디로 장로회 자체(unitas)에 교회의 열쇠가 주어졌다는 원리로 설명하였다. 이 회 자체(unitas)에 주어진 권리와 회중교회 지도자 토마스 후커의(그것만이 교회직원을 선출할 권리를 갖는) 본질적인 교회전체(Totum essentiale)에게 주어진 권리 사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런 장로교의 원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한 회안에서 혹은 그 회를 넘어서 어떤 한 개인에게 권리가 이양되는 모든 교회의 정치활동을 배제하면서도, 교회의 정치활동도 교회의 성격에 포함시킨다. 지교회로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지교회 밖에 노회나 총회를 두고 있다. 다만 지교회 안에 다스리는 장로가 있고 가르치는 장로가 의장으로 하는 장로회인 당회가 있지만, 지교회의 당회와 같이 다스리는 성격으로 노회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노회 안에서의 목사들과 장로총대들 사이에 동등성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스코틀란드의 교회전통에서 회를 대표하는 상비적인 인물들( 예를들면, a perpetual moderator)이 있었다라기 보다는, 그 때 회의 중에서 결정되었던 의장들이나 위원회들, 총대들이 있었다는 것은 오래된 바른 가르침이 된 것이다.
5. 세속정치와의 교회의 독립성
칼빈에게 있어서 저항권은 교회안에서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관원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저항방식이란 오직 성경 이외에 다른 저항방식을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이런 저항정신에는 전제해야 할 특별한 원리들이 있었다. 첫째로 칼빈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Spirtuale Christi regnum)과 시민정체(civilis regimen, civilis ordinario, regnum politicum) 사이를 왜 구별하였는가가 중요하다. 이 구별은 단순히 질서와 법의 차이가 아니라 거기에 속한 것들은 크게 구별된 것들이다는 것(res esse plurimum sepositas)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왕국, 참된 의, 영생의 축복에 관련된 하나님의 순수한 지식(pura Dei notitia), 참된 의의 본성(verae iustitiae ratio), 하늘의 왕국의 신비(regni coelestis mysteria)와 같은 하늘의 것들(res coelestae)이라 부르고 후자는 정치(politia), 경영(aeconomia), 모든 기술들(artes omnes mechanicae)과 자유학문들(disciplinae liberales)등과 같은 땅의 것들(res terrenae)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후자의 요소들 안에서 전자의 것을 찾거나 그 안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왕국에서는 땅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이냐 공화정이냐, 왕정이냐가 중요하지 않다. 즉 교회는 “사람들 사이에 너가 어떤 조건에 있든, 어떤 땅이나 종류의 법아래 살든 중요하지 않다(nihil referre, qua sis apud homines conditione, cuius gentis legibus vivas)”. 그러나 이런 지식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부패된 인간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다. 따라서 윤리적 혹은 정치적 질서의 씨로서의 인간이성(humana ratio) 혹은 이성의 빛(lux rationis)이나 그로 인한 인간활동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고 어떤 영원한 목적에 이바지하는 성격에서 포용적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있다. 셋째로 이것과 함께 저항방식으로서 오직성경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5장 29절에 근거하여 지배자에 대한 복종이 하나님에 대한 복종보다 앞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주님 만이 왕의 왕이시다는 것이다. 칼빈은 그 복종의 질서를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주님은 “모든 것 전에 동시에 모든 것 위에 들어야 할 자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높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복종하되, 그 분 안에서 외에는 복종해서는 않된다(Dominus ergo rex est regum, qui ubi sacrum os aperuit, unus pro omnibus simul ac supra omnes sit audiendus. Iis deinde qui nobis praesunt hominibus subiecti sumus: sed non nisi in ipso)”. 이런 사도행전 5장 29절에 대한 입장이 후에 개혁주의 안에서 John Poinet, Christopher Goodman(1520-1603)과 John Knox의 저항개념으로 발전하게 된다.
동시에 역사적으로 유럽개혁교회(우르시누스이래)와 장로교 전통에서 교회의 주권을 관원에게 허용하는 에라스투스주의를 단호히 거절해 왔다. 특별히 그리스도 만이 교회의 유일한 왕이시오 머리이시라는 고백이 장로교회의 확고한 입장이다. 이런 식으로 정경분리는 가장 기본적이고 확고한 개혁교회의 입장이었고, 그러면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에 대한 그 분리의 정신도 칼빈의 정신을 유지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세속세계에 대한 이해도 적극적이다. 창조계시 혹은 일반계시에서도 초자연적인 은총으로 이해하는 정도로 하나님의 지식을 발견하고자 하나, 그 계시의 본질적인 성격을 오직 성경에서만 인식한다는 점에 강조를 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조의 주체와 창조의 근원과 방식, 목적 및 그 종결로 돌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에 대한 성경계시를 파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그 계시는 모든 계시의 기초이다.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바울의 입장을 고집하는 것은 이런 면에서 정당하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사회윤리나 과학적 의식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오직 성경만 먹고 마시는 삶의 차이일 것이다. 사실 사회나 국가가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은 함께 운동하고 같은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에 궁극적 해답을 주는 것이다. 칼빈의 욥기주석에서 나타난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차원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리는 것이다. 인간들도 일하고 영적인 실체들도 일하고 하나님도 일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시는 차원과 방식이 다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분안에서만이 시작과 종결이 있다. 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원수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범위와 관련하여 칼 바르트(에밀부르너와 파울 알타우스에 반대하여)처럼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이란 이원론을 거절하고 철저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하나의 은혜만을 강조하는 신학에 대해서 현금 심사숙고하는 경향이 있다. 즉 칼빈의 경우처럼 보편은혜 혹은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이나 입장이 성경에 대한 고백에 대한 도입의 성격에서 들어오거나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일반은총과 특별은총,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구별이 결코 민족주의나 이성주의에 대한 근거로서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인 은혜아래 복음만 포함한 것이 아니라, 율법, 심판, 죽음과 지옥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마치 바울(고후 3:1-12)과 어거스틴의 정신인 것처럼, 그것은 그가 성경이란 개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을 더 좋아하는 정신과 비슷한 정신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점에서 또한 바르트주의와 거리를 갖는 조심한 기준이 된다. 문화적 다원주의를 인정하는 방식은 이미 과거 미국 북장로교가 1902-3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수정할 때부터 시작하였다. 중생되지 못한 자들에 의해서 행한 것들도 하나님이 명령할 것일 수 있고 유익할 수 있다는 부분을, 1902-3년이후 그것들은 찬양할 가치가 있고 그런 것들을 무시하는 것은 죄요 하나님께 불쾌한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또한 사랑과 은혜 사이의 구별, 유아로 죽은 모든 택자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아로 죽은 모든 아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수정하였다. 그 때이래 장로교회에서 유아세례를 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을 포함하여 현금 보편은혜안에 일반적 총애(favor in general)와 일반적인 선물들(gifts in general)사이의 구별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대화의 방식에서 나오고 있다.
6. 주일성수와 예배의식들
칼빈에게 있어서 의식법을 제외한 모세의 법의 대부분을 도덕법으로 이해하였고 십계명안에 포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생된 이후에 그 법의 사용(usus legis tertius)을 열어 놓았다. 그와같이 제 4계명 안식일 준수도 도덕법으로 해석하였고 중생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의식적인 성격을 제외한 주일의 개념아래에서 같은 방식으로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퓨리탄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들은 주일만 지키고 도덕법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의식법에 속한 유대절기들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드여왕시대에 이미 주일날 백성들의 오락을 위해서 공적으로 스포츠가 허용된 이래(1583) 퓨리탄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안식일 논쟁은 Mr.Bound가 안식일에 관한 논문에서 주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처럼 지켜져야 하며 그 법은 도덕적이고 영원한 법이라 하여 주일을 세속화하는 스포츠나 오락게임들을 버릴 것을 발표하자, 대주교인 Whitgift가 출판된 그 책들을 회수하고 더 이상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던 일이 있는 후에도 계속 은밀히 읽혀졌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역사적으로 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에 의해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첫째로 퓨리탄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1618년 8월 25에 처음 법정과 주교들이 결정되어 제임스 1세의 왕명으로 출판된 퍼스의 5개 조항이 결국 목회자들에게 강요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5개 조항은 성례를 무릎을 꿇고 받도록 할 것, 사적으로 병자에게 성례를 집행할 의무, 필요에 따라 사적인 세례집례의 허용, 이미 세례받은 어린애들은 주교에게 데리고 가 견신례(Confirmation)와 주교의 축복을 받을 것,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령강림절, 승천절을 지킬 것 등이다. 둘째로 개혁주의 퓨리탄들의 번성을 막기 위해 소위 「오락의 책(A Declaration to encourage Recreations and Sports on the Lord's Day)」을 출판하여 목회자들로 하여금 읽도록 강요한 사건들이 제임스 1세 때(1618)와 챨스 1세 때(1633)에 있었다. 특별히 퍼스의 5개 조항은 스코틀란드 총회에서 불법으로 통과되었기 때문에 계속 스코틀란드 교회의 저항의 대상이 되어 왔다가 1638년 총회개혁에서 처음 그 총회의 결정을 무효화하였다. 퓨리탄들의 순수성(non-conformity)이란 이런 주일성수와 예배의식에 대해서 생명을 걸고 그 개혁주의 전통을 지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오락의 책에 대한 저항정신과 퍼스의 5개 조항에 대한 거절은 모든 퓨리탄들(장로교적인 퓨리탄들과 독립교회적인 퓨리탄들)에게 공통된 정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의 확고한 정신이었다. 유럽대륙에서도 이런 퓨리탄정신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인물들(G.Udemanus, W.Teellinck, J.Spiljardus)이 1612년이해 강한 주일성수를 강조함으로 논쟁이 되기 시작하여 도르트회의에서도 논쟁이 되었고, 1620년 이후 G.Udemannus, W.Teellinck와 Jacobs Burs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거기에 꼬리를 이어 1621-1627년 사이에 남홀란드(Zuid-Holland)의 특별대회에 논쟁이 있었고, 계속해서 A.Thysius, A.Walaeus, F.Gomarus, A.Rivetus, G.Amesius등으로 이어지는 Hoornbeek, Heidanus, Coccejus사이의 논쟁, Utrecht대학, Groningen대학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즉 기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퓨리탄들의 기본입장은 카톨릭주의와 영국국교회자들의 주일의 세속화와 재세례파, 퀘커교도, 다른 이단들의 주님의 날을 버리는 운동, 또한 이런 이단들에 대해서 관대하고 관용함으로 상업도시들이 세속화됨으로 주님의 날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 반대하여 강한 주일성수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성직자 중 William Gouge는 사도행전 20장 7,11절의 주석에 근거하여 24시간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서 몇 가지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장로교인들은 예식서의 사용을 불법적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정해진 예식서에 제한하는 것을 거절한다.
둘째로 장로교인들은 주일이외에 부활절, 성탄절 등의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다. 부활절은 Eostre라는 이방여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대체하였고 성탄절은 로마의 신 Saturn을 기념하여 제정된 것을 축제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세례시 십자가의 상징을 하지 않는다.
넷째로 견신례(Confirmation)의 의식을 거절한다.
다섯째로 성만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지 않느다.
여섯째로 성만찬 예식을 사적으로 집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장로교의 경우 지금까지의 예배의식들의 전통으로 보아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인식되거나 바르게 가르쳐 왔다고 보기 힘들다.
부록
I. 퍼스(Perth)결정에 대한 1638년 스코틀란드 총회결정의 회록 (1638년
12월 10일)
“퍼스의 5개조항들은 버려져야 되고 말살되어져야 할 것을 선포하는 그라스고우 총회”
“총회는, 그 때에 들어와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커다란 불화인 퍼스 조항들이전에 이 교회안에 있었던 예배의 통일성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목사들과 교수들 모두에 반(反)하여 야기해온 슬퍼해야 할 결과들로서 이미 이 총회에서 선포된 퍼스총회의 불법성과 무효를 (기억하면서), 1638년 2월 신앙고백의 필연적 쇄신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배에 소개된 갱신의 실천이 자유총회에서 결정되기까지 연기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해에 관원들의 명령으로 어떤 사람들이 처음 서명하였을 때 고백된 대로 신앙고백에 서명했다는 것. 이런 이유들 때문에 총회는 전의 조항에 대해서 1580년, 1581년, 1590년과 1591년에 의도되고 고백된대로 그들이 신앙고백에 모순적인지 힘겨운 조사에 임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일반적인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다. 즉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고백하기를, ‘우리는 기꺼이 오랫동안 왕의 권위에 의해서 공적으로 고백된 종교의 형식과 모든 점에서 하나님의 의심되지 않은 진리로 여겨진 대로 오직 그의 쓰여진 말씀에 근거한 이 영역의 전체를 우리의 양심으로 동의하고 따라서 대적적인 모든 종교와 교리를 거부하고 미워한다. 주로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란드 교회에 의해서 멸시되고 논박된, 일반적이고 특별한 카톨릭 의식들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특별히 로마 카톨릭 적그리스도, 모든 의식들과 제식들을 포함한 다섯가지 가짜 성레들,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고 참된 성레집례에 덧붙혀진 거짓 교리들, 성레없이 죽은 유아들에 대한 잔인한 심판, 세례의 절대적 필연성을 (거부하고 미워한다). 마지막으로 공허한 비유들, 제식들, 상징들,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리고 우리가 친히 기꺼이 그것의 교리, 신앙, 경건, 권징을 기뻐하는 참된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와 우리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안에서 같은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로서 약속하고 맹세하는 등 참된 성례들의 사용에 반대되는, 교회안에 들어온 (그런) 전통을 싫어한다’고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이 다섯가지 조항들이 그때 고백된 종교에 모순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스코틀란드 교회에 의해서 논박된 것들이다. 참된 성례들의 집례들에 덧붙혀졌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없는 제식들과 의식들이거나 혹은 성례없이 죽은 유아들에 대한 교황의 정죄를 고양하거나 혹은 세례의 절대적 필연성을 고양하거나 혹은 제식들, 의식들,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런 참된 개혁주의 교회의 교리 밖에 혹은 반대하여 교회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다음으로 특별히 절기들에 관해서 발견하고 있다. 첫 항목, 권징의 첫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크리스마스 축제, 할례절, 현현절은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축제들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성경에 명령된 것도 아니고 보증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대로 관원들에 의해서 징벌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서 전적인 폐지가 요청되고 있고 오용의 개혁만이 아니다. 그런 축제들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보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556년 에딘버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스위스의 대고백이 인정되었으나, 특별한 예외로서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같은 다섯 절기에 대해서 반대되었다. 기각되었던 것은 예배와 공로에 대한 로마 카톨릭적인 견해와 함께 교황적인 경축만이 아니라, 단순히 모든 경축들이다(그렇게 스위스 개혁주의 교회가 그들을 경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목적 때문에 그 당시 이 목적에 관련된 이 부분들에 있어서 어떤 성직자들에게 우리의 성직자들이 보낸 라틴어로 된 편지가 읽혀졌다. 1575년 8월 총회에서 아버든 밖에 있는 목사들과 강독자들을 반대하는 상소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축제때 설교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제날에 한 그 설교와 기도들은 책망받을만한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들자신의 강독자로부터의 거절로 인하여 서판과 호각을 가진 교회의 강독자에게 기도서를 읽도록 강요하고 전달하였기 때문에 드럼프라이스(Drumfreis)란 도시의 섭정자에 대한 상소가 있었다고 똑같이 규정되었다. 이 총회에서 섭정자에게 내린 지시의 내용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주일을 제외한 거룩하게 지키는 율레데이(Yooleday = 크리스마스날)와 같은 모든 성일들과 성자의 날과 그와같은 다른 날들은 폐지되었음이 요청되었고 이들날에 연회를 열고 기도하며 잔치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징벌들이 정해졌다. 1577년 4월에 개최된 총회에서의 일이다. 공의회의 권고를 행할 시찰자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날과 동일한 미신적인 때에 설교하고 성찬을 집례하는 목사에게와 강독하는 강독자에게 성직박탈을 처한다는 조건으로 그만두라고 경고하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 1 권징조례 제 9항에 근거가 부활절 성찬식에 대한 반대가 기록이 되었다. 너희 고관들은 백성들이 그 때가 마치 그 성례에 효력을 주는 것과 같이 그 유월절에 얼마나 미신적으로 그 행동으로 달리고, 일년전체의 나머지는 마치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그 때에만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이 얼마나 조심없고 무시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때문에 거룩한 행동을 위해 다른 때가 그 책에 의해서 정해진 것이다. 1595년 3월에 시작되었고 그 때에 언약이 갱신된 1596년에 개최된 총회에서 축제의 날들을 지킬때 쏟어져 나온 미신과 우상, 화톳불을 집히고 카롤을 노래하는 것은 개선되어야할 부패들에 속한 것으로 사려되고 있다. 주일을 제외한 어떤 축제의 말이든 그것을 지키는 모든 징후들에 반대하여 강단들이 자주 선포하여 왔다.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해서 시편의 글의 머리말에 있고 종교개혁 초기에 우리의 교회에서 공인된 신앙고백에서 다음과 말이 있음이 발견되고 있다. 즉 성례집례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따라 행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정하신 그대로 그들이 집례되어야 한다. 대 신앙고백 23장에서 올바른 성례집행을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요소들로 그리고 그 방식대로 그들이 집례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고 있다.그 사람들은 그들의 자신의 날조로 성례를 조악(粗惡)되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행동의 어떤 것도 원 순수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고백을 작성한 우리 개혁자들의 판단은 분명한 증거에 의해서 성례를 받는 행동에 있어서, 시편의 글의 머리말에 앉아서 성만찬 집례자들에 의해서 나누어진다고 한 성만찬을 거행하는 질서에 있어서 이런 행동에 반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똑같이 권징조례 제 2항에 그리스도 자신의 행동과 그의 실천에 가장 가깝고 그의 거룩한 행동에 가장 적절한 것이다. 사람에 의한 고안된 모든 창안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규례에 대한 변질과 죄과이다. 목회자들은 1562년 12월의 총회결의에 의해서 향유되고 있다(?) 제네바의 질서를 준수하는 것, 낙스선생이 성례집례시 거기에서 종종 목사로서 섬겼던 제네바의 영국교회의 질서인데, 그 행동은 1564년 12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갱신된 것이다. 거기에서 목사들은 시편전에 세운 질서로 성례의 집례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서 전자와 동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네바의 영국교회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1567년에 개최된 의회에서 이 개혁주의 교회에서 공적으로 집례된대로 성례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이 교회의 지체들에 의해서 비난되어야 한다고 선포되고 있다. 제위식에서 성례의 의무적인 집례를 주장하는 왕들의 맹세 행위는 그들이 1567년에 집례되었던 대로 1581년에 재가되었다. 그 때에 성례의 유용을 지지하는 짧은 신앙고백은 스코틀란드 교회에서 서명되었다. 신앙고백에 대한 두번째 서명이후인 1592년에도 마찬가지이다. 1572년 의회에서 성례들이 바르게 집례되었는데도 그들에 참여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 결의가 있었다. 그러나 받을때 무릎을 꿇는 모습은 이 교회에서 사용된 성례의 집례의 짜임밖에 있다. 그로 말미암아 분명한 것은 어떤 모습이나 의식도 전에 집례되었고 종교개혁이래 1618년까지 계속 집례되어 온대로 성례집례와 항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성례의 참된 집례에 덧붙혀진 의식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밖에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이 개혁주의교회의 교리에 반대되는 의식이나 전통처럼 우리교회에서 멸시됨에 틀림없다.
셋째로 견신례에 관해서
다섯가지 거짓 성례들이 멸시된 고백서의 문장에서 그것이 이해됨을 발견하였다. 주교제도가 멸시되었기 때문에 주교들에 의해서 안수도 실패로 돌아간다. 성만찬 입회허락전에 가르치거나 시험하는 모든 과정에서 안수의 암시는 없다.
넷째로 사적인 장소에서 성례집례와 사적인 세례와 성만식에 관해서
시편전에 기록된 예식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음을 발견한다. 마술사와 마법사가 습관적으로 하듯이 성레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사적인 장소에서 사용되도록 제정된 것이 아니라 공집회를 위해서 남기신 것이다. 1581년 10월 에딘버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신앙고백서가 서명된 같은 해 총회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그 당시 트라넨트의 목사는 정직되었다. 왜냐하면 개인집에서 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위반을 고백하였기 때문에 그가 사면되기전에 트라넨 교회에서 공적회개를 하도록 규정되었다. 다른 목사가 사적으로 세례를 주고 유월절에 성만찬을 거행하였기 때문에 1580년 10월에 개최된 총회에서 조사되고 책벌되었다. 그 결의와 책벌이 명백히 밝히는대로 우리교회는 세례의 필연성에 대한 견해를 육성하고 바티칸처럼 성례를 주는자는 누구든지 그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들과 길게 호소되었고 심사숙고하여 사려된 다른 많은 결의들과 근거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의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도록 수여된 자유, 좀더 언급될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의 충만한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 문제는 이런 말로 표현되고 있다. 1580년, 1581년, 1590년, 1591년에 의도되고 고백된 대로 신앙고백에 의한 퍼스의 5가지 조항은 어느 것이든 이 교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총회는 위에서 세분된 다섯 조항들은 이 교회에서 고백안에서 포기되고 그렇게 그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고 가결하였다. 그러므로 (총회는) 그들에 대해서 논하고 오는 모든 시기동안 그들이나 그들중 어느 것을 지키는 것을 금하고 누구든지 책임을 물으며 (당회 혹은) 노회(Presbyteries)로 하여금 모든 범과자들에 대해서 교회의 책벌에 의해서 재판할 것을 규정한다.”
II. 오락에 관한 포고문서(1633년 10월 18일)의 내용에 대해서
1) 명목상 주일날 오락을 허용한 것은 민생복지에 목적을 두었다.
신민(臣民)들은 주일내내 심하게 일하는 천한 자들이다. 그들을 영혼에 새로운 활력을 집어넣기 위해서 오락을 허용해야 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것이 된다는 논리이다. 더구나 찰스 1세의 포고는 자신의 아버지 제임스 1세의 포고를 기억하는 것이므로 그 오락을 법적인 오락(lawful recreation, lawful sports)이라 칭하였다. 그 찰스 1세의 포고는 제임스 1세의 포고문에 따른 것으로, 후자의 포고문에 그 선민에게 일요일이나 다른 성일에 그 법적인 오락과 정숙한 운동(honest exercises)을 금하거나 방해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물론 이런 포고문을 낸 것은 어떤 관구(Lancashire)에서 시발되었던 것이고 왕국전체로부터 백성의 일반적인 불평에 근거하였다. 그 오락의 내용을 보면 남녀 모두에게 허용되는 춤, 뛰고 넘는 남자의 경마 스포츠, 메이게임, 시골축제, 모리스 춤등 다른 해없는 오락들이었다.
2) 실제로 그 포고문서의 동기는 퓨리탄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이였다. 동시에 퓨리탄운동의 확산(... is much infected)을 막기 위한 것도 있었고 다른 종교세력인 교황주의(로마 카톨릭 국교기피자들: Popish Recusants)를 견제한 것이였다.
3) 그 당시 오락과 스포츠의 금지는 주일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성일에도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왕명포고문서는 주일성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였고 다만 일요일 저녁기도후(after evening prayer), 일요일 오후 (upon the Sunday's afternoon) 혹은 모든 신적인 예배종결후(after the ending of all divine service) 그런 오락이나 스포츠를 허용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그 당시 청교도인들(Puritans)과 엄격한 이들(Precisians)은 온종일 주일성수를 강조하였다. 동시에 어떠한 정숙한 오락이나 건전한 놀이(honest mirth or recreation) 까지도 관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퓨리탄 정신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예배모범에 정확히 반영되여 있다.
4) 주일날 오락을 허용하는 법은 최고 재판권을 가진 자들인 왕과 주교가 일체하여 일어난 핍박형태이였다.
그런 퓨리탄정신은 종교의 오용이였고 그 포고문에 의해서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그것이 종교의 오도임을 설득시키고 개혁하는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그것은 법적인 효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어길 경우 법정에 넘겨졌다. 그 법적인 제재효과는 퓨리탄들이 스스로 그 법에 순응하거나 그 나라를 떠나야 하는 택이었다.
5) 따라서 이런 법들때문에 퓨리탄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 이런 법에 순응하는 자들(conformist)과 순응하지 않은 자(non-conformist)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순수한 퓨리탄의 원개념은 사실 후자의 개념을 의미한다.
III. 17세기 개혁신학의 역사적 배경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신학
제네바에서 칼빈을 계승한 Theodor Beza(1519-1605)는 17세기초까지 살았다. 그가 80세의 노년이었을 때, 웨스트민스터 성직자들은 대부분 태어나는 시기이였다. 이 성직자들이 대부분 40대로서 총회에 참석할 때는 대륙에 아직도 많은 유명한 개혁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때이였다. D.Tossanus에 따르면, 17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16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던 개혁주의자들 중에서 베자와 제네바의 다른 신학자들외에도 J.J.Grynaeus, Stuckius, Zanchius, F.Junius, B.Copius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제네바에서 칼빈의 동료이면서 직접적인 제자로서 Th.Beza이외에도 불란서 출신인 Pierre Biret(1511-1571)가 칼빈과 함께 종교개혁자이었지만 칼빈이 세상을 떠난 후 얼마되지 않아 부름을 받았다.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주의자들 안에서는 이 세 사람은 중요한 인물들이였다. 베자처럼 삐에르 비레 역시 칼빈의 참된 제자이였다. 칼빈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단순성을 유지하고자 하였고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며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으로서 창조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믿었다. 예정과 유기에 대한 작정도 하나님의 의지이외에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그 목적도 인간을 영화롭게 하는데 두었다. 섭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일반섭리와 특별섭리에 의해서 다스리신다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도와 같은 약속과 같은 은혜에 기초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에 의해서 거룩히 된다는 칼빈주의적인 신학이었다. 성만찬도 교회에 아주 유익되지만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였다.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던 칼빈의 제자들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강의를 듣지 않았어도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특별히 칼빈의 입장에 서 있었던 자들로서, 벨직고백(네델란드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였던 Guido de Brès(1522-1567)와 Petrus Dathenus(1532-1588), Gaspar van der Heyden(1530-1586), Pierre de Cologne(Petrus Colonius, 1530-1571), Jean Taffin, Herman Moded(1520-1603),Adrianus Saravia(1532-1613), Johannes Helmichius(1537-1568), Jean Polyander(1535-1598)등이 있었다. 초기 네델란드 신교 개혁자들은 Zwingli의 입장에 가까웠다고 알려지고 1530년초 재세례파들의 영향이 폐해가 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540년대로부터 칼빈이 알려지지만, 예를들어 Jan Gerritz Versteghe(Ioannes Anstasius Veluanus, 1520-1570)의 경우, 개혁자들 중에 재세례파를 비판하고 칼빈을 선택하지만, 성만찬 교리에 있어서는 쯔빙글리의 입장을 따랐고 예정론을 버리고 중생과 새생활을 강조하며 어느정도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쪽이였다. 그러나 초기 개혁자들 중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F.Junius가 레이든대학에서 가르치기 전에 레이든에서 가르쳤던(1587-1592) Carolus Gallus(Karl de Haan, 1530-1616)는 제네바에서 칼빈과 베자아래서 공부하였는데, 그가 제네바에서 공부하기 전에 역시 화란의 초기 개혁도시인 Keulen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미 목사로서 봉사하였다는 자로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첫 칼빈주의 개혁자는 Guido de Brès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벨직고백서는 그에 의해서 작성되어 A.Saravia와 H.Moded에 의해서 인정되고 수정되었다. Daniel Colonius의 아버지 Petrus Colonius는 칼빈의 신실한 제자로서 교회를 세울 때 칼빈으로부터 배운 그 정신으로 목회하였다. 특별히 Petrus Dathenus는 네델란드 남부가 칼빈의 영향권아래 있을 때 수도원 생활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자가 되어 18,19세의 나이에 수도원을 박차고 핍박을 피하여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선포하기 위해서 유량설교자가 되었다. 여러 도시를 따라 유량하다가, 헨리 8세가 신교인들에게 개방성을 보이면서 런던으로 피신하면서 그 곳 피난민 교회를 섬기는 폴란드 개혁주의자 Johannes à Lasco를 만났고 다시 영국에서의 핍박을 피하여 완전한 자리인 엠덴을 거처 프랑크푸르트에 이르렀을 때, 루터주의 설교자들을 방해에도 불구하고 네델란드 피난민들의 설교자로 봉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아세례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성만찬과 세례에 관해서 루터와 칼빈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은 세례는 은혜언약의 표징이고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그들의 이미에 세례의 표를 받기 전에 이미 은혜언약 속에 받아드려 진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어린아이가 잃지 않는 것이 그 아이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루터주의자들은 세례는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세례의 필연성을 가르쳤다. 이런 확고한 입장을 초기 지도자들은 사실 피난민 목회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목회생활 가운데에서도 네델란드를 위해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를 번역하고 예배를 위한 시편들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초기 개혁세력들에게 칼빈과 베자의 영향이 크지만, 바로 이어지는 세대에게 하이델베르그의 신학자들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잠시 칼빈에게서 배운 바있는 F.Junius를 제외하고 Daniel de Dieu(1540-1607), Johannes Fontanus(1545-1615), Wernerus Helmichius(1551-1607)등은 모두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고 있다.
프레데릭 3세의 지배시에(1559-1576) 그 선제후가 개혁주의자들을 보호함으로 이런 새로운 분위기가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 때로부터 스위스에 있는 다른 개혁중심지들과 함께 점점 더 하이델베르그 대학이 개혁주의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그 대학은 1386년에 세워진 대학이지만, 선제후 Otto Heinrich 하에 있는 사람들이 온건하게 루터주의 신교에 기울게 되었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이미 스위스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교수들(Martinus Frechtus, Simon Grynäus, Sebatianus Münsterus, Hieronymus Buschius)이 있었고 철저히 개혁주의적인 사람들인 Petrus Martyr Vermiglius, Musculus가 그 교회의 관리들과 친밀해 상태이였다. Johannes à Lasco에 대해서 신뢰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한 Petrus Colonius등 화란 개혁주의자들을 영접할 준비가 된 도시이였다. 그러나 그 선제후가 죽자(1559년 2월 12일), 44세 나이로 프레데릭 3세가 그를 계승하였다. 그기 즉위하자 루터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토론이 주선되고 논쟁이 일어났는데, 거기에서 선제후 프레데릭 3세가 칼빈주의에 강한 인상을 받아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개혁주의 학자들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모이게 된다. 더구나 1560년 4월에 멜랑히톤이 죽자 대학이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미 선제후 Otto Heinrich의 때에, 프랑스 피난민으로서 Petrus Boquinus(Pierre Bouquin)가 1557년 하이델베르그로 와서 1558년에 세 번째 신학교수가 되었던 이래, 이제 1561년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추천으로 Zacharias Ursinus가 대학교수로 부름을 받고, 같은 해에 Caspar Olevianus가 대학교수로 옮김으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거기에서 Z.Ursinus와 Caspar Olevianus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작성되어, 그것이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Z.Ursinus도 Wittenberg에서 공부하였고 거기에서 멜랑히톤과 밀접히 교제하다가 그의 추천에 의해서 여러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칼빈, 부쪄, 불링거와 교제하였고 특별히 Petrus Martyr Vermiglius와는 오랫동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C.Olevianus는 법학자가 되기 전에도 칼빈의 책들을 읽었고 신학을 할 때 처음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쮜리히의 Petrus Martyr Vermiglius, 로쟌에서 베자의 강의를 듣다가 마지막 제네바에서 칼빈의 강의를 들었다. 그 후 자신의 고향인 Trier에서 선생과 설교자로서 종교개혁운동을 하다가 카톨릭주의자들의 저항으로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치게 되었고 제후들의 청원에 의해서 풀러나게 되었고 자신이 프레데릭 3세의 가족과의 인연과 프레데렉 3세의 신용이 두터웠던 Peter Martyr의 추천에 의해서 하이델베르그로 오게 되었다. Z.Ursinus도 역시 1558년 Breslau에서 가르치다가 최종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Caspar Olevianus가 합세하였던 것인데, 이들이 공동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작성함으로 다음 세대의 개혁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출신이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교수해 왔던 Hieronymus Zanchius가 1568년 이래 하이델베르그에서 교의학이 가르쳐지기 시작하여 유럽의 많은 신학생들이 이 곳에 모이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려 유학할 때 필히 제네바와 하이델베르그를 거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이 Hieronymus Zanchius는 이태리 출신 종교개혁자 Petrus Martyr Vermiglius의 제자로서 그 스승처럼 이태리를 떠나 Geneva, Strassburg등으로 피난민 생활을 하였다가 1553년이래 교수생활을 하였으나, 1561년 Martin Bucer가 죽은 후 스트라스부르그를 루터주의로 몰고간 Johann Marbach와의 성만찬과 예정론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Johann Marbach의 편에 있었고 인문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J.Sturm과 일부 교수들만이 H.Zanchius의 편에 있었지만, 결국 관원이 연합적 입장을 만들어 두 편으로 하여금 서명토록 하였으나(1563. 5.28), H.Zanchius는 자신의 기본입장을 고집함으로 평화를 깨뜨린 자로서 그 곳을 떠나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Chiavanna에서 짧게 목회하다가 지금 Heidelberg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역량을 가진 개혁주의 교수들이 하이델베르그에 모여 개혁주의 신학을 꽃을 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프레데릭 3세가 죽자 그를 이은 선제후 Luwig VI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그 도시는 다시 루터주의의 시대로 변하여 개혁주의자들이 쫏겨나게 된다. 이 루터주의 복고시대에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개혁주의 교수들은 물러나고 피신하여야 하였을 때, 선제후의 동생인 Johannes Casimir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Johannes Casimir에 의해서 관할하고 있는 곳에 학교를 세워 하이델베르그에서 피신온 자들을 받아 드렸다. 이 학교가 유명한 Neustadt의 대학이다. 이 대학이 Johnnes Casimir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의 아들 프레데릭 4세에 이어지면서 개혁주의자들의 산출지가 되었다. Z.Ursinus는 하이델베르그에 있을 때부터 로쟌으로부터 교수청탁을 받았으나 선제후의 거절로 옮기지 못하였으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런 예감이 선제후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현실화되었다. 프레데렉 3세가 죽은 후 14일 후에 Daniel Tossanus가 개혁주의에 강한 반대자인 Paul Schechsius에 의해서 교체되었고, 그 다음 Caspar Olevianus가 교수자리를 잃었다. 다른 교수들도 거주지와 생계비가 거절되어 버렸다. 1577년 Petrus Boquinus가 추방된다. 그는 추방되어 Lausanne에서 목회자와 교수로서 섬기다가 거기에서 1582년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1578년 봄까지 600명이상의 설교자들과 교수들이 내쫏김을 당하였다. 그러나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새로운 보호지역으로 모이게 되었고, 그 곳이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들이 된 것이다.
한편으로 Neustadt가 새로운 중심지가 되는 것은 그 도시로 Z.Ursinus를 포함한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들이 옮기기 때문이었다. Z.Ursinus도 거기에 예외가 아니어서 어버지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선제후 Ludwig VI의 힘에 의해서 떠날 수 없게 되었다. Neustadt로 옮겨 이사야주석에 대한 강의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남은 생애를 거기에서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가 하이델베르그의 시기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시기에 유명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석(Explicationes Catecheticae)』과 『기독교적 권고(Admonitio christiana)』이 출판되었다. 특별히 후자의 작품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이 확고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 책은 루터주의자들로부터 비난들과 오해들에 대한 대답하는 형식이지만, 오히려 그 대답에서 루터주의와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은 인성과의 본질적인 속성을 실재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그들이 비난하기를,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실재적으로 공유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본성들의 각각에 대한 독특한 것이 그리스도 인격에 공유적이다는 주장이다는 변증이다. 그래서 우르시누스는 루터주의자들이 본성과 위격사이의 차이를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권하고 있다.
둘째로 성만찬론에 있어서 개혁주의자들이 성경귀절이 애매하여 다른 구절과의 관계속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고 또한 말씀들이 새롭고 외래적인 의미를 취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르시누스는 그 반대로 매 말씀이 철저히 판명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칼빈의 독특한 주장으로서 우르시누스가 그 입장을 다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개혁주의자들은 그 말씀들은 유사와 전체 성경의 해석에 따라서 설명한다며 거기에 더하거나 감하는 것이 없다고 대답하고 있다. 다른 비난 즉 쯔빙글리와 함께 오해된 해석 즉 몸‘이다’에서의 ‘이다’가 단순히 ‘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고 강화하며 제공한다는 표시로 해석하면서, 칼빈처럼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혹은 장소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관계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relativa et spiritualis) 현존한다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셋째로 예정론에 대해서 섭리론과 구별하면서 전자는 인격체에 관계된 것이지만, 후자는 모든 피조물들에 관계한다고 하면서, 그 예정의 실제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다는 것이다. 그와같이 유기의 원인도 죄에 원인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있다는 것인데, 만약 유기의 원인이 죄에 있다면 만민들이다 죄인들이므로 버림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582년이 기울어지면서 Z.Ursinus는 병을 얻어 오랜 하이델베르그 친구이였던 F.Junius앞에서 1583년 3월 6일 사망하기까지 교회를 섬겼고 이 때에 David Pareus, Fr.Gomarus, Lubbertus Sibrandus 등의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들이 다음 세대 개혁주의들 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이 되었다. 즉 그를 하이델베르그에서 쫏아냈던 선제후 Ludwig VI가 같은 해 10월 12이 사망함으로 그 아버지와 달리 할아버지의 정신을 따라 Friedrich가 개혁주의를 다시 받아드림에 따라 Ursinus의 하이델베르그 옛 동료인 F.Junius가 하이델베르그 교수직을 다시 얻었고 또한 그의 수제자인 Davis Paraeus가 1584년에 교수직을 얻게 되었다. 역시 Daniel Tossanus도 1586년에 교수직을 회복하여 돌아와 1602년까지 가르치게 되었다.
다른 한편에는 헤르보른(Herborn)이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칼빈주의 대학으로 만든 두 기둥 중 하나인 Caspar Olevianus가 하이델베르그에서 쫓겨나 선제후 Johann von Nassau의 영역인 Berleburg에서 개혁운동을 계속하였고 이 때 베자의 편집아래 중요한 책들을 펴냈다. 그 후 선제후 Lugwig VI세가 사망한 후 1584년 4월에 학문이 많고 외국어들에 능한 선제후 Ludwig von Wittgenstein가 그를 Herborn으로 데려와서 거기에서 가르치도록 하였다. 같은 해에서 일찍이 하이델베르그 철학교수이였다가 쫓겨나 Neustadt로 피신하였다가, 헤르보른(Herborn) 교수로 부름을 받은 자가 Johannes Piscator(1546-1625)이다. 이 Johannes Piscator는 원래 스트라스부르그의 학창시절에 H.Zanchius의 강의는 들었으나, J.Marbach의 신뢰받는 제자이었고 역시 그 당시 Zwingli의 경향을 가졌다고 알려진 Wittenberg를 피하고 Tübingen를 택할만큼 루터주의의 입장에 있었으나, 점진적으로 H.Zanchius의 강의에 대한 기억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 연구를 통하여 개혁주의의 입장으로 바꾸어 졌던 인물이다. 비록 J.Marbach의 신뢰 속에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으나, 자신의 개혁주의 입장을 감출 수 없었고, 따라서 강의 중에 나타난 소위 Extra-Calvinisticum의 입장과 예정론의 입장 때문에 강제로 강단을 떠나야만 하였던 자이였다. 그가 강제로 떠나게 된 것은 루터주의자들의 권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Sturm의 보호는 길지 못함에 따라서 1573년 봄 개혁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던 하이델베르그에서 철학사강사로 자리를 얻어 온 가족과 친척들과 이별하였던 것이며, 하이델베르그 시절에 Tremellus, Junius, Ursinus와 우대관계를 얻게 되었다. 특별히 그 생애에 가장 영향을 끼쳤던 Caspar Olevianus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Ludwig VI의 등장으로 갑자기 자리를 잃고 거리에 방항하여야 할 처지가 되었으나, 마침 Caspar Oleviansus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하고 자리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스승인 Caspar Olevianus는 1587년 3월 12일 사망하면서부터 그가 Herborn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독일 개혁주의 신학의 두 기둥이 사라지고 그의 제자들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의의 원인(causa meritoria justificationis)이 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고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입장이 Beza, Grynaeus, Polanus 등에 의해서 거절되었고 1603년 갑대회(Synode von Gap)에서 협오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라로셀 대회(Synode von La Rochelle)에서 그 입장이 변경되었어도 그와 같은 입장을 주장하였던 세당(Sedan)의 Daniel Tilenus(1561-1633)로부터 지지를 받았어도, 시간에 지남 따라 몰리내우스(Pierre du Moulin)의 반대를 받았다. 그 외에 Herborn 대학에서 의미있는 학자로서 Johann Heinrich Alsted(1588-1638)가 있다. 그는 헤르보른에서 철학을 10년 가르치다가 1619년 신학부 교수가 되었다. 그의 신학의 성격 때문에 그는 Keckermann의 제자로 불리어 지고 있지만, 천년주의의 옹호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신학 전체를 , 선지식(Praecognita), 자연신학(Theologia naturalis), 요리문답(Catechesis), 스콜라 신학(Theologia scholastica), 실천신학 혹은 교회신학(Theologia practica sive ecclesiastica), 변증신학(Theologia controversa sive polemica)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의 개념에 있어서 모든 계시진리의 샘으로서 성경이외에 다른 것을 신학의 원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Sadeel, Zanchius, Junius, Danaeus 등의 자신의 선행자들을 가지는 개념이었다는 점에서 그 개념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itionis)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먼저 다루고 그 말씀의 부분들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둘째로 하나님의 행위들(actiones Dei)에 대해서로 나누고, 이 후자를 다시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 즉 작정과 그것의 집행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서 예정의 집행(executio praedestionationis) 아래 은혜언약과 그것의 다양한 경륜들로의 발전이 다루어지고 있고 여기에 기독론이 종속하고 있다. 자연언약(foedus naturae)과 은혜언약(foedus gratiae)로 나누는데, 멜랑히톤과 관계하는 성격이 있지만, 은혜언약 안에 구약과 신약경륜을 포함하여 기초와 실체에 따라서 동일한 복음을 내포하며 다만 선포와 경영의 양식(modus promulgationis et administrationi)에 의해서 구별된다는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다.
Herborn에 대학이 생길 즈음에 화란의 Franeker에 대학이 1585년에 생겼다. 그 대학의 첫 학장은 Martinus Lydius(1539-1601)로서 Ursinus의 제자이다. 이미 Ursinus의 제자이면서 동료로서 1567년부터 1576년까지 praeceptor collegium sapientiae로서 봉사였다가 루터주의의 회복시에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그 곳을 떠나 피난생활을 하다가 Franeker 초대학장으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다. 그의 동료교수들인 Henricus Antonides Nerdenus(1546-1614)와 Sibrandus Lubbertus (1555-1625)도 같은 시기에 부름을 받았던 자들이다. 특별히 Sibrandus Lubbertus는 브레멘(Bremen)에 개혁주의 학교가 세워지기 전에 J.H.Molanus의 라틴학교에서 베자의 책을 교재로 하여 개혁주의에 대해서 배웠다. 여기에서의 배웠던 동료들이 다시 Heidelberg 대학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에 같이 레이든 교수가 되었던 Johannes Polyander가 같은 라틴학교 출신이다. 다만 Johannes Polyander는 J.H.Molanus를 계승한 Christophel Pezelius 밑에서 공부하였을 뿐이다. 그런 시기를 지나 1575년 Wittenberg, 1576년 Genève에서 공부하였고 이 곳에서 Ubbo Emmius, N.Casaubonus와 친분을 갖게 되었으며 1577년 Marburg을 거처 1580년 Ursinus가 있었던 Neustadt에서 Piscator, Pareus, Gomarus와 친분을 갖게 된다. Luwig VI세가 죽고 개혁주의가 Heidelberg 대학에 회복된 이후 Daniel Tossanus이 학장이 되었을 때, 1587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가 이 학위를 받기 전에 Franeker 대학의 교수로 임명받게 되었는데, 상기의 세 교수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로 교수직을 얻었다. Ursinus, Grynaeus, Sadeel의 언어와 스타일에 영향을 받고 있다. 그의 일생의 특이성은 도르트회의에서 정리되기 전에 그의 친구인 Petrus Bertinus와 아르미니우스의 계승자인 Conrad Vorstius와 논쟁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또한 자체 내의 동료들인 Johannes Drusius와의 잠언 8장 22절에 관한 논쟁, Johannes Maccovius와의 ‘그리스도의 부활, 마지막 심판, 칭의, 그리스도의 화목의 죽음의 충분성과 그 영향’ 등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의 오래된 친구인 Menso Alting과 함께 대표적 칼빈주의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같은 Franeker 동료인 H. A. Nerdenus(van der Linden)는 Bullinger의 입장을 따르고 새로운 젊은 사람들 Cocceijus, Episcopius등에 대해서 우호적이였다. 또 다른 Franeker 교수로서 Johannes Maccovius(1588-1644)가 유명하다. 그는 하이델베르그 히브리 교수이였다가 30세쯤 되어 폴란드로 옮겨 Dantzig에 있었던 Bartholomäus Keckermann(1571/3-1609)의 제자인데, 폴란드를 떠나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lelberg, Marburg, Leipzig, Wittenberg)을 거쳐 예수이트교도들와 소키니우스주의와 논쟁들을 통하여 개혁주의자로서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1613년 이래 네델란드에 와서 1613년 10월 21일에 Franeker에 등록하여, 그 다음 해 1614년 3월 8월에 Franeker에서 학위를 받았고 거기에서 사강사로 봉사하다가 1614년 상기 H. Antonides Nerdenus가 사망하자 그가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1615년 1월 28일 extraordinarius Professor, 1615년 6월 16일 ordinarius Professor). 그러나 도르트회의를 기점으로 약간의 차이가 4년 후에 많은 점들에 있어서 자신의 학위논문 지도자인 Sibrandus Lubbertus와의 갈등을 갖는 결과를 얻었다. 이 점에 있어서 해석의 차이가 있으나, 아마 신학적인 근본적 입장에 있어서 차이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Maccovius는 F.Gomarus, Rivetus, Festus Hommius W.Amesius, G. Voetus처럼 강한 타락전 선택설을 입장을 가져, ‘유기자들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 결국 파멸한다’(Reprobos necessario peccare ac tandem perire), ‘그리스도는 모든 이들과 개인들의 구원을 원치않았다(Christus non vult omnium et singulorum salutem)’는 주장이다.
반면에 Sibrandus Lubbertus는 Hidding의 입장에 반대하여, ‘죄들의 은혜로운 허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인 긍휼일 수 없고 시간상 하나님의 외적역사이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형벌로 정하셨다’(Deum destinare aliquos ad poenam)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죄를 의도하셨고 죄가 하나님께서 시준한 목적이었음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다’(non possumus negare, quin Deus intendat peccatum, et peccatum sit finis, ad quam Deus collimat)고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세상을 위해 충분하고 유효하다는 데에 더 강조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Satisfecit igitur Christus pro omnibus homnibus, sed non eodem modo. Nam pro electis merito et efficacia simul; pro caeteris, merito. 그래서 그의 입장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이들의 죄를 위한 만족이였다는 것이요 동시에 그리스도의 힘과 열매는 택자들에게와 나머지에게도 유익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일치한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후에 1617년 교수로 부름을 받은 Johannes Acronius(1565-1627)는 Neustadt에서 신학공부를 하였으나, Lubbertus의 영향으로 Maccovius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는 Lubbertus의 입장을 지지한다기 보다, Conrad Vorstius(1569-1622), Arminus, Socinus의 입장들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추천하였다는 점에서 Lubbertus의 입장과 다르다.
일찌기 세워진 Franeker대학 이외에 네델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Leiden 대학이 있다. 이 대학은 Franeker보다 10년 전인 1575년에 세워졌다. 이 대학에서 칼빈과 베자의 제자인 Carolus Gallus(1530-1616)와 Lucas Trelcatius가 가르치고 있었지만,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으로 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592년 F.Junius가 거의 청강자들을 잃은 C. Gallus 대신 professor primus로서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옮긴 이후부터이다. 그가 1602년 흑사병으로 갑자기 죽기까지 레이덴 대학에 머물면서 가르쳤다. 이미 신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레이덴 대학에 와서 신학의 전성시대에 도달하여 많은 저서를 써서 남겼다. 그리고 2년 후에 F.Gomarus(1563-1641)가 교수로 오게 되는데, 후에 도르트회의에서 크게 활약하는 Festus Hommius(1576-1642)는 이 두 신학자들 밑에서 공부한 대표적인 제자이다. F.Gomarus는 스트라스부르그의 Johannes Sturm 밑에서 공부하였고 1580년 Neustadt에서 Z.Ursinus, H.Zanchius, D.Tossanus, F.Junius(히브리어), S.Stenius(헬라어), L.Pithopoeus(라틴어), F.Crellius 와 J.Jugnitius(철학)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582년 Oxford로 가서 J. Reinoldus의 강의를 들었고 1583년 Cambridge로 옮겨 칼빈의 직계인 W.Whitaker밑에서 B.A.와 M.A.를 마쳤다. Cambridge에서 라무스주의에 접촉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라무스 이론 사이의 종합을 시도하게 되었다.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루터주의로부터 개혁주의로 다시 회복된 하이델베르그에서 D.Tossanus, F.Junius, 바젤에서 와서 루터주의 신학자 Timotheus Kirchen의 자리를 대신하였던 J.J.Grynaeus, Marburg 대학에서 구약교수로 있다가 루터주의 신학자 Marbach 대신해서 그 곳으로 옮긴 Georgius Sohnius(구약, 신조학, 설교학)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피난민 교회를 섬기다가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자 마자 레이든 대학으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학창시절의 동료이였던 Antonius Thysius(1565-1640)도 후에 레이덴 대학으로 부름을 받았다. 나이가 조금 많은 Jacobus Arminius(1560-1609)는 F.Junius의 후계자로 1602년에 그 당시 궁중설교자이였고 제네바 유학시절의 같은 동료이였던 Johannes Wtenbogaert(1557-1644)의 압력에 의해서 레이든 대학으로 오게 된다. Arminius는 첫 레이든 출신 교수인 셈이였다. 그리고 초기 레이든 교수이였던 Lucas Trelcatius의 아들인 Lucas Trelcatius(1573-1607)이 유럽의 여러 대학들(Heidelberg, Bazel, Zürich, Genève)에서 공부를 마치고 베자아래서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1603년부터 레이든에 옮겨 거하는 동안 1606년 교수로 임명된다. 이렇게 최근 교수들이 된 젊은 세 학자들이 공동저서를 낸 것이 『Syntagma disputatiorum theologicarum』이다. 그러나 Arminius와 긴 논쟁으로 말미암아 Gomarus가 레이든 대학을 떠나자 큰 변화가 있었다. 그 자리에 Steinfurt의 Gymnasium Academicum 교수이었던 Konrad Vorst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이 학자는 특별히 그의 최근 저서 『Tractatus theologicus de Deo sive der Natura et Attributis Dei』에 의해서 영국 뿐만 아니라 하이델베르그 등의 모든 학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지만, 레이든 교수가 되었다. 이는 역시 아르미니우스를 레이든 교수로 오게 하였던 Johannes Wtenbogaert의 힘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그가 궁중설교자로 있는 동안(1601-1617)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초기 네델란드 칼빈주의자인 Jean Polyander(1535-1598)의 아들이요 부레멘의 라틴학교 출신이면서 하이델베르그와 제네바에서 공부하였던 Johann Polyander(1568-1646)가 1611년 10월7일에 새로운 교수로 임명되었는데, 이 임명이 후기 레이든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의미가 얻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념강의 제목은 『De vera S.S. Theologiae existentia ac sublimi natura』이였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의 제자인 젊은 Simon Episcopius(1583-1643)가 그 대음해 1612년 2월 23일에 교수직을 얻게 되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갈등의 상황은 도르트회의가 열게 되는 상황으로 발전되었고 그 회의에서의 승리가 칼빈주의 신학이 항존적으로 정착이 된다. 바로 도르트회의 이후에 건전한 교수진들로 새롭게 변모하게 된다. 즉 1619년 7월 20일에 Antonius Walaeus가 Middelburg 대학에서 Leiden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recta instiutione studii theologic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고, 2달 안되어 Antonius Thysius가 Harderwijk대학에서 레이든 대학으로 옮겨 『Oratio de theologia eiusque studio capessendi』이란 제목으로 기념강의를 하였다. 그 다음 해 이어서 Petrus Molinaeus 때문에 Andreas Rivetus가 레이든 대학 교수로 오게 되는데, 이런 변화된 레이든 교수진들에 의해서 차후 네델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력 있는 기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변화가 개혁주의 신학사 전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Z.Ursinus와 C.Olevianus 때문에 Heidelberg 대학이 의미를 얻게 되었고 그가 Neustadt를옮김으로 거기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이 옮겨지며, 또한 C.Olevianus가 Herborn으로 옮김으로 새로운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처럼, 네델란드에서는 F.Junius와 함께 F.Gomarus가 그런 의미를 갖는다. 그가 레이든 대학으로 떠나 Middelburg으로 초대받았을 때, Middelburg에는 레이든 대학의 초기제자들인 Castellanus, A.Aurelius, Antonius Walaeus나 G.Voetius 같은 그의 제자들이 목회하거나 가르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으나, 가르치는 일에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는 Gomarus가 Groningen에 있을 때, 도르트회의에 Middelburg 대학교수로 Antonius Walaeus가 대표하여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Saumur대학에서 자신의 조국으로 갔던 Robert Bodius 자리에 Gomarus를 초청하였을 때, Gomarus는 학장으로서 초청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레이든 대학의 자신의 자리를 Conrad Vorsitius가 계승하였던 것처럼, Saumur대학에서의 자신의 자리도 John Camero가 계승하였다. 다만 Groningen 대학의 계승자는 S.Maresius이었다. 어떻든 Gomarus의 신학은 개혁신학의 특징과 그 노선을 알려주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신학의 특성을 다음 몇 가지 면에서 구별되고 있다.
첫째로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다.
주님 앞에 신비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해서 신중하게 논하여야 하고 우리에게 계시된 것은 탐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정은 보편적으로 모든 만물들에게 미치고 특별히 지적피조물 즉 천사들과 인간들에 대한 것이다고 보았다. 인간에 대한 특별한 예정에 있어서 문제는 어떤 인간들을 택하셨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예정의 대상(objectum praedestionationis)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명확히 예지되고 창조되어 타락한 인간, 혹은 창조되고 타락하게 될 인간을 그 예정의 대상이었거나, 명확히 예지되지 않은 인간 혹은 좁게 창조될 수 있었던 인간을 예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마루스의 경우 그들의 입장들에 대한 약점들을 인식하면서도 마지막 견해에 대한 기호를 가지고 변명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의
죽음은 하나님으루서 죽은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었다는 칼빈주의 독특성을 주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역시 모든 택자들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도르트회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그의 순종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그의 순종의 시작이라 보았다. 역시 Piscator의 입장에 반대하여 그의 수동적 순종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을 인정하였고, 그의 수동적인 의가 그의 자발적인 순종이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의에 기초하였다는 입장이다.
셋째로 영국의 퓨리탄들의 신학의 영향으로 주일성수를 하였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Perkins의 입장에 따라 엄밀한 안식일 성수를 주장하였던 자들이 Middelburg의 설교자 William Teellinck와 Zierikzee의 설교자 Godefridus Udemannus이였다. 역시 A.Walaeus가 그들의 편에 있었다. Godefridus Udemannus는 처음 1612년에 주일성수에 관한 글을 출판하여 1621년에 제 2판을 내었다. 주일성수에 대한 William Teellinck의 또 다른 글이 1622년에 출판이 되고 다시 1627년에 출판되자, 이에 대한 Tolen의 목사 Jacobus Bursius의 반박의 글이 같은 해에 출판됨으로 그 논쟁이 시작되었다. 더구나 이논쟁이 W.Teellinck의 편에 있었던 G.Voetius가 같은 해에 자신의 글을 펴냄으로 크게 되었다. 이미 도르트회의에서 논의된 유대 안식일은 지금 폐지되고 주일날만 그리스도에게 지켜져야 한다고 결정하였었는데, 그 때의 결정은 예배에 방해되는 모든 종류의 오락의 금지정도이였다. 지금 Jacobus Bursius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완전하 유대주의를 심을려고 한다고 비판하면서, 씨뿌리고 쟁기질하며 수확하고 여행하는 일등은 사람이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Jacobus Bursius의 입장을 Gomarus가 수정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게 된 것이다. 즉 일반적인 안식일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이나 후나 땅위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타당하지만, 특별한 안식일 계명은 주님의 임재까지 유대민족에게만 관련된 것이다. 영원한 언약은 유대적인 안식일이 계속 지켜져야 한다고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주님의 날 혹은 주일의 첫날은 사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예배를 위해서 제정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우리 모두가 영적인 안식일 지켜야 하고 계시된 예배의 날을 어떠한 더러힘이나 우상숭배함이 없이 거룩하게 경애해야 한다는 온건한 정도의 주장이였다.
위의 세 대학들 외에도 Groningen대학이 1614년에 세워졌다. 첫 primus professor로서 헤르보른 대학에서 신학공부하여 거기에서 잠시(1612년) 교수직을 얻어 봉사하였던 Herman Ravensberger(1586-1625)가 1614년에 이 곳으로 부름을 받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F.Gomarus가 1618년 부름을 받아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여기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후 1625년에 Emden의 유명한 목회자 Menso Alting의 셋째아들인 Henrich Alting(1583-1644)이 Herman Ravensberger를 계승하였다. Henrich Alting도 역시 Herborn 출신으로 Johannes Piscator, Mattias Martinius, Wilhelmus Zupperus 밑에서 공부하였다. 세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Paltz의 선제후 자녀들의 개인교사로서 일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자녀들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때 하이델베르그에 함께 거하기 시작하여 거기에서 학위로 받고 1616년에 교수자리를 얻게 된다. 거기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Abrahamus Schultetus, Paulus Tossanus와 함께 도르트회의에 부름을 받는다. 그러나 1622년 하이델베르그에 폭동이 일어나 제수이트교도들의 수하에 들어감에 따라서 갓갓으로 그곳에서 숨어 생활하다가 도시를 떠나 여러 곳으로 도피생활을 하다가, 1627년 6월 16일에 Groningen 대학에 자리를 얻어 봉사하였고 1634년에 다시 하이델베르그에 들어 가고자 시도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Groningen에 다시 돌아와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특별히 그의 아들인 Jacob Alting(1618-1679)이 1643년 1월 13일에 Groningen 대학의 히브리서 교수가 되었다. 신학교수는 1667년에 비로서 되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코케이우스와 같은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따라서 동료교수인 Samuel Maresius에 의해서 펠라기수주의자, 소키누스주의자, 카톨릭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Groningen 대학의 다른 대표적인 학자는 Samuel Maresius(1599-1673)이다. Samuel Maresius는 F.Gomarus가 Leiden 대학을 떠나 프랑스의 Saumur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그 후 1643년 Groningen대학에 교수로 옮으로 오랫동안 여기에서 가르쳐 왔던 F.Gomarus의 신학을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Gisbertus Voetius와 화합하지 못한 것은 개인적인 성격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J.Alting과 J.Cocceijus에 대한 "Novatores"로서의 비판은 정통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시 A.Rivetus와 제네바의 동료이였던 F. Spanheim(1600-1649)의 뿌리에 서서 역시 Saumur 대학의 아미롤드주의(Amyraudisme)에 반대하였고 역시 데카르트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주의와 루터주의 사이의 통일성을 추구한 학자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의 중요한 인물인 Gisbertus Voetius(1588-1676)는 Gomarus와 Arminius가 레이든 교수로 있을 때, 그들의 제자이다. 1611년부터 계속 목회생활을 하였다가 1619년 여름에 도르트회의의 부름을 받았다. A.Rivetus의 추천에 의해서 Utrecht 신학교 교수로 부름을 받은 것은 1634년이었다. 그 다음 해에 목사로서도 부름을 받았는데, 이 곳에서 42년 동안 섬기게 되었다. 그는 그 학교에 8가지 강좌를 열어 강의하였고 주 중에 사적으로 공적토론들을 이끌었다. 우선 그는 코케이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우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과 같이 죄의 완전용서를 주장하였고 역시 구약성도들도 신약에 성도들과 같은 방식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Coccejus는 παρεσις와 ἀφεσις 사이의 차이란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런 구별은 Johannes Chrysostomus, Photinus, Theophylactus, Beza, Johannes Cloppenburg에 호소하였으나, Voetius는 시대나 인간의 어떤 구별없이 죄의 용서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고 시편 103편 3절, 시편 65편 4절, 시편 85편 3절은 ἀφεσις의 용서(ἀφεσις-remissio)를 말한다고 대변하였다. Voetius의 이런 논증과 반대는 코케이우스가 말하는 성령의 역사 사이의 질적이고 양적인 차이(Spiritus servitutis ad metum, Spiritus adoptionis)에 대한 반대논증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건전한 선교신학의 효시자가 바로 Voetius의 선교신학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교회개척론에서(De plantatione ecclesiarum) 선교의 목적은 택자들의 소명과 회심으로 보고 미래에 대한 약속과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명령을 강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예정론과 선교가 잘 조화되었던 것은 그의 섭리에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였다. 이에 따라서 선교의 대상에는 이방인들, 유대인들, 모슬렘인들을 포함하는 불신앙인들 뿐만 아니라, 이단들(haeretici), 분리주의자들(schismatici)을 포함하고 있었다. 파송인들에 대해서도 선교사들, 조사들(adjutores), 다른 조력자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구체적인 선교의 수단들도 다양하게 논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런 전반적인 화란 땅의 신학적 분위기와 그 배경과 함께 다른 유럽지역에서 발전을 좀 더 언급할 필요가 있다.
Marburg 대학은 17세기 초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1584년 Heidelberg 대학의 교수로 발탁된 Georg Sohnius(1551-1589)는 이미 1574년에 사강사로 1575년에 구약교수로서 활동하였으나, 늦게까지 멜랑히톤 신학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음이 알려지고 있고, 칼빈주의에 가까이 있었다고 해도, 부쪄의 신학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점이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성격처럼 처음부터 대학은 칼빈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예정론에서 그러하였는데, 그런 요소는 Lambert von Avignon, A.Hyperius 등에 의해서 확인되고 있다. 그 중에서 아주 독립적으로 사고하였던 A.Hyperius의 저서에 의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1569년이래 Wilhelm IV세 아래 Georg Sohnius의 신학적 입장이 더 신뢰를 얻게 되어,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칼빈주의와 비텐베르그 교리 사이의 중용입장이 유지되어 왔었다. Willelm IV세의 다른 형제 Luwig IV세가 죽은 후, 그를 선제후 Moritz에 의해서 계승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선제후는 팔방의 학자(시인, 작곡가, 수학자, 건축가)로서 여러 언어들(불어, 영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히브리어)을 구사하거나 알았던 제후이었다. 그가 루터주의의 성례론을 결정적으로 싫어하였다. 그래서 베자와 친말한 관계를 가졌고 선물을 가지고 84년의 노년의 베자를 두 번의 방문하기까지 하였다. 1605년에 3 가지 점들을 개혁하도록 하였는데, 첫째로 그리스도의 위격 중에서 신성이 다만 구체적으로 즉 인성자체가 아니라 전 그리스도로부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로 상들을 없애고 십계명이 가르쳐 져야 한다는 것, 셋째로 성만찬에서는 규정에 따라서 빵이 떼어져야 한다는 것등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이었다. 또한 교수들 중에서 루터주의자들인 두 교수들(Winkelmann, Balthaser Mentzer)이 경질되고 그 대신 Mother와 Caspar Sturm이 그 자리를 얻었다. 2년 후 궁중설교자로 Schönfeld가 들어 왔다. 이렇게 하여 이 지역에서 개혁주의 대표자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는 총대들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멜랑히톤의 신학이 대표해 왔기 때문에, A.Tholuck은 예정론에 대한 판단도 멜랑히톤의 입장에 서서 판단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그 후 Schönfeld가 Johnnes Crocius에 의해서 계승되었는데, 그는 궁중설교자이면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동료 헤센주 궁중설교자 Neubauer와 함께 보편적 은혜를 좋아하여 절대적 작정(decretum absolutum)을 던져 버렸다. 네 번째 신학교수는 Eglin이었다. 이 사람이 바이겔리우스주의 즉 신비주의 혹은 천년주의를 반대하여 싸웠다. 이를 이어 Sebatian Curtius, Johannes Heine, J.G.Crocius등이 활동하여 루터주의나 데카르트주의를 경계하였다.
그 다음은 개혁주의자들의 도시 Bremen에 대해서 다루어야 한다. 이 도시는 Jena에서 공부하였고 멜랑히톤 신학의 대표자인 Christoph Pezel이 이 곳에 라틴학교에 온 이후부터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1576년 Nassau에 와서 교회의식에 대한 입장에서 칼빈주의로 변화하였다. 그 지역은 멜랑히톤주의와 칼빈주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그도 예외가 아니였다. 그가 하이델베르그 대학과 레이든 대학의 부름을 거절하기까지 브레멘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도시가 칼빈주의의 다른 한 중심지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더 발전은 Emden에서 부름을 받은 Matthias Martini가 1610년 학장으로 옮으로 시작되었다. 역시 Marburg의 J.Crocius의 형제인 Ludwig Crocius가 같은 해에 구약교수로 왔고 1612년에 Isselburg와 Pierius가 교수로 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곳을 대표하여 Matthias Martini와 Lugwig Crocius가 참여하였다. A.Thouck이 지적하기를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은 온화한 입장으로 아르미니우스에게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입장이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강제로 서명한 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그런 교회회의가 악을 크게 하였다는 입장이였다는 것이다. Lugwig Crocius는 후에 1641년의 한 편지에서 그들은 보편은혜 혹은 충분한 은혜를 좋아하였다는 고백을 인용하고 있다. 그 밖에 특별히 J.Coccejus가 브레멘 출신이였고 화란으로 옮기기 전에 브레멘에서 상당한 기간동안 철학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 밖에 17세기 개혁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스위스의 개혁주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먼저 Zwingli의 개혁도시인 Zürich의 인물들에 대해서 살펴 볼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Zwingli외에도 Leon de Juda, 히브리어 학자인 Pellicanus, Theodore, Bibliander, Bullinger, Ludwig Lavater, Gualter, Petrus Martyr, 교회사가 Rud.Hospinian등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인척관계로 맺어지게 되었고 계속 인척관계 속에서 계승되었다. Zwingli의 사위가 Gualter이고 Gualter의 사위들이 Ludwig Lavater와 Jose Simler이다. 또한 Ludwig Lavater의 사위가 Hospinian이었고 그의 사위인 Wilhelm Stucti가 1563년 신학교수가 되었고, Jose Simler의 사위가 Casper Waser인데 그는 1651년에 신학교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Bullinger가 타락후 선택설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있으나, 스트라스 부르그의 Zanchius는 1561년 자신의 예정론에 대한 입장을 Bullinger, Ludwig Lavater, Jose Simler, Gualter등으로부터 동의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etrus Martyr의 예정론의 경우에도 엄밀한 예정론이 실천적 의미에서 온화하게 자리를 잡은 형태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에 와서 신학교수들로서 1625년 조직신학 교수가 된 Johannes Jok. Huldricus, 1642년 22세로 교회사 교수가 된 Johannes Hein. Hottinger, 1649년 히브리어와 요리문답 교수가 된 Caspar Suicer, 1651년에 논리학 교수가 된 Johannes Wirtz, 1661년 윤리학 교수가 된 Caspar Heidegger 등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신학교에서는 Wittenberg와 같이 Genf나 Zürich의 경우에도 성경주석이 교육의 시작이요 모든 것이었다. 이런 훈련의 예가 소위 예언회(Prophezei)라는 모임의 경우이다.
바젤에서는 맨 먼저 J.Jak.Grynaeus(1540-1617)는 바젤의 루터주의자인 Antistes Simon Sulzer(1508-85)의 제자이였고 튜빙겐의 유명한 루터주의 신학자들(Andreae, Heerbrand, Schnef) 밑에서 공부하였으나, 70년대에 교회교부들의 독자적 연구들에 의해서 개혁주의로 옮겼던 자인데, 이로 인하여 화해가 없이 열렬한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강하게 미움을 받게 되었던 인물이다. 1575년 이래 바젤의 구약교수이였으나, 아마 역시 그로 인하여 하이델베르그로 옮기게 되었으며, Sulzer 사망이후 그의 후계자로 1586년에 다시 바젤로 돌아와 구약으로부터 바꾸어 신약교수로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가 바젤을 칼빈주의적인 사상으로 바꾸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다. 그가 1534년 바젤고백을 칼빈주의적으로 1589년에 재해석하여 출판함으로 반루터주의적인 성격으로 바꾸게 하였고 1598년에는 모든 목사가 그 바젤고백을 의무화하도록 하였다. 그의 제자로서 그의 사위로서 후에 유명하게 된 자가 Amandus Polanus(1561-1610)이다. 이미 Gymnasium in Breslau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대해서 친밀하게 되었고 튜빙겐 대학에의 연구초부터 루터주의적인 성만찬론에 대한 반대자로서 동시에 개혁주의 예정론의 신봉자로서 증거되고 있다. 바젤, 제네바, 하이델베르그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그렇게 Polanus는 베자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 드렸던 신학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비록 멜랑히톤의 소요학파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받아 드렸을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근원적으로 비판한 Ramus의 논리를 일부 받아 드렸던 인물이기도 하다. J.J.Grynaeus의 영향하에 1590년 바젤에서 학위를 마쳤고 그 후 9년 후에 Johannes Brandmüller(1533-1596)의 후계자로 구약교수로 자리를 얻게 되어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Piscator, Olevianus, Beza의 제자로서 Basel의 교수가 된 사람은 Johnnes Buxdorf(? -1629)이다. 1590년이래 히브리어 교수이였는데, 영감에 대한 그의 독립적인 입장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진보적인 Saumur 대학의 Ludwig Cappellus의 영감론과 갈등이 되었다. 자신의 아들 Johnnes Buxdorf가 같은 대학에서 1630년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 1647년에 조직신학 교수가 되었고 1659년 아버지를 계승하여 구약교수가 되었다.
2.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고 볼 수 있다. 영국국교회의 신학인 감독주의 신학 혹은 아카데미 신학도 오랫동안 카톨릭주의와 첨예하게 싸우는 종교개혁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 신학이였다고 볼 수 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죤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죤 낙스의 친구이었던 죤 폭스의 칭의론은 루터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에드워드 6세때(1550) 런던주교 리들리(Ridley)의 종교개혁은 성만찬에 있어서 제단대신 테이블로 바꾸는 것도 큰 개혁이었다. 그 개혁은 루터주의로부터 더 나아간 개혁이었지만, 부쩌, 오에콜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불링거, 칼빈, 피터 마르티르, 라스코, 헤디오, 카피토등이 공히 개혁하고자는 것에 불과하였다. 한편 쮸리히에서 돌아온 후퍼(Hooper)는 1550년 7월에 왕에 의해서 주교로 임명을 받았을 때, 두 가지 이유로 거절하였다. 하나는 맹세의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과 성령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론적인 복장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단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리들리는 복장문제는 별문제가 아니다고 법에 복종할 것을 주장하였다. 후퍼의 이런 개혁정신은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와 같은 정신이였다. 부쩌와 피터 마르티르가 그 땅에 피신하여 있었어도 그렇게 종교개혁은 유아기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여왕 집정 초기에 완성된 영국 국교회 39개조항은 바로 이런 유아기 시기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던 42개조항에 의해서 기틀을 잡은 것을 다시 수정한 고백이었다.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난후 메리여왕의 핍박시대에 대륙으로 피신한 종교개혁적 성직자들이 엘리자베트 여왕 즉위와 함께 영국 땅에 들어오나, 엘라자베트 여왕의 종교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의 회복에 불과하였다. 에드워드 6세때의 종교개혁인물들(Rogers, Hooper, Ridley, Latimer, Cranmer)은 메리여왕시 화형을 당하였고 그 때 277명이상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개혁유산을 보존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핍박으로 인하여 지하교회가 형성되게 되었고 800명 이상이 바젤, 프랑크푸르트, 엠덴, 스트라스부르그, 두이스부르그, 알로우, 쭈리히등으로 피신하였다. 루터주의자들은 이들을 받아드리 않았고 오히려 쫓아냈다. 그 말은 그들 피난민들이 개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프랑크푸르트에 피신한 자들중에 단순히 에드워드 6세 때의 고백과 의식들을 넘어서 좀 더 개혁을 시도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이 죤 낙스, 죤 베일, 죤 폭스등의 인물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의 신학은 칼빈의 개혁사상과 가까운 대륙의 종교개혁자들(무스쿨루스, 마르티르, 불링거, 비레)의 정신들과 연결되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6세의 개인교수이였던 콕스(Dr.Cox)를 중심으로 에드워드 왕의 예배모범을 고집함으로 분열이 생겼고 더구나 이들이 타국 관원의 재가를 받아냄으로 여기에서 개혁하고자 하는 자들이 화합하지 못하고, 일부의 인물들이 거기를 떠나 바젤, 제네바로 떠나게 됨으로, 엘리자베트 여왕시대의 퓨리탄들과 융화자들(conformists)이 분리되는 상황이 형성된 것이다. 그때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제네바로 간 인물들이 교회를 이루었는데, 여기에서 후대 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의 교회정치원리와 예배모범(The Service, Discipline, and Form of Common Prayers and Adminstration of Sacraments used in the English Church of Geneva, Feb, 10th 1556)이 형성되게 된 것이다. 이들로부터 또한 유명한 제네바 성경이 발생(1560년)하였다. 이들이 바로 영국이나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의 주역을 맡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자베트 여왕 시기의 철저한 종교개혁정신이 있었다면, 그것은 칼빈주의적인 종교개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퓨리탄이란 개념은 에드워드 6세의 종교개혁을 회복한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에 영국의 종교개혁의 법적인 통일성에 동의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비난의 용어(주후 3세기의 용어, Cathari 혹은 Puritani)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네바쪽에서 온 퓨리탄들의 개혁이란 에드워드 6세때의 종교개혁을 더 철저히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코틀란드 장로교 신학이 그것의 전신인 제네바의 영국교회으로서 한 맥을 이룬다면, 엘리자베트 여왕 시대의 제네바 종교개혁정신이 장로교 신학의 다른 본맥을 결정하고 있다. 그 예로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싸웠던 동료교수 화이트깁트(John Whitgift)는 일부 교리에 있어서 철저한 칼빈주의자이였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더 철저한 칼빈주의로 나아갔던 카트라이트의 신학적 입장과 싸우고 과격한 핍박자가 되었기 때문에, 장로교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그런 모든 분야에서 철저하지 않은 칼빈주의와 구별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넓게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영국 국교회주의자들이란 개혁주의자들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이름아래 우리와 구별되면서 서로 고통과 피를 흘려야 하는 신학적 다양성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국의 개혁주의는 에드워드 6세때(1547년이후 1553년 메리여왕의 등
지)의 토마스 크렘머(Thomas Cranmer)의 개혁이 중요하고 그 다음은 카트라이트 논쟁이고 세째로 같은 화이트깁트와의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바로우주의자들의논쟁, 네번째로 람베트 선언서(Lambeth Articles)의 중요한 사건이다. 크렘머는 에라스투스주의자로서 영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봄이 좋다. 그런 에라투스주의자들과 싸우는 것이 장로교 운동이다.
교회정치형태로 보아 장로적인 노회가 처음 생긴것은 1572년이지만 그런 노회의 전신이 장로교 성직자들의 모임인 ‘예언회’(The Prophesyings)가 그 전부터 있어 왔고 카아트라이트의 주장들은 그 당시 새로운 것들이 아니였음을 이미 Daniel Neal의 퓨리탄 연구에서 증명되었다. 오히려 그 때의 교회개념이 70년 후에도 여전히 정확히 같은 개념으로 웨스트 민스터 회의 정치론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후 그 ‘예언회’들은 주교아래서 활동하였고 발전되었다. Edmund Grindal 대주교 당시 1582년 4월 6일 스코틀란드 장로교에서 임직을 받았던 성직자 John Morrison에게 강도권을 받음으로 장로교적 형태의 임직이 인정되게 되었다. 역시 목회자들의 모임에 스코틀란드 성직자들도 포함되었다. 즉 이런 성격은 주교정치형태아래 장로교 성직자들이 포섭되는 타협주의 노선의 모습이다.
장로교의 근본적 성격이 드러난 것은 비타협주의 운동이 갖는 신학적 다른 입장들과 함께 드러났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란 철저한 칼빈주의 운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다른 신학적 입장들이란, 첫째로 에드워드 6세 때 Cranmer의 개혁유산인 ‘공동예식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받지 못하는 정신에서 나타났다. 그 예식서는 성례식, 공적 사적 기도, 임직법에 대한 규례들에 대한 것으로서, 그 예식이 교회법으로 강요됨으로 퓨리탄 정신이 일어났다. 예식서의 가르침과 반대로 퓨리탄들은 생각하기를, 세례시 무릎을 꿇고 서서 받거나 상관이 없다. 십자가 사용할 필요가 없다. 입교문답을 하고나서 주교에게 안수받을 필요가 없다.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않된다. 카톨릭주의자들처럼 예복(Gown, Cap, Tippet, Supplice)을 입을 필요가 없다, 주일을 온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외경을 읽을 의무가 없다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그 예식들에 대한 타협주의자들과 비타협주의자들이 일어났다. 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성직의 정직, 옥살이,도피,추방, 침묵이 퓨리탄들의 역사이다. 이런 반대입장이 확장되지 않도록 그 예식서를 강요하고 일반가정에서 퓨리탄들이 설교, 가르침, 기도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역시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싸웠던 Whitgift가 대주교가 되어 발령된 5가지 금지령이 퓨리탄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여기에서 그가 ‘공동예식서’와 ‘39개조항’을 내세웠을 때, 에드워드 6세의 개혁정신을 계승하고 고집하는 것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반면 브라운주의자들인 Elias Thacker과 John Copping도 비타협주의자들로서 정죄되여 죽는 사건이 일어났고 거의 10년후에는 강하게 그 브라운주의 운동이 일어나 투쟁하여 영국에 영향을 끼쳤다. 그 대표적 인물들로 Henry Borrowe, John Greenwood, John Penry등이었다. 이런 브라운주의자들과 다른 이단, 예를들어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신성화 되었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소위 ‘사랑의 가족’(Family of Love)과 혼합되여 혹은 그런 이단의 오해 아래 퓨리탄들도 핍박을 당하였다. 그래서 외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같이 비타협적인 길을 간다 하는 자들에 의해서 또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고통이 정리된 것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인데, 첫째로 1586년에 ‘공동 예식서’에 대응하는 장로교의 원리에 따라 정치와 권징에 관한 새로운 고백서가 작성되어 서명되었던 사건이다. 이 고백서는 월터 트레버스의 라틴본, 이것이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번역된 월터 트레버스의 영어역본, 일반적으로 사용을 위해서 카아트라이트에 의해서 간단히 정리된 장로교 정치지침서에 기초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고백서에 서명한 인물들은 퓨리탄의 아버지인 Thomas Cartwright와 Walter Travers이외에 Edgerton, Barber, Gardiner, Payne, Fenner, Field, Snape, Lord, Farmer, Rushbrook, Wilcox, Whitaker, Perkins, Gellibrand, Cawdery, Udall, Dyke, Paget등과 더불어 500명이상의 인물들이였다. 그러나 아직 이들 대부분이 에라스투스주의를 포용하는 자들이었고, 일부는 온건한 브라운주의자들 혹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스코틀란드 개혁에 자극을 받아 그 개혁에 부응한 종교개혁이 웨스트민스터총회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이 때 비로소 에라투스주의자들과 회중교회주의자들이 장로교회주의자들과 분리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열매들은 회중교회주의자들의 분리와 그들의 새로운 고백서로 말미암아 그리고 왕정고백으로 인하여 그 땅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결론적으로 정통 개혁주의 노선과 관련하여 판단할 때, 웨스트민스터 총회 전까지 단순히 비타협주의자들 혹은 퓨리탄이란 말은 바른신학적 노선에 관련된 말로 이해할 수 없다.
3. 화란 땅에서의 장로교적인 개혁주의 신학
토마스 카아트라이트와 더불어 영국에서 정식 임명되었어도 실제 쫓겨났다고 할 수 있는 왈터 트레이버스(Walter Travers)가 장로교 성직자로서 처음 Antwerp에서 힘있고 부요한 의복상인들의 설교자로서 부임하여 섬겼으나(1578-1580), 스페인과 전쟁 때문에 그 버려야 하기 때문에 1582년에 Middelberg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는데, 그 때 Thoams Cartwright가 와서 그 교회를 섬기게 되고(1582-1585), 그 다음 Dudley Fenner(1585-1587)가 섬겼다. 급진주의자인 Francis Johnson(1590-1592) 전까지 그 곳 상인들의 교회는 장로교 교회로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이 장로교는 이 후로부터 영국 국교회의 예배모범이나 고백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강하게 거절한 역사를 가진 교회이기도 하지만 한편 이미 카트라이트가 여기에 와서 섬기는 과정에서, 그 도시의 다른 피난민 회중교회가 있었든데, 이 교회를 이끌었던 로버트 부라운(Robert Browne)가 1584년에 영국으로 돌아가고 그의 조사이였던 로버트 헤리슨(Robert Harrison)도 1585년에 사망하자 그 교회는 해체되었고, 그 해체된 30 내지 40면의 회원들이 카아트라이트가 이끄는 상인들의 장로교회에 합세하였다. 이런 부라운주의자들은 그 교회의 내적인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별한 이 상인들의 교회에 스코틀란드 출신의 비타협주의 장로교 성직자인 죤 폽스(John Forbes, 1558-1638)가 부임하여 그 교회를 계속 맡았는데, 그는 토마스 카아트라이트나 월터 트레버스와 친밀하였던 Andrew Melville의 제자이였다. 스코틀란드의 왕이 칼빈주의적인 스코틀란드 교회를 영국국교회 정치형태로 바꿀려는 맹렬한 와중에서, John Forbes가 총회의장으로서 있었던 1606년 7월의 총회의 기점으로 교회위기에 들어섰었고, 그로 인하여 1606년 11월에 여러 동료들과 함께 유배되었다.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의 여러 곳을 돌아 다니다가 1608년 초에 Zeeland에 정착하게 되었다. Vere에 있는 스코틀란드 교회의 설교자로서, Vlissingen의 군인교회에 설교자로서 섬기다가 독일 북쪽 Stade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에서 설교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Middelburg에 있는 상인들의 교회를 맡고 있었던 Lawrence Potts의 부목사로 섬기게 된다. Lawrence Potts가 그 곳을 1612년에 떠나자 그 교회를 그가 맡게 되었다. 그 후 1621년에 상업적 이유로 Delft로 옮겨 섬기게 되었는데, 그가 퓨리탄들의 핍박자인 윌리암 로드 주교에 의해서 임명된 성직자(George Beaumont)에 의해서 1635년 교체될 때까지, 뚜렷히 장로교의 성격을 가진 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교회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은 이 교회가 영국교회의 예배모범과 달리 독립적으로 사용된 예배모범(Booke of the Forme of Common Prayers,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 Agreable to Gods Worde, and the Use of the Reformed Churches, Edinburgh 1584, reprinted at Middelburg)이 칼빈의 것(La forme des prières et chantz ecclesiastiques avec la maniere d'administrer les Sacraments et consacrer le Mariage selon de coustume de l'Eglise ancienne, 1542)이나 스코틀란드의 예배모범과 아주 유사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서의 교회형태가 메리 여왕시 프랑크푸르트로 피신하여 피난민 교회형태와 함께 역사적으로 관심이 있는 부분이다. 이미 Walter Trewers가 섬겼던 시기인 Antwerp의 상인교회에서부터 피택된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예배모범의 특성 중 세 가지가 화란개혁교회와 다른 것들로 알려지고 있다. 첫째로 목사나 장로임직이 17세기의 장로교의 표징이 되었던 목사의 안수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는 점, 둘째로 교사들(doctores)에 대해서 더 많은 책임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 셋째로 노회의 근원이고 영국 퓨리탄들과 스코틀란드에서 보편적인 소위 ‘예언회’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예배모범의 특성들 이외에도 이 지역에서 처음 1621-1628/1633에 소위 장로교 노회(‘English Classis’, ‘Presbytery’, ‘ Delph Classis’)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 노회는 처음 1622년 4월 20일에 개최되었는데,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여기에서 화란교회로부터 자유를 선언하였다. 자신들의 교회를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값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 선포하였고 매 노회마다 새로운 회장과 서기를 선출하였고 자신의 노회보다 더 높은 교회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다. 이미 첫 회집에서 목사회원권 문제를 다루어 다음 회기까지 그 목사의 소명에 대한 증서를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1623년 4월 12일에 개최된 제 2차 영국노회에서는 John Forbes가 다시 회장으로 선출되고 John Wing이 서기로 선출되었는데, 17명의 목회자들 중에 12명만 증서들을 제출하고 다섯 목회자들은 제출하지 못했다. 그 중에 레이든에서 목회하였던 Hugh Goodyear가 첫 집회에만 참석하고 그 다음 집회에서 참석하지 않았다. John Paget가 목회하고 있었으나 화란교회에 속해 있었던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는 제 1차 집회에서 방청객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퓨리탄으로서 유명한 John Paget 역시 그 노회를 분리주의자들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John Paget의 동사목사이였던 Thomas Potts의 후임을 위해서 암스테르담의 영국교회에 속한 회중교회파들이 본국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Thomas Hooker를 초빙하였을 때, John Paget가 이를 막았다. 왜냐하면 Thomas Hooker가 회중교회의 입장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부 반대자가 있었을지라도, John Forbes가 노회장으로 있었으면서 Thomas Scott(Utrecht에 교회목사로), 그의 사위인 John Oswald(Dordrecht에 있는 교회목사로), Steven Paine(종군설교자로), Jeremiah Elborough(Thomas Scott의 후임목사로), Henry Sibbald(Nijmegen에 있는 교회목사로), George Clark(종군설교자로), Maximiliaan Teellinck(John Wing의 후임목사로) 등이 임직을 받아 장로교 목회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임직은 노회장과 다른 두 목사회원의 입회 하에 노회장에 의해서 수행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목사시험으로서 이미 설교과목이 알려져 있고, 그 임직방식도 설교 이후 강단에서 내려와 임직을 받은 자로 하여금 무릎을 꿂게하여 안수하였다. 그밖에 제 2 차노회에서는 도르트회의의 결정에 모든 회원들이 서명하기로 결정하였고 예배모범에 대해서 성경으로부터 한 두장의 성경봉독, 시편송, 설교의 순서를 확증하였으며 성만찬 집례시 전달하고 받는 일 만을 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노회활동은 본국의 영국교회로부터 늘 압력이 있었는데, 1623-24에 제임스 1세는 그 노회에 ‘항존의장(perpetual moderator)’을 임명하기를 원하였고 그래서 1624년 4월 17일 노회에서 John Forbes를 보내기로 결정함에 따라 런던에 와서 도르트회의에 참석했던 George Carleton의 중재로 왕에게 그 사정들을 전하였는데, 그 노회에 주교를 임명하면 보르스티우스주의자들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유익을 얻을지 모르는 큰 불안을 야기할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였다. 그 점에 있서 왕의 동의를 얻었다. 그러나 1627년에 와서 그 노회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을 소개하고 새로운 목사들을 시험하고 임직하는 것을 금하였고 결국 1628년 8월은 그 노회의 마지막 회집이 되고 말았다. 1632년 4월에 다시 회복을 시도하였으나, 관원들이 호응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소집이 되지 않은 1633년 3월로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장로교회가 중요한 것은 그 당시 화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아직 젊거나 태어나지 않은 때이므로 이런 교회들의 신학들은 화란 신학의 분위기를 형성시켜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화란교회와의 관계에서 출판한 John Forbes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의 글이 중요하다. 그가 그 논쟁의 글에서 나타난 입장은 Johannes Maccovius에 의해서 최근에 야기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열띤 논쟁동안에서 나타난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가 이 글에서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보증을 얻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과 성정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이해에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정되었다는 사실이 선행의 생활을 인도하였다. 역시 참된 신자만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이해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중생의 필요, 택자의 소명과 성화에 강조가 있다.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교회정치에 반대하여 딤전 6:13에 근거하여 목사들의 군주는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영국 국교회의 성직제도를 비판하였다. 한 때 온건한 회중교회주의자인 Thomas Hooker(1586-1647)가 이 John Forbes밑에서 조력 목회자로 일하였던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경건한 신학자들이었을지라도, 여러 가지 점에서(회중의 권위에 대해서, 분리주의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교인이 아닌 자들의 유아들의 세례에 관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칭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서) 견해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4. 스코틀란드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 역사에 있어서 두드려진 신학자들은 죤 낙스, 죤 크래그(John Craig, c.1512-1600),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등이라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세 종교개혁자들 중 신학적인 종교개혁한 자는 앤드류 벨빌이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 성경에서 주교와 장로의 개념은 같다는 칼빈의 개념을 도입하여 장로교의 뿌리되는 입장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제네바에서 베자나 카아트라이트와 회우와 밀접히 관계한다는 사실도 주목되고 있다. 그 후 그의 제자들이 에딘버러 대학과 글라스고우 대학에 엄밀한 칼빈주의 신학을 심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로버트 롤록(Robert Rollock)과 로버트 보이드(Robert Boyd),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1618년 퍼스 선언이후 반동이 일어난 것인데, 그것은 도르트 회의 선언에 반대되는 사상인 조건적 선택사상과 보편구원론을 글라스고우의 로버트 보이드를 계승한 카메론(John Camero)이 주장하여 그 추종자를 얻게 되었고 그는 다시 불란서의 소무르(Saumur) 대학으로 가 유럽에서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아밀로드(Amyrauld)를 제자로 길러내었다. 이런 입장은 리차트 박스터에 의해서 다시 주장되어 박스터주의를 영국에 심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글라스고우에만 퍼진 것이 아니라 에버딘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들고 일어난 사람이 1618년에 폽스(Wm. Forbes)와 로버트 베이론(Robert Baron)이다. 그리하여 이런 주장에 넓게 인정되었고 받아 드리게 되었으나 1636년에 비로서 사무엘 러더포드에 의해서 논박되기에 이르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자에게 제한된다는 강한 칼빈주의 주장으로 반박하게 된 것이다. 결국 1638년 스코틀란드가 장로교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정죄됨으로 장로교 신학의 뿌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1638년 총회의장인 데이비드 디킨스(David Dickson)에 의해서 강하게 그런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이 비난되었고 그 다음 총회의장인 알렉산더 헨더슨의 직임기간에 앤드류 멜빌의 제자이기도 한 로버트 롤록까지도 그런 보편주의 구원론에 관한 주장에 대한 의혹속에 정죄되기도 했고 죤 폽스는 아르미니안주의로부터 자신이 떠날 것을 선언하였어도 교회정치와 예배모범에 대해서 맹세하지 못하여 1644년에 화란으로 떠나게 되었다. 베이론를 추종하는 자들도 1639년에 권리를 박탈당했다. 이렇게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기 전에 스코틀란드 장로교회의 신학적 깊은 뿌리에 도르트회의 신조가 확고히 정착되였고 그 위에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신학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은 장로교의 정치원리에 대한 스코틀란드의 신학적 뿌리와 함께 장로교의 중요한 신학적인 입장이 되고 있다.
IV. 17세기 개혁신학의 개관(槪觀)
1. 유럽대륙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앞 단원에서 칼빈의 직접적인 제자들로서 베자(Theodor Beza)와 다네우스(Lambert Danaeus), 비렐리우스(Matthaeus Virellus)등이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의 그늘에 있던 자들은 그들의 신학사상에 있어서 여러 종교개혁 신학자들로부터 동시에 영향받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종교개혁 2세들은 대개 루터로부터 물론 쯔빙글리,오클람파디우스, 불링거,부쩌, 피터 페어밀리우스, 멜랑히톤등의 개혁자들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쯔빙글리나 불링거는 조직적인 신학체계를 가진 책을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칼빈의 영향은 당연히 이런 조직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좀 더 교의적 소재들에 따라 외적으로 더 잘 정리한 개혁주의 학자는 피터 페어밀리우스라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칼빈의 영향권아래에 있다. 비록 피터 페어밀리우스가 칼빈보다 조금 어리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항상 가까이 있기를 원하였고 그의 총명과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자신이 그의 신학에 대한 평가는 불링거선에 있는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바젤의 오에클람파디우스는 불링거에 의해서 계승되었고 페어밀리우스에 의해서 꽃이 피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론을 포함한 많은 신학적 입장에 있어서 칼빈의 입장에 동의하였다. 페어밀리우스처럼 이런 교의적 소재에 따라 교리를 조직화한 인물로서 베른학자들인 볼프강 무스쿨루스(Wolfgang Musculus)와 아레티우스(Benedictus Aretius)를 들 수 있다. 무스쿨루스의 교의적인 입장은 절충적이었고 언약론에 있어서 두 언약론을 주장하였어도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과 자연보편적인 노아의 언약 사이를 구별하였다.
후대 스콜라적인 신학체계는 케커만(B.Keckermann), 폴라누스(Polanus), 알스테드(H. Alsted)등이지만, 알스테드는 이미 이런 스콜라적인 신학을 샤델, 쨘끼우스, 단니수스, 유니우스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스콜라 신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온 성령자신의 신탁들로 정의되고 있다. 가르침의 체계에 자신의 독특한 입장을 가진 자는 안드레아스 휘퍼리우스(Andreas Hyperius)이다. 물론 그가 외적으로 교의학소재들에 따라 기술하고 있으나, 그러나 내용상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에서 얻은 인상처럼 예정론에 근거한 교회론위에 그의 신학체계의 골격을 잡고 인간타락전 교회(Ecclesia ante lapsum), 인간타락후 교회(Ecclesia post lapsum), 영광의 교회(Ecclesia gloriae)가 소개되고 있다. 이것은 취리히신학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역시의 칼빈이 취하였던 취리히신학적인 요소를 수용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사상을 이어 체계화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제롬 쨘키우스는 엄밀한 칼빈주의자로서 하이델베르그에서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1560년동안 마르바흐(Marbach)와의 예정론에 논쟁이 알려지고 있다. 물론 루터주의안에서의 예정론에 대한 논쟁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적인 것이 드러난 것은 루터주의자들에 의해서 고백된 ‘협화신조’(Konkordienformel)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논쟁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하이델베르그 문답서를 펴낸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안우스의 신학들이 중요한 개혁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는 루터주의적인 그리스도의 보편편재(Ubiquität)에 반대하는 칼빈주의의 독특성(Extra-Calvinisticum)이라 부르는 기독론 논쟁이 그것이고 둘째로 이 기독론과 연결된 성례론 논쟁이며 세째로 우르시누스와 논쟁이 된 에라스투스주의에 대한 문제이다. 처음 두 가지 논쟁점들은 루터주의로부터 구별된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고정되었다. 세 번째 문제는 개혁주의 신학 다양성안에 논쟁되는 문제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밖에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으로서 루터주의적이고 제세례파주의적인 반율법주의(Antinomianismus)에 대한 반대입장인 율법의 제 3사용은 이미 종교개혁주의 시대에 형성되었던 특성이다. 문제는 이 우르시누스의 제자들(F.Gomarus, Lubbertus Sibrandus, David Pareus)사이에 예정론에 대한 입장이 도르트회의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논쟁으로 첨예화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내에 남아 계속된 논쟁점이다. 우르시누스는 언약론에 있어서 Olevianus나 F.Junius의 자연의 언약의 개념을 인정하는 것과 달리 칼빈의 언약의 통일성을 확고히 주장하고 있었고 예정론에 있어서도 칼빈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택자를 위한 구원임을 세웠고 유기의 최종원인을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하나님의 영광에 찾았다. 이 논쟁점은 아르미니안주의에 대한 논쟁과 언약론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논쟁점들 하나로 남아 있다. 어떻든 이들 제자들은 그가 루터주의자들(루이 6세 때) 때문에 피신하여 프리데릭 3세의 아들인 Johann Casimir의 보호받아, 신학교가 세워졌던 노이스타트(Neudstadt)나 헤르보른(Herborn)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회의에 참석한 성직자들 중 특별히 브레멘의 Matthias Martinius와 Ludwig Crocius의 제자중에 Johannes Cocceius가 그들의 제자이였음을 관심할 필요가 있다. Samuel Rutherford는 Crocius를 루터주의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예정론논쟁이 개혁주의 신학의 이전과 이후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그 중요한 도르트회의는 이미 화란 땅에서 예정론논쟁의 배경에 대해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와 제네바에까지 칼빈을 따랐다가 1544년 아가서와 그리스도가 지옥까지 비하하신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로 바젤로 떠나게 되었던 세바치안 카스텔리오(Sebatian Castellio, 1515-1563)가 칼빈과 베자의 예정론을 비판하였는데, 사후에 출판된 그의 글(De Presdestinatione, 1578)이 화란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비난하기 위해서 번역되었다. 1578년 그 번역자(Dirck Volckertszoon Coornhert)와 델프구역의 설교자들(Donteclock, van der Linden)사이에 생긴 예정론에 대한 논의가 화란에서 예정론 논쟁의 발단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논의과정에서 델프지역의 설교자들이 칼빈과 베자의 견해를 포기하고 불링거 입장인 타락후 선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택하였다는 점이다. 칼빈과 베자의 입장에 의혹적인 델프의 설교자들은 타핀(Taffin)과 바스팅기우스(Bastingius), 그 당시 레이든 교수이였던 단네우스(Danaeus)와 우트레히트 설교자 헬미키우스(Wernerus Helmichius), 그리고 프라네커 교수 리디우스(Lydius)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이 자문한 개혁주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칼빈의 생각에 만족해도, 정확하게 그를 모범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였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간입장이 개혁주의 신학내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암스테르담에 젊은 설교자 아르미니아누스(Arminius)가 있었다. 그는 제네바의 베자밑에서 공부하였고 그 당시 그의 소문은 좋지 않았으나 신용을 얻고 있었다. 그런데 리디우스로부터 호의를 받은터라, 자신의 스승인 베자의 개혁주의 입장을 옹호해주기를 기대하여 그에게 그 문제를 맡게 되었던 것이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논쟁의 시작이였다. 아르미니우스에게 있어서 문제되었던 점은 예정의 대상이 누구이었느냐에 대한 것이였다. 1604년이전에는 다만 개혁주의 전통에 있어서 칼빈, 베자, 유니우스의 입장에 대해서 논평하는 선에서 참여하였으나, 1604년에 처음 자신의 정의를 제시하였다. 그 때는 대표적인 창조전 선택론자들인 유니우스와 트렐카티우스가 흑사병으로 죽게 되어 그 유니우스를 대신하여 아르미니우스가 되었을 때이다. 그에 의하면 선택의 근거는 예지된 신앙(fides praevisa)이요 따라서 예정의 대상은 타락한 인간(homo lapsus), 창조해야할 인간(homo condendus), 창조된 인간(homo conditus, homo creatus)이 아니라, 믿을 사람(homo fidelis)이다는 것이다. 믿음을 조건으로 선택설이란 이런 낱말에서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화하였던 사람들이 Helmichius와 Plancius이다. 그들의 비판앞에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위해 Sohnius와 Polanus에게 호소하였다. 아르미니우스의 동료이였던 고마루스는 이 당시에 그렇게 비판적이 아니였다. 아르미니우스의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였다. 그런 견해는 스콜라신학에서도 추적할 수 있고 이미 영국에서 화이테이커(Whitaker), 퍼킨스(Perkins)와 틴달(Tindall)에 의해서 반박된 바로(Baro)의 주장과 네델란드에서도 레이든의 노장교수중 한 사람인 홀만(Holman)의 주장에 그 선례가 있었다.
이런 아르미니안주의는 칼빈, 베자, 피스카토르, 마르티르 페어밀리우스, 쨘키우스, 우르시누스의 선에서 이어지는 주장과 벗어난 주장이였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앙고백들(Confessdio Gallicana 1559, Art.XII; Confessio fidei et doctrinae per Ecclesiam Reformatam Regni Scotiae professae 1560, Art.XVII; Thirty-Nine Articles 1552,1562, Art. XVII; Lambeth-Articlels 1595, § 1; Irish Articles of Religion 1615, § 12-13)과도 벗어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르트회의가 열릴 쯤에는 고마루스, 페스투스 홈미우스(Festus Hommius), 트리글란드(Trigland)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 그 외에 고마루스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Hieron. Vogelius와 Casp. Sibelius가 그런 옛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도르트회의 참석자들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든 학파의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Walaeus, Thysius, Lubbertus)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이였고 도르트회의에서 그의 글이 거의 채택된 Bogerman의 경우우 항변파들이나 영국과 브레멘 대표들에 대해서 반대하였다고 하여 타락전선택설 입장에 서 있는 것은 아니였다. 브레멘 대표들은 처음부터 신뢰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온화한 멜랑히톤주의자들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Martinius가 Gomarus과의 언쟁이 있었고 아르미니안 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가진 Vortius과 교통을 가졌다. 이 Martinius와 일치하였던 자들이 또한 영국에서 온 Joh.Davenant와 Samuel Ward이였다. 주교이였던 Balcanqual 만이 타락전 선택설의 경향을 가졌으나, 다른 원인 때문에 Gomarus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특별히 Gomarus가 과거 개혁주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타락전 선택설 입장을 표명하였을 때, 영국 대표자들이 감히 다른 나라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판단한다고 하여 불쾌해 하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물론 진술의 과정에서 영국의 39조항 17조에 있는 ‘eos quos in Christo elegit ex hominum genere’까지의 귀절에 근거하여 영국교회가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인데, 바로 이어진 ‘a maledicto et exitio libere’이란 어귀를 놓쳤던 것이였다. 이 문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유일하게 예정의 대상을 타락한 인간(genus hominum lapsum)이었다고 해석할 있는 고백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쟁점이 되었던 예정의 대상에 대해서 영국 대표자들, 하이델베르그 대표자들, 제네바, 브레멘. 엠덴, 벨직, 북부 홀란드, 젤란드, 우트레이트, 프리스란드, 흐로링겐에서 온 대표자들이 거의 예정을 대상을 타락한 인간(homo lapsus)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다만 Gomarus만이 전인류로부터(e genere universo humano) 택하였다고 주장하고 남쪽 홀란드 대표자들은 결정하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Gomarus도 다수의 결정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아갔었던 것이나, 이런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으로 몰아가게 한 주 인물이 Molinaeus이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문제는 타락전선택설에 대해서 도르트회의가 부정적으로 결정하였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첫째로 영국 대표자들과 Gomarus 사이에 생긴 논의는 결정없이 Gomarus의 침묵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후에도 계속 Gomarus가 타락전 선택설의 입장에서 공적으로 강의하자, 1640년 흐로링겐의 Joncker Clant가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타락전선택설에 대한 공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펴는 것에 대해서 금지한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 점이 중요하다. 이 때 고마루스의 대답은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 사이의 의문은 예정론 자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해서 항상 교회 안에서 다양하고 자유로운 질서에 관한(de ipsa Praedestinationis doctrina sed de ordine, de quo semper varia fuit et libera in ecclesia Dei) 문제로 대답하였으며 그 당시 도르트회의에서 자기만 그 타락후선택설의 반대한 것도 아니였고 역시 예정에 대상에 대해서 그 회의가 결정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화란 땅에서는 교회가 갈라져 있을 정도로 미묘한 문제이다. 둘째로 Maccovius와 Lubbertus와의 논쟁이다. 물론 그 사건은 Lubbertus가 고소한 것이 아니고 프라네커 노회에서 소원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도르트회의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보거나 그에 대한 학자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식의 발언이였다. 오히려 Lubbertus의 제자인 Hommius조차도 스승과 반대하여 마코비우스의 입장을 세우는 일이 일어났고 자문에 참여한 Amesius도 Parker의 입장과 일치하다 하여 그의 주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였다. 비록의 마코비우스는 예정의 대상이 타락한 인간이라고 한 것이 잘못이라 보인다는 진술까지 확인(quod fatetur se dixisse ad discipilos videri sibi erroneum et falsum docere genus humanum lapsum esse objectum praedestinationis)하였어도, 그 논쟁은 마코비우스와 루베르투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악수하고 끝났다. 결론적으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타락후 선택설 입장의 결정이지만 타락전 선택설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혼합적 정통주의(syncretismus orthodoxus)라고 결론되고 있다.
후에 1626년 라이덴 대표적 학자들(Polyander, Rivet, Walaeus, Thysius)은 아르미니안주의자인 Episcopius에 반대하여 칼빈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옹호하였다. 그런 노선문제는 다시 1645과 1649년 마레시우스(Maresius)와 보에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이어진다. 보에티우스는 고마루스의 입장에 호소하여 우리 교회 안에서 예정에 대해서 분명히 정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흐로링겐의 고마루스를 계승한 마레시우스는 타락후 선택설 입장에서 예정의 대상을 창조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창조되었고 타락한 인간(homo creatus et lapsus)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에 참여한 퓨리탄들은 아르미니안주의를 완전히 배제시키고 확고히 타락전선택설에 기초하여 작성하였다. 다만 1645년 10월에 있었던 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성직자들의 발언 배후에 있는 타락후 선택설을 허용하는 정도에서 머물렀다. 이것은 도르트신조보다 훨씬 엄밀한 칼빈주의 노선을 확인한 셈이다.
한편 개혁주의 신학 안에서 언약론 논쟁은 Johannes Coccejus로부터 시작한다. Johannes Coccejus는 어릴때부터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배웠고 언어에 능했지만, 그의 독자적인 성향은 다른 종교에 대한 개방성에서 찾아야 될지 모른다. 그는 신학을 배우기전에 코란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글을 쓴 일이 있다(Oratio de religione Turcarum). 브레멘에서 Matthias Martinius와 Ludovicus Crocius로부터 신학을 배운 후에도 1625년 함부르그에 가서 유대 랍비의 글들을 배웠다. 프라네커에서 Georgius Pasor, Johannes Maccovius, Gulielmus Amesius, Sixtinus Amama(근동 언어학자)와 가까이 접촉한 후에도 쓴 책들은 유대 랍비문헌들에 대한 연구들이다. 흐로링겐에서 Gomarus와 레이든에서 Polyander, Rivetus, Heinsius등 다른 유명한 학자들과 접촉하면서 배웠어도 그들과는 다른 독자성이 계속 남아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Johannes Coccejus는 세 가지 논쟁점에서 문제의 신학자로 남게 되었다. 첫째로 Johannes Coccejus는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와 더불어 안식일을 도덕법으로 해석하지 않고 단지 예표로만 생각하였다. 그의 히브리서 주석(Explicatio Epistolae ad Hebraeos, L.B. 1659)에서 처음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그의 견해는 더 일찍 알려져 그의 동료인 Abraham Heidanus가 그의 견해를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de Sabbatho et de Die Dominica). 이런 주장들 때문에 Essenius(de perpetua moralitate Decalogi adeo specialiter)와 Hoornbeek(Theses de Sabbato)와의 심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코케이우스(de indagatione naturae Sabbati et quietis Novi Testamenti, Typus concordiae amicorum circa honorem Dominicae, L.B.1659)와 하이다누스(Consideratien)와 호른벡(Nadere bewering van 's Heeren dagheiliging) 사이에 논쟁이 계속 되었고 결국 코케이우스와 하이다누스는 소씨니안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으나 1659년 관원의 명령에 의해서 레이든에서의 논쟁은 중지되었고 구다 공의회에서 끝나게 되었다. 둘째로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와 관련하여 ἀφεσις ἁμαρτιων(완전한 용서)과 παρεσις ἁμαρτιων (불완전한 용서) 사이를 구별하는 Johnnes Coccejus의 주장에 대해서 1665년 Gijsbert Voetius(onderzoek over den waren aard des Sabbaths)가 반박해 나셨다. 코케이우스의 작품(Moreh Nebochim; utilitas distinctionis duorum vocabulorum scripturae παρεσις et ἀφεσις Amsterd. 1666)이 나왔다. 세째로 Samuel Maresius와 논쟁이 일어났다.
언약론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의 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바빙크의 일반적인 비판을 참조해야 한다:
“언약론 자체는 처음 올레비아누스, 칼빈 혹은 불링거에게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이미 제세례파와 대립하여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장하였던 쯔빙글리안에서 만나게 된다. 쯔빙글리로부터 그것은 불링거와 칼빈에게 계승되고 특별히 올레비안누스, 우르시누스, 손니우스(Sohnius), 에글린(Eglin), 보쿠비우스(Boquinus), 휘퍼리우스(Hyperius)등 독일 개혁주의자들안에서 받아 드려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국신학에서는 롤록(Rollock),하우(Howe), 카아트라이트(Cartwright), 프레스톤(Preston), 토마스 블레이크(Thomas Blake), 퍼킨스(Perkins), 아메시우스(Amesius), 죤 볼(John Ball), 제임스 우셔(James Usher),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프란시스 로버스(Francis Roberts), 토마스 보스톤(Thomas Boston)등에 의해서 받아 드려졌다. 네델란드에서는 스네카누스(Snecanus), 유니우스(Junius), 고마루스(Gomarus), 아버지 와 아들 트렐카티우스(Trelcatius), 네르데누스(Nerdenus), 라벤스페거(Ravensperger)등에게서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클로펜부르그와 코케이우스보다 오래전에 언약론은 개혁주의 신학안에 고유적이다. 그러나 후자 인물들이 언약론을 전 교의학의 출발점과 지배원리로 삼았고 동시에 원리적인 변화를 야기케하였다.
코케이우스와의 싸움은 직접 모든 이들에게 인정된 언약론에 대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에센니우스와 호른벡의 경우 안식일에 대한 것이고(1655-1659), 마레시우스의 경우 두 가지 경영에 있어서 교회의 상태에 대한 것이며(1662), 보에티우스의 경우 구약에서의 용서(παρεσις)에 대한 것이다(1665). 코케이우스에서 논쟁되고 있는 것은 언약개념이 아니라, 그의 성경신학과 그의 역사적 방법이다. 철학에서 데카르트와 같이 코케이우스는 신학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와 전통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났고 성경연구를 주장하며 그의 교의학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대로 성경으로부터 끌어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ex Scripturis repetita)을 원하였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그는 그의 책 ‘언약에 관한 교리대전’(Summa doctrinae de foedere)에서 하나님과 그의 영원한 의논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그의 입장을 역사와 인간과 하나님의 언약속에서 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교의학은 구원사이고 거기에서 성경은 원리와 규범이 아니라, 대상과 내용이었던 역사학적인 형식을 띤 성경신학이 되고 있다. 그는 그 언약 즉 참된 종교를 역사적으로 그의 첫 시작에서부터 현재까지 추적하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에서나 다양하고 계속적인 경륜들안에서 이 언약의 발전과 진보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이 말하였던 대로 계시의 명료성, 즉 통찰의 선명과 의식의 판명성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 은혜언약의 다양한 경륜들아래에서 객관적 축복들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에 있어서 구원은 신약에서보다 객관적으로 더 빈약하였다. 구약에서 안식일은 행위의 연기안에(cessatio operis) 있었고 이스라엘은 아직 참되고 영원한 선(vera et permanentia bona)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되, 소망의 백성이었고 땅에서의 긴 생을 열망하였으며 여전히 죽음의 공포안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충만한 죄용서( ἀφεσις)를 갖지 못하고 불완전 용서(παρεσις)만 가지고 있었다. 동물희생은 전혀 화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칭의는 불완전하였다. 신자들의 위로도 약하였고 그들의 양심은 안식하지 못하였다. 마음의 할례는 참으로 없었고 다만 신약에서 선물로 주신 것이다. 율법은 천사들에 의해서 제공된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구약에는 참으로 모든 것이 현존하였으나 다만 모형과 그림자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자체의 실재성은 전적으로 부정되지 않았어도 그때 대부분이 부정되었다.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우연에 있어서(in accidentia)뿐만 아니라, 실체에 있어서(in substantia)도 구약은 신약과 다른 것이었다. 참으로 코케이우스가 은혜언약을 다만 부정적으로 점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이며 계속적으로 발전된 행위언약의 폐지로서 파악하였을 때, 친히 언약론 전체를 근절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언약에 대해서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었다. 그것은 다만 일시적이고 인간적이며 계속 스스로 변하는 종교의 형태이었다.
그렇게 코케이우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개혁주의 신학의 출발점과 기본선을 잃었다. 이것이 직접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느껴졌기 때문에 역시 다소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원리적인 논쟁이었다기 보다는 부속적인 점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코케이우스주의는 바로 데카르트주의와 결합되어 계속 점점 더 받아 드려지면서 여러가지 교의들에 대한 반대로 인도하였고 역시 구약의 붕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구약은 단지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교의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파고들어 갔다. 이런 변경된 교의학적인 직관으로부터 저절로 그의 때가 되어 특별히 스피노자(Spinoza)와 시몬(R.Simon)이래 구약의 역사적 비판이 태어났다.” 이런 바빙크의 판단에 따르면 현대의 역사비판학적 방법의 근원과 관련하여 코케이우스가 한 역할은 개혁주의 신학안에서의 정통신학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미 대학의 학문세계에 깊게 파고든 코케이우스주의와 데카르트주의로부터 극복을 위한 노력이란 분파주의를 낳게 되었을 뿐, 정통주의의 완전회복을 불가능하였던 역사가 유럽개혁주의 신학의 역사이다. 회복된 개혁주의는 온건하고 중용적이었다. 그후 개혁주의 안에서의 보수주의란 정통개혁주의 신학의 재흥이라기보다는 분리하게 된 신학적 노선 위에 머물려 있는 보수주의가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유럽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심되는 노선의 결정은 예정론에 대한 입장과 신구약 통일성에 대한 입장이 결정되고 있다.
2. 영국, 스코틀란드, 아일랜드에서의 개혁주의 신학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들은 대륙에서 첨예화되지 않은 문제들이 영국에서는 첨예화되었다. 즉 철저한 종교개혁의 문제들이였다. 그런 개혁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서와 같은 종교개혁의 한 입장들일 수 있었으나 계속적인 철저한 종교개혁은 바로 철저한 칼빈주의를 의미하였다. 실제적으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전체적으로 아직도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에는 이르지 못하였고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은 루터주의적인 종교개혁 혹은 부분적 칼빈주의에 가까웠다.
예를들어 메리여왕 때 순교당한 죤 브래드포드의 경우 정확한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죤 낙스의 친구이었던 죤 폭스의 칭의론은 루터주의에 머물렀던 종교개혁자의 모습이었다.
죤 브레드포드(John Bradford, 1510-1555)의 기본적인 예정론(1555년 7월 1일 순교하기 약 8개월전에 쓴 1554년 10월 22일의 한 편지에 따라 )에 대한 이해는 칼빈과 같이 실천적이다. 그의 예정론에 대한 이해는 구원의 확신에 강조를 둔 예정론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신앙은 행위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 것이요 같은 그리스도안에서 오직 성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얻는) 영원히 영생의 유산자들임을 믿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예정론에 대한 신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 중에서 원리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총체’라 하였다. 하나님의 선택교리로부터 유익들은 셀 수 없다고 하면서 간추리기를,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신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경건하고 의롭게 살며 신실하게 사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예정에 근거한다’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가장 신뢰할만한 목자이였고 연약한 양과 같아도 이런 예정론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사자와 이리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믿었고 그가 죽고 태워져도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덕이나 악도 외적인 행동에 따라, 혹은 인간의 의지와 지혜에 따라 판단될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려되었다:
1. 하나님의 선택의 원인 그 분의 선한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는 것은 그 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태초전의 일이다. 3. 그 선택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일이다. 4. 그 선택은 아담의 후손중 어떤 이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택자가 아닌 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마태복음 20장, 13장, 사도행전 13장, 요일 5장, 살후 3장인용). 5.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영생을 얻도록 택한 자들을 예정하셨다(롬 8장, 눅 10장). 6.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찬양이다. 우리가 예정받은 것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위해서 이다. 7. 예정은 하나님의 때안에 소명, 칭의없이는 없다. 즉 예정이나 선택이 보편적이지 않고 모든 이에게 속한 것이 아님은 모든 이가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선택은 그렇게 확실하고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고 예정된 자는 최종적으로 결코 파멸하거나 정죄에 이르도록 잘못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그의 의의 찬양도 아니요 그의 지혜의 찬양도 아니며 그의 능력의 찬양도 아니다. 다만 그의 은혜의 찬양을 위해서 예정을 입었다. 머리가 없는 선택, 목적이 없는 선택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종의 보존이 선택에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가 제자로 부름을 받았어도 영생을 위해서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고 사울도 왕의 직책으로 택함을 입었어도 영생을 위해 택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런 예정론의 성격이 바로 정경인 성경책의 전체내용과 책들안에 세워져 있다고 보았다. 비록 리들리 밑에서 그와 가깝게 지냈고 부쪄와 친했던 그였지만, 이런 예정론에 따르면 정확하게 칼빈의 사상위에 서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정치에 대한 그의 판단이다.
메리여왕의 등극이후 유럽으로 피신한 인물중 죤 폭스(1517-1584)의 신학사상의 일부를 소개하면, 위의 브레드포드와 잘 비교할 수 있고 죤 낙스와 친한 신학자로서 알려졌지만 제네바로 가지않고 바젤로 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물론 교회권징과 영국의식에 대한 죤 낙스의 프랑크푸르트 논쟁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논쟁에 대해서 후회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칭의론은 루터의 실천적 칭의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율법에 대한 입장도 죤 낙스가 칼빈주의라고 한다면 그는 루터주의를 대표하는 자로서 사려할 수 있다. 언약의 두 방식과 두 가지 의를 강하게 대립시키고 있다. 즉 복음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율법의 준수로 말미암지 않으며 우리편에서 어떤 의무의 수행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참된 의를 옹호하지 않으면 그것에 반대하는 것이다고 생각하였다. 신적인 은총의 모든 문을 닫히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은혜의 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를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강하게 그 차이를 강조하였다. 물론 그는 우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주장하면서 이성도 가장 맹아이고 신적 지식의 빛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신적인 것들에 대한 참된 이해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6세의 개혁의 산물인 39개조항에서 개혁주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예정론에 있어서 그렇다. 따라서 후에 Lambeth Articles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 선언은 Mr.Barret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설교에서 칼빈의 예정론의 교리를 반박함으로 생긴 것이다. 그는 그의 청강자들에게 칼빈의 책을 읽지 말라고 하하고 다른 신학자들(P.Martyr, Beza, Zanchius)을 문제를 삼았는데, 그로 인하여 퓨리탄들의 반박을 받아 논쟁이 되었다. 마지막 카톨릭으로 전환하였던 Mr.Barret는 타협적인 고위 성직자들과 카톨릭주의자들에 의해서 지지를 받으면서 Lambeth에 있는 대주교 앞에 소환되었는데, 그 때 대학을 대표하는 Dr.Whitaker와 Dr.Tyndale가 도와 작성된 것이다. 이 선언서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유기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었다는 것, 둘째로 예정의 원인을 인간의 예지된 믿음이나 행위나 기타 어떤 것들에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기뻐하심에 돌렸다는 것, 셋째로 참되고 의롭게된 신앙의 영구성, 구원에 대한 충만한 보증, 죄용서에 대한 확신이 선언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공적인 입장들이 도르트회의에 참여하여 동의할 수 있었던 배경이였다.
특별히 일찍부터 양심의 자유를 따라 퓨리탄들의 피신처가 되었던 아일랜드지역에서 자체의 신앙고백이 고백되었다. 여기에서 독자적인 장로교파(Presbyterian Persuasion)가 형성되었다. 그 대표적 목사들은 스코틀란드에서 온 Mr.Edward Bryce, Mr.Robert Cunningham, Mr.Robert Blair, Mr.Hamilton, Mr.Levingston, 영국에서 Thomas Cartwright 등에 의해서 훈련받은 Mr.Ridges, Mr,Henry Calvert, Mr.Hubbard등 이었다. 여기에서는 그 관구의 주교와 화해가 이루어져 공적으로 장로교 성직자들이 임직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대주교 Dr.James Usher때(1615년)에 자체적인 신앙고백서가 고백된 것이다. 이 고백에는 위의 Lambeth Articles가 흡수되었고 주일성수가 고백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고백이 1634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대주교 Laud 때에 와서 화해가 깨지고 약화되어 버렸다. 결국 이것이 카톨릭의 힘을 성장시켜주었고 마지막 거의 모든 신교인들이 순교당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 아일랜드 고백서에의 일반적인 틀과 내용이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크게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다. 예정론의 경우 첫째로 Lambeth Articles과 달리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과 예정과 유기에 대한 고백을 구별하였다는 점이다. 즉 예정과 유기는 인격체에 제한 하였고 만물에 대한 영원한 작정은 먼저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에 대한 고백에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셋째로 그 예정의 목적과 그 효과에 대해서도 고백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기초들임에 틀림없다. 신구약의 통일성의 경우 첫째로 신구약의 차이는 계시의 판명성의 차이이라는 것, 둘째로 신구약 모두에서 영생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공된다는 것, 따라서 그들 사이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것, 셋째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 중에 의식법과 시민법을 제외하고 도덕법에 해당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적이라는 고백이었다. 즉 율법의 제 3 사용에 대한 확고한 고백이 들어있었다.
V. 도르트회의와 예정론 논쟁
1. 논쟁점들에 따라 합의된 신학적 입장
1.1. 신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1) ‘믿고 그 신앙과 신앙의 순종 속에 견고히 하는 자들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구원에 이르는 선택에 대한 완전한 결정이라는 것,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오직 이 결정에 대해서 계시되었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성경은 믿을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어떤 확실한 사람들을 영원전부터 선택하셨음이 증거되었다는 대답이다(요 17:6; 행 13:48; 엡 1:4).
2) 영생에 관련된 하나님의 선택은 다양하여, 어떤 경우 보편적이고 명확하지 않거나, 다른 경우 특별하고 명확한 것이다는 것, 다시 이 선택은 불완전하고 철회할 수 있으며 결정적이지 않고 조건적이거나, 혹은 완전하고 철회할 수 없으며 결정적이고 완전하다는 것, 똑같이 신앙에 이르는 선택, 구원에 이르는 선택,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인 선택없이 의롭게 하는 신앙에 이르는 선택이 있다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성경에 증거하지 않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요 선택의 교리가 부패되고 우리의 구원의 금고리들(롬 8:30)이 파괴되고 있다.
3) 성경이 선택교리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의도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 앞에 어떤 특별한 사람들을 선택하였다는데 있지 않고, 모든 가능한 조건들로부터 혹은 만물의 모든 질서로부터 하나님은, 은혜롭게 어떤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고자 하셨고 영생의 보상에 가치가 있다고 여긴, 신앙의 기본행위와 불완전한 순종 자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하여 선택하셨다는데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은 비판하기를, 이런 해로운 오류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가치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무익한 물음을 통하여 은혜로운 칭의의 진리와 성경의 단순성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며 사도의 교훈(딤후 1:9)에 위배된 것이다고 하였다.
4) 신앙에 이르는 선택의 경우 이 조건이 미리 요구되었다는 것, 마치 선택이 사물들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빛을 정당히 사용하고 경건하며 작고 낮으며 영생에 적합하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펠라기우스의 견해를 기호하는 것이고 사도의 가르침(엡 2:3-9)과 충돌한다고 하였다.
5)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사람들의 불완전하고 비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신앙으로부터 처음 시작하였거나 계속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는 회심, 거룩,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일어났다는 것, 그러나 완전하고 결정적인 선택은 예지된 궁극적 견인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 이것이 그 때문에 선택된 그가 선택되지 않는 자들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은혜롭고 복음적인 가치성이다는 것, 그 때문에 신앙, 신앙의 순종, 거룩, 하나님의 구원, 견인은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의 열매들이 아니라, 그것은 미리 요구되고 성취된 것으로서 완전히 선택되었던 자들 안에서 예지된 조건들이고, 그것 없이 영화에 이르는 불변의 선택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들이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전 성경(롬 9:11; 행 13:48; 엡 1:4; 요 15:16; 롬 11:6; 요일 4:10)에 충돌된다는 대답이다.
6) 구원에 대한 모든 선택이 불변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어떤 선택들이 잃을 수 있으나,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그러한 대 오류에 의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변적으로 만들고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위로를 훼파하는 것이며 성경에 상반되다(마 24:24; 요 6:39; 롬 8:30).
7) 이 삶에서 영화를 위한 불변의 선택에 대한 열매나 느낌들이 없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선택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사도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하나님의 이런 기뻐하심을 찬양하는 성도들의 경험에 충돌적이다(눅 10:20;롬 8:33).
8) 하나님은 그의 순수 의롭게 하시는 뜻으로부터 아담의 타락에서와 죄와 저주의 일반적인 상태에서, 신앙과 회심을 필요로 하는 은혜의 경륜 속에 아무도 결정하지 않았다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이 이것은 확고하다고 대답하였다(롬 9:18; 마 11:25).
9) 하나님은 다른 민족보다 어떤 한 민족에게 복음을 보내시는 원인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어떤 기뻐하심이 아니라, 한 민족이 복음이 전달되지 않는 다른 민족보다 더 좋고 가치있기 때문이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도르트 회의 성직자들은 이를 모세(신 10:14,15)와 그리스도께서(마 11:21) 부정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인간구원의 신적기원을 가능한 한 인간론(인간의 자유)에 기초하고자 하여, 전적인 은혜의 차원에 심한 손상을 주고 있고,그들의 민주주의 이념과 반대되게, 그들이 하나님의 민족차별성을 민족우위성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그들의 예정론에 대한 파괴와 성도의 보존에 대한 파괴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공동고백의 일반적인 틀에 의하면, 죄론 다음에 기독론을 언급하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적용차원에서 신앙의 자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에 와서 하나님의 진노와 영생의 개념을 고백하고 있다. 즉 그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머물고 그것을 받아 드리고 참되고 살아 있는 신앙을 가지고 구주 예수를 받아 드리는 자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그 부패로부터 구속되며 영생을 선물로 얻는다는 고백방식이다. 칼빈처럼 여기에서 예정론에 대한 열쇠를 풀고 있다. 즉 하나님이 시간상 어떤 이들을 신앙으로 선물하셨고 어떤 이들을 선물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영원한 결정으로부터 나왔다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행 15:8; 엡 1:11).
비록 강팍할지라도, 이 결정에 따라서 하나님은 택자들의 마음을 은혜로부터 부드럽게 하고 굽히어 믿도록 하시고 그의 택자들이 아닌 자들을 그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그들의 악과 강팍케 됨으로 내버려 두신다. 여기에 그리고 이런 식으로 그들은 깊은 인간의 차이, 긍휼히 여기시고 의로우신 차이, 선택과 유기의 결정을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다. 이런 식의 고백은 하이델베르그 고백의 순서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의 차원인 듯한 인상을 얻게 된다.
1) 그 선택은 불변의 하나님의 작정이다. 하나님 자신이 지극히 지혜롭고 불변하며 전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선택도 불변하고 번복되지 않으며 깨지거나 이미 택한 자들이 다시 버려지거나 수에 있어서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2) 그 선택은 세상의 기초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3) 택자들의 수가 확실하다.
4) 그 택자들이 다른 자들보다 더 좋거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5)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곤비한 자들, 즉 처음 정직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여 죄와 부패안에 있는 온 인류로부터 택하였다.
6) 그 선택은 하나님의 뜻의 자유롭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은혜로운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향들이나 역사들을 모든 가능한 조건으로부터 구원의 조건으로 택하셨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어떤 사람들을 일반 죄인들의 수로부터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는데 있다.
7) 순수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다.
8) 하나님은 그 그리스도를 영원전부터 모든 택자들의 중보자와 머리로, 구원의 기초로 세우셨다.
9) 구원의 길 혹은 수단까지 결정하였다. 즉 택자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도록, 그가 친히 그를 주시고 능력있게 그의 로고스와 영을 통하여 같은 교통으로 부르시며 만나시며, 혹은 그를 믿는 참된 신앙으로 선물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거룩히 하시고 그의 아들과의 교통 가운데 능력있게 보존하여 마지막 그의 긍휼을 증명하도록 영화롭게 하시어 그의 사랑스로운 은혜의 부요성을 찬양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선택은 원인과 조건으로서 예지된 신앙과 신앙의 순종, 거룩 혹은 어떤 다른 좋은 성향이나 능력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았고 택함을 입을 인간 안에서 미리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신앙의 순종과 거룩에 이른다. 즉 선택이 구원의 모든 은택의 샘으로서 그로부터 신앙과 거룩, 다른 구원의 은사들, 마지막 영생까지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엡 1:4).
역시 택자들은, 서로 다른 단계들과 다른 방식일지라도, 그의 때에 그들의 구원의 영원하고 불변의 선택에 대해서 확신하게 된다. 그 지각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폐되고 깊은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했을 때 지각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 하나님에 대한 자녀다운 두려움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 죄를 넘어 의를 향하여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 선택의 실패할 수 없는 열매들을 자신들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거룩한 즐거움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신앙이나 마음의 확실한 신뢰, 양심의 평화, 자녀다운 순종에 대한 숙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 안에서의 영광이 자신 안에 아직 힘있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 일들을 이루도록 약속하셨던 수단들을 사용하는 자가, 유기에 대한 언급을 들었을 때, 낙심되거나 자신을 유기자들 안에 사려해서는 않되고, 수단들을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부지런히 진행하고 넘치는 은혜의 때를 열렬히 열망하며 그 같은 것들을 경애와 겸손을 가지고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0) 그 선택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신약에서나 구약에서나 하나요 동일하다. 즉 하나님의 작정하시고 기뻐하신 뜻은 하나요 유일하며(een eenig welbehagen, voornemen en raad des willens Gods) 그것을 통하여 영원전부터 우리를 택하시되,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은혜와 영광과 구원과 그가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이르도록 택하셨다.
11) 성경에 증거에 따르면, 모든 인간들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어떤 이들은 선택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간과되었다(voorbijgegaan). 즉 스스로 자신의 죄책으로 말미암아 곤비함에 뛰어 들어간 그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전혀 자유롭고 의로우시며 무제한적이고 불변의 기뻐하심에 따라 그 일반 곤비함에 내버려 두시고 구원의 신앙과 회심의 은혜를 얻지 못하여 자신의 길과 그의 의로운 판단아래 내버려 두시며 결국 불신앙과 다른 죄들 때문에 징계하시고 영원히 벌하시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유기에 대한 결정이 결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een auteur van de zonde)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섭고 흠없는 의로운 심판자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택자들로 하여금 더욱 더 하나님께 돌아가고자 열망하나, 하나님과 구주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세상의 염려와 육체의 정욕에 빠진 자들에게만 무서운 것이다.
1.2.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말미암은 인간의 구원
우리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만족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대한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로 벌받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아버지와 성령과 똑같은 영원한 무한한 본질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 완전히 만족된다. 그런데 바로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강조한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과 사람들에게 차별없이(zonder onderscheid) 보내신다는 점이다. 이 점은 도르트회의의 결정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관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확실하고 분명한 도모없이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완전 자유로운 하나님의 도모와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에 의해서 영원전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택들이 주어진 것이라고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택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표현방식으로 고백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영원전에 구원하기로 선택하였으며 아버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모든 자들만을 모든 민족들과 혈족들, 종족들, 방언들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였다는 표현으로 고백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는 분명히 택자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 택자들을 죽으셨다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주로 택자들에게 일어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게 될 구원에 관한 도모가 세계의 시작부터(van het begin der wereld) 실패함이 없이 지금까지 성취되었고 역시 계속 성취될 것이다는 논점이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 비로서 구원의 백성이 실제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상이 타락후 선택설의 입장이 아니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런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 중 첫째로 ‘실패함이 없이(onfeilbaarlijk)’ 혹은 ‘능력있게(krachtiglijk)’라는 표현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취된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도 실제적으로 전유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대한 반대입장이다.
둘째로 창조 전 택자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도모에 대한 언급은 그런 도모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이 단지 은혜의 새 언약을 사람들과 체결할 수 있는 순수한 권리를 얻고, 구원의 성취와 적용사이의 구별을 없애는 어떤 새로운 조건 즉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는 것과 그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힘이나 완전한 의지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얻는데 있었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대답이였다.
셋째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든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그 죄책을 지셨다는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의 고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아무도 저주의 원죄에 대한 죄책이 없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죄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주장에 반대하는 고백이다.
1.3. 인간의 부패성과 하나님에게로 회심과 그 방식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원죄는 그 자체에 있어서 전인류를 저주하거나 일시적이고 영원한 형벌들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의 의지에는 영적인 은사들이나 선한 성향, 선과 거룩, 의와 같은 덕들이 존재할 수 없고 그 의지 자체는 결코 부패되지 않았다는 것, 중생되지 않은 사람은 죄로 완전히 죽지 않고 영적인 선에 완전 무능하지 않는다는 것, 타락 후에도 남아 있는 보편은혜(de gemeene genade)나 은사들을 부패된 자연인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좋은 사용에 의해서 좀 더 즉 복음적이나 구원적인 은혜, 구원 자체까지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인간의 참된 회심의 경우 의지에 어떤 새로운 성향, 능력이나 은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회심하게 된 은혜는 부드러운 충고 외에 다른 것이 아니거나 이것이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가장 고상한 역사의 방식이며 충고에 의해서 일어나는 인간의 본성과 가장 일치한다는 것, 하나님이 힘있게 그리고 실패함이 없이 신앙과 회심으로 기울게 하는 그의 전능의 그런 능력들을 인간의 중생에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 은혜와 자유의지가 회심의 시작을 행하는 영적인 원인들이요 역사의 순서에 있어서 은혜가 의지의 역사에 앞서지 않으며 인간의 의지가 스스로 움직이기 전에는 하나님이 회심에 이르도록 힘있게 인간의 의지를 돕지 않는다는 것등이다.
이에 대해서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기독론과 구원론의 뿌리를 굳게할 필요가 있었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특한 역사를 분명하게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타락 전과 타락 후 그 변화에 대해서 분명히 고백하였는데,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의 의지 안에 의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고백하였고, 타락 후에는 오성(verstand)과 의지와 마음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을 고백하고 있다. 이런 전적타락은 그런 것이였다. 즉
첫째로 모든 인간들은 죄 안에서 태어났고 진노의 자녀들로서 태어났으며, 어떤 구원하는 선에 이르기에 무능하고, 악으로 기울러져 죄들 가운데 죽으며 죄의 종들이다. 따라서 중생케하는 성령의 은혜없이는 하나님께 돌이키려고 하지 않고 돌이킬 수 없으며 그들의 부패된 본성을 개선하지 못하며 스스로 개선에 이르지 못한다는 대답이다.
둘째로 원죄와 관련하여 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아담의 부패성은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모든 그의 자손에게 이르되, 모방(navolg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패된 본성의 전가(전이, voortplanting)에 의해서 자손들에게 이른다는 고백이 되었다. 이런 아담의 죄의 전가(imputatio peccati Adami)는 후에 직접적인 전가(imputatio immediata)와 간접적인 전가(imputatio mediata)방식으로 나뉘이지만, 도르트회의에서 분명히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보편적인 입장으로 정리된 셈이다.
셋째로 타락후에도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 빛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거나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 올 수 있기에는 아주 멀다. 그러나 자연의 빛이나 첨가된 율법에 의해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과 말씀을 통하여 할 수 있다는 것이요 이것의 메시야의 복음이며, 신약에서와 같이 구약에서도 그것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기뻐하셨다.
넷째로 하나님의 이런 뜻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신약에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시하셨다. 그런 다른 경륜의 원인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더 맗은 가치성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완전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과 넘치는 사랑에 있다는 고백이다.
다섯째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택자들에게 구원이 때가 되어 적용될 때, 크고 놀라운 은혜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고 그 변화는 새 창조의 역사이다. 따라서 죽음으로 깨어나는 것이요 살아나는 역사인 중생이란 전혀 초자연적인(een gansch bovennatuurlijke) 역사이요 큰 능력의(een zeer krachtige) 역사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적적이면서 비밀의 역사이다. 이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 자신 만이 일하신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영원히 하나님에게만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에 제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고 불어넣으며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능력을 주어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동의나 직접적인 신앙을 기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의지를 일으키고 산출하시는 그 분이 참으로 모든 것들에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 안에서 믿고자 하는 의지와 신앙 자체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도르트회의 성직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신인협동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입장에 반대하여 구원의 성취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섯째로 중생의 이런 신적인 은혜는 인간의 의지와 속성들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요 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요, 그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도록 하고, 자발적이고 바른 영의 순종이 우세하게 하는 것이다.
1.4. 성도의 견인
성도의 견인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참된 신자들의 견인은 선택의 열매이거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은사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beslissende verkiezing)과 칭의 앞에 그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성취해야할 새 언약의 조건이다. 반증: 롬 11:7; 롬 8:32,33,34,35
하나님은 견인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예지하시며 친히 그 안에 보존하기로 준비하시사, 그는 자신의 직무를 행하실지라도, 지금 신앙가운데 견인하는데 필요로 하고 하나님께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 사용하고자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어 그가 견인하든지 견인하지 않든, 그것이 항상 의지의 믿는 행위에 의존하도록 하였다고 가르쳤다. 반증: 고전 1:8
참된 신자들과 중생한 자들은 의롭게 하는 신앙으로부터, 동일한 방식으로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종 실제적으로 그로부터 타락할 수 있고 영원히 버릴 수 있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반증: 롬 5:8,9; 요일 3:9; 요 10:28,29
참된 신자들과 중생한 자들도 죽음에 이르는 죄 혹은 성령 훼방죄에 빠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반증: 요일 5:16,17,18
사람들이 특별계시 없이는 이 생에서 미래의 견인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증: 롬 8:39; 요일 3:24
구원의 보존에 대한 확신의 교리는 그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육체의 베개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두려움과 선한 덕들과 기도와 다른 거룩한 실천들에 해된다고 가르쳤다.
다만 일시적으로 한 때 믿은 자들의 신앙은 의롭게 하고 구원케하는 신앙으로부터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증: 마 13:20; 눅 8:12
첫 중생됨을 잃었던 인간이 다시 새롭게 참으로 여러번 다시 중생되었다는 사실은 모순이 아니다고 가르쳤다. 반증: 벧전 1:23
신자들이 신앙가운데 실패함이 없이 보존될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결코 기도하지 않으셨다고 가르쳤다. 반증: 눅 12:32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성령에 의해서 중생된 자는 죄의 지배와 노예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육체와 죄의 몸으로부터 완전 해방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이로부터 일상의 죄들이 나오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케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그들이 도피하도록 하며 기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거룩한 실천들에 의해서 죽도록 하며, 이 죽음의 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어린 양과 더불어 그들이 다스릴 때까지 완전의 한계선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한 항존적인 원인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의 이런 잔여 때문에 그리고 세상과 사탄의 시험으로 인하여 회심한 자들이 그 은혜 가운데 완전하게 남아 있을 수 없고 그들 자신의 능력들 안에서 내버려둠을 당하게 되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사, 그들에게 단번에 주셨던 그 은혜 가운데 친히 자비로 확증하시고 끝까지 능력으로 보존하신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들을 은혜가운데 확증하시고 보존하시는 그의 능력이 얼마나 더 큰지, 긍휼이 풍부하신 하나님께서 비참한 타락에서조차도 선택의 불변의 의지에 따라 성령을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거두시지 않는다. 그들이 영접의 은혜와 칭의의 신분으로부터 타락할 만큼 혹은 죽음의 죄에 이르거나 성령을 해방하는 죄에 이를만큼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도의 견인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 고백과 함께 그런 견인과 보존이 갖는 뿌리와 특성들이 고백되었다. 그런 보존의 조건이 인간으로부터 전혀 찾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긍휼로부터 옮을 고백하고 따라서 그런 구원의 방법과 서정조차도 헛되거나 없이될 수 없다는 성격과 함께 고백되었다.
2. 각 대표자들의 신학적 입장들
2.1. 영국의 신학자들
3-1) 타락한 인간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힘에 대해서
i) 타락한 인간의 의지는 무죄의 상태에서 은사로 받았던 초자연적이고 구원적인 은사(엡 4:24)가 결여하고 있다. 그 때문에 그는 이제 은혜의 힘없이 영적인 사역을 전혀 할 수 없다(요 15:15; 롬 5:6; 고후 3:5).
ii) 타락한 의지에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짓기에 능한 경향이 있다(잠 2:14; 창 6:5; 롬 6:17; 엡 2:1).
3-2) 회심에 선행하는 것들에 대해서
i) 중생이나 회심의 상태로 되기 전에 보통 인간으로부터 요구되는 어떤 외적인 행위들이 있다. 그것들은 종종 자유롭게 쉽게 행하고 종종 자유롭게 그대로 있다. 교회에 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를 듣는 일 등등이 있다(롬 10:14; 막 6:20; 행 13:46; 시 58:5).
ii) 아직 중생되지 않은 자들의 마음 속에서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회심이나 중생에 선행하는 어떤 외적인 결과들이나 행위들이 있다.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 죄에 대한 느낌, 진노에 대한 두려움, 구원에 대한 생각, 용서에 대한 어떤 소망이 있다(행 2:37; 고전 4:15).
iii) 하나님께서 말씀과 그의 영의 수단을 통하여 그와같이 접하였던 자들을 그가 부르시고 참되고 진지하게 신앙과 회심을 필요로 하게 하신다(고후 5:2; 고후 6:1;갈 1:6; 계 3:3,20).
iv) 그와같이 하나님께서 접하였던 자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께서 의도적인 무시나 이런 초보적인 은혜의 거절에 의해서 그들을 내버려 두기 전에, 쉬지않고 회심에 이르는 바른 길에 있도록 요구하신다(마 25:28; 히 3:7; 전 1:24; 왕하 24:20).
v)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진행하는 선행의 역사들은 반항적인 의지의 죄책에 의해서 질식되고 단번에 소멸되어 버리고 역시 많은 자들의 경우 쉽게 소멸된다. 그래서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그 마음들 속에 신적인 진리의 어떤 지식, 그들의 죄에 대한 어떤 슬픔, 부패되는 어떤 욕망과 어떤 조심이
2.2. 팔쯔의 신학자들
2.3. 헤센의 신학자들
2.4. 스위스(쮜리히) 신학자들
2.5. 나사우와 베터라브 신학자들
4) 성도들의 견인과 구원의 확실성에 관해서 6 가지 쟁점들을 항론파들과의 견해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
구원의 신앙은 모든 은사 중 은사요, 혼 중의 혼이요, 이성 중 이성이요, 거룩의 산 뿌리이요, 하나님의 자녀의 징표이며 하늘의 보고의 열쇠이요 간결한 위로의 어머니이요, 선한 양심의 유모요, 하나님의 자녀들의 손과 입과 귀이며 우리의 영원한 유산의 담보요 배려자요 하나님과의 평화의 보증이요 선택의 표이며 하늘의 사다리, 믿는 영혼의 방패,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연합되는 띠이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영원전부터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에게 신앙의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어떤 사람들을 보존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우리 중에 만물을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우리의 모든 것들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의 은혜 만이 네델란드 그대들을 특별하게 인도하신다.
2.6. 제네바 신학자들
4) 성도의 견인에 대한 입장
i)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선택하셨고 그리스도께서 확실하고 미리 이루어진 도모에 의해서 죽으셨으며 그들을 위해서 항상 기도하시고 그들을 그의 영적인 몸 안에 자신과의 강한 결합으로 연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시는 자들을 결국 성령의 인도와 살아있는 통치에 의해서 영접하여 보존하시고 증진하시며 완전케하시고, 동일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 그들을 의롭게 하심으로부터 전적으로 그리고 마지막까지 이탈하지 않게 하신다(사 55:22; 롬 8:29; 빌 1:16; 살후 2:17; 고전 1:7; 살전 3:12; 렘 24:6; 사 6:13; 딤후 2:18; 눅 22:31; 요 17;12; 요 10:17; 요 6:39; 롬 8:33; 요일 3:9; 요 8:35; 요 14:16; 렘 31:33; 렘 32:40).
ii) 견인이 비록 우리의 구원의 유익(건덕)을 위해서 모든 신자들로부터 요구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뜻에 합하고 자신의 모든 부지런함과 노력과 배려를 그것에 사용하시는 그런 자들을 외에 소유되거나 보존될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을 얻기에 확실한 조건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특별히 하나님의 탓으로서 순수히 은혜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참된 은사가 거기에 있다(히 3:13, 6; 롬 11:22; 요 8:31; 골 1:22; 요 3:27; 히 13:21; 엡 5:10).
iii)자연과 인과의 질서에 따라 참되고 고유한 결과나 열매로서 견인은 선택과 칭의에 뒤따른다. 그러나 지식과 감정, 우리의 양심을 고려할 때, 견인의 방식, 증가와 확고성에 따라 선택의 은폐성은 고백되고 있고, 견인의 마지막 행위는 육체의 의심들과 이중성들을 넘어 마지막 승리임을 우리는 고백한다(계 22:11; 벧후 1:10; 요일 3:19).
iv) 견인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부끄럽게 되는 자는 둔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게 되며 스스로 은혜하고 후퇴한다.
2.7. 브레멘 신학자들
2.8. 엠덴 신학자들
2.9. 화란의 신학자들
2.9.1. 네델란드 교수들
Johannes Polyander, Antonius Thysius, Antonius Walleus는 같은 입장으로 발제하였고 거기에 Sibrandus Lubbertus가 그들의 발제문에 서명하였으나, Franciscus Gomarus는 서명하지 않았다. 반면 Sibrandus Lubbertus의 독립적인 발제에 대해서 앞의 세 교수들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Franciscus Gomarus의 발제에 대해서 그런 판단이 없이 발제 전문이 그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Franciscus Gomarus의 첫 번째 조항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다른 조항들은 모두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 3, 4 조항과 제 5조항의 경우 다른 네 교수들이 같은 발제로 나오고 Sibrandus Lubbertus가 좋다고 동의하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고 Sibrandus Lubbertus의 독립적인 입장은 다른 네 분에 의해서 동의되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다.
1) 첫 번째 조항에 대해서
2) 두 번째 조항에 대해서
다섯 교수들이 이 조항에 대한 고백이 있어서 일치를 보고 있다. Sibrandus Lubbertus도 이 조항에 대해서 자신의 독립적인 입장을 발제하지 않았다. 이 발제에는 그들의 판단부분 4조항과 거절부분 5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그들이 거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런 이의들에 근거하여 그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몇 가지로 고백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공로와 만족은 완전하고 무한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 그들이 다만 참된 신앙을 가지고 포용하는 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없이하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하다(행 20:28; 히 9:14; 벧전 1:18; 요일 1:7; 요 3:16; 롬 3:22; 고전 6:11).
2. 이것이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뜻이며 계획이었는지, 주께서 그렇게 큰 속전을 치루었음을 의심할 수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을 통하여 행하셨던 무엇이든지, 그가 그의 아버지와 자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행하였기 때문이다(요 5:30; 14:31).
3.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런 속전을 그리스도 백성과 복음이 전파된 모든 자들에게 그러한 것으로서 차별없이 선포하여야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제공하여야 하며, 그 자신을 진지하게 그리고 성부의 도모에 따라서 그러나 그의 감추어진 경륜들을 그가 원하시는 만큼 광대하고 많이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 자에게 이런 은혜를 분배하시고 적용하시는 하나님께 맡기면서 제공해야 한다(행 13:38,39; 고후 4:20; 행 11:20; 고전 3:6; 요 3:8; 고전 12:3).
4.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특별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구원의 능력을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자신의 도모에 따라 유기자들이고 잃어버릴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택함을 받고 믿을 자들을 위해서, 능력있게(krachtiglijk) 죽으셨다, 즉 주께서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의 용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의 공로에 의해서 얻도록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실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시는 그의 강한 은혜를 전하셨다. 분명한 많은 증거들에 의해서 증명될지라도, 다음 몇 가지로 충분할 것이다.
첫째증거: ‘다만’(alleen) 이란 말이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다음 인용된 말씀들(마 1:28; 요 10: 11,12,14; 행 20:28; 엡 5:25; 계 5:8,9)에 의해서 표시되고 있는 그 사실 안에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귀결들과 결과로부터 만들어 내는 모든 힘이 단번에 사라짐에 틀림없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주 정확하게(even gelijk en even na) 모든 백성들의 구주이다면, 천사가 공허하게 거기에 ‘그의 백성’을 첨가하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꼭 동일하게(even glijk) 모든 이들을 위해서 세우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나 자신의 양떼를 위해서’라고 말하였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들과 각 사람들을 그의 피로 샀다면, 바울이 ‘그의 피로 그가 성취하였다는 것’을 거기에 첨가하였다는 것은 아무런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2.9.2. 헬더란드의 신학자들
2.9.3. 남홀란드 신학자들
2.9.4. 북홀란드 신학자들
2.9.5. 제란드 신학자들
2.9.6. 우트레이트 신학자들
2.9.7. 프리스란드 총대들
2.9.8. 오버레이셀 총대들
2.9.9. 흐로링겐과 옴메란드 총대들
2.9.10. 드렌테 총대들
2.9.11. 발쯔 대회의 총대들
VI. 레이든 대학 신학자들의 신학
VII.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그 신학
1. 웨스트민스터 총회와 그 배경
2. 총대들의 신학적 입장들과 그 고백서의 성격
2.1.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해서
첫째로 17세기 일반적인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처럼 작정(decretum)과 예정(praedestinatio)을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작정의 대상들로 인하여 구별된 것이다. 일어나고 존재해야 할 모든 것들(omnia qui fieri et subsistere debent)에 관련하여서는 작정아래 기술하고 있고 사람들과 천사들에 관해서는 예정이란 용어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이 예정 안에서 선택(electio)과 유기(reprobatio)가 구별되어 있다. 이런 신학적 입장을 따라 H.H.Heidegger는 전자를 일반적인 하나님의 작정(decretum Dei generale)이라 하고 후자 즉 예정의 작정(decretum praedestinationis)을 하나님의 특별한 작정(decretum Dei speciale)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덱거의 경우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선택에 대한 작정이 창조와 섭리에 대한 작정이 앞서고, 선택에 대한 작정보다 역시 타락의 허용에 대한 작정이 앞서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이 바로 도르트회의의 결정을 따르고 있는 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같은 도르트 결정을 따르는 레이든 신학자들의 입장과 약간 다른 방식이다.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둘째로 창조와 섭리, 타락에 앞서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자들의 예정과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예정에 대하여 말하고 이에 따라서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타락의 허용에 대한 작정이나 선택과 유기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는다. 창조나 섭리에 대한 작정을 말하지 않는다. 작정과 예정이란 근본적으로 대상에 따른 구분이고 전자는 넓고 후자는 좁은 대상이며 그 수효가 확증된 예정이다. 이에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전 선택설임에 분명해 지고 있다.
셋째로 정확히 칼빈의 입장에 따라 창세전의 예정에 택자들의 구원의 성취방법도 포함하고 있다. 즉 택함을 받은 자들이 타락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적으로 부르심(내적소명=중생)을 받고 의롭게 되며(칭의) 양자가 되고 성화되어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보존되(견인)는 구원의 방식까지 예정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3장 6항, 11장 4항).
넷째로 중세 스콜라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예정론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은 그의 예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자유롭고 불변의 자신의 뜻에 따라 작정되고 예정되었으며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그리스도가 오시고 죽으신 것은 이런 택자들을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11장 4항).
2.2. 언약의 통일성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에 서로 ‘다르게 경영되’었으나, ‘그 실체에 있어서 다른 두 은혜언약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륜들아래서 하나요 동일하다’는 고백을 웨스트민스터 고백서가 아주 확고히 했다(7장 5-6항). 언약의 실체는 그리스도로서 그는 어제나 오늘아니 영원토록 동일한 분이시다. 그가 성육신 하기 전에도 그의 사역의 공로과 효과와 혜택이 유사이래 모든 시대에 살전 택한 백성들에게 전달되어 내려왔다고 고백하고 있다(8장 6항). 따라서 구약의 성도들의 구원의 방식들에 있어서도 신약시대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입장(11장 6항)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케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반대하여 율법시대에도 그 예식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충분하고 유효하여’ ‘약속된 메시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충분한 사죄(full remission of sins)와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을 받았’다는 입장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7장 5항).
3. 에라투스주의와의 논쟁
4. 독립교회주의와의 논쟁
VIII. 17세기 언약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몰락
1. 코케이우스 이전의 언약신학
2. 코케이우스 언약신학과 그 후기역사
맺는 말
한국교회 안에서 정통개혁주의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종교개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갈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우리가 193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신학적 논쟁에서 그 논쟁점의 신학만을 유산으로 받은 것만이 아니라, 고 박형룡 한 사람의 신학과 그 신학이 배경으로 삼는 그 벌콥신학을 받은 것이었다. 지금 우리가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갈 때, 지금의 보수주의 개혁주의 신학 혹은 어떤 보수주의 신학자를 통하여 돌아가는 것이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16세기나 17세기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더구나 단순히 도르트 신앙고백서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로 돌아가면 바로 정통개혁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이 중요하다. 우리가 돌아갈 때 어느 인물을 통하여 어느 선을 따라 돌아가야 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쯔빙글리, 부쪄, 불링거, 칼빈으로 바로 돌아간다는 것조차도 신학의 다양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속에 잠깐 도달한 것일지라도 가장 완전한 정통개혁주의를 통하여 인물을 따라 거슬러 가야 한다. 이렇게 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우리의 참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참된 개혁은 그 시대에 헤르만 바빙크, 죠지 길레스피, 사무엘 러더포드, 스테반 마샬, 다니엘 코드레이, 카아트라이트, 월터 트래버스, 멜빌, 베자, 칼빈등과 같은 인물들이 한 교회 안에서 수 없이 활동하고 있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물이다. 그런 선물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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