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히틀러가 등장할 즈음인 1929년 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페터 바이어하우스(79) 박사는 부모로부터 받은 두 가지 모습에 자신을 헌신했다. 첫째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하게 헌신한 선교사의 모습이었고, 둘째는 히틀러 정권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에 용감하게 저항한 행동이었다. 그는 1947년 베를린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 웁살라대학교에서 신학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7년 스웨덴 출신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사로 9년간 활동했던 그는 65년 튀빙겐대학교 교수가 되어 97년 은퇴하기까지 33년을 선교학 교수와 에큐메니컬신학연구소장을 지냈다. 연구 분야는 아프리카의 독립운동과 모국운동, 성경적 선교신학,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와 이념, 복음주의 신학 등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는 1973년 1월 방콕에서 개최된 제8차 세계선교협의회(IMC), 제5차 WCC나이로비총회(1975), 제6차 밴쿠버총회(1983), 제10차 산안토니오세계선교협의회(1983) 등에 참석하며 주요 이슈와 결정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 선교의 근본적인 위기를 진단했는데, 특히 WCC의 신학적 노선에 반발해 프랑크푸르트선언문(1970)과 베를린선언문(1974)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74년 로잔세계복음화대회의 주강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와 아시아신학협의회(ATA)의 자문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은퇴 이후에는 유럽과 해외 여러 신학대학교 방문교수로 활동하면서 계간지 '디아크리시스'를 발간하는 등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의 선교신학적 입장으로 동시대의 이성주의, 인본주의, 진보주의 신학들을 극복하고 G 바르넥, K 하르텐슈타인, A 벵엘, W 프라이탁의 구원사적 선교신학 노선을 취했다. 그는 "구약과 신약시대 그리고 2000년간의 교회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구약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고 말하며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선교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이어하우스는 성경적 규범에서 탈선한 신학과 선교를 극복하려 애써왔고, 20세기 선교운동에 나타나는 인본주의적 해석에 대해 경고해 왔다. 그는 성경이 갖는 계시의 진실성, 유기적 통일성, 사도성과 무오성을 변증하는 데 주력했고 그리스도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또 성도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속죄와 화해 행위에 있음을 천명하고, 말씀의 청취자가 마음에 비췸을 얻고 깨닫고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선교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이러한 선교의 열매이며 그 결과로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1981년 이후 매년 전 세계를 다니며 여러 교회와 선교회, 신학교를 방문해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그는 한국 교회를 사랑해 그동안 13차례나 찾아 복음주의신학을 심어주기도 했다. '엑스플로 74'와 '세계복음화대회'(1980)에서도 100만명 이상 되는 청중을 향해 강연했다.
2003년에는 용재 박낙준 박사 기념 석좌교수로 초청받아 연세대에서 1년간 머물면서 강의했다. 그의 강의 내용은 '현대선교와 변증'(CLC)에 담겨 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의 저술은 '선교정책원론' '성경적 선교신학' 등이 있고 근간으로 '그가 보내신 말씀' 등이 있다.
이동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글쓴이 : 이상갑 원글보기
1957년 스웨덴 출신 부인과 함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선교사로 9년간 활동했던 그는 65년 튀빙겐대학교 교수가 되어 97년 은퇴하기까지 33년을 선교학 교수와 에큐메니컬신학연구소장을 지냈다. 연구 분야는 아프리카의 독립운동과 모국운동, 성경적 선교신학, 에큐메니컬 운동의 역사와 이념, 복음주의 신학 등이다.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그는 1973년 1월 방콕에서 개최된 제8차 세계선교협의회(IMC), 제5차 WCC나이로비총회(1975), 제6차 밴쿠버총회(1983), 제10차 산안토니오세계선교협의회(1983) 등에 참석하며 주요 이슈와 결정을 분석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 선교의 근본적인 위기를 진단했는데, 특히 WCC의 신학적 노선에 반발해 프랑크푸르트선언문(1970)과 베를린선언문(1974)의 초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또 1974년 로잔세계복음화대회의 주강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와 아시아신학협의회(ATA)의 자문위원으로도 봉사했다. 은퇴 이후에는 유럽과 해외 여러 신학대학교 방문교수로 활동하면서 계간지 '디아크리시스'를 발간하는 등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바이어하우스의 선교신학적 입장으로 동시대의 이성주의, 인본주의, 진보주의 신학들을 극복하고 G 바르넥, K 하르텐슈타인, A 벵엘, W 프라이탁의 구원사적 선교신학 노선을 취했다. 그는 "구약과 신약시대 그리고 2000년간의 교회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구약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있다"고 말하며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도구"라고 주장했다. 선교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심판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주라는 사실을 땅끝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바이어하우스는 성경적 규범에서 탈선한 신학과 선교를 극복하려 애써왔고, 20세기 선교운동에 나타나는 인본주의적 해석에 대해 경고해 왔다. 그는 성경이 갖는 계시의 진실성, 유기적 통일성, 사도성과 무오성을 변증하는 데 주력했고 그리스도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그는 또 성도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속죄와 화해 행위에 있음을 천명하고, 말씀의 청취자가 마음에 비췸을 얻고 깨닫고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선교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이러한 선교의 열매이며 그 결과로 교회는 사회적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1981년 이후 매년 전 세계를 다니며 여러 교회와 선교회, 신학교를 방문해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그는 한국 교회를 사랑해 그동안 13차례나 찾아 복음주의신학을 심어주기도 했다. '엑스플로 74'와 '세계복음화대회'(1980)에서도 100만명 이상 되는 청중을 향해 강연했다.
2003년에는 용재 박낙준 박사 기념 석좌교수로 초청받아 연세대에서 1년간 머물면서 강의했다. 그의 강의 내용은 '현대선교와 변증'(CLC)에 담겨 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의 저술은 '선교정책원론' '성경적 선교신학' 등이 있고 근간으로 '그가 보내신 말씀' 등이 있다.
이동주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교수)출처 : 청년아 부흥을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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