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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신학의 흐름과 전망

by 【고동엽】 2021. 11. 3.

강근환 /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여는 말

 

한국기독교학회가 금년으로 제30차 정기학술대회를 "세계신학과 한국신학" 이라는 주제하에 열리게 되었음은 필자에게 감개무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1972년도 그러니까 제2차 정기학술대회 때부터 본학회에 참석하여 한 때는(1984-86) 촘무의 직을 맡아 일하였던 사람으로서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년에는 구태라 퇴역한 필자에게 한국교회사학회 발표를 맡기지 않았나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이다.
본 발표는 "한국교회 신학의 흐름과 전망" 이라는 제목하에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신학과의 연관성에서 대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1. 신학수업과 한국교회사학

 

필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 속한 서울신학대학에서 첫 신학수업을 하였다. 그 것은 기숙사의 새벽기도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교역자양성의 경건훈련을 바탕으로한 보수적 복음주의 신학 교육 과정이었다. 그러나 몇몇 동료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신학수업에 매진하였고 필자는 특히 웨슬리 신학과 함께 현대신학 사조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였다. 그 당시 세계적인 신학사조는 신정통주의가 풍미하였고, 나는 그 중에서도 에밀 뿌르너, 폴 틸리히, 디트리히 본훼퍼, 그리고 라인홀드 니버 등에 흥미와 관심이 있었다. 재학 중 입영하여 병역 관계로 졸업이 늦어져 60년대 초에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하던 해에 불행하게도 교단이 에큐메니칼 운동 문제로 분열하게 되어 교단 분열의 핵심 세력이었던 성청(설결교회청년회) 전련 수습총무로 활동하면서 성청 대표로서 한국기독교청년연합회(KCYC)의 공동 대표직을 맡게되어 그 이전부터도 개인적으로 학생운동과 관계가 있었지만 청년운동을 통하여 에큐메니칼 운동에 깊히 접하게 되었다. 마침 그 때 신학교 재학시 미국에서 갓 돌아 오시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신 현재 한국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거장 이신 박상증 박사님이 N.C.C. 청년국 간사로 계셔서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다.
한국교회 분열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회의 삼대 분열 사건은 첫 째로 신사참배로 인한 고려파의 분열이고(1951), 둘 째로는 성서관을 중심으로 한 보수와 진보 간의 신학적인 문제로 말미암은 기장과 예장의 분열 이고(1953), 셌 째로는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야기된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 이다(1960).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장로교회의 분열은 한국교회 전반에 큰 파문을 이르켰고 마침내 성결교회도 기성과 예성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실로 한국교회의 분열은 한국교회의 슬픈 일이요,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교회의 분열 사건은 한국교회 신학의 흐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세계적인 해외 신학과의 관계성 또한 크다 할 것이다.
청년운동 관계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 기회를 통하여 일본의 여러 신학대학을 돌아본 끝에 교또(京都)에 있는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대학원 과정에 해방 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입학허가를 받아 신학수업을 한 끝에 신학수사(神學修士) 학위를 받았다. 그 당시로서는 기독교 윤리에 관심이 많아서 디트리히 본훼파에 대하여 공부하려고도 하였고 폴 틸히히에 대하여서도 그의 신학방법논을 중심하여 공부하고도 싶었다. 그리하여 폴 틸리히 신학으로서는 일본에서 대가인 도이(土居眞俊)교수에게 상담한 결과 엉뚱하게도 칼 바르뜨 신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신학의 토대를 든든하게 하기위해서는 바르뜨의 신학을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그리하여 다께나까(竹中正夫) 교수의 지도하에 바르뜨 교회교의학 제4권의 화해론에서 전개된 교회론을 발취하여 정리하면서 교회와 이 세상과의 관계성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내지는 기독교 선교적 바탕을 이해하는 논문을 썼다. 이때에 나에게 바르트 신학에 대한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은 스위스 쭈리히 출신으로 객원 교수로 와 있었던 베르나 콜라 박사였다. 그 분은 스위스에서 오면서 갓 출판된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독일어판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강의하였다. 이런 관계로 인해서 나로서는 교회론에 대한 기초적인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 것은 우연히도 후에 교회사를 공부하는데 유익한 기초가 되었다고 본다.
나는 도이 교수의 추천으로 카나다 토론토에 소재한 카나다 에큐메니칼 인스티튜트에 연구원으로 추천을 받아 토론토에 가게되어 토론토 대학교의 낙스대학(Knox College)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신학석사(Th.M.)와 신학박사(Th.D.) 학위를 마쳤다. 1960년대 후반기의 북미주는 히피족이 들끓었고 토마쓰 알타이저의 신의 죽음의 신학과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가 신학계를 풍미하고 있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 (Hidden God)의 이 세속도시에서 사는 우리들의 삶의 양태가 어떠해야 되겠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세계적으로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 이었고 중국에서는 홍위병의 문화혁명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대학가의 소요가 연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한.일협정 반데 및 삼선 개헌 반대등의 투쟁을 비롯한 본격적인 반군사독재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교회사 분야로 전공을 바꾸게 된 것은 모교인 서울신대의 교수 부재로 인한 강력한 요청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한국교회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백낙준 박사의 『韓國改新敎史』영문판(그때는 아직 한국어판이 출판되지 않아음)을 접하면서 한국교회사 분야의 연구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됨에서 였다. 신학교 시절에는 김양선 목사님에게 한국교회사를 배웠으나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때는 한국교회사에 전공하는 학자가 나타나지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다른 전공분야에 비교하여 교회사, 특히 한국교회사 분야는 황무지와 같은 형편 이었다. 교회사의 원로요 한국교회사의 대가이신 백낙준 박사는 학문활동에 전념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대 다행이도 내가 귀국하던 해인 1972년에 민경배 교수의 『韓國基督敎會史』가 출판되어 이로부터 한국교회사 연구가 한국에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분열 문제를 비롯한 해방 후에 나타난 많은 문제들에 선교사의 영향이 컸음을 인지하고 이를 주한 선교부의 초기선교정책과 연관시켜 분석한 것이 석사(Th.M.) 논문 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발전 내지는 형성 요인을 신학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역사적으로 고찰한 것이 박사 논문 이었다. 박사 학위는 훨씬 세월이 흐른 다음에 1990년도에 받게되었지만 모든 과정은 72년도에 다 마치게 되어 나는 그 해 9월에 귀국하게 되었고 그 때부터 서울신학대학에서 교수직을 시작하게되었다. 그리하여 귀국한 해인 1972년도 그 당시 공동학회에 참석케 되었던 것이 오늘 날 기독교학회인 본 학회와 관계를 갖게된 것이다. 그 당시의 공동학회 총무는 전국신학대학협의회(KAATS)의 총무가 겸임하게 되어 김정준, 이종성 박사에 이어 감신대의 김용옥 박사가 맡아 수고하셨고, 공동학회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신학사상」에 실리게 하였다. 나는 1974년부터 「신학사상」의 편집 겸 기획위원이 되어 그 일에도 관계하게 되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의 회기에 나는 본 학회 총무의 직을 맡아 일하였는데 그 회기중 가장 의미 있고 보람 있었던 일은 KAATS와 협동하여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신학자대회를 개최하여 국내외 신학자들의 강의를 듣고 토론하고 끝으로 "한국신학자 선언"(Declaration of Korean Theologians)를 발표한 일이다. 외국 신학자로서 대표적인 인물은 남미 해방신학자인 보니노 교수였다. 해방신학은 그 당시 한국의 반군사독제 민주화운동, 인권둔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로 인해 정부로부터도 억압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기에 보니노 교수의 내한은 더욱 뜻이 있었다.
그 후 본 학회는 한국 유일의 기독교학회로 발전하여 오던 중 또 하나의 복음주의학회가 생기게 됨으로 한국교회의 신학사상(神學史上) 이원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 본학회의 회원이 세계 굴지의 명문대 학위 소지자들로 수백명에 달하고 있으며, 특히 그렇게도 귀하던 교회사학회의 회원만도 수십명에 이르고 있음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여러분의 피나는 노고의 결실이라 믿는다.

 

2. 한국신학의 흐름

 

1) 신학적 경향에 대한 주장들
한국신학의 흐름에 있어서의 신학적 경향성에 대한 견해는 여러 주장들이 있는데 이들을 대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세가지로 불 수 있겠으나 나는 여기에 하나 더 첨가하여 네가지로 본다. 그것은 '일원논', '이원논', '삼원논', 그리고 '사원논' 이다.
첫 번째인 '일원논' 주장은 "보수주의" 이다. 홍현설 박사는 이 보수주의가 근본주의 지향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보수주의 신학유형이 다른 기독교 사상을 한국에 소개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Spencer Palmer 박사도 "그본주의가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쥐었다"고 말하였다.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가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신학 추세로 보였다.
두 번째인 '이원논' 주장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이다. 이종성 박사는 한국교회 내에 있는 신학적 갈등에 대해 한국신학계의 "좌와 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로 표현했으며, 전성천 박사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또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언급하였다. 한 편 이장식 박사는 한국 신학계에서 논난 되었던 신학적인 주제를 法(Mood), 形(Type), 式(Mode)이라는 세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法은 보수주의냐 자유주의냐 이고, 形은 고백적이냐 변증적이냐요, 式은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의 문제이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우익"은 보수적, 고백적, 객관적 이고, 다른 한측인 "좌익"은 자유적, 변증적, 주관적 이다.
세 번째인 '삼원논" 주장은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이다. 유동식 박사는 『韓國神學의 鑛脈』에서 학국신학을 보수주의, 진보주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라는 세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주재용 박사도 한국신학을 유사하게 세 유형으로 보고 있다. 즉 보수주의 신학, 진보주의적 삶의 신학, 문화대화적 토착신학이 그것이다.
넷 째인 "사원논" 주장은 보수주의, 복음주의, 진보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이다.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일원논과 이원논과 그리고 삼원논 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사원논으로 본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본 결과 이다. 즉 하나는 원,근적(遠,近的)인 관측의 시각에서와, 또 하나는 역사적인 시대적 흐름에 따른 발전된 변화의 결과로서의 양상 이다. 먼저 원,근적인 관측의 시각에서 본다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은 멀리 원거리에서 포괄적으로 바라 본다면 보수적 복음주의 이다. 그런데 좀더 근접하여 까까이서 본다면 보수와 진보주의로 나뉘어 두 가지로 보이고, 그 것을 좀 더 근접하여 더 가까이서 본다면 보수주의, 복음주의, 진보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의 네가지 형태로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역사적인 흐름의 발전적인 변화의 양태에서 본다면 앞서 언급한 세가지 형태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었다기 보다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발전적인 변화된 형태라 할 것이다. 초기 1930년대까지의 태동기는 선교사 지배하의 보수적 복음주의 일원논 형태의 경향 이었고, 다음의 정초기인 30년대 이후에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이원논적인 경향 이었고, 60년대 이후의 개화기에는 보수와 진보가 각각 둘씩 분류되어 보수주의에서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복음주의로, 그리고 진보주의는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로 네 가지 경향의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본 다면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은 대체적으로 일원논적으로 보겠으나 이원논 주장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여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한국교회의 신학사조는 보수적 복음주의라 하겠으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라고 하는 "좌와 우" 두 계열로 구분할 수 있으며, 더 상세하게 구분하자면 각 유형을 각각 둘로 나누어 네 걔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적인 흐름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혹은 근본주의와 온건적인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로 구분해 볼 수 있고, 진보주의 흐름은 사회참여적 행동주의와 종교문화적 자유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은 시각의 측면과 시대적 흐름에 따라 하나로도, 둘로도, 그리고 결국은 넷으로도 볼 수 있다.

 

2)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홍현설 박사가 이미 말했듯이 한국의 신학적 경향성은 보수주의 지향적 이었다. 팔머 박사는 "청교도적인 열심과 웨슬레의 열정을 지닌 미국 선교사들이 지도하는 프로그램의 영향(Impetus) 속에 근본주의가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말한다. 1953년에 있었던 미국 남장로교 세계선교 특별위원회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현상에 대해 "정책과 프로그램 상의 이견으로 인한 파벌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대단한 보수주의 이다"라고 평하였다.
아와같이 보수주의 일변도였다고 불 수 있는 한국교회에 진보주의의 대두로 인한 한국신학계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간의 대립현상이 최초로 나타나게 된 것은 1930년대 초의 성서관 문제에서 였다. 그것은 아빙돈(Abingdon) 단권 성경주석 번역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34년에 출판된 이 단권주석 번역 작업에는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장로교회의 몇몇 소장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수주의적인 장로교회의 입장에서 불 때 그 단권주석은 신학적으로 너무 자유주의적으로 비쳤다. 축자영감설이 지배적 이었던 장로교회에서는 당연히 이에 대한 강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총회에서는 구독 금지와 역자들에게는 공개 사과를 받기로 결의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두 그릅 간의 차이점이 더욱 심화되어 보수주와 진보주의는 더욱 분명하게 계열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는데 보수주의 측이 당연히 다수를 차지하였다. 진보적인 측은 비교적 소수 그릅을 이루었고, '자유주의자', '신신학자', 심지어 이단으로 불리는 비판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 성서관에 있어서 상반된 그릅간의 대표자는 박형용 박사와 김재준 박사라 할 것이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1935년에 김 박사가 보수신학, 특히 성서의 완전 축자 영감설을 비판하므로 시작되었다. 김 박사는 「신학지남」에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 연구"란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박 박사는 그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평양신학교 교수 였던 박 박사는 김 박사의 논문이 「신학지남」에 게재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로부터 이 두 사람은 대립상태를 견지하게 되었다. 평양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마펫(Samuel A. Maffet) 박사는 1935년 선교 50주년 기념예배 설교에서 30년대 초부터 일본을 비롯한 미국등의 해외 유학생들의 귀국을 개기로하여 한국신학계에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의 등장에 대해 강력히 경고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김재준 박사는 일본과 미국에서 훌륭한 신학 수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의 교수로 채용되지 못하였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문울 닫게된 후에 김재준 박사는 1940년에 마침내 송창근 박사와 함께 서울에서 조선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새 조선신학교의 시작은 순전히 한국인의 손으로 설립되어 선교사의 경영적인 주도권과 신학적인 보수주의 신학사상에서 탈피한 신학교육 기관이라는 면에서 한국교회사에 의미있는 사건 이었다. 김양선 교수에 의하면 조선신학교는 한국교회에 자유주의 신학을 수립한 기반이요 모체이며, 이에는 김 박사의 공이 컸다고 한다.
해방 후 조선신학교는 그 명칭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6.25 동란 중에 송창근 박사가 납북되자 김재준 박사가 교장직을 맡게 되었다. 반면에 박형룡 박사는 총회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장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 두 교장이 신학적인 반대 그릅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 이듯이 두 신학교 또한 대립적인 두 신학사상을 대표하는 신학교육 기관이 되었다. 그리하여 전성천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신학교들 속에서 그 중심점을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양측의 오랜 기간의 대립 결과 1952년의 제 37회 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 박사에게 축자영감설에 대한 비판을 이유로 면직처분이 내려지게 되었고, 결국 1953년에 장로교회는 박 박사측의 예장과 김 박사 측의 기장으로 분열 되었다.
1960년에 예장은 에큐메니칼 운동 문제로 인한 게속된 갈등으로 또 다시 분열되었다. 그것은 친에큐메니칼 W.C.C.측과 반에큐메니칼 N.A.E. 측 간의 분열이었다. 반에큐메니칼 측의 주장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중심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W.C.C.: World Council of Churches)는 신학적인 면에서 너무 자유주의적이며 용공적이고 로마 카톨릭 교회적이므로 W.C.C.에서 탈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친에큐메니칼 측은 우선 총회 내의 N.A.E.측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W.C.C.에서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끝내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열되었고, 통합측은 1970년에 다시 W.C.C.에 재가입하였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회는 삼차에 걸친 분열을 통하여 4개 교단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 문제가 신학적인 입장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장로교회의 4개 교단은 친에큐메니칼적인 진보주의 계열과 반에큐메니칼적인 보수주의 계열로 양분되어 친에큐메니칼 계열에는 예장 통합측과 기장이 반에큐메니칼 계열에는 예장 합동측과 고려파가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반에큐메니칼 계열은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고 I.C.C.C.(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지지하며 미국 정통장로교회의 분리주의적인 칼빈주의의 입장을 지향한다. 에큐메니칼 운동 문제는 비단 한국 장로교회에만 국한되지 않고 온 한국 개신교파에 큰 파문을 이르켰다. 특히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던 제3차 W.C.C. 대회에서 러시아 정교회가 회원으로 가입되자 이를 연유로 I.C.C.C.의 총재인 맥킨타이어(Carl McIntyre) 박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한국의 보수적인 반에큐메니칼 그릅은 W.C.C.를 더욱 용공 단체로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성결교회까지도 1961년에 이르러 N.C.C. 탈퇴 문제로 분열 되었다. 교회 일치를 주창한 에큐메니칼 웅동이 한국에서 처럼 아이로니칼한 현상을 나타내고 분열의 고통을 겪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 한국 개신교는 대부분의 교단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찬, 반 혹은 N.C.C.측과 N.A.E.측의 두 계열로 분리되었다.
요컨대 193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은 비록 보수주의가 다수를 점하였지만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신학이라는 두 큰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간에 갈등을 일으킨 신학적인 문제는 성서관과 에큐메니칼 운동을 중심으로 한 신학 방법논적 차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를 넘으면서 이 두 큰 신학적 흐름은 각각 또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네 계열을 형성하게 된다. 즉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형성되고, 진보주의에서 참여적 행동주의와 문화종교적 자유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3) 보수주의의 전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한국교회 신학의 보수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보수개혁 신학' 이다. 보수개혁 신학이라 함은 웨스터민스터 표주문헌Westermiinster Standard Literature) 속에 구현되어 있는 대륙의 칼빈주의와 영미의 청교도주의 신학을 말한다. 영미의 보수주의적인 선교사들이 선교 초기부터 한국에 이러한 신학을 소개했고, 그 신학이 오랫 동안 한국교회 보수신학 전통의 주류를 이루어었다.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신학 전통 수립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박형룡 박사 이다.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길선주 목사가 이러한 류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1930년대에 박형룡 박사가 이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해외에서 이러한 보수신학을 공급한 송수로(Pipeline)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신학적 계열 이다. 즉 N.A.E., W.E.F., I.C.C.C., 휘튼선언(1966), 프랑크트선언(1970), 베르린선언(1974), 로잔언약(1974), 서울선언(1975) 등이다. 그러나 온건 보수파는 N.A.E.와 W.E.F. 그리고 로잔언약을 지향하는 편이었고, 극단적인 보수파는 I.C.C.C.와 휘튼, 프랑크프르트, 베를린, 그리고 서울선언을 지향하는 경향 이었다. 위의 기구와 선언에 긴말한 관계를 갖고 있는 I.C.C.C.의 매킨타이어 박사, 프랑크프르트 성언의 피터 바이어하우스(Peter Byerhouse) 박사, 로잔언약의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박사 등은 한국교회의 보수파 지도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회의나 부흥집회를 위해 비교적 한국을 자주 방문하였다.
선교사들의 전통적인 '보수 개혁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신학적 경향성은 성서의 신적인 권위와 무오성 주장, 反 에큐메니칼 운동, 'Missio Dei' 선교신학에 대한 거부, 타 종교와의 대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 등에서 진보주의 신학 계열과 구별된다. 보수주의 신학은 신정통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참으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자들은 W.C.C.계열의 선교신학, 특히 '오늘의 구원'(Salvation Today)으로부터 '해방신학'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 대해 비판적 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산업선교, 인권운동 등과 같은 K.N.C.C. 중심의 사회참여 운동에 반대하였다. 1975년 8월 27일부터 9월 1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와 유럽의 16개국 보수주의적 교회지도자들의 아시아 협의회 모임에서 채택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 선언"에서는 에큐메니칼 선교에 대하여 "현재의 에큐메니칼 선교의 이데올로기적 탈선은 역사적인 기독교의 메시지를 완전히 파멸로 이끌고 있으며 끝없는 암흑에 잠기게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타종교와의 대화에 대해서도 보수주의자들은 배타적이다. 박형룡 박사는 "기독교의 이교에 대한 適正한 관계는 타협이 아니라 정복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종교의 태도는 타협이 아니라 충돌이며 정복이다"라고 말한다. 박 박사는 1953년 장로회 총회신학교 교장 취임사에서 그의 신학적 입장을 다음과 갘이 공적으로 표명하였다.

한국교회 신학의 수립이란 결코 우리가 어떤 신학체계를 창작함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 의 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 우리 교회가 70년전 창립되던 당시에 받은 그 신 학을 우리 교회의 영원한 소유로 확보함을 이름이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미국 연합장로교회의 1967년에 새로 작성한 신앙고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한철하 박사는 새로운 신앙고백을 신정통주의 신학체계를 공식화한 하나의 신조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1982년 8월 27일부터 9월 5일까지 "Theology and Bible in Context"라는 주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갈리브 해안과 태평양 연안의 섬으로부터 82명의 대표와 옵서버들이 서울에 모여 협의한 끝에 또 하나의 "서울 선언-제3세계의 복음주의적인 신학을 지향하여"를 통해 에큐메니칼 계열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우리는 인종신학(ethnotheology), 혼합주의 신학, 해방신학과 같은 신학들의 전제나 자 료, 해석학이 적합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인종신학은 종종 정치적인 문제를 동인으로 하기 때문에 성서를 정당하게 다루지 않는다. 혼합주의 신학은 종종 성서의 진리를 문 화의 변화에 적응시킨다. 해방신학이 무시할 수 없는 생동감 있는 질문들을 제기한 것 사실이지만, 우리는 신학을 하는데 있어 상황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경향에 대해 반대 한다. 그러한 것은 성서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서를 해석하는 열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학기술을 가장하여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인 매체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손봉호 박사는 "해방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기독교 신학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한국복음주의 신학협의회의 신학지인 「聖經과 神學」 제1권을"민중신학 비판"이란 특집으로 발간하였고 김명혁 박사는 "신학운동이 아닌 사회운동"이란 논문에서 민중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사회론"이라고 비난하였다.
1980년대는 진보주의에 대한 반발로 보수주의의 운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된 듯 하다. 1980년에는 한국보수주의 계열의 복음주의신학회가 새롭게 조직되었다. 그것은 1973년에 빌리 그래햄의 기금을 받아 아세아연합신학원(ACTS)이 설립되면서 뒤따라 생긴 일이다. 이미 1971년부터 한국 신학연구의 대표적인 연합기구로서 모든 분야의 신학회를 종합하고 있는 공동학회(현 한국기독교학회의 전신)가 조직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보수주의 신학회가 별도로 조직된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이래로 한국 보수주의 계열에는 양대 진영으로의 분리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인 근본주의 계열과 온건적 보수주의인 복음주의 간의 분리인 것이다. 박형룡 박사가 "근본주의야 말로 유일한 기독교 자체"라고 주장하자 이를 계기로하여 장로교 보수주의 진영 내에 파열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보수주의는 에초부터 자체 내에 분열의 가능성을 소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란 자유주의를 대항하기 위해 신비주의, 세대주의, 경건주의, 복음주의, 근본주의 등의 여러 신학적 배경을 지닌 여러 요소들이 한데 포괄적으로 함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한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둘로 나누어 진다면 그것은 근본주의자들과 신 복음주의자로도 호칭되는 복음주의자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김의환 박사는 "신 복음주의 비판", 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신 복음주의는 신학적으로 신 중립주의요 변질된 신학이라고 주장한 윌리암 에쉬브룩(William A Ashbrook)의 입장에 찬성을 표했다. 박아론 박사도 그의 부친인 박형룡 박사를 따라 에쉬브룩의 신학적 입장에 동조하여 신 복음주의자를 신 자유주의자 내지 신 타협주의자로 강력히 경고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대부터 한국교회의 보수주의 진영 내에는 장로교 뿐만이 아니라 전 개신교에 걸쳐 신학적인 이질적 성향의 기류가 형성된 것이다. 곧 극단적인 보수주의의 근본주의와 온건적인 보수주의의 복음주의 이다. 해외와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주의측은 칼 매킨타이어중심의 I.C.C.C.계열과 가까우며 복음주의측은 빌리그래햄을 중심으로 한 로잔언약 계열과 가까운 듯 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계열의 신학교육기관은 고려신학대학, 합동신학원, 장로회 총회신학대학, 아세아연합신학대학(A.C.T.S.), 순복음신학대학, 침례교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등이다. 이들 중 한국신학대학협의회(K.A.A.T.S.)의 회원교인 서울신학대학, 침례교신학대학, 순복음신학대학, 아세아연합신학대학 등은 복음주의 계열의 성향이고, 그외의 비회원교들은 근본주의 계열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A.C.T..S.는 원래 신 복음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설립되었지만 점차 근본주의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장로회신학대학은 소속 교단은 W.C.C. 회원교회 이지만 복음주의적 성향도 있다고 본다.

 

4). 진보주의의 전개:
한국교회의 신학에 진보주의적 초석을 놓은 사람은 김재준 박사 이다. 나는 여기에 정경욱 교수도 우선 포함시켜 보고싶다. 김재준 박사가 박형룡 박사와 성서 비평 문제로 논쟁을 벌인 후 1940년에 송창근 박사와 함께 조선신학교를 설립한 것이 한국에서의 진보주의 신학 교육의 시발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보수주의적인 외국 선교서들의 손을 떠나 한인 지도자들의 손으로 조선신학교를 시작하면서 김재준 박사가 그의 신학교육에 대한 이념에 입각하여 학문적인 자유를 강력히 주장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지배적인 선교사들의 보수주의 신학의 우산 밑에서 진보신학은 발전이 거의 불가능 했었으나 기장이 예장과 분리된 후 한신대학의 학장 김재준 박사의 지도에 의해 진보적인 신학은 조선신학교에 이어 보다 자유롭고 활발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교회는 진보주의 신학 작업이 발전하는 전환기를 맞았다. 다른 학문 분야와 함께 기독교의 신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으로 60년대는 한국 신학의 개화기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의 젊고 유능한 신학자들이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시작하였다. 가독교의 출판작업도 활발하여 많은 단행본들이 출판되었는가 하면 각 신학대학들도 매년 신학 학술지를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정기적인 신학지로서 1957년의 월간지 「基督敎思想」과 1973년의 계간지 「神學思想」이 발행되게 된 사실은 신학 발전을 위한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더 나아가 에큐메니칼 운동은 한국교회에 많은 도전을 안겨 주었다. 당대를 풍미하던 세계적인 신학사상들과 자유로운 교류를 통해 진보적인 신학이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진보주의적인 신학이 한국 신학계에서 더욱 소리를 높이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서구의 신학사상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신정통주의와 W.C.C. 계통의 신학을 추종하였다. Karl Barth와 E. Brunner, P. Tillich, R. Bultmann, D. Bonhoeffer 등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이었다. 그 후로 계속 John A. T. Robinson, H. Cox, W. Pennenberg, J. Moltmann 등의 새로운 신학사상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세속화 신학, 토착화 신학, 해방신학, 오늘의 구원, 하나님의 선교 신학 등을 수용하고 적용하여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드디어 신속하게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는 상황신학으로써 그들 자신의 '한국 신학'을 형성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러한 자신들의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의지는 K.A.A.T.S.와 한국기독교학회가 공동으로 1984년에 있었던 한국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신학자 대회에서 제정한 한국신학자 선언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는 2세기를 향한 우리의 신학의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마 16:24)뿐임을 고통스럽 게 절감한다. 이는 우리가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이 취했던 종교적 무사와 정치, 경제적 인 안락의 길을 떠나 한국사회와 역사에 동참하고 민중들과 함께하며 이 세상에서 예 수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길을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 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를 때 닥치게 될 고난과 빈곤을 회피하지 않기를 기도한 다. 우리의 신학을 한다는 것은 믿음과 감사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하나의 행위 이다. 우리의 지식과 신학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한국에서 우리의 신학 을 하려는 우리의 모든 미래에 우리와 함께 하길 기도한다. 아맨.

진보주의 신학 계열도 1960년대에 들어와 두 갈래의 양태로 발전되었다. 곧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이다. 한국교회에 있어서 이 두가지 신학적 경향성의 현상을 시대적으로 보다 소급하여 보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모두어 진보주의로 포괄하여 간주하고 60년대부터 구분하여 본다. 그 하나인 진보주의는 민중신학으로 구체화된 사회참여적 행동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신학을 추구하는 종교 문화적 자유주의 이다. 전자가 사회 정치적 신학이라면 후자는 종교 문화적 신학이다. 전자가 한국의 사회적 현실과의 만남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한국의 종교적 전통문화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이다. 전자가 세속화 신학과 연계성을 갖는데 비해 후자는 토착화 신학과 연계성을 갖는다.
사회참여적 행동주의자들은 그 초석을 놓은 김재준 박사에 이은 민중신학자들 이다. 이 신학은 성육신 신학에 입각하여 인간의 권리를 회복하고 인간의 해방을 이룩하려는 예언자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회와 역사의 현실에 참여하려는 신학이다. 사회참여적인 행동주의는 마침내 민중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민중신학은 현장신학이라는 면에서 한국의 사회 정치적인 역사적 현실과의 만남에서 197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반기에 행정부가 주도한 유신개혁에 등장하였다." 실로 민중신학은 '해방신학'과 '하나님의 선교' 신학 사상을 통해 한국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한국 신학자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발전시킨 한국교회 백년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한국신학이다. 한국에 있어서 민중신학 운동은 1973년 5월 20일에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한국 크리스챤의 신학적 선언'이 발표되면서 실제적으로 시작되었다.
민중신학 운동에 공헌하였던 대표적인 신학자들로는 김정준,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민중신학은 한국적 상황의 신학을 추구한다. 서광선 박사는 "Minjung and Theology in Korea: A Biograpycal Sketch of an Asian Theological Consultation"의 논문에서 민중신학의 성향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민중에 관한 신학 내지 민중신학은 한국의 신학자는 물론 기독학생, 노동자, 언론인, 교수, 농부, 문필가, 지식인들이 1970년대에 체험한 정치적인 경험에 대해 신학적으로 반추한 것을 축적하여 연결한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상황 속에서 억눌린 자들에 관한 신학, 즉 억눌린자들에 대한 신학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그것은 억눌린 자들의 교 회와 교회의 사명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민중에 관한 신학은 일반적으로 본회퍼 의 '성서에 대한 세속적인 해석'과 '복음의 세속적인 의미'라는 신학의 범주에 속한다. 그것은 한국 현실에서의 '복음에 대한 정치적인 해석학'의 발전이다.

사실 미중신학자들은 대학에서는 가르치는 학문적인 신학자들이라기 보다는 산업선교와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한국의 사뢰-경제와 정치의 역사 속에서 그들의 체험을 반추해온 사람들이다. 한국신학이라는 것이 한국의 교인들과 신학자들 다수가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민중 신학은 한국신학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만둘어지고 있는 한국신학이며, 역사적으로 이러한 특수한 시기의 한국 현실에 대한 체헙을 반추하는데서 등장한 미래 지향적인 한국신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문화적 자유주의 신학은 1910년대 초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지마, 한국 토착화 신학의 발전에 관심이 있던 학자들을 통해 1960년대에 학문적인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신학 운동의 실제적인 초석을 다진 사람은 1910년대에는 최병헌 목사였고, 1930년대에는 정경옥 교수였다. 그것이 1960년대에 계속 이어지게 죈 것이다. "이 운동을 전개하는 자들은 보수적인 서구신학에 얽매이지 않았고, 성령은 전통적인 한국문화 속에서도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타종교와의 대화 문제가 대두되었다. 한국인들은 무교, 불교, 유교등의 풍부한 종교-문화적인 유산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재래 종교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이는 유학자였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1902년에 정동교회의 첫 담임 목사가 된 최병헌이었다. 종교-문화적 자유주의는 한국의 컨택스트 속에서 신학을 하여 기독교의 복음과 토착 종교-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토착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신학형태이다.
이 신학을 전개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감리교인 들이다. 윤성범, 유동식, 변선환 등이 주된 인물들이다. 그들은 전통 종교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 문제를 다루었다. 즉 윤성번 박사는 유교를, 유동식 박사는 무교를, 변선환 박사는 불교를 연구하여 그 종교들과 기독교와의 만남을 시도하였다.
윤성범 박사는 1972년에 『韓國的 神學: 誠의 解釋』이란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한국적 신학의 과제는 한국의 전통들에다가 서구적인 신학적 전통을 가미하여 우리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 전반을 서구신학의 빛을 통해 재래의 종교 전통에 따라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는 誠을 무교, 불교, 유교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보며, "한국적인 誠의 개념은 서구신학에서 말하는 계시와 동등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誠'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참 말씀이며,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을 표시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서양의 계시 개념을 우리에게 친숙한 개념인 誠이란 말로 대체하고, 誠의 개념으로 제반 신학적인 문제들을 재해석하며 한국적 신학을 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다.
변선환 박사는 선교신학적인 입장에서 기독교와 불교와의 관계성 문제에 대해 학문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하였다. 비종교적인 해석의 빛 아래에서 그는 "비종교적으로 해석된 기독교는 사랑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altruism의 성육신인 Doddhisattava의 길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선교신학적인 제 일차적 전제는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가 '개종'이 아니라 '대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동식 박사는 일종의 종합적 종교신학인 풍류신학을 한국적 신학으로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는 토착신학을 위해 문화의 어떤 부분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문화는 물론 사람들의 근본적인 영성도 창조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퐁류도를 한국 문화의 근본저인 이데오로기요 한국인의 본질적인 영성으로 본다. 풍류도는 실로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풍류신학을 우리의 전통적인 시각(영성)을 통해 주체적으로 복음을 해명하고자 노력하는 한국적인 신학을 나타내 주는 용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적인 신학으로서의 풍류신학은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한국문화의 근 본적 이데오로기는 '한. 멋. 삶.'이라는 형상으로 요약된다. 한국 역사는 이 이상의 실현 을 지향한다.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영적으로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이 기독교 안에서 이러한 이상적인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목표는 이러한 민족적인 꿈을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민족 구원의 길 을 본다.

그리고 그는 부활에서 그것의 신현을 기대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이 신학의 본질은 부활의 세계에 있고, 부활을 믿는 삶의 희망에 그 중요성이 있음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의 진보주의 신학 계열의 대학은 한국신학대학, 감리교신학대하,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이화여자대학교 기도교학과, 장로회 신학대학 등이다. 그 중에서 한국신학대학이 민중신학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사회참여적 행동주의 신학교육 기관이었고, 감리교신학대학은 풍류신학으로 대표되는 종교-문화신학을 강조하는 신학교육 기관으로 볼 수 있었다..
'민중신학'과 '풍류신학'이 서구신학의 바빌론 포로에서 탈출하여 한국 역사의 사회 정치적 현실과 종교 문화 속에서 자신의 신학인 한국신학을 수립하려는 doing theology의 시도와 신학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 of theology)의 결실이었다는 면에서 그 의미성과 중요성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요약한다면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은 원래 보수적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시대적 흐름에 따라 크게 둘로 나뉘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되었다가 다시 분류되어 보수주의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로 나누어지고, 진보주의에서 참여적 행동주의로서의 세속화 신학적 민중신학 계열과 종교-문화주의로서의 토착화 신학적 풍류신학 계열의 네 형태로 확대되었다 할 것이다.
보수적 복음주의 계열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전수 받은 구미교회의 전통신학에 바탕을 두고 이를 계승 보존하려는 신학적 작업을 사명으로 삼고 있는가 하면, 진보주의 계열은 보수주의 계열의 신학적 소위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오늘의 역사적 정황, 즉 사회 정치적 내지 문화 종교적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의미를 모색하고 해석하려는 신학 작업이다.

 

3. 전망

 

1). 보수와 잔보 신학간의 갈등과 한국신학의 수립 과제
우리는 앞에서 한국교회의 신학적 경향성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본 연구에 따르면 발전적인 역사적 흐름에 따라 원래 하나이었던 것이 둘이 되고 다음으로 넷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주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를 대체적으로 포괄하여 두 계열로 나누면 보수주의 진영과 진보주의 진영이 될 것이다. 앞으로의 한국신학 발전에 대하여 전망헤 보면 우선 이 보수와 진보 두 진영간의 갈등이 계속 심화될 것이다.
그 두 진영의 신학적 성향으로 볼 때 보수주의는 선교사들에게서 전수받은 신학을 계승 보존하려는 것이고, 진보주의 진영은 이러한 보수주의의 신학적 소위 바빌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오늘의 상황에 부합한 신학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보수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의 절대적인 확고한 권위에 바탕을 두고 현대성의 문화에서 허탈과 불안에 직면하여 무엇인가에 확신을 추구하려는 현대인에게 충족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인데다가 아울러 특히나 교회 성장 위주적인 하국교회의 정서에 부합하여 계속 활기찰 것으로 본다.그런가 하면 진보주의 진영에서는 신학의 상황화에 입각한 doing theology의 작업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신학 수립에 대한 전망은 보수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진보주의 진영에서 보게 된다. 진보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신학은 역사 참여적 행동주의로서의 세속화 신학적 민중신학과 종교-문화주의로서의 토착화 신학적 풍류신학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진보주의 진영의 신학들은 doing theology와 신학의 상황화에 영향 받아 한국 신학자들에 의하여 한국의 역사 현실에서 시도되었다. 전자는 사화-정치적인 역사적 삶의 현장과의 만남에서 이룩된 신학이라면, 후자는 문화-종교적인 인간 심성과의 만남에서 이룩된 신학이라 할 것이다. 전자가 횡적인 관계성의 만남이라면, 후자는 종적인 관계성의 만남의 신학일 것이다. 전자가 외적인 현실(external reality)과의 만남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내적인 영성(internal spirituality)과의 만남의 신학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내.외적인 면으로 분리해서 이원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앞으로의 추구할 신학작업은 이 두 내.외적인 차원이 통합된 전인적인 삶의 현실(reality of life)과의 만남에서 이룩된 총체적인 신학 수립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정치적 외적인 현실과 종교-문화적 내적인 영성이 총화된 입체적인 정황 속에 실존하는 인간 삶과의 만남의 신학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근본적인 도전
오늘 날 기독교 신학은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적으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즉 이것은 다름 아닌 '예수 세미나' (Jesus Seminar)의 등장 이다. 이에 대하여는 아직 한국 신학계에서 큰 반응이 없는 것 같다. 「神學思想」지는 2000년 겨울호(111호)를 "21세기와 신학"이란 특집호로 편집하여 그 주제하에 심포지엄과 특집 논문도 있어 좋았지만 '예수 세미나'에 대한 언급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110호인 2000년 가을호에 해외 논문으로 마크 앨런 포웰의 "예수 세미나"란 제목의 논문이 실려있어 개괄적으로 집약된 소개를 하고 있다. 나는 근년에 예수 연구 분야에 관심이 있어오다가 1999년도 겨울 미국에 갔을 때 서점에 들려 신간 신학서적들을 둘러보던 중에 우연히 눈에 띠어 두 권의 책을 사게 된 것이 '예수 세미나'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두 권의 책은 하나는 John Dominic Crossan의 The Birth of Christianity 이고, 또 다른 하나는 Robert W. Funk의 Honest to Jesus 이다. 우선, 이 두권의 서적을 통하여 나는 '예수 세미나'의 충격적인 연구 분야를 엿볼 수 있었다.
'예수 세미나'는 예수에 대한 가장 중점이 되는 문제를 연구하는 일군의 학자들로 1985년에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1993)와 Honest to Jesus등의 저자인 Robert W. Funk에 의하여 창설되었고, Funk는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the Mediterranean Jewish Peasant(1991)와 The Birth of Christianity(1998)등의 저자인 John Dominican Crossan과 함께 공동 의장으로 되어있다. 원래, '예수 세미나'의 의도는 "예수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예수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전승들의 모든 부분을 검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 세미나'는 예수의 말한 것에 대하여서와 예수의 삶과 활동에 관한 것들을 공동 연구하며 출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대중 매체의 관심은 비상하고 출판사업 또한 활발하다. 나는 '예수 세미나'의 깊이 있는 내용에 대하여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 충격적인 도전이 되었던 것은 그들의 거침없는 성서 비판 작업이다. 역사적인 예수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에 대한 말씀(The Authentic Words of Jesus), 그리고 삶과 활동에 대하여 추구하는 연구 작업 과정에 있어서 그들은 성서를 심지어 외경까지를 포함하여 대담하게 분석 비교하고 있다. 요는 지금까지 지탱하여 온 기독교의 전통적인 성서의 경전적 권위(canonical authority)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 세미나'의 연구는 새로운 개혁을 위한 작업이며 그것은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시작된 전해진 신앙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종교가 아니라 "어떤 방법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에게 직접적으로 연관된 참 신앙으러서"의 예수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는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세미나'의 연구 활동은 한국교회 역사는 물론 세계 교회사에서 있었던 종래의 보수. 진보간의 대립적 신학 논쟁들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차원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라 하겠다. 그것은 성서의 경전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라고 본다. 보수. 진보간의 논쟁은 적어도 성서의 경전성을 전재로한 해석학적인 입장의 갈등 내지는 대립이었다고 본다면 '예수 세미나'의 연구는 성서의 경전성 자체에 대한 분석 비판을 통한 새로운 재구성에 관심을 두고 있지안나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경전적 성서(Canonical Bible)의 범주 안에서의 논의이고 후자는 이 범주의 경계를 타파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파격적인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는 정작 '새 시대'(new age)에 들어선 듯 하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지금 '후 그리스도교 시대'(post-Christian age) 내지는 포스트 모던 시대(postmodern period)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 지구상에는 그 어느 곳도 기독교권(Dhrsitendom)의 보호나 속박을 받는데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성서학은 한 때는 교회에 종속된 학문이었으나 이제는 세속적인 일반 연구 기관에 옮겨졌다고 R. Funk는 말한다. 이 얼마나 변화된 세상이 되었는가? 이제 신학은 교회 내에서 이단 여부로 통제를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닌 듯 하다. 신학의 틀에서 못하면 종교학 분야에서, 또는 일반 학문 연구 기관들에서 하게될 것이다. 거기에 일반 대중 매체가 집중되고 출판물은 넘치게 될 것이다.
이 시점에 우리 한국 신학계는 앞으로의 신학 진로의 방향을 향한 풍향계 설정이 중요한 과제로 요청된다고 본다. 또한 성서의 정경화(Canonization) 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통한 재검토 작업은 교회사학 분야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맺는 말

앞에서 우리들은 한국교회 신학의 흐름과 전망을 살펴 보았다. 본 발표는 한국기독교학회 30년의 역사와 함께하여 온, 그리고 일생을 통하여 반 세기 넘어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 살아 온 사람이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오면서 몸소 배우고 체험하였던 바를 바탕으로하여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한국교회 신학의 흐름을 통하여 세계교회사와 마찬가지로 신학은 발전하여 왔음을 배우게 되었다. 1930년대부터 한국교회사에 대두된 진보적 신학의 발전이 60년대 이후 혹은 민중신학, 혹은 풍류신학 등의 이름으로 한국적인 신학이 구현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한국교회사적인 측면에서는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본다. 그것은 내용에 있어서는 혹 미진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선교 백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삷의 문제를 우리의 역사 현실 한 가운데서 우리들에 의하여 풀어보려는 진지한 시도의 결실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속적인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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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ical Trends Developed Through the Historical
Stream of the Protestant Church in Korea

 

Kang, Keun Whan,
Professor Emeritus,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Bucheon, Korea

 

 

The theology of the Korean Church has developed out of the combination of influences both national and foreign according to historical stream. The ideas on the matter of theological trends in the Korean Church can be seen variously. Three representative trends may be characterized as 'single', 'double', and 'triple'.
The 'single' idea is Conservative Theology. Dr. Herald S. Hong insists that, in general, the trend has been toward extream fundamentalism. According to him, such a conservative type of theology blocked the introduction of other types of Christian thought. Dr. Spencer J. Palmer also writes that "fundamentalism held sway in the peninsula". The general trend of theology is either fundamentalism or conservatism.
The 'double' idea is 'Conservatism and Progressivism'. Dr. Rhee, Jong Sung refers to the theological conflict within the Protestant Church in Korea as the "Left and Right" of conservatism and Progressivism in the Korean theological world. Dr. Chun, Sung Chun mentioned on this matter as "Fundamentalism and Modernism", or "Fundamentalism and Liberalism".
The 'triple' idea is "Conservatism, Progressivism and Liberalism". Dr. Ryu, Tong Shik mentiones in his Hankook Shinhak eui Kwangmek(韓國神學의 鑛脈) three streams of Korean theology, i.e., Conservative, Progressive, and Liberal theological thought. Dr. Choo, Chai-Yong also similarly views the streams of Korean theology as three: Conservative Theology, Progressive Theology of Life, and Indigenous Theology of Cultural Dialogue.
As observed above, there are many various views on the theological trend of the Korean Church. The present writer, however, thinks a little differantly, and he likes to insist another idea, that is, as from one to four idea developed according to the historical stream of the Korean Church. The origianl trend of theology in the Korean Church was, in general, one of concervative up to the 1930's, but since that time the main conservative stream divided into two lines: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and it becomes four lines altogether divided into two from each line in the 1960's such as Ultra Conservative Fundamentalism, Mild Conservative Evangelicalism, Participative Activism, and Religious Liberalism.
In the confrontational situation existing since the latter part of 1960's the Korean Church has begun to exert an effort in the social participation movment. Particularly the developement of Korean theology such as "Minjung Theology' and 'P'ungryu Theology' among Korean proegressive theologians during this period is very exciting and significant in terms of doing theology. It would be desirable to be continued and developed such a work further hereafter. -end-

출처 : 행 복 충 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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