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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및 신조〓/한국 교회사

한국 교단의 분열 약사

by 【고동엽】 2021. 11. 3.
[주님의 뜰-행원소구에서 펌]


한국 교단의 분열 약사

목 차

*.서론
1. 세교단의 선교의 시작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의 시작

*. 본론
1. 세교단의 활동
*장로교회의 활동
*감리교회의 활동
*침례교회의 활동
2. 교단들의 분열
*장로교회의 분열
*감리교회의 분열
*침례교회의 분열

*. 결론


*.서 론

한국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지도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개신교의 역사도 이제 100여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많은 선조들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그들이 당한 핍박과 순교의 공로들로 한국 교회는
짧은 세월속에서도 급속한 성장과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국의 개신교는 기존의 천주교 보다는 늦게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선교 사역이 외국 선교사들의 교단적

교세활동으로 인하여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선교의 활동을 하게 되어 발전의 모습 이외의 문제점들을 한국교회에 안겨 주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외에도 성장속에서 갈등 들을 스스로 해결 하지 못하여 많은 분열과 아픔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교단인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 침례교,성결교,하나님의성회등 많은 군소교단의 모습 속에서 한국 교회는 초창기의 핍박 이후에 우리 스스로가 핍박하여 갈라진 모습의 교회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분열된 한국교회의 모습속에서도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의 통합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안겨 주며,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의 활력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것임은 확신할수가 있다. 본문에서는 한국의 개신교단중 대표적인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의 종파운동과 활동, 분열원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결과에 대하여 생각 해보기로 한다.

1. 세 교단의 선교의 시작

* 한국 장로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개신교회의 첫 사역은 바로 장로교회의 의하여 이루어 졌다.먼저 한국인
과 직접적으로 최초의 연관을 맺은 개신교의 선교사들인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1875년에 이미 성서의 한글 번역에 착수하였고 함께 성서번역에 참여하였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김진기 등이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이 되었고 곧 매서인이 되어 국내에 잠입함으로 한국교회의 초석이 된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본에 머물던 한국인 이 수정은 재일장로교 선교사 녹스등과 교분을 맺고 이수정역 성서를 발간하는 한편 미국의 여러 선교잡지에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등 장로교회의 한국 진출의 성숙한 분위기를 조성한 바 있다.

한편 1884년에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북장로회의 한국 선교사인 알렌 의사가 내한하였다. 비록 선교사라는 신분을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고 미국 공사관의 공의 신분으로 입국하였으나 그의 목적은 선교사역이었고 마침내 왕실의 신임을 받아 그해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광혜원을 설립함으로 그의책무를 수행하였다. 뒤이어 1885년 부활절에는 본격적인 장로교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가 내한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이렇듯 한국 개신교회는 나라밖에서 이룩된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한국 선교 접촉 그리고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미 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해 비롯된것임을 살필수 있다.

그후 북 장로회는 한국 선교회를 조직 하는 한편 서울, 평양, 대구, 신천, 강계, 청주, 안동 등지에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선교는

물론 교육, 의료사업등을 대대적으로 폈다. 언더우드 목사는 부임한후 얼마 안되어서 한국의 요단강세례라 불리우는 압록강에서의 33인에 대한 세례식을 베푸는 장거도 이룩하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은 장연의 소래 교회와 서울의 세문안,연동,승동,안동교회, 평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대교회로 발전, 인근 교회의 모교회가 된 유서 깊은 교회들이 되었다.1882년에는 북장로교회에 이어 미국 남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테이트, 데이비스, 레이놀즈, 선교사등이 주축이 되어 한국의 호남지역에서 선교 하여 놀라운 선교 성과를 올렸으며, 교회와 교육,의료기관을 설립을 추진하며, 북장로회와의 협력으로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기여 하였다.

또한 1889년 호주가 한국선교를 희망 데이비스 남매가 필두로 여러 선교사가 내한하여 경남 지역에서 경건과보수성에 입각한 장로교 교리를 심었는데 이후 서북지역 못지않은 한국장로교회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캐나다인 독립선교사 메켄지의 한국 선교 착수와 순직에 자극되어 1898년 캐나다 장로교회는 그리어슨 의사와 푸트, 맥레 목사를 필두로 함경북도와 간도 지역을 할당받아 원산,함흥,성진,회령 등을 선교부로 정하고 선교에 임한바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 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취하였다. 우선 그 선교 지역의

분할 협정으로 서로간의 선교권한을 보장 하였고 신학교육, 성서와 각종문서사업등에서 연합, 협력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장로교공의회를 조직하여 협력방안을 구체화하고 1901년에는 4개의 장로 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 신학교 (평양신학교) 를 설립하여 한국인 교역자양성에 들어갔다.이로써 장로교회의 창설이 가능해졌고 선교부 조직이 아닌 한국교회 자체의 치리기구의 구현이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 감리교회의 시작 역시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더불어 이루어 졌다. 한국개신교는 천주교회와는 달리 그 시작부터 한국의

주권자 (고종황제) 의 선교 허락을 받고 시작되었다.

1882년에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한국정부가 미국에 보빙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사절단은 워싱턴으로 행하던 차중에서 미국 감리교 목사이며 교육가였던 가우쳐 박사를 만나게 된다.

가우쳐는 이들로부터 한국의 국내 사정을 알고 곧 한국에 대한 선교를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 호소 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미 일본에서 에서 선교 하고 있던 감리교의 맥클레이 박사에게 연락 하여 새 선교지가 될 한국에 대한 현지답사를 받고 부탁하게 되고 맥클레이는 이 부탁을 받고 1884년 6월24일에 서울에 와서 김옥균을 통해 고종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에 대한 요청을 윤허 하였다. 이렇게하여 감리 교회는 한국 황제로부터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은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선교사를 모집하였고 이 부름에 두 가정이 응하였다. 이들이 곧 아펜젤러가와 스크랜톤가

였는데 후자는 모자 선교사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아펜젤러 목사 부부는 교육선교사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1885년4월5일
부활절에 제물포에 상륙함으로써 한국에서의 감리교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다.

서울에는 그해 5월3일 의료선교사인 스크렌톤 목사가 먼저 들어와서 정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후에 들어올 아펜젤러와 모친 스크렌토 대부인의 처소를 마련하였다. 아펜젤러는 정동의 자리 잡으며 자기집에서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한국의 신교육의 효시가 되는 배재 학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스크렌톤의 모친인 스크렌톤 대부인은 한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이화학당의 시발점이 되었다.

1895년에는 미국 남 감리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였으며 20세기 접어들면서 선교지역은 확대되고 교세도 늘어나서 선교구역을 분할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까지는 전국이 한 구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1901년 11월 이후부터는 전국을 세지방으로 분할하였다. 즉 서울과 그 이남은 남부지방으로 인천,강화,황해도는 서부지방,그리고 평안도일대는 북부지방으로 편입 시켰다. 특히 1901년은 감리교회 뿐만 아니라 바로 한국최초의 목사가 탄생되었다.

이해 5월 새로 봉헌된 상동교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평양과 인천,원산에서 각기 사역하며,한국인 목사를 배출하여 인력이 부족한 선교사를 대신하여 이들이 복음 전파의 일선 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후 교세도 급성장하여 1904년에는 한국선교연회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한국연회가정식으로 조직되면서 일본연회나 중국연회와 독립된 독자적 연회를 가지게 되었다. 좀 늦게 들어온 남감리교회 에서는 1911년 10월에 와서야 김홍순을 비롯한 세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


* 한국 침례교회의 선교의 시작

한국의 침례교의 역사는 1889년에 한국에 온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펜윅과 더불어 시작된다. 펜윅 선교사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는 침례교란 명칭을 쓰지 않았다.

펜윅은 10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고 황해도 소래에 가서 일하다 1893년에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이때 북침례교의 목사인 고든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고, 그가 경영 하는 선교 학교에 참석한 후 침례교 신앙을 갖게된 것이 이 시기였다.

1894년에 그는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원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원산에서 사역중 자금난으로 돌아가버린 고든 목사의 교회의 집사인 딩을 비롯한 한국의 파송된 선교사들이 자금난으로 1900년이전에 스테드만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교사가 귀국하였다. 1902년에는 스테드만 선교사도 일본에 옮겨 가자 그들의 에라딩 선교회를 펜윅에게 이양 하고 말았다. 펜윅은 자신의 선교회와 엘라딩선교회를 병합하자 효과적인 사업을 위한 조직의 필요에 직면했다. 그는 다시 이 조직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고 선교하게 된것이다.

1890년에 한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선교지역을 분할하자, 펜윅 선교사는 기왕에 다른 교단에 손에 미치지 않는 만주,간도,시베리아,몽고지역으로 설정하고 그지역에 산제한 한국동포에게 주력했다. 그후 미국 침례교 한국선교회는 펜윅과 관계를 맺고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쓰기 시작하였다. 그후에 계속 에버내티 선교사를 필두로 많은 선교사들이 6,25로 전후하여 한국의 선교사역에 힘썼다.

남침례교 한국선교부는 1954년에 공식적으로 조직 되었고 초대 회장은 애버내티 선교사 였으며, 선교사 주재지는 부산, 대전, 서울에 설치 되었다. 선교 사역의 초창기는 피난민 가운데의 전도 사역과 난민 구호사역이었으며, 그들의 조직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자 복음전도와 신학교 사업 및 의료 사역에 국한하여 사역하였다.


*. 본 론

1. 세 교단의 활동

* 장로 교회의 활동
한국의 장로교회는 1907년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 하고 그해 9월 17일 36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여 한국 장로교 첫 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명에게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이로써 한국 장로 교회는 자체 치리 조직이 구형되었고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한국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는 쾌거를 이룩 한 것이다.

그리고 1907년의 한국교회에 몰아닥친 대 부흥운동은 장로교회가 그 중심체가 되었고 그 신앙의 구형과 교세성장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일제의 국권찬탈이 눈앞에 놓인 절망의 시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국 애국교회는 심오한 기독교적 섭리에 인도되어 불붙은 내면 신앙으로 현실적 절망을 극복하고 있었다.

사회적 관심과 현실적 기복,국가적 안위에 목표를 둔듯한 교회신앙의 생리가 개인의 죄를 절실히 통회하고 영혼의 구원에 이르며 나아가 하나님의 심묘한 섭리가 박동 치는 역사에의 개안을 맞으면서 뜨거운 부흥신앙으로 줄달음쳤다.

평양의 장대현교회와 한국인 길선주목사는 이 부흥의 한 핵이 되었고 평양을 진원지로 전국의 장로 교회로 나아가 여타의 개신 교파에까지 섬광처럼 번져 나갔다. 교회의 현실적 무력감에 발을 돌리던 민중 들이 되돌아 오고 신앙의 열정에 목마른 많은 한국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장로교회의 교세는 크게 성장되었고 특히 서북지역의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경의적인 일대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중심교파인 장로교회가 현실적으로 비민족파의 궤도로 돌아서며 현실도피적인 종교적 침잠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비판도 일었다. 그러나 전 민족과 교회의 봉기로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1919년 3월 1일 운동에 이르러서는 장로교회의 혁혁한 공헌이 가늠되고 있다. 그 지도자와 민중적 통로로서, 확고한 이념의 제공처로서 교회의 역활은 이루 다 형언키 어려우며 이에 따른 일제의 보복과 억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수많은 교회당이 초토화되고 무죄한 교인들이 학살되었으며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연행, 투옥, 고문당하는 격동을 치렀다. 1920년대에 접어든 한국 장로교회는 그 성숙의 모습은 드러내었으나 이미 역동의 기능이 현저히 줄었고 급변하는 사회적 변화에 어두었으며 일제의 가공할 경제적 탄압에 기인한 곤궁, 유물사관에 입각한 사회주의의 도전등으로 하나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총회 조직 이전 부터 왕성히 추진 되어 왔던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 활동 등은 계속 추진 되었고, 사회적 변화에 적응 하려는 광범위한 모든 노력, 농촌의 황폐와 농민의 좌절을 막아 보려는 농촌운동 등을 펴면서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했다.

한편 장로교회는 점차 장로교 밖에 인물들의 종파운동과 성서 연구의 물결이 장로교회에 큰영향을 미쳤고 장감 연합공의회를 기처로 한 연합운동에 대한 서북계 장로교회의 반발, 적극신앙단문제등 성숙에 따른 여러 부산물적 문제가 끊이지 않았고 그 이후 점차적으로 장로교 내의 신학적 인 갈등이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그러나 장로교회는 새로운 신학 도전에 제압을 가했고 표면적 으로는 보수주의 신학을 고수 하고 있다.


* 감리 교회의 활동

감리 교회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기구와 활동 분야가 확대되고 교회조직도 전국적인 것이 됨으로 민족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다.

특히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지한 독립협회가 강재로 해산되고 이승만, 이상재, 정 교 등이 조직한 협회간부들이 투옥되었을때 이들 양반출신 독립지사들이 감옥에서 대거 그 리스도교로 개종 하였다. 이들은 출감한후에도 계속 교회내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교회는 당시 애국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중에서도 서울의 상동 교회가 가장 대표적인 교회이었다.

이 교회의 전 덕기 목사는 소년 시절에 스크렌톤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로 입교한 이후로 목회와 애국독립운동을 하나로 결합시키면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상동교회를 중심한 민족독립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여 나갔다.따라서 그의 주위에는 이필주,최성모 목사를 비롯한 김구, 이준, 이갑,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이희영, 이승훈 등이 모여들어 활발한 독립운동을 펴나감으로 상동교회는 한국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전덕기가 상동교회내에 세운 상동청년학원에서 주시경 최남선이 주동한 한글운동과 국사운동은 감리교회의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전개의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이후에도 감리교회는 어려웠던 시대의 정신적인 모체이며, 애국하고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큰 역활을 하였다. 한국 민족에게는 교회는 국가적 위기를 당할때에 자기 민족을 저버리지 않는 애국애족의 집단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므로 불신사회의 존경을 받아왔고 교회의 권위가 크게 신장되어 교세도 상승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민족운동은 이교회의 심오한 영적체험신앙 및 감리교회의 독특한 심령 부흥 운동과 평행하면서 진행된 사실은 주목 할만 하다. 이러한 감리 교회의 성격은 3.1운동과 6.25사변을 겪는 우리민족 가운데 같은 공감대를 형성 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도 3.1운동이후 사회주의사상이 침투되면서 당시의 세속적인 유물론적 풍토와 합세하여 교회의 큰 위험세력으로 나타 나게 되는 갈등을 안겨 주었다.

더우기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가중된 압박은 위에 언급한 사상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의 성장과 민족운동을 질식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공동적을 앞에 두고 더 효과적인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같은 웨슬레의 후예인 남북감리교회가 한국에서 언제 까지나 갈라 져서 선교할 타당성을 y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감리교회가 갈라져서 처음부터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는 합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 지상명령을 받아 들여 졌다. 더우기 1907년 부터 두 감리 교회가 합동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경영한 이후부터 협력의 기운이 더욱 촉진 되었다.

계속하여 두 교회는 합동 계획을 연구하며 일하다가 미국의 두교회가 한국에서의 합동을 서로 승인하고 합동 전권 위원까지 5명 씩 선출 하였다.1930년 12월2일에 서대문의 냉천동의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1백 명의 두교회 대표들이 모여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 감리 교회의 창립총회를 열고 최초로 한국인감독을 선출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리사로 불리우는 이감독의 자리에는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제부터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하나의 감리교회가 탄생되었고 이렇게 단결된 후에는 국내선교 는 물론이고 만주선교연회까지 조직하여 만주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위한 선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게 되는 감리교회의 새로운 선교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 침례교회의 활동

침례교회는 펜휙이 조직한 대한기독교회는 1890년 기존의 장.감의 교단의 선교지역이 아닌 만주,간도시베리아, 몽고 지역에서의 개척 선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실로 불멸의 큰 업적 이었다. 이 당시 개척순회선교사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이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그들은 펜윅으로부터 한짐의 복음 책자를 공급받아서 이것을 판매한 돈으로 선교비에 충당하면서 개척선교의 고난을 이겨나갔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선교활동의 결과로 국내에 약100여개의 교회, 만주.간도 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40여개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를 설립하는 교세확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는데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던 대한기독교회는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32명의 교단의 지도자가 투옥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압제에 굴복하지 않자 1944년에는 강압적으로 교단 해제 명령을 내리고 교회건물을 철폐 시키며 재산을 압류하여 국방 헌금으로 강제 헌납 시키고 말았다.

1945년 조국광복은 한민족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계에 새로운 삶의 소망과 빛을 주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으로 본 교단의 근거지 였던 이북 지역의 모든 교회를 일시에 상실하고 말았다. 남한에 남은 교단 지도자들은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갖고 충남 강경의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1950년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로 에버내티 박사 부처가 파송됨으로 한국 침례회 선교사업의 서막이 열었다.

그러나 6.25 사변은 침례교회를 큰혼란을 빠뜨리게 하였고 6.25사변중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화로 고통받는 한국민의 구호사업에 치중하면서 선교의 막을 열었다.

아직도 남 침례교 회의 신앙원리와 신앙 행습에 생소한 한국에 구호사업으로 시작된 선교사업은 그 이후에 배태하게 된 여러가지 비 침례교적 신앙의 씨앗을 처음부터 뿌려가고 있었다. 구호물자로 교인을 모으며 선교 보조금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목회자의 사례금이 지급되었을때 침례교인의 숫자와 교회는 놀랍도록 자라났다.

그러나 질 적향상을 병행하지 못한 단순한 양적 발전은 신앙 행습과 원리면에 있어서 침례 교정체를 위협하는 숫자 결과를 빚었을뿐 아니라 이 시기에 타 교단에서 유입된 교역자들의 비 침례교적인 교회의 행습은 그 이후 침례교 신앙 정립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2. 교단들의 분열

* 장로교회의 분열


장로 교회의 분열은 가장 큰 교단으로 큰 교단인 만큼 많은 분열의 아픔이 있었다. 분열의 큰 원인 들을 살펴 보면 첫째로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으며, 둘째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대두로 인한 분열과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큰 사건으로 나눌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때 한국 교회는 해방 이전의 교회가 내포 했던 문제들을 극복하면서 부흥 재건 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하나는 주체성을 상실하고 교회 로서의 정체를 상실 하였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본래의 한국 교회의 모습으로 재건하는 일 이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정통이 일제하의 강요에 따라서 신사 참배나 일본 기독교조선교단으로서의 통합 때문에 패멸되었다고 보고, 그 이전의 순수 정통에로 회기한다는 운동이었다.

그 이후 소위 고신파의 분립이 1950 년 4월에 표면화되기 시작하였고 이 즈음에 조신파 (현재의 기독교장로회) 역시 신학적 사상에 대한 성서의 소위 고등비평과 역사적 비판등을 이유로 예장과 분립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조신파의 방법론들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 일색으로 목회자양성을 실시해온 장로교에 충격을 주었다. 김재준 목사와 박형용목사 두 거목의 사상은 대립하게 되었고 박목사는 김교수가 한국교회를 능욕한다고 까지 힐책 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장로교회는 총회에서 새로운 장로회 신학교를 개교하고 기존의 조선신학교와(한국신학대학) 두개의 신학적 대립의 신학교가 탄생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장총회는 `대한민국에는 예장 총회는 하나 밖에 없다`고 성명서를 제출하게 되었고 조선신학교 측은 새로운 대한기독교장로회 라는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다.(1954) 그 이후 기장은 1957년 10월에 한국기독교교회연합회(NCC)에 가입하였고 같은해 한국 세계기독교봉사회에 가입하였으며,1959년에는 동남아시아 기독교협의회(EACC,CCA의 전신)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하여 교단으로써 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독립된 교회의 기구로서의 출발을 다짐하였다.

그런데 1959년 예장은 다시 합동파와 통합파로 분립하게 되었다. 합동파에서는 1960년 12월 비상 사태속에서 고신파와 합동해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 총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NAE계의 목사들은WCC가 용공적이라고 공격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보존을 위해 WCC 에서 탈퇴할 것을 그동안주장해 왔다.

그런데 1959년 대전총회에서 경기노회의 총대 명단의 조작성 여부의 문제로 양쪽의 주장이 충돌하여 마침내 분립까지 치닫게 되었던것이다.

통합파는 곧 서울 연동 교회에서 속회를 가지고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WCC에서의 잠정적 탈퇴를 하면서 합동파와의 재결합을 모색 한다고 하였으나 그것이 그 시기에 제출된 제안은 아니었다.

반대로 합동파 에서는 서울 승동 교회에서 속회하여 당장 WCC에서 영구 탈퇴하고 어떠한 형태의 에큐메니칼 운동도 반대하며, 한국NCC와도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언 하였던것이다.

그런데 합동파의 역사도 그이후 기복이 많았다. 1962년에는 ICCC탈퇴 문제로 박병훈계가 호헌파로 분열되고 1963년 9월 고려파가 옛 고려파 총회로 그산하 노회들이 환원 되었다.

그리고 같은해에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하였다가 1972년 9원 57회 총회에서 이곳으로 부터 탈퇴를 결의하였다. 합동파 교회가 다시 사당동파 와 방배동파로 다시 분열된 것은 1979년 9월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파들의 분립과 조직 과정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계보상 뚜렷한 파생 경로 없이 단독 생성된 장로교 교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 감리 교회의 분열

감리 교회는 일제시대를 겨우 면하게 되는 기쁨을 잠시 느끼고 공산주의자들의 북의 점령으로로 북한의 감리교회 지도자와 교인들이 대거 남으로 피하여 남 에서 감리교회의 재건에 힘썼다. 한편 남한에의 감리교회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일제 말기의 교회 탄압의 후유증은 해방된 조국의 교회에 그대로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일제 말기의 교권을 장악한 측은 그때의 교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나가려고 하였고 이에 반하여 탄압을 받고 투옥되었거나 교직에서 물러난 측은 다시 옛날의 감리 교회의 체재와 조직으로 돌아가서 감리 교회를 재건하자 며 1946년 1월에 동대문교회에서 모여서 감리교 재건측의 연합연회를 가졌다.

이에 맞서 같은해 9월에는 감리교 부흥측은 특별총회를 소집하여 감독까지 선출 하였다. 이렇게 되니 재건측도 이듬해 1월에 총회를 열어 감독을 선출하니 두 명의 감독이 생긴것이다. 한국 감리 교회의 최초의 분열이었다. 하지만 그 분열은 오래 가지 않았으며 뜻있는 목사들에 의해 1949년 4월에 합동 총회로 통합 된 감리교회의 감독을 선출함으로 통합되었다.

하지만 6.25로 인해 감리교회는 다시한번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감리교회는 피난처인 부산에서 복구 사업에 힘쓰며 재건을 서둘렀다. 부산에서 1951년 다시 총회 열어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미국 감리교회와의 협조를 취하며 잿더미 상태인 감리교회의 재건과 복구에 힘썼다.

그리고 1954년 3월 대전총회에서 유감독을 재선시키고 개정 전의 헌법에는 감독의 자격은 연회 정회원으로 6년 계속 시무해야 하는데 유감독이 일제 말기에 친미분자로 몰리어 투옥되고 파면당하여서 6년 연속 시무 조항에 저촉된것이다. 이것이 문제되어 이듬해 제 2의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유감독이 은퇴하면서 분열된 감리 교단은 다시 합동을 호소하였고 드디어 호헌측과 합동이 그해 총회에서 이뤄짐 으로써 3년만에 감리교의 분열은 끝을 맺게 되어 다른 교단의 좋은 본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4.19가 1960년에 일어나면서 소장파 목사들에 의한 교회혁신을 부르짖게되며 교단내의 갈등은 심화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1967년에는 감독선출에 135회의 투표끝에 감독이 선출되는등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70년 10월의 11회 총회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1차 투표에 감독을 선출함으로써 단함된힘을 과시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인사들에 의해 감리교회는 제4의분열을 초래 하고 말았다. 이 분열도 4년후인 1978년 10월 13차 총회에서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감리교 분열은 다른 교파와는 달리 4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는 전통을 고수하였다.


* 침례교회의 분열

1960 년대의 한국 침례 교단은 발전을 위한 여러가지 시련을 거쳐야 했다. 한국 지도자들간의 불목이 정치적으로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고 한국 총회와 선교회 간의 협동 문제가 마침내 결여 되자 총회는 안타깝게도 두개로 분열 되고 말았다.

1959년 3월 17일에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실행 위원회는 총회 장소 결정을 둘러싸고 양분 되었으며 3월18일의 한미 연석 회의에서는 선교부측에서 총회의 전도부장을 불신임 결의함으로써 총회와 선교부간의 대립이 격화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두개의 분열 총회가 충남 대전과 경북 포항에서 각각 개최 되었다. 1959년 4월 28일 대전 대흥 교회 에서 개최된 이 른바 대전 총회는 선교부의 지원을 받는 장일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지도자와 타 교단 에서 들어온 전입 교역자들이 주측을 이루고 있었다.

1959년 5월25일 경북 포항 교회에서 개최된 포항 총회에서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온 교단의 지도자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 지도자들은 대개가 남침례회와 교단이 제휴 되기 전에 펜윅 선교사 밑에서 훈련을 받고 자라온 동아 기독교의 교역자들로서 교단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선교부와는 흔히 대립적입장을 가졌었다.

결국 선교부가 대전 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총회와 협동하게 되자 포항총회 측은 대전 총회와 선교부의 주동 인물을 불신임 결의함으로 교단은 두개로 분열되고 말았다. 향후 9년간은 교단 분열은 한국침례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한국침례교가 침례교가 침례교 본연의 신앙 원리와 이 상에 투철한 교회 발전과 신앙정신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역사의 한 변천 과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열 이후 대전 총회는 선교부 주도로 미 국 남침례교총회를 모본으로한 여러기관을 조직하고 그 기관들을 통하여 교단 사업을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분열 이후 선교부의 재정 지원이 중단된 포항 총 회는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초 교단적인 선교 단체들로 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된 포항 총회는 침례교의 정체를 간직하며 침례교의 신앙 정신과 원 리에 입각한 교회로 발전해 나가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교단 분열은 양 총회에 서로의 반성과 자구책을 마련하고 자립 정신을 함양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1960년대부터 성령의 은사 운동이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영적으로나 재정적 으로나 활기를 띠게 하였다. 60년대의 영적 부흥은 온 교회의 영적 각성과 형제간의 이해와 사랑을 알게 하였고 교단 통합의 불씨가 되었다. 1968년 4월16일 한국침례회는 포항총회측과 대전총회측의 합동총회로 9년간 갈 라졌었던 교단이 통합되었다.

갈라졌던 양측의 교역자들이 악수를 나누면서 김용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 하였다. 이날은 침례회의 역사적인 날이며 한 세 대가 물러가면서 세대 교체의 전환을 맞이한 화합의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이 후 침례 교단은 교단안에 신학대학에서 배출된 젊은 사역자들을 배출하였고 침례회의 신앙원리와 정신으로 한국에서의 복음 사역에 전력을 다하게 되었다.


*. 결 론


위와 같이 세 교단의 선교 과정과 분열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 한국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역사였으며, 수 많은 과정속에서 아픔 또한 크다고 생각한다. 성격이 다른 세 교단의 역사 속에서 한국 교인들은 민족의 수난들로 인하여 너무나 많은 시련을 안게 되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 속에서 교단들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마음이 자리잡게 되고, 민족의 울분과 불만들이 해방후 한국 교회의 분열된 모습으로 표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어째든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에 비하여 놀라운 성장과 많은 사연들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분열은 우리에게 진정한 교훈과 역사 의 증거로 남게 되었으며 오히려 분열로 한국교회는 큰 부흥을 이루어 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로교단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만큼 분열이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1980년대 탁명환 교수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49개교단의 장로교가 나누어져 있으며 현재는 거의 60여개의 분열되어 있다고 한다. 교단 만큼 신학교가 있고 서로 상반된 사상들이 신앙인들로 하여금 혼란케 하는 분열의 모습은 그리 좋은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침례회의 분열속에서 통합을 이뤄가는 모습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용기를 알게 했음을 높이 평가한다. 얼마전 하나님의 성회도 통합을 하게 되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것은 그 통합 속에서 진정 한 의미의 통합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감리 교회는 통합후 다시 분열 하는 사건들을 여러번 겪지 않았는가 통합은 되었으나 여전히 내적 갈등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통합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하나님의 성회는 분열된 교회가 남아있으며 함께 통합 된다는것이 얼마나 힘들다는것을 알게 해 준다. 하지만 지금 우리 교단의 통합은 화합의 시작 단계라 생각하며 우리가 진정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국교회의 사명들을 실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주님의 계획안에서 속히 이뤄지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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