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강의노트 (박용규 교수)
글쓴이: 비율빈-필그림 http://cafe.daum.net/chongshin39/4IKG/14
한국교회사 강의노트 (박용규 교수) 본 자료는 2007년 2학기 한국교회사(박용규 교수) 강의를 적은 필기노트입니다. 본 강의안의 지적 재산권은 박용규 교수님께 귀속되어 있으며, 문서에 첨부된 각종 사진자료는 인터넷, 직접촬영 등의 방법으로 첨부된 것입니다. 본 자료는 신대원 내에서 연구를 위한 자료로만 유통․사용될 수 있으며, 이 한도 내에서의 자유로운 배포와 복사를 허락하나, 내용의 위․변조는 금합니다(역사적 사실이기에 위․변조 자체가 불가능). 강의 내용은 대부분 “한국 기독교회사 Ⅰ․Ⅱ(박용규 저, 생명의 말씀사 刊)”에 들어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주교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교과설명 : 1784년, 이승훈이 영세를 받으면서 한국 천주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는데, 한국 교회사를 천주교 역사와 포함하여 논할 때, 한국교회사를 총체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정확하게 100년 늦는다(1884). 개신교 선교는 토마스 알렌이 입국하면서 시작되었다.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다 하더라도 1884년부터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사를 살핀다는 뜻이다. 2. 교과목적 ㄱ. 우리가 초대교회사를 공부한 때처럼 시대적인 배경은 무시할 수 없다. 지리적 위치에 따라 신학의 컬러가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 기독교라는 시대적 배경, 사건, 특징적인 인물들을 공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ㄴ. 역사는 “관점”이라는 것이 있기에 그것에 따른 해석의 차이가 정말 중요하다. 한 사건을 두고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역사가 보이게 된다. ㄷ. 이 부분은 그 동안 교수님께서 오랜 시간동안 강의를 하지 않으셨던 부분이다. 1884년 이전의 역사가 과연 우리 기독교와 무관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ㄹ. 정체성과 역사의 문제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의 뿌리를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종교개혁을 대단하게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역사를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역사 사대주의가 생각보다 크다. 이번 강의를 통해 바른 역사인식을 가졌으면 한다. ㅁ. 흥미롭게도, 한국의 교회사는 현대교회사의 한 파트이다. 카톨릭(1784)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말이다. 개신교를 기준으로 한다면 더욱 한국 교회사는 현대교회사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세계 교회사에 대한 이해 없이 한국 교회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세계교회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교회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3. 교재 ⑴주교재는 한국기독교회사 Ⅰ, Ⅱ권이다. 3권이 나오지 않도록 기도할 것^^; ⑵참고도서는 다섯 권만 소개한다. ①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②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 기독교출판사, 1988 ③한국기독교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Ⅱ, 서울 : 교문사, 1988 ④김영재, 한국교회사, 서울 : 이레서원, 2004 4. 성적평가 : 출석, 과제물, 기말고사 세 파트로 평가함. ①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할 것. 두 명 정도 리서치를 하는데, 신앙배경, 선교 진행, 업적 등을 조사한다. 우선 장로교회 선교사들 중심으로 진행한다. ②번역 과제는 History of Korean Mission이라는 책으로 한다. 아주 좋은 책이다. ③강의의 흐름이 빠르기 때문에 교재를 읽고 올 수 있도록 한다. A4 한 페이지로 교재를 읽고 간단히 Summary한다(www.1907revival.com 참고할 것). ◎2007년 9월 4일 강의 1강. 서양 문화와의 접촉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떠나 한국인으로 한 가지 큰 소원이 있었는데, 이는 기독교 전래 이전의 한국 역사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였다. 도대체 서양과의 첫 접촉, 다른 문화권과의 첫 만남은 어떠했는가이다. 이번 시간은 이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언제부터 동양에 복음이 전해졌는가는 동양의 한 나라인 한국을 무시할 수 없기에, 언제부터 동양에 복음이 전해졌는가를 살펴본다면 예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자들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서 침묵하고 있기에 알 수 없지만, 유대에 복음이 전해지는 기록이 일단 성경에 나타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4세기의 유세비우스의 기록이다. 그의 교회사 3권에 이런 기록이 있다. “인도에 와서 토마스가 복음을 전했다”라는 기록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는 “인도”라는 명칭을 쓰지는 않았다. Partia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 나라는 어디인가? 뒤져보면 오늘의 인도에 해당한다고 본다 한다. 4세기의 교회사가라고 한다면, 그리고 유세비유스의 기록을 빌린다면, “만일 유세비우스의 기록이 없다면 교회사 문헌의 절반이 사라졌을 것이다(곤잘레스)”라는 사람이니, 이를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설에 의하면, 바돌로매는 중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도마는 인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한다. 실제로 인도에는 성 도마 교회가 존재한다. 이 ‘설’을 인도교회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선교자인 Samuel A. Mofett의 아들인 H. Mofett은 동방교회사를 전공했다. 그는 동양의 복음전래 중에서 인도의 복음전래에 대해서 논문을 썼는데, 이 부분(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에 있어서는 단정지을 수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 네스토리우스 기독교[景敎] 전래 그렇다면, 기록적으로 정확히 언제인가? 이를 추적해보면 “경교” 전래와 맞물려 있다. 중국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네스토리우스의 정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정죄를 받을 당시에 라이벌은 시릴인데, 431년, 그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이후 그는 선교의 방향을 동양으로 틀게 된다. 그의 추종자들은 페르시아, 중국쪽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동방에 복음이 전래되기 시작했다. 경교(景敎)가 전래되던 당시 중국의 지배자는 당 태종이었는데,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를 수용한 것일까? 당시 중국 최고의 이슈는 아랍권의 진출이었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없었고, 중국은 페르시아를 통하여 이들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경교 사절단을 대환영하고 합법적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복음이 전해진 후 2세기 반만에 중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당 태종과는 달리 그의 후예가 도교에 심취되었던 사람이었기에 도교의 포교에 지장이 있다하여 박해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이상하다. 아무리 그렇다고 경교가 사라져? 다시 조사해보니 경교의 토착화 방법이 중요한 쇠퇴원인이었다. 도교는 당시 토착화 전략을 사용했다. 교회라는 이름 대신 ‘寺’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상 대신 부처와 비슷한 상을, 그리고 교회 종 대신 목탁을, 목사나 신부 대신 승려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러다보니 토착화가 되기는커녕 복음의 토착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불교권에 효과적인 전도를 하기 위해 토착화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경교가 토착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여기서 질문 하나가 생긴다. 그렇다면 통일 신라에 복음이 들어왔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단 중국에서 발견된 “대진국경교중국유행비”라는 경교 자체의 비석을 보면 그들의 신학이 잘 드러난다. 현재 신라시대에 경교가 들어왔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세 사람이 있다. 고든 여사, 오윤태, 김양선. 고든 여사는 중국의 사적과 한국의 것을 살핀 후, 이 모든 것이 경교의 영향이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이 주장을 오윤태, 김양선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김양선 목사가 이를 강하게 확신하는 이유는 “돌 십자가” 때문이다. 불국사 근처에서 돌 십자가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돌 십자가는 현재 숭실대 기독교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는 가장 강력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금강산에 있는 절 근처에서 경교비가 발견되었다는 것. 그러나 서양 학자들은 의문을 제시한다. 만일 당 시대에 유행하던 것들이 다 신라에 유입되었다면 한국쪽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현재 한국쪽 기록은 전혀 없다. 이 십자가에 대한 연구를 선교사 H. H. 언더우드가 했는데, 경교 십자가는 정방형이 아닌 장방형이라고 한다. 또한 경교비 관련 문제도 터졌고(교재 참고), 불상의 모습에 대한 부분 역시 설득력이 없다. 이런 점에 비추어 민경배 교수는 “낭만적인 가설”이라고 일축한다. 이를 아니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국내에 전혀 단서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어쩔 수 없이 “낭만적인 가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후에 문화적인 접촉이 언제 이루어졌을까? 대부분 13세기로 보고 있는데, “한국, 은둔의 나라”라는 책을 보니까 이런 기록이 있다. “쿠르드 지바”라는 9세기 아랍 학자의 기록에 이미 신라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한다. 당시 한국에 대해 언급한 자료를 보니까 아주 설득력 있고 정확했다고 한다. 이 기록 자체는 없어졌으나 자료를 통한 역추적이 가능하다. 당시 기록에 볼 때 “금이 풍부하다”라는 기록을 보아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그가 어떻게 이를 알아차렸을까? 당시 활발하게 오고가던 무역로인 “실크 로드”를 통해서 자료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쿠르드 지바는 우편 배달부였는데, 그 당시 세계 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우편 배달부였다. 그러니 정확하게 정보를 읽어올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임진왜란 전후의 복음접촉 이 외에 제대로 접촉한 첫 사건은 임진왜란으로 볼 수 있다. 일본군은 20만이라는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조총을 사용했던 그들이 이런 신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문화를 접했기 때문이었다. 1598년, 인도에서 활동하던 사비에르(Xavier)를 기억하는가? 그가 아시아 선교를 하면서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가 어떤 소식을 듣게 된다. 일본에 관한 소식이었다. 그가 일본에 관한 소식을 듣고 나서 보고를 남겼다 한다. 이 보고를 올리고 2년 후 일본으로 가서 1,500명이라는 엄청난 신자들을 남겼다. 이후 복음이 엄청나게 확장하게 되었는데, 임란때 쳐들어온 일본군 중에서도 크리스천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일본군은 패하게 되었고(세 가지 이유 : 의병의 활약, 명군의 참전, 이순신의 해상장악), 이들은 웅천에 틀어박혀 저항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톨릭인 고니시는 사기진작을 위하여 군목을 요청하게 된다. 한국에 파송된 군목이 세스페데스 신부인데, 그는 일본군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고니시의 라이벌인 가토 기요마사의 견제로 인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의 기록을 보니, 세스페데스의 한국 체류기간 중 한국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수도 있다는 기록이 있었던 것. 어쨌든 이 사건은 일본이 예수회를 결정적으로 받아들인 사건이 되었고, 한국 포로들이 일본에서 상당수 신자가 되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도록 하라(p.105). 이 세속적인 사건이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는 전형적인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 임진왜란 이후의 복음접촉 임진왜란 이후에 서양문화와의 접촉을 꼽으라면 1627년을 꼽을 수 있다. 화란은 당시 해상 강대국이었고,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다. 그러던 중, 1627년에 화란 상선 한 척이 일본을 향해서 가다가 배가 표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정을 타고 경주 근처(라고 기록에 나옴)에 와서 물을 구하려고 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세 사람이 나왔었는데, 그중 하나가 “벨테브레(박연)”이다. 이들은 자기를 화형시키려고 하는 줄 알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고 하는데, 알고보니 추우니 불쬐라는 거라나 뭐라나… 어쨌든 이들은 훈련도감에 편입되었다. 당시 최고의 기술자들이 바로 선박 기술자였는데, 이들은 호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벨테브레는 조선 여인과 결혼을 허락받고 1남 1녀를 두게 된다. 그러다 제주도에 36명이 표류했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그가 내려가서 통역을 하게 되었다. 이들이 바로 하멜 일행이었는데, 그의 표류기에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어떻게 30세에 표류되었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모국어를 잊을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한 달 후에 그가 모국어(화란어)를 회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좀 달랐다. 도망갈 궁리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조정으로 이들을 둘로 나누어 여수로 귀양을 보냈는데, 하멜은 결국 일본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나가사키에 갔던 그는 화란으로 돌아간 후, “하멜 표류기”를 썼다. 거기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하멜 표류기는 신앙 고백서와도 같은 기록이었다. 그는 조선에 머물던 기간동안 모든 기록을 샅샅이 기록했는데, 당시 정치․문화 등을 상세하게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이 표류기는 한국교회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표류기는 화란어로, 그리고 영어와 독일어로 발간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조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급기야 1819년(정확하진 않음)에 바실 홀이 한국 해안을 탐사하러 온 것이다. 어쨌든 한 학자도 그의 글을 해석하길, 그의 표류 사건은 복음 전파와 맞물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본래 바실 홀의 배는 중국으로 오려고 했으나, 당시 중국 황제가 쇄국정책을 폈기에 입국하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서해안(우리나라 기준으로)을 탐사하다 기가 막힌 곳을 발견한 것이다. 그게 조선이다.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았는데, 이는 교재에 자세히 잘 나타나 있다(p.148). 어쨌든 이들 일행의 탐사결과가 매우 정확했는데, 이들이 측량한 마량진과 비인만 근처 해도는 대단히 정확해서 16년 뒤, 칼 귀츨라프가 한국 입국을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귀츨라프는 고대도에 정박한 후 통상을 원한다는 뜻으로 조정에 선물을 보냈고, 이를 기다리던 한 달 동안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고, 이 기간에 주기도문도 번역을 했을 뿐 아니라 감자도 재배하게 했고, 포도 재배법을 가르쳐 줬다고 한다. 결국 지방관리는 조대복의 파직을 보면서 두려워하여 진상품을 한양에 올리지 않았고, 결국 귀츨라프 일행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의 모습에 걸맞은 기록을 남겼다. 귀츨라프는 얼마 후에 태국(시암)으로 와서 시암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다시 일본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중국으로 왔는데, 이 때 탐사가 풍랑으로 잠시 지체되어 정박했을 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서 한국인에게 번역을 부탁했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최소 7개국어에 능통했던 사람이었고, 엄청난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일기를 영국의 몇 개 대학으로 보냈고, 이 일기가 한 청년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가 바로 로버트 토마스 목사이다. ― 정리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매우 섬세하게 복음이 들어올 준비를 하셨고, 이를 통하여 역사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첫 강의를 통하여 우리는 10세기 이상을 꿰뚫어본 셈이다. ◎2007년 9월 11일 강의 2강. 한국 선교의 준비( ~1884) 1866년, 제네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소실된 후, 미국에서는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을 추적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다. 수많은 노력들 속에서 국내에서는 개항을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먼저 세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는데, 개항 절대반대의 위정척사파, 중국식 개항을 지지하는 동도서기파, 완전 개항을 주장하는 개화파. 그 사이 중국에서 복음 전파의 준비, 일본에서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은 이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국내에서의 복음 준비는 앞서 세 그룹이 그 역할을 감당했고, 그 중 개화파의 역할이 지대했다. ①위정척사파 위정척사파에서는 개항을 절대 반대했다. 동양의 전통이 서구의 문화나 문물보다 결코 낮지 않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전통, 동양의 전통을 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서구의 문화나 종교까지도 배척한다. 그래서 서구의 종교는 “오랑캐의 종교”라고 했다. 대신 이들은 대안으로 유교를 제시했다. 이들은 유교를 正學이라고 했다. 이들은 민족적 지지를 받았고, 그래서 이 시기에 대원군이 득세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이 바로 “영남 만인소”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책략’을 읽은 왕이 그 책에 감동을 받게 된다. 그러나 위정척사파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왕은 이 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대신들과 유생들에게 돌렸고, 유생들은 이에 반발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복음 전파에 그렇게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②동도서기파 동양의 문물은 견지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중국이 잘사는 것은 중국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친청파의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주장은 조금 입김이 셌다. 실제로 인원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우리와 맞지 않았다. 사해주의(중국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원래 맞지 않는다. 등소평의 정책은 상당히 모순된 정책이다. 그러나 이게 가능한 것이 중국이다. 당시 황성신보에는 “서양의 기술과 문명을 받아들인다 하면서 서양 기술과 문명의 뿌리인 종교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글이 실렸다 한다. 뭐 어쨌든… ③개화파 이들은 일본의 모델을 따르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주목했고, 이러한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사실 이들은 개화를 주장했지만 친일파이다. 이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결국 실패했고, 퇴각하는 일본군을 따라 김옥균과 서재필이 동행해서 일본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일본에서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고, 고종에게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나라가 부강해집니다”라는 내용을 고하였다.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 주재한 선교사들과 접촉해서 이들이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많이 열어주었다. 김옥균은 생전에 불교신자였지만,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사역할 수 있는 문을 많이 열어주었다.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은 기독교라고 외친 것이다. ― 중국에서의 복음 전파 중국은 특별히 스코틀랜드 출신들이 만주에서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중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있었다. 로스의 아내는 불행하게도 출산도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본국 선교본부와 부모님들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고, 그의 동생 캐더린 로스(참고로 처녀였음)는 선교지로 달려와 태어난 지 3일 된 아이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결국 맥킨타이어는 그런 그녀(캐더린 로스)를 보고 청혼하여 부부가 되었고, 이들은 한국 선교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당시 그(존 로스)의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만주의 고려문으로 갔는데, 이 때는 헛걸음을 했다. 그 이후 한약재 중개상인인 이응찬을 만났다. 당시 그(이응찬)는 난파되어 한약재를 다 잃었는데, 이 때 존 로스는 그에게 “내 어학선생을 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을 했다. 1년간 신실하게 어학선생 역할을 해준 이응찬은 로스를 신뢰하고 고려문으로 가서 김성하, 김진기, 백홍준 세 사람을 데리고 와서 한문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 번역을 한다니!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 네 사람들은 회심하여 세례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고, 여기에 서상륜이 합세하면서 진척이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결국 1887년, 신약성경이 완역되었다(예수셩교젼셔; 예수聖敎全書). 이 성경에서 최초로 GOD을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게 되었다. 본래 1906년 나온 성경은 “천주”와 “하나님”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언더우드는 “천주”를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통일하게 되었는데, 이는 로스의 책을 좀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쓴 The Origin of Chinese People이라는 책을 보면 중국인들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한국인에 대한 문화, 풍습, 언어 등에 대한 이해가 담긴 책을 이미 1870년에 집필했는데, 여기서 ‘Hananim’이라는 神의 개념이 있음을 밝혔다. 그러니까 그는 상당히 한국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로스의 번역성경은 한문성경을 번역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맥킨타이어의 선교보고서에 보면 그가 헬라어 성경을 보고 수정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리고 로스의 기록을 볼 때, 이는 비교적 정확한 번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나온 성경을 들고 이들은 북부지역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만주에 복음이 퍼졌고, 이어 북부지역(이북지역)에도 복음이 퍼지게 되었다. 어떤 학자는 한국선교를 존 로스의 사역을 기준으로 연대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의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이북사람들, 특히 의주사람들이 번역한 것이다보니 평안도 사투리가 심하게 묻어 있었고, 이 점은 서울이나 이남에 선교하기 조금 힘든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귀한 것만은 확실하다. ― 일본에서의 복음 전파 일본에서의 복음전파는 이수정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는 ①박영효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입국했다는 설, ②1882년 임오군란때 민비를 구출해준 공으로 입국했다는 설이 두 가지가 있다. 둘 다 맞다고는 한다. 어쨌든…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친구의 말을 듣고 그는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않고 계속 남아있게 되었는데, 栗田박사의 인격에 매료되어 그의 종교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세례문답까지 다 한 후,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일본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 사람 하나가 세례를 받았으니 왜 안 그렇겠는가.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대한 기록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데, 그가 세례를 받고 5월달에 있던 한 모임(체육대회였던 듯)에서 이수정은 대표기도를 했고, 이 곳에 우찌무라 간조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수정의 기도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의 기도는 한국 선교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고, 미국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한 통 써서 보내게 된다. 그의 편지는 당시 저명한 선교잡지에 “리주테이(Rijutei)”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 한 통의 편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모른다. 이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오게 된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이다. 갑신정변 이후 유학생 소환령이 본국에서 내려와 이수정에게도 소환령이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다. 본국에서 이런 소문이 돌았다. 빚을 져서 못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생이 그를 데리고 가기 위하여 돈을 갖고 왔었다. 뭐, 어쨌든 이수정 성경번역이 완간되었을 때, 언더우드가 요코하마에 들렸고, 그에게 한국어를 2개월 정도 배웠는데, 이 후 언더우드는 한국에 입국할 때, 포켓에 조선어 성경을 넣어서 들어오게 된다. 갑신정변 이후 이수정에게 개화파들은 반정부활동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했고, 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게 상처를 입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갔다. 세 가지 설이 있는데, ①부산으로 돌아가자마자 처형당하였다는 설, ②부산에 입국한 이후 비밀리에 보낸 사람에게 처형당했다는 설, ③자객에게 당한 상처로 인하여 죽었다는 설. ― 이수정 배도設에 관하여 백낙준 박사의 학위논문은 정말 탁월한 논문이다. 그러나 그 중 이를 치명적으로 잘못 해석한 부분이 몇 부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수정에 관한 부분이다. “알렌즈 파슨”의 책에서 그는 “이수정이 배교했다”고 했는데, 백낙준 박사는 이를 그대로 수용해서 현재 한국교회에는 이수정이 배교했다는 해석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기록과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정리 한국을 살리는 길이 기독교라고 주장한 김옥균과 서재필, 중국에서 성경번역을 담당했던 이응찬과 그 네 사람, 그리고 이수정. 이들을 들어 쓰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한국 복음전파는 이렇게 준비되었다. ◎2007년 9월 18일 강의 3강. 복음의 수용과 확장(1884~1900) 오늘 강의는 조선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분량이 가장 많다. 이 과정은 모두 세 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사람들에 의한 복음 전파, 선교사들의 입국, 그리고 그들의 선교활동이다. ― 국내에서의 복음의 확장 ①김청성과 집안현 김청성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대단히 흥미롭다.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인쇄기를 도입하여 출간하게 되었는데, 중국인을 식자공으로 쓰려니 의미가 없어서(한글을 모르니까) 그를 식자공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식자공으로 그를 사용하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는 곧 집안현(자기 고향)으로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존 로스에게 세례를 달라고 요청을 했고, 계속 미루다 그가 18xx년에 세례를 주러 가게 되었다. 그 때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 때 세례를 준 사람들이 거의 가장들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기록은 엄청난 사실을 말하는데, 이미 집안현 공동체에서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이 600명 정도 되었고, 학습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까지 기다리면 거의 1,000여명 되는 사람들이 결신하게 된 것이다.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5,000장을 인쇄할 때 5장도 조판하지 못했던 이런 느려터진(?) 인물 한 사람으로 한 마을이 엄청나게 변하게 된 것이었다. ②백홍준에 의한 복음의 확장 그는 이응찬에 의하여 포섭된 사람이었다. 그는 특별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의주(자기 고향)로 쪽복음을 갖고 들어오게 된다. 이성화가 발각된 이후, 그는 성경책을 갖고 들어오는 것에 대하여 특별한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바로 제본된 성경을 전부 새끼줄로 꼬아서 갖고 들어온 것이다. 어쨌든 그가 계속 존 로스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발각, 봉천 감옥에 투옥되고, 2년 후 쓸쓸하게 죽게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한 16명의 신자들이 생기면서 의주 교회가 성립되었다. ③서상륜 그는 홍삼장수였다. 그가 만주에 장사를 하러 갔다 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그래서 입원하게 된 병원이 바로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관할하는 병원이었다. 그들의 정성스런 진료로 질병이 낫게 되고, 곧 서상륜은 존 로스역 성경의 번역에 결정적인 공을 하게 된다. 복음을 알게 되어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성경을 한 보따리 가지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를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과 청의 경계는 간도가 그 중심이었다. 이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어쨌든 청나라의 별정소(국경관리소)에서 쪽복음을 갖고 간 것이 발각되어 조선 별정소에 임시투옥되고, 새벽에 국문을 받게 된다. 그런데, 별정소의 검문관으로 있던 두 사람이 바로 그의 먼 친척이었다. 쪽복음 10권까지 손에 넣은 그는 곧바로 고향으로 달려가 동생인 서경조에게 예수를 전하고, 결신을 하게 된다. 그 서경조는 평양신학교에 진학, 최초의 목회자 7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복음을 계속 전하게 되면서 관가에 이 사실이 알려질 찰나, 이들은 의주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어서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서가 남아나질 않았다. 그는 로스에게 편지를 보냈고, 로스는 쪽복음을 제물포로 6,000권을 보내게 된다. 그 당시 세관 담당자는 독일인인 뮐렌도르프였다. 그는 믿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로스의 편지(이 편지를 조선인 서상륜에게 꼭 전해주시기 바랍니다)를 읽고, 남편을 설득하게 된다. 기록에 보면 서상륜을 밀초(密招 : 은밀히 초청)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쨌든 그는 6,000권의 성경을 받고 서울에, 송천에 엄청나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된다. 수많은 결신자들이 생겼고, 로스는 서상륜의 요청에 의하여 1887년 9월 초에 입국을 했다. 새문안교회 창립예배가 열리는 날, 언더우드와 존 로스가 교회를 방문했고, 존 로스에 의하여 창립멤버 14명 중 13명이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난다. 당시 사건을 기록한 로스의 글을 볼 때, 이미 서울에 300명이 넘는 신자들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전도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 이후, 존 로스는 언더우드에게 모든 한국선교에 대한 자료와 권한을 인계했고, 서상륜은 존 로스에 이어 언더우드의 충실한 조력자가 된다. ― 선교사의 입국과 관련한 큰 두 가지 사건 당시 선교사들이 입국하던 시기에 이를 도왔던 두 가지 큰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조미수호조약과 갑신정변이었다. ①조미수호조약과 보빙사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고, 이는 선교사들의 입국에 도움이 되었다. 조선은 몇 해 전,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는데, 일본의 세력이 너무 거세어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일본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당시 공사로 파견된 이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던 푸트였는데, 조선에 도착한 후 파견할 대사도 정해지지 않았음을 보게 된 그는 고종에게 사절단이라도 보내라고 주청하여 조정은 곧 11명의 사절단을 “보빙사”라는 이름을 붙여 미국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보빙사 11명은 민영익을 필두로 한 것이었는데, 8명은 한국인, 2명은 각기 청과 일본인, 나머지 한 명은 통역이었다. 이렇게 11명이 갓 쓰고 도포차림에 곰방대를 들고 미국으로 간 것이었다. 이들은 문화적 충격을 엄청나게 받았다. 전원 수구파였던 이들은 미국에 사절단으로 다녀온 이후 받은 충격에 의하여 전부 개화파로 전향(?)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기차 속에서 이들은 바우처를 만나게 되었다. 바우처는 이들(보빙사)을 만난 후,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불태우게 되었다. 본부 감리교회에 편지를 보냈으나 시기상조라고 했고, 이를 거절당하자 일본에 있던 친구인 맥클레인 목사를 통해 조선으로 가게 되었다. 고종을 알현한 이후, 그는 몇 가지 준비를 하며 선교의 길을 닦게 된다. 장로교회에서도 두 사람에 의하여 준비가 되었다. 조지 낙스와 길버트 리드가 그들인데, 1884년 1월, 조지 낙스가, 4월달에 길버트 리드가 본부에 편지를 보내어 한국 선교를 촉구했고, 맥 윌리엄스가 한국 선교를 위하여 5,000달러를 헌금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5,000달러나 받았는데 선교를 주저할 이유가 있을까? 인도에서 선교하려던 알렌 선교사가 한국으로 파송해 달라는 편지를 본부에 보냈고, 본부는 그에게 “Allen, Korea”라는 전보를 보낸다. 그는 곧 어학선생을 데리고 와서 공부하기 시작했고, 어학선생은 그가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며 궁금증을 갖게 된다. 곧 그(어학선생 노춘경)는 알렌의 집에서 성경 두 권을 훔쳐서 밤새 집에서 성경을 읽었고, 결국 그는 알렌에게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한다. 알렌은 당황하여 언더우드에게 보내서 그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도록 한다. 이 “노 도사”는 이후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②갑신정변 개화파는 나라를 위한다는 목적 하에 우정국 낙성식에 불을 지르는 것을 필두로 거사를 치르기로 한다. 당시 조선의 규정에서는 변고가 생길 경우, 대궐로 가도록 하였는데, 이들은 그 길목에 자객을 풀어놓았던 것이다. 민영익은 칼에 난자를 당한다. 이를 뭴렌도르프가 발견, 알렌의 집으로 인도하게 된다. 알렌은 혼란스러웠다. 그를 죽여야 하는가, 살려야 하는가. 결국 밤새 간절히 기도하던 알렌은 그를 치료하기로 결정하고 칼에 맞은 상처를 명주실로 꿰메기 시작했다. 3개월 후, 그(민영익)는 기적적으로 완치되었고, 그는 알렌에게 3만냥이라는 거금과 함께 참판 벼슬을 선물로 내린다. 민영익은 이 때 받은 상처로 청나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고, 수구파가 힘을 잃고 개화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만일 이 때,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을사조약이 20년은 앞당겨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 사건이 실패함으로 인하여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개화파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던 서광범은 처형당하였고, 그의 집은 알렌에게 내려져 병원(광혜원)으로 개조되었다. 알렌은 광혜원을 개원하여 사역을 시작했고, 알렌은 화학을 가르치며 선교를 준비했다. 더욱이 개원 5일 전 언더우드가 입국하면서 그야말로 ‘아다리’가 딱 맞아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대표적인 선교사들의 사역 ①언더우드(H. Underwood) 그는 뉴브런스윅 신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일본선교사인 000 선교사가 그의 선배이다. 본래 인도 선교사로 가기를 희망했던 그는 한국 선교사가 없어서 파송할 사람을 찾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을 듣고 한국 선교를 오기로 결심한다. 원래 그는 RCA교단 소속이었다. 그러나 교단이 아직 한국선교에 대한 준비가 덜 되었음을 확인한 그는 장로교단으로 교회를 옮겼고, 두 번의 거절 끝에 세 번째에 한국선교사로 파송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답변을 듣는다. 그의 약혼녀는 조선에 가는 것을 거부했다. 언더우드는 그런 약혼녀와 절교를 하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일본 요코하마로 오게 된다. 그 곳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공부하고, 아펜젤러를 만나 함께 입국하게 되었다. 그가 한국에서 이룬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첫째로 선교의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그는 북장로교 선교사였으나, 다른 교단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는 복음의 장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두 번째로 성경 번역이다. 그가 없는 성경 번역은 상상할 수 없다. 셋째, 교육사역이다.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의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크게 기여했고, 이를 통하여 기독교가 뿌리내리는데 일조했다. 마지막은 복음전도이다. 그는 복음전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다 바친다. 그의 부인은 00 여사이다. 한국에 와서 광혜원에서 사역하던 중 언더우드의 패기에 반하여 서로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함께 한국 선교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부부는 9살 차이의 연상연하(언더우드가 연하였다!) 커플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정말 헌신적으로 선교에의 열의를 불태운다. 심지어는 신혼여행도 전도여행으로 대신할 정도였다. 당시 언더우드의 라이벌은 누구였을까? 바로 마포삼열(Samual Moffet)이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마포삼열은 복음전파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은 서로 갈등을 벌이게 되었고, 서울과 평양의 사역 컬러가 틀려지게 될 정도가 되었다. 이런 갈등 중 가장 큰 것은 숭실과 연전의 존립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불편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1934년 열린 한국선교 50주년 행사에서 마포삼열은 언더우드를 극찬한다. ②아펜젤러 그는 프랭클린 마샬 대학을 졸업했고, 언더우드보다 한 살 많았다. 미국에서 열린 한 선교대회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장소가 하트포트였다. 희한하게도 두 사람은 동시에 입국하게 되었다. 이들이 어떻게 입국하게 되었을까? 어떤 기록에 보니 Mrs. 아펜젤러에게 첫 상륙을 양보했다고 한다(사유 : Lady first). 아펜젤러의 업적도 세 가지로 짚어볼 수 있겠다. 성경번역에 크게 기여한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아펜젤러인데, 그는 독일어와 고전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 따라서 1887년 성경번역위원회를 함께 운영하였고, 예수성교서회 등을 만드는 일에 앞장선다. 또 하나, 교육인데, 사실 아펜젤러의 가장 큰 기여는 교육부분이다. 배재학당을 통하여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교해볼 때, 아펜젤러가 훨씬 민족주의적 색채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춘생문 사건에서 고종의 침실을 권총을 들고 지키던 두 사람이 바로 아펜젤러와 헐버트 선교사였다. 그는 목포 앞바다에서 죽었는데, 침몰하는 배에서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몫인 구명조끼를 한국인들에게 벗어주고 죽었다. ③남장로교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는 언더우드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1891년, 내쉬빌에서 선교대회가 열린다. 이 때, 한국 부분 강사로 나섰던 사람이 언더우드와 윤치호였다. 이들의 강의를 듣고 한국 선교를 불태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남장로교는 여력이 안 되었던 때였다. 남북전쟁이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언더우드의 3,000불 헌금 등을 기반으로 남장로교회도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다. 이 때 파송된 대표적인 선교사가 바로 레이놀즈(이눌서) 선교사였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던 탁월한 학자였다. 어쨌든 그를 주축으로 선교가 진행된다. ④호주 장로교회 당시 중국에서 선교하던 한 선교사가 한국 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본부에 보내게 된다. 그러다 헨리 데이비스, 메리 데이비스 두 사람이 한국 선교를 다짐하게 된다. 1890년, 이들은 귀국 6개월 후 부산으로 내려왔다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호주 선교의 장이 되었다. ―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선교사들의 썼던 선교정책이 어떤 것이길래? 이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은 상당히 탁월했다. 직접선교와 간접선교 사이의 균형이 아주 탁월했다. 첫째는 의료선교였다. 당시 의료선교의 기수가 바로 광혜원이었는데, 이는 민중의 마음과 왕실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둘째가 바로 교육사업이었는데, 당시 선교사들이 세웠던 고등교육기관은 민족의 등불이 되었고, 해방 이후 한국이 일어서는데 큰 역할을 감당한 인재들이 이 학교들 출신이었다. 세 번째는 성경번역이다. 이들의 번역은 아주 탁월했던 번역이었다. 1906년, 최초의 성경(신약)이 나왔는데, 성경이 엄청나게 번역되면서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11년, 구약이 완간되면서 8,000부를 인쇄했다. 이 번역은 질적으로도 우수한 번역이었다. 이 성경번역은 한글문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한글성경은 한글이 한글 되게 만들었다. 한글 성경의 번역의 질은 상당히 수준이 높았고, 탁월한 번역이었다. 이후 개역 작업을 거쳐 1937년에 나온 것이 바로 개역성경이다. 춘원 이광수가 “한국 문학사의 첫장은 바로 ‘성경번역史’가 차지할 것”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 결론 오늘 강의의 결론은 한국인에 의한 성경 번역이 이루어졌고, 한국인에 의한 복음 전파가 놀랍도록 퍼졌다는 것, 뛰어난 선교사가 들어왔으며 복음에 대한 열정이 놀라웠다는 것,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시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 정말이지 매 순간마다 ‘아다리’가 딱 맞게 모든 사건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 부록 : 언더우드의 기도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잠깐 소개하셨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를 소개한다. 하나쯤 필기노트에 이런게 들어가 있어도 좋겠지…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2007년 10월 9일 강의 4강. 평양 대 부흥운동 교수님께서 평양 대 부흥운동에 관하여 연구할 의도가 처음부터 있으셨던 것은 아니라 한다. 단지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던 도중 평양 대 부흥운동에 대한 정리를 참고하려 했던 것인데, 서적들 중에서 평양 대 부흥운동에 대하여 정리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집필하고 2000년(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바로 그 해)에 출간하게 되었다. ― 평양 대 부흥에 대한 이해 세 가지 ①한국 교회만의 독자적인 현상인가? 한국만의 독자적인 현상은 아니다. 이미 1904년에 웨일즈에서, 1905~6년은 인도, 1906년은 호주에서, 그 해에 아주사 대학교에서 부흥운동이, 1908년에 만주와 중국에서 부흥이 일어났다. 이는 이 시기에 전세계적인 부흥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며, 이러한 맥락 안에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19세기말과 20세기만큼 세계선교가 앞당겨진 시대가 없었다. 기독교역사상 이렇게 활발한 선교활동이 일어난 때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시아에 그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교회의 관심은 인도와 중국, 일본과 한국 네 나라에 집중되어 있었다. 1904년, Student Valundeer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이중 많은 사람들이 D. L. 무디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한다. ②당시의 국제정세 오늘은 6자회담이라 하는데, 사실 그 당시에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러시아는 남하정책을, 미국은 대륙에 대한 발판으로, 일본은 대륙 진출에 대한 야심으로, 중국은 원래 갖던 기득권으로 각기 조선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오죽했으면 한 미국의 외교관은 한반도를 일컬어 “강대국들이 침을 흘리는 나봇의 포도원”이라고까지 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졌다. 그러나 이 두 전쟁은 단지 두 나라만의 전쟁으로 볼 수 없다. 한 여행가가 당시 평양을 방문했을 때, 그는 “피비린내가 10리 밖까지 진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그 가운데 조선이 치인 것이다. 그런 조선의 백성들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은 이런 강대국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③사경회 운동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다 20대였다. 게일은 25세, 언더우드가 27세, 아펜젤러가 26세, 헤론은 28세, 스크랜턴도 29세 등 패기만만하지만 선교경험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그래서 선교에 경험이 많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1890년, 이들은 한국에 파송된 네비우스 선교사의 세미나를 들었다. 당시 네비우스 부인은 “마치 아버지의 유언을 듣는 것처럼 진지했다”고 증언한다. 이리하여 이른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흔히 알려진 자립․자치․자전이 아니라 성경공부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곽안련 선교사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핵심은 성경공부였다고 주장한다. 이 정책의 9가지 중 두 가지는 오늘날의 제자훈련이라 봐도 무방한데, 그래서 사경회가 개최되고 지속적인 성경공부가 시작되었고, 이는 조선 백성들의 영적인 분위기를 바꾸게 된 것이다. 이런 세 가지는 웨일즈 부흥운동과의 차이점이다. 성경 중심, 말씀 중심의 한국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대각성운동이 바로 이 사경회 운동으로 인함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그동안 이렇게 해석했다.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려 하다 안되니까 종교적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래서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비정치화 해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를 간과하는 것이다. ― 원산 부흥운동 교수님은 평양 대 부흥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산의 부흥운동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결론을 내렸다. 원산 부흥운동의 시발점은 하디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기록을 뒤져보니까 1901년부터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다. 1901년과 1902년에 이미 부흥에 대한 전조가 일어나고 있었고, 1903년에 와이트와 맥컬리, 두 명의 여자 선교사가 기도하던 것을 부흥의 시발로 본다. 당시 이 두 명의 선교사는 의화단 운동을 피하여 조선에 들어와 있었고 이들은 부흥을 소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는 하디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그의 증언). 이 두 명의 여자 선교사들은 점점 더 기도하였고, 하디에게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지 하디에게 강의를 요청했다. 그는 세 편의 강의를 준비했고, 그러던 중 큰 은혜를 얻었다. 그동안 그는 똑똑한 사람이었는데도 선교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고, 그러한 실패를 한국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하디는 요한복음 15~17장에서 큰 은혜를 경험했다. (요 15:7)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과 말씀을 동격으로 놓고 있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씀하고 계신다. 루터교는 성령께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한다고 보지 않았다. 그러나 칼뱅은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한다고 보았고, 이는 부흥의 여부로 이어졌다. Lutheran에서는 경건주의 운동을 제외하고는 큰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하디는 이 말씀을 깨닫고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눅 11:13)의 말씀은 하디를 강하게 찔렀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 ― 학력, 직업,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좋은 것을 내려놓았고, 곧 큰 은혜를 경험했다. 은혜를 입은 하디는 180도 바뀌었다. 원산의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다가 큰 은혜가 회중에게 임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낯뜨거운 기록들이 많다. 선교사들의 기록 중에는 “이 민족은 감사를 모르는 민족이다”라는 기록도 있을 지경이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체면문화에도 기인한다. 한국의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하디가 은혜를 받고 너무 달라지자 동료 선교사들도 엄청나게 놀라기 시작했다. 그는 의사였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백성들은 그에게 가지 않았다 한다. 하디가 너무 쌀쌀맞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라리 아프고 말지, 저 양반에게는 가지 않는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은혜를 받은 후에는 “손만 닿아도 병이 낫는다”고 할 정도로 바뀐 것이다. 그가 13년간 사역했던 내용보다 그 이후의 사역이 훨씬 더 능력이 넘쳤다. 그가 떠난 이후에도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었고, 1906년에 장감 선교사 공의회가 결성되고 하나의 민족교회를 세우기로, 그리고 사경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부흥은 신자의 부흥이다. 불신자의 부흥은 있을 수 없다.”라는 로이드존스의 말 그대로이다. 깊이가 있으면 넓이는 따라오게 마련이다. 1906년에 네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그중 하나가 평양 선교사 사경회였다. 이 당시 강사는 하디였는데, 그는 당시 자신의 직업(의사)을 포기한다. 그는 청진기 대신 성경을 들었다. 이 사경회에서 장대현교회 담임목사도 은혜를 받았고, 당시 12세였던 셔우드 홀도 은혜를 받았다. 이 날의 설교는 탁월한 설교였다고 한다. 하디는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며,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된다”고 외치고 다녔다. 이 고백은 당시 만주에서 사역하던 선교사의 입에서도 나왔고, 결국 만주의 대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성령과 기도, 그리고 부흥을 달라고 사모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외 없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날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무리들은 1906년에 서울에 와서 존스톤에게서 웨일즈 부흥운동 이야기를 들었다. 웨일즈에서 통성기도를 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통성기도를 시작했고, 목포 부흥운동의 소식이 들려왔고, 곧 1907년 1월 14일과 15일에 열린 사경회에서 사도행전 이후 가장 강력한 성령의 역사라 불린 평양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평양이라는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아니하고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으며, 이 점에서 당시 일어났던 부흥운동과 차이가 있다 하겠다. 이 운동을 통하여 선교사들의 인식 ― 서양인과 동양인은 아무래도 다르다 ― 도 바뀌었다. 물론 조선의 상황은 더욱 안 좋아졌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민족을 위하여 헌신했고, 현재 이런 큰 성장은 평양 대 부흥운동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겠다. ◎2007년 10월 16일 강의 ― 과제에 대하여 선교사 연구에 있어서 일단은 “내한 선교사 총람”이라는 자료를 찾아볼 것을 권한다. 이름을 찾아서 그 사람의 소속을 찾아보도록 하라. 이게 아니면 교문사에서 나온 “기독교 대 백과사전”을 참고해도 될 듯 하다. 거기에는 그 사람을 집필하면서 어떤 책을 참고했는지 나오니까 자료는 그렇게 찾도록 하라. 특별히 Canada출신 선교사들은 “Canada in Korea”라는 책을, “Australia ”라는 책을 찾아보면 조금 자료가 풍부하게 나올 것이다. 이건 기본적인 Reference이다. 사당동에 선교사들의 편지나 기타 문서들을 취합하여 만든 자료집이 있다. 그걸 참고하라. 제출기한 : 학기말까지. 만약, 기한을 맞추기 힘들면 한 주 연기해도 좋다. 5강. 민족주의와 기독교 ― 105인 사건과 선교사들의 대 일본(對 日本)정책 변화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급부상하게 된다. 일제가 1905년 고종황제 퇴위,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하여 조선을 접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최대의 적을 기독교로 점찍고 기독교 말살정책을 세우게 된다. 그것에 1911년 12월 29일에 발생한 105인 사건이다.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수탈을 당하고 있을 때, 대한매일신보가 일본정부로부터 차입한 1300만이나 되는 고리채를 값기 위해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거기에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겼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교사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해리스 감독의 경우에는 일본의 정책을 옳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부산에서 활동하던 월터 스미스라는 선교사는 본국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해리스 감독은 일본의 앞잡이라는 평이 일반적이며 …… 앞으로 그런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 편지의 말미에는 “내 개인의 생각에는 현재의 상태보다 합병이 나으리라고 봅니다”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당시 많은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 지배를 환영했다고 한다. 한편 평양의 선교사 모임에서는 일본에게 “대적․무관심․협조․충성” 중 “충성”을 택했다고 한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당시 대부분 이렇게 생각했다. 백낙준 박사는 “일본인에게는 비위를 맞추는 한편, 교인들에게는 무마한다”는 식의, 대단히 시니컬한 평을 내렸다. 의병이 일어났을 때, 선교사들은 교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지 않도록 했다. 이런데도 일본정부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고 보고 의심하고 있었고, 선교사들이 자신들에게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다. 마삼락 교수는 “비록 선교사들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라고 권하고, 정치적인 문제를 피하려 하였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민족주의적인 감정이 고취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일제는 한국의 영구 통치를 위해서는 선교사들을 내쫓고 기독교를 말살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라는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105인 사건)은 선천에서 일어났는데, 왜 하필 이 도시에서 이 사건을 조작한 것일까? 그 당시 도시의 인구는 8,000밖에 되지 않았으나 선천의 기독교 인구는 도시의 반이 넘었다. 또한 기독교 민족주의를 고취시킨 학교(학교)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타겟을 선천으로 잡고 그 다음으로 평양을 노린 것이다. 이 때 구속된 105인 중 상당수가 장로교인이었다. 그러나 105인 사건을 통하여 선교사들은 일본에 등을 완전히 돌렸고, 한국인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역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면 서양사를 가르쳤고, 지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면 다른 방법으로 가르쳐 민족주의를 심어준 것이다. 평양 대 부흥운동의 주역인 노블 선교사가 해리스 감독에게 한 독설을 보면 선교사들이 얼마나 급격히 일본에게서 돌아섰는지를 알 수 있고,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밀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 3․1운동 이런 가운데 삼일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삼락 교수는 “잔인한 만행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이 때 태극기 제작을 도와주고 한국인들을 보호해주는 등 한국인들을 많이 도와주었다. 당시 선교사들도 독립운동의 현장을 많이 찾았고, 스코필드 선교사의 경우에는 제암리 학살 현장의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알리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많이 감당했다. 일제침략 초기에는 일본에 협조했던 선교사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일본에게 협조하지 않고 외형적으로 볼 때, 3․1운동은 실패한 사건이다. 그러나 이는 중요한 몇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한국 민족에 대한 독립에 대한 소망이나 욕구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둘째, 한국의 반만년 역사 속에서 신분, 직업, 연령, 성별을 초월하여 민족공동체를 세계 앞에 내놓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셋째, 3․1운동 이후 기독교가 성장하게 되었다. ― 관동대지진(1923. 9. 1) 관동대지진은 국사에서도 잘 다루지 않지만,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다. Korean Mission Field에 보면 극적으로 살아남은 한 사람의 글이 있다. 도쿄에서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충격적인 사건이다.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났는가 하면 관동지역의 인구 63만호에서 40만호의 집이 전소되었고, 9만명이 사망할 정도의 큰 피해가 났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게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할까? (AM 11:58)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1시부터 괴소문이 돌았다.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은 조선인들이 수돗물에 독극물을 탔다는 소문까지 돌았고, 그래서 이날부터 엄청난 수의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하였다. 일본은 이를 아직까지 숨기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지극히 작은 문제인 것이다. 일본 군관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살해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오죽하면 일본 변호사들이 일본정부에 항의를 다 했겠는가. 당시 동아일보․조선일보 두 신문이 이 때의 사건을 보도했다가 18회에 걸쳐 정간을 당했다. 이 사건을 당시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일본 기독교 단체에서도 물론이고, 당시 조선의 교회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왜 그렇게 무관심했던 것일까?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교회는 사회문제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길 바란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한국 통치방식을 바꾼다. 이른바 “문화통치”이다. 그러나 이는 말로만 그러했을 뿐이다. 당시 일본의 정책 중에서 “공창(公娼)”제도가 있다. 이를 위하여 일본은 50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들였고, 이로 인하여 당시의 젊은이들이 성적으로 엄청나게 타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18만 달러를 들여서 아편 재배를 시작했다. 국가에서 이 때만큼 주초(酒炒)를 권장한 때가 없었다. 정부가 없고 식민지가 되었던 암울한 시기. 이 때부터 교회에서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금연․금주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젊은이 해체작업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면서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나누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인구원에 중심을 두고도 사회구원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던 반면, 감리교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혼동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시대를 불문하고 교회는 이 민족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길선주 목사님과 김익두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논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의 가슴속에는 민족이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다. 식민지 시절,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교회는 희망이 되었다. ◎2007년 10월 23일 강의 6강. 자유주의의 발흥과 보수주의의 응전(1930~1935) ― 자유주의 신학 발흥의 원인 1930년대에 왜 자유주의가 이슈로 발흥하였는가? 이 시기에는 세계적으로 장․감의 최대 이슈가 바로 자유주의의 발흥이었다. 당시 세계 개신교의 주류는 첫째는 3․1운동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스타일을 바꾸었는데, 이들은 “내선일체”를 내세워 이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하여 일제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하나는 사범학교 육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었다. 당시 일제는 최고의 직장을 사범학교로 만들었다. 일제시대에 사범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몰랐다 한다. 당시 사범학교는 일본 내의 엘리트 교사들을 채용하여 운영했는데, 인품과 실력 모두 뛰어난 사람들을 사용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일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유학이었다. 일제는 사람들을 일본 본토로 유학하거나 외국으로 유학하도록 유도하였는데,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이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유학한 사람들은 자신이 배운 신학을 조선에 이식했다. 당시 한국에 발흥한 신학은 다섯 가지인데, 이는 각기 박형룡의 보수주의, 김재준의 자유주의, 정경옥의 자유주의, 이용도의 신비주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등이었다. ― 미국 장로교회와 자유주의 논쟁 당시 북장로교회의 선교사들 중 뉴욕 유니온 신학교 출신이 3명이나 되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잠시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해결된다. 1788년, 미국장로교회(PCUSA)가 형성되었다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나중에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회중교회와의 연합, 다른 하나는 노회 문제였다. 이 때 미국장로교회는 New School과 Old School로 나뉘었다. 이 때 NS애 앞장선 사람이 찰스 피니 등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나뉘면서 학교도 둘로 나뉘었는데, NS에는 Union, Auburn 등이 속했다. OS에 속한 신학교가 Princeton, Union, Mcomick 등이었다. 이러다 두 교단이 합하면서 양교의 목사나 학교 등을 다 인정하기로 하고 합하여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합쳐진 것이 1869년이었다. 1892년, 소위 Charles Briggs 사건이 터진다. 주제강연이 열린 자리에서 성경의 무오성을 반대하는 내용을 강의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소속노회에서 그를 목사 면직을 시키면서 사태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나 당시 교단의 입장과는 달리 Union신학교(NY)의 교수들 대부분은 오히려 찰스 브릭스를 지지하면서 교단을 탈퇴했고, Union 신학교는 교단을 탈퇴한다. 1892년에 진행되었던 이 논쟁은 계속 미국 내에 퍼졌고, 1910년부터 교단은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메이천이 주도한 그룹이 1929년에 WTS를 세운 것이다. 이 중 주목해야 할 과정은 1922~1925년 사이에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가 유명한 설교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설교를 했고, 메이천은 1924년에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집필하게 된다. 1923년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 북장로교회가 자유주의를 우려하면서 근본주의 5대교리를 천명하게 되었는데, 1910년, 1916년, 1923년 세 번에 이르렀다. 그러나 Auburn 신학교에서 그 유명한 어번 선언서를 작성하였는데, 북장로교 내의 목사 1,293명이나 되는 엄청난 목사들이 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293명 중에서 3명이 한국 선교사(William Kerr)였다. 결국 북장로교회는 진보주의로 흘렀고, 소안련 선교사(나중에 확인할 것)는 PCUSA를 탈퇴하고 메이천이 주도한 OPC에 가입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 살펴볼 것이 있다. 미국 북장로교회의 이러한 자유주의 논쟁과 조선 내의 신학적 흐름이다. 선교사들은 어떻게 이를 감지하였을까? 박용규 교수님의 책 “한국장로교사상사”라는 책에 이와 관계된 증언이 하나 나와 있다. 선교사들은 이미 내한 선교사들 중에서 근본주의 논쟁이 들어와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23년, 미국 내의 신학논쟁이 벌어지던 그 때에 한국에도 이른바 “김장호 논쟁”이 벌어졌다. 그는 성경을 믿지 않고 성경도 믿지 않고 재림과 부활을 믿지 않아 황해노회에서 총대권을 박탈당하였다. 그의 신학사상을 조사하던 도중 그가 오랫동안 조사로 있던 교회의 선교사였던 윌리엄 커에게서 그 사상이 나왔다는 것을 발견, 선교사들에게 어필하여 그 선교사들을 본국으로 소환토록 요청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 조선 내의 자유주의 신학사상 침투경로 그렇다면 조선 내의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경로로 침투하였을까? 약 다섯 가지 경로가 확인되고 있다. ①소수의 북장로교 선교사들 : 이를 대변하는 사람이 바로 윌리엄 커이고, 유니온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이다. 앞에서 긴 설명을 했으니 설명이 더 필요없을 것이다. ②감리교회 : 1920년대부터 감리교회의 신학이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는 개인구원에서 사회구원으로, 교회목회에서 기관목회로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양주삼, 정경옥, 이형기, 이용도, 신흥운 등 5인이 감리교회의 체제를 바꾸었다. 이상하게도 이 5인은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했다. 양주삼은 교단의 흐름을, 정경옥은 협성신학교 안에서, 유형기는 아빙돈 단권주석을 통하여, 이용도는 부흥운동 변질을, 신흥운은 기관 “적극신앙”을 만들면서 신학적 변질이 시작되었고, 장로교회와의 연합운동을 통하여, 기타 활동을 통하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③학교교육을 통하여 : 미션스쿨에서부터 이러한 움직임도 퍼져나갔는데, 창조론을 부인하고 현대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④캐나다연합교회를 통하여 : 1925년까지 캐나다는 장로교회가 독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에 회중교회, 감리교회와 연합하면서 United Church of Canada를 결성하였고, 그러면서부터 회중교회나 감리교회 출신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자유주의를 확신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선교사가 William Scott였다. 이렇게 진보적인 캐나다 연합교회를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가 장로교회의 고민이 되었고, 함경도(네비우스 정책에 따른 캐나다 선교지)를 중심으로 자유주의가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⑤일본에서 교육받은 3인 : 송창근, 최필근, 김재준. 이 세 사람은 일본 청산학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김재준의 말에 의하면, 이 곳은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출장소였다 한다. 따라서 이들은 배운 신학을 한국에 보급하였다. 이 자유주의 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이 남궁혁이었다. 당시 그는 신학지남의 편집장이었는데, 이 세 사람을 필진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유주의 신학이 퍼지기 시작했다. 박형룡은 이에 반발, 한동안 신학지남에 글을 쓰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곧 아빙돈 단권주석을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곧 출판되기에 이른다. 이 주석은 1,000부만 찍어내었다 한다. 이 주석은 Radical은 아니나,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결국 1934년, 장로교 총회는 아빙돈 단권주석의 출판금지를 명했으나, 이 성경은 불티나게 팔렸고, 총회는 심각성을 느끼고 표준 성경주석의 출판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앞장선 사람이 길선주 목사이고, 편집장은 박형룡 박사였다. 이 주석은 욥기와 시편만 주석되어 있으나, 상당히 수준높은 내용이 담긴 주석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3대 신학서적이 등장한다. 정경옥의 기독교 신학개론, 백낙준의 기독교신학사, 박형룡의 근대신학난제선평(近代神學難題選評)이 그것이다. 이후, 총회는 진보주의에 대한 조사를 시작, 라부열 선교사와 박형룡 박사가 주도가 되어 총회에 보고서를 올렸다. ― 정리 1. 1930년대에 자유주의가 발흥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다. 2. 보수주의가 자유주의를 압도한 것 역시 맞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압도했다기보다는 자유주의자들이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가 1935년 이후부터 교회의 신학을 주도했다는 것이 맞으며, 이후부터는 진보와 보수가 첨예한 갈등을 보이다 해방 이후 표출되면서 교단 분열로 끝나게 된다. 3. 1930년대, 해외유학파들이 신학적 리더십을 구축하면서 한국적 신학이 태동하게 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5인이 주도한 것이다. ◎2007년 10월 30일 강의 7강. 1930년대의 한국 신학(김재준, 정경옥, 박형룡) ⑴김재준의 생애와 신학 ①김재준의 생애 장공 김재준의 사상을 정리한 “김재준 저작전집”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모두 16권으로 되어 있으며, 그의 글들은 물론이고 아주 시시콜콜한 것들(이를테면 사생활)까지 재미있게 기록되어 있다. 김재준은 1901년 함북 경흥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정은 독실한 유교가정이었고, 사서삼경을 즐겨 암기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글은 물 흐르듯 쉽게 쓰여졌는데, 어릴 때부터 시를 좋아하고 한학을 공부했던 때문이다. 그러나 1926년, 김익두 목사의 승동교회 집회때 회심하고 주를 만났다. 1925년, 청산학원에 유학을 떠났는데, 여기에서 송창근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졸업논문으로 바르트의 신학에 대하여 다루었다. 청산학원을 졸업한 김재준은 미국의 프린스턴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는 송창근이 거기서 유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해가 1928년이었다. 그의 유학여비는 윤치호가 대 주었다 한다.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던 김재준은 웨스턴 신학교로 옮겼다. 장학금을 좀 더 준다는 제안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도 그의 벗이었던 송창근이 있었고, 귀국 후 숭인산업고에서 교사를 하다 1936~9년, 신학지남 사건이 터지면서 중국의 용정중학교 교사 자리로 옮겨서 가르치는 일을 계속했고, 이 때 강원용과 문익환을 만난다. 김재준의 사상은 역사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그만이 가진 독특한 역사의식이 있었다. 그에게는 한 인물이 자주적, 창조적으로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그 자신을 역사적 인물로 보았다(수정 필요). 자연히 그의 사상은 진보주의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의 사상이 진보주의적으로 흐를까? 그가 귀국한 이후 강의했던 “예언서 연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소선지서를 읽으며 역사의식을 배워 나갔다. 예언자는 불의한 세상에서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라 보았고, 사회나 정치 등 온 세상까지 이러한 외침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박형룡 박사보다 김재준 박사가 화란의 문화변혁 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문제는 그가 가진 예언자적 외침이 반 선교사적 정책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을 서구 신학을 이식하는 앞잡이로 인식하고, 한국교회사는 미국 선교사의 한 토막에 불과하며,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사상적 노예라는 강한 비판을 하게 된 것이다. 그의 글에는 전투적인 용어가 많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정통주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가 프린스턴에 있던 기간에 메이천의 투쟁과 분열 사건을 보았고, 그래서 정통주의는 실패한 신학이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신학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결국 1940년에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이러한 면을 강의하게 된 것이다. ②김재준의 신학 그의 신학에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는 어떤 신학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교수님은 그의 글을 쫙 추적하다가 하나의 아티클을 발견하고 실마리를 얻었다. 그의 사상은 이 글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①실존주의적 해석, ②초자연과 자연의 구분이 없음, ③그리스도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높다는 해석. 이 세 가지는 바르트 사상의 액기스에 해당한다. 역사의 해석에서 History와 Geschichte의 차이를 기억하는가? 이중 Geschochte만 인정하는 것이 바로 바르트의 해석이다. 또한 성경의 권위 없이 그리스도의 권위가 세워질 수 없다. 성경의 권위를 높이면 그리스도의 권위는 자연스레 높아지게 된다. 청산학원에서 배운 바르트의 초월론, 그리고 웨스턴에서 공부하던 것들이 그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김재준의 신학사상을 조사하던 목회자들은 그의 신학사상에 무엇이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또한 1960년 이후 그는 함석헌과 함께 어울리면서 민주주의의 투사, 민족주의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글쎄’이다. 조선신학원은 말년에 조선新학원이 되었고, 그는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이다. 김재준은 정통주의로 포장된 한국 신학계의 숨통을 터주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했다. 그 이후, 한신대학교는 더 이상 바르트의 후예들이 아닌 종교다원주의자들을 배출하는 학교로 전락해 버렸다. 그에게 있는 인간미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는 Integrity가 계속 오버랩되고 있다. ⑵정경옥의 신학과 사상 한국 신학사상에서 정초기에 있는 학자들 중 자칭 ‘자의식을 가진 신학자’라고 한 사람이 바로 그, 정경옥이다. 감리교 신학은 정경옥의 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학은 자유, 신앙은 보수”,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는 말 역시 정경옥이 제일 처음 만든 말이다. 이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인 ‘절대의존감정’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①정경옥의 생애 교수님이 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그가 가장 많이 글을 기고하였고, 신학지남과 쌍벽을 이루는 잡지인 “신학세계”를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그에 대하여 알려진 정보들 중 상당수가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도미(渡美) 시기이다. 1928년에 유학을 가서 2년간 B.D를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프랭클린 놀 교수에게서 사사하였다. 그는 리출의 신학이나 사상을 미국에 이식한 대표적은 사람이다. 그가 쓴 “기독교신학개론”에서도 자신의 교수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차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1930년대) 감리교에서는 이용도의 사상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왜 그의 신학을 비판하는 글이 신학세계에 없는 것일까? 정경옥의 논문을 보면 신비주의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었다는 것을 그의 신학사상은 프랭클린 놀 교수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고,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출의 신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두 가지가 그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31년에 귀국하여 1940년까지 협성신학교에서 교수를 하는 동안 그의 강의는 명강의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그는 신학세계에 매달 글을 쏟아냈고, 별다른 참고문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트의 신학을 상당히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고, 이는 그의 탁월함을 잘 보여준다. 1943년부터 2년간 그는 광주중앙교회(장로교)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이 기간에 그는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②정경옥의 신학사상 그에게 있어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인격적 관계였다. 이는 리출의 신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에게 ‘경험’이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경험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경험이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사회 변혁을 이야기했다. 정경옥에 대하여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정경옥의 신학이 오늘날 감리교의 신학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말하면서도 자유주의적 해석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다원주의로 넘어가는 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⑶죽산 박형룡의 신학 박형룡 박사에 대하여는 “평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평가가 끝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귀국당시 교단 내에서는 평가가 너무나 결여되어 있었고, 그나마 자료도 거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 대한 평가도 잘못된 것이 많았고, “죽산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이 나오기 전까지는 이렇다할 자료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견해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1923~6년까지의 유학기간 중 그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논쟁을 직접 목도했다. 박형룡은 이를 보고 머잖아 한국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전투적 메이천주의자가 되었다. 그래서 프린스턴의 신학으로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논했다. 그는 ‘칼빈주의’라는 말보다 ‘정통주의’라는 말을 선호했다. 이는 메이천의 생각과도 비슷했다. 그의 생애동안 그를 지배했던 신학은 성경무오, 성경의 완전축자유기적 영감이었다. 때문에 현대주의에 대하여 반 자유주의, 반 신정통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박형룡 박사의 일생을 지배했다. 그에 대한 글들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고, 특별히 장동민 교수의 비판적 글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두 가지 공헌을 했다. ①정통주의 신학을 보존하고 계승하였으며, ②성경의 권위에 대한 사상을 뿌리내렸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문화주의와 사회주의를 배척하는 경향을 한국교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11월 6일 강의 8강. 신사참배 반대운동(1935~1945) 1936년 1월 18일, 조지 맥퀸은 조선 총독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는 편지이다. 이 일이 있은 후 4개월 뒤, 그는 한국에서 추방당하였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신사참배 반대의 문제는 1935년부터 10년간 만난 가장 큰 시련이었다. 김양선 목사의 말을 빌린다면, “1919년의 3․1운동보다도 이 문제가 더 큰 문제이다”라고 했다. 이는 민족운동 차원을 넘어서 민족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한국교회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용의주도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제일 먼저 천황 숭배를 강요했는데, 이는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시작했다. 학교에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마다 천황에게 경례를 하는 등 천황 예배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다. 곧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로 인하여 당분간은 미션스쿨에서 이러한 일을 진행하지 못한다. 그러자 일제는 학교에서 역사, 지리, 국사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식으로 교과과정을 재편한다. 대신 일제는 “일본어 독본”을 가르치게 했는데, 이는 말로만 “독본”이었고, 여기에는 식민사관이 담겨 있었다. 흔히 황국사관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임나일본부설, 신공황후 신라 정복설, 백제 조공설 등의 내용이 담겨 있어서 조선이 일본에게 어쩔 수 없이 침략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심어준 것이었다. 또한 방지일 선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예배 시에 묵도를 드리는 것도 궁성요배를 드린 후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일제시대의 습관이 남은 것이라며 비판하는데, 이렇게 일본의 잔재는 생각보다 깊다. 어쨌든, 이렇게 황국신민화 정책은 잘 먹혀들어갔다. ― ‘신사’와 ‘신사참배’의 문제 그렇다면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왜 ‘신사’가 문제가 있는가? 신사는 일본의 ‘가미’사상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가미’사상인데, 일본에서는 전쟁영웅을 가장 높이 숭배했고, 이 것이 천황숭배, 더 나아가서는 패권주의로 이어진다. 천황은 태양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해서 승리해야 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신사참배를 강조하면 할수록 일본은 패권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근삼 박사는 신사참배에 관하여 이렇게 논평한다. 천황은 전 우주의 통치자라는 극단적인 믿음까지도 일반에 횡행했는데, 이는 메이지유신과 메이지 헌법의 영향이라는 것이고, 이 것이 일본의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단계의 전략을 구사한다. 하나는 ‘교파신도(神道)’의 진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가신도’의 진출이었다. 천리교 등이 먼저 들어와 전파가 되기 시작했고, 그 이후 이 일이 잘 이루어지자 일본은 여기저기에 신궁을 짓기 시작했고, 이는 해방까지 40여 개가 넘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말로 이를 호도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교파신도와 국가신도를 나누었을까? 이는 한국 내에 신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국가신도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명분 하여 굴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 신사참배 강요 문제 제일 처음 일본은 공립학교, 그것도 초등학교에 이를 요구하였다.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이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부 미션스쿨의 학생들이 이를 반대했다. 대표적으로는 충남의 강경보통학교가 있다. 신사참배가 있던 날, 26명이 결석하고 40명이 신사참배를 반대하기에 이르렀는데, 총독부는 발칵 뒤집어졌고, 동아일보는 이에 대하여 그 학생들에게 우호적인 논평을 냈다. 총독부에서는 미션스쿨에 대대적으로 이를 강조하기 직전에 두 명의 선교사에게 ‘무궁훈장’ 금메달을 수여하며 일제가 한국 기독교의 친구임을 과시한다. 1935년 11월 14일, 평안남도 공․사립 학교 교장들을 다 모아놓은 자리에서 야스다케 도지사가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우리 모두 바깥에 있는 자동차에 올라 신사참배를 하고 온 후에 회의를 하십시다.” 이 때, 맥퀸 선교사를 비롯한 세 사람(맥퀸 + 3명)이 일어나서 이를 거부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신사를 참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스다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장은 그 직위를 박탈한다. 제국 내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학교는 있을 수 없다”며 6일의 말미를 준다. 숙고한 끝에 이 네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국가에 대한 예의를 갖출 수는 있지만, 신사를 참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11월 30일, 장학관이 이들을 찾아와 함께 회동을 한다. 그러나 결론은 같았다. 장학관은 그냥 돌아갔고, 맥퀸은 강의 서두에 잠시 소개한 그 편지를 도지사에게 보낸 것이다. 1월 20일, 맥퀸은 교장직에서 해임을 당하였고, 곧 미국으로 강제 추방을 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연희전문의 교장이었던 원한경(언더우드의 아들) 박사는 신사참배를 하면서까지 학교를 운영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논쟁은 미국 선교부에서도 논란이 되었는데, 결국 선교사들의 회의에서 “학교를 폐교할지언정 신사참배와 맞서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와는 반대로 1936년, 천주교에서는 신사참배를 인정했다. 1936년 5월 25일, 교황청은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교서를 내렸다. 이는 한국 천주교의 결정적 터닝 포인트였다. 당시 천주교는 당황했으나, 이들은 결국 Hierarchy에 굴복했고, 이후 천주교는 급속히 좌경화가 되어 제사를 허용하는 등의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렇다면 왜?! 교황청이 교서를 발표했는가? 교황청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는 세 곳밖에 없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세계 제 2차대전의 추축국이었단 세 나라이다. 교황청은 이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고, 세속정치에 개입한 것이다. 일제시대의 천주교는 정권의 시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감리교마저 무너졌다. 감리교 본부에서는 결정을 내려 신사참배를 허용했으며, 그 이후부터 감리교에서는 정통성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때에 장로교, 그것도 남장로교에서 목소리를 낸다. 풀턴 선교사는 세 가지 선언을 했다. ①정부가 말한 신사참배에 대한 설명은 거짓이다. ②국가신도와 교파신도의 명확한 구분은 없다. ③신사 의식은 종교의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는 일본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사가 무엇인지 피부로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선언은 북장로교를 움직이게 했고, 캐나다 장로회를 제외한 전 장로교 선교사들을 움직여 신사참배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1937년 2월, 가장 큰 노회인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총회 개최 직전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27차 총회가 서문교회에서 열린다. 이 때의 풍경을 김양선 목사는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었는데, 총회장소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내부에도 경찰들이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총회장은 홍택기 목사였는데, 그는 결국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이 뒤쪽에서 “불법이요!”라고 외치며 뛰쳐나갔으나, 이들은 결국 무술경관들에게 제압 당하였다. 또한 총회에서는 이러한 총회의 결의를 위반하는 자들은 목사직을 면직한다고 선언하였다. 방위량 선교사는 이때부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 신사참배 반대운동 당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포문을 연 사람들은 세 그룹이다. ①평양신학교 학생들, ②박관준 장로, ③주기철 목사였다. 한 신학생이 신학교 교정에 심은 기념식수 나무를 찍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일제는 신학생들과 박형룡 박사, 그리고 주기철 목사를 구속한다. 주기철 목사가 평양신학교 사경회에서 “일사각오”라는 설교를 하신 것인데, 일제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가 신학생들을 선동했다고 보고 그를 지목하여 구금한 것이다. 또한 의사 출신이었던 박관준 장로는 일본 본토의 제국의회까지 찾아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제출했다. 이 때문에 박관준 장로는 구금되었다. 또한 주기철 목사님 역시 그러했다(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이 목사님의 설교를 금지하자 목사님은 “내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았소. 경찰서에서 받은 것이 아니오. 그러니 당신들이 내 설교를 금지할 권리가 없소이다”라며, 마치 맥퀸 선교사가 했던 것 같은 말을 던졌다 한다. 일제는 목사님을 구금하며 협박하고 고문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차 타고 지나가면서 신사 쪽으로 고개만 까딱하면 참배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무시하자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하는 등의 만행도 저질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러한 순교자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 이는 분명 잘못이다. ― 정리 ①신사는 종교이다. ②너무나 부끄럽지만, 너무나 많은 지도자들이 신사참배에 굴복했다. ③신사참배는 신앙의 시금석이었다 : 자유주의자들은 타협하였으나, 보수주의자들은 끝까지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④신사참배 회개 : 39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당시의 결의(신사참배)를 취소한다고 했으나, 회개하지는 않았다. ◎2007년 11월 13일 강의 9강. 대립과 분열의 시대(1945~1960) 이 시기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대립과 분열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간하배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대립”이라고도 표현했다. 세 차례의 장로교회 분열(기장, 고신, 합동통합)이 성경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중심에는 신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조선신학교, 고려신학교, 총회신학교가 그것이다. 오늘 강의는 선이해를 위해서 몇 가지의 테마를 가지고 논의할 것이다. ⑴분열의 역사적 배경 1940년에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세 가지 모토는 이것이었다. 첫째는 평양신학교와의 단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신학교 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들은 평양신학교 출신이 아니었다. 캐나다 선교회가 힘을 실어주었고, 미국․일본 등지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주도했다. 둘째는 세계 신학조류의 수용이었다. 이들은 자신 있게 “신앙은 보수, 신학은 자유”라는, 정경옥이 사용했던 모토를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세계신학의 조류는 바르트의 신학이었다. 따라서 조선신학교에서는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추구했다. 셋째는 성경 무오성의 반대였다. 김재준에게 있어서 성경 무오의 반대는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처음에 그는 “성경의 권위는 구원의 문제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교재에 보면(p.909), 그는 “절대 무오한 것은 없다. 절대 무오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라고 말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절대 무오하지 않은 인간이 어떻게 절대 무오한 책을 쓰겠는가”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렇다면 김재준이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김재준의 글을 추적한 결과, 그는 성경은 구원을 이루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고, 구원을 이루는 부분에 있어서는 오류가 없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영감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완전영감’이 아닌 ‘부분영감’의 시도가 미국 내에서도 참 많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바르트의 후예들이 시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은 교과서가 아니기에 과학 등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으나, 구원에 문제에는 오류가 없다‘고 했다. 그(바르트)는 성경 무오성의 교리가 1565~1606년 사이에 태동되었다고 본다. 이 시기는 개신교 신앙고백의 시기로, 베자 등의 신학자들이 신학을 더욱 정교하게 하던 시기였다. 바르트는 이 시기에 성경무오의 교리가 태동한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도 미국에서는 학자들이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는 성경무오냐, 부분영감이냐를 놓고 나뉘어진 것이다. 이런 것으로 놓고 본다면 김재준의 신학은 바르트의 신학이며, 통합측이 취하던 입장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미국의 Rogers Mckim이라는 교수가 책을 썼는데, 그는 이 책에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완벽한 책을 쓸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의 스승은 화란의 벌카우어인데, 그가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그 그룹들이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 문제가 한 번 빗나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이 빗나가게 마련이다. 이렇게 빗나가던 조선신학교를 비판하던 그룹이 바로 고려신학교였다. 고려신학교는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에 세운 신학교였다. 당시 유일한 인준신학교는 조선신학교 단 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성도들은 여기서 교육을 받을 수 없었고, 고려신학교의 설립은 필수적이었다. 한상동 목사와 박윤선 교수가 손을 잡고 학교를 세우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박윤선’이라는 한 인물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윤선은 박형룡의 제자였다. 박윤선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다. 그는 결혼 후, 부인을 학교에 다니게 했을 정도로(그 당시에!) 깨어 있던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기도를 너무나 많이 한 사람이었다. 이용도의 평양기도단 중 한 사람이기도 할 정도로 기도에 열심히 있던 사람이었다. 그가 유학을 가기 위하여 입학허가서를 받고 대사관에 가서 인터뷰를 하던 중, “재정문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자 “잘 아시지 않습니까(You Know that)?”라는 한 마디로 비자를 받았다고 한다. 유학길에 올라 떠나던 배 안에서 그는 요한계시록을 읽고 영어로 싹 다 외우게 된다. 그는 두 번 유학을 했는데, 1934~36년까지가 1차 유학시기였고, 1938~40년까지가 2차 유학시기였다. 그가 간 곳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TS)였다. 당시 WTS와 프린스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프린스턴의 신학에서 1929년 이전의 신학을 Old Princeton이라고 한다. WTS의 모토는 바로 이 Old Princeton을 계승한다는 모토로 설립되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메이천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전통이 접목되는데, 이 것이 화란 개혁주의이다. 화란 개혁주의는 반 틸에 의하여 접목되었고, 풍요로운 개혁주의의 유산을 계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박윤선 박사는 1차 유학시기에 메이천 밑에서 공부했고 귀국 후 평양신학교에서 2년간 헬라어를 가르치며 표준 성경주석(신약) 편찬을 도왔다. 박형룡 박사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곧 그는 2차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 시기에 메이천이 세상을 떠났고, 그는 반 틸 밑에서 공부를 했다. 그의 전제주의 변증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박윤선이다. 따라서 그는 구 프린스턴 신학과 화란 신학의 유산을 다 소유할 수 있었고, 개혁주의라는 말을 한국교회에 소개하고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박형룡은 정통주의라는 말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WTS의 실수가 하나 있었다. 바로 학교 외교관계와 관계된 것이다. WTS는 칼 맥킨타이어의 ICCC와 관계를 가졌는데, 이로 인하여 결국 고려신학교가 근본주의의 흐름을 피할 수 없었고, 그는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였다. 결국 훗날 그는 맥킨타이어에게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다. 결국 고려신학교는 근본주의자들과 교류를 가지게 된다. ⑵51인 진정사건 조선신학교가 1946년에 남부총회에서 인준을 받음으로 유일한 신학교가 되었는데, 당시 한국에 있던 사람들은 무조건 조선신학교를 거쳐야만 했다. 그런데 이 때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51인의 학생들이 반감을 갖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들이 제출한 조선신학교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반감을 가졌고, 당시 조선신학교가 어떤 신학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이들은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다고 했고, 근대주의 신학과 고등비평 등을 배척한다고 진술하며, “우리는 순복음(True gospel, 순복음교회의 그 ‘순복음’이 아님)의 전사가 되어 전 세계를 향해 도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이러한 진정서를 총회에서 받고 조사하면서, 총회는 이러한 진정서의 내용이 사실임을 알아냈다. 이 때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김재준의 신학을 비평했다. 당시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 하면서도 모세오경을 거부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김재준의 신학을 공격했다. 전체적인 대세는 박형룡에게 기울었고,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일단락하게 된다. 김의환 박사는 그의 말 바꾸기에 대하여 “당시 그가 자신의 신학을 선명하게 설명했다면 한국교회는 분열을 막을 수 있었다”고 진술한다. 당시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선이해가 없었기에 전라도 지역에 있는 수많은 보수적인 교회들은 김재준이 모함을 받은거라 판단, 기장쪽으로 돌아서게 된다. 1949년에 맥케이와 에밀 브루너가 한국에 방문했었고, 그는 김재준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면서 박형룡을 근본주의자로 평하게 된다. 1949년 당시, 한국교회에는 분열의 흐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⑶세 차례의 분열 ①기독교장로회의 분열(1953) 분열은 모두 세 번에 걸쳐 일어났다. 1952년에 기장이 분열되어 나갔다. 1946년, 남부총회에서 조선신학교가 인준을 받았고, 1년 후 51인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1948년, 총회는 “시정령”을 내려 보수적인 교수들을 더 채용할 것을 명한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우리는 보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주장을 거부한다. 1951년, 총회에서는 김재준과 스콧 선교사를 면직에 처했으나, 1953년, 이에 반발한 700개의 교회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떨어져 나간 교회는 자신들을 일컬어 “Conservatory Liberal(보수적인 자유)”이라고 주장하며 기장을 창립한다. 이 문제는 분명히 신학적인 문제이며, 교권의 문제로 호도할 필요가 전혀 없다. ②고려파의 분열(1952) 1946년, 고려신학교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영입하였다. 그러나 박박사는 곧 고려파를 빠져나왔다. 이에는 세 가지 부분에 있어서 의견충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상동은 “신사참배를 한 총회의 인준은 필요없다”고 보았으나 박박사는 이와 달랐다. 총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면 신학교가 어려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선교회와의 협력이었다. 한상동은 당시 독립선교회와의 교류만을 가지려고 했으나 박형룡 박사는 북장로교 등에 있는 보수적 선교사들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세 번째는 신학교의 위치이다. 부산에 위치한 신학교는 한국의 신학교를 주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박형룡은 신학교를 서울로 옮길 것을 제안했으나, 한상동은 평양신학교가 서울에 있지도 않았는데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이 세 가지 부분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박형룡은 서울로 올라오고 말았다. 1948년, 결국 총회가 인준한 ‘총회신학교’가 설립되어 박형룡은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고신측에서는 아직도 박형룡 박사의 사임을 비판하고 있다. 1949년, 장로교회 안에는 세 파벌이 존재했는데, 조신 ― 기장, 고신 ― 고려파, 총신이라는 그룹이 각자의 영역에서 존재했다. 그러나 1952년에 있던 고려파의 분열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일단 고려파와의 분열은 총회의 인준 문제에 있었다. 고려파는 인준을 받지 않으려 했으니 총회 차원에서는 학생들을 추천해줄 수 없었다. 결국 1952년 대구에서 열린 총회에서 문제가 터진다. 한상동을 지지하는 고려파와 총회파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총회에서는 고려파를 인정하지 않았고, 고려파는 이에 반발하여 독노회를 구성(목사총대 50명, 장로총대 36명)하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한다. 이유는 박형룡 박사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당시 표결에서 40:21이었는데,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설자리가 없었고, 결국 독노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가 떠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박윤선 박사가 떠나온 것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당시 박윤선 박사는 소안련 선교사를 마중하기 위해서(떠나는 상황) 차를 운전하던 중이었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주일에 가게 되어서 선상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려신학교는 이 문제에 있어서 “안식일을 범했다”라고 하며 박윤선 박사를 힐난했고, 결국 박윤선 박사도 고려신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③통합과 합동의 분열(1959) 통합과 합동의 문제는 핵심적인 것만 짚어보자. 1952년 고려파, 1953년 기장의 분열 이후 한국교회는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들렸고, 총회에서는 두 사람을 WCC 회의에 파견하게 되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명신홍 박사였다. 제 2차 WCC대회가 Evanstone이라는 도시에서 열렸고, 이 총회에 대한 보고서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WCC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명신홍 박사는 영어가 대단히 유창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WCC 신학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당시 한국교회에는 WCC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너무 심하게 싸우고 있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WCC에 가입된 교단에서 파송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를 지지하는 측이 우세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한국교회는 보수적이어서 반반이었다. 1959년, 호남지역에 10개 노회가 WCC 탈퇴를 정식으로 헌의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고, 제 44차 총회(대전중앙교회)는 전환점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이 바로 경기노회 총대사건이었다. 당시 경기노회 총대의 수는 28명이었는데, 이중 상당수가 WCC를 반대하는 NAE 지지측이었다. 그러나 WCC 지지측에서는 총대들을 WCC를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하였고, 황금찬 목사의 반대로 임시노회가 열리게 되어 다시 총대수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노회 임시노회의 총대를 받아주어야 하는가, 정기노회의 총대를 받아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투표가 열렸고, 임시노회의 총대권을 지지해야 한다는 투표결과(124:119, 기권 5표)가 나왔다. 그러나 당시 23명의 선교사들이 WCC 지지측(임시노회)으로 몰표를 던진 것이 발견되어 엄청난 소용돌이가 있었고, 총회는 증경총회장단에게 질의하기로 하여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WCC 지지파는 총회임원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연동교회에서 모여 총회를 열게 되었고, NAE 지지측은 예정대로 승동교회에서 모이게 된다. 이렇게 나뉘어진 총대들은 ‘잠시만’ 정체성을 위해 모이면서 각각 “우리는 기어이 통합을 하고야 말리라”, “우리는 합동하기를 원한다”라고 했는데, 이렇게 갈라진 것이 40년이 넘어 50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통합과 합동이 분열되고 나서 선교사들(북장로교, 남장로교 등)과 대학교들은 통합측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던 교단(합동)은 지금 큰 발전을 이루었다. 성경의 무오성 하나만을 붙잡은 교단은 이렇게나 성장했다. ◎2007년 11월 20일 강의 10강. 정체성 파악의 시대(1960~ ) 1960년 이후의 한국교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정체성 파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교회는 60년대까지 세 차례의 대 분열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각 교회는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교사들은 부산에 모여서 논의했고, 한국교회가 충실한 칼뱅주의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때, 한국교회에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 둘을 경험하게 된다. 4․19와 5․16이 그것이다. 한국교회는 세 가지의 흐름을 탄생시켰다. 토착화 운동이 일각에서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우려로 인하여 복음주의 운동이, 또한 일각에서는 근본적․폐쇄적 성향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는 대 지각변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⑴토착화 운동 한국교회 토착화 운동의 중심은 연세대 신과대학, 감리교신학대학, 한국신학대학 등이었다. 이 세 학교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컬러는 달리했다. 연대에 있어서 토착화는 민족이라는 모티브를 갖고 있었고, 감신의 경우에는 문화라는 모티브를, 그리고 한신은 민중이라는 모티브를 갖고 토착화 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 ①토착화운동 탄생 배경 일단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배경은 전통신학에 대한 반증이었다.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온 신학을 배척하면서 우리 것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에는 우리의 것과 서양의 것이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으나, 토착화 라인에 있어서는 선교사들의 신학을 “수입 신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다른 배경은 해방신학이었다.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있던 남미에서 ‘해방신학’이라는 독자적인 신학이 구축된 것은, 한국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면서 4․19와 5․16이 일어났고, 박정희 정권에서는 산업 드라이브를 추진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기술력과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야 했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노동력 착취와 빈부격차 증대라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당시 구로나 동대문 등지에 있던 서민들의 삶을 보면서 교회 안에서는 자연스레 ‘산업선교’라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토착화 운동과 맞물리면서 교회의 할 일에 대한 고민으로 진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의식 있는 자들은 산업선교에 동참하면서 존경을 받게 되었지만, 보수적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를 외면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토착화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좀 더 다른 배경을 살펴볼 필요도 있다. 토착화 신학의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1960~90년대까지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 제 1기 : 유동식 교수의 등장 제일 처음 토착화 신학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유동식 교수였다. 그는 1962년에 토착화 신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 이 필요성을 제기하기 시작했을 때, 이에 대한 긍정적 반응과 함께 부정적 반응 역시 적지 않았다. 유동식 교수의 의견에 대하여 정경연 교수는 ‘복음의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 전달의 토착화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또한 윤성범 교수는 유동식 교수의 의견에 힘을 심어주면서 환웅․환인․환검 삼위일체론을 폈고, 박봉랑(하버드 Ph.D) 교수가 이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장식 교수는 “기독교 2천년의 역사는 토착화의 역사다”라는 주장을 펴며 윤성범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렇게 하면서 소위 토착화 신학은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 2라운드에 돌입했다. ― 제 2기 : 誠의 신학 이 때까지 토착화 신학은 하나의 신학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윤성범이 ‘誠의 신학’을 제기하면서 하나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 신학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나 전통적 사상이 기독교의 사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을 펴면서 발전했다. 그는 한 축에서는 율곡의 사상을, 다른 한 축에서는 충무공의 삶을 연구하며, 율곡과 충무공의 삶을 지탱했던 誠이 기독교의 계시와 다르지 않았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너무나 독창적이고 신선하다. 그러나 이 신학이 무엇인지를 집대성하지 못한 채 윤성범은 세상을 떠나게 된다. ― 제 3기 : 세 가지로 분화된 흐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토착화 신학은 다시 세 가지의 흐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민중신학이다. 소위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이 시기에 등장했는데, 민중신학은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안병무 교수’의 흐름이며 다른 하나는 ‘서남동 교수’이다. 서남동은 한국인이 가진 ‘한’을 모티브로 하였고, 안병무는 ‘예수와 오클로스’라는 책을 통하여 ‘민중’을 그의 신학적 모티브로 잡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과연 영적인 구원만 이야기했는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구원은 영적 구원을 너머 물리적 구원을 포함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다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신학이었고, 이는 산업선교를 하던 그룹과 그 맥이 닿아있다고 하겠다. 또 다른 흐름은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이었다. 이 과정신학은 몇 가지로 꼽아볼 수 있다. 당시 이 흐름에 서 있던 외국의 대표적인 학자는 러셀, 존 콥 등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러한 신학의 소개에 앞장섰던 사람이 바로 시카고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경재 교수였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후 서울신대에 와서 이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외국에서도 해방신학과 과정신학이 중요한 신학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바로 종교다원주의였다. 이 흐름은 감신의 변선환 교수가 주도했다. 그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며, 박아론 교수와 대대적인 논쟁을 벌였다. 이 ‘종교다원주의’의 뚜껑을 열면, 초대교회의 변증가들이 폈던 로고스 사상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한편 당시 감신의 박종천 교수는 당시 ‘상생신학’이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모든 신학을 관통하는 신학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相生신학이라는 것인데, 이 신학이 바로 ‘誠의 신학’의 재판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기독교 사상」에서 토착화 신학을 종합하는 시리즈물을 두 번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여기서는 “우리가 30년간 논쟁한 결과가 바로 서구의 신학자들을 소개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을 냈다. 자성의 목소리이다. 또 다른 목소리는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너무 성경을 떠나 있던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신학이 Context신학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학적 흐름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힘을 잃게 된다. Context가 없어지니 힘을 잃은 것이다. ― 순기능과 역기능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토착화 신학이 어떤 영향력을 끼쳤는지를 잠시 살펴보아야 한다. 토착화 신학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둘 다 존재한다. ①토착화 신학의 긍정적인 부분에 있어서 첫 번째는 Doing Theology, 즉 신학 함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신학이 서구의 신학, 정통 신학이라도 우리의 정서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영지주의를 가르치면서 구원파나 시한부 재림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②또한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하였다. 사실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는 정통신학자들의 관심 밖이었다. 토착화 신학의 등장 이후부터 교회는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③또한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주체성에 대한 고민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민족과 역사에 대한 고민이 바른 것인지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문제도 안고 있었다. ①지나친 상황화였다. 이들이 갖고 있었던 것은 Context의 극대화였고, 따라서 이들은 Text를 너무 떠나버리고 말았다. ②또한 이들은 반동신학으로 흐르고 말았다. 김재준은 박형룡을 비판하면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김재준의 신학을 갖고 신학을 한 책들은 항상 박형룡을 공격하며 신학을 시작했던 것을 볼 수 있다. ③종교혼합주의 현상의 등장이다. 1962년 유동식은 “내가 외치는 신학은 결코 혼합주의 신학이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변선환이 등장하면서 토착화 신학은 종교다원주의로 흐르고 말았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에서 페터 바이어하우스가 외쳤듯이, “종교혼합주의는 반 기독교적”이다. 이러한 흐름들은 결국 한국에서 복음주의의 태동을 낳게 되었다. ⑵복음주의 운동 1960년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태동하게 된다. 여기에도 몇 가지 흐름이 배경으로 작용한다. 먼저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신진 신학자들의 등장이었다. 60년대 이후 진보적인 신학자들뿐 아니라 보수적인 교단 소속 목회자들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한국에서 가지던 신학과 외국의 신학 흐름이 다르다는 것에 눈을 뜨고 1972년에 KETS(Korean Evangelical Theological Seminary; 한국 복음주의신학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 때 앞장섰던 사람은 총신의 김의환 교수, 서울신대의 조종남 학장, 장신의 한철하 교수, 고신의 오병세 교수 등이었다. 이 4인이 중심이 되어 한국 복음주의 신학회가 결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여건이 아직은 성숙하지 않았으며, 10년 후 이 신학회가 재조직하면서 새롭게 부활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신학회는 진보진영에 대한 Counter Part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한국 복음주의 협의회(KETF; Korean Evangelical Theological Fellowship)도 등장하는가 하면 초교파 선교단체들(CCC, IVF 등)도 힘을 합치게 된다. 또 다른 흐름은 출판사들의 등장이었다. 생명의 말씀사는 팀 선교회가 세웠던 군소 출판사였다. 그러나 60년대를 넘어서면서 이 출판사가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해외 복음주의자들의 책을 번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활발한 마케팅을 벌이면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엠마오, 두란노 서원 등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세 번째는 교파를 초월한 복음주의 성격의 교회 설립이다. 이 흐름의 선두에 선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옥한흠 목사), 온누리 교회(하용조 목사), 남서울 교회(현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지구촌 교회(이동원 목사) 등이다. 이들이 포문을 열고 나자 이러한 성격의 교회들이 한국에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좋지만, 이들은 지나칠 정도로 Elitism(엘리트주의)에 빠져 있었다. 어쨌든 이들은 한국교회 복음주의 운동의 모델이 되었다. 이들은 ①교파를 초월하려 하였다. 이들 교회들은 자기 교단 출신의 신학생들만을 교역자로 고용하지 않았다. 또한 이 교회들끼리는 서로 다양한 교류를 하고 있다. ②전통적인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는 양보하지 않았지만, 비본질에 대한 부분은 관용하였다. ③對사회적인 책임의식을 많이 강조하였다. 온누리교회는 문화적인 부분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남서울은혜교회의 경우에는 장애우 사역이나 북한돕기 사역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사랑의교회는 “민족을 책임지는 교회”라는 기치를 걸고 있고, 지구촌 교회는 KOSTA라는 걸출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에 다른 교회들에게까지 확장되어 새로운 시각을 가진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서울광염교회(조현삼 목사), 분당우리교회(이찬수 목사), 열린교회(김남준 목사)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이러한 교회들이 성장하면서 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한국교회의 대명사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되어 많은 교회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⑶결론 향후 한국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한다. “전통적인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에 그 교회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복음의 對사회적이고 민족적인 책임을 다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에 우리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한국교회사 강의노트.hw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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