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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양신혜교수

by 【고동엽】 2021. 10. 28.

칼빈의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

 

양신혜(안양대학교)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Ⅱ. 칼빈의 성경영감 이해에 대한 연구 경향

Ⅲ.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

1. 영감에 대한 개념적 이해

2. ‘영감’과 동의어로 사용된 용어들에 대한 이해

3. 성경형성 과정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3.1 구두전승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3.2 율법의 해석사로서 성경

1)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와 제사장

2) 율법의 해석자로서의 선지자

3) 율법의 해석자로서 예수

4) 선지자들의 보증인으로서 사도

5) 요약

Ⅳ.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

Ⅴ. 결론

 

Ⅰ. 들어가는 말

 

한국 장로교 교회는 한국전쟁 후 불행하게도 민족의 분열과 동시에 교회 내부 분열을 겪었다. 장로교회는 1952년 고신(고신대학)이, 1953년 기장(한신대학)이 분열하여 각각의 독립 교단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 후 1959년 WCC가입 문제로 다시 현재 합동(총신대학)과 통합(장신대학)으로 나뉘었다. 이 분열의 과정에서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교리이다. 이 교리의 논리적 근거가 바로 ‘축자영감설’이다. 이 때문에 ‘축자영감설’의 옹호자인 박형룡은 한국 장로교 분열의 한복판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 해석을 제공하였고, 그와 반대 입장인 김재준은 성경의 역사적 비판 방법을 토대로 한 성경 해석을 지지하였다. 그 이유는 성경의 무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관련된 내용에만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사상영감). 이러한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에 대한 논쟁은 6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를 분열과 혼돈으로 몰아갔다. 그 결과 한국장로교는 20여개 교단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런 분열의 폭풍우는 80년대에 다시 장로교 교단을 흔들었는데, 그 원인 역시 성경영감에 대한 상이한 이해가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중요한 신학적 과제를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다. 바로 장로교단의 신학근원인 칼빈의 성경영감론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며, 곧 그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칼빈은 성경영감을 독립적인 교리 주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제베르크(R. Seeberg)는 칼빈을 “정통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감 이해의 장본인”(축자영감)으로 여겼고, 리츨(O. Ritschl) 역시 축자영감의 이해가 개혁파 교회 진영 내에서 만들어졌으며 칼빈에게서 처음으로 축자영감 이해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부류도 생겨났는데, 박형룡과 김재준의 대립적인 시각이 칼빈의 성경영감에 대한 이해에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염두 해 두어야 할 사실은 ‘축자영감’이란 개념이 칼빈 이후 후대에 형성된 신학 용어라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텍스트 분석을 통한 하나의 논리적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에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는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문법적 접근을 통해 텍스트의 원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에서는 영감이란 개념을 칼빈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라틴어 영감(inspiratio/inspirare)이란 단어의 사용 용례를 분석하여 그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둘째,『기독교 강요』-이하『강요』라고 칭한다 – I.6.2에 기술된 성경의 전승 과정에서 영감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라틴어 원문을 시대별로 상세하게 분석하고자 한다. 셋째,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 이해의 중요한 단초를 제공하는 성경 구절 디모데후서 3장 13-17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분석하여 영감에 대한 그의 이해에 접근하고자 한다.

 

Ⅱ. 칼빈의 성경영감 이해에 대한 연구 경향

 

칼빈의 성경영감 이해에 대한 연구는 세 가지 부류로 구분되는데 ‘축자영감’(Verbalinspiration), ‘사상영감’(Sachinspiration), ‘인격적영감’(Personalinspiration) 으로 나뉜다. 워필드(B. B. Warfield), 머레이(J. Murray), 패커(J. I. Packer) 등은 칼빈의 성경영감을 축자영감으로 이해하고 언급하는데,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한국의 칼빈주의자들도 이들의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 이들은 축자영감설을 성경무오류의 근거로 삼아 인간의 자유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점을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초자연적 능력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토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인간은 단순히 앵무새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말하는 기계(기계적영감; mechanical inspiration)가 아니라, 역사적·사회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 공간을 허락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유기적영감’(organic inspiration)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그들의 신학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새로운 해석의 틀을 지지하는 학자로는 크루쉐(W. Krusche), 게리쉬 (B. A. Gerrish), 뮬러(R. A. Muller), 퍼켓(D. L. Puckett)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칼빈의 영감 이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성경의 문자와 내용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리하여 성령의 통제로서 영감은 성경의 내용과 문자를 포괄한다. 이 정명은 성령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된 내용만을 오류 없이 인도했다는 사상영감-헤페(H. Heppe), 두메르그(E. Doumergue), 맥네일(J. T. McNeill)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다.

 

성경의 내용을 오류 없이 인도한 성령이 성경의 문자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성령의 역할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쿠루쉐는 성령의 영감을 ‘강력한 성령의 통치’로 이해한다. 이는 하나님의 임무를 부여받은 ‘공적수행자’ 또는 ‘증인’으로서 성경 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 어떤 인간적인 사상을 덧붙이지 않고 받은 것을 그대로 전달하는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저자가 ‘그대로 전달한’ 것이 바로 성경의 “원형”(Origialitaet)이고 이것이 “강력한 성령의 통치”로 보존된 것이다. 게리쉬는 성경의 내용과 형태가 성령을 통하여 “정교한 통합”(ingenious synthesis)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성경의 내용과 형태의 정교한 통합이 바로 성경의 초자연적인 본질(a compendium of supernaturally imparted information)을 형성한다. 그는 성경의 초자연적 본질의 근거로 한편으로는 ‘성경의 자증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권위인 ‘성경의 정경성’을 제시하였다.

 

뮬러는 성경의 영감과 성령의 증거를 “성령의 상관관계”에서 이해한다. 이 상관관계는 “인식론적(epistemological) 그리고 그리스도론적 (또는 삼위일체론적), 지성의(noetic) 그리고 존재의(ontic), 주관적(subjective) 그리고 객관적(objective) 요소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적 또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성경은 올바른 하나님 인식으로 인도하는 특별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론적 차원에서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되며, 이 말씀은 성육신하신 본질적인 말씀과 동일하게 된다. 이는 말씀선포에도 적용된다. 그는 존재와 지성의 관계를 선지자 자신과 선지자가 도달한 인식이 본질적으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입장에서 표방한다. 왜냐하면 선지자와 사도들이 도달한 인식은 성령의 힘에 의하여 도달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성령이 외적으로 나타난 성경의 외형적·객관적 형태와 성경을 직접 대면하여 읽을 때 주관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개입의 관계이다. 성령은 우리를 “성경의 다양성에 대한 개인적 이해에서 객관적 진리의 확증으로 인도한다.” 믿음은 성령을 통한 주관적인 확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영감된 성경의 객관적인 진리를 보존하는 의미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논리적 정교함으로 이들은 칼빈의 성경영감을 논증하며, 결론적으로 이들은 칼빈의 영감 이해를 축자영감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성경의 구원 내용과 관련해서는 오류가 없다는 입장, 즉 사상영감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도 축자영감에 대한 새로운 교리적 이해를 시도함을 알 수 있다. 맥킴(D. McKim)에 따르면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증인’으로 성령을 통한 경험의 정당성을 확증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문자적으로 영감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인간의 제한된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최근 독일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는데 칼빈 연구가 노이저(W. Neuser), 쉘롱(D. Schellong), 쉘트(S. Scheld) 등은 칼빈의 성경영감을 ‘인격적영감’ (Personalinspiration)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영감을 성경 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임무를 깨닫고 수행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생각한다.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이와 유사한 ‘유기적영감’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축자영감이 기계적영감으로 오인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도입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성품과 능력, 그가 처한 문화적․사회적 환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靈)은 이러한 제약들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기적영감을 주장하는 학자들과는 달리 노이저는 분명하게 문자와 연결시키는 축자영감설을 부인한다. 더욱이 그는 영감이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관한 내용만 오류 없이 보존했다는 사상영감이 지닌 한계도 또한 직시하고 있다. 노이저는 칼빈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 주석에서 성경, 선지자들의 문서와 선지자들의 교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영감이 성경의 중심 교리로서 성경의 내용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선지자들의 문서에서 ‘중심적인 것’과 ‘그 외의 것’ 또는 복음과 복음서의 전체 사이에 한계를 긋는 데 주저한다. 더 나아가 성경을 ‘하늘의 진리’가 아닌 “칼빈 자신의 교리적 체계”에 종속시킨다. 노이저는 칼빈이『강요』서문에서 성경에서 올바른 교리를 찾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독자의 선이해에 대해서 서술한 것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는데, 노이저는 이를 “해석학적 순환”으로 여기고 있다. 이로써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유기적영감과 노이저를 비롯하여 독일계 신학자들이 표방하는 인격적영감 사이에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성경의 무오류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차이를 드러냄을 알 수 있다.

 

Ⅲ. 『기독교 강요』에 나타난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

 

1. 영감에 대한 개념적 이해

 

칼빈은 ‘영감’(靈感)이란 말의 라틴어 어원인 인스피라치오/인스피라레(inspiratio/inspirare)를『강요』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강요』최종판에서 그는 단지 네 번 사용했을 뿐이다. 그 중 두 번『강요』I권 5장 5절과 I권 16장 1절에서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영감을 창조의 힘과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 칼빈에 따르면 고대 철학자들도 “일반적인 영”(우주정신)이 세상에 생명을 불어 넣으며 그것을 이용해 자연을 움직인다는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도 세상에 내재된 초월적인 힘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능력에 의거하여 철학자들도 “자연이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이러한 빈약한 사색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되어 있는 경건을 불러일으키거나 보존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오히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보살핌을 뜻하나 “일반적인 영”(우주정신)의 영향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을 명확하게 판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본다는 확신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철학자들의 사고는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므로 이들의 하나님 인식은 “영상적인 신격” 을 고안해 내는 것으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칼빈은『강요』I.18.2에서 ‘영감’이라는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하나님의 영이 소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들을 하나님이 정한 목적으로 이끄는 역할로 영감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III.1.3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칼빈은 여기에서 ‘영감’이라는 라틴어 동사(inspirare)를 ‘숨을 불어 넣다’는 동사(afflare)와 함께 사용하여 그 뜻을 더 분명하게 나타낸다: “성령께서는 그 힘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며 거룩한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과 자극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 구절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힘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어떤 것이라는 점과 더불어 인간의 실존적 경험으로 성령의 힘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성령을 “샘물”(요 4;14) 그리고 “하나님의 손”(행 11;21)으로 표현하였고,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끄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인간이 성령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들의 마음은 어두울 뿐만 아니라 사악할 뿐임을 강조하였다.

 

요약하면 성령은 한편으로 창조의 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별한 사역을 행하는 힘이다. 이 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세계에서 간섭한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늘의 보화와 하나님의 힘이 흘러 넘쳐 나오는 원천으로, 이 힘은 외부로부터 인간의 마음에 들어가 그 마음을 휘저어 하나님이 정한 목적에 도달하도록 인도한다.

 

2. ‘영감’과 동의어로 사용된 용어들에 대한 이해

 

칼빈은 영감이라는 단어 대신에 성령의 역할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다른 동사들을 사용하는데 ‘숨을 불어 넣다.’(afflare: I.8.4)와 ‘충동하다. 격려하다.’(instinguere: I.8.8), ‘통치하다. 관리하다.’(gubernare: I.8.8)와 ‘받아쓰다’(dictare: IV.8.5:6), ‘끌고가다. 인도하다’ (ducere: IV.8.14) 등이다. 이러한 단어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주체자이고 동인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반면, 인간들은 단지 하나님의 힘을 받아들이는 수납자임을 나타낸다.『강요』I.8.4에서 ‘숨을 불어 넣다’라는 동사는 수납자로서 야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성령이 성령을 수납한 선포자의 혀와 연결되어 있어서-예를 들어 예레미아의 혀(I.8.8)-구체적으로 성령이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이는 한편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의 말씀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아 수행하는 수동성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가 전수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보증하며 또한 선지자에 대한 신뢰성과 그의 선포의 성취를 보증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I.8.8에서 성령의 역할인 ‘신적 충동’(divinus instinctus)을 명사 ‘증거’(specimen)와 연결한 것이고, 성경 저자인 사도들을 ‘서기’(amanuensis: IV.8.9)로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 칼빈은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라는 동사를『강요』IV.8.5와 IV.8.6에서 세 번 사용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이 단어를 문자대로 받아쓰는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영을 통한 ‘불어넣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강요 IV.8.5에서 칼빈은 성령의 역할을 구두전승의 맥락에서 “하나님이 내적으로 불어넣는 것”(Deo intus dictate)으로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에 그의 계시가 하나님의 영이 직접 불어 넣음으로 후대에 전승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장들이 받았던 것을 후손에게 직접 물려주는 일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적으로 불어넣었기 때문에 자녀들과 그들의 손자들은 그것이 땅에서 오지 않고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다.” 칼빈이 이 단어를 불어판에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증거를 고백”(avoyont tesmoinage de Dieu en leur coers)하는 것으로 번역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딕타레(dictare)라는 단어를 문자와 연결된 ‘받아쓰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8.6에서는 성령의 역할로서 ‘받아쓰다’란 동사인 딕타레를 성경 문서들의 편집행위와 연결하여-dictante Spiritu santo compositae-‘명령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칼빈이 불어판에서 “성령이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작성하다”(le saint Esprit les inspirant et dressant à cela)로 번역한 것과 의미에 있어서 일맥상통하다.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받아쓰기’란 단어가 어떤 문자를 받아쓰는 행위가 아닌, 폭넓은 성령의 역할로서 ‘무엇을 불어넣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로서 하나님이 불어 넣은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전승하고자 할 때도 인간적인 것이 아닌 신적인 것을 전승했다는 것을 확신하게 만들었다.

 

칼빈은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을 뜻하는 인스피라레(inspirare) 또는 인스피라치오(inspiratio)란 단어를 드물게 사용하였고, 이 단어로 성경의 어떤 외적으로 보증된 신적 본질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단어를 인간에게 압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성령의 역할로 이해하였고, 이러한 성령의 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실존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는 것으로 보았다.

 

3. 성경형성 과정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3.1 구두전승에 나타난 영감의 이해

 

칼빈은 성경 문서들의 역사적 전승과정을『강요』I.6.2(1539)의 구두전승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게 계시의 말씀과 환상을 통해서 나타냈든지 마치 후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것처럼 그들의 임무를 통해서든지 선조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드러내었다. 여기에는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선 말씀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수되었고) 그들이 (그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적용할 때마다 이 사실을 믿도록 항상 확고한 믿음을 허락하였다. 말하자면 그(하나님)는 소수에게 표징을 주어 특별히 그의 분명한 현존을 꿰뚫어 알게 하였고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진리의 보물(salvificae doctrinae thesaurum)을 주었다. 그것 자체가 다시 후대인에게 전달되어야만 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계약(foedus aeternae vitae)이 하늘의 계시를 받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가족에게 퍼뜨려나갔을 뿐만 아니라 전 후손들에게 확대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보살폈는지를 보았다. 더욱이 (이것으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구별하였는데 이것이 확실한 차이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은혜(!)로 말씀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칼빈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이 그의 뜻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었는지 서술한다. 그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겪은 하나님 현존의 체험을 통해서 족장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족장들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후손에게 전달한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시작한다. 그는 전승의 연속성을 ‘말씀에 참여’하는 행위, 즉 예전에서 이루어지는 선포에 참여하는 행위와 그 말씀의 원저자가 하나님이라는 믿음에 토대를 둔 내적 확신에서 찾았다. 전승의 본질로서 선포 말씀은 바로 “구원을 주는 진리의 보물”이며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언약”으로, 이것이 전승의 연속성을 갖게 한다. 이 전승의 연속성은 하나님과 그가 선택한 백성과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하며 언약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인식과 더불어 확고한 믿음에 도달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주체자도 하나님이며, 이를 다음 세대에 전수하도록 하는 믿음의 수여자도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전승의 통일성임을 나타낸다. 이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며, 이 믿음을 통해서 진리가 전달하는 것을 확신하는 자에게 성경의 전승은 “독점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건”이 된다.

 

그런데 1559년 최종판에서는 1539년판에서 전승의 연속성의 방편으로 삼은 ‘말씀의 참여’가 뒤로 물러나고 ‘믿음을 통한 내적 확신’과 ‘가르침’이 두드러진다. 이는 칼빈의 관심사가 변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1539년판이 발행되었을 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프랑스 이민교회를 돌보았다. 그 때 그는 예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달리 1559년 최종판에서의 칼빈은 프로테스탄트라는 종교적 정체성에 토대를 둔 교회의 건립에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차이가 연속적인 전승의 방편을 결정하는 데 변화를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전승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족장들의 마음에 새긴 내적 확신을 동일하게 제시하였다: “…그들은(계시의 수납자들) 자기들이 배운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확증하고 보았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인간의 모든 견해를 능가하는 확고한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는 전승된다.

 

그렇다면 족장들은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때 확신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시 사건을 통해서 하나의 표징을 준다. 인간은 이 표징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확실하게 경험하게 되며, 이 경험은 표징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 인간에게 하나의 해석을 요구한다. 이 해석의 잣대를 칼빈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약속(promissio)으로 삼았다. 이 약속의 말씀이 바로 전수의 본질로서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퍼져나가게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현존의 표징을 통해서 확신에 이른 자는 구원의 진리를 수납하고 약속의 본래 의미로서의 진리를 널리 전파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위임한 것은 인간들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역동성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나아가 영원한 진리인 독트리나(doctrina)로서 다음세대로 전수된다. 영원한 독트리나로서의 진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며 널리 퍼지게 되는 힘이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의 힘의 근원지, 진리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진리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내적 확신으로, 믿음 안에서 단지 진리로서 받아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진리는 믿음의 저편에 놓여 있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대화를 요구한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말을 건네는 자이고 주체자로 앞서 가는 자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대답하는 수동적 입장에 서있게 되고, 이 관계에서 인간은 단지 듣는 자이다. 그렇지만 ‘들음’은 인간에 속한 능력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간의 동의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올바르게 들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말씀을 공유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다.

 

3.2 율법의 해석사로서 성경

 

1)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와 제사장

칼빈은 모세를 첫 번째 성경 저자이자 “율법의 해석자”, 율법의 충실한 통역자로 여겼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율법을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교리의 중심 내용들을 십계명에 짧게 요약하셨고 이는 경견하고 올바른 삶의 척도로서 충분하다. 모세가 후에 덧붙인 더 분명한 설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더 분명한 설명 내지는 해석이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모세가 성령을 통해서 이 일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성령이 인도하는 그 능력에 의지하여 다섯 권의 책들을 썼을 뿐만 아니라 … 정확하게 하나님이 그의 면전에서 그에게 구두로 말씀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기록하였다. 모세를 통해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추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모세의 이러한 권위는 후대 제자장들의 권위 해석의 전제로서 그들의 권위에도 적용된다. 이처럼 성령의 인도 아래서 이루어진 그 시대의 정황에 적절하게 적용된 율법의 해석은 후대 제사장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 권위가 유효하다. 그리고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권위는 이러한 방법으로 제사장에게도 적용된다.

 

2) 율법의 해석자로서의 선지자

모세와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칼빈은 선지자 역시 율법의 해석자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선지자들은 “율법의 참된 해석자들”이며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율법의 본래의 목표에서 벗어나 있는 일반 백성들의 눈을 율법의 목표로 다시 향하게 하는” 데 있다. 선지자들이 자신의 시대에 율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행한 해석은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난 백성들을 위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목회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주제와 관련하여 문제는 선지자들이 율법의 해석 이외에 덧붙인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능력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러한 선지자들의 능력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분명하게 그리고 폭넓게” 구원의 교리를 보여주기 위하여 행한 것으로 보았다: “약한 양심들이 더 만족하도록 더 분명하고 더 풍부하게 교훈을 나타내는 것이 주의 마음에 합당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언들을 문자로 기록하여 그의 말씀의 일부로 삼기를 명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언들은 바로 율법의 ‘해명’이며, 그 목적은 바로 당시 삶의 정황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지자들의 임무는 율법과 떨어져 있지 않다. 율법에 이은 예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부록처럼 어떤 새로운 것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백성이 더 율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임무는 칼빈에 의해서 선지자로 간주된 역사서를 편찬한 자들과 시편 기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역시 선지자들의 임무인 역사서들도 성령의 영감 아래서 편찬되었다.” 성령이 이들에게 엄밀한 의미에서 선지자와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칼빈은 모세도 선지자로서 이해하였고 “모든 선지자 중에 최고의 선지자”라고 칭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자는 ‘공무수행자’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들은 어떤 것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그들이 받은 것을 전수하는 ‘하나님의 학생’이다.

 

3) 율법의 해석자로서 예수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율법의 제정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가장 확실한 율법의 해석자”로 이해하였다. 예수도 율법에 순종하였고 그는 율법이 지닌 본래의 뜻을 회복하는 것을 그의 목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율법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조이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그릇된 것들로 인하여 매우 부패해져버린 율법의 참되고 진정한 이해를 다시 회복시키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의 해석의 전권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가 바로 육신이 된 말씀(Logos)이기 때문이며, 이에 근거하여 그의 선지자적 임무를 깨달아 수행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고스를 계시 사건과 예언의 원천으로 삼았다. 로고스는 “하나님 곁에 머물고 그로부터 모든 계시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지혜”이고 모든 계시의 근원으로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아버지의 영원하고 본질적인 말씀”, “본체적인” 말씀이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항상 한 분으로, 동일한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하는 분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전제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이 세상의 창조 시기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모든 계시 사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이 예수의 선지자적 임무의 완성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칼빈은 이사야 61장 1절과 관련하여 이러한 예수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우리는 그가 아버지의 은혜의 선포자 그리고 증인이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선지자적 권위의 근거가 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다른 선지자들과 구분되는 “마지막이고 영원한 증언”이다. 그의 독트리나(doctrina)는 제한된 영역에서 일어난 결정적인 계시 사건으로서 그의 나타남의 범주에서 구원으로 인도하는 완전한 진리(doctrina), “모든 예언을 종식시키는 완전한 진리(doctrina)”이다. 그의 진리는 참된 교리와 거짓된 교리를 구분하는 척도로서 복음을 넘어서 다른 구원의 길에 도달하는 것은 제외되었다: “복음에 만족하지 않고 외부의 어떤 낯선 것을 가져다 복음에 꿰매는 자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자이고 모든 교리의 내용이자 척도이다. “왜냐하면 그 외에 어떤 것을 아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그의 본질을 파악한 자는 하늘을 가득 채운 보화를 갖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영이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근거가 형성되었다. “그리스도가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그 자신이 선생의 임무를 적절하게 완수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위해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힘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힘 안에서 선포의 주체이자 내용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율법의 원래의 의미로 되돌아간 율법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해석은 영원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4) 선지자들의 보증인으로서 사도

칼빈은 사도들도 선지자들과 동등하게 율법의 해석자로 여겼다. 그는 말하길, “사도들은 이전에 선지자들이 사로잡힌 것과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승된 문헌들을 주석해야만 했고 문서가 가르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선지자와 달리 그들에게는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덧붙여졌다. 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원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계시 사건이 선지자들의 문서에서 은밀하게 숨겨진 채 있지만, 사도들의 문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구원의 역사가 더 분명하게 서술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보증인으로서, 그들은 본질상 선지자의 문서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다시 말해 구원에 관한 보증인으로, 그 구원의 역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계시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사도들이 기록으로 남긴 증거들과 관련하여 칼빈은 그들을 ‘그리스도가 부른 공적수행자’로 여겼다. 그들도 선지자들처럼 그들의 임무를 임의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실하고 신뢰할 만하게 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그들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닌 단지 그들에게 명령한 것을 가서 가르치라고 명하므로 그들의 사명에 이를 하나의 규칙으로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우위성은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이 땅에 산 예수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다. 사도들은 예수를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특별한 권위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그들의 체험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의 영이 이끌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어떤 의미에서는(quodammodo) 그가 불러준 것을 받고 오직 주의 지도를 받아 행했다.” 칼빈은 이로써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그는 사도들의 능동적 활동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은 불명확한 화법으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증거는 그리스도의 영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에서 “확실하게 확증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그[예수]는 최상의 하나뿐인 선생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서 그[사도]들을 그의 자리에 앉히지 않았다. 이 자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만 보증된다. 이 자리바꿈은 지금부터 그리스도가 앞으로 더 이상 그가 이 땅에 머물면서 했던 것처럼 직접 자신의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입을 통해서 전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 사도들은 확실한 확증의 근거인 그리스도의 영에 복종함으로써 그의 뜻에 걸맞게 행동해야만 한다. 바로 이 조건 아래서 칼빈은 사도들에게 자유로운 공간을 허락하였다.

 

5) 요약

칼빈은 성경의 통일성을 율법의 해석사(史)로서 해석의 총체로 여겼다. 율법 해석의 전수 과정에서 그 권위는 한편으로 선지자적 권위에서, 다른 한편으로 성령의 영감에 그 근거를 두었다. 선지자적 권위의 측면에서 칼빈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무를 받아 수행하는 자’(minister)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게 하는 사건으로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건네는 주체이며 인간은 이 부름에 겸손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의 뜻에 협력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역할을 통한 믿음으로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모세를 ‘선지자 중 가장 큰 자’라고 표현하였고, 그리스도의 증인인 사도들은 선지자들의 보증인이라고 이해하였다. 성경의 형성 과정은 구원의 진리가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소명’과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능력을 주는 분이다.

 

성경의 형성 과정에서 칼빈은 성경 해석의 필요성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한 것은 변화하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항상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칼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인식 능력이 부족한 인간에게 자신이 스스로 계시하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를 설명하고, 더 나아가 그 해석의 전 과정을 돌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형성과정은 ‘다양한 하나님의 계시의 현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계시 사건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완성되는 해석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믿음 안에서 행해지는 해석이다. 이러한 명료성은 하나님이 항상 성경에 나타난 현존의 역사에서 이미 명확하게 증명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전승되고 확증된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가르칠 의무가 주어지지 않는다.

 

Ⅳ.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

 

칼빈은 그의 성경 주석에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독립된 구절로 다루지 않고 13-17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다룬다. 이 텍스트의 문맥은 저자가 믿음의 형제들에게 거짓 교사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라고 경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해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13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배우고 확신한 일, 즉 진리를 굳건하게 붙잡아야 한다(14절). 이 진리는 가르치는 선생과 성경에 근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15절).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16절에서 성경의 영감을 언급한다. 이로써 칼빈의 관심은 거짓 교리가 선포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교리를 전하는 성경에 유의하라고 경고하는데 그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성경이 거짓 교리를 전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성경이 얼마나 권위가 있고 유익한가를 드러내는 데 그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의 성경의 영감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 16절에서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divinitus inspirata)이라는 서술을 칼빈이 축자영 감설과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는지 추적해 보고자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칼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Omnis scriptura divinitus inspirata est ac utilis)이라고 번역한다. 이 라틴어 번역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칼빈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을 불가타(Omnis scriptura divinitus inspirata et utilis)와 달리 술어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칼빈의 번역은 카이(kai) 앞에 구두점을 찍어 두 문장으로 나눈 에라스무스의 신약 성경판에 근거한 것으로 여겨진다. 칼빈의 번역은 그가 이 구절을 성경의 영감과 그 유익을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역할로서 영감은 성경의 본질과 연결되어 성경의 권위를 보증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어떤 의미에서 이 구절을 설명하고 논증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칼빈의 영감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다음 구절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확실하게 선지자들이 자기 자신의 의견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의 도구였고 단지 그들에게 신성하게 부여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확신한다.

 

이 문장에서 관건은 칼빈이 선지자를 ‘성령의 도구’라고 표현한 것에 대한 이해로, 이를 칼빈이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칼빈의 영감 이해를 축자영감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이 표현을 선지자는 단순히 성령이 명령한 것을 수행하는 도구였다는 점을 강조하여 칼빈의 축자영감설을 논증한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표현에서 칼빈의 축자영감설을 추론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칼빈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사명과 더불어 그가 그 사명을 “충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하게”(confidenter ac intrepide) 수행했다고 부사를 첨부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칼빈이 선지자를 성령의 꼭두가시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사명을 깨달아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선지자를 한 인간으로서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사명을 충실하게 완수할 수 있도록 불렀다. 이때 선지자들에게 하나의 의무가 부여되는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부여한 임무만을 그의 뜻에 따라서 충실하게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지자들은 ‘공적수행자’로서 ‘성령의 도구’인 것이다. 이를 칼빈은 “모세나 선지자들은 그들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쉽게 받아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은 신적인 추진력에 의해서 선포했기 때문에 충실하고 그리고 두려움 없이 바로 주의 입이 전달하고자 한 것이라고 확증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제 문제는 성경의 독자 내지는 청자가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에 형성된 성경이 신적 근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이다. 칼빈은 한편으로 이것을 ‘동일한 성령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한 사건으로 보았다. 즉 선지자가 자신의 임무를 깨달아 수행하도록 인도한 성령과 현재 성경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움직이는 힘도 동일한 성령의 역할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그들의 소명을 확실하게 깨닫도록 인도한 영이 동일하게 오늘날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의 임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에 확증으로 심어주었다.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은 동일한 영의 계시를 통해서 그의 제자들과 선생들에게 동일하게 성경의 원저자임을 입증해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성령으로 언제나 동일하게 머물기 때문에 성경의 선지자들과 성경의 수납자인 독자 사이에 놓여있는 시간적·공간적 간격을 뛰어 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깨닫게 되고 인정하게 된다. 성령이 선지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하나님을 증명하도록 유도했다면 그 성령이 지금도 그들의 증언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포를 인식하도록 이끈다는 결론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영향은 지금 현재도 작용하고 있으며 성경의 독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붙잡힌 상태를 통해서 주관적 확신에 도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표현은 칼빈에게 있어서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영향으로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을 인식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말을 건넴을 받은 자가 된다! 그는 하나님과의 믿음의 관계에 서 있고 이 믿음 안에서 그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된다. 선택받지 못한 자와 달리 하나님에 의해서 말 건넴을 받은 자는 성경이 하나님에서 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경 원저자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다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성경 곳곳에서 스스로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에 비로소 눈을 뜨게 된다. 이 성령의 조명은 모든 자에게 나타나지만 실제로 단지 선택받은 자들만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칼빈의 논증을 통해서 볼 때 그가 축자영감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구절을 증거로 댔다고 하기는 어렵다. 칼빈은 이 구절에서 성경의 신적 본질로서 그 권위를 보증하기 위한 축자영감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단지 그는 성경의 독자가 성령을 통해서 성경의 권위를 인증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힐 뿐이다. 또한 이 구절에서 성경의 무오류를 보존하기 위해서 영감을 성경의 저자에게 주어진 어떤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의 관심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성경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계시할 뿐이다.

 

Ⅴ. 결론

 

성경영감과 관련하여 칼빈의 텍스트를 분석한 결과를 나열하기 전에 칼빈은 성경영감을 독립적인 교리 주제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단지 성경의 권위를 상대화시키는 로마 카톨릭 교회 및 열광주의자, 리버틴파와의 논쟁에서만 이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칼빈은 단지 성경의 영감의 효용을 설명하는 데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이는 성경 형성의 근거가 바로 성령만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단지 인간적인 경향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데 그의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요약하자면, 성경은 성령의 작품이고 그 자체로서 권위를 지니게 되므로, 교회가 이를 인증해야만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영향을 통해서 믿음에 도달한 자들 모두 성경의 증언을 인식하고 이에 동의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전제 아래서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얻는 사실들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의 역할과 연관하여 칼빈은 인스피라치오(inspiratio) 또는 인스피라레(inspirare)라는 단어를 강요에서 드물게 사용하였다. 오히려 다양한 동사들을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면 ‘숨을 불어 넣다’(afflare), ‘충동하다. 격려하다’(instinguere), ‘통치하다. 관리하다’(gubernare), ‘받아쓰다’(dictare) 등을 통해서 성령의 역할을 나타내었다. 또한, 그는 베드로후서 1:21 주석에서 불가타 번역과는 달리 인스피라레대신에 ‘충동하다’(impellere)로 번역하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영감을 의미하는 라틴어 인스피라레가 성경의 신적인 본질을 구성하는 외형적 근거로 삼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며, 오히려 인간을 제압하는 강력한 성령의 역할로 이해한 뒤에, 이것을 하나님과의 실존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받아쓰기란 단어로 성경의 신적 본질을 증거하는 논의도 그 타당성을 잃게 된다.

 

둘째, 칼빈은 성경의 문서들이 전승되어가는 형성사의 관점에서 그 문서의 권위를 한편으로는 선지자의 권위에 두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영감에 두었다. 선지자의 권위는 바로 그가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는 봉사자(minister)이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이들이라는 점에 있다. 선지자들은 성령의 간섭함을 통해서 믿음 안에서 그들이 행해야만 하는 임무를 깨닫고, 이 때 그들은 자신의 임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함 아래서 충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하게 그의 말씀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여기서 선지자적 권위 역시 바로 그가 얼마나 충실하게 그리고 신뢰할만하게 임무를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이 성경의 저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성령의 도구” 또는 “서기관”이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한다.

 

셋째, 선지자와 사도들에게 주어진 임무 부여는 그들을 부른 소명에 대한 확증에 근거한다. 이러한 소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그 속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이자 말을 먼저 건네는 자로 등장하고 인간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에 대답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렇듯 칼빈은 선지자를 증인으로 표현함으로써 성경 전승의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소급됨을 알 수 있다.

 

넷째, 칼빈은 성경 저자의 영감과 성경의 권위를 인식하도록 인도하는 조명을 유비적(analog) 관계로 이해한다. 한편으로 영감은 성경의 문서들이 전승될 때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독자가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을 확신하도록 인도한다. 성경의 형성과정에서 일어나는 성경의 권위의 수납은 성령을 통해서 성경의 수납자가 시·공간을 넘어서 성경 저자의 의도에 동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렇게 수납자들은 성령의 개입을 통해서 성경 안에 봉인된 진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여, 그것에 의지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를 통해서 쿠루쉐가 영감과 조명을 구분하여 성령의 강력한 통제로서의 영감을 강조하였는데, 칼빈에게서 그러한 의도를 찾기는 힘들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다섯째, 칼빈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 해석에서 성경의 본질과 효용을 나누고 있으나 그는 신학적 논쟁에서 성경의 신적 본질을 논제로 삼아 논증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성경의 효용의 측면에서 자유로운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칼빈은 영감을 성경의 권위의 근거로 여겼지만 이를 주석하는 과정에서 형식적 척도로서 성경의 정경성과 그것의 필요성과 연결시켜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에라스무스와 다른 점으로 칼빈은 성령의 개입인 영감을 어떤 객관적 척도로 고정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는 것을 반증하며 더욱이 자유로운 성령의 개입을 강조하고자 하는 데 그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게리쉬가 축자영감설을 논증하기 위한 객관적 척도로서 성경의 정경성을 끌어들이는 논증은 그 힘을 잃게 된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성경의 신적 본질이 자유로운 성령의 작용 아래서 성령의 확증을 통해서 그 신적 본질을 깨달아 고백하도록 인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는 성경의 객관적 권위와 주관적 수용의 간격에서 펼쳐지는 성경해석학적 공간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뮬러가 제시한 것과 같이, 칼빈의 영감 이해는 인식론적 차원과 그 신적 본질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것이 타당성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전히 인격적 영감이해와 유기적 영감설과의 논의를 통한 성경무오의 문제는 또 하나의 연구과제로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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