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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교회교육 이야기: 화란 개혁교회1

by 【고동엽】 2021. 10. 20.

해외 교회교육 이야기: 화란 개혁교회1

들어가는 말

한국 교회는 선교받는 교회에서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한 지가 그리 오래지 않다. 과거 한국 교회는 선교국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는 주 선교국이었던 미국 교회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 교회의 영향은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국 교회와 유럽의 대륙 교회는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교회는 어떤 나라에서든지 적극적인 의미에서 복음을 상황화하고 토착화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와 ‘권사제도’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또 한 예로 ‘주일학교’ 제도를 들 수 있다. 주일학교는 영국 교회를 거쳐 미국 교회에서 꽃핀 좋은 예이다. 우리는 대개 주일학교 제도가 세계 모든 교회에 있다고 당연히 생각하지만, 화란의 개혁교회는 대부분 주일학교가 없다. 주일날 아이들에게는 부모님과 함께 드리는 두 번의 예배가 주일예배의 전부이다. 그러나 비록 주일학교가 없지만, 신실한 화란 개혁교회 교인들은 가정에서 매 끼니 식사 후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을 신앙적으로 교육한다. 더 나아가 교단에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사립학교를 만들어 학교에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이런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은 그 교회가 각각 다른 역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생겨난 독특한 특징들이다. 물론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 글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른 교회의 교회교육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회교육의 장점을 한국 교회에 비판적으로 수용하며, 단점은 교훈이나 경계로 삼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한 면적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화란에 있는 개혁교회의 교육을 살피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먼저 짧게나마 화란 교회의 역사를 살피지 않고서는 화란 교회의 특징을 이해할 수 없기에 화란 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현재 화란 교회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화란 개혁교회의 어제와 오늘 화란 지역은 일찍이 로마시대부터 간헐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화란은 종교개혁 시대 이전 로마 교회 속에서 ‘공동생활형제단’을 통한 경건 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공동생활형제단’은 당시 백성들에게 삶의 모델을 제시했고, 후에 종교개혁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여 한 장소에 모여 살았고 성경을 읽으며 경건한 삶을 실천했다.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이다. 이 운동은 라인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는 화란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강을 거슬러 올라 독일 중부와 남부를 거쳐 스위스까지 영향을 미쳤던 중세 후기의 한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화란은 유럽 북부 대부분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책을 읽고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선다. 1523년 화란 지역에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최초의 두 순교자가 생겨난다. 루터가 이 두 순교자(Hendrik Voes와 Johannes van Essen)를 위해 애도의 시를 쓴 것은 유명하다.

또 다른 한 커다란 영향은 라인강이 시작되는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시작된 칼빈의 개혁운동이다. 당시 수많은 화란 신학생들이 제네바로 가서 신학수업을 하였고, 이들이 화란으로 돌아와 화란 개혁교회 형성의 초석이 된다. 1559년 개교된 제네바 신학교(Genevan Academy)에는 한 때 2,000명의 신학생들로 붐볐다고 한다.

유럽 많은 나라들이 로마교와 국가의 정교 유착의 폭력 아래서 종교개혁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듯이 화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란의 지배자는 당시 스페인의 왕이면서 독일의 황제였던 칼 5세였는데, 루터와 칼빈의 신앙을 좇는 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등 혹독한 박해를 계속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신자들이 화란을 떠나 영국 런던과 독일 북부, 중부, 스위스 등지에 망명하여 교회를 세웠고, 바로 이 교회들이 화란 개혁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망명교회들이 1571년 독일 북부 엠던(Emden)에 모여 최초의 망명 화란 개혁교회 총회를 구성한다. 이 때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 ‘벨기에 신앙고백’과 칼빈이 만들어 준 프랑스 교회법을 토대로 교회의 틀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화란 개혁교회의 진수이다. 이 후 화란 개혁교회 역사는 바로 이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란의 개혁교회는 생성 초기부터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화란이 로마교를 신봉하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화란 왕실은 로마교로부터 빼앗은 교회 건물을 개신교에게 주고 수도원 재산을 개신교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개혁 교회는 1572년부터 안정된 교회의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화란 개혁교회가 박해 없이 평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유럽 다른 나라 개신교도들도 박해가 있을 때면 늘 개신교의 나라 화란으로 피신해 신앙의 자유를 누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큰 폐단도 있었다. 국가의 왕이 교회의 일에 개입할 수 있음으로 인해 교회와 정부가 반대 입장에 서게 될 경우 교회는 영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국가로부터 정치적,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데서 오는 교회의 영적 손실은 중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역사에서 늘 반성되었던 점이다. 화란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국가는 화란 개혁교회의 영적인 신앙까지 보호해 주지는 못했다. 17,18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인문주의가 낳은 아들 계몽조의 사조의 영향으로 인해 교회는 신학적으로 자유화되고 신앙적으로 세속화되었다. 그렇지만 신실한 성도들은 이에 대항해서 칼빈의 개혁 신앙으로 무장하고 말씀으로 용감하고 끈기 있게 싸워왔다. 사탄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결코 넘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교회는 승리하고 있다. 화란 개혁교회는 400년의 역사에서 크게 세 번 정도의 교회 분리(1834년, 1886년 그리고 1944년)를 경험한다. 물론 이 분리는 부정적 의미의 교권쟁탈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파수하려는 진리 운동의 결과였다.

금세기 화란의 교회는 한국의 교회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화란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자유화되고, 신앙적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성경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의 문학 작품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높은 첨탑을 가진 아름다운 교회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이다. 교회에서 동성연애자들이 공식적으로 교인으로 축복될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학교에 동성연애 동아리가 있을 정도이다. 매년 교인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화란의 자유개혁교회

그렇지만 고무적인 것은 비록 수적으로는 적은 무리들이지만 말씀대로 살기 위하여 초기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 믿으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주일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삶의 전 영역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한다. 이들은 앞에서 소개한 초기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이다. 필자는 바로 이런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화란 개혁교회의 모습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면 이러한 화란 교회는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들인가? 물론 교회나 교단과 관계 없이 개인 신앙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경향으로 본다면, 먼저 ‘기독교 개혁교단’이 있다. 이 교단은 유아세례 교인을 합쳐서 9만명 정도 되는데, ‘아뻘도른’이라는 도시에 신학대학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5명의 한국 학생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화란 자유개혁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유아세례 교인을 합쳐 13만명 정도의 교인이 있는데, ‘깜뻔’에 신학교를 두고 있다. 현재 이 학교에는 필자를 포함한 3명의 한국 학생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 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개혁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독특한 그룹이 있는데, 이들은 ‘개혁연맹’이라 불리며 40만 정도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화란개혁교회’라 불리는 조그마한 교단이 있는데, 교인이 4만 정도밖에 되지 않아 신학교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

계속되는 본 글에서 필자는 필자가 속해 있는 신학교 교단인 ‘자유개혁교회’의 모습과 교회교육에 대해 보고 배우고 느낀 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교단은 한국의 고신 교단과 자매 교단이며 국제개혁교회모임(ICRC)의 참석 교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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