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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 귀히 여겨야 할 보물

by 【고동엽】 2021. 10. 20.

장로 귀히 여겨야 할 보물
By C. Van Dam
trans. by Seok-Jun Yun
C. Van Dam 박사는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있는 캐나다 개혁교회 신학 대학의 구약학 교수이다.
본 글은 클라리온 Volume 57, No.22(October 24, 2008)에 실렸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일에 우리는 루터와 칼빈과 같은 그의 종들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다시 한번 풀어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말씀은 다시 그 충만한 데까지 선포되었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복된 소식은 강단에서 다시금 울려퍼졌다. 또 다른 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통해 덜 알려졌던 열매였던 장로직에 대한 회복이 있었다. 우리는 이 직분을 당연히 여기기 쉽지만, 우리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직분은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몇 가지 배경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장로를 가지고 있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것과 장로가 항상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에게는 지도력과 방향성을 제공해 주는 중차대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새 이스라엘이었던(cf. 갈6:16) 기독교회는 단순하게 이 직분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로 최초의 교회들은 회당이라고 불려졌던 것이다(문자적으로는 약2:2에 나타난다). 그리고 장로가 없던 회당은 무엇인가? 이 구약과의 계속성 때문에 누가는 사도행전 11장 30절에서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로들을 기술할 수 있었다. 모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직분에 익숙했고 그것은 전 교회들, 곧 이방인 신자들로부터 기원한 회중들을 포함하는 모든 교회들에 표준이 되었다(예를 들어 행14:23을 보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를 쓸 때, 그는 “교회를 잘 다스리는” 장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 장로들이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라고도 말한다(딤전5:17). 이 본문은 장로에게는 두 직분-다스리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 혹은 우리가 더 익숙한 표현으로는 장로와 목사-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게 해주는 본문이다. 여기에서 두 장로 직분은 그들의 돌봄을 신뢰하는 무리들을 목양하는 역할을 감당함을 말한다. 이 목양은 특별히 말씀이 그들의 집에서의 사적 생활과 공적 예배 모두에서 양들에게 베풀어졌음을 의미한다(cf. 행20:20).
역사의 거대한 굴레 속에서, 장로들이 가정을 방문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베푸는 아름다운 목양의 조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장로직분의 전복과 회복
초기 기독교회는 원래 성도들의 가정 구성원들을 살피는 사도들의 예를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변화되었다 장로들은 사제(priest)들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 있어 거대한 비극이다. 이러한 정체성의 변화로 인해 장로의 사역의 초점은 회중들로부터 성례전에게로 옮겨가게 되었다. 실제로 이 변화는 부분적으로는 성찬의 시행이 사제들의 집행을 필요로 하는 희생적 식사로서 간주되게 되었다는 점 때문에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목양 아래 가정을 방문하던 심방(family visitation) 대신에 사제들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고해성사를 위해 찾아오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교회는 그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돌보는 작업을, 교회 회원들이 신앙고백을 위해 사제들을 방문하도록 하는 방법으로 지속한 것이다.
장로의 중요한 위치가 재인식되고,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다시금 성경의 유형을 따라 교회 안에서 기능하게 된 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 와서나 가능케 된 일이었다. 루터가 고해의 형식을 정화하려 한 것과 그래서 그가 결코 장로의 직분에 완전한 권리를 주지 않은 것은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철저하게 고해성사를 파괴해 버리고, 무리를 목양하는 데 있어 더 나은 위치를 장로의 특권으로 회복하였다. 가르침과 치리에 의해 목양하는 장로들은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의 시대 동안 교회에 돌려주신 위대한 선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유산의 위대한 상속자들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시대의 이 보물을 기억하는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이 직분이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귀히 여겨야 할 보물
장로들이 성실하게 그들의 직무를 행하는 회중은 얼마나 축복받은 자들인가! 장로들은 교회의 선한 본질을 돌보는 자들이며, 복음을 자신들의 직무 안에서 그들의 삶에 적용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멀거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자신들의 돌봄(care)을 받아야 할 자들을 보살피는(minister) 목자들이다. 장로들은 권력을 휘두르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적당한 방법으로 섬김으로써 겸손하게 이 일을 행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섬기셨고 섬김을 받지 않으셨기 때문이다(마20:28). 이러한 방식으로 장로들은 또한 믿음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그들의 직무를 통하여 회중들을 격려한다. 더 나아가 다스리는 장로는 강단을 보호하는 자들이며, 들려지는 설교를 보증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이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더욱 행하게 된다.
이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장로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직분은 그렇게 불리워지는 자들에게는 대단한 특권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어마어마한 책임감이 따르는 것이다. 목자장(Chief Shepherd)께서 시온의 안전을 위한 책임을 지고 있는 휘하의 목자들을 붙들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경고받거나 목양받지 못하는 자들의 영혼들을 위해서도 그리하실 것이다(겔3:17-18;행20:28-31). 또한 장로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은사들을 계발할 필요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증진시킬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그들을 보내신 분은 말씀이시오, 성령께서 또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을 그들의 과중한 직무를 위하여 정비시키시는 것이다. 더 나아가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이 직분자들이 주 안에서 자라게 하신다. 선한 목자께서는 직분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행하는 데에 필요한 확신을 주시는 데에 그의 말씀과 성령을 사용하신다.
이 모든 내용의 요지는 회중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선물로 주어진 자신들의 직분자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교회의 직분자들과 그들의 수고를 가족모임(family devotion) 등에서 기도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할 것이다. 권위에 대해 존경함이 거의 없는 세속문화의 인류평등주의 속에서는 이런 것들이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훈계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2-13).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꺼이 하지 않겠는가? 이 작은 목자(under-shepherd)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주신 선물이 아닌가!
종교개혁일을 기념하는 것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위탁하신 보물들을 기념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그 보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결국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과 함께 의롭게 되는 모든 복음의 이 위대한 선물에게로 회중을 인도하는 그의 방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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