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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만찬과 집사직

by 【고동엽】 2021. 10. 20.

주의만찬과 집사직
Dr. C. Trimp
trans. by Seok-Jun Yun
이 글은 클라리온 VOLUME 49, NO. 3(FEBRUARY 4, 2000)에 실렸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C. Trimp 교수는 캄펀(Kampen)에 있는 신학대학의 봉사신학 명예교수이며, 일전에 주의 만찬에서의 봉사에 관하여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클라리온에서는 그 질문과 대답이 독자들에게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본 글은 교회 직분자들을 위한 정기 간행물 Dienst(1974)에 처음 실렸던 것으로서 J. Mulder 목사에 의해 번역되어 간단히 요약된 것입니다.
질 문
우리의 주의 만찬상에는 항상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부금(donation)을 내놓은 헌금 접시들(collection bowls)이 여럿 존재한다. 원래 이 선물들은 자비의 사역(집사직)을 위해 지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들은 신학대학 건축기금을 위한 것이 되고 있다. 우리 교회 회의(council meeting)에서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이 헌금 접시들을 없애고 예배 중에 보통방식으로서의 헌금으로 바꾸어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참여토록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것이 질문의 내용이다.
이 “문제”는 집사들에게 넘겨졌다. 왜냐하면 그들이 과거에 집사직에서 가졌던 유익들을 포기하기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 헌금접시들은 아마도 역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약 20세기쯤 되는 상징적인 기원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이 전통을 유지하는 것이 여전히 합당한가? 혹은 교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는 편이 더 나은가?
애찬(love meals)과 주의 만찬(Lord's Supper)
우리가 이 전통의 오랜 역사를 추적해 보면, 우리 주님의 식탁에서 이 감사예물(thanksgiving offering)의 풍성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약성경으로부터 우리는 가난한 형제, 자매들을 돌보는 것과 주의 만찬의 시행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밀접하여 두 활동이 같은 식탁에서 동시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오순절 직후에 이 문제가 회중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독자들이 알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2장 42절과 46절로 돌아가, 그것들을 같이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최초의 오순절 회중의 예배에서 그들이 행했던 일의 세부적인 부분이나 정확한 지침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소위 애찬(love meals)이나 사랑의 식사(love feasts)라고 불리는 것이 초창기부터 있어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유다서 12절과 고린도전서 11:17-33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읽을 수 있다. 회중의 더 부유한 성도들은 너무 많은 음식과 음료를 가지고 와서 가난한 형제, 자매들까지 충분히 먹을 수가 있을 정도였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회중들에게 그들의 애찬이 원래의 의미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경고한다. 이 식사의 의도는 사도행전 2:42에서 묘사하고 있는 형제애(fellowship)과 친교(communion)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 그들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으로 변질되도록 내버려두는 위험 가운데 있었다. 사도행전 6:1이 의미하는 바 역시, 이 사랑의 상과 주의 만찬에 관한 문제이다(사도행전 6:1은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에 자꾸 빠지게 되는 것 때문에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것에 관한 본문이다-역자주).
머지 않아 이 관습은 신자들이 온갖 종류의 음식들을 교회 건물로 가지고 오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 우리는 그 1세기의 빵과 포도주, 기름과 치즈, 올리브와 각종 과일들, 게다가 온갖 종류의 새들이 교회로 가져와 졌다는 것을 읽을 때 매우 화려한 장면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집사들은 언제나 이들 음식 기증품들을 수집하고 분배하는 데 있어 활동적인 사람들이었다. 중세 기간 동안 이 화려했던 장면은 이 모든 다양한 기증품들 대신 교회에 돈을 가지고 가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또한 이 다양한 기증품들 중 일부는 주의 만찬을 위한 음식과 음료로 사용되기 위해 가져가 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머지 전부는, 그것은 꽤 되는 양이었는데, 성직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것으로 지정되었다. 이 가난한 형제, 자매들은 주의 만찬상에서 그들을 위해 남겨진 기증품들에 의존하여 살아갔다.
감사(thanksgiving)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용(generosity)
이러한 풍습에는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점이 있다. 기독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리스도의 손으로부터 직접적인 방법으로 받은 것으로 인해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주의 만찬상을 가능케 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또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더 많은 사랑과 형제애(fellowship)를 자극시켜, 더 가난한 형제와 자매들이 그 사랑과 그 식탁으로부터 자신들의 생계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알고 있듯이, 꽤 이른 시기에 이 기증품들은 주의 식탁에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선행들(good works)”과 “희생제사(sacrifice)”의 일부분이 되어 버림으로써(성체성사의 구조 속에서 소위 오페르토리움-봉헌-이라 불리는 것의 시초), 이 모든 것들이 그 배후에 있는 성경적 아이디어를 계속해서 발휘하도록 유지하지는 못하게 되어 버렸다. 역사적으로 이 기증품들이 나중에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지는 “보속의 희생적 선물(sacrificial gifts of atonement)”로 변질되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이것들은 받은바 용서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선물들이었다.
신약교회에서의 이 관습은 또한 완벽하게 구약 언약의 연계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의 연회에 참석하러 갈 때에 하나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께서 애굽 곧 속박의 집으로부터 건지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으며(유월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광야에서 보살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초막절). 그러므로 또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있는 약한 자들을 기억해야만 했다: 과부들, 고아들, 그리고 레위인들(예를 들면 신14:28,29;16:11,14). 유월절 저녁에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기억한 것은 좋은 유대전통이었다. 만약 우리가 마음 속에 이것을 새겨둔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3:29와 같은 본문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요13: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역자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쁨은 회중 안에서 서로를 돌보기 위한 기본적 틀이다(행2:46을 보라). 집사 본연의 직무는 이러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의미심장한 전통
우리가 마음 속에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잘 기억해 둔다면,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아가야만 할 방향은 명확하다. 주의 만찬 상에 헌금접시가 나타난 것은 단지 낡은 전통인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는 또한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를 직접 연결하는 의미심장한 전통이다.
이 헌금접시는 주의 만찬에 가까이 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이 주의 만찬은 또한 그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의 기쁨은 그들의 매일의 필요들에 대한 걱정을 경감시켜 준다. 주의 만찬의 강력한 상징은 이들 감사의 제물들에 의해 풍요로와진 근본적인 방편들 안에서 나타난다.
또한 여기에는 집사들이 상기되는 또 다른 국면이 있다. 집사들의 직무의 뿌리는 주의 식탁에서 가시화된다. 그들의 사역과 회중에 대한 방문은 이 식탁에서 그들의 기초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집사들은 신자들이 그의 구원에 대한 사랑으로 주의 상으로 가져온 것들을 배분한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들이 이 예물들을 집사의 사역을 위해 지명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회중들 내에서 집사가 이 선물들을 다른 어떤 용도로 지정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면 이것은 잘못인 것이다. 이 주의 만찬 접시 풍습을 “보통의” 헌금으로 대치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 일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우리는 매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는 집사의 직무에 대한 정당한 평가 뿐 아니라 주의 만찬의 기념에도 손상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주의 만찬의 상징적 힘에 대해 인식과 이해에 대한 결여가 이미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다시 회중과 집사로서 배워야만 하고, 주의 만찬에서의 물품이 집사직을 위해 제공된 것이라는 점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매 주일의 소위 “보통의” 헌금들이 주의 만찬 예물의 확장이라는 사실도 알아야만 한다.
주의 식탁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의 예물을 가지고 올 수는 없다는 논의는 실제로 아무런 논란이 없고, 이 아름다운 전통을 토론할 이유도 없다. 남자든 여자든, 기부금을 가지고 오는 모든 세례받은 신자들은 이 선물들을 전달할 방법 또한 찾기를 원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있어 올바른 관점을 잃어버린다면, 참으로 주의 만찬상에서의 헌금행위는 교회 내에서 “돈을 모으기 위한” “저속한” 방법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식탁에서 이들 헌금 접시를 빨리 없애버리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헌금 접시를 없애버린다면-역자주), 우리는 집사직의 진가를 인정하는 데에서 뿐 아니라 예전에 대한 존경심 모두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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