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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의 윤리(로마서 15장 1절~6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 그러자 제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에 노자는 대답합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센바람이 불 때에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제자는 되물었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마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다시 노자가 대답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남들의 미움을 받기 쉽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한다." 여러분,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강하기를 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척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 치고 사랑 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흔히 말하기를, 어리석고 어수룩해야 인간미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이 또 그렇습니다. 똑똑한 사람, 잘난 체하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사람은 일생 원수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사는 것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습니다. 불편하기 그지없어요.
약하고 어리석은, 거기에 사랑이 있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양철학을 하는 옛사람들의 높은 지혜입니다.
도대체 강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강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완력으로 강하고, 육체적인 힘이 있고, 돈 있고, 그래야 강자라고 합니다. 대개 이 방향으로 강함을 찾습니다. 또 하나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 남보다 더 많이 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난 체하는 것의 이유입니다. 인물 잘나고, 힘있고, 돈 있고, 권세 있고, 지식 있고, 기술 있고, 경험 많고…… 흔히들 강하다, 똑똑하다는 것이 주로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이 강함의 의미가 얼마나 맹랑한 것인지를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가 진리이니만큼 언젠가는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기 전에 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불편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좀더 여유 있고 좀더 강자로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야 했나 하는 것입니다. 강함의 뜻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지식, 기술, 그리고 고도의 문화생활이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세 가지 회색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지성인 여러분, 말로 할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그림자가 여러분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첫째가 공허감입니다. 텅빈 마음입니다. 채울 수 없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먹어도, 배워도, 노력해도 텅비었습니다. 채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목적의 문제요, 의미의 문제입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수고를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의미를 잃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릴 때마다 목적이 없고, 목적이 없을 때마다 그는 공허감에 빠집니다. 이 텅빈 마음은 메꿀 길이 없습니다.
둘째가 죄책감입니다. 남들에게는 내가 바르다고 합니다. 이제껏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고 합니다. 내가 의롭다고, 정직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뺄 수 없는 것은 정직함입니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압니다. 내 도덕성이 항상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에만 걸려도 벌받은 것 같고, 무엇 하나 삐걱하고 잘못되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신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죄책 없는 고난이란 고통일 수가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의 육체적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가혹한 심판이 내 양심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회색 그림자입니다.
셋째가 공포감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요, 종교적 고민입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어디로 가느냐,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냐, 죽는 것은 분명한데 죽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고민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맥스웰 멜츠라고 하는 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의 95%는 열등감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 있다." 씨 에스 루이스는 "비교의식에서 열등의식이 나온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비교의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에 있지 못하고, 다른 것과 꼭 비교해서 내가 남보다 더 똑똑하고, 남보다 더 낫고, 남보다 더 어떻고…… 이렇게 항상 비교하는 의식 속에는 끝도 없는 공허감과 메꿀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 가장 강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첫째는 자유인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그래서 이제 온전한 영적 자유를 얻은 그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입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비판하는 자가 없어도 스스로 자기 감옥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강한 자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 속죄함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강한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의롭게 살고, 깨끗하게 살고, 또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매여서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내 공로로, 내 의로, 내 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버둥거리는 동안에 또다시 약자가 됩니다.
그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신앙과 교리로 확실하게 자기의 믿는 바를 신학화하고 체계화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오직 하나님의 의로써만 주님 앞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그 교리가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자기 의, 자기 교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사람, 이 사람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과거를 보나 미래를 보나 거칠 것이 없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또한 강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평안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또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성공을 통해서 확인하고 실패를 통해서 확인하고, 건강함을 통해서 확인하고 병들어서도 나를 향하신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간에 너무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갑자기 딱 중단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자니 얼마나 클클하고 얼마나 많은 일이 뒤틀려 보이겠습니까? 그래, 본인이 고민하고 어려워할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힘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오. 쉬어야 될 줄 알지만 쉬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여서 쫓겨가듯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 'all stop'해주셔서 그야말로 오랜만에 성경 읽고, 오랜만에 똑바로 한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라고 간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사람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확증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사랑이 충만하니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원수도, 허탈함도, 죄도, 약함도, 비겁함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너무 크니까요. 이 사랑의 간증 속에서 모든 어려움을 다 물리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이제 사명의식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일을 하되 '이 일을 위하여 죽어도 좋다'--그렇게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지금 죽으면 안돼'--그 사람은 벌벌 떠는 사람입니다. 비겁한 사람입니다. 이 길을 가다가 죽어도 좋다--얼마나 좋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목사님이 안계셔서 그러니 주일날마다 오셔서 설교를 해주십시오"하고 저한테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지요"하고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주일날은 학교공부도 쉬는 날이니까요. 그렇게 한 주일, 두 주일 설교하러 갔는데 그 때마다 그 교회의 집사님이 저를 데리러 오십니다. 한 사십 분 동안 차를 타고 와서 저를 데리고 교회로 가서 예배드리고 또 집까지 바래다주고…… 주일마다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닙디다. 가만히 보니 주일날마다 집사님들이 교대로 그렇게 해요. 얼마 있어 교인분들이 자기들끼리 상의하고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계속 이렇게 다니시면 목사님도 불편하고 저희들도 불편하니까, 차를 한대 사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도 따로이 심부름 안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때만 해도 옛날이니까 차 값이 비교적 싼 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차를 집으로 보내준다기에 간절히 기다렸는데 토요일 저녁에 새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하고는, 그 차를 하도 타고 싶어서 밤중에 도로로 나가 한번 몰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주일날 아침에 미국에서는 생전처음으로 고속도로로 차를 몰아 교회까지 딱 들어섰습니다. 온 교인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어제 사드린 차를 오늘 몰고 왔습니까?" 제가 그 때에 웃으면서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교회로 오는 길이니까 왔지요. 오다 죽어도 상관없으니까요."
여러분, 교회로 가는 일,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사명감이 분명한 일을 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쉽게 말해서 '이거 괜찮을까?'하며 찝찝한 길을 가려 하면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시원치 않아요.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은 안됩니다.
문자 그대로 '이대로 이 일을 하다가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사람만이 강한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위해, 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피를 쏟아부어도 좋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살아가니까 강한 자가 될 수밖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만 조금 다녀본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적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탠턴이라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링컨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가 링컨을 두고 지껄인 독설은 유명합니다. "링컨은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널 고릴라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 스탠필드로 가라. 거기에 가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그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하거든요." 링컨은 다 극복할 수 있었어요.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 당했을 때에 가장 슬피 운 사람이 바로 스탠턴 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라고 말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링컨, 얼마나 강합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링컨은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기에 평생 자기를 비난하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강한 사람은 마지막을 믿는 사람입니다.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happy end를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마지막은 틀림없이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강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의 윤리가 있습니다. 강해야 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해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평안하니까 남을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누구를 사랑합니까? 내가 기쁨으로 충만할 때에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사랑받지 못한 탓이요,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이요, 내가 희생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내가 인내할 수 없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그 신앙이 확실하다면 그까짓 원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은혜에 강하고, 사랑에 강하고, 은혜에 충만할 때에 라야 비로소 약한 자를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평화가 충만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때이고 보면, 언제든지 콤플렉스(complex)가 있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불뚝불뚝 화를 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 유치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저만 위해달라고 떠드는 것입니다. 언제 자랄 것입니까? 몸집이 크다고 어른이던가요? 정신적으로 네 살도 못된 어린아이니까 그 모양입니다. 저만 위해달라고--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서 먼저 내가 강하고, 내가 성숙하고야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강한 자는 약한 자의 벗이에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기 기쁨에 살지 않고 남을 기쁘게 하는, 그 기쁨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기쁘게 할까,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give and take'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쁠 수 있습니다. 남의 기분을 뒤틀리게 하고 내가 기쁠 수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저 사람이 기뻐야 내가 기쁜 것입니다. 저 사람이 틀리면 만사가 다 틀린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내 기쁨이 충만 하고야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먼저 내 행복이 충만 하고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또한 남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이해'라고 말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고양이와 개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웁니다. 어느 인류학자가 '그것은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보세요.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갑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이요, 다른 신호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개가 고양이한테 "I love you."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꼬리가 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양이는 '너는 왜 나만 보면 싸우자고 하느냐'라며 개한테 '앙'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래서 허구헌날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내 신호를 버려야 됩니다. 나로서는 꼬리를 위로 올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쪽의 신호를 택해서 꼬리를 낮추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세요. 언제나 입장을 바꿔놓아야 돼요. 남자는 여자의 입장으로, 여자는 남자의 입장으로 바꿔놓는 것, 이것이 서로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5절)"--이제 성서적 맥락을 따라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따야 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넉넉히 건강한 사람은 이런 병, 저런 병 상관없이 항상 입맛이 좋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건강치 못한 사람은 이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되고, 영 입맛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무 데나 누워도 잠이 잘 와요. 그러나 허약한 사람은 잠자리가 어떻고 하며 쓸데없는 소리만 합니다. 병든 사람은 과민합니다, 투쟁적입니다, 짜증을 냅니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허약해 있는데 누구를 돕는다는 얘기입니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은 강자입니다. 사랑 안에 강합니다.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합니다. 내 행복, 내 기쁨이 충만하고, 모든 사람의 약점을 내가 감당하고 이해하고 소화합니다. 여기에 덕이 있고, 인내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 윤리(로마서 15장 1절~6절)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중국의 철학자인 노자가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연약한 것이 강한 것보다 낫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것이 얌체같이 똑똑한 것보다 낫다." 그러자 제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에 노자는 대답합니다. "강하면 부러진다. 약하면 부러지지 않는다. 센바람이 불 때에 큰 나무는 뿌리째 뽑히지만 연약한 갈대는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제자는 되물었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마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잘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다시 노자가 대답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은 남들의 미움을 받기 쉽다. 어리석은 듯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모두 좋아한다." 여러분,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강하기를 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척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잘났다는 사람 치고 사랑 받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흔히 말하기를, 어리석고 어수룩해야 인간미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이 또 그렇습니다. 똑똑한 사람, 잘난 체하는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이런 사람은 일생 원수입니다. 이런 사람하고 사는 것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습니다. 불편하기 그지없어요.
약하고 어리석은, 거기에 사랑이 있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양철학을 하는 옛사람들의 높은 지혜입니다.
도대체 강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강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선 완력으로 강하고, 육체적인 힘이 있고, 돈 있고, 그래야 강자라고 합니다. 대개 이 방향으로 강함을 찾습니다. 또 하나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 남보다 더 많이 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난 체하는 것의 이유입니다. 인물 잘나고, 힘있고, 돈 있고, 권세 있고, 지식 있고, 기술 있고, 경험 많고…… 흔히들 강하다, 똑똑하다는 것이 주로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이 강함의 의미가 얼마나 맹랑한 것인지를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가 진리이니만큼 언젠가는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죽기 전에 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이렇게 불편하게 살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좀더 여유 있고 좀더 강자로 살 수 있었는데, 왜 이렇게 비겁하게 살아야 했나 하는 것입니다. 강함의 뜻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에게는 지식, 기술, 그리고 고도의 문화생활이 있다. 그러나 타인에게 공개하기 어려운 세 가지 회색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고 있다." 지성인 여러분, 말로 할 수 없는 세 가지 회색 그림자가 여러분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첫째가 공허감입니다. 텅빈 마음입니다. 채울 수 없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먹어도, 배워도, 노력해도 텅비었습니다. 채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목적의 문제요, 의미의 문제입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수고를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치다꺼리를 해야 하는지 의미를 잃었습니다. 의미를 잃어버릴 때마다 목적이 없고, 목적이 없을 때마다 그는 공허감에 빠집니다. 이 텅빈 마음은 메꿀 길이 없습니다.
둘째가 죄책감입니다. 남들에게는 내가 바르다고 합니다. 이제껏 바르게 살았다고 합니다. 남보다 내가 낫다고 합니다. 내가 의롭다고, 정직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뺄 수 없는 것은 정직함입니다. 이것은 도덕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내가 압니다. 내 도덕성이 항상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기에만 걸려도 벌받은 것 같고, 무엇 하나 삐걱하고 잘못되어도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신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죄책 없는 고난이란 고통일 수가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의 육체적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죄책이라고 하는 가혹한 심판이 내 양심을 누르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회색 그림자입니다.
셋째가 공포감입니다. 이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요, 종교적 고민입니다. 도대체 이 생명이 어디로 가느냐,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이냐, 죽는 것은 분명한데 죽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미래에 대한 종말론적 고민이 있습니다. 이 어두운 그림자가 항상 우리를 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맥스웰 멜츠라고 하는 의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인의 95%는 열등감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 있다." 씨 에스 루이스는 "비교의식에서 열등의식이 나온다. 악마가 우리 인간을 파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비교의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에 있지 못하고, 다른 것과 꼭 비교해서 내가 남보다 더 똑똑하고, 남보다 더 낫고, 남보다 더 어떻고…… 이렇게 항상 비교하는 의식 속에는 끝도 없는 공허감과 메꿀 수 없는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바 가장 강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첫째는 자유인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그래서 이제 온전한 영적 자유를 얻은 그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죄책에 눌려 있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입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비판하는 자가 없어도 스스로 자기 감옥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가장 강한 자는 죄로부터 구원받은 사람, 속죄함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강한 사람은 의롭다 함을 얻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의롭게 살고, 깨끗하게 살고, 또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매여서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 외식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내 공로로, 내 의로, 내 선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버둥거리는 동안에 또다시 약자가 됩니다.
그는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에 매여 있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벌벌 떨고 있습니다. 신앙과 교리로 확실하게 자기의 믿는 바를 신학화하고 체계화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오직 하나님의 의로써만 주님 앞에 설 수 있다'고 하는 그 교리가 생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있어야 합니다.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자기 의, 자기 교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사람, 이 사람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과거를 보나 미래를 보나 거칠 것이 없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또한 강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을 확인하고서 평안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또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성공을 통해서 확인하고 실패를 통해서 확인하고, 건강함을 통해서 확인하고 병들어서도 나를 향하신 더 구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간에 너무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모든 것을 갑자기 딱 중단하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자니 얼마나 클클하고 얼마나 많은 일이 뒤틀려 보이겠습니까? 그래, 본인이 고민하고 어려워할 것 같아서 제가 "얼마나 힘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오. 쉬어야 될 줄 알지만 쉬지도 못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여서 쫓겨가듯이 살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 'all stop'해주셔서 그야말로 오랜만에 성경 읽고, 오랜만에 똑바로 한번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라고 간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가장 강한 사람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확증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사랑이 충만하니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원수도, 허탈함도, 죄도, 약함도, 비겁함도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너무 크니까요. 이 사랑의 간증 속에서 모든 어려움을 다 물리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이제 사명의식에 사는 것입니다. 내가 왜 사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일을 하되 '이 일을 위하여 죽어도 좋다'--그렇게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지금 죽으면 안돼'--그 사람은 벌벌 떠는 사람입니다. 비겁한 사람입니다. 이 길을 가다가 죽어도 좋다--얼마나 좋습니까? 미국에서 공부할 때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우리 교회에 목사님이 안계셔서 그러니 주일날마다 오셔서 설교를 해주십시오"하고 저한테 부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지요"하고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차피 주일날은 학교공부도 쉬는 날이니까요. 그렇게 한 주일, 두 주일 설교하러 갔는데 그 때마다 그 교회의 집사님이 저를 데리러 오십니다. 한 사십 분 동안 차를 타고 와서 저를 데리고 교회로 가서 예배드리고 또 집까지 바래다주고…… 주일마다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닙디다. 가만히 보니 주일날마다 집사님들이 교대로 그렇게 해요. 얼마 있어 교인분들이 자기들끼리 상의하고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계속 이렇게 다니시면 목사님도 불편하고 저희들도 불편하니까, 차를 한대 사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도 따로이 심부름 안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 때만 해도 옛날이니까 차 값이 비교적 싼 편이었습니다.
어쨌든 차를 집으로 보내준다기에 간절히 기다렸는데 토요일 저녁에 새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하고는, 그 차를 하도 타고 싶어서 밤중에 도로로 나가 한번 몰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주일날 아침에 미국에서는 생전처음으로 고속도로로 차를 몰아 교회까지 딱 들어섰습니다. 온 교인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아니, 여기가 어디라고 어제 사드린 차를 오늘 몰고 왔습니까?" 제가 그 때에 웃으면서 대답한 말이 있습니다. "교회로 오는 길이니까 왔지요. 오다 죽어도 상관없으니까요."
여러분, 교회로 가는 일, 하나님의 일 하는 것, 사명감이 분명한 일을 하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쉽게 말해서 '이거 괜찮을까?'하며 찝찝한 길을 가려 하면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시원치 않아요.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것은 안됩니다.
문자 그대로 '이대로 이 일을 하다가 여기서 죽어도 좋다'하는 사람만이 강한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내가 너희를 위해, 네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라면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하리라'---피를 쏟아부어도 좋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소중한 말씀입니까? 이렇게 살아가니까 강한 자가 될 수밖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만 조금 다녀본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이 있었겠습니까? 적도 많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탠턴이라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링컨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가 링컨을 두고 지껄인 독설은 유명합니다. "링컨은 교활한 어릿광대, 오리지널 고릴라다. 고릴라를 구경하려면 아프리카로 가지 말고 일리노이주 스탠필드로 가라. 거기에 가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라는 고릴라를 만날 것이다." 그런데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각을 조직할 때, 그 스탠턴을 국방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링컨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당신을 비난하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링컨은 여유 있게 대답합니다. "그 자리는 그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사명감이 분명하거든요." 링컨은 다 극복할 수 있었어요. 넉넉히 이길 수 있었습니다. 훗날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 당했을 때에 가장 슬피 운 사람이 바로 스탠턴 그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 누워 있다"라고 말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링컨, 얼마나 강합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링컨은 철저한 사명의 사람이기에 평생 자기를 비난하던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강한 사람은 마지막을 믿는 사람입니다.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happy end를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마지막은 틀림없이 아름답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나 강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의 윤리가 있습니다. 강해야 약한 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강해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평안하니까 남을 평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누구를 사랑합니까? 내가 기쁨으로 충만할 때에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사랑받지 못한 탓이요,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내가 약하기 때문이요, 내가 희생할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요, 내가 인내할 수 없는 것은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다고 하는 그 신앙이 확실하다면 그까짓 원수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은혜에 강하고, 사랑에 강하고, 은혜에 충만할 때에 라야 비로소 약한 자를 넉넉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평화가 충만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1절)"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때이고 보면, 언제든지 콤플렉스(complex)가 있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불뚝불뚝 화를 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 유치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어린아이라서 저만 위해달라고 떠드는 것입니다. 언제 자랄 것입니까? 몸집이 크다고 어른이던가요? 정신적으로 네 살도 못된 어린아이니까 그 모양입니다. 저만 위해달라고--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안에서 먼저 내가 강하고, 내가 성숙하고야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세요. 강한 자는 약한 자의 벗이에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이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자기 기쁨에 살지 않고 남을 기쁘게 하는, 그 기쁨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기쁘게 할까,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것은 'give and take'입니다. 남을 기쁘게 하고야 내가 기쁠 수 있습니다. 남의 기분을 뒤틀리게 하고 내가 기쁠 수 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미우나 고우나 저 사람이 기뻐야 내가 기쁜 것입니다. 저 사람이 틀리면 만사가 다 틀린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내 기쁨이 충만 하고야 남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먼저 내 행복이 충만 하고야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또한 남을 이해하게 됩니다. 저는 '이해'라고 말하면 늘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책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고양이와 개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웁니다. 어느 인류학자가 '그것은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보세요.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갑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전혀 다른 문화권이요, 다른 신호를 가졌습니다. 그러니 개가 고양이한테 "I love you."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꼬리가 위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양이는 '너는 왜 나만 보면 싸우자고 하느냐'라며 개한테 '앙'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래서 허구헌날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내 신호를 버려야 됩니다. 나로서는 꼬리를 위로 올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쪽의 신호를 택해서 꼬리를 낮추고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세요. 언제나 입장을 바꿔놓아야 돼요. 남자는 여자의 입장으로, 여자는 남자의 입장으로 바꿔놓는 것, 이것이 서로를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5절)"--이제 성서적 맥락을 따라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따야 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지 않습니까? 넉넉히 건강한 사람은 이런 병, 저런 병 상관없이 항상 입맛이 좋습니다.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건강치 못한 사람은 이것은 이래서 안되고 저것은 저래서 안되고, 영 입맛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아무 데나 누워도 잠이 잘 와요. 그러나 허약한 사람은 잠자리가 어떻고 하며 쓸데없는 소리만 합니다. 병든 사람은 과민합니다, 투쟁적입니다, 짜증을 냅니다.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허약해 있는데 누구를 돕는다는 얘기입니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은 강자입니다. 사랑 안에 강합니다.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합니다. 내 행복, 내 기쁨이 충만하고, 모든 사람의 약점을 내가 감당하고 이해하고 소화합니다. 여기에 덕이 있고, 인내가 있고,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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