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1920년대-30년까지 미 장로교의 논쟁의 와중에서 J. Gresham Machen의 역할

by 【고동엽】 2014. 9. 1.

1922년 자유주의 침례교 목사인 Forsdick이 뉴욕시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를 통해 보수주의 신학을 흔들어 놓았다. 포스딕은 자유주의자들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서 역사와 과학 및 종교에 관한 새로운 지식들을 옛 신앙과 화해시키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포스딕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재림을 하나의 견해로 상대화시켰다. 이 설교로 미장로교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필라델피아 장로교회 Macartney목사는 ‘불신앙은 승리 할 것인가?’라는 설교로 대응하였다. 이미 1916년에 메이첸은 포스딕의 설교를 비교리적이라고 정죄한 바 있었다.

이러한 미장로교의 갈등의 주된 원인은 미국 사회의 지적, 사회적 변화떄문이였다. 미국교회는 남북전쟁 직후부터 진화론의 대두, 성경의 고등 비평 채용과 종교 다원주의 도래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었다. 더구나 경건의 산실이었던 대학들에 전문주의가 들어오고 과학적 실증주의와 역사주의가 대두되면서 많은 복음주의적 대학들이 과학적 연구를 위한 세속적 센터들로 변모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포스딕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의 도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적극적인 기소였다. 이 기소를 담당한 검찰관이 프린스톤의 메이첸이었다.

1906년에 메이첸이 프린스톤에 신약 강사로 임명되면서 독일 유학 시절에 그를 혼란에 빠뜨렸던 자유주의 신학을 정리하고, 프리스톤을 옹호하는 Old School 칼빈주의의 변호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메이첸은 프리스톤의 신약학자인 워휠드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기독교는 이성의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지적 변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워필드의 성경무오설에 완전히 동의하고, 또한 기독교가 바른 교리를 개발함으로써 주변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일차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워필드의 견해를 대부분 수용했다.

기독교에 있어서 사상들의 중요성을 주장함에 있어 메이첸은 구학파 장로교 주의를 나타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19세기의 영혼을 구하는 복음주의의 강조로 부터도 분리되고 있었다. 그는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현 세계의 일차적 전쟁터는 학교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상이 문화의 지적 토대이며,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미래 영향은 설교단이 아니라 대학과 신학교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이 20-30년대에 메이첸을 자유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상대들과 격렬한 논쟁으로 이끌어 갔으며, 결국은 그가 프린스톤을 떠나 새 신학교와 새 교단을 창설하게 된다.

메이첸은 포스딕-메카트니의 논쟁시 프린스톤의 신학교수로 있었다. 그는 현대주의 신학의 파괴적 결과를 경고하고, 1921년 ‘자유주의냐 기독교냐?’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포스딕과 같은 자들이 전하는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변형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3년에 출판된 ‘기독교와 자유주의’라는 저서에서 공리주의 교육과 자연주의적, 물질주의적인 사고의 결과로 미국이 영적으로 쇠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은 신앙을 문화에 적응시키려는 목적으로 ‘기독교의 고유한 모든 것’을 희생시켰다고 주장했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제외하고 내재성만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죄성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단지 그리스도를 도덕적 완성의 모범으로 간주했다.

메이첸은 교회 안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의 분리는 시대의 긴급한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배교를 인정하고 떠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신학적 평화주의란 있을 수 없었다. 메이첸은 장로교 논쟁에 특유한 남부 전통의 해결책을 존중했는데 그것은 분리였다. 그는 톤웰처럼 분리를 논란을 해결하는 완전히 합법적 수단으로 보았다. 남 장로교의 전통에 있었던 메이첸에게도 교리의 원리가 화합할 수 없을 때에는 분리는 명예로운 해결책이었다. 그는 1927년 총회의 특별위원회가 프린스톤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도 분리에 대한 긍정적인 말씀을 하셨고, 개신교도 분리주의자라고 말했다. 1922년-36년 사이에 메이천이 그리스도인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분리를 요청했을 때, 그의 오랜 동지요 친구인 메카트니는 북부의 전통에 따라 비 분리로 남아있었다. 메이첸의 입장은 구학파의 남부의 유산을 지니고 프린스톤의 신학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 양자의 공통점은 교리를 강조하고, 고백적인 신앙과 스코티쉬 상식 철학, 성경의 권위와 기독교 문화관이었다. 그러나 북부 장로교에 생소한 메이첸에게는 그가 자라온 남 장로교가 논쟁의 최종적 결과를 결정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