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의 성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코네티컷주 헤이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어렸을 때부터 불운의 연속이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열네 살에는 어머니까지 잃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평생동안 우울증과 결핵을 안고 살았다. 청소년 시절부터 죄와 구원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금식과 기도 훈련을 받았다. 21살 때에 죄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축복을 확신하면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 예일대학교에 입학하여 영적인 성숙에 매진했으나 학교 당국에서 오해하는 바람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아픔과 상처를 안고 대학을 떠난 후 부레이너드는 목회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신학 수업을 받아 설교할 자격을 얻었다. 24살에 선교에 헌신하여 스코틀랜드 선교 협회로부터 인디언선교사로 임명받았다. 그 다음해부터 카우나우믹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한 이후 펜실베니아의 델라웨어 훡스, 뉴저지 크로스윗 숭, 크랜버리 등에서 인디언 영혼들을 위해 젊음을 불태웠다. 25살에는 뉴욕 장로교협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29살까지 생애를 마칠 때까지 복음을 위해서 몸이 으스러지도록 힘써 일했다.
브레이너드가 세상에 머문 기간은 29년 5개월 19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족적들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일생 동안 하나님을 갈망하던 거룩한 열정, 불꽃처럼 타오르던 무릎의 헌신, 밥 먹듯이 반복했던 금식의 사투, 인디언들의 영혼을 사랑하던 뜨거운 마음, 경건한 삶을 위해 싸웠던 치열한 내면의 투쟁, 우울증과 폐결핵의 고통 중에서도 한시도 중단하지 않았던 철저한 기도 생활,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불타는 열심 등.
실로 그는 짧지만 굵게 살았다. 뜨거운 열정을 식힐 겨를도 없이 건강 관리에 소홀한 것이 화근이 되어 너무 빨리 부름을 받게 되어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그가 끼쳐온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그는 선교사(宣敎史)에 큰 획을 그어 주었다. 예를 들면, 18세기 윌리암 케리, 19세기 헨리 마틴, 그리고 20세기 짐 엘리어트 등 각 세기마다 선교의 대가들이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복음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다. 브레이너드의 영향은 선교사(宣敎史)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 세계의 교회에 이어졌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존 밀, 영국의 존 웨슬리와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모리슨과 로버트 멕체인, 독일의 프레드릭 슈바르쯔, 그리고 남아프리카의 앤드류 머레이 등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외에도 브레이너드의 기도 생활은 후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인디언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하려는 거룩한 열정은 일과처럼 습관이 되었던 기도와 금식의 열매였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뜨거운 마음도 무릎의 산물이었다.
그는 하늘을 천장으로 삼고 짚무더기를 덮고 자면서도 기도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각혈 중에도 기도 생활을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침대에 누워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나 항상 기도는 그의 식량이요, 음료였다. 어려서부터 기도 학교에서 절저하게 훈련받아온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기도하면서 임종을 맞이할 정도로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한 터툴리안의 말처럼 브레이너드는 짧게 생애를 마감했지만 그의 기도는 후대 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브레이너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일기가 소개되면서부터였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생애의 마지막 몇 개월을 자기 집에 머물렀던 브레이너드를 보면서 크게 감동하여 일기를 출판하기로 마음 먹었다. 짧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부름받은 브레이너드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브레이너드의 명예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필생의 노력을 다해 추구했던 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 브레이너드 자신도 일기를 출판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출판에 대해서 에드워즈 목사에게 전권을 맡기기로 했다. 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허락한다고 했다. 에드워즈 목사 자신도 브레이너드의 신앙과 삶에 도전을 받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가감없이 있었던 그대로 브레이너드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인디언의 영혼을 사랑하는 불타는 마음, 한순간도 헛된 것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으려는 열심, 죄를 멀리하려는 치열한 내적인 싸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려는 몸부림, 거룩을 추구하는 뜨거운 열정, 기도와 금식으로 생애를 불사른 성자같은 삶,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균형잡힌 인격 등. 참으로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브레이너드가 완전주의를 지향했다거나 완전한 삶과 사역을 이룬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생 동안 죄와 투쟁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다. 심지어 침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 있으면서도 죄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려고 했다.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 때문에 고통하던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신은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할 자격조차 없는 죄인임을 밝혔다.
또한 그가 단번에 경건의 정상에 이른 것도 아니다. 그는 날마다 한걸음씩 하나님의 거ㅉ룩을 추구하면서 경건의 산을 정복해 간 사람이었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서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참된 경건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모델과 같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더욱이 그의 열정적인 기도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섬길 때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을 보여 주는 지침서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일기가 출판되자 미국과 영국에서 널리 읽혀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감리교를 창시했던 웨슬리는 그의 일기를 일고 삶과 사역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는 모든 설교자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18세기 선교의 아버지라 칭하던 윌리암 케리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통해서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19세기 선교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헨리 마틴, 20세기에 순교로 선교의 제물이 된 짐 엘리어트 역시 그의 일기를 읽고 선교사로 헌신했다.
그 외에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에 헌신하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를 만났거나 일기를 접했던 미국 목회자들은 영적으로 각성하여 노스햄톤 부흥 이후에 교회를 일깨우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도 브레이너드의 생애가 알려지면서 목회자들의 영성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생애와 일기를 접한 사람은 대부분 놀라운 영적 생활에 큰 감동을 받는다. 짧은 기간 동안 오직 무릎으로 사역했던 기도 생활도 도전을 받는다. 실로 브레이너드는 경건의 사람이요, 무릎의 성자였다.
송삼용, <믿음의 거장 시리즈5 - 무릎의 성자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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